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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라이프니츠 141111강의[신학]

라이프니츠 141111

이름 : 이근호(IP:119.18.98.57)

한윤범(IP:119.♡.174.28)

14-11-14 14:53

20141111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8-라이프니츠
(강의:이근호 목사)

강의하기 전에

셀프야 물을 자기가 알아서 먹는 걸 셀프라 하는데 셀프라는 번역을 ‘자아’, ‘자기’라고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에고가 나오면, 번역에 제한을 받지요. 에고와 셀프를 구분을 해야 되는데 구분을 어떻게 할 것이냐? 셀프에다 자아, 자기 그냥 마구잡이로 자신, 이러다가 에고가 나오니까 에고와 셀프가 구분될 필요가 있겠죠.

에고를 자아라고 하는데 자아는 이미지입니다. 누가 어디서 만드는 이미지냐 하면, 이미지는 반드시 이미지를 유발할 수 있는 물질, 실체가 있어야 되거든요. 몸에서 나온 이미지를 자아(에고)라고 합니다. 셀프라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를 정립할 때 셀프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 누구 것이야?” “내 것이야.” 할 때는 셀프가 됩니다. 그래서 셀프는 반드시 홀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고 누가 나를 호명할 때 누가 내 앞에 등장했을 때 그걸 셀프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셀프는 사회성이라 볼 수 있고, 에고는 사회성 없이 이불 뒤집어쓰고 잠을 잔다든지 그냥 몸만 달랑 있으면 에고가 되는 거죠. 그래서 인간은 태어나면서 에고에서 셀프로 이동하겠지요. 어린애는 눈앞에 뵈는 게 없어요. 배고프면 막 울지요. 짜증내기도 하고. 심지어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가서 성공하려고 하는데 얘가 울어서 들키는 경우가 있잖아요. 6.25때 인민군이 왔을 때 얘가 울면 입을 막아야 될 것 아닙니까. 얘들은 상황파악이 안 되지요. 인간이 자기 주변과 관계가 될 때 셀프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셀프일까요, 에고일까요? 선악과가 뭡니까? 네가 신처럼 되리라 했잖아요. 그러니까 뭐든지 행동이 누구 좋으라는 행동이죠? 자기 좋으려는 행동이죠. 그게 바로 에고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했지요.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항상 아버지를 의식하지요. 아버지가 요단강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했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예수님 됨을 누가 규정을 하고 누구 확인을 하는 겁니까? 예수님 말고 따로 확인해주시는 분이 있지요.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한복음 5장에도 나와 있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예수님만이 하나라 할 때는 인간이 내 몸 있다고 하나라고 치는 게 아니고 하나라고 해놓고 거기에 아버지가 계시죠. 아버지와 내가 같이 있을 때 그게 하나란 말이죠. 그러면 하나란 말을 예수님이 사용했다는 말은, 인간이 하나란 말을 사용할 수 있을까요?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럼 사용할 수 없는데 인간은 자기 자신을 하나로 보느냐? 이게 바로 죄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주제파악이 안 되서 그래요.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창조주와 함께 있을 때 자기 자신을 파악했는데 인간은 자기 몸만 있으면 그것이 곧 나라고 여기는 타고난 본성이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맨해튼 강의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에고가 누굴 핍박하는 거예요? 진짜 유일하게 나라고 할 수 있는, 왜 예수님만 유일하게 나라고 할 수 있습니까? 누구와 함께 있기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때문에. 맨해튼 학생들보다 더 이해 안 돼요?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자기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하나님이 오던, 예수님이 오던 항상 어느 쪽으로 귀환해버립니까? 나를 에고를 위해서 저분들은 쓰일 때가 어디 있겠는가? “내가 죽어서 좋은데 가려면 예수를 믿어야지.”라는 식으로 나올 때 이건 에고를 탈피하지 못했지요. 그러면 바리새인도 마찬가지지만 에고가 누구를 살해했습니까? 유일하게 하나님 아버지가 인정하는 자기를 인자를 살해하는 거죠.

성경에 인자란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사람의 아들이죠. 이 말은 예수님 외에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진정한 사람의 아들, 사람이 낳은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지만 사람은 비어있어요. 이거는 없는 거예요. 진정한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자칭 사람의 아들이라고 여기는 그 세계에 예수님께서 인자라고 투입하면서 예수님 빼놓고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겁니다. 전부 다 흙이지요.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데 무슨 사람이고 하나님 형상이 없는데 무슨 사람이겠어요. 나로부터 출발해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형상 이런 걸 잡아당길 생각 말고, 그건 마귀가 하는 짓이고, 모든 시작은 예수님이 자기니까, 예수님 자기로부터 모든 것이 새롭게 만들어질 때, 자기가 1인칭 단수형이죠.

1인칭 단수형이 예수님으로부터 시작이 되면 1인칭 복수형으로 확정됩니다. 영어로 하면 ‘we’고 우리말로는 ‘우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기도문에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가 아니고, 우리 아버지. 거기 있는 우리라는 것은 에고가 거부당한 오직 예수님부터 새롭게 조합된 새로운 집단, 그게 우리에요. 그래서 주기도문은 바로 출애굽기 사상을 보여주는 거예요.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게 만나잖아요.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출애굽 정신에 의해서 모든 것을 새로 천국의 백성을 만드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우리는 이방인이죠. 예수님 빼놓고 다 이방인이니까. 왜냐하면 예수님만 아버지를 아니까 다른 사람은 아버지를 모르잖아요. 이방인의 기도가 뭡니까? 나한테 이런 것들이 있어야 된다고 기도하지요. 그런데 그런 기도는 하지 말라고 했지요. 이방인의 기도가 뭡니까? 자기가 기도해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이방인들의 사고방식이잖아요.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는 뭡니까? 아버지께서 너한테 있어야 될 것을 이미 아시느니라. 이방인들은 자꾸 중언부언하면서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하는데 너희들이 할 기도는 그런 기도 말고 앞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해서 예수님부터 새로 출발하는 그 집단에서 아버지의 뜻을 펼치기 위한 기도뿐이다. 다른 기도는 필요 없어요. 셀프로 가는 게 아니고 에고로 가기 때문에 안 되지요.

그래서 셀프란 용어를 제는 왜 수용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어린애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사회성을 갖기 때문에 자기 말고 주변에 다른 관계를 할 때 셀프란 용어를 쓰기 때문에 나는 에고와 셀프를 나누어서 맨해튼 첫 번째 강의에서 그렇게 이야기했던 겁니다. 됐어요?

-요즘 사회철학에서도 셀프는 에고와 ....

그럼요. 발전된 개념, 에고를 버리고 셀프로 해야 된다. 이렇게 들어갈 때 그들은 소통이라고 이야기하죠(-사회화과정). 하지만 그거는 셀프는 에고에서 발전됐기 때문에 에고를 부정하지 않잖아요. 인간의 몸을 부정하지 않잖아요. 부정하는 걸 전체주의라 합니다. 전체주의의 대표작 누구냐 하면, 히틀러거든요. 전체주의는 하나의 사상을 위해서 나머지는 다 제거하는 거죠. 하나의 사상을 위해서 모든 걸 없애버리는 것, 하나로 집결하는 것, 마키아벨리 같은 사상.

그래서 리오타르라는 현대 포스트모던 철학가들은 칸트 같은 사람을 아주 싫어해요. 칸트는 다음에 하겠지만(로크 다음에) 칸트란 사람은 모든 종교를 버리고 모든 계시, 모든 교회도 버려라. 오직 인간의 이성만이 완전하다. 인간의 이성으로만 생각해서 이성으로만 마감내자. 그래야 이성을 가진 인간들끼리 의견이 투합할 수 있기 때문에. 리오타르는 말하기를 그게 바로 전체주의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성 또는 의식, 이것 주의하는 것이 결국은 1,2차대전을 낳았다면 프로이트 이후에는 의식이 아니고 무의식, 그리고 현대미술 같은 데에서는 눈에 보이는 이성적인 것이 아니고 감각적이고 우연적, 우발적 요소, 비이성적인 거예요. 이성에서 탈피한 것. 그래서 그걸 들뢰즈는 탈주, 끊임없이 도망치는 것, 뭔가 이만하면 됐다할 때 도망치고, 또 도망치고. 내가 보기에는 도망쳐봐야 셀프가 안 되고 결국 뭐만 사수하고 도망치는 거예요, 뭐만 아끼려고 합니까? 에고, 자아는 어떤 경우에도 흠집 안 내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죄는 예수님이 안고 있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알지 못하고 자기 가치와 자기 존엄성(북한 생각나지요?), 자기 가치를 유지하려는 모든 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이건은 선악과 따먹은 것에 대해서는 일체 묻지 마라. 그걸 지적질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이성적으로 선과 악을 알아서 자기가 조정해서 악을 버리고 선 쪽으로 갈 테니까 내가 이렇게 선을 향하는 가치만은 제발 손대지 마라. 어떤 경우라도 이것만은 남한테 다치지 않게 하겠다.

저는 이것을 모든 범죄의 씨앗이라고 보는 겁니다. 모든 죄의 씨앗이에요. 이렇게 되면 착해도 죄고, 악해도 죄고, 왜냐하면 착하고 악하고의 주인공이 누굽니까? 하나님이 착해요? 아니잖아요. 누가 착해요? 착해도 내가 착하고 악해도 내가 악하니까 내가 알아서 악을 다룰 테니까 경찰이나 국가는 관여하지 말라는 거예요. 범죄자의 특징이 뭡니까? 잘못한 걸 내가 아니까 내 죄에 대해서 책벌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외부기관은 관여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숨어 다니잖아요. “내 자식 내가 패는데 네가 왜?” 이런 식으로. “내 몸 내가 자살하는데 네가 왜?” 이런 식으로.

결국 포스트모더니즘 입장에서 국가란 자체가 인간을 범죄하게 만드는 범죄단체로 간주하고. 그래서 요즘 사회는 자기 팔, 자기 흔들기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 붙들고 교회를 한다는 것은 갈수록 힘들지요. 왜냐하면 전체주의 집단의 사상을 젊은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고 어릴 때부터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을 어디로 튈지 모르는데 언제 붙잡아서 예배드리고 해요. 교회에서 야외예배 가자고 하면 빠질 사람은 다 빠지고 가는 사람만 가고. 목사가 영적 카리스마로 그들을 붙잡을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가버렸잖아요. 그래서 요즘은 교회 안 다니는 것이 유행하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답변이 됐습니까?

그러면 오늘 라이프니츠 해봅시다.
라이프니츠란 사람이 왜 철학사에서 유명인사로 등장해야 되는가? 이 사람의 주장을 한 마디로 말해서 뭐냐고 할 때 이걸 아셔야 돼요. 세상에 있는 모든 원인과 결과란 관계를 없애고 철폐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결과인데 그 원인은 옆 사람 또는 주변 상황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그런 관계를 벗어나야 된단 말이죠.

왜 벗어나야 하느냐 하면, 어떤 원인과 결과가 있게 되면 뭐가 깨지느냐 하면, 창조의 연속성이 깨어지는 거예요. 창조성의 연속성이 깨어지는 가장 대표적인 예를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들고 있습니다. 이거는 데카르트를 겨냥해서 하는 건데,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걸 사고라 하죠)과 물체, 물질이 따로 따로 있어서 물체와 영혼이 결합해서 하나의 개체가 된다고 이야기해버리면 여기서 연속성이 깨어진다고 본 거예요.

데카르트는 말하기를 인간이란 영혼과 신체가 결합해서 인간이 된다고 본 겁니다. 보통 이걸 이분법이라고 하지요. 영혼과 신체로 인간이 됐을 때에 교인들에게 설교하기는 상당히 쉬워 보이죠. 쉬워 보이면서도 라이프니츠가 보기에는 쉽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본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거든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죄라고 할 때 사람을 직접 칼로 죽인 것은 그 범죄에 해당됩니까, 해당되지 않습니까? 해당되지요. 사람이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라고 할 때 정말 칼 들고 피 흘리게 해서 살인한 죄도 거기에 포함이 되지요. 그런데 포함이 되는 데도 불구하고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가 돼버리면 얼른 들으면 칼 들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대수롭지 않는 일처럼 그렇게 희석될 가능성이 있지요. 왜냐하면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니까.

따라서 교인들한테 산상설교 그대로 한다고, “여러분,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죄입니다.”라고 한다면, “어차피 미워하는 것만 해도 살인죄인데 실제로 칼 들고 죽이더라도 살인죄의 연장에 불과하니까 그게 뭐 문제가 되겠느냐?”라고 살인할 가능성이 오히려 더 높아질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잖아요. 사람을 아무리 네가 미워하더라고 칼 들고 그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아아, 더러워라. 그래도 참아야지.” 뭔가 참아야 한다는 게 있는데 법조항이 늘어나버리면 참는 것과 안 참는 것과 결국 살인죄란 범위 안에 다 포함이 된다는 구태여 참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또 예를 들면 또 이런 거예요. 기차 안이 조용하면 누구 하나가 휴대폰 울리면 미안해서 밖에 나가서 통화해요. 벌써 앞쪽에서 누가 떠들고 있고 뒤쪽에 떠들고 있다면 휴대폰 하나 울려봤자 묻혀가는 겁니다. 별 양심의 가책이 안 되잖아요. 그러다가 이번엔 방송에서 “이번엔 대전역입니다.” 하고 방송에 크게 나오면 그때는 마음 놓고 떠들어도 이미 시끄럽기 때문에 괜찮게 돼버리죠.

사람이 마음 자체가 생각은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지만 실제로 행동은 피해를 준다고 했을 때에 사람들은 굉장히 편리하다고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면 라이프니츠가 보기에 문제가 되는 게 뭐냐 하면, 생각만으로 나쁜 짓을 해도 실제로 행동으로 안 옮기면 덜 나쁜 짓(물론 생각도 나쁜 짓이지만)이 되니까 여기서 연속이 되니까 연속이란 단절되는 거예요. 끊어지지요. 마음속으로 어떤 여성을 사모하더라도 실제로 그 여성을 차지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형법에 저촉이 안 되잖아요.

그렇게 되면 라이프니츠가 보기에는 하나님을 가지고 노는 게 돼요. 인간은 하나님이 만들었다.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함이다. 인간이 영혼과 물체 양쪽으로 되어 있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요령을 부리는 셈이 되지요. 또 어떤 경우에는 마음은 먹었지만 행동에 옮기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브레이크를 밟는 자신의 대단히 양심적인 행위 자체가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우수해 보일 수 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게 아니고 인간 자기를 기쁘게 하는 거죠.

그래서 이런 점이 이미 데카르트에서 나왔기 때문에 지난번에 스피노자 같은 경우에는 인간을 아예 해체해버리지요. 인간이란 자체는 개체가 아니고 그냥 흐름에 불과하다. 흐름에 불과하니까 그냥 물 흘러가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살아갈 뿐이지 그게 신에게 모든 걸 맡겨야 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신이 만들어준 인간의 합당한 삶이다. 스피노자가 그렇게 이야기했단 말이죠.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개체가 없지요. 나 만에 따로 만들어놓은 하나님의 이유가 없어져버렸지요. 개체란 게 의미가 없어져버렸어요. 스피노자의 개체는 이런 거거든요. 밑바닥은 동일한데 물방울처럼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런 모습이란 말이죠. 잠시 나타나게 되면, 내가 이런 행동을 한 것은 주변에서 그런 원인이 제공되어서 이렇게 되었다, 하고 꺼지면 다시 편평해지잖아요. 그러면 자신의 책임이란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잠시 있다가 없어지니까 참 편리하지요. 이런 사고방식.

그러면 개체를 만든, 너 따로, 나 따로, 따로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을 찾을 길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예 인간 자체를 물방울로 만들든지 해야 되는데 동물 따로, 인간 따로, 돌멩이 따로. 돌멩이는 왜 만들어놨는데? 이런 것이 규명이 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 자체를 해체하면서도 인간의 개체를 살리는 방법은 없을까? 이게 라이프니츠에요. 그래서 라이프니츠에 의해서 인간 개체를 없애는 방법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세상이 되어간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돼요.

그 다음에 하나님의 뜻의 어디 있느냐? 그렇게 되면 인간은 내 뜻대로 산다는 것은 안 되지요. 하나님의 뜻이니까. 모든 게 하나님의 뜻으로 돼있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만 주장해서 남에게 피해 입히는 것은 합당한 게 아니에요. 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부응이 되지 만약에 뜻대로 되지 않고 내가 따로 있어버리면 하나님을 섬길 때 있고 안 섬길 때 있고.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내 마음으로는 죽이고 싶지만 행동으로는 참았다고 하나님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결국 자기 영광밖에 관심을 두지 않잖아요. 그러면 이건 하나님 영광이 아니고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 개체를 없애는 겁니다. 개체를 없애는 방법은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가 존재한 걸 분명히 해야 되고.

그러면서도 개체를 살리는 방법은 뭘까요? 라이프니츠가 천재적인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하나님의 뜻이 개인 안에 들어있다고 본 겁니다. 어떻습니까? 그 하나님의 뜻이 자기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내부에 있다고 보잔 말이죠. 그럼 내부가 자기를 만들겠지요. 그러면 자기는 내부에 의한 표현, 다른 말로 하면 표상이 되는 겁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고 그 뜻이 발현(표현)된 것이 바로 개체, 내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보니까 스피노자와 비슷해졌지요. 스피노자는 양상, 양태라 했거든요. 스피노자의 양태라 하는 것은 파도처럼 돼있는데, 그렇게 되면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차이점이 없잖아요. 인간의 내부 존재가 하나님이고, 하나님에 의해서 내가 표현됐다면 스피노자와 똑같이 되잖아요. 파도는 어디서 나온 거예요? 바다가 바람 쳐서 나오잖아요. 파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파도는 다시 바다의 물결로 돌아가잖아요. 바다 속으로. 바다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발적으로 등장한 양상이 스피노자가 되죠. 그러면 같이 되잖아요.

라이프니츠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인간마다, 동물마다 다 그렇다. 그러면 신이 몇 가지 돼요? 사람마다 신이 하나씩 되는 거예요. 그러면 또 안 되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쪽 인간이 이쪽 인간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겁니다. 영향을 주면 원인과 결과란 관계가 되니까 이건 안 되고. 이쪽에 있는 인간이 나라는 인간과 일체 상호관계가 성립이 안 된다고 본 거예요.

성립이 되지 않으면서 고유의 하나님의 뜻을 갖고 있는 방법이 뭐냐 하면, 모나드, 이걸 우리말로 단자라고 하는 거예요. 각 사람마다, 각 동물마다, 각 바위마다, 흙마다 전부 단자가 들어있어요. 그 단자란 것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단자란 말을 라이프니츠가 사용함으로써 더 얻을 수 있는 추가적으로 밝혀낼 수 있는 진리가 뭐냐는 거죠.

거기에 대해서 알아보면 데카르트는 생각과 물체가 따로 있지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만약에 데카르트가 생각과 물체가 따로 있다고 했는데, 여기 물이 있는데, “물아, 네가 날아서 내 입에 들어오너라.” 하면 내 생각대로 물이 올라와서 들어오면 이건 내 생각과 물체가 같이 있는 거죠. 그런데 “물아, 제발 내가 목마른데.” 해도 끄덕도 안 하지요. 그러니까 따로 있는 것 분명히 맞지요.

라이프니츠는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물체가 데카르트는 연장이라고 했지요. 연장이란 그림을 그려봅시다. 이게 3미터입니다. 연속된다 이 말입니다. 이게 물체니까. 연장되면 이게 연결된다는 것은 분할도 가능하다는 거죠. 3등분 냅시다. 그러면 하나 남겠지요. 백날 남아도 또 분할되지요. 그러니까 물체, 물질을 질료라고 하는데 물체를 아무리 작게 해도 물체가 되는 한 계속해서 분할이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단자라 하는 것은 분할되지 않는 걸 단자라 해요. 그 물체를 받치고 있으면서도 물체 되게 하는 분할되지 않는 걸 단자라고 하는데 그 단자는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생각에서 나오지요. 생각은 가만 앉아있어도 은하계 바깥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은하계 안 가도 지구밖에 뭐가 있을까? 생각하잖아요. 이거는 분할되지 않지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생각이란 것이 분할이 됩니까? 어디서 어디까지 분할이라는 게 있습니까? 사람은 살아있는 한 길을 걸으면서도 계속 이어지잖아요. 이게 끊어짐이 없잖아요. 물론 끊어짐이 있습니다. 기절할 경우와 죽었을 경우에는 끊어진다고 하잖아요. 라이프니츠는 no라고 이야기합니다. 기절하거나 졸도하거나 죽는다할지라도 미세지각이, 단자는 ‘지각+욕구’인데 이 지각을 그냥 지각과 미세지각이 있어요. 미세지각은 흙, 광물, 책상, 죽은 나무, 철, 아연, 이런 걸 미세지각이라고 해요.

지금 라이프니츠가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세상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라면, 어떤 식으로 창조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진리지 자기가 아는 인간만 생각하고 광물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다고 방치하게 되면 진리답지 못하다는 이야기에요. 철학가가 진리에 대해서 언급하고 신학자가 신에 대해서 언급하려면 세상에 어떤 것 하나 빠뜨림 없이 다 설명이 되어야 그게 진리답게 되는 거예요. 만약에 철과 아연, 구리 그건 어떻게 움직이는지 왜 있는지 모르겠다고 빼놓고 인간들끼리 이렇게 돼버리면, 남겨둔 그것이 인간들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 가능성을 놓치게 되지요. 놓치게 되면 이 진리는 미흡한 진리지 온전한 진리라고 할 수 없잖아요. 그렇잖아요.

부부간에 이야기할 때 여자가 하는 말이 남편에게, “여보, 당신 사랑해.”라고 할 때 “사랑해.” “왜 사랑하는데?” “얼마 전에 내가 다이아반지 사줬잖아? 사랑해.” 그럼 여자가 하는 말이, “다이아반지 사준 건 고마운데 전에 약속시간에는 왜 늦게 나왔는데?” 지금 다이아반지로 사랑의 전부라고 보면 여자 쪽에서는 그 사람이 놓쳐버린 것, 약속 시간 늦은 걸 끄집어내서 온전하게 그 둘이 조화가 돼야 되지 않습니까? 예정조화에요.

라이프니츠의 사상을 예정조화설이라고 하거든요. 예정조화설의 의미가 뭐냐 하면, 인과관계가 아니란 뜻이에요. 원인과 결과 관계가 아니란 뜻입니다. 원인과 결과가 되려면 내가 결과라고 여기는 순간만 원인을 찾지 그 전에는 원인, 결과라는 관계가 계속 나오지 않게 돼요. 계속 지각이 안 된다니까. 그걸 느끼지 못하게 돼요.

사람이 교회 다니고 하나님을 믿을 때 여러분, 언제 하나님 생각나던가요? 뭔가 일이 안 될 때 하나님 생각나지요. 갑자기 차가 뒤에서 박는다든지 이럴 때 “하나님이여, 오늘 왜 이런 일이?” 평소에 스물네 시간 내내 하나님 생각나는 것 봤습니까? 뭔가 일이 안 될 때 지금 9회말 투 아웃까지 1:0으로 지고 있을 때 삼성 팬들은 뭐합니까? “신이시여, 주여, 이대로 삼성이 무너질 겁니까, 4연패 못할 겁니까?” 무너질 때 최형우가 2루타 쳐서 2:1로 역전됐잖아요. 평소에 기도 안 한 사람 같으면 모르지만 기도하는 사람 같으면, 오늘도 내 기도에 응답했기 때문에 나는 신자 맞는다는 거예요.

뭔가 안타까울 때 뭔가 뜻대로 잘 안 풀릴 때 그 순간에 내 기도가 원인이 되고 결과가 최형우의 2루타로 삼성이 3승 2패로 한 게임 앞서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라이프니츠 보기에는 그게 하나님보다도 전부 자기 위주에요. 아까 이야기한 에고 위주, 자기밖에 모르는 그건 진리가 아닌 자기 욕망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라이프니츠는 단자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어떻게 통합하느냐 하면, 동물, 식물, 광물, 인간 전체를 다 합쳐서 단자가 한 꺼풀, 두 꺼풀 그 주름을 편 걸로 본 거예요. 단자 안에 있던 내장돼있는 그 정보가 펼쳐지는 걸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라이프니츠는 말하기를 현재는 미래를 임신하고 있다고 이야기해요. 지금 안에 미래가 다 들어있는 거예요. 이제는 펼쳐지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남과 나와 어떤 좋은 관계를 이룬다는 것을 남이 나한테 영향을 어떤 원인을 제공할 수 없어요. 제공할 수 있으면 펼쳐짐이 방해받기 때문에 안 돼요.

그러면 그 사람은 왜 내가 배고플 때, 내가 차비 없을 때 도와줬을까? “그 사람 단자 속에 몇 월 며칟날 어떤 사람이 너한테 차비를 빌리려고 할 거야. 그때 갑자기 네 속의 양심이란 지각이 발동해서 너는 서슴없이 그 사람에 돈 삼천 원을 차비하라고 줄 거야.”라는 것이 예정돼있고 그 예정됨과의 만남이 조화가 되는 거예요. 예정조화설로 세상은 다 움직이는 겁니다.

따라서 개체가 개체로서 종속됩니까, 종속 안 됩니까? 화끈하게 종속되지요. 이렇게 될 경우에 남한테 고개 숙일 필요 있습니까, 아부할 필요 있습니까? 전혀 없지요. 그야말로 진자교회 아닙니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왜 남한테 고개 숙이고 남한테 아부해서 내가 살려고 할 필요 없는 거예요. 내가 죽는다는 것은, 내가 광물이 된다는 뜻이고 광물 되도 단자는 안 죽어요. 왜 단자가 안 죽느냐 하면, 근원적 단자가 신이기 때문에. 라이프니츠에서는. 최초의 단자가 하나님이거든요. 하나님 자체가 죽을 리가 있습니까.

단자란 개념을 끄집어낸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한 분인데 왜 다채로우냐를 설명할 때 왜 세상은 다양하냐? 스피노자는 전체를 많은 것을 어떡하든 하나로 모으려고 설명한 반면한 오히려 반대로 라이프니츠는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다채로우면 다채로울수록 컬러풀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오히려 그 하나 됨이 더욱 더 빛이 난다는 거예요. 하나와 다양성이 예정조화로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더욱 더 한분이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이 라이프니츠 이론입니다.

그러면 개인이 그냥 산 속에서, 우리나라에서 해외여행 안 가본 사람 많아요. 그리도 읍내만 가봤지 도시에 안 간 사람도 있고, 제주도 안 가본 사람도 참 많이 있습니다. 비행기 안 타본 사람도 많이 있어요. 그 사람은 자기 고향에서 태어나서 농사짓다가 죽을 때도 자기 고향에서 죽었다. 이것보다도 맨날 해외여행 갔다면 그만큼 다채롭지요. 그럼 어느 쪽이 단자가 더 풍성한 것이에요? 해외여행 다닌 단자가 풍성하겠지요. 다채로우니까. 다양하니까.

그래서 인생은 그냥 곱게 살아도 되겠지만 힘들게 살고 굴곡이 많고 롤러코스트 같은 인생을 살아도 그렇게 힘든 인생 살았다고 하나님께 영광 가리지 말고 도리어 그런 다채로운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면 되잖아요. 하나님이여, 내 인생을 요란스럽게 하셨군요. 한 곳에 머물게 하지 않고 온갖 사정, 상황이 다 터지게 만들 때 오히려 그걸 통해서 남보다 더 하나님의 뜻을 맛보게 하고 경험케 하셔서 감사합니다. 이러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착함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주장입니다.

발상이 반대지요. 보통은 이렇게 해서 다양성에서 신을 어떻게 찾아가려는 구상이지만 라이프니츠는 오히려 하나 됨을 버리고 다채로움 속에 들어가는 거죠. 모든 다채로움이 펼쳐지면 우린 몰랐는데 하나님이 미리 숨겨놓은 예정하신 뜻이 펼쳐지니까 살면 살수록 힘들면 힘들수록 더욱 더 하나님께 감사할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동물과 인간은 뭔가 느낄 때 광물은 못 느끼는 이유가 뭐냐? 광물은 느끼고 있는데 그게 미세지각이에요. 아주 작은 지각이기 때문에 못 느낄 뿐이지 사실은 우리도 이런 미세지각 같은 게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꿈이라든지 또는 한가할 때 혼자 턱을 괴고 먼 산을 볼 때 내가 놓쳐버린 체험이나 기억들이 혼자 조용한 시간, 명상을 가지면서 새록새록 나오지요.

여러분, 길에 가면서 가로수의 나뭇잎이 몇 개인지 기억납니까? 기억 안 나지요. 나무가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다시 내려가 보세요. 분명히 나무가 있거든요. 우리 눈은 그 나무를 봤기 때문에 나뭇잎사귀가 있다는 걸 봤을 거고 우리 눈 속에 나뭇잎사귀 전체가 들어왔단 말이죠. 그런데 그걸 나무 앞에서 헤아릴 시간을 안 갖고 우리는 딴 볼 일 보다보니까 나뭇잎사귀가 우리 눈에 들어오긴 들어왔는데 잎사귀가 몇 개인지 아십니까? 모르지요.

바로 꿈이란 게 그런 거예요. 꿈이란 평소에 우리는 어느 한 쪽에 몰두하다보니까 몰두한 노선에서 이탈해버렸어요. 내가 기억나는 것은 내가 강조했던 집중했던 그 노선만 기억하고 내가 놓쳐버린 것이 있었는데 꿈에서 놓쳐버린 것이 생각나는 거예요. “오늘 참 그런 일이 있었지. 이런 일이 있었지.”라고 생각할 때 나의 개체는 개체가 아니고 내 안에 누가 있다? 단자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꿈을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것까지 합류해서 파악해줘야 이것이 진정 진리라고 할 수 있다는 게 라이프니츠의 주장입니다.

라이프니츠의 미세지각 하니까 생각나는 게 라이프니츠가 미분, 적분을 만들었어요. 미분이란 뭐예요? 계속 쪼개고 쪼개는 거예요. 쪼개고 쪼개면 물질을 날아가고 남는 건 결국 정신, 생각이죠. 생각이 지각으로 발전하면 이게 바로 물질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물질 따로 생각 따로 이분법이지만 라이프니츠는 생각과 물질이 서로 소통하고 통하는 겁니다. 그게 의식이고 이런 지각으로 하여금 물질되게 하고 또는 생각이 물질로 바꾸고 발전시키는 그것을 라이프니츠는 ‘힘’이라고 합니다. 라이프니츠의 사상을 한 마디로 말하라면, 하나는 힘으로 나타나고 단자는 힘으로 움직이고 그 힘은 예정조화의 법칙 하에서 모든 것은 힘으로 움직이는 이 세상은 힘의 세계다.

라이프니츠의 이야기를 설명 드리고 이게 성경적으로 맞는지 다음 시간에 확인하겠습니다. 옛날부터 힘이란 ‘질량*속도’였어요. 질량이 증가하면 힘은 더 센 거예요. 옛날에 운동학이 가벼운 것은 힘을 적게 해도 갈 수 있고 무거운 것은 힘이 더 들잖아요. 그럼 힘이 센 것이 힘이 더 쓰이고 또는 빨리 움직이는 것과 천천히 움직일 때 천천히 움직이는 게 힘을 적게 받고 빨리 움직이는 게 힘을 더 가해야 되잖아요.

라이프니츠는 이걸 반대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이 정지가 된다는 거예요. 정지가 되면 힘의 운동학 같은 자체는 진리를 표현할 수 없고 이게 동력학으로 바뀌어야 된다. m 제곱을 해버려요. 이건 가속도가 돼버리죠. 가속도가 붙어야 모든 것은 움직이는 겁니다. 따라서 옛날에는 이것이 어떻게 움직이느냐고 했는데 근대 뉴턴 물리학에서는 이것이 왜 멈추느냐, 왜 정지하느냐로 바뀌어요.

그럼 뭐가 우선입니까? 정지하다 움직이는 것이 정상이라고 본 것이 옛날 사고방식이라면(뉴턴 이전에는), 그 이후는 뭡니까? 움직이고 있는 것이 정상인데 이게 왜 정지하지? 정지하는 것은 마찰 때문에 정지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가속도가 가미될 때 비로소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거예요. 만약에 가속도가 아니면 에너지는 위치에너지밖에 안 되니까 운동에너지란 가속도가 반드시 붙어야 되지요.

라이프니츠가 이런 사고방식을 한 거예요. 그 말은 뭐냐? 모든 것을 활력, 아까 힘이라 했지요. 활력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이 활력은 어디에서 활력이냐 하면, 바로 물질에서 인간 단자가 포개져있는 자기 정보를 주름을 펼칠 때마다 계속해서 숨겨져 있는 활력, 힘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은 전부 움직이는 겁니다. 만약에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뭔가 외부에서 힘을 가했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거예요.

라이프니츠의 이러한 힘과 사고방식은 나중에 이것이 뉴턴 이후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 이런데서 새롭게 증명이 돼요. 뉴턴에서는 항상 보는 관점이 주체가 대자연을 보잖아요. 주체가 그냥 정지돼있단 말이죠. 정지돼있으니까 대자연의 배경은 정지돼있는 겁니다. 정지돼있으니까 이걸 정지된 공간, 흐르는 것은 주체가 뭔가 시간을 느끼니까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이 흐르는 겁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뭘 날려버렸습니까? 인간이 본다는 이것을 상대성이란 이름으로 날려버렸어요. 물론 갈릴레오부터 했지만.

그럼 주체자리가 확정/고정됐다고 봤는데 현대 양자물리학이나 생성물리학에서는 고정된 건 인간이 아니고 고정된 것은 빛의 속도가 고정됐지요. 1초에 34만 킬로미터. 빛의 속도가 고정이 되니까 그때부터 인간은 물체, 질점이 되면서 인간 자체도 질량을 갖게 되죠. 질량은 갖는다는 말은 에너지를 갖는 거죠. 인간 자체가 주체가 아니고 인간 자체가 질량과 시간과 그리고 에너지 이런 방정식에 예속이 돼버립니다.

그러면 이 우주 자체가 무엇과 충돌을 일으키죠? 내가 보는 것은 고정돼있고 절대적이라는 절대와 실제로 인간이 소속돼있는 대자연의 빛의 속도의 절대와 서로 티격태격 충돌을 일으키지요. 충돌을 일으키면서 결국은 우리는 현실 속에 살면서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겁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조금밖에 모르는 아는 게 거의 없는 작은 것만 아는, 그렇게 되면 인간은 스스로 정신에서 물체로 가버립니다.

물론 이건 아인슈타인 시대지만 라이프니츠는(뉴턴 시대에 있는) 물질도 미세지각을 갖는 단자고 인간도 단자라면 뭔가 차이가 나야 되는데 이걸 반성하는 단자로 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반성하는 겁니다. 반성하면 반성할수록 점점 더 우주의 진리, 신에 대한 생각은 폭이 더 넓어진다고 본 겁니다. 그게 힘에 의해서 지각이 생기고 지각이 발달하게 되면 그때부터 나오는 게 지각의 여러 종류에 따라서 양심이 될 수 있고 윤리, 도덕, 착함, 종교가 여기서 다 나오지요. 그래서 인간만이 스스로 자기를 반성할 수 있다. 반성하는 것도 나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라이프니츠의 주장에 의하면 단자가 하나님 뜻이잖아요. 하나님 속에 뭐가 들어있다? 하나님 스스로 자기를 반성하는 하나님의 모습, 형상, 하나님이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하는 요소가 그것은 인간의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그런 생각이 있다는 것이 어디서 발현됩니까? 돌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동물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동물은 그냥 감각이에요. 이성적인 존재는 인간밖에 없으니까 이성적인 존재 속에 반성이 있다는 말은, 곧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형상을 표출하도록 그렇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19.♡.174.28)

14-11-14 14:54

20141111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8-라이프니츠
(강의:이근호 목사)

우리가 사랑하잖아요. 사랑한다는 것이 우리의 세포의 작용으로 사랑하게 되면 세포에 대자연의 일부가 포함이 돼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진동이 생긴다 말이죠. 그 진동이 멀리 있는 그것까지 상호작용하는 걸로 보지요. 현대 양자이론에서는. 그런데 상호작용한다는 것에 대해서 라이프니츠는 반대하고 상호작용하지 않는다고 본 거예요. 단자는 창문이 없는 거예요. 창문이 없다는 것은 개별적이 돼요. 만약에 창문이 있으면 스피노자가 돼버린다니까요. 소통이 돼버리면. 일체 소통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조치를 하신 것이지 서로 아부하지 말라 이 말이거든요. 내가 아부를 하게 되면 내가 원인이 되고 저 사람이 나한테 유리하게 되면 그 사람한테는 신이 없고 나한테는 신이 있는 셈이 돼버리니까 안 되잖아요. 서로가 단자, 신이 주신 게 있기 때문에.

첫째 시간에 라이프니츠에서 못다 한 중요한 것이 몇 개 있어요. 그 중에서 단자는 누가 만드느냐? 단자는 어떻게 만드는지 그 이야기를 해야 되겠어요. 단자는 물질과 생각, 그 중간에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게 아닙니다. 왜 눈에 보이면 안 되느냐? 보이면 분할이 가능하니까. 보이는 것은 또 쪼개면 다시 더 작은 보이는 게 나오기 때문에 그러면 안 되거든요.

단자는 처음에 하나님께서 한꺼번에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결국 설계도에요. 전 우주의 설계도를 다 갖고 있으니까 단자에서는 아까 현재가 미래를 품었다고, 임신했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그 말은 단자 안에 미래 입장만 들어있다고 보면 돼요. 미래에서 보는 거예요.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미래 입장에서 미리 앞당겨서 보는 겁니다. 그러면 미래에서 현재를 회수하는 셈이 되지요. “이리 와, 이리 와. 그렇게 살아.”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아마 철학가 중에서 제일 난해한 게 라이프니츠일걸요. 특히 기독교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 무슨 희한한 소릴 다 하고 있느냐. 심지어 기독교를 안다고 해도 어려워요. 라이프니츠를 이해한다는 것은 성령 안 받으면 안 될 정도로. 그가 하는 이야기가 도대체 무엇을 기피하고 무엇을 피하가려고 애를 쓰느냐 하면, 하나님을 믿으면서 결국은 하나님이 인간의 욕망과 욕구를 들어주는 그 시대의 종교상 있잖아요. 그걸 어떻게든 피해가려고 하는 겁니다. 절대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돼버리면 그 당시의 교회 상, 그 당시의 세속 상 그대로 가는 꼴이 돼요. 신의 이름으로 자기를 정당화하고 신의 이름으로 남을 피해 입혀도 그것이 아무 죄책도 없는 그런 식이 된단 말이죠. 그러면서도 동물, 식물보다 인간 위주로 세상의 모든 걸 포괄할 수 있는 그러한 철학은 나올 수 없는 겁니다. 라이프니츠가 그걸 염두에 두고 기존의 과학 같은 모든 걸 고려해서 미래 입장에서 보는 겁니다.

그러면서 점점 라이프니츠는 어디로 가느냐 하면, 나의 생각이 성경에서 나온 생각이지 성경을 해석하고 성경을 풀이하는데 이러한 철학 외에는 달리 해석되지 않는다는 자신감에서 그렇게 이론이 나온 겁니다. 그러면 라이프니츠 중에서 철학가들이 제일 당황해하고 난처해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은 모순과 굴곡 가능성이란 이론을 펼칩니다. 성경해석하면서.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잖아요. 그것부터 라이프니츠는 시작하는데 적어볼게요. 어렵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다.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 이 두 개가 같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립이 안 되지요. 이게 문제라는 겁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다면, 아담은 죄를 지을 수 없다가 돼버리죠. 아담이 죄를 지은 상태에서 아담이 죄를 못 짓게 되죠. 이런 사이를 모순이란 한다. 모순이란 말을 제가 이야기하면서 여러분 표정이 너무 어두우니까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철학적 용어는 들어갈수록 더 어렵게 돼요. 쉽게 하겠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는 순간에 아담이 죄를 짓지 않는 게 되지요. 아담이 죄를 짓는 순간 아담은 죄를 못 짓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돼버리면 하나님도 아담한테 못 이긴 게 돼요. 내가 죄 짓는데 대해서 하나님이, “너한테는 못 당하겠다.” 이렇게 돼버린다고요. 그러면 뭘 놓치느냐 하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놓치게 돼요. 전능하지 않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인간과 협상하고 타협하는 하나님이 돼버립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려고 하면, 나서지 못하고, “제발 부탁이다. 죄 짓지 마라.” 이렇게 오히려 인간한테 매달리는 나약한 하나님이 돼버리죠. 전능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전능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 진리를 구축하고 우주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신은 혼자서 해낼 능력이 없는 무능력자가 되고, 무능력자니까 자기가 만든 인간이 필요해서 인간의 도움으로 신은 제대로 된 창조, 세상을 운영하고 있다는 논리가 되고 마는 겁니다. 실제로 많은 신학자들이 말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라고 하면서 아담이 죄를 짓는데 있어서 하나님도 어쩔 수 없었다는 쪽으로 해석을 해버린 겁니다. 왜 그렇게 해석을 해야 되느냐 하면(그 당시 신학자들이), 아담이 스스로 자유의지로 죄를 지어줘야 효과 있게 심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던가요? 심판을 하려면 본인 책임이 돼야 심판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심판하려면 본인 책임이 돼야 되고 더 나아가서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아야 돼요. 예를 들면 물이 선악과라고 합시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심어놓고 따먹지 말라고 분명히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걸 따먹었어요. 따먹고 난 뒤에 네가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따먹었으니까 네 책임이고 네 책임에 대해서 내가 처벌을 가한다. 이게 얼마나 합리적이고 자연스럽습니까? 참 자연스럽지요.

그렇게 되면 라이프니츠의 생각에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에 대해서 어떤 위반자가 나오지 않는 이상은 하나님의 벌칙이 무색해진다는 이야기에요. 하나님의 자존심이 상해버리는 겁니다. 라이프니츠 말고 보통 사람은 말씀에 순종할 때 자존심이 산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라이프니츠 생각은 그게 아니고 인간이 순종하면 벌칙을 내린 하나님이 너무 오버액션한 거예요.

막 태어난 아기한테 “아기야, 아빠 차 운전하지 마. 운전하면 때찌 할 거야.” 이런 이야기할 때 옆의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 사람이 미쳤나?” 이럴 것 아니에요. 얘가 할 수 없는 것으로 그걸 다짐할 필요가 있습니까? 갓난애가 무슨 운전을 해요. 아직 기지도 걷지도 못하는 게. 그러니까 그 아빠가 부질없는 짓을 한 거예요. 그럴 때 다른 사람이 그 아빠를 얼마나 놀리겠습니까? “아버지가 정신이 나간 모양이다. 얘한테 할 소리가 아니지.”

라이프니츠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그것도 하나님이 할 소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마귀가 할 소리입니까? 그건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했다면 하나님이 우리가 보기에 할 필요도 없는 소리를 했다는 말은 우리 쪽에서 하나님의 생각에 대해서 뭔가 오해했다는 거예요. 어떤 점에서 오해냐 하면, 하나님이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은, 반드시 선악과 따먹어서 그래서 벌칙 받아서 내가 따먹지 말라고 한 하나님이 사전에 한 조치, 하나님의 자존심을 높여달라는 취지로 따먹지 말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래야 말이 된다는 겁니다.

여학교에 가서, “너희들 가운데 서서 오줌 누는 사람은 때찌 할 거야.” 이러면 웃을 일이란 말이죠. 누가 여자가 서서 오줌을 눕니까? 앉아서 눌 거잖아요. 그처럼 너의 도움 없이는 내가 벌칙 내린 자존심이 안 사니까 제발 벌칙이 벌칙답게 저항이 저항답게 어떤 활동을 해주십사하는 요구가 돼버리면 이것은 하나님이 홀로 전능하심이 깨진다고 본 거예요. 사람의 협조 없이는 주님의 전능하심이 등장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심 자체가 독자적으로 등장할 수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 일에 파트너가 없으면 일을 못한다? 그건 전능하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건 역시 물리학인데 뉴턴은 말하기를 절대 공간, 절대 시간을 이야기했어요. 절대 시간이란 것은 여기서 15억 광년에 있는 사람의 시계의 초침과 15억 광년 떨어진 여기 있는 사람의 초침이 같이 움직인다는 겁니다. 시간의 1초가 동일하다는 거예요. 동시성이죠. 뉴턴의 절대 시간에 의하면. 그래서 우리는 뉴턴의 절대 시간에서 절대를 빼버립니다. 그냥 시간으로 보지요.

구원과 시간의 연관성이라는 글을 쓰니까 반대하는 글이, 이광호 목사가 낸 책이 있어요. 거기에 보면 박길현 목사가 반대한다는 글을 썼어요. 인터넷에 올라와있어요. 내용이 뭐냐 하면 이근호 목사는 시간으로 구원과 연관했다는 거예요. 박길현 목사가 사용한 시간이 바로 아인슈타인 시간이 아니고 흔히 아는 뉴턴적 시간관을 갖고 있는 거예요. 본인이 시간을 언급하면서 그렇게 사용하는 거예요.

성경에서 시간은 세 가지라 했지요. 카이로스(때), 아이온(세대), 그 다음에 보통 흔히 말하는 크로노스, 과거-현재-미래로 흘러가는 그 시간, 세 가지 시간관으로 성경에 나오잖아요. 제가 미국 버지니아 강의에 보면 목요일 강의에 올려놨어요. 우리는 흔히 시간이라 하면 앞에 절대를 붙여도 돼요. 멀리 있어도 같은 시간에 있다. “너, 왜 시간 되서 안 나오노?” 이 말은 시간이 간다는 뜻으로 한 거예요.

그 다음에 절대 공간이라 하는 것은, 더 난해한 이야기에요. 절대공간이란 말은 뭐냐 하면, y=ax+b 좌표에서 y=3이고 x=4, 이 지점을 A라고 하면 좌표가 (4, 3)이죠. 물어봅니다. 이 4와 3이란 지점에서 또 다른 지점이 있습니까? 여기 물병이 있는데 이 물병이 있는 자리에 다른 게 이 자리를 점유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이미 차지했잖아요. 차지했는데 누가 차지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게 절대 공간개념이에요. 절대 공간개념에서 우리는 절대를 빼버린 거예요.

공간이란 말은, 내가 여기 있으면 내 자리고, 너는 내 옆에 있든지 아니면 위에 있든지, 아래에 있든지. 내 위에 있다는 말은 z좌표가 나오기 때문에 딴 이야기에요. z좌표를 하게 되면 (4, 3, 5)에 누가 차지한다면 그 자리를 누가 차지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내 위에 있다면, (4, 3, 6)이 되는데 이건 안 되잖아요. 한 지점에는 하나만 있다는 것이 뉴턴의 생각입니다. 맞아요, 틀려요? 이게 상대성원리에서 틀린 거예요.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동시성이란 말을 해서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왜 이런 발상들이 자꾸 나오느냐 하면, 현대과학에서 양자는 이미 남의 이야기, 과학자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나노 산업이 되게 되면 여기는 양자개념이 있고 앞으로 양자컴퓨터이란 게 등장하게 되면 현재 컴퓨터보다 속도가 수억 배 빠른 게 튀어나와요. 양자개념에서는 관찰하는 본인이 측정기구, 관찰기구가 전자의 운동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우리가 관찰하는 순간 내 의식이 요구하는 대로 그것이 변화가 일어난다니까요.

그래서 쉽게 말해서 이런 겁니다. 엄마 없을 때 아빠가 와서 아기 보고, “네가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하는 순간 걔는, “아빠가 좋아.” 이렇게 해요. 아빠 뒤에 숨어있고 아빠가 안 보이는 상태에서 엄마가, “네가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엄마가 좋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결국 얘가 아빠, 엄마를 고르는 것은 뭡니까? 질문자에 따라서 바꿔지는 거예요. 양자란 인간의 관찰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양자로부터 늘 관찰 받고 심사받는 입장에 있거든요.

아까 라이프니츠가 단자에는 창문이 없다고 이야기했지요. 소통하는 창문이 없다고 했는데 정확하게 말해서 단자 자체가 창문이에요. 인간은 창문뿐이에요. 현대물리학으로 보면 양자가 지 마음대로 왔다갔다해요. 전자라는 게 소립자가 또는 광자(빛의 입자)가. 라이프니츠는 이야기합니다. 한 지점에 둘, 셋, 넷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아담은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은 하나님에게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담으로 하여금 죄를 안 짓는 가능성보다도 짓는 가능성을 아담의 단자를 통해서 펼쳐낸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아담이 자기 인생에 대해서 관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관여할 수 없지요. 왜 관여할 수 없느냐 하면,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아담 자체가 셀프가 아니고 에고기 때문에 그래요.

에고를 뭐라고 했습니까? 몸이 있고 몸에서 나온 이미지라 했지요. 그러니까 에고는 실체가 없어요. 우리 몸이 있을 뿐이에요. 현재 있는 몸을 나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 나라는 것이 실체가 없어요. 그냥 이미지라니까. 피어나는 부대효과에 불과한 거예요. 그럼 나라는 것이 언제 사라지느냐 하면, 잠잘 때, 졸도할 때, 충격 받아서 의식이 없을 때.

“영철아, 영철아.” 하면 일어납니까? 몸을 흔들어 깨우지요. 만약에 두뇌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합시다. “영철아.” 하면, “누구시지요? 제가요? 제가 영철이에요?” “정신 차려라. 왜 이렇게 됐나?” “내가 뭐 어때서요?” 이건 교통사고도 그렇지만 저나 여러분이 나이 한 팔십 쯤 되서 치매 걸리면 모른다니까요. “할아버지, 저 유나에요.” “유나가 누구지? 몰라.” 드라마 <유나의 거리>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인간은 몸이에요. 몸이 전부에요. 에고, 나란 만약에 뭔가에 부딪치면 한꺼번에 날아가 버려요. 그러면 인간이란 내가 뭘 하는 것이 아니고 몸이 하고자 했었지요. 장발장 보세요. 배고프니까 나는 저걸 먹으면 도둑이 된다는 걸 알잖아요. 하지만 내 몸이 빵을 훔쳐서 교도소에 갇히잖아요.

여러분, 율법을 알기만 하면 죄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 로마서 2장에서 율법을 알기만 해도 의가 된다고 했어요? 율법을 외워도 다 알아도 그걸 성경대로 살지 않으면 죄가 되지요. 그러면 성경을 안다는 자체가 이게 의가 됩니까? 그건 의가 안 되잖아요. 성경을 안 상태에서나 모르는 상태에서나 무조건 성경대로 안 살면 죄가 되는 거예요. 처음부터 인간의 몸이 죄가 된다면 죄가 되고 난 뒤에 율법을 줬다는 말은 뭡니까? 이미 죄인 된 그 죄를 이제는 확인차원에서 그 다음에 말씀이 주어지는 거죠. 그런데 인간은 몸이 우선이 아니고 나를 위해서 내 몸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나를 죄인 만들게 하는 그 말씀을 안 보고 싶어요. 교회도 안 나가고 싶어요. 설교도 듣기 싫어해요. 왜? 나는 잘났으니까.

얼마 전에 우리교회에 어떤 부부가 오셨는데 분명히 부부가 왔어요. 아내는 교회에 들어오고 남편은 예배 끝날 때까지 차에 앉아있는 거예요. 들어오라고, 들어오라고 식구가 아무리 해도 안 들어와요. 왜 안 들어오지요? 교회가 왜 싫은 거죠? 그 사람 상식에 의하면 교회는 신의 말을 하지요. 신의 말을 하면 본인이 당당해요, 뭔가 부족한 게 많습니까? 신의 말씀 앞에 인간은 부족한 게 많지요. 부족한 게 많으면 자기는 졸지에 회개할 거리가 많고 죄인 되지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차에 앉아있는 그 몸이 교회에 앉아있다고 달라져요, 안 달라져요? 안 달라지지요. 선악과 따먹기 전의 몸이나 따먹고 난 뒤의 그 몸이나 맨 아담의 같은 몸이죠. 그런데 뭐가 달라졌어요? 부끄럽다고 아담이 자기를 가렸잖아요. 그러면 선악과 따먹기 전에 왜 안 가렸지요? 어디서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몸의 변화에요, 어디의 변화에요? 자아의 변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자아가 발생되면서 “내가 따먹은 것은, 하나님이 주신 저 여자가 따먹으라고 해서 따먹었습니다.” 여자가 하는 말이, “내가 아니고 저 뱀이 따먹으라고 해서 따먹었습니다.”

뱀 집어넣은 하나님 책임이고, 잠잘 때 갈빗대로 만든 여자 책임이고. 결국 내가 아니라 여자 책임이라는 거예요. 하지만 그 몸은 그 몸이에요. 그냥 무화과 나뭇잎 벗기면 똑같은 몸이에요. 우리의 몸은 주인을 찾아가야 되거든요. 우리의 몸은 우리의 소속, 주 되신 주인한테 가야 되는데 주인에게 가는 길을 마귀가 차단시켜버렸어. 마귀가 선악과 따먹어서 주인과 우리 사이에 나가 있어서 하나님께 가야 될 몸이 중간에 누가 가로챘습니까? 마귀가 시키는 대로 이미지라는 있지도 않은 나라는 허상이 내 몸을 가져간 거예요. 이제부터는 내 몸은 내가 관리한다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 자아와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몸과 상대합니다. 몸과 상대하니까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이 계속 죄가 되는 거예요. 이걸 욕구라 하고, 라이프니츠는 지각+욕구라고 본 겁니다. 욕구는 다른 말로 하면 힘이거든요. 무슨 힘? 우리 신체라는 힘, 몸의 힘이 점점 더 성장하고 하나님의 단자에 의해서 발전하고 성장하는 겁니다.

알기 쉽게 말해서 단자는 어떻게 만들어졌느냐 하면,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하나님이 처음에 한꺼번에 만들어버렸어요. 미래까지 포함된 단자를 만들었어요. 어떤 단자는 동물, 어떤 단자는 광물, 어떤 단자는 인간이 되는데 설계도가 펼쳐져요. 그만큼 다채롭지요. 그 모든 다채로움은 결국 단자, 여기에서 나오는 겁니다. 단자가 어떤 것이냐는 살아가면서 아는 거예요.

지각+욕구니까 힘에 의해서 지각이 느껴지는 거예요. 이게 미세지각 같으면 광물, 고차원 지각 같으면 스스로 자기를 반성하는 하나님, 이렇게 되는 겁니다. 결국 남는 건 뭐예요? 이 세상은 하나님, 신의 활력만 충만하고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아시겠지요. 그 다음에 계속 해봅시다. 라이프니츠는 자연세계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윤리까지 언급하니까.

아담이 죄를 지었다. 하는 순간 아담은 죄를 짓지 않을 가능성, 이걸 가능성으로 본다고요. 그건 아담의 단자가 죄를 짓는 가능성을 보인 거예요. 이 가능성은 결코 아담이라는 인간의 가능성으로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없어요. 단자가 펼쳐지니까 아담이 된 거기 때문에 아담 본인 소속의 가능성으로 되진 않아요. 본인 속에 있는 단자의 소속이 되지.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이 단자가 마지막 노리는 것은 하나님 형상입니다. 그럴 때 창세가 1장 26절에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지요. 라이프니츠는 그냥 그걸 그대로 보자 이 말이에요. 그대로 보는 데도 불구하고 라이프니츠 같은 해석이 안 나오는 이유가, 하나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에고가 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으니까 그 다음에 에고가 있으니까 나는 잘났다. 날 건드리지 마. 왜? 하나님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존엄하고 고귀한 존재로 본 거예요.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어떻게 봅니까? 본문 그대로 봅시다. 하나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중요하지 않고 뭐가 중요해요? 단자 속에 있는 하나님 형상이 나보다 중요하지요. 보세요. 똑같은 본문을 두고 강조점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완전히 차이가 나지요. 라이프니츠의 생각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그 중심이 하나님의 전능하심 중심이 아니고 내가 잘났다는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갔다. 지금까지. 라이프니츠 시대뿐만 아니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범죄와 모든 죄악들은 밑을 파보면 결국 내가 잘났다는 겁니다.

고속도로 주유소에서 기름 넣고 외상 하자고 할 때 안 해주니까 차 세워놓고 편의점에서 담배 사고 담배 값은 나중에 준다고 하자 안 된다고 하니까 휘발유를 과자봉지에 붓고 불질러버렸어요. 오늘아침 뉴스거든요. 그래서 도망가니까 직원들이 붙잡았어요. 왜 불 질렀느냐고 하니까 횡설수설하고. 정신병자 비슷하지요.

라캉은 말하기를 정신병이란 자기 에고를 보여줄 이미지를 못 만들었을 경우를 정신병이라 했어요. 참 재미있는 말이에요. 정신병이란 자기 잘남을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를 따로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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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727건 중 2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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