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가락-요한복음 4장11(거울 자아)140918b-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복음

가락-요한복음 4장11(거울 자아)140918b-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요한복음 4장11(거울 자아)140918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14절 보면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했잖아요. 예수님이 우물이라는 거죠. 그럼 사마리아 여인 이 제시하는 우물은 야곱의 우물인데 야곱의 우물은 이미 야곱은 죽고 그 우물은 야곱이 하나님께 복 받아서 물이 나왔던 약속의 땅의 그 지하수를 그냥 야곱의 후손들이 그 땅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집에 가서 퍼먹으면 되는데 문제는 이게 목마르다는 게 문제에요.

‘목마르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라고 생각하는 그걸 생각 못하니까 그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목말라야지.’ 이렇게 생각하지 ‘목 안 말라야 돼. 영원히 목 안 말라야 돼.’ 이런 것은 인간으로서 예상 못 합니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다 그러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냐 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삽입되지 않는 이야기를 해버려요. 사람들이 예상하거나 기대하거나 짐작한 것이 절대로 스며들지 않는 이야기를 해버린다니까요.

그러니까 인간의 행함으로써 주님을 접근할 수가 없죠. 그럼 어떻게 되느냐? 그냥 믿어야 되지 뭐. 믿으려면 지금껏 내가 알고 있던 것은 죄였습니다. 라고 인정하고 믿어야 되죠. 주님만이 영원한 우물입니다. 라는 이 말은 ‘우리가 지금 길러 오는 이 물은 물도 아니고 주의 축복도 아니고 주의 선물도 아닙니다. 그저 우리는 목마르다가 죽어 마땅합니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주님이 영원한 생수가 주는 우물입니다.‘ 라는 것을 인정된 상태에서만 비로소 그런 고백이 나오게 되죠.

그럼 여기 이 여인이 이 말 듣고 믿었느냐? 그때는 안 믿었죠. 계속 버티죠. 자기한테 문제없다는 것. 버틴다는 말은 뭐냐 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목마르지 않은 우물을 이야기할 때 자기는 너무 허황돼 보입니다. 참으로 허황돼 보이고 하는 말이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라고 돼 있죠. 참 이 여인이 생각하는 수준이 이런 물이 목마르지 않으면 두 번 다시 물 길러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물은 현재 기존에 있는 그 물하고 같은 물인데 차이점은 목마르지 않기 때문에 두 번 다시 안 길러 와도 되는 물이다. 그러니까 기존의 물도 뭐다? ‘기존의 물도 물이다.’라는 것을 계속 고집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 기존의 물이 물이라고 고집하는 자아는 누굽니까? 기존의 자기 자아상이죠. ‘난 이게 물인 줄 아는데 당신이 그걸 준다니까 이 물보다 그물이 낫겠습니다.’ 라는 뜻이지 이거는 물이 아니고 그것만 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여인이 아직도 여전히 자기 기존의 자아상을 나는 포기 못하겠다는 식으로 나오죠.

그러니까 주님 하신 말씀이 뭐라 합니까?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하죠. 자, 여기서 남편을 불러오게 되면 그 물 줍니까? “네 남편 데리고 오게 되면 내 생수 만들어 줄게“ 그런 조건으로 한 겁니까? 왜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현재 있는 내가 아는 물 말고 거기다 당신이 주는 물까지 추가해서 얻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이 말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내 자신이 생각하는 것은 나는 포기 못하겠습니다. 이것도 정당한 겁니다. 꾸준한 거예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아주 생뚱맞은 이야기를 해줘요. “네 남편 불러와라” 고 이야기합니다. 써 봅시다. 이게 어느 정도로 무관한 이야긴지. 물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네 남편 데려와라.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물이라는 관심사에서 남편으로 관심사를 옮기려면 어디를 통과해야 됩니까? ‘현재 나는 이 야곱의 우물도 물이라고 우깁니다.’라고 여기는 이 여자의 자아상을 통과해야 이게 가능하겠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물도 물입니다.’라고 우길 때 그러니까 ‘다시는 물 길러 오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한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그 물과 당신이 주는 물과 이렇게 결합이 가능하다, 이런 뜻이거든요. 지금 물 길러 오기 귀찮은데 아이구, 물 길러 오지 않아도 됐습니다. 이런 거거든요.

물이 뭐냐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는 물 길러오지 않게 된 것도 자기는 그거라도 고맙습니다. 그런 뜻이다 말이죠. 물을 그렇게 생각하는 자아상에서 남편 데려오라 하면 그냥 이야기를 못하고 자아를 뚫어야 내 남편이 나와요. 예수님께서 “네 남편을 데려와라” 이렇게 한 거예요.
그러면 “네 남편 데려와라” 한 순간에 무슨 소리가 날라 가 갑니까? 물 이야기를 순식간에 날라 가 버렸죠. 날라 가 버리고 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이 여인은 자기를 지키고 사수하고 보호해야 될 입장에 있죠. 만약에 예수님께서 ‘네 남편 데려와라“ 이렇게 하게 되면 ”사실은 요 제가 전에 남편이 다섯 명 있었거든요.“ 이렇게 나와야 돼요.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무슨 이야기합니까? 남편이 없다 하죠. 단답형으로 이야기했죠. ”남편 데려오라“ 할 때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했다고요.

계속해서 여인은 자기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있죠. 그런 자기 자신을 감추는 순간 물 이야기는 어디로 날라 가 버렸습니까? 물 이야기는 벌써 날라 가 버렸죠. 그러니까 물이라는 것은 하나의 핑계였고 예수님이라는 자아와 여인의 자아와 물이라는 하나의 매개로 해서 끝나버리고 이제는 예수님께서 자아와 그 여인의 자아 속을 지금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그 뒤에 물 이야기 안 나오죠? 그 말은 뭐냐 여인은 자아를 숨긴 상태에서 어떻게 하면 두 번 다시 물 안 길러오는가, 내게 어떤 이익이 있는가, 저 유대인 남자를 한번 이용해봐? 혹하는 소리를 했는데 다시 영생하는 물이 온다면 안 길러오지. 자아 자신은 계속 숨긴 채 계속 주변에 있는 자기가 안 들킨 상태에서 주변 이야기 가지고 예수님과 관계지려고 하다가 예수님께서 남편 이야기한 순간 물 이야기 다 날라 가 버리고 직접 예수님과 여인의 속마음이 공개 당하게 된 겁니다.

“네 남편 데려와라. 생수를 주시옵소서.“ 참 이건 실전하면 되죠. ”여기 맛있는 홍삼이 있는데 드릴까요? 집사님.“ ”주세요.“ 했다고요. ”남편 데려오세요.“ 이거 갑자기 무슨 이야기냐 말이죠. 그러니까 여인의 입에서 뭐가 나옵니까? ”남편은 없다.“ 했죠. ”남편은 없다.“에서 남편을 잘라보세요. 뭐가 남습니까? 없다. 여인은 없는 거예요. 여인 자신이 주님 앞에서 없는 존재입니다. 여인은 없습니다. 여인은 없는 거예요. ‘없다.’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나는 네가 무엇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내가 알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네 친구 데려와라.” 하면 “친구 데려오면 생수를 줄게.” 한 거예요. 없는 걸 주님께서 지적한 거예요. 그러니 주님께서 생수를 줄 때는 그 생수 주는 그 바탕이 우리가 이미 짐작하고 기대하는 바에서 덧붙여서 주시는 게 아니고 우리는 받아 낼 그릇조차 없는, 받아낼 수 있는 어떤 건더기도 없는, 받아내려는 두 손마저 없는, 없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없는 것부터! 없는 것부터 뭐가 나오느냐? 없음에서 있음이 있다는 것은 남편 없다에서 남편 있다가 아니고 나 없음에서 나 새롭게 나 있음으로 끄집어내는 거예요.
이야기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여인은 자기가 여자라고 여겼습니다. 자기 자아가 있으니까. 예수님께서 이야기를 합니다. “물을 달라.” 여인은 자아와 더불어서 나는 야곱의 자손이며 야곱이 주는 축복 가운데 하나님 주신 선물 가운데 살면서 지금도 그 혜택으로 이 맛 좋은 물도 야곱의 우물에서 혜택을 입습니다. 해서 계속 자기 자신이 있는 존재로 있죠. 거기다가 생수를 준다 하니까 있는 존재에다 덧붙여 주는 줄 알았다 이 말이죠.

그런데 생수를 줄 때는 어떤 원칙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있는 것이 다시 있는 게 아니고 없음이라는 것을 본인이 알아야 돼요. 본인이 알았다는 말은 물이 있다, 없다가 아니라 물 이전에 내가 없고, 내가 없다는 말은 내가 여기 있지만 주께서 원하는 아까 하나님과 결부된 나가 있어요? 없어요? 없는 거예요. 하늘나라 갈 수 있는 나는 없는 거예요. 하늘나라 가는 나는 주님 안에 들어있지, 내 안에 들어있는 게 아니에요. 영생 얻는 나는 내 안에 있는 게 아니고 주님 안에 있다 이 말이죠.

주님 안에 있다는 내 목숨은 내 목숨이 아니고 주님의 목숨이 함께 작용하는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는 따로 있는 거예요. 그것을 주께서는 예수 안에서 자신의 야곱의 자손으로서, 예수님 자신이 야곱이니까, 이스라엘이니까, 자신의 후손으로서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백성들을 만들어줘야 그 백성 속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넘쳐나는 겁니다.

여인은 자기가 있다는 것을 자기는 항상 자부했고 그걸 들키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갑자기 여인에게 없는 이야기를 했어요. “남편이 없지?” 이야기하지 않고 “남편을 데려와라” 했잖아요. “남편 데려와라” 하니까 여인이 하는 말이 “남편은 내게 없습니다.” 남편은 없는 거예요. 그럴 때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 말은 뭐냐 여인이 뭔가 감추고 싶은 게 있어요. 결혼 안 했으면 남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남편 없죠. 결혼했는데 남편을 사별해도 남편이 없죠. 그래서 여인은 어디다 숨어버렸냐 하면 결혼 안 해서 남편 없을 수도 있고 결혼했는데 남편이 죽을 수도 있고.

그런데 자기가 숨기려고 했는데 누가 여인이 숨기고자 하는 본색을 누가 끄집어냅니까? “그래 네가 남편 없는 건 맞다.” 하면서 그냥 지나가지 않고 뭐라 합니까? “원래 네가 남편 다섯 있었잖아” 생판 모르는 여인보고 완전히 도사도 아니고,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는데 지금은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다.” 그럼 여인 말이 참된 거예요? 예수님이 참된 거예요? 여기서 예수님이 참되죠. 여인은 참되지 않죠. 왜, 숨기려고 했으니까. 설마 남편 없다하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아, 저 여인이 나이를 보니까 결혼은 한 것 같고 남편 없다하니까 아, 사별했구먼.’ 이렇게 이해해주기를 바라죠. 왜냐 하면 그래야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숨겨둔 자신이 계속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자기가 나라고 여기는 이상은 생수를 줄 수 없어요. 몽땅 거덜 내야 된다 말이죠. 거덜 내려면 숨길 수 있는 숨기는 마지막 모습까지 완전히 거덜 내야 돼요. 그걸 누가 하시느냐, 주님이 하시는 겁니다. 이게 뭐냐 십자가의 기능입니다. 주께서 십자가 지실 때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 앞에 있는 사람은 이유도 묻고 따지지 않고 죄인 이예요. 그것은 자기가 잘못한 게 아니고 저 피가 말해주는 겁니다.

백부장이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뭐라 했습니까? “당신은 정말 의인입니다.” 나는 죄인 맞다는 뜻 이예요. 십자가 앞에 설 때 묻거나 따지지 말고 그냥 죄인 이예요. 따라서 죄인 되게 한 그 나를 내가 가질 수 없어요. 왜냐 하면 죄인 되게 했다는 말은 이미 주님께 손 탔다는 거예요. 이미 거기서 관여하고 있다는 거예요.

아까 처음에 했죠? 하나님과 관여된 자아상, 주님에 의해서 관여된 자아상만이 영생 얻지, 그렇지 않으면 영생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수가 나오지 않아요. 주께서 오신 것은 우리에게 통보한 자체로서 이미 그 사람이 구원이 주님의 손에 의해서 구원된 백성이라야 야곱의 언약이 완성되거든요. 야곱의 언약은 야곱이 이룬 게 아닙니다. 야곱 안에 누가 있느냐, 예수님이 있어요. 그럼 야곱이 구원받았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이삭의 하나님이고 야곱의 하나님이라 할 때 야곱이 구원받은 것은 야곱의 공로도 아니고 야곱의 기여도도 아니에요. 누가 구원했습니까? 야곱을 찾아오신 하나님이 누굴 구원했다? 야곱을 구원했거든요. 야곱에게 주신 언약에 의해서 야곱이 매달려 끌려가니까 구원받은 겁니다.

똑같은 방식을 이제 새 언약 가지고 하시는 거예요. 새 언약이 뭡니까? 십자가잖아요. 십자가가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여기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뭔가 내 것은 완전히 묵살당하고 일방적으로 끌려가서 일방적으로 구원된다는 그런 모양새가 나타나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 모양새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누가 시비를 걸었어요? 주님이 먼저 시비를 걸었죠. “남편 데려와라” ‘남편 데려오면 물 주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왜 하필 나한테 없는 이야기를 하지?’ 그래서 무심코 이야기했죠. “남편이 없습니다.“ 그때까지는 아직까지 자기를 안 들켰죠. 그런데 갑자기 주님이 뭐라 합니까? ”네 말이 옳도다.“ 하니까 이거는 지금 자기를 숨겼음에도 불구하고 옳다고 이야기했으니까 분명히 나보고 옳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지금부터 내가 너를 찾아가는 모든 행동이 참이고 옳을 수밖에 없는 행동이 너를 향하여 실시가 된다는 이야깁니다.

네가 한 말은 네가 진심이 아닌데 그 진심이 아닌 것을 들통 내는 그거는 진심이 되도록 하시는 거예요. 내가 내 죄를 숨긴 것이 진심이 되는 경우는 이 여인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 경우밖에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자기는 죄인임이 드러날 때 그때 내가 거짓말 한 것도 죄 일부임을 자백하게 되니까 그게 진심이죠. 그런데 그걸 향해 주님이 뭐라 합니까? “네 말이 옳도다. 참되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그리고 나서 여인이 까붑니까? 까불이 하면서 나는 주님과 친합니다. 이렇게 합니까? 어떻게 됩니까? 부끄럽기 짝이 없어요. 그렇죠? 이미 “너는 참되다. 옳도다.” 한 순간부터 이 여인은 예수님 손에 완전히 장악된 거죠. 이제부터 그 여인은 자기 멋대로, 뜻대로 살 수 없습니다. 주께서 여인에게서 뽑아낼 것을 다 뽑아내요. 여인의 입을 통해서.

그 다음에 뽑아낸 게 뭡니까? “예배는 어디서 드리면 됩니까?” 이런 소리까지 다 뽑아내요. 여인을 통해서 에스겔 흐름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여인은 졸지에 하나의 칠판이 된 거죠. 주님이 이 땅에 계시를 전하는 하나의 칠판이 된 겁니다.

이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분명히 사마리아 땅에 갈 때에 12제자와 더불어 갔잖아요. 이 12제자 이야기보다도 한 여자하고 이야기한 게 더 많아요. 예수님과 12제자 이야기는 몇 구절 되지도 않아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일을 누구와 한다? 홀로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추수할 때 한 사람은 수고하고 다른 사람은 그냥 누린다. 공짜로 다른 사람은 참여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여인도 이미 참여된 여인이 되는 겁니다.

계속 이야기해 봅시다. “남편이 없나이다.” 자기를 숨기려고 했죠. 설마 알겠나? 남편 없으면 남편 하나 있었는데 사별했겠지. 이렇게 여긴 거죠. “남편이 없나이다.” 하니까 “옳도다.” 여기서 주님 이야기가 좀 마감해 줬으면 여인이 자존심이 유지될 거잖아요.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가 네 남편이 아니다.” 할 때 여인이 뭐라 했어요? ‘쉿, 쉿, 쉿, 쉿’ 아무리 여인이 쉿 해도 이거는 이 성경책이 팔릴 때마다 공개 다 된 거예요.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은 하늘나라에서 아주 유명한 인사가 됐잖아요. 요한복음 8장에 들어있어요. 막달라 마리아도 유명인사 됐고, 사도바울은 말할 것도 없고.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인이 여기서 뭐라 합니까? 드디어 자기 자신보다 더 큰 자가 여기 있다는 걸 알죠. 야곱의 우물보다 더 큰 자, 야곱보다 더 큰 자. 어느 누구도 이제는 자기가 주님 앞에 나서서 “내가 어때요?”라고 비춰야 될 하나의 거울 같은 존재로서 인식하게 되는 겁니다. “당신은 선지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은 모르는 게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입니다. 나는 당신 앞에 서고 싶어요. 내가 당신 앞에 서면 왜 그리 작아지는지, 나는 당신 앞에 서고 싶어요. 당신은 선지자입니다.”

물 이야기하다가 남편 이야기하다가 이제는 여인의 이야기는 사라지고 무슨 이야기? 나는 우리 조상이 어떻고 이야기 끊어지고 예수님 이야기로 전환되죠. 성전의 특징이 바로 예수님 이야기로 전환되는 겁니다.

제가 부산 강의하면서 들은 이야기에요. 부산에 섬이라고 중심가가 있는데 큰 합동 측 서문교회라고 있어요. 그 교회 부목사님 그분이 쫓겨났는데 쫓겨난 이유가 뭐냐 장로인지 당회장이 쫓겨냈는지 모르겠는데 이유가 이거에요. 당신은 1년 내내 예수 이야기밖에 안한다. 물론 그 부목사가 복음 안다, 그건 모르겠는데 알든 말든 지금 쫓아내는 그 빌미가 1년 내내 설교를 할 때 설교가 예수 이야기해서 맘에 안 들어서 당신을 쫓아낼 수밖에 없다. 그 이야기에요. 장로들이 한 거예요.

그럼 예수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해야 된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들 장로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럼 다른 이야기해버리면 그게 교회입니까? 교회 아닙니까? 그건 머리가 주님 되시는 교회가 아니죠? 교회가 아니고 친목 모임이죠. 그러니까 그 목사는 실례한 거예요. 친목 모임에 자기는 교회인 줄 알고 착각해서 1년 동안 다닌 거예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몰라 봤습니다. 친목 단체인 줄 모르고 난 교회인 줄 알았잖아요.’ 이러고 나와 줘야 되죠. ‘아, 나는 교회인 줄 알았는데 교회가 아니었구나. 아이쿠, 제가 참 실례 많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미처 알아봐야 되는데 못 알아봐서 미안합니다.’ 이러고 나와야 되죠. 그렇죠? 그런데 그런 교회가 그 교회뿐이겠어요? 대부분 교회가 다 그렇죠.

예수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일단 그분이 복음을 전했다 치고 예수 이야기한다고 복음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자기 신학적 학문 배운 걸 내놓을 수도 있는 그런 요소가 굉장히 많아요. 예수가 어떤 분이고 신학적인 의의가 뭐고, 진짜 복음을 위한 게 아니고 예수에 관해서 이야기하지만 진짜 예수에 관해서만 이야기하지 복음을 뽑아낼 어느 설교도 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러면 성경에서 예수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 해달라는데 다른 이야기가 뭘까요? 그건 그 서문 교회가 지금까지 들어왔던 그 설교를 해달라는 거죠.

그 설교가 어떤 설교입니까? 바로 하나님과 인간 설교죠. 하나님 앞에 이렇게, 이렇게 하시면 복 받습니다. 이게 전부죠. 그겁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 욕심만 채우지 마시고 선한 이웃을 돌보세요. 그러면 여러분 복 받습니다. 이런 설교죠. 그러니 이것은 예수가 필요 없죠? 그냥 행함이죠. 그냥 하나님 믿고 행하기만 하면 교회 된다는 게 그들 주장입니다.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여기 보면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유대인들하고 자기 사마리아 인하고 차이를 이야기합니다. 차이가 뭐냐 하면 예배를 드리는데 “당신은 선지자입니다.” 선지자이시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맞고 맞는다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뭘 원한다? 예배를 원하는데 예배 방식에 대해서 예수님한테 왜 묻습니까? 이게 어려운 문제죠.

본인이 이미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리고 있잖아요? 그러면 그것이 정당할 것 같으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립니다.’ 라는 말을 꺼낼 이유가 없어요. 에이, 유대인들이야 뭘 하든지 우리는 그리심 산에서 꾸준히 지금까지 드려왔고 저는 옳다고 믿습니다. 이러면 될 텐데 새삼스럽게 왜 이걸 예수님한테 묻느냐 이 말입니다. 새삼스럽게.

이게 컵입니다. 컵에 물 따라 먹습니다. 이렇게 물으면 될 텐데 우리는 컵으로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은 이걸 그릇이라고 생각하는데 선생님 의견은 어떻습니까? 이걸 왜 묻는 거예요? 이게 아닐 수도 있다 이 말 아닙니까? 그 정도로 주님이 자기 과거를 밝힌 주님의 견해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듣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죠. ‘당신이 하시는 어떤 이야기든지 간에 그냥 그대로 수용하겠는데 수용하기 전에 우리는 요 정도 알고 유대인은 저 정도 아는데 우리가 보기는 나타난 선지자 당신 앞에서는 둘 다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를 본인이 지금 인정한 셈이 돼요.

예를 들면 우리는 이걸 컵으로 알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이걸 그릇으로 봅니다. 그러면 주님은 이게 뭡니까? 물으면 “그거는 주전자지.” 이럴 수 있다 이 말이죠. 주전자라 하던지 간에 나는 더 이상 토 달지 않겠다. 이미 마음을 비운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여인이 자진해서 자기 속에 있는 그동안 예배해 왔던 자기 종교를 완전히 선지자인 줄 알고 탈탈 털어내는 겁니다. 자기 것만 털어내는 게 아니고 자기가 들었던 것도 털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유대인과 그리스도는 대립관계에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그동안 보이지 않게 암투로 싸웠던 우리들 수준 이 정도까지 싸우는데 그 싸우는 양쪽 다 탈탈 털어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이러한 예수님 앞에서 이런 논쟁도 부질없을 가능성 있음을 여인이 이미 인정한 겁니다. 처분만 맡기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이산으로 가면 뻐꾹, 저 산으로 가면 뻐꾹, 이산 저산 소용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땅에서 하는 예배는 주님과 연결된다? 안 된다? 어떤 예배도 연결되지 않습니다. 예배는 이 땅에는 없었습니다. 구약에 있잖아요. 그거는 구약에서 하나님이 사건을 유발한 거죠. 인간이 드린 예배를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엘리야가 물 12통 부니까 불이 확 탔잖아요. 갑자기 물이 핥아지고 불이 확 붙었잖아요. 누가 주인공입니까? 주님이 주인공이죠. 이걸 동시성의 불일치성.

사건이란 특징은 사건은 일어나면 누가 봐도 동일한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의견은 일치되지 않아요. 이해관계에 따라서 다 달라요. 가정에 애가 성적이 내려가게 되면 아버지는 공부 못해서 그렇다고 이야기하고 엄마는 당신이 술 먹고 늦게 들어오니까 애가 공부 방해돼서 못했다 이러는 거예요. 공부 못했다는 동일한 사건이 가정마다 다 달라요.

주님은 예배를 뭐로 시킨다? 사건화 시켜버려요. 사건화 되게 되면 땅에서는 잡을 수가 없어요. 표준 형식이란 게 성립이 안 되고 매뉴얼도 지금까지 했던 매뉴얼도 소용없어요. 경리 보면 딱 나오잖아요. 견적서 따라 약정 나오죠. 양식이나 폼이 나오죠. 세금계산서에 빈칸만 있어서 빈칸만 메우면 되잖아요. 그 양식이 없다니까요. 성경에. 주보에도 맨날 그거만 바꾸면 돼요. 주보 틀이 있어서 바꾸면 되는데 주님의 예배는 그게 없다니까요. 왜냐 하면 예배는 인간이 드리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예배는 누가 드리느냐? 성령이 알아서 드려요. 신령과 진정, 진리와 성령, 성령이 성령 안에서 드려야 그게 하나님께 예배가 됩니다. 이 말은 예배 말라가 아니라 인간은 예배 할 수가 없어요.

예레미야 31장 33절 한번 볼까요?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 예레미야 31장 33절 이야기하게 되면 지금 마음을 누가 장악하죠? 그때 새 언약 시대가 되면 하나님이 장악하잖아요. 그렇게 되게 되면 예배라는 그 모든 시작과 끝을 누가 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시작해서 하나님이 마무리 짓죠. 에스겔을 봐도 하나님의 신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주의 말씀을 지키게 돼 있어요. 에스겔에 그런 게 있습니다.

제가 왜 예레미야, 에스겔을 언급하느냐 하면 여기 23절에 보면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할 때 이 때가 온다 할 때 예레미야나 에스겔에서 이미 예언했다는 그 이야기를 제가 말씀드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예언하신 대로 그대로 우리에게 실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배라는 것을 우리에게 언급했을 때 유대인들이 부지런히 예배를 드렸죠? 제사 드리고 예배 드렸잖아요. 예배드리게 한 이유가 뭘까요? 그들이 드리는 예배가 예배답지도 않은데 예배드리게 했을까요? 그것은 뭐냐 하면 분명히 예배는 드렸는데 어떻게 됩니까? 약속의 땅에서 추방이 되고 벌을 받죠. 그러니까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들을 통해서 주의 말씀 성취에 인간이 하는 일이 개입이 될 수 있다? 못 된다? 인간은 개입하거나 관여할 수 없어요.

하나님의 제사의 특징은 뭐냐 하면 철저하게 인간을 배척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게 어려운데요. 인간이 죄를 짓고 난 뒤에 죄 속죄 해달라고 어린양을 잡잖아요. 어린양을 잡고 제사 때 인계할 때 그들이 자기 죄를 압니까? 몰라요? 죄인 줄 알고 바쳐도 죄가 뭔지 몰라요. 왜냐 하면 일단 제사장에 의해서 성막 안에서 양을 잡을 때는 이거는 새로운 하나님이 생각한 죄가 여기 어린양에 가해져 버립니다. 인간은 자기 죄를 몰라요. 양심의 가책이라고 죄라고 이야기해도 그게 진정 죄의 진수는요 인간의 손을 떠나서 주님한테 맡길 때 주님만이 진정 인간의 죄가 뭔지 알아요.

그래서 제사의 특징은 뭐냐 일단 제사장 손에 들어가 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죄인은 거기 관여하지 못하고 제사제도 안에서 그 양은 무참하게 불태워지죠. 무슨 죄가 불태우는 죄를 범합니까? 주님 앞에서는 작은 죄, 큰 죄 없어요. 전부 다 불 탈 죄에요. 도대체 어떤 죄의 기준이기에 커닝 했다고 불태워버리고 농사 졌다고 불태워버리고 무슨 기준에 의해서 그런 죄가 있을까요? 인간은 뭘 해도 불타도 할 말 없는 죄인인 겁니다. 그러니 그 죄인이 예배를 드린다고 그리심 산에서 드린다고 받겠어요? 예루살렘에서 드린다고 받겠습니까? 받지 않죠.

찝찝해서 안 되겠네요. 기어이 찾아야지 마음이 울적해서 안 되겠어요. 에스겔 36장 26절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을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이 예언이 요한복음 4장에서 지금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을 주신다 할 때 그 주시는 분이 누구다 하는 것을 이 사마리아 여인이 알았어요? 몰랐어요? 알은 거예요. 왜냐 하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고 해서 지금 인간이 할 수 있는 예배는 뭐냐 하면 그리심 산이냐?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느냐? 형식과 격식에 맞추어서 역사와 전통에 맞추어서 하는 거,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에요. 그런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참 예배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한계를 벗어나서 하나님에 의해서 진행된다 말이죠.

그러면 예배는 이루어져야 되거든요. 왜 예배 중에 말씀이 이루어지니까. 그 예배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누가 왔단 말입니까? 결국 그런 이야기하시는 분이 지금 사마리아 여인 눈앞에 나타난 거예요. 그래서 예배 이야기하면서 사마리아 여인이 요한복음 4장 29절에 보면 그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 사람한테 누굴 만났다 합니까?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돼 있죠?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이야기하는 걸 봐서 이미 그 여인 속에 뭐가 있다?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 말을 알아들은 거예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예배는 본인이 어느 산에서 어떻게 드릴 그런 수준이 아닌 거예요. 어떤 형식과 격식이, 아침 10시에 드릴까요. 9시에 드릴까요? 그럴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진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주님께서 성령 주게 되면 이미 예배가 시작된 거예요.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러면 여인이 물을 얻은 거예요? 안 얻은 거예요? 물 어떻게 됐습니까? 여기 4장 28절에 보면 여인이 뭘 버려두고 왔습니까? 물동이를 버려두고 빈 몸으로 마을 사람에게 왔죠. 뭔가 급했던 모양입니다. 자기 본연의 사명을 잊어버렸죠. 물 길러 왔다가 물동이 버려뒀으니까 물을 어디 손에 담아왔는가요?

그러니까 물이냐? 아니면 메시야냐? 그리스도냐? 둘 중에서 여인이 어느 게 더 중요하다고 보죠? 지금 물 길러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중요한 거예요. 그리스도가 왜 중요하냐 하면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그리스도가 와야 모든 것을 밝히 보여주거든요.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그분이 한방에 다 보여준다 이 말이죠. 보여주면서 여인이 겪었던 일 중에 하나가 뭐냐 여인 자신의 과거가 들통 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떤 지식을 전달하면 지식을 받고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고 예수님은 우리 구원받은 자를 관통함으로 말미암아 이전에 자아라고 여겼던 자아는 이미 그것은 인정받지 못할 자아고 주님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자아만이 진정한 자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자아는 이미 예수님이 알고 있죠. 그러니까 일부러 제자들 따로 돌려놓고 없는데서 이야기한 겁니다. 추수하러, 자기가 알곡을 알기 때문에 건지러 온 겁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의 진짜 여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요. 그걸 거울 자아라고 내가 표현한 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23절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그 다음에 뭐라 합니까? 곧 무슨 때다? 이때다. 사건화 시켰어요. 사건화 시켜버리면 예수님이 말하는 그 당사자가 그때를 이미 선포를 해버렸죠? 이때라고. 누가요? 예수님이 그걸 선포를 해버렸다 말이죠. 예수님이 그걸 선포를 했으니까 앞에 보면 이때라 하기 전에 앞에 때가 또 나오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돼 있으니까 때가 온다고 하는 것은 예언이고 이때라고 선포한 것은 주님 본인의 결정이고, 그러니까 예수님이 스스로 약속한 것을 스스로 지금 실시되고 완성되었다고 선포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건 속에 누가 계십니까? 이미 사건이 현재와 하나님의 말씀이 사건을 통해서 현재화 되려면 반드시 누가 완성해야 될 그리스도가 나타날 경우에만 그 구약의 예언된 것이 “이때”에 해당될 수 있어요. 이때가 뭐냐 그리스도가 왔기 때문에 가능한 때가 이때가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단순한 선지자라면 뭐라 합니까? ‘아마 내 뒤에 또 그리스도 오시면 될 걸.’라고 미래로 미룰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에 선지자라 이야기해놓고 뭐라 합니까? 나는 누굴 만났다? 선지자를 만난 게 아니고 누굴 만났다? 그리스도를 만난 거예요.

이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말이 무슨 의미냐? 이거는 무서운 의미에요. 심판 날입니다. 더 이상 카렌다에 6월 달, 10월 달 이게 의미가 없는, 째칵째칵 이게 의미가 없는 때가 돼 버린 거예요. 째칵째칵 날짜 넘어가고 해가 넘어가고 달이 넘어가는 것은 이거는 기존의 인간들이 그만한 가치 있다고 우겨서 아직까지 쥐고 있을 때 그 시간 속에서 기존의 자기 자아를 유지하려고 할 때는 그 카렌다가 필요한데 자아가 어디로 이동했습니까? 나라는 자아는 이제는 묵사발 되고 껍데기로 변했고 이제는 그리스도 자아만이 절대 자아가 돼 버리면 그리스도의 자아에 부합된 시간이 적용되는 그런 시절에 우리가 지금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된 거예요.

그러면 그 앞에서 우리의 째칵째칵 시간은 이건 부정돼야 마땅하죠. 그걸 가지고 예수님은 추수 때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 35절 봅시다.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니까 토지 추수가 몇 개월 있어야 되죠? 넉 달 남았죠. 사람들에 의해서 넉 달 뒤에 추수가 있죠. 그러면 예수님은 넉 달이라는 그 기간을 이걸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이걸 버린다면 지금 예수님이 계시잖아요? 지금 예수님이 계신 그것이 뭐냐 하면 추수 때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넉 달 공백은 어디로 가버렸습니까? 넉 달 공백은 없는 거죠. 그럼 주님이 넉 달 기다렸다가 주님 다시 시작하죠? 이럴 수 없어요. 넉 달이라는 그 기간 자체가 주님 앞에 의미 있다? 없다? 그건 무의미한 걸로 날라 가 버렸죠. 넉 달 기다렸다가 추수하겠다는 이 말은 인간들이 예상하고 기대하고 짐작한 거잖아요. 주님께서는 예상하고 기대하고 짐작한 것을 이걸 무산으로 만들어버렸죠. “네가 남편이 있느냐?” 할 때 뭐라 했습니까? “남편이 없다.” 한 거예요. 없다 할 때 없다는 말은 그냥 없다는 말이 아니고 ‘설마 내 과거를 알랴? 내가 틀린 말은 안 했잖아. 남편이 없다는 말은 맞잖아. 하지만 내가 남편이 없다고 하면 이혼해서 없다고 이렇게 생각하겠지.’라고 여인이 자기나름 대로 조마조마하면서 숨기고 있는데 주님께서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은 옳다.“고 이야기한 것은 그 여인이 옳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안에 있는 새로운 여인의 자아 입장에서 거기 ”없다.“에 맞춰서 새로운 여인을 내가 만들어 내겠다는 이야기거든요. 네 말이 옳게 만들게 하는 조치가 내 안에 있는 새로운 여인의 탄생으로서 결국은 네 그 옳다는 말이 옳은 말이 되도록 지금 내가 너한테 조치를 가한다는 이야깁니다. 하여튼 배려해도 이렇게 배려해 주시네.

만약에 집사님이 “나는 주님 싫어요.” 하면 “그렇다. 싫다는 말이 옳도다.” 이 말은 우리가 잘했다는 말이 아니고 “싫다.”하는 그걸 통해서 그것이 진짜 제대로 진리를 표현한 말로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거예요.

촌에 가다 보면 배고파서 그런지 진짜 맛있어서 그런지 촌에 어떤 중국집에 가면 짜장면 시키면 맛있어요. 참 맛있단 느낌 있잖아요. 맛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대도시에 큰 중국집 요리하는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시켜보세요. 그 촌에 먹던 그 맛이 안 나옵니다. 당구장이나 기원에서 먹는 그 짜장면 맛이 안 나와요. 당구 내기해서 한 그 짜장면 맛이 안 나와요. 만화 보면서 먹는 그 짜장면 맛이 안 나온다고요. 찜질방에서 배달해 먹는 짜장면 그 맛이 안 나와요. 레시피가 달라요. 그러면서 나름대로 짜장면에 온갖 것 콩 넣어놓고 완자 넣어놓고 해도 맛이 그 맛이 아니라. 맛이 이상해. 옛날 우리 몸에 맞는 그 맛이 아니죠.

“옳도다.”라고 이야기할 때 그 여인에게 옳을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그게 뭘 해도 그게 죄가 아니고 의되게 하시는 작업을 주님 쪽에서 알아서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믿어라” 그러면 믿음 있는 자가 뭐 된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가 되는 거예요. 믿음으로 사는 거예요. 믿음으로 의인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내가 행함으로 의인되는 게 아니고 다른 분이 나한테 그런 조치를 해줬기 때문에 의인됐다고 하는 그걸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행함과 믿음을 대비할 때 행함과 믿음을 대비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행했느냐, 아니면 너 말고 다른 분, 예수님이 행했는가, 그걸 비교해서 예수님이 행했으면 믿음이고 자기가 했으면 믿음이 아닌 거예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됐으니까 아브라함이 뭘 믿었습니까? 자기가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걸 믿게 된 거예요. 이건 다른 분이 있음을 인정한 거예요. 이게 얼~마나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늦게 와서 공부하는 게 우리가 알아서 버텨서 했지, 삐졌으면 우리는 갔다. 우린 이런 생각이잖아요? 주께서 버티게 하신 거예요.

수요일 날 제가 무슨 설교했습니까? 우리는 뭘 했다고 하지 말고 당했다고 이야기하라는 겁니다. 안 들었죠? 표정 보면 알아요. 당했다고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놀러 갈 때 목욕탕에 가서 ‘나 주님 목욕 왔습니다.’ 하지 말고 오늘도 목욕탕에 앉아서 ‘어~! 좋다.’는 그런 소리 하도록 나는 당했습니다. 이런 이야기하라는 거죠. 뭘 해도 우리는 당하는 입장에 있죠. 사실 세상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눈이 가리워서 그런 모르고 성령 받은 사람은 그걸 늘 우리는 당하며 산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 여인도 당했어요. 바른 소리 안 했는데 “옳도다. 참되다.” 해서 당했어요.

개그 콘서트라는 코미디 프로가 있는데 어떤 젊은 신혼 남편이 아내한테 화를 냈어요. 내가 결혼하기 전에 그렇게 당부했는데 왜 말을 안 듣느냐고 화를 낸 거예요. 내가 결혼하기 전에 네가 설거지하지 말라고 내가 한다고 그렇게 당부했는데 왜 네가 설거지해? 그러면 내가 너한테 때치, 때치 할거야.

우리는 죄인 밖에 없는데 주께서 때치, 때치 해서 전부 의로 다 만들어 놨어요. 우리가 책임질 자아가 아니고 주님이 책임질 자아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일에 말려든 사람 이예요. 오늘 강의 제목을 때치, 때치 할까요?

사마리아 여인은 선지자를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선지자라고 생각하는 아직도 자기의 자기 자신이 남아있어요. 선지자 말씀대로 따르겠다고. 그러나 그리스도가 돼 버리면 이것은 따를 것도 없이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덮치는 거예요. 허리케인처럼. 태풍처럼 밀려와 덮치기 때문에 그냥 자기는 추수 당했죠. 알곡으로 추수당한 거예요. 알곡 되려고 애쓴 게 아니고 알곡 추수를 당하고 보니까 이미 알곡으로 당해져 있어요.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도 버려두고 오직 그리스도만 감사하면서 자랑하죠. 그래서 성도가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와 그리스도밖에 없어요. 이건 성령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에 우리가 말려들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께로 말려들지 아니하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착한 일해서 영광 돌린다는 그러한 자기 자신을 믿는 위선에 빠져있을 텐데 뭘 해도 죄인 것을 까발려 주시는 그 주님의 선한 손길로 인하여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케 하는 일에 저희들이 말려들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가락-요한복음 4장11(거울 자아)140918b-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16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84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