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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41107b 울산강의-출애굽기 32장 : 생명책자유게시판출애굽기

20141107b 울산강의-출애굽기 32장 : 생명책

이름 : 한윤범(IP:119.192.174.28)

20141107b 울산강의-출애굽기 32장 : 생명책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 끝에 다소 난해한 이야기했지요. 구약에서는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다. 그런데 그 말이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틀린 말이기도 해요. 우선 틀린 경우부터 이야기할게요.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절대로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게 맞는 말이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지워진다고 했잖아요. 이걸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껍데기 속에 알맹이가 들어있어요. 껍데기를 껍데기로 드러내면서 알맹이가 알맹이로 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워지는 생명책이 껍데기라면 지워지지 않는 생명책이 진짜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책은 그냥 생명책이 아니고 앞에 뭔가 붙어야 돼요. 어린양의 생명책. 예수님이 오셔서 생명책 명단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지워지겠네요? 그게 맞는 말이 아니라니까요. 그게 틀린 말일 수도 있고 맞는 말인데 왜 틀린 말이냐 하면, 누가 구원받는지는 창세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틀린 말입니다. 이렇게 정리합시다. 창세전부터 이미 택정한 자는 생명책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구약에서 생명책에서 명단이 지워져야 된다. 이러면 맞지요. 아까 모형이야기로서 충분히 이해됐지요.

그러면 그렇게 작업하는 이유가 뭐냐? 인간은 하나님이든 누구든 간에 뭔가 개념이나 단어 의미를 줘버리면, 그것이라도 붙들고 자기를 천국에 구원받으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그걸 들춰내기 위해서는 하나님도 그 방식 속에 인간의 언어로 그들 세계 속에 잠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네가 죄 지어놓고도 나와 동행하고 싶으냐? 그렇다면 나는 그런 자를 용서하지 않고 책에서 지워버리겠다.” 그런데 그 말씀 자체도 문제되는 게 지워버리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다면 그 사람은 지워질 사람입니다. 지워버리겠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생명책에 남아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뜻이에요. 한 명도 없는데 결국은 나중에 천국 가니까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만 다 천국 오게 돼있어요. 누가 그 이름에 대해서 책임졌습니까? 어린양 되시죠. 모든 구약, 신약 전체가 예수님의 활동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구약은 모형으로 그림자로 사용하신 겁니다.

첫째 시간에 한 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출애굽기 32장 자체가 이상한 거예요. 어떤 점이 이상하냐 하면, 기회도 주지 않고 벌부터 내린 셈이 되지요. 그들은 된 통으로 무지막지하게 당한 거예요. 그리고 모세가 성질을 내지 말고 돌 판 지가 부수지 말고, 돌 판을 모세가 부셨잖아요. 결국 모세 행동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자기가 성질 못 이겨서 돌 판 던져놓고 그 책임을 산 밑에 있는 사람한테 돌린 셈이 돼버려요.

그것이 인간들 사회에서는 굉장히 잘못된 거잖아요. 흔히 아버지가 자식들 생각하면 도저히 못 참겠다고 자식들 공부 못한 걸 핑계로 혼자 포장마차에서 소주 두 병 먹고 들어오자마자 티비 깨놓고 티비는 너희들 때문에 깼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거든요. 무슨 그런 무지막지한 억지가 어디 있어요. 지금 그 억지를 모세가 쓴 거예요. 모세가 이런 억지를 썼다는 말은 기존에 인간들이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에 관한 내용은 진짜 하나님한테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은 거예요. 진짜 하나님에 대해서 완전히 정반대고 모르는 거예요.

그 무지몽매한 자를 주께서는 구원하겠다는 거지요. 그런데 무지몽매한 자를 구원하겠다는 말이 아니고 무지몽매한 걸 드러내서 구원하겠다는 말이거든요. 제가 말을 하면서도 장난치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요.

무지몽매한 너희들을 구원함이 아니고 무지몽매함을 구원한다니까요. 신종어다, 신종어. 그 무지몽매함이 귀한 거예요. 어느 누구도 무지몽매하지 않은 채 구원받은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베드로도 그렇고 누구나. 사도 바울도 그렇고. 사도 바울은 사도되기 전에 얼마나 똑똑했어요. 하지만 주님 보시기에 무지몽매한 자지요. 왜? 눈이 안 열렸으니까, 주님을 못 알아봤으니까.

그 죄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와 관련시켜서 바로 자기가 가져온 넘겨받은 그 죄에 대한 사람들을 구원해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다. 그러면 죄인을 부르러왔으면 죄인은 몽땅 다 구원하셔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에요. 엘리야 시대 기근 때 그렇게 과부가 많았으되 오직 한 사람만 데려간다. 많다는 말을 끄집어내지나 말지 괜히 많다고 이야기해서 다른 과부들까지 마음 설레게 만들어놓고, “과부 어디 있어?” “여기 있습니다.” “손 내려. 내가 뽑아.” 그것도 달랑 한 사람만 뽑아갈 때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과부라서 구원되는 게 아니라 과부임에도 구원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죄를 구원하는 거죠. 인간을 구원하게 되면 예수님은 하나에 인간 존재로서 마주쳐야 되는데 인간이 죄의 지배를 받고 있으면 예수님은 바로 십자가 지심이란 기능으로 구원이 성사되는 겁니다. 십자가 지심은 다른 말로 희생이죠. 희생인데 앞에 뭘 붙인다면, 대신 희생하심. 대신 희생하심이 없으면 예수님이라도 주님이 아니에요.

성경에 보면 그런 게 나오지요. 아무리 아들이지만 아들이 곧 주는 아니에요. 뭘 해야 됩니까?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주가 돼요. 그래서 하시는 말이, “주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지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할 때 예수님 존재 자체가 주가 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해야 될 아버지의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주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어떤 인간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갖고 있던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와 연관이 될 때 구원되는 겁니다. 이 말은 인간은 구원되지 않습니다. 다만 구원시켜 줄 때 구원될 뿐이죠.

우리는 주체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됩니다. 물러나서 아예 가시면 안 되고요. 어떤 사람은, 십일조 해서 구원 못 받는다고 하니까 아예 십일조 안 하는 사람이 있어요. 아예 물러가지 말고 저 끄트머리에, 결과에 있어야 돼요. 십일조를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우리 자신이 십일조가 되게 주께서 그런 조치를 했지요. 십일조하지 말라는 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지요. 우리 자신이 십일조니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주께서 조치를 내리신 거예요. 무슨 양념을 쳤어. 닭갈비에 소스를 발랐어요. 피를 발랐어요.

그 피로 말미암아 구약에 있는 모든 말씀들, 십일조고 안식일이고 우리 자신이 주님 말씀에 합당한 사람이 된 겁니다. 이건 횡재한 것이고 이거는 특혜입니다. 진짜 이런 특혜가 없어요. 우리가 목숨을 잃는다할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맙시다. 이런 특혜 받았으면 목숨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됩니다. 그딴 것 아무것도 아니에요. 받은 기능이. 죽어도 괜찮아요. 죽은 우리를 다시 살릴 능력이 그 특혜에 있기 때문에.

생명책을 좀더 언급하면 이렇습니다. 생명책은 말라기에는 기념 책이라 해요. 생명책은 누굴 기념한 사람에게만 명단에 있게 되지요. 보통 졸업앨범에 우리 사진이 있는 것은 나를 위함입니까, 아니면 출신 그 학교를 기념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까? 제가 묻는 것은, 여러분 사진이 앨범의 사진뿐입니까, 아니면 따로 찍었던 사진도 있어요, 없어요? 우리 사진도 많지요. 그 많은 사진이 있는데 앨범에 있는 사진과 보통 사적으로 찍은 사진과 차이점이 뭡니까? 앨범에 있는 사진은 우리를 빛내기 위함이 아니고 영광된 이 고등학교 졸업생이라는 학교를 빛내기 위해서 얼굴을 빌려준 거지요.

만약에 그 앨범 속에 이영애나 김태희 나와 보세요. 학교를 얼마나 빛내겠어요. 제46회 졸업생, 이영애 나와 보세요. 얼마나 자랑하겠습니까? 지는 이영애와 싸워놓고 나중에 이영애 출세하게 되면 싸운 것 싹 빼고 그때 친하게 지냈다고 하잖아요. 이번에 미국에 처남이 이영애 부부와 찍은 사진이 있어요. 그걸 자랑질해요. 내가 앉던 소파가 이영애가 앉은 소파였어요.

누굴 기념하지 않으면 구원 없습니다. 그리고 생명책이 확정될 때는 무슨 단계를 거치는데 기념 책이 된 상태에서 생명책으로 넘어가는 거죠. 누굴 기념하겠어요? 그건 아까 학교 앨범 이야기했지요. 우리가 앨범 속에 있는 그 인간, 이영애라면, 이영애가 학교를 빛내겠지요. 그렇다면 그 이영애가 지금 와서 혹시 그 학교 나왔느냐고 물으면, 나는 죽어도 모른다고 하면 뭔가 잘못됐지요. 본인이 나온 그 고등학교를 기념하고 싶지 않습니까? 나는 절대로 그 고등학교를 저주합니다. 이러면 안 되겠지요.

결국 주께서 우리를 그냥 존재로 봐주는 게 아니고 쓰일 기능인으로 줄곧 사용하는 거예요. 누구를 기념하는 것? 바로 너를 대신해서 희생하신 어린양을 기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기념 책에 명단을 집어넣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오늘 본문에서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명단에서 지워진다는 이야기 나오지요. 그러면 그 죄가 우리가 생각하는 죄, 흔히 말하는 남한테 피해준 죄, 사적으로 망상한 죄, 내가 도둑질한 죄, 그 죄가 죄일까요? 아닙니다. 인간은 평생을 살아도 자기 죄에 대해서 몰라요. 그리고 성도는 미처 알지 못했던 죄를 매일같이 내일 되면 또 만나야 되고 만나야 돼요. 평생 우리는 죄를 대하고 만나줘야 우리는 계속 누구를 기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지금까지는 죄 지었는데 성령께서 오셔서 용서받았다면 그때부터 누굴 기념하겠어요? 잘나기 짝이 없는 자신을 기념하겠지요. 그럼 그 학교 이사장 돼. 그것이 마귀의 나라지요. 자기가 선악과 따먹은 티를 톡톡히 내잖아요. 나도 신이다. 너만 신이냐? 나도 신이다.

마귀가 하나님을 신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에요. 야고보서 2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한 분인 줄 아느냐? 귀신들도 믿고 떤다고 돼있지요. 귀신들도 알지요. 문제는 마귀는 뭐냐 하면, 너만 신이 아니고 나도 신이라는 거예요. 신으로 인정해달라는 겁니다. 종교가 없는 게 마귀가 아니고 종교가 있는 게 마귀에요. 왜? 종교를 통해서 신이시여, 내가 신을 섬기니까 나도 신으로 인정해달라는 거죠.

어떻습니까? 힌두교가 그런 게 발달하고 불교도 그쪽에서 발달했는데 천주교도 그런 게 발달돼있어요. 로마서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신이라 하였거늘, 그 대목을 완전히 반대로 해석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신이다. 은근히 뭔가 노림수가 있었어요.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그 날에는 너희가 나와 하나가 된다고 할 때 그 하나가 이 지상에서 볼 때 신성을 갖는 건 맞습니다만 신은 나이에요. 왜냐하면 신이란 의미가 우리가 생각하는 신은, 인간보다 우월하고 절대적인 존재잖아요.

그러나 성경에서 신은 이미 기준이 정해져있습니다. 신이 아니고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느냐가 문제에요. 우리는 내가 어떻게 신이 되느냐가 관심사인데 그 관심사 자체가 주님 앞에서는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소개하는 게 아니에요. 중보자부터 먼저 소개합니다. 내가 있는 곳에 아버지가 있게 하는 방식입니다. 아버지 먼저 알고 덤으로 숟가락 하나 놓는 것처럼, 덤으로 밥 하나 추가하듯이 예수님 하나 추가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게 되면 기존의 밥상 다 엎어버립니다. 밥이 살아서 밥이 횡포를 부려서 기존에 있던 밥상 다 쪼개버립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변화산에서 제자들이 들었던 음성, 너희는 저의 말만 들어라. 예수 그리스도만 보게 돼있어요.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잊자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은 내가 지어낸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꾸 하나님으로 예수님 십자가 앞을 얼쩡거려서 예수님을 하나의 존재로 보는 겁니다. 하나님도 있고, 예수도 있고, 성령도 있고, 나도 있고. 있다, 있다는 존재함으로 계산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게 아니고 너는 죄인의 기능을 하고, 주님은 용서하시는 기능을 하시고, 그 기능과 기능의 만남이에요. 따라서 그 기능에 의해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몰랐던 죄를 내일 아침 되면 죄다 죄가 된 걸 알게 돼요. 내일 되면 내일치의 죄를 또 만나게 되고 그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또 용서하셨다는 걸 깨닫고 그 다음에 또 다음 날 되면 또 새로운 죄가 밝혀집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비타500이 있으면 처음에는 이렇게 맛있으면서도 피로회복 해준다니, 그야말로 힘내세요. 힘낼게요. 이렇게 보던 것이 비타500을 늘 주니까 또 주나. 벌써 죄잖아요. 마음에 교만해졌다고. 찬송가 405장 부르는데 그렇게 은혜 됐는데 나중에 한 달 뒤에 부르니까 3절만 하지 4절까지? 미치겠어. 4절까지 누가 지었나? 4절이 지겨워. 제발 1절만 있으면 좋겠어.

그걸 감안해서 목사는 긴 것 하면 짜증낼까봐 짧은 걸 골라서 하고. 그것도 일년 돌다보니까 짧은 것도 다했어. 그 다음부터 긴 것 하려니까 벌벌 떠네. 3절하고 주무실까 싶어서 노인들 여름에 4절하다 졸기 때문에. 그게 바로 죄거든요. 왜냐하면 예배 안 드려도 구원받는데 뭔가 예배를 잘 드림으로 구원에 기여하려는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깜빡깜빡 자꾸 잊어버려.

또 죄가 뭐냐 하면, 은혜 받으면 얘 공부 못해도 구원받는데 지장 없는데 갑자기 은혜 받고 돌아서니까 아이가 아프다니까 공부 못한다고 패고. 이왕 예수도 믿고 공부도 잘하고 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바로 예수 믿는 나를 기념하는 식으로 되돌아오는 이게 바로 육이에요. 육은 영을 위해서 항상 큰 틀을 이루어서 계속 가줘야 돼요. 육은 계속 육의 티를 내줘야 돼요.

사도 바울도 우리가 예수 믿는 순간 육이 탈락하지 않잖아요. 우리의 옛사람은 있어요. 다만 새사람을 옛사람을 통해서 그 속에서 새사람이 나오면서 새사람과 옛사람이 구분되면 영적 사람이에요. 구분 안 되면 영적 사람 아니고 육적 사람 돼버립니다. 구분할 것 없네. 이래도 육적 사람 돼요. 영과 육이 갈라져 나와야 돼요.

지난 대구공부에서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이명박 전대통령의 4대강사업이 실패했다. 그것과 주께 우리가 영광 돌리는 것과 무슨 관계있느냐고 했어요. 관계없지요. 그런데 돌아서니까 4대강 좀 잘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죠. 항상 짝을 이뤄야 우리가 얼마나 육적이라는 사실, 그러면서도 문득문득 그것과 상관없이 십자가로 영광 돌린다는 걸 안다는 자체가 그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다룰 대상이 아니고 기껏 우리가 뭘 설쳐봐야 내 육을 꾸미고 육을 기념하는 일밖에 안 하지 예수님을 기념한다는 것은 내 소관이 아니고 성령이 와야 마지막 때 다 이루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 안에 장착된 그 십자가 영이 와야 비로소 예수님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고 영광이라는 고백이 우리 입에서 감히 나올 수 있지요. 우리가 실력으로 나오는 게 아니고 감히 이런 게 나오다니, 놀라버리죠.

따라서 생명책의 구조는 이처럼 죄라는 것은 주님의 동행하심의 의미를 모를 때는 그 사람은 삭제됩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의 동행의 의미는 뭐냐? 우리는 뭘 해도 죄가 되기 때문에 동행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차라리 그렇게 하지 말고 동행하는 것도 주님도 귀찮으니까 우리한테 시켜서 시킨 대로 잘 살게 되면 동행하지 말고 못 지킬 때는 투입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어느 말씀도 우리가 지킬 수가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을 줬기 때문에 동행이 필요하지 않는 순간은 한 순간도 우리에게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잠을 잘 때도 동행이 필요해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전쟁할 때 제사를 드리는 것이 율법이죠. 그래서 사울 왕이 블레셋과 전쟁하기 전에 제사를 드리죠. 그 다음에 율법에 제사는 선지자나 제사장이 드려야 되겠죠. 그런데 적들은 코앞까지 쳐들어왔고 백성들은 동요하고 있고 제사 드리려고 하니까 누가 빠졌어요? 사무엘이 오지 않는 거예요. 약속 위반을 사무엘이 했지요. 약속을 안 지켰잖아요. 10시에 한다고 해놓고 12시 넘어도 안 왔으니까. 그래서 답답하니까 율법대로 사울 왕이 제사를 드리고 나니까 그 다음에 무대 뒤에서(일부러 안 나오고 가만있다가) 누가 등장했습니까? 제사 왜 드렸어? 그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이건 왜 그러냐 하면, 미래가 현재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현재가 항상 죄로 전환돼야 돼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어떻게 살아왔던 그게 죄가 돼야 오늘밤에 낙원에 가는 겁니다. 오늘밤에 낙원에 안 가고 죽지 않고 내일까지 살아있으면 어제까지 용서받았다는 그것이 나의 의로움이 돼버리죠. 그러니까 새로운 죄가 들이닥침으로 말미암아 죄 짓기 위해서 우리가 남은 생애를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우리가 미처 몰랐던 새로운 죄를.

그럼 죄 짓는 것을 미리 알고 짓는 죄는 어떻습니까? 미리 알고 짓는 죄는 없어요. 똑같아 보이는 죄도 그 죄를 지면서 새로운 느낌을 받게 되는 게 인간입니다. 그것은 베르그송의 철학에 보면 나오지요. 인간의 지속이라는 게 있는데 인간은 같은 일을 두 번 다시 못해요. 한 사람이 같은 강물에 몸을 담글 수 없습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유명한 철학이지요. 흘러가는 강물은 두 번 다시 올 수 없습니다. 이게 실존입니다. 인간은 늘 달라져요.

세자르란 사람이 산을 그렸는데 200번을 그렸어요. 미쳤어요. 같은 산을 같은 장소에서 200번을 그린 겁니다. 200번의 그림이 다 달라요. 왜 그럴까요?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한 순간도 동일한 순간이 없어요. 이 말은 인간이란 정체성은 그때그때 달라요. 세자르(후기인상파 화가)란 사람이 같은 산을 그리면서 아니야. 이거 아니야. 또 그리고 아니야. 이거 아니야.

모네란 사람인가 프랑스 성당을 그렸는데 아침의 햇빛에 따라서 그림이 다 달라요. 그걸 인상주의. 햇빛에 반사되기 때문에 흐릿하죠. 하지만 색깔은 다 다르지요. 이 말은 결국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자체가 반칙이다. 있는 그대로가 뭔데? 제 글에 그런 게 있었지요. 야구심판 세 사람이 나는 보는 대로 심판한다는 사람이 있고, 나는 있는 그대로 심판한다는 사람이 있고, 제일 마지막에 대답한 사람은, 내가 심판하기 전에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람이 있었고.

어느 글입니까? [신은 죽지 않았다] 그 글에 보면 나와요. 첫 번째 사람이 뉴턴 식인데 나는 있는 그대로 심판한다. 두 번째는 나는 보는 그대로 심판한다. 뭔가 조금 다르지요. 뭐가 다릅니까? 나는 진짜 스트라이크인지 볼인지 그것만 신경 쓰겠다. 두 번째 사람은, 볼인지 스트라이크인지는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 내가 스트라이크면 무조건 스트라이크야.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은 뭡니까? 나는 무조건 너와 달리 한다. 나 말고 모든 것은 다 동일하지 않다는 겁니다. 왜? 나의 동일함만이 내가 채택하기 때문에. 그런데 그 순간이 지나가버리면 또 본인이 어제 순간을 나라고 할 수 있느냐? 없어요. 그게 모든 것은 물결처럼 흘러가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너무 똑똑하시고 훌륭하시니까 이 질문 하나 내겠습니다. 바다 위에 나뭇조각이고 싶습니까, 아니면 이 나뭇조각을 움직이게 하는 파도이고 싶습니까? 인간은 파도입니다. 날마다 달라져요. 나뭇조각이라고 여겼지만 사실은 나라는 것이 물결 속에 나도 하나의 부분으로 이미 포함돼있어요. 내가 나 되는데 있어서 주께서 만들어가는 건 맞는데 그 만드는 과정 속에서 내가 나름대로 이렇게 되고 싶다는 그런 내용이 항상 교류가 되면서 만들어져요.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보면 성경이 다 풀리게 돼있습니다.

선지자가 오지 않아서 내가 제사 드렸다고 할 때 자기는 나라는 인간이 제사 드리는 인간인 줄 알았지요. 하지만 진정한 제사는 뭐가 포함돼야 돼요? 선지자가 없을 때 나라도 드려야지 하는 그 개인의 의사가 포함된 그 죄가, 자기는 죄가 아니죠. 지금까지 제사 드려왔으니까. 하지만 죄는 어디서 온다? 미래에서 와서 현재를 만드는 그것을 몰랐지요. 미래를 가져오는 자는 선지자고 그래서 사무엘은 등장하지 않았고. 사울이 제사를 드린 그 순간에 별에서 온 그대처럼 미래의 사나이로 와서 지적하는 거예요. 왜 내가 오지 않았는데 제사 드렸습니까? 안 왔기 때 드렸다는 말은, 결국 나는 죄가 없습니다. 나는 의롭다는 핑계죠. 그 핑계가 바로 미래에서 볼 때 인간은 뭘 해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몰랐던 죄가 되는 겁니다.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라는 것을 일부러 그걸 허용해요.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놓고 찾아와서 그게 바로 죄라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최선 말고 다른 것으로 인간은 할 수 있어요, 없어요? 못 하지요. 최선이 뭔데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를 했기 때문에 기껏 그 정도밖에 안 되지요. 인간은 기껏 해봐야 죄인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이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분명히 그렇고 죽을 때까지 그런 거예요. 결국 우리가 마지막에 구원받는 것은 십자가의 용서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이야기를 먼저 당겨서 하면 어떻습니까? “그럴 것 같으면 아무것도 안 해야지.” 하는데 ‘아무것도 안 해야지’가 움직이는 파도 속에 포함돼있어요. 아무것도 안 하게 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벌어지면 그 다음부터 우리는 후회하죠. 그때 좀 뭘 할걸. 난 가만있으면 주께서 채워줄 줄 알았는데 양식을 주실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안 하니까 양식도 없어요. “뭔가 내가 움직여서 일을 해야 돈이 생기지 그냥 기도한다고 돈 생기는 게 아니구나.” 하고 나설 때 “진작 그러지 왜 아무것도 안 했어.”

사람들은 나름대로 꼼수를 부려서 내가 뭘 해도 주께서 주신다면 내가 아무것도 안 한 그것도 내 할 일이 된다면 주님 주신다는 계획된 바는 내가 하나 안 하나 줄 거니까 이 참에 회사 그만두고 아무것도 안 해봐야지. 그럼 진짜 아무것도 안 생기지요. 그런 경우가 참 많잖아요.

아브라함이 아들 바칠 때 우리는 드라마를 미리 봤기 때문에 그 옆 수풀에 대신 죽을 숫양이 있다는 걸 알지요. 아브라함은 모르지요. 그냥 아들을 죽일 척했습니까, 죽여 버리려고 작심을 했습니까? 아예 작심을 했지요. 멈추라하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죠. 그래서 아브라함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아들 바친 게 아니고 하나님의 개입이에요.

하나님의 개입의 찬스는 누가 만듭니까? 우리가 만듭니까, 하나님 자신이 만들어요? 하나님 자신이 개입할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버려요.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무지몽매한 가운데 죄 짓는 가운데가 되어야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 이루었다가 개입되는 겁니다. 어설픔 속에 이루었다가 개입되면서 어설픔이 구원하는 게 아니고 이루었다함이 어설픔을 대신 희생함으로 건져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이 어설픔, 박 어설픔, 평생 우리가 어설픈 자로 살아가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념하지 않고 주님을 기념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오늘 32장 끝나면서 물어봅시다. 이스라엘은 ①스스로 살아야 될 나라다. ②주님이 구원해주는 나라다. ③주님을 기념하기 위해서 데리고 다니는 나라다. 몇 번입니까? 삼번이지요. 이번과 삼번의 차이가 크지요. 이번은 내가 해서는 안 되고 주께서 살려준다고 해서 항상 무슨 낌새가 있습니까? 이러나저러나 살면 됐지, 뭐. 자기 존재에 대한 우선성이 들어있지요. 삼번은 뭡니까? 주께서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활용하는 거죠. 이번에서 삼번 가는데 성령이 필요합니다. 성령 없이 삼번 채택해버리면, “말은 맞는데 진짜 구원 안 해주면 나만 손해네.” 이런 생각이 들겠지요. “안 돼, 안 돼. 그러면 안 돼. 그런 건 믿음 좋을 때 해야지. 나는 이번에 멈출래. 주여, 살려주옵소서.” 이렇게 되지요.

33장 봅시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떵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서 떠나서” 적어볼게요. [운동이란 사물이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이란 사물을 휘감은 상태가 이동하는 것이다.] 이 말 이해되시죠. 운동이란 이렇게 할 때 운동으로 보잖아요. 그게 아니고 진짜 운동은 단독으로 있던 이 상태가 들어서 이리로 가는 게 진짜 운동이란 말이죠.

제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33장에서 애굽 땅에서 인도해낸 백성이지요. 그러면 이 백성이 애굽 땅에선 왔지만 애굽에서 살던 사람이죠. 애굽의 삶에 찌든 정신과 사고방식과 세상관이 나올 때 다 떨어졌습니까? 상태로 포함돼있는 거예요.

또 한 예를 들겠습니다. 모르드개가 에스더 사촌오빠거든요. 에스더가 삼촌 딸이기 때문에. 모르드개가 하는 말이, 네가 왕궁에 있다고 이 난리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 말을 왜 했느냐 하면, 에스더 그럴 사람은 아닌데 혹시 에스더가 아무리 난리쳐도 나는 왕궁에 있기 때문에 특혜 받을 것이다. 여자가 아니고 왕비잖아요. 왕비는 왕이 지켜주잖아요.

내일 대전에서 주례하는데 주례 포인트는 이겁니다. 여자는 보호받아야 된다. 여자는 무조건 보호받아야 돼. 보호받아야 된다는 말은, 여자의 행동에 대해서 남자가 책임추궁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책임추궁해서 제대로 할 것 같으면 보호라는 자체가 날아가기 때문에. 여자가 괜찮을 것 같으면 보호가 안 되잖아요. 왜? 잘났기 때문에. 여자가 보호받아야 된다는 말은, 그의 잘잘못을 남자가 따져서는 안 되는 거예요. 무조건, 무조건 보호해야 돼. 여자가 나이트에 가면 무조건 나이트에 따라가서 자기가 춤을 춰야 돼. 여자한테 어떤 책임(추궁하는) 자체가 그건 남편 아닙니다.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이 보호하잖아요. 에스더가 내 남편이 왕이기 때문에 자기는 괜찮을 것이라고 보는 거예요. 왕궁에 있으니까. 그런데 모르드개가 하는 말이, 너를 보호하는 자체가 바뀌었다는 겁니다. 지금 이 시국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보호하지 않으면 너는 여호와에 의해서 날아가게 돼있다. 따라서 우리 백성들은 울면서 통곡하는 그 기도에 너도 동참해라. 동참해서 주여, 내 남편이 결코 나를 살려낼 능력이 없습니다. 고백하라. 이게 에스더입니다. 페르시아 나라가 아무리 세다 해도 하나님보다 세지 않고 우리는 거기서 새로운 구원의 의미를 깨달아야 된다는 거죠. 그러면 그 페르시아가 애굽의 반복이죠.

자, 오늘 33장 봅시다. 애굽에서 나왔지요. 그동안 그들의 삶의 태도, 방식이 뭐예요? 애굽 안에서 상태가 같이 이동하니까 애굽이 좋아했던 짜장면, 애굽이 좋아했던 짬뽕, 애굽이 좋아했던 월남 샤브샤브, 그런 것 좋아한다고요. 아까 식사하면서 서 목사님이 아주 중요한 말을 했어요. “요새 프로야구 관심이 없어서 오늘 누구와 붙노?” 누구와 붙는지 진짜 몰라서 물어요. 삼성과 넥센과 붙는 것 모르면 간첩인데 진짜 목사님은 몰라요.

우리나라 젊은 얘들 종교가 야구거든요. 서양에서는 축구고. 이런 것이 나를 더 이상 둘러줄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우리가 사는 이것이 내가 사는 이유, 내가 사는 기쁨, 보람은 어떤 것도 채워줄 수 없다는 겁니다. 이제 그 세계로 너희들을 인도하겠다는 거예요. 결국 이 말은 뭡니까? 먼지 털이로 막 털어내는 거예요. 얼마나 그게 찢어지고 아플까요? 그동안 정들었는데.

딸 시집가는데 안 운다고 하지만 물론 아버지가 울진 않았지만 인상 그리고 있었지요. 사진 찍을 때도. 제 사진 보니까 다 인상 그리고 있어요. 섭섭해서. 뭐에 섭섭한지 모르겠는데 무조건 섭섭해요. 이제는 어느 누구도 나를 보호할 수, 쉽게 말해서 이 세상은 내가 살만한 곳이 못 된다. 그러나 그것이 온 몸으로 느껴지기까지 얼마나 주께서 뜯어내는 작업을 할까요? 부산 항만에 가면 고된 일이 있답니다. 녹슨 배에 도료 칠하기 위해서 녹을 긁어낸다는 거예요. 그 힘든 작업을 주께서는 때밀이가 되어 우리는 맨날 눕혀놓고 뒤에서 애굽 벗겨낸다고 등어리 벌겋게 피부 다 벗겨졌어.

분명히 내가 삼성을 응원했는데 7:0으로 지고. 분명히 엘지를 응원했는데 넥센한테 지고. 아아, 대한민국 했는데 일본한테 지고. 월드컵 16강은 고사하고 예선탈락하고. 하여튼 모든 범사가 주의 뜻대로, 내 뜻대로 마옵시고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자동적으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다 되어버렸어요.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가게 하시고. 이게 뭐냐? 때 벗기는 작업이었어요. 샌드페이퍼로 미는 작업을 울산바닥에서 하든지 또 다른 곳에서 하든지 어딜 가도 세상이 날 기쁘게 한다는 것은 성도에겐 없습니다. 그게 전부 애굽이기 때문에. 주의 사자가 동행해주기 때문에.

이동할 때 천국 갈 때 새로운 상황에 둘러싸여서 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상황이 주어져야 돼요. 그 상황이 뭐냐? 궁금하지요. 내 바깥에 있는 말씀이 내 속으로 스펀지처럼 내 속에 스며드는 상황이 그게 바로 새로운 상황이에요. 바깥에 있어서 내가 지켜야 될 말씀인데 그게 지켜야 될 말씀이 아니고 내가 하는 그것이 말씀으로 전환된 상황으로 바로 이미 내 몸을 흠뻑 적신 상황이에요. 이젠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에요. 여러분 몸이 아니고 말씀이 말씀대로 확실하다는 것을 말씀이 곧 현실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뤄지는 몸으로 바꿔진 거예요. 그게 새로운 상황이에요.

우리가 놀랄 것은 내 뜻대로 되서 놀라는 게 아니고 내 몸은 내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고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말씀은 영원하구나. 이것을 매일같이 1초, 2초 짧은 순간이지만 그걸 느끼도록 하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33장 2절을 이것하고 마치겠습니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거니와” 이 열 민족이 어디에 위치해 있느냐 하면, 여기 밑에는 사해가 있고 위에 요단강이 있고 갈릴리 바다가 있잖아요. 이쪽 편에. 이건 지중해고. 어디쯤인지 알겠습니까? 요새 같으면 사우디아라비아. 이쪽 편에 열 족속이 살아요. 이쪽을 뚫고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물어봅시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앞서 보낸다는 말은, 너희들이 스스로 관리해서 구원된다, 안 된다? 안 된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럴 필요 없어도 우리는 매일같이 내 관리는 내가 알아서 하거든요. 하세요. 육이니까. 하시되 돌아서서 이게 육이고 이게 불신앙인 줄 아는 그것이 신앙이에요. 내 죄를 보여주고 내 죄를 고백하고 내 불신앙을 보여주는 그것이 신앙이라니까요. 자기 신앙을 말하는 것은 그게 불신앙이에요. 얼마나 믿지를 못했으면 자꾸 신앙이야기를 언급해야 됩니까. 자꾸 신앙이야기하면 일곱 귀신 다시 들어와요. 어디 거할 곳이 없다가 “여기 좋으네. 신앙생활 하려고 애쓰네. 여기 들어가자.” 해서 신앙생활하는 사람에게 일곱 귀신 다 들어갑니다.

그런데 내가 뭘 해도 이건 불신앙일 수밖에 없다는 사람한테는 이미 주님께서 그런 조치를 했기 때문에 오직 예수 믿는 것을 내가 신앙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나를 붙들고 있다는 것을 결과적으로 우리가 받아들이면 그것이 신앙이거든요. 주님이 주체가 되셔서 나를 구원한다는 것이 결과물이 우리 자신인 것을 소급해서 파악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외부에서 볼 때 주님에 의해서 살기 때문에 그걸 신앙이라고 합니다. 자기 신앙으로 자기가 사는 것은 신앙이 아니고 자기를 신앙하는 사람밖에 안 돼요. 그래서 33장 1절, 2절에서 내 사자를 앞서 보낸다는 말은 내가 알아서 다 할게라는 뜻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살아온 것을 뒤돌아 볼 때에 하나님 말씀 지키는 게 우선이 아니고 내가 살아남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죄인 걸 깨닫게 하신 것은 성령을 보내주셔서 신자 되게 하셔서 깨닫게 되었사오니 이런 일에 대해서 늘 주께 감사드리고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141107b 울산강의.hwp (52.0K), Down: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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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8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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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