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92강, 93강), 하나님 형상과 인간, 어떻게 살 것인가 141106
유튜브(92강, 93강), 하나님 형상과 인간, 어떻게 살 것인가 141106
이름 : 이근호(IP:119.18.98.57)
92강
93강
이미아(IP:180.♡.88.49)
14-11-13 20:05
92강-YouTube강의(하나님의 형상)141106-이 근호 목사
오늘은 제 92강, 사람이 무엇이냐?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사람은 자기가 미리 아는 것은 질문하지 않는 법입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너무나 잘 안다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겠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이 되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을, 사람에 대해서 안다고 여기는 것은 자기를 표준 모델로, 인간의 모델로 그렇게 간주하니까 그런 성급한 결론이 나옵니다.
내가 나를 알고 있는 것, 그것이 정답이냐? 그것이 진리냐? 라는 것을 따질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 성경을 통해서 내가 나를 안다는 것, 내가 인간이라는 것이 이렇다는 것을 단정 짓던 그 단정이 성경에 대해서 동의하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되겠죠. 성경에서는 단독적으로 인간은 이렇다, 라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인간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뭐 없이는 없다는 이야기죠? 하나님의 형상 없이는 사람도 아니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형상을 놓쳐버리면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은 사람이 아니고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고,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이 이미 사람이다, 라는 그러한 사람에 대한 그러한 규명이 이 성경 말씀 외에 우리가 스스로 우리 자신을 파악해서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될 수가 없죠.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우리 인간이 스스로 판단하는 것은 매사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어떤 문제가 있느냐 하면, 우리는 내 중심이 우선이거든요.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그것을 단정 짓고, 그것을 이미 진리로 시작하는 바탕으로 삼고 난 뒤에 그렇다면 하나님은 나에게 뭘 해줄 것인가? 그렇다면 남들은 나에게 뭘 해줄 것인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도킨스라는 생물학자가 말하기를 그것을 ‘이기적 유전자’라고 표현했거든요.
우리 속에 있는 DNA는 날 위해서, 내 속에 있는 DNA가 스스로 발현하기 위해서 우리의 몸을 사용하고 그것이 가장 기본이고 우선되는 것이라고 그렇게 본 겁니다. 많은 사람은 거기에 동의할 수밖에 없고 저도 거기에 대해서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도킨스가 이야기한 것이 창세기 3장 이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3장 이후에 보면 인간은 자기가 곧 신이고, 인간은 신으로 군림하기 때문에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하나님이 십계명을 줄 때에, 제일 먼저 준 것이 뭐냐 하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얼른 보면 신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이죠.
그러나 거기서 나오는 우상이라는 것, 그 우상이라는 것을 섬기지 말라고 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때부터 우상을 섬기지 않고, 다른 민족의 신을 섬기지 않고, 자기에게 찾아온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그렇게 작심을 하고 긴긴 자기들 나름대로의 민족의 역사를 이끌어 갔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들이 우상을 섬긴 걸로 그렇게 결론지어졌고 멸망했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여호와를 불렀음에도 그게 왜 우상이 되는가.
그 해답은 바로 신약에 골로새서 3장 3절에 보면 나옵니다. 인간은 바로 자기 자신이 우상 되게 하는, 그러한 작동하는 능력이 인간 속에 탐심으로서 자리 잡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신약에 나오는 결론, 인간이 곧 우상이라는 결론을 구약에 앞당겨서 아까 이야기 한 출애굽기 20장 십계명을 적용시켜 해석해 보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은 “너 자신이 우선이냐? 아니면 너에게 찾아온 언약의 하나님이 우선이냐?” 그거에 관한 언급을 하신 거죠. 니가 너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믿을 수 있는 그러한 역량이 있느냐를 스스로 한번 돌아보라는 겁니다.
이 말은 쉽게 말해서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원래 만든 그 하나님의 작품이 아니라는 겁니다. 창세기 1장 26절 다시 보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했을 때, 이미 하나의 죄를 짓고 난 뒤에 흙이 되어 버린 인간이, 다시 하나님의 형상이 내포되어 있는, 본래 그 인간으로 자력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역량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은 더 이상 인간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 말은 달리 이야기해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취급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거기서 대들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바로 심판입니다. 그리고 구원에 대한 모든 열의는 주께서는 차단시키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자유의지가 자신을 구원하는데 전혀 기여하거나 보탬이 되지 못하도록 조치하시는 겁니다. 그것은 철저한 인간무시, 완전 개 무시죠.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도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바로 예수님도, 독생자도 버림받았다면, 하물며 우리들이 마땅히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처사고, 당연한 대우를 받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한 사람도 천국에 넣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인간이 지옥불 들어간다고 해서 거기에 대해서 항의할 수 있고 집단적으로 하나님 앞에 시위할 수 있는 그 어떤 자격도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인간의 자화상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었다는 그 창조의 영광성이 하나님께서 친히 만들어놓고 그걸 취소하거나 포기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어놓고 인간이 흙으로 돌아갔을 때, 처음에 인간을 만들어놓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 인간 만들기를 하나님이 실패했다는 이유만으로 중도에 포기하실 분이냐 하는 겁니다. 절대 포기하실 분이 아니죠. 그러면 인간이 아니고 흙이라면 그러면 하나님이 인정한 인간은 어디서 생기고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하나님 나라 천국에 합류해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그런 참 인간이 되느냐.
그 문제에 대해서 창세기 1장, 2장, 3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요한계시록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그 중에 인간에 관한 부분에서 중요한 부분이 바로 시편 8편에 보면 나옵니다. 시편 8편 4절에 보면,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여기서 사람이 무엇이관대 라고 했고 뒤에는 인자가 무엇이관대 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인자가 나옵니다. 근데, 히브리서에 보게 되면 이 인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구약에서 장래에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받으시는 그런 사람의 등장을 시편 8편에서 예언을 해놓으시고, 그 예언대로 그 과업을 실천하고 성취하실 분은, ‘인자’라는 호칭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안에 누가 있느냐, 예수님 안에 인간이 들어있는 겁니다. 예수님 안에 인간이 들어있다는 말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된 존재,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유일한, 합류할 수 있는 인간 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인정한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서 살게 되고 나타나고 삶을 보여주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창세기 1장 26절 다시 보게 되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에서 사람은 하나의 결과물이고 그 앞서서 있는 것이 우리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이 먼저 나오죠. 따라서 이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서 만들어진 그 인간처럼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 안에서 함께 있는 인간이 만들어집니다.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하면,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같이 죽고, 예수님이 살았을 때 같이 살아난 자들만이 예수 안에서 참 인간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이 성도인데요, 그러면 성도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자기 존재가 우선이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자기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존재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계시기에 없어도 되는 내가 여기에 등장했다고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사람, 그것이 참 인간입니다.
이미아(IP:180.♡.88.49)
14-11-13 20:06
93강-YouTube강의(어떻게 살 것인가)141106-이 근호 목사
이번에는 93강입니다. 제목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딱 우리 자신들에게 묻게 되면, 우리는 거기에 생존에 관한 문제처럼 오해를 하면서 받아들입니다. “나는 회사 취직해서 살 것입니다” 아니면 “나는 예술가로서 작품을 하면서 살 것입니다.” 아니면 “나는 공무원으로 살 것입니다.” 아니면 “주부로서 시어머니 모시고 살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이야기를 하죠. 거기에 나오는 대다수의 답변은 나는, 내 생존은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 되고, 생존이 보장되기 위해서 나는 이런 노동과 활동을 한다는 식으로 답변을 내놓습니다.
이거 물론 계시 아니죠. 이것도 자기욕심이죠. 그럼 성경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그 문제는 땅과 연관성 지어서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이런 말씀 나오거든요. 창세기 3장17절에 보면,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땅이 저주받는 것은 인간 때문에 저주받는 겁니다. 땅은 아담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는다. 땅과 연관성을 지어서 아담을 그렇게 추궁하는 것은, 땅이 손상된 것에 대해서, 저주받는 것에 대해서 니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땅도 만들어놓고 인간도 만들어놨는데 인간은 죄 짓고 난 뒤에 나 몰라라 하게 되면, 그것은 따로 하나님이 만든 땅은 누가 원상회복 시키겠습니까? 책임자가 없죠. 무책임한 발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살 것인가? 에 대해서 너로 인해서 저주받았기 때문에 너가 만약에 말씀에 제대로 순종하게 되면 땅이 저주가 없어지고 그게 복된 땅으로 변하는, 새로운 무대를 내가 보여주겠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준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겁니다. 약속의 땅은 뭐냐 하면, 약속대로 살 경우에만 거기서 살 수가 있고, 팽창하고 자손이 번성하고, 그리고 약속대로 살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는 거예요. 근데 이 말을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약속의 땅은 말씀대로 살면 약속만 드러나게 되고,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약속가운데, 약속이 갖고 있는 심판과 저주성이 약속대로 퍼부어지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뭐냐 하면, 두 개의 서로 상반된 결과를 보여 줍니다. 하나는 지옥이고 하나는 천국입니다. 이 두 개를 합치면 약속 안에 둘 다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이냐에 대한 정답은 간단합니다. 너가 약속대로 살면 된다. 근데, 약속대로 안 살면 어떻게 되느냐. 약속대로 안 살면 그래도 약속대로 결과는 주어질 것이다. 물론 심한 저주로 주어질 것이죠.
이걸 다시 한 번 함축시켜 보면, 인간은 약속 안에 애초부터 갇혀있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갇혀있었는데 그 약속의 내용이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약속대로 천국과 지옥으로 분류가 되는 겁니다. 이걸 다시 말씀드려보면, 땅과 연관된 인간 속에는 애초부터 분열된 요소가 함께 들어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담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지 않을 수밖에 없는, 그런 환경 속에서 선과 악의 지식에 인간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선과 악은 절대로 합칠 수가 없는 겁니다.
서로 대립이 되고 충돌하고 마찰을 일으키는 요소입니다. 그 두 가지 요소로 인하여 인간의 내부는 분열되어 가죠. 그 분열되어 있는 그것이, 쉽게 말해서 ‘찢었다’ ‘인간을 찢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자, 인간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은 자신의 찢어진 그 대목을 만끽하듯이 보여주면서 살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로 하나님께서는 다루시는 겁니다. 예를 들면 성경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의 지시가 이렇게 주어집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그게 곧 살인하는 것이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 대목을 보는 순간 우리 내부는 둘로 분열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그러한 자아 이미지를 연상하게 되고, 형제를 만약에 사랑하지 않았을 때, 형제를 미워했을 때, 그때 자기 처지는 살인자로서 마땅히 지옥불에 가고 저주받는다는, 저주받는 자아상이 두 개가 나란히 같이 나옵니다. 그 두 개가 합치되지 않고 이게 갈라집니다. 그게 바로 인간은 어떻게 살 것인가. 바로 그런 식으로 살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살게 됩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드리느냐 하면, 많은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성령을 받아서 예수 말씀대로 살면 이제부터는 착한 일만, 계속 꾸역꾸역 착한 일만 추가적으로 보태서 양적으로 많아지는 그런 삶을 산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거는 약속에 의한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게 되면, 하나님의 완성된 약속이 임하게 되면, 우리는 두 가지의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하나는 왜, 우리는 이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저주받아 마땅한가? 라는 것을 보여주게 되고.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죄를 용서해주시고 주께서 우리 죄를 받아주신 예수 안에 있는 우리의 모습, 두 가지의 모습을 우리는 다같이 보여주죠.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사느냐. 새로운 죄를 맞이하는 식으로 인간은 더 살게 되는 겁니다. 20년을 살았습니까? 21년 살게 되면 20년 동안 살게 된 미처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죄를 21년째 받아들이게 됩니다.
받아들이면서 지금까지는 나는 회개했고 모든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누가 건드려도 나는 의인이다고 자부했는데, 자부한 그 다음날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죄가 우리 속에서 생산됨으로 말미암아 그 죄를 지키지 못한 나의 죄인의 모습과 그 죄를 주님께서 그 죄인인 줄 미리 아시고 주께서 그 죄를 처리하신 십자가의 은혜가 또 다시 보이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21년이라면 나이가 한 40이 됐다고 합시다. 40년 동안 지은 죄는 용서받았다고 너끈했던 그 마음가짐이 41년째 내가 예상 못한 새로운 죄를 맞이하게 됩니다. 새로운 죄를 맞이하게 되었을 때, 지금까지 죄는 용서받았지만 새롭게 나로 인하여 나온 죄에 대해서는 내가 어떻게 처리가 되지 않습니다. 감당이 되지 않습니다.
그 죄를 어떻게 해부할 수 있는 어떤 역량이나 그런 선함은 나한테 나올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인간이라 하는 것은 계속해서 계속해서 죄를 짓게 됩니다. 자, 그 다음 문젭니다. 이렇게 죄를 지으면 제가 오늘 강의에서 뭐라고 했던가요? 이 강의에서 제일 먼저 뭐라고 했던가요? 아담이 죄를 범했으매 땅이 저주받죠. 그렇다면 우리가 살 동안에 계속해서 죄가 나온다는 말은, 내 인생이 남보다 더 행복해야 되고, 또는 내가 생각하기에 정말 이 정도까지 하나님께서 복되고 평안한 삶을 해주셔야 내가 그동안 착한 일 한 보상이 되겠습니다, 하는 그런 생각은 다 헛된 생각이고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것이 들통 납니다.
내가 지은 죄가 얼마나 많은 죄인지 그것도 미처 모르면서 우리는 죄는 지으면서 내 주변과 환경과 땅은 나한테 내 뜻대로, 내 원대로, 내 소망대로, 곱게곱게 행복을 마구마구 가져다 주겠다는 식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거는 우리와 우리 주변의 땅과의 관계를 너무 무시한 겁니다. 우리가 계속 죄가 나온다면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삶의 환경이 나를 숨 막히게 만든다 할지라도 오히려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항의할 수 있는 어떤 자격도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그렇게 힘들지 않고 살아가는가. 그것은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저주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또 다시 용서해주신 주님의 입장에서 주신 환경입니다.
그러면 그 환경은 내가 착한 일해서 만들어진 환경이 아니고 주께서 은혜로 주신 환경이죠. 결국 말씀을 맺으면 뭐냐, 죄를 우리가 짓고 복은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복을 받고. 우리는 그걸 통해서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는 성도가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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