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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41111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8-라이프니츠자유게시판[신학]

20141111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8-라이프니츠

이름 : 한윤범(IP:119.192.174.28)

20141111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8-라이프니츠

(강의:이근호 목사)

우리가 사랑하잖아요. 사랑한다는 것이 우리의 세포의 작용으로 사랑하게 되면 세포에 대자연의 일부가 포함이 돼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진동이 생긴다 말이죠. 그 진동이 멀리 있는 그것까지 상호작용하는 걸로 보지요. 현대 양자이론에서는. 그런데 상호작용한다는 것에 대해서 라이프니츠는 반대하고 상호작용하지 않는다고 본 거예요. 단자는 창문이 없는 거예요. 창문이 없다는 것은 개별적이 돼요. 만약에 창문이 있으면 스피노자가 돼버린다니까요. 소통이 돼버리면. 일체 소통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조치를 하신 것이지 서로 아부하지 말라 이 말이거든요. 내가 아부를 하게 되면 내가 원인이 되고 저 사람이 나한테 유리하게 되면 그 사람한테는 신이 없고 나한테는 신이 있는 셈이 돼버리니까 안 되잖아요. 서로가 단자, 신이 주신 게 있기 때문에.

첫째 시간에 라이프니츠에서 못다 한 중요한 것이 몇 개 있어요. 그 중에서 단자는 누가 만드느냐? 단자는 어떻게 만드는지 그 이야기를 해야 되겠어요. 단자는 물질과 생각, 그 중간에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게 아닙니다. 왜 눈에 보이면 안 되느냐? 보이면 분할이 가능하니까. 보이는 것은 또 쪼개면 다시 더 작은 보이는 게 나오기 때문에 그러면 안 되거든요.

단자는 처음에 하나님께서 한꺼번에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결국 설계도에요. 전 우주의 설계도를 다 갖고 있으니까 단자에서는 아까 현재가 미래를 품었다고, 임신했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그 말은 단자 안에 미래 입장만 들어있다고 보면 돼요. 미래에서 보는 거예요.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미래 입장에서 미리 앞당겨서 보는 겁니다. 그러면 미래에서 현재를 회수하는 셈이 되지요. “이리 와, 이리 와. 그렇게 살아.”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아마 철학가 중에서 제일 난해한 게 라이프니츠일걸요. 특히 기독교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 무슨 희한한 소릴 다 하고 있느냐. 심지어 기독교를 안다고 해도 어려워요. 라이프니츠를 이해한다는 것은 성령 안 받으면 안 될 정도로. 그가 하는 이야기가 도대체 무엇을 기피하고 무엇을 피하가려고 애를 쓰느냐 하면, 하나님을 믿으면서 결국은 하나님이 인간의 욕망과 욕구를 들어주는 그 시대의 종교상 있잖아요. 그걸 어떻게든 피해가려고 하는 겁니다. 절대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돼버리면 그 당시의 교회 상, 그 당시의 세속 상 그대로 가는 꼴이 돼요. 신의 이름으로 자기를 정당화하고 신의 이름으로 남을 피해 입혀도 그것이 아무 죄책도 없는 그런 식이 된단 말이죠. 그러면서도 동물, 식물보다 인간 위주로 세상의 모든 걸 포괄할 수 있는 그러한 철학은 나올 수 없는 겁니다. 라이프니츠가 그걸 염두에 두고 기존의 과학 같은 모든 걸 고려해서 미래 입장에서 보는 겁니다.

그러면서 점점 라이프니츠는 어디로 가느냐 하면, 나의 생각이 성경에서 나온 생각이지 성경을 해석하고 성경을 풀이하는데 이러한 철학 외에는 달리 해석되지 않는다는 자신감에서 그렇게 이론이 나온 겁니다. 그러면 라이프니츠 중에서 철학가들이 제일 당황해하고 난처해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은 모순과 굴곡 가능성이란 이론을 펼칩니다. 성경해석하면서.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잖아요. 그것부터 라이프니츠는 시작하는데 적어볼게요. 어렵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다.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 이 두 개가 같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립이 안 되지요. 이게 문제라는 겁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다면, 아담은 죄를 지을 수 없다가 돼버리죠. 아담이 죄를 지은 상태에서 아담이 죄를 못 짓게 되죠. 이런 사이를 모순이란 한다. 모순이란 말을 제가 이야기하면서 여러분 표정이 너무 어두우니까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철학적 용어는 들어갈수록 더 어렵게 돼요. 쉽게 하겠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는 순간에 아담이 죄를 짓지 않는 게 되지요. 아담이 죄를 짓는 순간 아담은 죄를 못 짓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돼버리면 하나님도 아담한테 못 이긴 게 돼요. 내가 죄 짓는데 대해서 하나님이, “너한테는 못 당하겠다.” 이렇게 돼버린다고요. 그러면 뭘 놓치느냐 하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놓치게 돼요. 전능하지 않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인간과 협상하고 타협하는 하나님이 돼버립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려고 하면, 나서지 못하고, “제발 부탁이다. 죄 짓지 마라.” 이렇게 오히려 인간한테 매달리는 나약한 하나님이 돼버리죠. 전능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전능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 진리를 구축하고 우주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신은 혼자서 해낼 능력이 없는 무능력자가 되고, 무능력자니까 자기가 만든 인간이 필요해서 인간의 도움으로 신은 제대로 된 창조, 세상을 운영하고 있다는 논리가 되고 마는 겁니다. 실제로 많은 신학자들이 말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라고 하면서 아담이 죄를 짓는데 있어서 하나님도 어쩔 수 없었다는 쪽으로 해석을 해버린 겁니다. 왜 그렇게 해석을 해야 되느냐 하면(그 당시 신학자들이), 아담이 스스로 자유의지로 죄를 지어줘야 효과 있게 심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던가요? 심판을 하려면 본인 책임이 돼야 심판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심판하려면 본인 책임이 돼야 되고 더 나아가서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아야 돼요. 예를 들면 물이 선악과라고 합시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심어놓고 따먹지 말라고 분명히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걸 따먹었어요. 따먹고 난 뒤에 네가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따먹었으니까 네 책임이고 네 책임에 대해서 내가 처벌을 가한다. 이게 얼마나 합리적이고 자연스럽습니까? 참 자연스럽지요.

그렇게 되면 라이프니츠의 생각에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에 대해서 어떤 위반자가 나오지 않는 이상은 하나님의 벌칙이 무색해진다는 이야기에요. 하나님의 자존심이 상해버리는 겁니다. 라이프니츠 말고 보통 사람은 말씀에 순종할 때 자존심이 산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라이프니츠 생각은 그게 아니고 인간이 순종하면 벌칙을 내린 하나님이 너무 오버액션한 거예요.

막 태어난 아기한테 “아기야, 아빠 차 운전하지 마. 운전하면 때찌 할 거야.” 이런 이야기할 때 옆의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 사람이 미쳤나?” 이럴 것 아니에요. 얘가 할 수 없는 것으로 그걸 다짐할 필요가 있습니까? 갓난애가 무슨 운전을 해요. 아직 기지도 걷지도 못하는 게. 그러니까 그 아빠가 부질없는 짓을 한 거예요. 그럴 때 다른 사람이 그 아빠를 얼마나 놀리겠습니까? “아버지가 정신이 나간 모양이다. 얘한테 할 소리가 아니지.”

라이프니츠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그것도 하나님이 할 소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마귀가 할 소리입니까? 그건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했다면 하나님이 우리가 보기에 할 필요도 없는 소리를 했다는 말은 우리 쪽에서 하나님의 생각에 대해서 뭔가 오해했다는 거예요. 어떤 점에서 오해냐 하면, 하나님이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은, 반드시 선악과 따먹어서 그래서 벌칙 받아서 내가 따먹지 말라고 한 하나님이 사전에 한 조치, 하나님의 자존심을 높여달라는 취지로 따먹지 말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래야 말이 된다는 겁니다.

여학교에 가서, “너희들 가운데 서서 오줌 누는 사람은 때찌 할 거야.” 이러면 웃을 일이란 말이죠. 누가 여자가 서서 오줌을 눕니까? 앉아서 눌 거잖아요. 그처럼 너의 도움 없이는 내가 벌칙 내린 자존심이 안 사니까 제발 벌칙이 벌칙답게 저항이 저항답게 어떤 활동을 해주십사하는 요구가 돼버리면 이것은 하나님이 홀로 전능하심이 깨진다고 본 거예요. 사람의 협조 없이는 주님의 전능하심이 등장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심 자체가 독자적으로 등장할 수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 일에 파트너가 없으면 일을 못한다? 그건 전능하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건 역시 물리학인데 뉴턴은 말하기를 절대 공간, 절대 시간을 이야기했어요. 절대 시간이란 것은 여기서 15억 광년에 있는 사람의 시계의 초침과 15억 광년 떨어진 여기 있는 사람의 초침이 같이 움직인다는 겁니다. 시간의 1초가 동일하다는 거예요. 동시성이죠. 뉴턴의 절대 시간에 의하면. 그래서 우리는 뉴턴의 절대 시간에서 절대를 빼버립니다. 그냥 시간으로 보지요.

구원과 시간의 연관성이라는 글을 쓰니까 반대하는 글이, 이광호 목사가 낸 책이 있어요. 거기에 보면 박길현 목사가 반대한다는 글을 썼어요. 인터넷에 올라와있어요. 내용이 뭐냐 하면 이근호 목사는 시간으로 구원과 연관했다는 거예요. 박길현 목사가 사용한 시간이 바로 아인슈타인 시간이 아니고 흔히 아는 뉴턴적 시간관을 갖고 있는 거예요. 본인이 시간을 언급하면서 그렇게 사용하는 거예요.

성경에서 시간은 세 가지라 했지요. 카이로스(때), 아이온(세대), 그 다음에 보통 흔히 말하는 크로노스, 과거-현재-미래로 흘러가는 그 시간, 세 가지 시간관으로 성경에 나오잖아요. 제가 미국 버지니아 강의에 보면 목요일 강의에 올려놨어요. 우리는 흔히 시간이라 하면 앞에 절대를 붙여도 돼요. 멀리 있어도 같은 시간에 있다. “너, 왜 시간 되서 안 나오노?” 이 말은 시간이 간다는 뜻으로 한 거예요.

그 다음에 절대 공간이라 하는 것은, 더 난해한 이야기에요. 절대공간이란 말은 뭐냐 하면, y=ax+b 좌표에서 y=3이고 x=4, 이 지점을 A라고 하면 좌표가 (4, 3)이죠. 물어봅니다. 이 4와 3이란 지점에서 또 다른 지점이 있습니까? 여기 물병이 있는데 이 물병이 있는 자리에 다른 게 이 자리를 점유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이미 차지했잖아요. 차지했는데 누가 차지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게 절대 공간개념이에요. 절대 공간개념에서 우리는 절대를 빼버린 거예요.

공간이란 말은, 내가 여기 있으면 내 자리고, 너는 내 옆에 있든지 아니면 위에 있든지, 아래에 있든지. 내 위에 있다는 말은 z좌표가 나오기 때문에 딴 이야기에요. z좌표를 하게 되면 (4, 3, 5)에 누가 차지한다면 그 자리를 누가 차지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내 위에 있다면, (4, 3, 6)이 되는데 이건 안 되잖아요. 한 지점에는 하나만 있다는 것이 뉴턴의 생각입니다. 맞아요, 틀려요? 이게 상대성원리에서 틀린 거예요.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동시성이란 말을 해서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왜 이런 발상들이 자꾸 나오느냐 하면, 현대과학에서 양자는 이미 남의 이야기, 과학자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나노 산업이 되게 되면 여기는 양자개념이 있고 앞으로 양자컴퓨터이란 게 등장하게 되면 현재 컴퓨터보다 속도가 수억 배 빠른 게 튀어나와요. 양자개념에서는 관찰하는 본인이 측정기구, 관찰기구가 전자의 운동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우리가 관찰하는 순간 내 의식이 요구하는 대로 그것이 변화가 일어난다니까요.

그래서 쉽게 말해서 이런 겁니다. 엄마 없을 때 아빠가 와서 아기 보고, “네가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하는 순간 걔는, “아빠가 좋아.” 이렇게 해요. 아빠 뒤에 숨어있고 아빠가 안 보이는 상태에서 엄마가, “네가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엄마가 좋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결국 얘가 아빠, 엄마를 고르는 것은 뭡니까? 질문자에 따라서 바꿔지는 거예요. 양자란 인간의 관찰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양자로부터 늘 관찰 받고 심사받는 입장에 있거든요.

아까 라이프니츠가 단자에는 창문이 없다고 이야기했지요. 소통하는 창문이 없다고 했는데 정확하게 말해서 단자 자체가 창문이에요. 인간은 창문뿐이에요. 현대물리학으로 보면 양자가 지 마음대로 왔다갔다해요. 전자라는 게 소립자가 또는 광자(빛의 입자)가. 라이프니츠는 이야기합니다. 한 지점에 둘, 셋, 넷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아담은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은 하나님에게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담으로 하여금 죄를 안 짓는 가능성보다도 짓는 가능성을 아담의 단자를 통해서 펼쳐낸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아담이 자기 인생에 대해서 관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관여할 수 없지요. 왜 관여할 수 없느냐 하면,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아담 자체가 셀프가 아니고 에고기 때문에 그래요.

에고를 뭐라고 했습니까? 몸이 있고 몸에서 나온 이미지라 했지요. 그러니까 에고는 실체가 없어요. 우리 몸이 있을 뿐이에요. 현재 있는 몸을 나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 나라는 것이 실체가 없어요. 그냥 이미지라니까. 피어나는 부대효과에 불과한 거예요. 그럼 나라는 것이 언제 사라지느냐 하면, 잠잘 때, 졸도할 때, 충격 받아서 의식이 없을 때.

“영철아, 영철아.” 하면 일어납니까? 몸을 흔들어 깨우지요. 만약에 두뇌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합시다. “영철아.” 하면, “누구시지요? 제가요? 제가 영철이에요?” “정신 차려라. 왜 이렇게 됐나?” “내가 뭐 어때서요?” 이건 교통사고도 그렇지만 저나 여러분이 나이 한 팔십 쯤 되서 치매 걸리면 모른다니까요. “할아버지, 저 유나에요.” “유나가 누구지? 몰라.” 드라마 <유나의 거리>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인간은 몸이에요. 몸이 전부에요. 에고, 나란 만약에 뭔가에 부딪치면 한꺼번에 날아가 버려요. 그러면 인간이란 내가 뭘 하는 것이 아니고 몸이 하고자 했었지요. 장발장 보세요. 배고프니까 나는 저걸 먹으면 도둑이 된다는 걸 알잖아요. 하지만 내 몸이 빵을 훔쳐서 교도소에 갇히잖아요.

여러분, 율법을 알기만 하면 죄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 로마서 2장에서 율법을 알기만 해도 의가 된다고 했어요? 율법을 외워도 다 알아도 그걸 성경대로 살지 않으면 죄가 되지요. 그러면 성경을 안다는 자체가 이게 의가 됩니까? 그건 의가 안 되잖아요. 성경을 안 상태에서나 모르는 상태에서나 무조건 성경대로 안 살면 죄가 되는 거예요. 처음부터 인간의 몸이 죄가 된다면 죄가 되고 난 뒤에 율법을 줬다는 말은 뭡니까? 이미 죄인 된 그 죄를 이제는 확인차원에서 그 다음에 말씀이 주어지는 거죠. 그런데 인간은 몸이 우선이 아니고 나를 위해서 내 몸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나를 죄인 만들게 하는 그 말씀을 안 보고 싶어요. 교회도 안 나가고 싶어요. 설교도 듣기 싫어해요. 왜? 나는 잘났으니까.

얼마 전에 우리교회에 어떤 부부가 오셨는데 분명히 부부가 왔어요. 아내는 교회에 들어오고 남편은 예배 끝날 때까지 차에 앉아있는 거예요. 들어오라고, 들어오라고 식구가 아무리 해도 안 들어와요. 왜 안 들어오지요? 교회가 왜 싫은 거죠? 그 사람 상식에 의하면 교회는 신의 말을 하지요. 신의 말을 하면 본인이 당당해요, 뭔가 부족한 게 많습니까? 신의 말씀 앞에 인간은 부족한 게 많지요. 부족한 게 많으면 자기는 졸지에 회개할 거리가 많고 죄인 되지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차에 앉아있는 그 몸이 교회에 앉아있다고 달라져요, 안 달라져요? 안 달라지지요. 선악과 따먹기 전의 몸이나 따먹고 난 뒤의 그 몸이나 맨 아담의 같은 몸이죠. 그런데 뭐가 달라졌어요? 부끄럽다고 아담이 자기를 가렸잖아요. 그러면 선악과 따먹기 전에 왜 안 가렸지요? 어디서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몸의 변화에요, 어디의 변화에요? 자아의 변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자아가 발생되면서 “내가 따먹은 것은, 하나님이 주신 저 여자가 따먹으라고 해서 따먹었습니다.” 여자가 하는 말이, “내가 아니고 저 뱀이 따먹으라고 해서 따먹었습니다.”

뱀 집어넣은 하나님 책임이고, 잠잘 때 갈빗대로 만든 여자 책임이고. 결국 내가 아니라 여자 책임이라는 거예요. 하지만 그 몸은 그 몸이에요. 그냥 무화과 나뭇잎 벗기면 똑같은 몸이에요. 우리의 몸은 주인을 찾아가야 되거든요. 우리의 몸은 우리의 소속, 주 되신 주인한테 가야 되는데 주인에게 가는 길을 마귀가 차단시켜버렸어. 마귀가 선악과 따먹어서 주인과 우리 사이에 나가 있어서 하나님께 가야 될 몸이 중간에 누가 가로챘습니까? 마귀가 시키는 대로 이미지라는 있지도 않은 나라는 허상이 내 몸을 가져간 거예요. 이제부터는 내 몸은 내가 관리한다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 자아와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몸과 상대합니다. 몸과 상대하니까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이 계속 죄가 되는 거예요. 이걸 욕구라 하고, 라이프니츠는 지각+욕구라고 본 겁니다. 욕구는 다른 말로 하면 힘이거든요. 무슨 힘? 우리 신체라는 힘, 몸의 힘이 점점 더 성장하고 하나님의 단자에 의해서 발전하고 성장하는 겁니다.

알기 쉽게 말해서 단자는 어떻게 만들어졌느냐 하면,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하나님이 처음에 한꺼번에 만들어버렸어요. 미래까지 포함된 단자를 만들었어요. 어떤 단자는 동물, 어떤 단자는 광물, 어떤 단자는 인간이 되는데 설계도가 펼쳐져요. 그만큼 다채롭지요. 그 모든 다채로움은 결국 단자, 여기에서 나오는 겁니다. 단자가 어떤 것이냐는 살아가면서 아는 거예요.

지각+욕구니까 힘에 의해서 지각이 느껴지는 거예요. 이게 미세지각 같으면 광물, 고차원 지각 같으면 스스로 자기를 반성하는 하나님, 이렇게 되는 겁니다. 결국 남는 건 뭐예요? 이 세상은 하나님, 신의 활력만 충만하고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아시겠지요. 그 다음에 계속 해봅시다. 라이프니츠는 자연세계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윤리까지 언급하니까.

아담이 죄를 지었다. 하는 순간 아담은 죄를 짓지 않을 가능성, 이걸 가능성으로 본다고요. 그건 아담의 단자가 죄를 짓는 가능성을 보인 거예요. 이 가능성은 결코 아담이라는 인간의 가능성으로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없어요. 단자가 펼쳐지니까 아담이 된 거기 때문에 아담 본인 소속의 가능성으로 되진 않아요. 본인 속에 있는 단자의 소속이 되지.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이 단자가 마지막 노리는 것은 하나님 형상입니다. 그럴 때 창세가 1장 26절에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지요. 라이프니츠는 그냥 그걸 그대로 보자 이 말이에요. 그대로 보는 데도 불구하고 라이프니츠 같은 해석이 안 나오는 이유가, 하나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에고가 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으니까 그 다음에 에고가 있으니까 나는 잘났다. 날 건드리지 마. 왜? 하나님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존엄하고 고귀한 존재로 본 거예요.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어떻게 봅니까? 본문 그대로 봅시다. 하나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중요하지 않고 뭐가 중요해요? 단자 속에 있는 하나님 형상이 나보다 중요하지요. 보세요. 똑같은 본문을 두고 강조점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완전히 차이가 나지요. 라이프니츠의 생각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그 중심이 하나님의 전능하심 중심이 아니고 내가 잘났다는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갔다. 지금까지. 라이프니츠 시대뿐만 아니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범죄와 모든 죄악들은 밑을 파보면 결국 내가 잘났다는 겁니다.

고속도로 주유소에서 기름 넣고 외상 하자고 할 때 안 해주니까 차 세워놓고 편의점에서 담배 사고 담배 값은 나중에 준다고 하자 안 된다고 하니까 휘발유를 과자봉지에 붓고 불질러버렸어요. 오늘아침 뉴스거든요. 그래서 도망가니까 직원들이 붙잡았어요. 왜 불 질렀느냐고 하니까 횡설수설하고. 정신병자 비슷하지요.

라캉은 말하기를 정신병이란 자기 에고를 보여줄 이미지를 못 만들었을 경우를 정신병이라 했어요. 참 재미있는 말이에요. 정신병이란 자기 잘남을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를 따로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걸 갖고 오고자 노력하다보니까 그게 남한테 피해를 준다는 겁니다. 그 말은 모든 인간은 어떤 경우에는 정상이다? 자기를 대체할 이상적인 모델이 있을 때 그 사람은 정상인 것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라이프니츠 경우에 정상인은 뭡니까? 하나님 형상대로 펼쳐진다는 게 정상이죠. 그러나 현대인들의 정상은 뭐냐 하면, 나는 나다를 증명할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 정상인처럼 행동하고, 이미지 없으면 이미지를 찾아 헤매다보니까 정신병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이래나 저래나 이 세상에 정상인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전부 착각과 위선자로 살아가는 겁니다. 제대로 위선을 갖추면 정상인이고 제대로 자기를 위선할만한 것을 못 갖추면 난동을 부리는 거예요. 난동을 부릴 수밖에 없지요.

집에서 놀면 사람이 우울증 걸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바깥에 뭐가 보입니까? 남이 갖고 있는 이미지를 모델로 할 수 있거든요. 그 많은 수천 가지 이미지 가운데 자기 이미지가 없는 거예요. 없으니까 내가 저 사람처럼 될까, 이 사람처럼 될까? 자기 것이 없으니까 자기 이미지를 못 가지니까 미치는 거예요. 그런데 직업을 갖게 되면 어디에 몰두합니까? 돈을 벌지요. 인간은 돈을 버는 순간 내가 누구냐를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내가 생각 안 하니까 정신병 안 드는 거예요. 우리는 몸이 가는 대로 예, 예, 뭘 해드리면 될까요, 이러면 되지

만약에 여러분이 커피점의 아르바이트한다면, “나는 누구야?” 이럴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어서 오세요. 아메리카노? 알겠습니다.” 그 시간만큼은 구태여 나의 이미지를 가질 필요가 없다니까요. 우리는 남의 일을 할 때 기계가 되거든요. 단자가 기계가 되니까 미세지각 같아. 그냥 자아는 날아가 버리고 몸만 당기는. 하다보니까 화장실 갔다고 오고 또 일하고. 인간이 아니올시다. 일하는 순간만큼은 인간이 아니에요. 그러다 집에 가서 퍼지게 되면 나는 왜 이렇게 살지? 존재의 이유에 나오는 가사처럼, 난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야?

라이프니츠는 말합니다. 그게 인간의 신앙이냐고 묻는 거예요. 그게 신을 믿는 사람의 태도냐 이 말입니다. 라이프니츠의 이런 이야기가 다 일리가 있지요.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고 전능하심도 자기가 이용해먹고자 하는 그런 전능하심밖에 모르니까 자기로부터 출발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스피노자가 이야기했지만 비현실적이라는 거예요. 자기 체계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한 것 다시 해봅시다. 하나에 개체가 있으면 이 개체는 다른 사람과 상호관계를 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아르바이트 하는데 손님이 찾아왔다. 손님 찾아오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맞추게 한 거예요. 이 말은 손님이 안 올 수도 있는 문제인데 왔다는 겁니다. 이거는 실체만 보지 말고 실체 뒤에 있는 그림자까지 합쳐서 봐야 제대로 된 전부를 보는 것으로 봅니다. 나타난 것 말고 나타나기 위해서 나타나지 않아야 될 것을 겸하여 합쳐서 봐야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된다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감사가 이어지지요. “내가 예수 믿었다.”고 하면 감사가 안 돼요. “믿게 하셨습니다.” 해도 감사가 안 돼요. “안 믿어도 되는데 왜 믿게 하셨습니까?” 하면 감사가 되죠. 안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는데 주께서는 특별히 믿게 하셨기 때문에. 그것도 창세전에

라이프니츠 철학으로 성경해석하면 다 맞는다고 라이프니츠는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그야말로 말로만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그동안 말로만 한 하나님 중심이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세상에 살다가 힘들잖아요. 주여, 모든 걸 버리고 이제 신을 찾아 나왔습니다. 이렇게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이게 하나님 찬양하는 게 아니고 그건 다양성에서 하나로 모으잖아요.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되고 그냥 더 다양하란 말이죠. 있는 자리, 낮은 곳에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란 말이죠. 하면서 그 속에서 피어나는 다양성 그 자체 속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안 해도 되는데 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와 찬양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하여튼 우리 공부를 보면, 스피노자가 말하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고, 데카르트가 말하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하면 다 일리 있는 것처럼 보이고, 칼빈, 루터가 말하면 다 맞는 것 같지요. 라이프니츠 다음에 존 로크 나와요. 존 로크가 뭐라고 말하는지 여러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라이프니츠의 입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안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만 발현했다. 그것만 가능성 있게 나타내었다고 본 겁니다. 이 말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이제 더 어렵게 나가 봅시다. 진짜 어려워요. 만약에 2014년 11월 11일 내가 예정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칩시다. 예정되었다고 아는 가능성이 있는 순간 2014년도 5월에 내가 예정 안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때는 오늘 예정되었다는 것이 무효가 되는 경우가 생기겠지요.

구원파 같으면 이미 예정되었기 때문에 예정대로 끌고 나가겠는데 이렇게 끌고 나가면 단자가 죽어요. 단자는 계속 발현되는데 2014년도에 펼쳐지는 단자에서는 내가 예정된 걸로 나오는데 2015년도 5월에 단자에서 발현되는 예정 안 된 걸로 나왔을 때 도대체 예정됐는지, 안 됐는지 그 문제를 어떻게 결정해야 됩니까?

성경을 볼 때 전에는 분명히 어떤 말씀이 믿어져요. 내 죄를 용서받았다는 게 믿어지는데 믿어져서 목사 되고 독일 가서 박사학위 받고 신학교에서 교수로 학생들 가르쳤는데 25년 뒤에 예수의 피로 죄 씻는다는 것이 그 당시 유대문화에 의한 사도 바울의 사적인 견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 교수는 예수 믿는 사람이에요, 안 믿는 사람이에요? 처음에 목사 되고 독일유학에서 신학박사 받을 때는 누가 뭐래도 예수 피 믿는다고 했는데 공부를 계속하다보니까 이것이 사도 바울의 사적인 종교심이고 사적인 의로움이고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하고 이걸 전 우주의 역사에 걸쳐서 적용한다는 것은 너무나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이란 생각이 들 경우에 신자겠어요, 신자 아니겠어요?

신자이다, 아니라고 했던 그 기준 자체가 적용이 안 되지요. 새로운 기준이 또 새롭게 마련돼야 되지요. 어떻게? 꼭 신자 될 필요 없지.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면 그것 때문에 고민할 필요도 없겠지요. 전에는 꼭 신자가 돼야 천국 간다고 여겼던 것이 만약에 1980년도라면 2014년도 신학교수하면서 꼭 신자 되나 안 되나 인간은 예수 믿으나 안 믿으나 죽으면 그만인데 흙이 되면 의식도 날아가 버리는데 괜히 그동안 신자 된다는 것은 대학교수하기 위해서 밥벌이하기 위해서 신자인 것처럼 했지만 따지고 보면 늙어 죽어가면서 자기 혼자 있을 때 신자라고 할 필요 없잖아요.

이제는 용기 생겨서 커밍아웃하듯이 나는 그동안 신자인 척했지 사실은 신자 아닙니다. 여러분, 신자 아니라면 겁나지요? 저는 그걸 초월했습니다. 전에는 신자 아니라면 겁날 줄 알았는데 지금 제 경지에 이르게 되면 신자 안 되도 편안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천국 본 사람 없고 사도 바울이 천국 봤다는 것은 개인적 체험이지 우리한테 적용시킬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진리의 전부입니다. 오늘부로 신학교 은퇴합니다. 학생들 그동안 고마웠다. 나한테 속아줘서.

제가 예상한 이런 일이 계속해서 점점 더 확대되고 있습니다. 전에는 신자 아니면 겁났는데 이제는 당당하게 커밍아웃해서 신자 아니라도 행복할 수 있다는 그런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목사, 신학교수들 한둘이 아닙니다. 한둘이 아니고 내가 보기에는 거의 100% 같아. 신학교 교수, 목사 되서 “신자 아니면 안 돼.” 이렇게 고민하는 사람? 100% 너무 심했나? 그럼 좀 자릅시다. 99.99%로 합시다. 천 명 중에 한 명이나 신자 안 되면 겁난다 하지 그 외에는 별로 겁도 안 낼 건데요.

왜냐하면 성경을 그만큼 많이 보고 설교를 많이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고 예수란 분이 이미 돌아가셨고 지금 일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낌상 아는 게 아닐까? 이것 다 아는 사항 아닙니까. 바로 라이프니츠는 그런 것을 꿰뚫어보는 겁니다. 뭐가 신자냐 할 때 “나, 예수 믿습니다.”라는 말을 안 믿어요. “너, 내년 돼봐야 알아.” 내년 됐잖아요. “너는 육년 뒤에 봐야 돼.” 육년 됐잖아요. “네가 죽기 전에 봐야 돼.” 죽을 때 됐잖아요. “죽을 때 헛소리하는 건지 진심인지 인정 못해.”

그럼 아무도 신자라는 그 자체에 대해서 동의할 필요도 없고 믿을 수도 없는 거예요. 라이프니츠는 이야기합니다. 왜 그 사람들의 고백을 믿느냐 말입니다. 헛소리를 믿느냐는 말이죠. 믿으려면 뭘 믿어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어야 되지 않느냐? 그게 신자 아니냐? 오늘 라이프니츠 공부하면서 우리가 도전받는 게 그겁니다. 내가 이런 고백을 했고 몇 년 전에 이렇게 은혜를 받았다고 끄집어낸다면 다른 단자가 웃는다는 거예요. 개나 소나 웃는다는 거예요. 실제로 바리새인들이 우리는 하나님 백성이라고 할 때 누가 비웃었습니까? 돌들이 웃지요. 세례요한이, 너희들이 신자라고 천국 간다면 이 돌들도 천국 간다고 이야기했잖아요.

그런 모든 사고방식이 어디서 나왔느냐? 라이프니츠가 말하기를 그 모든 것은 자기가 이야기한 전능하심에 기초해서 성경에서 그런 이야기했다. 주님의 전능하심에서 철저하게 인간 자신의 자유의지나 선택을 배제해버린 거예요. 그럼 남는 것은 뭐만 남는다? 예정, 그렇게 신자라고 했다가 신자 아니라고 했다가 그 다음에 신자라고 했다가 아니라고 했다가. 그런 건 전부 다 예정조화설, 예정된 사항이에요. 그럼 결국 뭘 믿어라? 내가 가르치는 예정조화설을 믿으면 그러면 너는 신자 된다. 결국 이런 이야기죠.

아까 제가 언급한 그것 다시 끄집어내보겠습니다. 라이프니츠는 인과관계가 없지요. 인과관계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한테 영향을 줄 수 없다는 말은, 이미지에 불과한 내가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줄 수 없어요. 왜냐하면 내 속의 단자(모나드)가 펼치는 대로 될 결과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내가 나한테 영향을 줄 수 없지요. 내가 신자라는 말이, 내년되면 바뀔 가능성이 많고, 이건 바뀔 가능성이 아니고 내가 신자라고 한 5분 뒤에 내가 신자라는 느낌이 유지돼요, 유지되지 않아요? 유지되지 않지요. 유지되지 않으니까 본인이 답답한 거예요.

전에는 한 때 예수 믿었거든요. 예수 믿었다는 기억은 나는데 지금 예수를 안 믿으니까 방법은 옛날 믿었다는 그 감정을 지금 다시 억지를 써서 만들어내야 되지요. 만들어내서 지금 신자임을 확증을 지을 때 안심이 되겠지요. 기도원에 간다든지 부흥회를 한다든지 옛날에 앉았던 자리에 앉는다든지 옛날에 불렀던 찬송가를 불러본다든지. 불러보면 그 느낌이 납니까? 안 나지요. 왜냐하면 단자는 펼쳐지니까. 한 번 펼쳐진 것은 뒤돌아가지 않아요. 계속해서 펼쳐지거든요.

여기서 라이프니츠가 준비한 필살기가 있습니다. 그게 아까 이야기했지만 자기반성이에요. 시간이란 내가 옛날에는 잘못했는데, 잘 들어보세요. 마지막 제일 중요한 겁니다. 내가 전에는 잘못했는데 지금은 반성한다. 그 반성이 아니고 내가 잘못했을 때 잘못한 그 기준이 있을 게 아닙니까. 그리고 모든 사람의 평가에는 반드시 뭐가 있어요? 모델이 있을 것 아닙니까. 2013년도 5월에 써먹은 모델과 기준을 2014년도 오늘 써먹을 수 있습니까? 써먹을 수 없다는 거예요. 왜? 그때 내가 나를 판정했던 그것마저 같이 달라지지요. 그렇다면 그때는 참 잘했어요, 했던 것이 2104년 지금 보기에는 미흡하거나 모자람이 당연한 거예요.

여러분이 글을 쓰고 설교해보세요. 설교하고 난 뒤에 참 잘했다고 싶지만 다시 돌아서서보게 되면 들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지가 뻔히 알아요. “에이, 그걸 빼먹다니. 에이, 본문 잘못했네.” 이런 생각 들어요, 안 들어요? 그럴 때 보나마다 자책할 게 뻔하기 때문에 부담되는 걸 안 하지요. 잊어버리는 게 좋겠지요. 왜 그것이 할 때는 좋았는데 돌아서면 후회되지요? 새로운 모델과 새로운 기준이 병행해서 등장했지요. 그게 차원 높은 모나드로 단자로 보는 겁니다. 누가? 라이프니츠가.

그러니까 라이프니츠가 보기에 자기 말이 맞는 거예요. 죽을 때 신자다, 신자 아니라할지라도 신자냐, 신자 아니냐를 따지면서 뒤돌아보면서 뭔가 계속해서 반성이 된다면 그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최고 경지의 존재가 된다 이 말입니다. 문제 해결됐지요. 문제 해결 안 됐어요? 표정들 보니까 뭔 뜻인지 모르는 이야기에요?

지금 내가 계속 반성하는 것, “나는 오년 전의 믿음이 최고야.” 이에 멈추는 게 아니고 “그게 과연 그게 최고였을까?”라고 반성한다는 것은 뭘 의식한다? 내 속에 단자 있음을 의식하고 단자는 뭐다? 하나님이 날 창조했습니다. 그냥 창조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날마다 하나님이 전능하심으로 다른 가능성 말고 예수 믿는, 하나님 믿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아는 가능성을 하나님 스스로 나에게 펼쳐내는 결과로 내가 알게 되었다면 그것이 하나님이 원했던 최고 경지의 하나님의 백성 맞는다는 말입니다. 그게 라이프니츠의 생각이에요.

끝으로 이것만 물어보자. 이게 복음입니까, 복음 아니에요? 오늘 답변을 안 하니까 내 단자가. 복음 아니지요. 왜 복음이 아닙니까? 그렇지요. 계속해서 두 시간동안 하나님과 인간 이야기했지요. 이스라엘 언약이 뭡니까? 성령이란 중보자를 만나지요. 중보자 이야기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없으니까 복음입니까, 복음 아닙니까? 복음 아니지요. 복음 아닌데 우리가 이 공부를 왜 합니까? 바로 오늘날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날마다 우리 속에서 십자가를 외면하고 결국 십자가를 언급하면서 빼고 나에게 집중하는 이 모습을 라이프니츠한테 걸려든 거예요.

라이프니츠와 우리는 같은 아담의 몸이잖아요. 그는 연구를 많이 했고 우리는 연구를 안 해서 그렇지만 따져보면 우리 몸이 평소에 뭔가 접혀져 있는 육적인 모습이 그대로 펼쳐진 거죠. 이래서 나는 중보자 빼놓고 십자가 빼놓고 내가 이렇게 생각하니까 신자 맞는다는 그 허점을 라이프니츠를 통해서 우리가 미리 맛본 겁니다. 다음 시간에는 존 로크 해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라이프니츠 생각이 사실은 평소에 잠재된 우리 생각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의미가 새롭게 우리에게 덮쳐지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141111b 부산강의.hwp (53.5K), Down: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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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8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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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