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01 미국뉴저지교회a
20141001 미국뉴저지교회a
이름 : 한윤범(IP:119.192.174.28)
20141001 미국뉴저지교회a
(강의:이근호 목사)
성경 로마서 1장 2~4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아멘.
이 대목부터 시작해서 목표는 로마서 1장에서 8장까지 어떻게 관통되는지 그것을 제가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이번 계획으로는 금요일에 9장부터 16장까지 다 할 텐데요, 로마서 내용이 관통된다는 말이 뭔 뜻이냐 하면, 로마서 1장에서 보는 관점이나 4장, 5장, 15장 어디를 봐도 통일된 사도 바울의 복음이 나오는 안목을 목회자뿐만 아니고 평신도도 갖기를 바라서 그렇게 생각해봤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16장까지 일관된 복음이 나온다면 그건 곧 예레미야, 이사야, 출애굽기, 성경 66권 어디를 건드려도 로마서와 동일한 결론과 내용이 나올 수 있는 그런 안목이 있기를 제가 바랍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1장 2절에 보니까 “이 복음”이라고 해서 복음에 대해서 언급이 돼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상식이 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입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거든요. 우리는 생각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가 복음에 대해서 언급을 했지 않았느냐? 그걸로 끝이 아니냐? 그렇다면 마태, 마가, 누가복음으로 충분한데 왜 로마서 1장 2절에서 또 복음이 언급이 돼있느냐는 것부터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거든요. 미흡한가, 아니면 모자라는 건가? 아니면 마태, 마가복음에 대해서 사람들이 봐도 몰랐는가? 도대체 어느 쪽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또 다시 복음을 언급해야 하는가? 거기에 대한 답변은 간단합니다.
최종 정리한 것까지 마태, 마가, 누가(공관복음이라고 하는데)에서 흘러나오는 복음이 참으로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그것을 로마서에서 일치되게 정립될 수 있어야 된다고 해서 로마서에서 복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백 사람이 마가를 보고 천 사람이 마태를 볼 때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구구절절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 모든 해석을 바울 서신에 의해서 무엇이 잘못되었으면 무엇이 옳은 복음인지 최종 정립하는 역할을 사도 바울을 통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을 유대인을 향하여 복음을 외쳤다면,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느냐? 그것은 아니다. 그럼 뭐냐? 이방인들이 아는 복음이나, 유대인들이 아는 복음이나 출발점은 자신의 삶의 정황(독일말로 sitz im leben)에서 나왔든 결론은 하나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 대목을 사실은 약간 더 설명해야 되는데, 설명 안 한다고 질책 많이 받았습니다.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는다고 하거든요. 여러분, 여기서 뭔가 빠졌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는다고 할 때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해야 저주 안 받는 진짜 영생 얻는 복음이라고 단박 오지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뭔가 빠져있어요. we우리라 할지라도, 그럼 우리 속에 사도 바울 본인도 포함이 돼있습니다. 내가 전한 복음에 대해서 내가 믿지 않는다면 나라도 저주받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나는 옳고 너희는 틀리다는 그런 대립논리가 복음에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로마서 9장에 내가 그리스도에서 끊어질지라도 우리 이스라엘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 설교가 충격이라고 하는데 저는 사도 바울의 그 이야기가 충격이에요. 사도 바울이 하는 그런 주장을 같이 하는 설교자나 교인들 찾아보기가 참 힘들어요. 우리 교회는 복음을 알고 있다는 사람들 참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우리 교회마저 항상 저주에 노출돼있고, 우리 교회가 십 년 동안 복음 전해도 십일 년째 복음 안 전하면 우리 교회라도 저주받는 것에 대해서 동의하는 그러한 마음가짐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는다. 빨리 지나가면 그렇게 들리는데 자세히 보면, 천사뿐만 아니고 우리라 할지라도 그런 복음을 전한 나라 할지라도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는 자동적으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그런 욕구와 욕심은 복음에서는 수용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거예요.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그 본성을 복음이란 이름으로 신앙이란 이름으로 교회 다닌다는 이름으로 어떻게 그걸 무슨 수로 확보합니까? 도를 닦으면 닦을수록 자신은 점점 더 빛나는데 닦은 도를 스스로 포기한다는 것이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하냐 이 말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거예요?
“목사님, 사도 바울이나 위대하지 우리 같은 초자한테는 해당 안 됩니다.”라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신다면, 제가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요한복음은 시대적으로 뒤에 있기 때문에 빼놓고)에서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서 뭔가 느끼는 게 있잖아요. 그 느끼는 것을 어디에 모으느냐? 나의 구원욕구를 만족하기 위해서 그걸 채워줄 때 그렇게 해서 나타난 정리된 복음이 갈라디아서 1장과 로마서 1장과 일치되는지 확인해보라고 로마서, 갈라디아서 주신 거예요. 일치될 수가 없지요.
사람의 모든 노동은 누구 좋으라고 합니까? 노동 당사자인 노동 주체인 자기 좋으라고 노동하지 남 주기 위해서 하는 것 아니잖아요. 공부해서 남 준다는 말이 있는데 저는 믿지 않습니다. 어떻게 자기를 빼놓고 남 구원하려고 자신은 자진해서 지옥 간다면 구태여 신앙생활, 교회 나올 필요 없지 않습니까. 다 교회 나오고 예수 믿지만 결국은 마지막에 “주여, 저는 기어이 살아남았습니다.” 그것 외치는 것을 최후의 희망사항으로 삼고 사는데 그게 복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로마서 1장에서 복음을 어디서 끄집어내느냐 하면, 이거는 너무 상식적인 이야기, 이걸 모르는 사람 없기 때문에 내가 기분 편하게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1장에서 복음을 어디서 끄집어내느냐 하면, 사람들이 구원받고 싶어요, 죽어서 좋은데 가고 싶어요, 나 살려주세요, 지옥 가기 싫어요. 이러한 욕구사항에 대한 반영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복음이 나옵니다. 제가 이야기한 것이 우습지요. 너무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지요.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초신자도 여기에 반대 안 할 거예요.
그 다음에 제가 말을 끄집어내면 반대할 사람이 혹시 있을까 염려됩니다. 그 복음 예수님에서 나온 복음이 여러분에게 가지 않고 예수님 안에 도로 회수되고 환원됩니다. 이것 참 난처하네요. 조금 전에 명동칼국수에서 푸짐한 해물칼국수 먹고 왔습니다. 명동칼국수 주방장이 칼국수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주문했어요. 한 15분 기다렸는데 맛있게 나왔지요. 그런데 15분이 아니라 15일 동안 기다렸는데도 명동칼국수가 안 나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가 만들고 자기가 홀라당 먹어버렸어요. 뭐예요? 우리 같으면 항의하겠지요. 칼국수 주문했는데 15일 동안 기다렸는데 왜 안 나옵니까? 칼국수집 주인이 하는 말이, 네가 인간이 아니거든. 얼마나 모독적인 이야기입니까.
인간의 행복과 진선미를 위해서 인간이 어떻게 위대해질 수 있는가를 위해서 종교가 있는데 인간을 비껴간다면 미쳤다고 교회 다니고 예수 믿습니까? 왜 나왔어요? 여러분의 행복을 비껴가서 예수님 혼자 좋으면 우리는 뭐예요? 혼자서 다 하세요. 우리는 삐졌어요. 이렇게 갈 게 뻔하단 말이죠. 사도 바울이 전하기를 그게 복음이라는 겁니다.
제가 너무나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제가 옆에 계신 분에게 여기 오기 직전에 물어봤어요. 사진 찍힌다는 것을 영어로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까 당황하셨는지 의논해서 답변해주셨습니다. 사진 찍힌다는 것은 수동, 다른 말로 피동. 정말 알기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복음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상대로 찍으시고 “참 내 모습 잘 나왔네.” 하고 필름으로 간직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들의 나라에 편입된 존재라고 규정합니다. 철저하게 수동적이죠.
원해서 오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 본인이 원해서 오셔서 부대효과를 거치면서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간다는 로마서 11장 36절 말씀을 구현하면서 네가 구원받은 것은 행함이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의 행함으로 된 것이다. 엘리야 시대 때 많은 사람이 있지만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남은 자만 건지겠다. 이게 로마서 9장, 11장에 연속되어 나옵니다.
저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설교 다시해요. 그분이 진도 따라잡도록. 다시 하겠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보면서 사람들은 천국이 가깝다는 소식에 대해서 아주 반가워했습니다. 그래, 불교에 없는 천국, 힌두교에 없는 천국, 바로 여기에 있었네. 신이시여, 이런 계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여, 뭘 해드리면 될까요? 어떻게 믿으면 될까요?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죽어서 영원한 천국 보장해주소서. 이사야에 보니까 양이 사자와 놀고 신났어, 신났어. 요한계시록에 보니까 생명나무에서 헤엄치고.
그 좋은 세상이 있다면 그게 희망이라면 이 땅에서 뉴저지에서 뉴욕에서 어떤 시련과 고통을 받는다할지라도 내가 기어이 예수님 믿고 견디리라.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면서 기어이 남들이 가지 못한 천국에 골인한다면, 여러분, 마지막 웃는 자가 승리자거든요. 거기에다 마태복음 7장에 좁은 문 나오니까,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본 어떤 자부심, 산상설교 나오니까 “야, 이런 법이 있었구나. 이걸 한 번 지켜 봐. 어, 되네.”라는 그러한 자긍심.
그런데 그 모든 결론이 주님의 것을 내 것으로 전환시키는 종교적인 수완, 테크닉, 기술발휘를 내세운 어떤 능력으로 마중 나온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셔야 돼요. 자기 좋으라고 예수님 주신 것을 이용해먹으려는 그러면서도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니까 이건 자기를 낮추라는 이야기죠. 낮춰서라도 기어이 얻고자 하는 천국까지 확보하겠다. 십자가 지고 가라? 테레사 수녀, 울지 마 톤즈, 그렇지 그 어려운 일이 십자가라면 한 번 해봐? 언제? 사업 망할 때. 지금은 안 돼. 나중에 망하고 난 뒤에 아프리카에 가 봐? 이런 생각까지 하면 뭔가 내가 어느 정도로 대단한 집념의 소유자인지, 그걸 한국에서는 ‘의지의 한국인’이라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상대로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하니까 예수님의 나의 라이벌 대상 되는 거예요. 그대로 완전하진 않지만 건방지게 완전하다는 말은 못 붙이지만(자기도 건방진 건 알거든요) 금식 40일? 그럼 나는 겸손하게 39일. 뭔가 해보면서 기어이 보라, 나는 믿음을 얻었노라. 그러한 집념을 발휘하는 그걸 시험하는 장을 자기 인생을 활용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 그 끝은 뭐였던가요? 누구 영광이었던가요?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가 있습니다. 당신은 마태, 마가, 누가 해석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잘못한 해석을 수정할 능력은 당신에게 없습니다. 그것은 타고난 본성입니다.
로마서 1장 2~4절에서 복음은 이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설명을 간단하게 하면 죽었다가 살아났다. 이것이 복음이다. 아까 보셨지요.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이렇게 돼있지요.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보면서 왜 우리가 복음을 잘못 이해할 수밖에 없었느냐 하면, 죽었다가 살아난 분을 내가 그걸 받아들임으로써 나는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고 할 때 지금 입술이 떨려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이게 아니라고 한다면 욕 얻어먹을 판이에요. “이것 맞잖아요?” 이런 표정들인데 그것이 잘못이었다고 하면, “그럼 당신의 대안이 뭐야?” 지금 저한테 쏟아대는 것 같아.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을 내가 영접하면 믿으면, 로마서 10장 13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을 얻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온다면 들어올 때부터 우리는 크고 예수님은 우리보다 작은 분이 되는 겁니다. 복음이란 뭐냐? 여기서 여기까지 연결시켜주는데 우리의 보는 것, 이해하는 것으로 되는 게 아니고 성령의 능력으로 돼있지요. 아까 로마서 1장에.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한테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우리는 마태, 마가, 누가를 보면서 지금 내가 살아있는 것처럼 죽어서 어디 갈까? 이왕이면 좋은데 가야지. 돌아가신 아버지가 장로님이고 어머니가 권사님이라면 또는 사랑하는 애인이 천국에 가있다면 우리는 합류하고 싶은 거예요. 오겡끼데스까, 거기 잘 계십니까? 제가 갈 테니까 가다리세요. 난 당신을 잊지 못합니다. 합류하겠습니다. 그런 희망을 보여주는데 마태, 마가, 누가복음으로 구원받는 나를 통째로 집어서 죽여 버리는 거예요. 이런 나를, 지그 살듯이 천국 가서 살고 싶은 나를 아예 납치해서 죽여 버리면 그러한 희망과 꿈을 꾸는 내가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내 꿈도 희망도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눈 떠보니까 나를 위한 예수로 눈 떠진 게 아니고 주님의 소유로 달라진 채 내가 등장하니까 우리는 생각합니다. “주여, 도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하셨습니까?” 한국에서 3년 전인가 유명한 치킨cf가 있었어요. 차태현이란 탤런트가, “도대체 닭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오묘한 맛이 어떻게 나타난 거야?” 주여, 저에게 무슨 짓을 했습니까? 죽었다가 살아나게 하신 겁니다. 그렇게 되면 현재 무조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살아야 된다는 나는 신을 찾아요. 신 또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함, 그런 전제를 깔고 자기는 복음을 이해하려는데 결론은 뭐냐 하면, 아까 목사님이 중요한 걸 지적했어요. 이근호 목사님은 명제부터 던지고 난 뒤에 하기 때문에 이해 안 되거든 질문하라고 하잖아요.
명제부터 던지겠습니다. 뭐냐 하면, 죄인이 죄인을 구원하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여러분, 죄인이 죄인을 구원해요? 너 같은 인간한테는 나 같은 죄인이 필요하다. 너희들은 눈앞에 죄인을 모르고 뭘 찾느냐 하면,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나를 행복하게 만들 신이시여(그것도 그냥 신이면 무식하니까),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건져주소서.”라고 그런 마음으로 실은 자기 자신을 살리겠다는 자기가 자기를 살리는 방법으로 하는 거예요. 왜 우리가 살아야 되느냐 하면, 누가 뭐래도 나는 잘난 존재고, 정의를 사랑하는 존재고, 나한테는 내가 제일 예뻐.
예쁜 내 존재가 나보다 더 훌륭하신 신이시여, 나를 건지소서. 그것이 인간의 타고난 종교라는 거예요. 기독교, 천주교, 다 종교라면 실제로 성경에서는 죄인이 죄인을 구원하는 방식을 하나님은 채택했습니다. 죄인이란 생각이 안 들거든 너는 구원자도 못 알아보는 안목을 가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네가 죄인임을 알지 못한다면 실제로 네 곁에 오신 구원자도 전혀 눈치 못 채고 있고 무식한 채로 있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죄인이 죄인 되게 하는 공식을 제가 제시했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타고난 공식을 또 다시 적용시키겠습니다. 나는, 그냥 나가 아니죠. 예쁜 나는, 그냥 예쁜 나가 아니죠. 천하보다 귀한 나는 어떤 식으로 천국, 죽어서도 내가 지금 사랑하는 이상으로 나를 사랑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온 이상한 목사가 하는 말이, 죄인이 죄인을 구원한다고 하니까 다시 말해서 자기가 죄인 됨을 알 때 그 죄인 됨을 건져주시는 분은 똑같은 죄인 취급받은 분이 나를 건진다고 이야기할 때 그 공식을 적용하게 되면, “좋습니다. 제가 죄인 되겠습니다. 내가 자진해서 죄인 되는 한이 있더라도 비로소 죄인 됨으로써 구원자가 죄인의 모습으로 왔다는 것을 파악해서 그 죄인에게 나의 모든 것을 헌신해서 기어이 나는 나를 건지고야 말겠습니다.”라는 전략을 또 세우게 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십자가도 이야기하고, 여기 로마서 1장 3절에서 뭐라고 하는지 읽어보겠습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이 대목에서 방금 이야기한 내가 죄인 되어서 죄인으로 오신 구원자를 만나서 기어이 나를 천국까지 건져 올리겠다고 할 때 하나님의 답변은 뭐냐 하면, 너는 아무리 노력해도 네가 죄가 뭔지 모르는 존재라고 아예 단정을 짓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제가 언급해드린다면, 죄라는 것은 다윗언약에 의해서만 죄가 밝혀져요. 스스로 죄를 많이 진다고 죄를 아는 게 아니고 죄 짓는 방식까지 덮쳐야 됩니다. 그것을 로마서에서는 두 자로 율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3장에 율법이 주어진 것은 죄로 더욱 더 죄 되게 하고 모든 사람의 입을 막아서 저주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
헌금하면서 헌금 내는 손은 떨리지요. 돈을 쥐고 있으니까. 헌금하면서 내가 얼마나 돈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헌금하지 않는 사람은 몰라요. 헌금하세요. 하면서 헌금하는 자체가 돈이라는 강한 집념이 담겨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하도 어떤 분들이 이근호 목사는 헌금하지 말라고 강의했다고 해서 지금 여기서 딴 소리를 해야 돼요. 헌금하세요. 죄를 받으세요. 헌금하면서 헌금하기 전까지는 몰랐던 죄를 돈에 대한 집착과 애착을 헌금함으로써 더욱 확실하게 느끼세요. 이제 아멘 나왔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그 율법을 모세언약이라고 하고 그 다음에 나온 언약은 다윗언약이 주어집니다. 율법언약으로 인간이 실패했다는 걸 확인하는 것이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이동하는 겁니다. 뭐가 이동하느냐?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매개체가 얼마나 부실한지 보여주면서 그 간격을 유지하면서 이동하는 것이 역사거든요. 역사가 흘러가면서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점점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성전 지었지만 실패했고, 율법 지킨다 했지만 실패했고, 제사장 주었지만 실패했고, 선지자 주었지만 실패했고, 간격만 점점 더 늘어나지요. 저는 이걸 가랑이 찢어진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모세언약과 다윗언약을 통해서 뭘 아느냐 하면, 인간 내부를 찢습니다. 찢는다는 말이 너무 참혹하고 잔인해 보이잖아요. 그래서 이걸 저는 망사스타킹이라 합니다. 망사스타킹을 가게에서 살 때는 촘촘해요. 신으면 쩍쩍 갈라지지요. 망사스타킹이 로마서 7장에 나옵니다. 나 바깥의 나는 하나님의 법을 좋아해요. 7장 끝에 보면 또 다른 게 내 안에 들어있어서 이게 죄의 법인데 이게 나를 찢어지게 하는 거예요.
그럼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나를 살리기 위해서 마태복음 시키는 대로 하는데 주께서 구원하는 방법은 그 나를 쥐포 찢듯이 찢어버려요. 그럼 나는 없어집니다. 구원받을 내가 없어지면서 나는 말씀을 증거하는 필름이 돼버리고 말죠. 아까 사진 찍혔다고 했죠. 수동형으로 사진을 찍어놨는데 그 결과는 필름이잖아요. 필름처럼 나는 없고 나라고 우기던 그것을 주께서 언약을 찍어서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었음을 보여주고 대외적으로 오직 예수님 사랑만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증인되게 만드는 겁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놀라운 이야기가, 그때 말할 때 네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네 속의 성령이 말한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자아를 유지할 때는 그 말씀이 해당이 안 되고 성령 오기 전에는 내 악이 내 이름을 사칭해서 나라는 이름으로 내 악이 나를 사용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령 오기 전이나 온 후나 우리는 누구의 노리개에요. 마귀는 뒤에 숨어버리니까 우리는 마귀도 없고, 마귀라 하면 얼굴이 녹색이고(오즈의 마법사도 아니고), 그 정도로 마귀를 생각하는데 뿔나고 박쥐처럼 무대에 돌아다니면 그게 마귀인 줄 아는데 마귀는 망사스타킹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걸 고집하는 그게 마귀에요. 내가 뭘 하고 내가 십일조하고 내가 청소하고 내가 봉사하고 그게 마귀입니다. 또 실수했다. 설명하는데 갑작스럽게 도약해버렸네. 내가 주의해야 되는데 급진적으로 진도가 확 나갔어요. 죄송합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이건 제가 설명을 좀 더 하기 위해서 이걸 먼저 첨부합니다. 나라는 게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찾아올 때 내 앞에서 10미터 앞에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멈추는 것이 옛날 방식의 법이었어요. 그게 돌 판이었어요. 돌 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그것이 내 코앞에 스톱이 돼요. 내 마음에는 안 들어와요. 예레미야 31장 32절에 나오는 새 언약의 예언에 의하면 내 앞에 있는 말씀이 허락도 없이 내 마음까지 장악하게 되는 그런 것까지 책임지고 서비스해주겠다는 것이 새 언약 시대에 구원받은 사람에게 혜택이에요.
전에는 내 앞에 스톱이 됐지만 예를 들어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면 내가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살인하지 말라는 내 앞에 스톱이 돼야 되고, 그 다음에 “주여, 보소서. 아직도 내가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어때요?” 이렇게 되는데 그런 모든 실험을 다 실패로 끝났어요. 신약 때는 그 말씀이 우리에게 쳐들어오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가 살인 안 하는 행위로 전환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지키지도 않았는데 지킨 것이 되고 말았어요. 왜 그러느냐? 우리의 모든 것이 갈기갈기 말씀에 의해서 찢긴 망사스타킹이 되어서 그런 거예요.
그러면 말씀으로 하게 되면 우리는 살았네. 그걸로 끝났네, 없네. 이렇게 되는데 말씀이 우리를 찾아오게 되면, 여러분 다 이해하신다 치고 넘어갑니다. 여기에 언약이 찾아와요. 언약도 어렵지요. 그럼 바꿉시다. 하나님의 약속이 찾아오는 거예요. 약속이 찾아오게 되면 간음하지 말라는 것이 이미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도 간음 안 한 게 돼요.
여러분이 만약에 결혼했는데 남편이 아내에게 이야기합니다. “여보, 나는 지금까지 바람피운 적 없어. 다른 여자한테 음란한 마음조차 품지 않았어.” 이것 간음한 겁니까, 간음 안 한 겁니까? 바람피운 적도 없다. 소주광고 달력에 나온 여자 보고도 절대로 음란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 그것 간음한 거예요, 간음 안 한 거예요? 이건 누가 봐도 간음 안 했지요. 간음할 잠재성 많습니다. 제가 여기 나이로 61세거든요. 61년 동안 간음 안 했다할지라도 내년 되면 보장 못해요. 내년은 안 살아봤으니까. 잠재된 간음자 돼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것은 간음 안 할 것으로 쳐주는 것이 아니고, 말을 바꾸겠습니다. “여보, 나는 당신을 사랑해.” 간음 한 거예요, 간음 안 한 거예요? 그게 바로 신약에만 최종적으로 적용되는 간음 안 한 거예요. 사랑은 모든 율법을 완성시킨다고 로마서 13장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게 로마서거든요.
만약에 내가 당신에게 남편도리로서 바람도 안 피우고 간음도 안 했다고 해버리면 이것은 바로 자기 의가 되면서 진정한 주께서 원한 약속의 완성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로 내가 망사스타킹이 안 됐기 때문에, 내가 찢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잘난 내가 계속 유지되니까 그 아내는 잘난 남편 뒷바라지한다고 스트레스 받고 나중에 우울증 걸립니다. “어이구. 잘났어요.” “이 정도야 빨리 밥 해내.” 이렇게 되면 자기 의로 상대방을 지배하는 그런 관계가 됩니다. 신약 시대는 주께서 모든 것을 다 찢어서 죄 없는 자만 돌로 쳐야 될 그런 원리가 적용된 시대가 이 시대입니다.
돌 판이 우리 속에 나올 때 내 안에,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인데, 언약 자체를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이여, 이렇게 십자가 언약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이 간음을 완성하는 사랑인 줄 압니다.” 하고 이걸 받아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우리 안에서 내가 자아를 상상하고 우리 안에서 예수님을 상상해서 그 상상된 내가 상상된 예수를 또 다시 내가 그분을 가져야 된다는 바깥에서 하던 행세가 안에서 똑같이 벌어집니다. 이거는 교묘한 지식이에요. 이러서는 안 되거든요.
그럼 언약이 들어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언약은 피 흘린 어린양과 마주치는 이것이 우리 안에 들어와 버립니다. 그럼 죄인의 역할을 누가 하느냐 하면, 바로 우리가 죄인의 자리에 서있어야 되고 그것을 매일같이 되풀이해서 용서해주는 역할은 누가 하느냐? 성령을 통해서 언약의 완성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서 우리를 계속해서 용서해주는 방식으로 언약은 우리 안에 자리 잡습니다.
이렇게 자리 잡아서 구원을 받게 되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신약 시대에는 이근호 목사에 의하면 사랑하는 것이 간음의 완성이다. 그렇다면 아내를 사랑해야지. 주여, 저는 아내를 사랑합니다. 사랑은 율법을 완성했으니까 사랑하는 재롱잔치 보세요. 이런 식으로 돼버리면 이것은 결국 뭐냐 하면, 자기 안에 잘난 자기만 턱하니 버티고 있는 셈이 돼버려요.
그런데 오후 2시 40분에 사랑하다가 오후 4시 반에 아내가 차 끌고 장에 가다가 속도위반에 걸려서 육만 원짜리 티켓 끊고 나올 때 갑자기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지요. 그러면 2시 45분의 사랑이 왜 유지가 안 되지요? 그때 마침 예수님 재림하시면 어떡해요? 하필 오후 4시 43분에 재림하시면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고. 생각만 해도 끔찍해. 하필 그 타이밍에 오시다니.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 다음부터 걱정이 뭐냐 하면, 대비책이 없을까 하고 찾아보니까 깨어있으라 도적같이 온다니까 이제는 성냥개비로 눈을 감기지 않게 하든지, 쉬지 말고 기도하라니까 시간 재서 50분 기도하고 10분 쉬든지, 이건 그야말로 광신도입니다. 정신병자에요.
제가 중간에 그런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죄를 안다, 모른다? 인간은 죄를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명령과 권면은 십자가 이후에 구원받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죄가, 우리가 미처 이것도 죄라고 할 정도로 죄를 더욱 더 풍성하게 만들어서 이미 그것마저 용서하신 분이 우리 안에 장착 돼있음을 다시 말해서 예수 믿고 더욱 더 잘난 나를 믿지 말고 예수 믿고 난 뒤에 더욱 더 내가 이 정도로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 있어서 오직 그분만, 십자가만 자랑하게 하는 것이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6장입니다. 나는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나는 예수님과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일체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사도 바울 끝났어. 백날 성령 받았다고 해도 사도라도 지옥 가는구나. 이렇게 하지 마세요. 그것이 바로 진정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 공통점이고 보편적인 현상이에요. 마태, 마가, 누가 제각기 보게 되면 자기 정립했다고 우기는데 그것이 사도 바울의 복음을 통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공통적인 것이 있는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동일한 고백이 나올 때 그것을 후차적으로 교회라고 이야기하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인간이 세우는 것이 아니고 발생되고 출현되고 나타날 때에 우리가 애썼다고 하지 마시고 주께서 지금도 이 교회 가운데 애쓰고 계시다는 것을 체험으로 온 몸으로 만끽하라고 늘 우리 식의 교회는 어긋나게 돼있어요. 저 사람은 분명히 앞으로 이년 후에도 아마 교회 봉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엉뚱한 짓을 일으킬 때 “주여, 이것이 진정 교회란 말입니까?” “원래 그랬어. 원래 그렇다니까. 교회가 부서져도 교회는 부서지지 않는 거야.” 교회는 부서져도 그리스도 몸은 부서질 일이 없어요.
그리고 남들 욕하지 마. 육십 세까지는 안 그랬지? 내년 되면 네 몸에서 어떤 짓이 나올 때 너도 장담 못해. 하지만 주의할 것은 지금 죄인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은 것을 믿는 사람은 내년 되서 내가 깜짝 놀랄 죄가 나온다할지라도 그것마저 이미 용서가 된 상태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주께서 그런 상황을 의도적으로 유발하신 겁니다. 갑자기 문장 길어져서 미안한데 문장이 길어질 수밖에 없어요.
다시 하겠습니다. 나는 저 사람 같이 되지 않았어.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란 말이죠. 그런데 같이 형제들 중에서 돈에 미혹 받아서 사기 치고 그런 사람 있잖아요. 그래서 저 사람은 신자 아니라고 했는데 갑자기 그 다음 해에 자기 집에 예상 못할 어떤 재정적인 어려움이 왔을 때 성도 여러분, 저도 인간입니다. 저는 천사가 아니었어요. 너무 무리하게 기대하지 마세요. 하지만 이번 일만 잘 되면 신앙생활 잘 하겠다고 편지 한 통 남기고 떠나버릴 때 얼마나 뒤에서 씹을까요? 그럴 줄 알았다, 그럴 줄 몰랐다, 갑론을박한단 말이죠.
그럴 때 교회는 어떻게 되느냐는 겁니다. 과연 그 교회가 엉터리 교회냐 하는 겁니다. 그거는 엉터리 교회가 아니에요. 어떤 사람이 뭔가 문제가 생길 때 그것이 망대가 무너져서 18명 죽을 때 세월호 물에 빠져 안산 얘들 죽을 때 그것이 그 사람이 잘못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 너에게도 직접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너는 과연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지금 일어나기 전에 미리 보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럴 때 그런 일이 일어나도 믿음 지키겠다는 것이 성도가 아니고, ‘아니고’에 악센트, 저는 지켜낸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고 그런 일은 의도적으로 일으킨 것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걸 지금 미리 믿는 사람은 그런 일을 당해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믿어버린다면 그 사람은 본인의 믿음이 아니고 성령을 통해 주신 선물입니다. 여러분, 이것 정리 안 되면 타인을 통해서 시험 받아 낙담합니다.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다음 해봅시다. 죄인+의인도 아닌 죄인+피로 용서하신 그것, 그렇게 되려면 죄인으로 하여금 죄인 되기 위해서 모세언약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다윗언약은 무엇이냐? 둘의 차이점을 이야기하세요. 이것 신학교에서 신학생에게 적당한 문제에요. 모세언약과 다윗언약의 차이점은 뭐냐? 혹시 여기 신학교 다니는 분이 계시면 이렇게 하시면 정답입니다. 모세언약은 개인이 지키는 반면에 다윗언약은 왕이 되신 분이 항상 대표로 지켜서 율법을 못 지키는 다른 사람에게 공짜로 혜택이 주어지는 구조가 다윗언약입니까? 이해되시죠.
모세언약은 사적으로 지켜서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 지키는 내가 복을 받고 못 지키면 내가 저주를 받는데 다윗언약은 한 분이 제대로 지키면 다른 사람은 그 혜택을 입어서 졸지에 그분의 백성이란 이름으로 단체로 입장이 가능한 시스템, 그게 바로 다윗언약이에요. 로마서 1장 3절에 보면,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으로 온 거예요. 다윗언약의 완성이기 때문에 다윗언약이 구원해주는 그 구원시스템을 견지하면서 성령을 통해서 한꺼번에 완전히 덮치게 하겠다는 거예요.
덮칠 때 나는 죄인인데 예수님이 의인이니까 나 아니고 주님이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의인이 되는 그러한 상황에 드디어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신약에서 제일 어려운 단어가 이야기해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 안에서 의인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이용하기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프란시스 베이컨이라는 유명한 현대미술작가가 삼면화를 그렸는데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있어요. 아마 경매하는 작품 하나에 200억 할 거예요. 그의 그림에 보면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일그러진 사람을 묘사해놨어요. 들뢰즈란 [감각의 논리]란 책에 이것을 많이 인용해놨어요.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일그러진 사람, 얼굴이 흉측한 괴물, 괴물이니까 피부가 벗겨진 거예요. 김태희나 전지현이나 영화배우 예쁘지요. 피부를 벗기면 안에 세포가 나오겠지요. 예쁠까요? 결국 예쁘다는 것은 피부만 껍데기만 예쁘다는 거죠.
예수 안에서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 죄인으로 드러나면서 율법 안에서 구원받는 것, 이것이 바로 다윗언약의 완성입니다. 거기서 뭘 보느냐 하면, 나는 나 자신을 제대로 보게 돼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십자가 피 흘림 앞에서 죄나 의나 용서에 대해서 유일하게 아시는 분은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뿐이에요. 우리는 생각하는데 하나님 계신 곳에 예수님 있다고 하는데 그거는 잘못된 말이고요, 예수님 계신 곳에 아버지가 있어요. 인간이 아는 하나님은 하나님 아닙니다.
아까 목사님 기도한 내용에 나오잖아요.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 갈 때 무슨 근거로 그런 짓을 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근거 하에 그 짓을 했거든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것이 정작 예수님한테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가 된 거예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땅에서 죄인으로 이미 규정받은 분이 예수님 아닙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예수는 정치범이에요. 죄인이에요. 그런데 하찮은 죄인이 세상에 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유일한,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길이 없어요. 오직 주님의 이름으로만 구원하기 위해서 죄인의 모습으로 올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그렇게 죄인으로 모습으로 오면 알아듣습니까? 모르지요. 왜? 우리는 잘났으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죄인이 죄인을 구원하는 방법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앞에서 모세언약, 다윗언약의 완성이 새 언약입니다. 그 십자가 피 앞에서 우리를 다시 보게 하는 겁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란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지 확실치 않습니다만 어떤 사람이 거울 속에 들어가 있어요. 거울은 내 모습이 비치게 돼있는데 거기는 나 말고 다른 모습이 있을 때 우리는 들어가고 싶어도 유리면 때문에 못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주께서는 십자가 안으로 들어오라는 거예요. 무슨 수로 들어갑니까? 성령의 손이 나와서 우리를 십자가 안에 집어넣으면 그때부터는 예수 안이라는 동그라미, 거울 속의 예수님과 우리가 함께 있게 되는 겁니다. 함께 있으면서 우리는 강도가 되고 세리가 되고 창기가 되고 옆에 거울, 용서하신 분은 주님이 함께 있고. 우리는 하나에 필름이죠. 사진 찍히고 필름이 된 겁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일을 실제로 당한 사람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어디 나옵니까? 로마서 4장에 아브라함이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란 사람의 특징은, 그분이 믿음의 조상이거든요. 그분이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에 믿을 보여주거든요. 아브라함의 믿음은 갈라짐이에요. 어떻게 갈라지냐 하면, 죄와 의가 갈라져서 합치될 수 없음을 그 빈 간격을 보여주는 것이 아브라함이란 탤런트의 역할이었습니다.
죄와 의로 갈라지기 전에 인간은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 또는 죄와 선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해서 선과 악을 인간은 차변, 대변, 장부에 기재해놓고 그것을 매개체, 매개란 연결체, 연결체로 누가 들어가 있느냐 하면, 자아를 여기에 집어넣어버려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올 때는 선과 악을 통합시키는 자아를 빼버립니다. 이걸 빼면서 아브람이란 이름을 빼면서 아브라함을 집어넣어요.
그러면 아브람과 아브라함의 차이가 뭐죠? 아브라함이 되어서 해야 될 추가적인 기능이 있어요. 그 기능이 뭐냐 하면, 아버지가 아들을 잡습니다. “아버지, 뭐 하십니까? 제사 드린다.” “불쏘시개는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지요?” “넌 몰라도 돼. 여호와이레,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셨어.”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산에 올라갑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입니다. 죽이려고 할 때 스톱! 멈추자 갑자기 수풀에 수양이 있지요. 하여튼 하나님도 미리 알려주면 얼마나 마음 편하겠습니다. 미리 알려주지 않고 잡을 때 알려줬습니다.
따라서 인간과 진짜 신과 접촉되는 것은 그냥 수양이 아니라 죽어야 될 사람을 대신한 어떤 무엇이거든요. 그러면 아브라함에서 무엇을 알아야 되느냐 하면, 나의 혈통이란 이삭에서 나의 노선이 통로가 이미 죽음을 통해서 하늘로 연결되는 다른 노선으로 노선이 갈라져요. 경부선, 전라선이 대전에서 갈라지듯이 하나님께서 갈라지면서 선과 악, 악과 선을 통합시키는 것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친히 준비하신 X, 친히 준비하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진정 선과 악을 통합시켜서 진짜 지옥 갈 사람은 지옥 보내고 그쪽에서 판정내리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는 거기서 자아 자리를 내놔야 되겠지요.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나 믿지 않는 게 믿음입니다. 나 믿지 않고 나를 완전히 들어내게 하신 그분이 내 자리에 계실 때 우리는 그걸 믿음이라고 하고, 아브라함은 그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겁니다. 말로 하니까 정말 어려운데요. 말로 하지 말고 실제로 하면 어떻습니까? 하신다면 이렇게 되지요.
요한복음 8장에서 현장에서 간통한 여인을 바리새인이 데려왔습니다. 여러분, 그 바리새인 참 고마운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현장에서 죽여도 되는데 안 죽이고 질질 끌고 예수님한테 데려온 거예요. 졸지에 그 여자는 구원받았어요. 누가 데려왔습니까? 율법을 주장하는 율법이 우리를 몽학선생 만들어서 데려왔습니다. 주님이 묻습니다. 너를 고소한 자가 있느냐? 없지요. 여러분, 남한테 고소 안 받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지 않습니까? 심지어 뻔뻔스럽게 간통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소 안 받는 그 즐거움. 이거는 노선이 인간 노선이 아니고 다른 노선, 예수 안에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 골로새서 3장처럼 다른 노선에 가버렸어요.
그게 뭐냐? 그 뒤에 나오는 말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더 간단하게 하면, 누려. 누리는 거예요. 뭘 누리는가? 용서하심을 누리는 겁니다. 잘나서? 아닙니다. 훌륭해서? 아닙니다. 완벽해서? 아닙니다. 내가 나 된 것은 주님 때문에. “주님께서 도대체 나 같이 아무것도 아닌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것만 증거할 때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거울 속에 함께 들어온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이제부터는 예수님만 증거 됩니다. 나 아니고 주님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할 때 “아이고, 집사님. 무슨 바람이 불어서 청소하십니까?” “나, 아니거든요. 나 아니고 주님이거든요.” “에이, 장난치지 말고요. 주님이라 하지 말고 무슨 기분 좋은 소식 있습니까? 얘 성적 올라서?” “아니거든요. 나 아니고 주님이거든요.” 무슨 뜻입니까? 내일 할지 안 할지 나도 장담 못합니다. 오늘까지만. 내일 목사님이 하라 해도 안 할 거야.
만약에 내일까지 이어지면 나는 나를 믿는 자가 되고 갑자기 이 안에 십자가 쳐다보던 죄인이 청소하고 난 뒤에 10월 1일 나는 청소를 말끔하게 한 죄인이라도 전적 죄인이 아니고 1% 착한 일이 섞여 있는 죄인이 돼버리면 이건 선과 악 사이를 통합하는 통합체에 괜찮은 나가 스며든 게 돼요.
죄인은 항상 뭐가 있든지 선과 악은 내가 판단해요. 내가 평가합니다. 저 사람보다 나으면 착한 거고, 저 사람보다 못하면 나쁘다고 내가 판단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평생 살 동안에 매일 일어나야만 하고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렇게 해야 돼요. 왜? 로마서 7장은 우리보다 기니까. 내가 원하는 법은 원치 않고 다른 법을, 이건 계속 가야 돼요. 감사한 것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교회 청소하게 만들어서 청소하기 전까지는 “주여, 죄인입니다. 못났습니다.” 하다가 청소하고부터는, “뭐야, 사람들. 나 봐. 몸 약해도 청소하는데 당신은 놀면서 왜 안 해.” 갑자기 자신이 청소한 만큼 마일리지가 쌓여버려요. 그걸 성화라고 합니다. 이건 모든 불교에 다 있는 거예요.
예수님 증거하다가 자기 증거하거든요. 그런데 일부러 청소하게 하셔서 또 다시 나로 하여금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게 하셔서 이미 그 죄는 일방적으로 다윗언약, 새 언약에 의해서 해결이 되어버린 거예요.
죽었다는 것은 소멸이 아니고 사라짐이 아니고 망사스타킹, 오늘 이것 하나 기억하세요. 잘난 내가 갈갈이 찢어져서 그야말로 현장에서 간통한 여인처럼 주님 앞에서는 용서받았고 막달라 마리아처럼 못났지만 못난 강도, 못난 세리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그냥 사진 찍혀버렸어요. 사진 찍힌 것이 로마서 1장에서 8장, 거기서 나온 필름은 9장에서 16장. 그 9장에서 16장은 금요일에 계속 이어서 하겠습니다.
그대로 마치겠습니다. 기도는 금요일에 해야 되니까.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다음 금요일에 할 때는 창조와 종말이 진짜 종말이 있느냐, 처음에 창조가 있느냐? 그것이 십자가가 역사를 중간을 쪼개서 십자가 안에서 창조가 나왔고 십자가 안에서 종말이 미리 나오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했다는 이야기를 예고편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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