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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41003 미국이상현목사 교회 집회a자유게시판이사야

20141003 미국이상현목사 교회 집회a

이름 : 한윤범(IP:119.192.174.28)

20141003 미국이상현목사 교회 집회a

(강의:이근호 목사)

아무도 아무나 들여다보지 않는 그 천국 어떤 기준에 의해서 어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누구는 갈 수 있고 못 가는지 예수님이 친히 가르쳐주신 천국에 대한 비유를 통해서 저희들이 깨닫는 시간되게 하옵소서. 시작부터 끝까지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25장에 두 개의 비유부터 먼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한 가지 비유는 흔히 말하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와 지혜로운 다섯 처녀의 비유. 신랑 하나 놓고 열 명의 여자가 결혼한다? 참 신기하죠. 물론 능력 있는 남자 같으면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능력 없는 남자한테는 부담이 되겠죠.

한 명의 신랑과 열 명의 처녀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하시면서 무엇을 언급하느냐 하면, 25장 1절에 보면, “그때에 천국은”이라고 이야기했잖아요. 천국이란 이 세상 아닌 것입니다. 쉽게 합니다. 천국이란 이 세상 아닌 곳.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원리원칙과 삶의 원칙도 역시 통하지 않는 곳이 되는 겁니다. 제가 이걸 미리 언급하는 것은 천국에 간다고 하면서 분명히 천국은 이 세상 아닌 곳인데 이 세상 원리를 고집하면서 “천국에 넣어주세요.” 하는 것에 대한 저는 거절의 의미를 언급하는 겁니다.

그럼 제가 이렇게 하면, 이 세상 살다가 천국에 들어가도 무방하지 않겠느냐는 고집이 있을 수 있어요. “하나님이여, 저는 이 세상에서 이런 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눈감아주시고 그냥 넣어주세요. 가서 잘하겠습니다.” 이럴 수도 있단 말이죠. 저라도 그러고 싶은데 그러질 못해요. 왜냐하면 천국은 이 세상과 그냥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 같으면 그냥 가도 되는데 이 세상이 누굴 박대하고 천대했느냐 하면, 이 땅에서 천국의 주인 되신 예수님이 오셔서 이 세상에서 어떤 식으로 추방당했느냐 하면, 미움 받아서 추방당하셨거든요.

“천국에서 오셨습니까? 잘해봅시다.” 이렇게 헤어진 게 아니고, “뭐지? 뭐야? 왜 낯설지? 우리한테 필요 없어. 당신, 꺼져! 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천국입니다. 원리가 서로 통하면 좋겠는데 이미 이 세상의 원리를 고수하다보니까 섞을 수 없어서 튕겨 나오신 분이 예수님이고 그분이 세우신 나라가 천국이라면 우리가 사는 원리가 그대로 통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베드로전서 2장에서는, 천국은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의 돌이 모퉁이 돌이 되는 겁니다. 하나, 하나 쌓이는 거룩한 성전이 공통점이 있다면 튕겨서 나온 사람들의 집합. 이것은 우리가 “천국은 그렇구나.” 이러면 별 이상 없는데 문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건 좋은데 그 다음에 우리 차례에요. 어떤 차례냐 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딱 맞는 원리와 원칙대로 사는데 우리 몸에 맞아요. 소위 한국에서 요새 유행하는 단어가 ‘소통’이라는 거잖아요. 소통이란 공통점 만남이잖아요. 서로서로 소통하면서 “그래 당신 원리, 내 원리, 인정해.” 이런 식으로 세상을 만든 겁니다.

그런데 천국은 어떻게 된다고요? 우리에 맞는 원리로 들어간다고 했습니까, 못 들어간다고 했습니까? 못 들어가죠. 우리에 맞는 원리로서는. 왜냐? 예수님이 추방당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곱게 나가신 게 아니고 퇴학당하신 거죠. 퇴학당해서 버림받은 돌이 천국이 되었다면 현재 우리 몸에 익숙한 원리는 안 통한다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논리가.

그 다음 논리를 전개해봅시다. 우리가 사는데 적합하고 이만큼 사는데 필요했던 것이, 그 원리가 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우리가 기껏 아는 것이 이 세상에 적합한 원리밖에 모르는데 이게 안 통한다는 이야기거든요. 그쪽에서 안 받아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겠어요? 이 땅에서 아무리 잘 살아도 고생인데 죽어서는 편히 쉬고 싶고, 천국이 구미에 당기는 요건 중에 하나가 그게 영원히 산다는 거예요. 십 년 살고 나오는 게 아니고 한 번 들어가면 이사를 안 해도 돼요.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사실은 저녁에 할 이야기인데 당겨서 해도 괜찮겠지요. 지옥의 문제점이 힘들다는 문제가 아니에요. 지옥이 단순히 힘들다, 불이 뜨겁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한 번 들어가면 두 번 다시 거기서 빠져나올 수 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마지막 웃는 자가 승리자거든요.

아무리 여자 분들이 스포츠를 몰라도 권사님한테 물어볼까요? 축구할 때 전반전만 뛰고 끝나는 겁니까, 후반전이 있습니까? 전반전 하고 15분 쉬고 후반전 있지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서 부자가 축구가 전반전만 있는 줄 알았어요. 전반전에 부자 됐거든요. 그런데 후반전에 어떻게 됐습니까? 후반전에 거지 나사로는 천국 가고 자기는 지옥 갔잖아요. 그러면 세 번째 피리어드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게 문제네. 마지막 후반전 뛰면 더 이상 축구는 없어요. 이제 테스트는 끝나버렸어요. 이 부자는 전반전에서 후반전으로 이어지질 못했습니다. 부자가 전반전 뛴 것은 소통이었습니다. 남들이 원하는 것을 누렸고 그것으로 자기는 늘 웃는 사람 될 줄 알았어요.

그리고 상대적으로 모든 걸 박탈당한 거지는, 제가 미국에서 만난 분들은 박탈된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지 몰라요. 어떤 식으로든 모든 걸 빼앗겼단 말이죠. 부자는 비아냥 거렸습니다. “아이고, 인간아. 나 같으면 너 같이 안 산다. 나 같으면 자살한다. 내가 보기에도 답답하다. 인간아, 왜 그렇게 사니?” 문제는 거지 나사로가 죽을 때가지 몸이 호전된 적이 없다는 겁니다. 마지막 죽을 때 약간 형편 핀 그런 적도 없어요. 심지어 몸도 성하질 않았습니다. 누가 봐도 웃을 수 없는 패배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9회말 역전이 생겼습니다. 마지막 웃는 자가 승리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니까 이것도 포함됩니다. 부자가 궁금해서 묻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서 나는 지옥에 오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 갔습니까? 그 원리가 궁금합니다.” 끝난 마당에 왜 궁금해? 부자가 하는 말이, 제 동생 다섯 명이 아직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전반전이 전부인 줄 알고 까불고 난리 났어요. 아직 안 죽었으니까. 소통이니까. 눈에 보이는 게 전부인 줄 아니까 서로 친하게 지내면 그걸로 행복인 줄 아니까 그 동생들에게 거지 나사로를 다시 살려서 천국의 원리는 따로 있다. 다르더라. 그 다른 원리가 있어야 나 있는 지옥에 오지 않고 거지 나사로처럼 천국에 갈 수 있다.

그걸 보면 역시 맏이는 맏이 같지요. 보세요. 자기가 지옥에서 동생들 걱정하잖아요. 맏이는 타고났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동생을 절대로 그런 마인드가 아니에요. 지만 챙기면 그만인데 가장이니까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원리를 알려줬습니다. 그 원리가 우리가 시작된 거죠. 천국의 비밀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가 죽기 전에 눈치 챌 기회를 주셨다는 겁니다. 축구 끝나기 전에 이 원리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줬다는 겁니다.

기쁜 소식, 나쁜 소식이 있는데 기쁜 소식부터 먼저 말씀드렸습니다. 고맙게도 우리가 이 세상 끝나기 전에 그 말씀을 주셨다는 게 기쁜 소식이에요. 이제 남아있는 게 나쁜 소식이지요. 나쁜 소식은 다 바꿔야 된다는 겁니다. 몽땅 다 바꿔야 된다는 이것이 나쁜 소식은 너무 하고 슬픈 소식 정도. 바라기는 슬픈 소식이 기쁜 소식이기를 바랍니다. 강의 끝나고 난 뒤에.

왜 슬픈 소식이냐 하면 이 세상은 돈 없이 못 삽니다. 어떤 사람은 그냥 편하게 말하기를 사람 낳고 돈 낳지 돈 낳고 사람 낳느냐고 이야기하는데 돈 낳고 사람 낳습니다. 괜히 곱게 위장하지 마세요. 이 세상은 철저하게 돈 낳고 사람 낳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진리 아닌 것 같아서 멀리하지만 실은 어느새 우리 몸도 거기에 푹 젖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돈 보태주는 주님이기를 간절히 간구하면서 우리는 되도 않는 포장용 기도를 해옵니다.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옵소서. 이 한 몸 희생해서 주의 말씀만 증거하고 주의 뜻대로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해봤자 주님께서, “그렇게 해서 결국은 네가 원하는 돈 달라는 이야기지? 솔직히 깨놓고 이야기하자. 빙빙 돌려서 이야기하지 말고 딱 깨놓고 이야기해. 이렇게 하나님 잘 섬기면 진즉에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겠지, 명예회복 시켜주시겠지. 그거지?”

그러니까 우리 몸이 어디에 적합하냐 하면, 이 세상 원리에 적합해요. 이것은 사적으로 우리가 성질이 더럽고 나빠서가 아니에요. 제가 지금 기거하는 곳이 김성진 장로님 댁인데 그 장로님이 차에서 이런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 인간의 성격이 어떻게 바뀝니까? 예수 믿고 난 뒤에 뭔가 변화가 있어야 되는데 어떻게 하면 그 변화가 있습니까?” 제가 이렇게 답변했어요. 교육심리학자들은 말하기를 dna 30%, 환경 70%라고 하는데 저는 환경 100프로라고 이야기했어요.

인간성 더러운 인간이 좋은 환경 되면 100프로 바뀐다는 게 아니고 인간성 좋은 척하는 사람이 진짜 주께서 집어넣은 환경에 들어가게 되면 나는 100프로 죄인인 것을 아는 마음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의 기본원리입니다. 천국 기본원리라고 해놓고 후딱 지나가서 모르겠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천국의 기본원리는 내가 생각하는 천사처럼 사는 게 원리가 아니고 내가 위선적이고 꾸몄던 모든 껍질이 다 벗겨져서 속살이 그대로 노출되게 함으로써, 예수님 하신 말씀에 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정말 주님께서 주신 은혜와 사랑이 많이 알게 되는 그 심령, 그것이 바로 주님의 천국의 조건입니다. 또 해도 모르겠지요. 잘 이해 안 되면 또 합니다. 나도 끝까지 갑니다.

천국은 천사처럼 사는 게 아니고 주여, 주님의 긍휼이 아니고 불쌍히 여기심이 아니면 저는 어떤 식으로도 아무리 이 땅에 와서 고생하고 외지에 와서 고생해도 고생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최선을 다해도 최선을 다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주님께서 저를 이유도 따지지도 않고 불쌍히 여겨서 데려가셔야 천국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장착이 될 때 그것이 바로 천국의 조건입니다.

부자가 왜 못 들어가는지 아시겠지요. 부자와 왜 못 들어갔느냐? 예수님이 없이도 행복한데 예수를 왜 믿을까요? 가진 게 넉넉한데 왜 믿을까요? 그런데 부자는 바보 같아요. 그 조건이 천국에 못 가는 조건인 것을 상상도 못했어요. 왜? 주위에서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았고 설사 그렇게 이야기해도 콧방귀 뀌면서 네가 없으니까 답답해서 그런 소리하겠지. 하면서 시답지 않게 여겨서 거절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말합니다. 부자야. 지금 이 선지자와 말씀대로 오신 분을 믿지 아니하면 너는 네 동생들, 거지 나사로의 존재가 부활할지라도 그곳은 갈 수 없다는 겁니다. 사람은 죽어서 다시 천국 있다는 소식 자체만으로 우리는 천국 못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계시를 받았는데 천국을 봤다. 따라서 천국 계시 본 사람은 갑니다. 그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주제넘게 우리는 천국을 들어갈 자격이 안 된다는 오히려 그것이 천국 가는 우리의 조건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리와 창기가 훌륭한 사람보다 천국에 먼저 간다는 그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아주 친절해요. 천국이란 있습니다. 증거가 뭐냐? 주께서 부활했기 때문에 있습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천국에 가려면 천국에 맞춤, 맞는 마음이 돼야 되는데 현재 우리는 몸 자체가 우리끼리 사는데 적합했어요. 돈이 최고고 돈 없이는 아무리 예수고 하나님이고 못 산다는 것에 우리는 완전히 익숙해진 겁니다. 따라서 그것은 천국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바꿔줘야 돼요.

기쁜 소식은 우리가 아직도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약간에 꺼림칙한 소식은, 바꿔야 한다는 이것이 상당히 우리한테 부담이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바꾸기 위해서 머리 깎고 절에 갔는데 쓸데없는 짓한 거예요. 어떤 사람은 열군데, 스무 군데 개척교회하고 모든 걸 버리고 선교지로 떠났는데 선교지로 떠난다고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세리와 창기가 소위 종교인들보다 먼저 간다는 주님의 그 말씀을 다시 한 번 새겨봅시다.

주님은 우리를 이해하셔요. 어떻게 이해하시느냐 하면, 네가 남보다 못 되서 그런 게 아니고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쪽으로 이해해요. 100프로 환경입니다. 사람이 환경에 들어가게 되면, 사람이 아무리 믿고 싶어도 본성이 환경을 이기기 못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에 너희는 그때에 불순종의 악한 영들 속에서 불순종의 아들들로 살아왔다. 나, 그런 식으로 너희들을 바라보고 있다.

어떤 분야에 있던지 남한테 밀리지 않고 부러움을 사는 자기 자존심의 이름이 영광 받고자 하는 본성은 심지어 어린아이라도 다 있는 거예요. 그걸 누가 이해하신다고요? 주님이 이해하는데 네 자신이 그것을 긍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주여, 그래도 남보다 낫습니다.” 그 자체를 긍정하지 마세요. 주께서 이해하겠다니까 그걸 자랑질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어쩔 수 없다는 건 할 수 없지만 그걸 자랑삼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여기까지는 알았다고 치고 그 다음 문제는 우리 몸을 바꾸시는데 바꾸는 주체가 나냐, 외부인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천국으로 마음을 바꾸는데 내가 스스로 바꿀까요, 다른 분이 와서 내 마음을 바꿔줄까요? 정답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른 분이 와서 바꿉니다. 바꿔주는 다른 분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뭘 믿지 말라? 내가 나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 시도하는 모든 것을 절대로 믿지 마세요. 금식, 기도, 헌금, 전도, 선교, 목회 모든 걸 믿지 마세요. 자기희생, 자기 구제 믿지 마세요. 누가복음 18장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계실 때 바리새인이 기도합니다. “주여, 제가 이레 두 번씩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엎드려있는 저 세리는 나처럼 성화되고 거룩한 생활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 재판소가 멀리 있을 때 순회재판소가 미국에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판사가 가서 마을회관 같은데서 재판을 하지요. 예수님께서 즉석에서 판결을 내립니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자랑질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주여, 저는 감히 얼굴도 못 들고 엎드려있습니다. 주님의 판결이 내려집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기도하고 십일조까지 하는 너는 천국에 오지 못하고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하는 너는 의인으로서 천국 간다고 순회재판을 즉석에서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 판결로 인하여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미움 받는데 그럴 때 우리가 궁금한 것이 누가 승리자고, 누가 패배자였습니까? 잘 했다고 하는 자는 패배자고, 죄인이라고 한 것은 승리자가 되지요. 어떻습니까? 그 이야기 듣고 나니까 갑자기 우리가 구원받는 길이 열린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사람이란 남 따라 하면 되거든요.

교육이 뭐예요? 교육의 시작은 모방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건데 뭐든지 교육한다는 것은, “나처럼 해봐라, 이렇게.”라는 거예요. 그러면 교인들은 누굴 모방할까요? 나보다 앞선다고 생각하는 교회 목사님이죠. 목사는 교육자니까 목사가 사는 대로 살겠다고 모방하게 되면 목사가 천국 간다고 생각하니까 나도 따라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는 죄인입니다.”에 대해서 누가 모방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모방 못해요. 왜냐하면 사람은 각자 느끼는 죄의 강도가 다르기 때문에 아무도 모방 못해요. 달리기를 빨리 달린다. 연습하면 됩니다. 그러나 죄는 연습이 안 되는 이유가, 환경이 나를 죄인으로 만들었지요. 구원받은 사람, 합격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어쩌다보니 죄인이 아니고 죄인 되게 하는 목표로 주께서 나를 이 환경에 집어넣었습니다. 드디어 나는 도달했습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죄인 맞습니다. 이 속성이 천국 가는 원리입니다.

진짜 이건 받아들이기 곤란한 원리에요. 아주 어려운 원리에요. 잘만 하면 착한 사람 될 수 있는데 이게 아니고 드디어 주님께서 나에 대한 작업을 성공하셨습니다. 나는 이유도 없이 무조건 이 땅에서는 주님 보시기에 죄인 맞는다는 죄인 의식이 돈으로 살 수 없어요. 경험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여행 많이 다닌다고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왜? 주위 사람도 날 칭찬하니까.

비유 들어갑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비유가 뭐냐 하면, 열 처녀가 있는데 천국은 이와 같으니, 지금까지 한 것을 응용해봅시다. 예수님께서 먼저 천국을 제시하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이 땅에 살기 적합한 그것은 뭐로 바꿉니까? 천국에 필요한 조치로 바꾸는 거죠. 이 죄인은 뭐냐 하면, 모든 조건은 주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다 준비된 거예요.

어제 제가 이 집에 왔을 때 저녁을 뭐뭐 크랩인데 하여튼 게에요. 목사님이 게 잡은 게 아니고 외부에서 공수해 왔단 말이죠. 천국의 원리는 주님이 친히 준비해온 거예요. 열 처녀 모두 다 똑같이 신랑 올 때 잠을 잤습니다. 이것 놓치면 안 됩니다. 예수님과 혼인한 다섯 처녀와 그렇지 못한 처녀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신랑 만나는 조건을 자기가 준비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정해준 조건 앞에서 자기를 내세운 겁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신랑 만나겠지.” 하는 자기의 세상적 논리를 포기하고 낯선 논리, 신랑이 올 때 준비할 기름을 신랑이 왔다고 생각하고 신랑 오기 전에 신랑의 조건을 먼저 시키는 대로 준비한 거예요. 그러면 그 조건은 자기 머리에서 나왔습니까, 주님 머리에서 나왔습니까? 주님 머리에서 나왔지요. 그렇다면 그 구원받은 여자들은 주님의 조건과 더불어 살고 있는 겁니다.

열 명 다 잠을 잤어요. 주님께서 아홉 명 잠자고 한 명 깨어있으면 신랑은 오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홉 명 잠자고 깨어있는 사람이 한 명이면 조건이 어떻게 달라지느냐 하면, 깨어있는 자는 구원받는다는 조건이 되잖아요. 그건 주님이 제시한 조건이 아니에요. 따라서 주께서 가시고자 해도 다섯 명 잠자고 다섯 명 깨어있을 때 안 갑니다. 여섯 명 잠자고 네 명 깨어있어도 안 갑니다. 나중에 너무 졸려서 아홉 명 잠자고 한 명 깨어있어도 안 갑니다. 드디어 열 명 다 잠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타났습니다. 난리 났지요. 신랑 떴다는 순간에 주유소 가서 기름 사고 분산을 떠는데,

잠자고 있었다는 말은 여자들이 신랑 오는 것을 반겼다는 겁니까, 안 반겼다는 겁니까? 반기질 않았지요. 다만 신랑이 주는 조건만 생각했지 반기질 않았지요. 신랑 오고 난 뒤에 깨웁니다. 깨우니까 그들은 영접했고 뒤늦게 같이 깼는데 조건이 구비되지 않아서 주유소에서 기름 준비할 때 주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문을 닫아버린 거예요.

여러분, 물어봅시다. 하나님은 사랑하십니까? 만약에 사랑하신다면 주께서 문을 닫지 않고 열어두지요. 왜냐? 다섯 명 오는 것보다 열 명 오는 게 천국이 더 빛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지요. 문 닫으려고 하니까 다섯 명이, “신랑이여, 우리 기름 준비 못했습니다. 문 닫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요 앞에 주유소 있으니까.” “그래, 기다리지 뭐. 나는 세상을 사랑하니까.”

어떻게 합니까? 다섯 명이 기름 사러 갈 때 문을 닫아버리지요. 주님은 사람을 사랑합니까, 자기 조건을 사랑합니까? 자기 조건을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소통의 원리 통하는 세상과 천국의 원리와의 차이점이 이겁니다. 주님은 우리 속에 칩처럼 박힌 조건을 사랑하지 우릴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런 원리를 수용하기 참 힘들지요. 우린 좋은 게 좋다고 생각하지요. 좋은 게 좋은 게 아닙니다. 자신의 원리만 사랑합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너의 아이디어로 천국은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고 내가 준비한 것만 용납하는 곳이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조건만 언급하고, 안 믿는다? 싫으면 말고. 그런 배짱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비유, 유명한 달란트 비유. 달란트 비유란 뭐냐 하면, 어떤 공장에 일꾼 세 명이 있습니다. 세 명 다 주인의 종으로 다 소속되었다고 생각했지요. 첫 번째 종도, 주인님. 옳지. 두 번째 종도, 주인님. 옳지. 세 번째 종도, 주인님. 옳지. 너는 우리 편이라고 했습니다.

공개적으로 주님은 타국에 갔습니다. 가고 난 뒤에 다시 왔습니다. 첫 번째 종이 하는 말이, “주인님이 시키는 대로 제가 이렇게 남겼습니다.” 두 번째도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인님이 함께 있으나 우리 눈앞에 떠나있으나 저의 신분은 전혀 달라질 게 없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세 번째 종은 주인이 떠나고 난 뒤에, 달란트 비유에서 중요한 포인트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세 번째 종에게 하는 이야기가 중요한데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네가 그렇게 노동할 자신이 없다면 내 돈을 은행에 맡겨서 이자를 얻을 생각을 왜 못했느냐고 추궁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세 번째 종은 주님 주신 것을 왜 은행에 맡기지 않았을까요? 그는 책망 받았는데 책망 받을 짓을 왜 했을까요? 그 사람은 주님과 함께 있어도 독자적인 생각을 한 거예요. 저 주인은 나를 위한 주인이지 내가 주인의 종으로 있기는 싫다는 겁니다. 내가 우선이고 그 다음에 주인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주인이 안 보이면 내 것이 아니니까 관심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힘없어서 못하던 하여튼 재물도 주인 것이고 자신도 주인 것이라면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전과 똑같이 일할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주인 떠났다고 이제는 자기 본색이 드러난 겁니다. 나 있고 예수 있지 예수님 있고 내가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 세 번째 종의 본색이었습니다.

결국 그런 사람은, 천국은 이와 같으니 해서 천국에 못 가지요. 천국 가서 독자적인 행동하게 되면 그건 천국이 아니고 자기 나라 되지요. 천국에서 땅 빌려서 자기 사업할 일 있습니까? 아니잖아요. 그 사람이 바로 못 들어가지요. 그것은 뭐냐 하면, 철저하게 주님이 먼저 있기에 내가 있다는 그 원리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천국에 못 간다는 이야기가 달란트 비유입니다.

주님이 없을 때 인간은 자기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지금 주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껏 자기 본색을 발휘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든 하나님이든 삼위일체든 나 좋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나 우선이지 예수 우선 아니라는 것, 그 원리가 바로 우리 몸에 딱 맞는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남들이 이해해주는 그런 원리입니다. 하지만 천국의 원리는 그것이 바뀝니다.

두 가지 비유를 말씀드렸지요. 여러분이 궁금한 게 하나 있었을 겁니다. 다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하여튼 이렇게 안 되는 걸 어떻게 되게 하시느냐? 그 조치는 어떤 조치인지 그것이 궁금하겠지요. 예수님이 우선이고 나는 나중이라고 태어나면서 자동적으로 그렇게 됩니까? 그건 아니거든요. 누구나 아무리 좋은 것도 내가 제일 좋아요. 우리는 우리가 지옥 갈 때도 격려할 사람은 우리밖에 없어요. “걱정하지 마. 지옥 가도 살만 해.” 어깨 두드리면서 할 사람은 우리밖에 없어요. 그런 원리가 어떻게 주님 먼저고 나는 나중이라는 그런 원리로 어떻게 바뀔 수 있습니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상당히 궁금하지요.

마태복음 13장 시작됩니다. 그걸 생각하시고 바꿀 의사도 없고 바꾸지도 못할 우리가 어떻게 그게 바꿔져서 천국에 골인되는지 마태복음 13장에 그 원리가 들어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3절부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덜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여러분 같이 보았습니까? 그 끝에 있는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말은 안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수상한 음산한 기운이 들지 않습니까. 그 말은 빼도 무방한 느낌 들지 않아요? 지금 제 취지가 전달이 되지 않는 것 같은데. 저기 기타가 있지요. 여러분, 천국은 기타의 현을 치면 소리가 나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제가 이렇게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면, 기타 치면 소리가 난다는 것까지만 이야기하고 그 뒤에 있는 말,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것은 쓸데없이 갖다 붙인 말처럼 들리지요. 이건 귀고 뭐고 간에 누가 봐도 그렇잖아요. “주님께서 귀 있고 없고 간에 전부 다 누구나 납득이 되도록 그 말씀을 주셨구나.”라고 생각하지요. 기타 현 치면 소리 난다. 이건 얘들도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씨를 뿌렸는데 새가 먹어버린 그런 씨도 있고 흙이 얕은 곳에 던져진 그런 씨도 있고 그 다음에 가시덤불에 던져진 씨도 있고 돌밭에 떨어진 씨도 있지만 그 다음에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다. 이게 그렇게 어려운 거예요? 이게 구태여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요건이 꼭 필요한 말씀처럼 들리십니까? 아니잖아요. 그렇지. 어쩌라고? 다 이야기네. 그게 다 아는 이야기십니까?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이 들어간 취지를 모르면 완전히 오해한 거예요.

그렇다면 이 씨 뿌리는 비유를 설명하면서 잘못된 해석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틀린 답을 먼저 말씀드리면서 그 다음에 제가 진짜 해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잘못된 해석을 이렇습니다. 밭은 사람의 마음이다. 씨는 주님의 말씀이다. 씨가 떨어졌는데 어떤 사람은 마치 길가에 떨어진 씨를 새가 먹는 것처럼 말씀이 떨어졌을 때 졸거나 할 경우는 마귀가 와서 씨를 먹어버려서 씨 자체를 먹어버리니까 열매를 못 맺었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들을 때 졸지 마세요. 말씀 들을 때 마귀가 와서 먹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여러분은 옥토가 돼야 됩니다. 아멘하면 곤란한데.

두 번째 해석, 여러분들이 교회 와서 누가 우선이다? 내가 우선이고 예수님이 나중이거든요. 우리는 돈 낳고 사람 낳잖아요. 돈 있어야 사니까 “주님이여, 다 털어먹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원상복귀 시켜주옵소서. 주님은 전능하시잖아요. 그 전능한 힘 어디에 쓰려고 그냥 두십니까? 주께서 전능한 능력을 주셔서 모든 자존심을 회복해주소서.” 그런 마음으로 그런 기대로 교회에 온 거예요. 오고 난 뒤에 말씀 들으니까 기도하면 이 땅에서 복 받고 나중에 믿으면 천국 가고. 좋더라 이 말이죠. 그러다 갑자기 취직을 했는데 주일에 쉬지 않는 곳에 취직해서 또는 사장이 불교신자라서 “교회 가려면 회사에 나오지 마.” 이랬고,

또 어떤 사람은 시어머니가 아주 불도가 심해서 어디 가는데? 교회 갑니다. 어디 며느리가 허락도 없이. 머리카락 휘어잡고 교회도 못 가고 환란이 심하고 또 남편이 교회 간다고 때리고 해서 “아이고, 하나님이여, 저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할 도리 다했습니다.” 하고 환란이 교회에서 집사 시키고 해서 좋았는데 갑자기 주위에서 경제적인 여러 가지 환란이 있으니까 주님이여, 더 이상 저는 견딜 수 없습니다. 나중에 늙어서 죽을 때쯤 주님 믿겠다고 하면서 환란에 넘어질 때 “여러분, 그러지 마시고 그러면 열매 못 맺으니까 이겨내셔야 30배, 60배 열매 맺습니다.” 이런 해석 잘못된 해석입니다. 밭 관리 잘하셔서 열매 맺을만한 마음으로 바꿔달라고 간곡히 기도하라는 식으로 이 비유를 해석하는 건 잘못됐습니다.

세 번째, 어떤 사람은 교회 와서 부러움을 받을 정도로 복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너무 많이 받았어요. 처음에는 어려울 때 주일 꼬박꼬박 지키고 심지어 새벽기도 나오고 하다가 좀 배부르니까 그 다음부터 노래방에 가고 나이트 가고 흥청망청 쓰니까 목사 입장에서는 교회도 안 나오고 교회 안 나오니까 헌금도 동시에 안 나오고. “집사님 왜 안 나옵니까?” “바빠서. 놀면서 사업 되는 줄 아세요.” 이렇게 된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 말씀에 그러면 천국에 못 갑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그런 유혹이 왔을 때 뿌리치고 많은 열매를 맺어야 됩니다.”

네 번째, “만약에 여러분 진짜 마음 관리 잘하면 드디어 효과 보는데 30배, 60배, 100배, 가면 갈수록 복을 받는데 이 복을 여러분 원하지 않습니까? 그런 복 받고 싶지요. 그러면 정신 차리고 교회 와서 마음 관리하고 성화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이 해석,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럴 것 같으면 구태여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할 필요 없어요.

인간은 나면서부터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하면 복 받고 나쁜 짓하면 하나님이 기어이 벌준다는 것이 짜여있기 때문에 열심히 애쓰는 사람에게 복이 오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벌이 온다는 그 뻔 한 이야기를 다 알고 있는데 심지어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와 있잖아요. 베짱이는 굶어죽고 개미는 잘 산다는 다 아는 이야기를, 내 몸은 내가 관리하고 도 닦듯이 닦아야 된다. 마음을 거울 같이 닦아야 제대로 보인다. 이건 불교에서다 하는 이야기거든요. 그렇다면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할 필요 없잖아요. 주께서는 바로 그 해석 자체가 예수님을 결국은 이 땅에서 추방시킬 수밖에 없는 동기가 된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천국은 이 땅에 왔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발로 차버렸단 말이죠. 왜 찼을까? 안 맞으니까 찬 거예요. 기존에 들어있는 세상관으로는 천국은 설명이 안 되니까 주님은 탈락된 겁니다. 추방된 겁니다. 이게 십자가거든요. 그렇다면 진짜 비유의 원리가 뭐냐? 이것이 아니라면 정녕 그것이 아니라면 그럼 진짜 그 뜻이 뭐냐? 궁금해요? 그것은 바로 여기에 나옵니다. 누가 마태복음 13장 11절 읽어보세요. 그게 해답입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됐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이라고 하면서 앞장세운 것이, 씨 뿌리는 비유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쉽다, 누구나 안다고 하지요. 누구나 알고 누구나 이해가 된다면 구태여 무슨 단어가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까? ‘허락’이죠. 허락이 뭐예요? 아무리 가고 싶어도 여기서 패스 오케이라는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못 들어가지요.

“씨 뿌리는 비유, 감동받았습니다. 저 이해했습니다. 어때요? 허락해주세요.” 허락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할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허락해야 들어간다면 구태여 씨 뿌리는 비유를 앞장세울 이유가 없잖아요. “너, 들어와. 너, 들어오지 마.” 한다면 다이렉트로 “목사님, 들어오세요. 들어오지 마세요.” 이렇게 할 것 같으면 씨 뿌리는 비유 같은 마치 미끼 같은 것이 필요치 않다 이 말이죠.

결국 씨 뿌리는 비유는 뭐냐 하면, 이해한다, 천국 알았다. 이건 내가 알기에 허락 없이도 들어갈 수 있다는 자를 거절하기 위함입니다. 네가 안다는 것, 그것은 내가 곧 거절하는 것이다. 그러면 허락이란 말을 수용할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아무리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유일한 남은 희망은 뭐예요? 허락하면 되겠지요.

다른 분이 15절 읽어보세요.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내가 고쳐주지 않았는데 고침 받았다고 우기는 인간들에게 그들이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내가 했는데 첫 번째 이야기가 씨 뿌리는 비유였다는 겁니다. 알아들었나? 그러면 끝났어. “주여, 무슨 이야기인지 못 알아듣겠습니다.” 그러면 허락만 있으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려라. 남은 것은 주님의 허락만 떨어지게 되면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으면서 천국 가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첫 번째 강의 전체를 단순하게 축약하면 이렇습니다. 아무도 갈 수 없는 그곳을 주의 허락이 떨어지면 어떤 상황도 전혀 거침없이 그곳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 제안을 하신 주님을 믿읍시다. 못 믿겠다고? 그건 아직도 자기에게 어떤 가능성을 스스로 지키겠다고 버티는 식입니다. 그런 자에게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못 알아듣는 말씀으로 규정됩니다. 알아듣지 못해도 갈 수 있는 나라, 오직 주님의 허락만 있으면 되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 말은 애초부터 천국을 상상하지 말라는 거예요. 마치 천국이 내 나라인 것처럼 그렇게 전제로 깔지 말라는 겁니다. 갈 수 없는 나라고 안 가도 되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런데 가게 해주셨지요. 오직 조건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해주셨다는 겁니다. 그럼 어떤 식으로 허락해주셨는가? 씨 뿌리는 비유를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고 자기가 한 말, 약속을 누가 지키는가? 주님이 지켜서 소급해서 내가 전에 너한테 준 씨 뿌리는 비유 있지, 그것 홀라당 내가 다 지켰어. 내가 다 지킨 자격에서 이미 넌 지켰기 때문에 못 지킨 너도 지킨 내가 허락하면 나와 동반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10분 쉬고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첨부파일 : 20141003 미국이상현목사집회a.hwp (52.5K), Down: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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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8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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