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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 의존교회141017a,b (말씀경쟁)―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디모데전서

서울 의존교회141017a,b (말씀경쟁)―이 근호 목사

이름 : 김창길(IP:180.150.194.146)

서울 의존교회141017a (말씀경쟁)―이 근호 목사

디모데전서 4장 12절부터 보겠습니다.

딤전 4: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딤전 4: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딤전 4:15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딤전 4:16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우리가 보통 사람들에게 잔소리를 할 때는 그 사람이 더 잘되라고 잔소리를 하잖아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이미 이러한 잔소리, 또는 이러한 말씀을 이것을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이것을 안 한다고 해서 구원 안 되는 것도 아니거든요.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바르게 사세요. 라고 할 때에 그 듣는 사람이 하는 말이 바르게 살면 구원 해 줍니까? 이렇게 나올수가 있거든요. 당신, 바르게 살아요! 이렇게 하면 듣는 사람이 그러면 바르게 살면 구원해 줄 겁니까? 라고 한다면 하나님 쪽에서 너 구원 문제는 네가 바르게 사는 것하고 상관없어, 그렇게 이야기할 경우에 구원해 주지도 못할 것을 뭐하러 바르게 살라고 잔소리를 하십니까? 살 때 어떻게 답변해야 됩니까?

구원이라는 것이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 어떻게 됩니까? 예수 십자가 피를 믿음으로 용서받는 것 맞잖아요. 그렇다면 뒤늦게 잔소리를 한다는 게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잔소리를 한다는 말은 그대로 지키라는 말인데 지켜서 구원 안 될 것 같은데 구원안되는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왜 하죠? 그러면 그것 지키면 구원해 줍니까? 어허 그건 아니야! 그렇다면 지키라는 이야기를 왜 합니까? 이렇게 이렇게 살으라는 이야기를 왜 하죠? 그 이유가 모호한 겁니다.

또 한 가지 생각은, 구원이 안 될 것 같으면 이러한 언급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구원이 안 될 사람에게 네가 이것을 지켜라! 지키면 구원해 줍니까? 너는 애초부터 구원될 사람이 아니야, 그렇다면 구원이 안 될 사람에게 그것을 지키라는 말도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의 말은 구원될 사람에게도 무엇을 하라 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면 왜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너는 가르침의 말과 행실과 사람과 믿음의 정절에 대해서 믿는 자의 본이 되고 하는 이러한 추가적인 이런 언급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상당히 중요하지 않은 문제처럼 느껴지지만 막상 제가 그렇게 운을 떼니까 해결이 쉽게 되지 않을 것 같은 문제가 등장하죠. 저 구원받았으니까 목사님, 저 보고 잔소리 하지 마세요! 라고 할 때 목사님은 뭐라 해야 됩니까? 여러분, 교회에 일찍 오세요! 일찍 오라는 잔소리 하지 마세요! 저 예수의 피로 구원받았어요. 이렇게 댓구할 때 목사님은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되느냐 말입니까? 아이고 구원받은 것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해야 됩니까? 구원받았으니까 안와도 괜찮아요!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또는 구원받아도 교회에 늦게 오면 지옥 갑니다. 그렇게 이야기해야 됩니까?

막상 그런 댓구에 대해서 할 말이 변변치 않죠. 성경에서 예수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만 해야 되는데 왜 늦게 성도의 본이 어떻게 연수함을 어기지 못하게 하고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에 대해서 정절을 지키고 뭐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구태여 추가해서 해야 되는 이유, 궁금하죠?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보고 이야기한 게 아니에요. 우리 속에 있는 주님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주님이 주님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상당히 어떻게 보면 중요한 문제에 포함이 될 수가 있는 문제입니다.

성도는 성령이 와 있어야 성도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열심 낸다고 말씀대로 지켰다고 해서 성도 아닙니다. 성령이 임해야 됩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때부터 누가 우리를 대표해서 주님과 관계를 하느냐 하면 우리가 아니고 우리 속에 있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영을 주신 예수님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삼위일체 사이의 그러한 교류에 의해서 상호소통이라 하는데 성부 성자 성령의 상호 교류에 의해서 우리는 주님의 구원 목적을 주님이 알아서 처리 해 나가시는 겁니다.

그러면 그러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됩니까?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손을 떼어야 되는 겁니다. 관여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내 일에 내가 관여 안하기입니다. 이게 어떻게 들으면 굉장히 편하게 느껴지는데 그런데 사실은 내 일에 내가 관여를 하지 않으면 누가 가장 불편해 하느냐 하면 막상 우리 자신이 가장 불편해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아침 일찍이 여행을 가야 되는데 아침 일찍이 일어나려면 누가 깨워줘야 되잖아요. 깨워줄 때 우리가 잠을 안자고 있는 이상은 성냥개비로 눈을 뜨게 해서 눈을 안 감는다든지 이런 경우는 내가 알아서 깨는데 내가 일단 잠을 자게 되면 잠잔 상태에서 내가 스스로 잠을 깨서 일어나는 법은 없어요. 태양이 깨운다든지 아니면 짹짹거리는 새소리가 깨운다든지 아니면 방에 있는 다른 식구의 발소리에 의해서 내가 깬다든지 이렇게 되지 스스로 알아서 깨어나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외부의 자극이 있어야 돼요. 예를 들어 외부의 자극이 뭐냐 하면 해가 솟아오르는 거죠.

평소에 우리의 몸이 익숙해지니까 그래서 우리가 구름낀날, 비 오는 날은 늦잠 자잖아요. 해가 안뜨니까 잠을 잔다는 것은 이미 우리는 나에게 손을 뗀 상태입니다. 뗀 상태에서 대자연의 흐름에 우리 자신을 맡긴 샘이 되는데 그게 확실히 생활의 리듬이 아침 되면 깨어나는 몸이 되기 때문에 알아서 깨어나게 되는 거죠. 일단 잠을 자게 되면 외부에서 깨어줘야 되는 겁니다. 본의 아니게 우리는 우리 자신에서 손을 뗀 샘이 됐는데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실천과 완성은 창세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어느 대목도 우리가 이 말씀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얻게 되어 있어요.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잔소리 하는 것은 자식이 그 잔소리를 들어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죠. 예를 들어서 그냥 학교 갔다 와서 그냥 방에 들어보니까 엄마가 야, 손씻고 발씻고 방에 들어와! 라고 했을 때 그 아이가 손씻고 발 씻고 방에 들어오게 되면 그래, 그렇게 해야지 하고 부모가 일단 자기 뜻에 일치한다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선언을 해 버리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발 씻고 손 씻고 들어와 하면 우리는 우리가 아는 차원에서 발씻고 손씻고 들어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지킨 것으로 간주합니까? 간주 안 해 줍니까?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자리가 생각한 기준대로 지키지 주님의 기준에 합당하도록 지킬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는 없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그래요.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홍해를 가를 때도 그것은 모세가 지팡이를 들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께서 하나님의 신이 모세에게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이 드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발걸음도 세시고 머리카락도 세신다고 되어 있죠. 지금 우리가 신앙이라는 게 뭐냐 하면 우리가 성경 말씀대로 잘에 따라서 잘 따른 몸을 하나님께서 제공해서 합격통지서 받아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신앙은 처음부터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 돌아가거든요. 모든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 책임 하에 있느냐 하면 누구 관리 하에 있느냐 하면 주님 관리 하에 있어요. 그래서 성령을 주신 거예요.

사람들이 성경에서 로마서 나올 때 나는 성령 받았다! 주께서 은혜로 한다. 이렇게 하다가 디모데전서에 이런 대목이 나와 버리면 갑자기 자기가 이 말씀을 지킨다고 나서고 거들목거리고 그래요. 그것은 앞뒤가 안 맞는 겁니다. 처음에 예수 믿을 때도 손을 뗐으면 이런 말씀에도 손을 떼어야 됩니다.

12절에 누구든지 내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라는 말씀에 대해서 인간적인 디모데가 느끼는 그 기준하고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하고 같을까요? 다를까요? 이게 달라요. 늘 달라요. 그 이유가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원칙이 있어요. 이 원칙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반드시 무엇을 통해서 주어지게 되느냐 하면 여러분들이 지금 알고 있지만 복습한다고 생각 하시고 제 말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이 우리에게 올 때는 반드시 중보자를 통해서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중보자가 우리를 용서하실 때만 중보자가 아니에요. 모든 말씀을 실천할 때도 반드시 중보자가 개입하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 25절을 보면 히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구원받는 데는 누가 관여한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기도해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누가 개입한다는 말입니까?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이 개입하시죠. 예수님이 개입할 때 어떻게 개입합니까? 그냥 아무 일도 안하고 멍하니 개입하는 겁니까?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시는 겁니까? 뭘 하죠? 히브리서 7장 25절에 뭘 하십니까? 친히 기도 하시죠. 그리고 우리가 지금 살아있는 것이 내 기도 덕분입니까? 주님 기도 덕분입니까? 주님 기도 덕분 맞지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한국교회는 왜 자신의 기도 덕분에 구원받는다고 그런 식으로 분위기로 몰아가는 이유가 뭡니까? 흔히 중보기도 해서 여러분들이 멀리 있는 자식이 여러분들이 기도 해서 멀리있는 자식이 편안히 있습니까?

당진에 있는 따님이 사모님이 기도 해서 결혼까지 골인하게 되었습니까? 어떻습니까? 그러면 딸을 위해서 기도 한 적이 없어요? 부모가 돼서 늘 기도 하죠? 그런데 기도 덕분에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사모님 기도 덕분입니까? 주님의 기도 덕분입니까? 주님 기도 덕분이죠. 주님 기도덕분인데 사모님은 왜 기도 합니까? 사모님이 기도 하는 것은 주님이 기도 하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사모님이 기도 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그 말씀에 반응을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반응이냐 하면 이 말씀을 누가 지킨다고? 내가 지켜야지! 라는 반응을 필수적으로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주의 말씀에 대해서 어떤 성과를 남기려고 하는 그런 의도 우리는 숨길 수가 없어요. 주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말씀 주셨죠? 제가 지키겠나이다. 다른 사람은 안 지켜도 제가 지키겠나이다! 제가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제가 미국뉴욕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사마리아 여인 가지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 사마리아 설교 내용 가운데 왜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빼돌리고 단독으로 사마리야 여인을 만났느냐? 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선입견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주게 되면 왔다! 하나님의 계시! 해서 주의 계시를 드디어 우리가 지킬만해서 주셨다 하는 그 지키는 실천하는 솜씨를 보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은 충동을 반응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원받는 것은 자기들은 구원받는 것은 자기 힘으로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왜냐 하면 당나귀가 말한 것, 홍해 갈라진 것, 여리고 성 무너진 것, 천지창조,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힘으로 안 되죠.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애굽에서 나오는 것은 절대로 우리의 능력이 아니고 주의 은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주어진 십계명 있잖아요. 그 십계명은 일단은 구원받은 사람 같으면 이제는 구원받은 티를 낼 수 있는 방법이 십계명을 준수함으로서 너는 합격이고 준수 못하면 너는 불합격이라는 식으로 그 사람들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인 거예요.

왜 문자적이냐 하면 십계명이나 신명기를 보면 이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을 받고 못 지키는 사람은 저주 받는다고 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처음부터 너는 못 지켜! 너는 저주 받아야 돼! 이렇게 나오신 게 아니고 지키면 복을 받고 라고 이미 지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미 말씀 안에 새겨 담아서 자기들에게 줘 버렸다 말이죠. 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그 가능성을 비친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는 옮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뜻으로 그들은 받아들인 겁니다. 그런 순간 그들은 무엇을 놓쳐버렸느냐 하면 그들은 중보자, 하나님 이름이 그들과 동행한다는 사실을 깜박 놓쳐버린거예요.

사람이 말씀을 지켰다고 착각하는 순간부터 중보자가 빠져버리면 그것을 가지고 이방민족이라고 합니다. 중보자가 빠져버리면 필히 인간은 우상숭배 하도록 되어 있어요. 중보자가 빠져 버리면 필히 살인하게 되고 있고 필히 간음하게 되어 있고 필히 탐내게 되고 있고 필히 부모공경 안하게 되어 있고 필요 거짓 증거하게 되어 있고 필히 도둑질 하게 되어 있어요. 중보자를 거치지 아니하면 그렇습니다.

옆에 어떤 집사님이 앉아있다면 그 사람의 머리 모양이 잘 나왔고 자기는 머리 모양이 못나왔을때 비교가 되잖아요. 비교되면서 무엇을 생각합니까? 예배 시간에 낮에 예배 끝나고 물어봐야지 집사님 어느 미장원에서 그렇게 머리했습니까? 물어보는 거예요. 뭘 거치지 않았죠? 중보자를 거치지 않았죠. 중보자를 거치지 않으면 반드시 탐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 말이죠. 그들 유대인들은 십계명을 자기를 보고 준 것이 아니고 그들과 함께 있는 중보자를 보고 줬다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알지를 못했어요.

제가 아까 강의 초반에 이 말씀은 중보자로부터 줬다 했을 때 여러분들은 그것을 내가 그런 이야기할 줄 알았어! 이렇게 생각했습니까? 헐! 무엇이? 그런 이야기가? 이런 생각이 든다 이 말이죠. 중보자와 함께 있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성령이 함께 있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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