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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그림자와 실체묻고답하기-

그림자와 실체선택을 확인하는 것과 잃어버림을 되찾는 것(눅 15장)지난 주에 실로암의 소경이 빛을 만나 졸지에 빛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경(죄인)이라는 노리개가 사라진 율법(성전) 종사자는 밥줄이 끊어지는 위기를 통해 다시한번더 자기믿음을 점검합니다. 선택을 확인하는 행동이 곧 율법에 자기를 측정하는 겁니다. 그 결과 그것은 누가 뭐래도 모세의 제자라는 겁니다. 그래 나는 모세의 제자야 모세의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이야. 교회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야. 이것으로 일관하기에 거기에 시비거는 것들은 족족 쫏아내거나 찟김을 당하는 겁니다.참 이상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을 잘 믿어볼려고 하는 짓들인데, 그런 일들이 예수님과 그의 자녀들을 노골적으로 미워하는 일에 이상하리 만큼 일관적인 행동을 표출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차라리 소경으로 태어났다면 좋았을껄껄걸 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눈이 보임으로 더욱더 하나님께 영광 돌릴수 있고, 건강함으로, 의인됨으로, 성화됨으로, 하나님 자녀 답지 않냐고 예수님의 말씀에 반기를 들고픈 겁니다. (요 9:35)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요 9:38)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소경은 심판 주를 만났습니다. 구원의 주를 만난 것이 아니라 심판 주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절합니다. 비로소 절합니다. 심판 주를 만났는데 절을 하냐뇨? 구원의 주를 만나야 절 하는 것이 아닐까요? 소경 아닌 자들은 심판 주를 만난 적이 없기에 절을 하기는커녕 영접은커녕 당장 내어 쫏습니다. 심판의 주가 아니라 구원의 주를 기다리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요 9: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요 9: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요 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예수님의 믿음은 일관성있어 보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뒤처질새라 만만치 않게 따라잡기로 일관적일려고 무지 애를 씁니다.실체(있음)은 없음(잃어버림)을 찾으러 돌아다니며, 그 없음(소경)을 통해 실체(예수님)을 증거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없음은 없는 겁니다. 우찌 없는데 어떻게 있다고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눈이 있기에 모세의 제자이고, 눈이 있기에 믿음도 지킴으로 일관 합니다. 있기에 그러는 겁니다. 없다면 지킬 수도 없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림자라고 합니다. 오로지 자신만을 실체로 남기고 모두다 그림자라고 합니다. 모세도 예수님의 그림자요, 율법도 예수님의 그림자요, 안식일도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그 그림자는 실체만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였다는 겁니다. 아벨의 족보도 그림자입니다. 자 그런데 나도 그림자인데 아무리 봐도 나 자신을 실체로 보고 싶어하지 그림자로 보고파 하는 자 없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더더욱 실체화 되지 그림자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믿음은 다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그림자으로만 남을려고 하지 않고 실체를 흉내내며 실체에게 도전합니다. 그림자가 실체를 죽여버려 그림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실체를 증거하던 그림자들이 바로 그런 그림자들에게 죽임을 늘 당해 왔습니다.(아벨과 가인). 그러나 그림자는 그림자로써 실체만을 보여주고 다 뒤로 누락되는 겁니다. 피조물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이지 신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피조물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모두가 신이 되었기에 참신을 인정 할수 없는 겁니다. 실체가 오면, 실체를 증거하는 그림자가 나타나면 족족 다 죽여버립니다.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실체요, 곧 예수님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그림자들의 증거가 됩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진들은 없음 곧 죽음으로 지향하였고(아벨 족보), 이 땅에 증거만 남기고 이 땅에서 없는 자 취급 받습니다. 히 11장(심지어 믿음의 세계에서 말이죠 바리새인에게 쫒겨나는 소경처럼)이것이 예수님의 믿음이 박힌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박힌 자는 선택의 확인을 할 여유가 없습니다. 확신은커녕 상한 심령으로 몰리기 때문입니다. 정작 자기자신이 하나님의 원수였음을 알고 애통하고 자복케 된다는 겁니다. 연기하고파도 안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믿음을 추구하는 자는 확신으로 이 히 11장을 해석합니다. 그래서 모세의 제자라는 결론으로 확신합니다. 있기에 더욱 더 있음을 추구한다는 거지요. 믿음도 구원도 천국도 있기에 그 속에서 확신을 가지겠다는 겁니다.문제는 소경은 자기자신에게 펼쳐진 예수님의 창조행위(무에서 유로 창조)가 예수님에게서 직접 펼쳐졌고, 그래서 소경은 믿을 필요 없이 그냥 예수님 앞에 엎드리면 됩니다. 창조주 앞에 피조물로써 엎드려 절한 겁니다. 마치 출산하는 어머니가 핏덩어리를 기뻐 감격하며 아기를 품에 안으면 안기면 되지(우리는 여기서 안긴다는 것도 자기믿음이나 자유의지랑 상관 없단 것을 알수 있죠), 아기가 나는 믿습니다 믿고요 그러니 안 안아주시면 안되요 라고 하질 않는다 라는 겁니다. 믿음이란 상호 교류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상대방에게 의해 생겨버리는 겁니다. 마치 소경에서 졸지에 빛이 생겼듯이. 없던 믿음이 생겨 버린 겁니다.(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그러나 모세의 제자들은 자기에게 직접 일어난 일(빛을 봄)이 아니기에 예수님의 행한 그 일은 모세 제자로써의 믿음으로도 충분히 카바 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모세가 누구입니까? 홍해도 가른자 아닙니까? 소경에게는 어둠이 두 갈래로 갈려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들에겐 이미 홍해를 가른 자가 있기에 예수님을 구지 모세보다 더 위대하게 볼 필요 없다는 겁니다. 대단한 믿음이 아닙니까? 확신이 될 수 없기에 더 확실한 모세만 붙들어도 되는 겁니다. 물론 모세보다 더 큰 이가 오면 그들은 그를 붙잡을 껍니다 믿을겁니다. 그러나 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왜요? 예수님이 이미 그들 곁을 지나쳐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곁을 지나가는 예수님을 소경(죄인, 병든자, 이미 죽은자, 버림 받은자, 귀신 들린자, 사마리아인)은 보고 절을 했으며, 유대인(의인, 선택의 확신이 있는자, 믿는 자, 건강한 자, 천국 시민)은 예수님을 쫒아내었습니다.그렇다면 믿음은 인간의 소관이 될 수 조차 없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없으면서도 믿음이 있다고들 우기니 그 믿음의 실상이 어두움(마귀)이었지 빛(예수님)이 아니었음을 그들의 실체를 예수님의 믿음에 의해 드러나는 겁니다.마찬가지로 실체의 선함은 자신을 소멸시키는 쪽으로 달려갑니다. 실체는 그림자처럼 없는 쪽으로 가고, 그림자는 없으면서 실체를 흉내냅니다. 일관성 있게 선한 목자는 자기 양들이 간 길처럼(아벨의 족보) 자신 또한 무모한 죽음을 향해 돌진 합니다. 조직(교회, 성전)의 뒤처리를 염두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믿음은 도저히 발휘 할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가 있어야 믿음을 성장 시키고 자라게 하고 그 속의 교육과 가르침을 통해 깨우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사라지는 쪽으로 일관해 버리면 인간은 기념비 없는 그 속이 마치 무덤 같기에 무덤의 자취를 없애려 아름답게 꾸밀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날마다 죽노라가 아니라, 날마다 살아있음을 확신 시키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만 믿음 있는 줄 착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는 이 땅에 더 이상 남아있지 않기에 제2의 제 3의 선한 목자들이 참선한 목자의 빈 자리를 채울려고 합니다. 빈 자리를 그냥 놔두질 않습니다. 반드시 채워서 이제 더 이상 무모하게 죽어버리는. 무식하게 늑대들에게 달려들어 자기 양을 지키는 목자가 아닌,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울타리(교리) 속의 양들로 만들겠다는 발상이 자기 양 삼겠다는 일관된 모습입니다.선한 목자의 비유는 선한 목자가 누구인가를 통해 선한 목자의 양이 누구인가까지 밝혀 냅니다. 그렇기에 자연히 거짓 목자와 거짓 양도 들추어 집니다. 무모한 선한 목자의 길을 따르는 자가 자기 양이지, 그 빈 자리를 채우는 자가 양이 아니고 목자도 아닙니다. 선한 목자가 자기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렸듯이(없음), 자기 양들도 선한 목자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운명(없음)이다는 겁니다. 이상스럽게 자꾸 이 땅에 남아서 새생명을 삶을 살겟다고 큐티 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 죽을려고, 소멸 될려고, 자꾸 없는 쪽으로, 자꾸 무분별한, 무식한 모습으로, 사람들이 싫어하는 존경을 절대 할 수 없는 모습으로, 이 땅의 어둠의 실체를 들추어내는 도구로 쓰이고 일회용 컵처럼 사라지더라 라는 겁니다.선한 목자인데 겨우 일회용 컵이 되다니 ! 이 아이러니가 우리의 확신을 요구하는 믿음에 의하면 전혀 일치가 되지 않는, 넘어뜨리게 하는 거친 반석이다는 겁니다.(롬 9:33)(벧전 2:8) 그래서 하나님이 심지 않는 씨앗(인간이 만들어낸 믿음)은 다 뽑히도록 한다는 겁니다. (마 15:13) 이 땅에서 펼쳐지는 믿음(빛)이란 결국 어두움에 내어쫒김을 받는 알 수 없는 애매한 핍박과 고난 속에 처하기에 자기 믿음으로 그것을 감지하거나 포착 할 수 없는 겁니다. 애매한 핍박은 이유를 알 수 없기에 팝박받는 것이 믿음의 조건인냥 내세울수도 없기에 그냥 무모하게 너무 비합리적인 소모성에 인간의 믿음이 그앞에 거짓임이 밝혀지는 겁니다.하나님의 일을 위해 소경으로 태어난다면, 예수님을 알기 위해 평생 강도짓을 하는 강도로 태어났다면, 예수님을 알 기 위해 닭 울기전에 3번 스승을 배반해야 하는 제자로 태어났다면, 우리의 믿음은 절대 이런 비확신들의 행동에 동의할 수 없기에 거부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 믿음이 보통 믿음이 아니라 순수하고 고귀하며 절대적인 믿음이기에 그런 완벽한 믿음으로 저런 삶을 살 수 없기에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의 믿음을 당연히 거부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믿음은 욥처럼 가장 저주 받는 모습의 자리에서 원수와 자녀를 밝혀냅니다. 마치 부모가 죽을 병이 걸렸을 때 곁에 남아 있는 자식과 부모를 버리는 자식이 나타나는 것처럼, 다윗이 왕이지만 거지꼴이 되었을 때 비로소 원수가 나타납니다. 자기 주변의 친구들과 자식들이 막상 자신이 거지가 되니 다 원수로 삼아 덤비더라 라는 겁니다. 그 속에서 비로소 상한 심령이 도출 됩니다. 상한 심령은 원수가 등장하고 그 원수로 인해서 상한심령이 되는 겁니다. 시편은 원수가 누구인지 모르면 해석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시편 전문가들인 유대인들은 시편 그대로 오신 예수님을 못 알아봤듯이 말이죠.왜 예수님의 믿음은 이렇게 인간의 믿음과 일치되는 점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너무 너무 수준 떨어지는 믿음들입니까? 절대 고차원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반대입니다. 너무 너무 고차원적인 믿음이면 올라가는 재미라도 있을텐데, 이미 다 아는 밑바닥의 모습이니 자존심 상해서 못믿을 정도입니다. 출애굽 공부 시간에 남들이 가지 않는 그런 프론티어 정신으로 채울 확신적인 믿음의 세계가 도전정신으로 넘쳐나는 세계가 아니라, 너무 유치찬란해서 못믿겠다고 거부할만한, 뻔하게 원망할 만한 믿음의 모습으로 다가오니, 자존심 상해 위대한 하나님이 그럴 리가 없다는 겁니다. 마치 모세 제자들의 확신처럼 말이죠.그래서 오늘 공부하고자 하는 내용이 바로 천국 비유인 탕자 비유인데 그 유명한 탕자 비유에서 하도 귀 따갑게 들었으니 뻔한 내용이기에 다들 안다고 하는 부분에서 우리가 놓치는 부분을 같이 고민할까 합니다. 그 뻔한 내용 속에서 돌아온 탕자가 아닌 늘 아버지 곁에 있던 아들에 관해서 보고자 합니다. 눅 15장에서 예수님은 3가지 비유를 통해 천국을 증거하십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 잃어버린 한 드라큐라가 아닌 한 드라크마 비유, 그리고 오늘 탕자 비유 곧 잃어버린 아들 비유입니다.왜 이렇게 잃어버림을 강조 할까요? 왜 99마리는 왜 안되나요? 왜 아홉 드라크마는 안됩니까? 왜 아버지와 늘 함께 했던 맏아들은 왜 안됩니까?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너무너무 쉽기에 엉뚱합니다. 잘 들어보세요. 잃어버린 한 마리 양,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 잃어버린 아들 이 누구를 드러내는 그림자입니까?실체인 예수님을 드러내는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실체를 들추어내고 그림자로써 사라집니다. 즉 되찾고 기뻐하고 잔치 벌리는 이유가 잃어버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되찾음이 있다는 겁니다. 그림자의 기쁨은 실체를 드러내는 것에 있지 자신의 그림자 됨을 증거하지 않습니다.즉 예수님을 드러내었다는 이유 뿐입니다. 인간의 목적이요, 피조물의 목적입니다. 그 목적 달성도 자신들이 한게 아니라 소경처럼 졸지에 선물 받아 저절로 표현 된 겁니다. 그럼 99마리, 아홉 드라크마, 곁에 있던 맏아들은요? 99, 9, 1은 요? 이상하게 동참하고 참예하면 되는데 그 잃어버린 한 마리 양 때문에.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 때문에, 잃어버린 둘쩨 아들 때문에 그 속에는 동참이 아닌, 참예가 아닌, 스스로의 거부감이 그 속내 속의 죄성이 드러나는 겁니다. 마치 아벨의 제사를 받았다는 이유 만으로 가인은 죄의 소원을 들추어 냅니다. 즉 반대로 실체인 예수님이 드러나질 않고, 어두움 그자체인 그림자를 실체화 합니다.즉 예수님의 빛되심, 하나님의 은혜성에 반드시 선악(죄)을 돌출 시켜서 은혜에 대한 거부성을 들추어 내더라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은혜로만 채우겠다는 고집과, 당신이 만든 법대로 선과악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라고 고집을 피우는 마귀의 싸움에 우리는 고래싸움에 끼여있는 새우꼴인 겁니다.마귀는 당신이 만든 법을 지키면 이유없이 보상을 하라, 왜? 근거는? 당신이 하라 했으니 지키기를 했으니까? 이것이 마귀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우리의 주장과 일치 합니다. 저도 그랬었고 믿었고 기도했고 교회 다녔는데 왜 안풀리냐고 분명히 다들 따졌습니다. 하라 카는데로 했잖아 그런데 왜 겨우 이거냐 라는 식이 우리에게 자리잡은 믿음입니다. 가인이 제사 안드린게 아니죠, 탕자비유의 맏아들이 아버지 곁에서 열심히 아버지를 거역함 없이 늘 충실히 순종한 자들입니다. 땡땡이 친 자들이 아닙니다.자 그런데 문제는 복병이 나타난 겁니다. 골치떵어리가 늘 말썽입니다. 무리 속에 가만히 있으면 될 걸, 꼭 싸돌아 다녀서 길을 잃어버렸으니 목자는 애타는 마음에 안 찾아 헤멜수 없는 겁니다. 뭐 대단한 동전 났다고 이러는게 아닌데 땅에 떨어진 잃어버린 한 개의 동전을 9개의 동전 보다 더 귀히 고집스럽게 찾아 헤메니, 주인을 또 귀찮게 하는 것 아닙니까?이거 이거 말도 못할 인간 말쫑입니다. 두 손 두 발 다 든 동네에서도 내놓아라 할 정도의 둘째아들입니다. 오죽하면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을 미리 달라고 아버지에게 때서서 챙겨서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둘째 아들 아닙니까? 망나니 그 자체입니다. 아닌가요? 불효자를 기독교가 부축이는 겁니까? 구원받은 강도처럼 강도짓을 해서라도 예수님 만나자 입니까? 아니면 부끄러운 구원입니까?(롬 6:1)이상스럽게도 우리는 이 속에서도 선악을 주장하고파 합니다. 우리의 마음 어떤 구석에도 은혜란 없습니다. 그렇기에 바로 이런 갈등과 전혀 상관 없이 예수님은 혼자 자기 고집대로 일관성 있게 일을 합니다. 즉 이 3가지 비유 속에서 우리는 나는 어디에 해당되냐고 자기를 염두한 상태로 접근을 합니다만.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자기 씨앗을 찾겠다는 겁니다. 완전 매치가 안되는 말이죠. 매치가 되기는커녕 가만히 보니 예수님이 찾아 헤메는 자를 우리가 미워했던 자들인 겁니다. 싫어서 그들을 귀히 본 자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우리는 그 속에서 믿음을 가질려고 믿어볼려고 우짜든지 간에 믿어볼려고 말씀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아주 대견 스럽죠.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씨앗 찾기입니다. 자 맏아들을 보세요 열심히 밖에서 일합니다. 일을 마칠 때 까지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 전혀 모릅니다. 그만큼 잡념 없이 충실한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집 가까이 오니 풍악 소리를 듣고 무슨 연고인지 알아보니 둘째 아들이 와서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 한 마리 잡았다라는 것을 듣게 됩니다. 참 기가 막힙니다. 밖에서 열심히 이 힘든 IMF 보다 더한 어려운 경기에 땀 뻘뻘 흘리며 따가운 때양볕 아래서 죽으라고 일하고 돌아오니, 반기는 이 하나 없는 이 슬슬한 고달픈 인생 앞에, 집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지 혼자 먹고 살겠다고,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협박하고 공갈쳐서 결국 재산을 받아 외국에서 빠징고로 도박으로 고도리로 온갖 향락을 다 즐기고 창기들과 먹고 마시며 자기 멋대로 산, 말쫑 중에 말쫑 폐인 중에 폐인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데, 가족부양에 모든 짐을 진 나 맏아들에게는 살진 소는커녕 염소 새끼 한 마리 잡은 일이 없거늘 뭐 대단한 자식 돌아왔다고 살찐 소 까지나 잡고 저렇게 풍악을 울리고 동네 잔치를 거하게 하고 있으니 맏아들은 그만 힘이 쭈욱 빠지는 겁니다.참 너무하다 너무해. 진짜 너무하다. 그만 낙이 없는 겁니다. 말로는 동생이 돌아온것에 대해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 하라고 하지만, 아니 생각을 해보슈, 동참할 맛이 나나?, 참예는 커녕 나도 동생과 똑같이 아버지 재산 챙겨 동생처럼 튀어서 외국에서 빠찡고 하고 창기들과 먹고 마시고 재산 다 없애버려서 빈털터리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살진 송아지 줄란가?참으로 만감이 다 교차했을 것 아니겠습니까? 오죽하면 그런 유치한 생각도 할 정도로 맏아들에겐 너무한 것입니다. 분명 너무 지나친 환대인 겁니다. 아니 환대는커녕 둘째를 족쳐서 반 죽여놓아도 속이 시원치 않을 정도로 가만히 놔둘 수 없는 둘째인데? 이것은 얼마니? 살진 송아지라! 요것은 금가락지라! 이것은 좋은 비단 옷에 최고급 럭셔리 구두라! 럭 럭 럭셔리 탕자가 되어 있으니, 그만 살 맛이 뚝 뚜~욱 떨어집니다. 아니 왜 맏아들은 안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님편에 선냥 이렇게 댓구합니다. 아니 둘째를 환대하는 아버지 마음에 동참하면 되지 않느냐? 안되긴 뭐가 안돼? 동참해. 이렇게 입에 침 바르고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자도 자기 집안에서 형제들 싸움이 일어날때면 그런 환대를 베푼 아버지의 마음은커녕 마냥 섭섭한 것이 우리의 본심입니다.실지로 일부러 하나님은 우리 생활 속에 그런 형제들 싸움을 많이 유발 시키십니다. 사건의 연속입니다. 좀 잔잔했는가 싶으면 어느새 뭐하나 뻥뻥 터집니다. 그리고 묻죠? 정말로 둘째를 환대하는 아버지의 마음에 참예 할 수 있냐고? 절대 없습니다. 우리 솔직해 집시다. 참예는커녕 배 아픕니다. 배가 너무 아파 화병이 날 정도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습입니다.그럼 도대체 뭐냐? 말씀을 믿자는 거냐 말자는 거냐? 배우자는 거냐 말라는 거냐? 너처럼 했다가 만약 아니면 우얄래?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우리의 본성이 들추어 지면 감사하고 기뻐 해야할 일 아닙니까? 그런데 짜증이 납니다. 아 이게 우리 모습이군요 자 이제 예수님 어떻게 하실껀가요? 예수님이 하실 일에 기대가 갈껍니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라는 것은 믿음을 자기 쪽에서 해야하는 것 아니냐 라는 것인데 그것을 자꾸 꺽으니, 아 기죽이는 일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말이죠. 기죽이지 말라는 거죠. 긍정적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져야 믿는 사람의 태도이지 그렇게 맨날 삐딱하게 부정적인 말만 하니 누가 믿겠느냐? 니 혼자만 옳고 다른 사람 다 틀리냐? 믿는 자면 믿는자 다운 태도를 보여야, 처신을 해야 할 것 아니냐? 믿는 자의 모양새가 저래선 안된다고 역정을 내며 달려듭니다. 그러나 소경은 그런데 그 속내가 밝혀짐으로 예수님이 더 이상 기대 안한다는 것을 알기에 예수님의 믿음에 기대를 거는 겁니다. 자 주님 이제 내 속에 있던 이 죄덩어리 이것도 죄인줄 몰랐는데 밝혀주셨으니 너무 감사합니다. 이제 어떻게 하실껀가요? 라고 묻게 되고 의사에게 자꾸 말을 걸고 사귐을 가지게 되고, 자꾸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듯, 병이 크면 클수록 환자는 의사에게 더욱더 매달립니다. 더욱더 의사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그 죄덩어리 수술하는 의사의 섬김 수고스러움 일하심 낮아지심이 더 더욱 기대감으로 다가오니 신나는 겁니다.즉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자기가 심은 씨앗이 있다는 겁니다. 그 씨앗이 바로 잃어버린 형태로 이 땅의 뱀의 후손에게 충돌을 빗고 있다는 겁니다. 뱀의 후손들도 믿음이 있습니다. 자기들 믿음의 씨앗으로 물주고 햇빛주고 자라게 합니다. 예수님도 자기 씨앗(믿음)으로 물주고 햇빛주고 자라게 합니다. 결국 누가 심은 씨앗(믿음)인 가 입니다.파리의 연인, 황태자의 첫사랑, 천국의 계단, 허준, 왕건, 인간 역사 위인전기문, 그 동안 수없이 스쳐간 인간 작품들을 보면 다 선악이야기요 선악의 대립입니다. 어디에도 은혜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 인간 작품 속에 누가 누가 사랑을 받는가? 사랑 받기 싸움입니다. 사랑을 받기 위해선 감수 할 것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신의 사랑, 신의 축복 따내기.그러나 성경은 예수님만 증거합니다. 인간의 믿음을 추호도 가미 시킨 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 믿음을 집어넣어(성령) 일을 다 완성 할 정도입니다. 결국 씨앗 싸움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족보 싸움, 보호자 싸움입니다. 선악이야기를 통해서 인간은 알 수 없는 길들여짐을 강요당합니다. 여자의 후손을 가만히 놔두는 꼴을 못봅니다. 그래서 다들 전쟁입니다. 성경도 전쟁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싸움. 자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맏아들과 둘재 아들은 한 아버지에게서 난 자식입니다만, 아버지는 그 속에서 은혜로 낳은 자식을 가려내어서 은혜의 자식만 자기 씨앗으로 삼겠다는 겁니다. 그 자기 씨앗(예수님의 믿음)의 모습은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아버지의 기쁨이 담겨진 은혜성을 보여 줍니다. 탕자처럼 되자? 말도 안되는 결론입니다. 맏아들의 태도를 버리자? 이것도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어떤 행동이 은혜를 유발한 것이 아니라. 원래 은혜가 늘 베풀어졌것만, 그것이 죄인임을 알 때, 은혜의 지나칠 정도의 환대와 영접과 용서와 일방적으로 베푸는 그 은혜성으로 감추어진 죄가 그 본성을 드러낸다는 겁니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이 은혜의 창조세계만을 고집하는 아버지의 기쁨에, 선악으로 자기 열심히 믿음을 키워온 자들은 그 창조세계를 수고한 만큼 댓가를 보상받는 창조세계를 고집함으로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결국 씨앗이 달랐다는 것이 판명 나는 겁니다. 인간 말쫑 그자체인 불효자인 둘째 아들의 겁때기를 아버지의 은혜가 벗겨보니 은혜의 자식이였고, 인간 모범생인 맏아들의 껍데기를 아버지의 은혜(믿음)가 벗겨보니 그는 은혜를 거부하는 진노의 자식이었던 겁니다.이 잃어버렸다가 다시 살아난 둘째아들은 은혜의 씨앗인 예수님이 심은 씨앗(믿음)이고, 늘 곁에서 열심히 지킬 것은 지킨다는 일관된 충심과 순종을 가진 아버지의 법에 철두철미 하던 맏아들은 은혜 씨앗의 등장으로 졸지에 본심 그 마음 깊이 있는 그 죄성이 비로소 등장함으로 둘째아들의 환대에 거부감을 나타내며 선악의 씨앗(마귀의 믿음- 마귀도 믿고 떨죠)이기에 죄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겁니다.(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결국 두 아들 중에 나는 어떤 아들인가? 라는게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이 들어간 자에게 거부할수 없이 일방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잃어버렸다가 다시 살아난 자를 찾아 기뻐 뛰는 아버지의 지나친 환대 라는 겁니다. 환대 하겠다는대 누가 거부하고 누가 말리겠습니까? 그 환대하심, 그 빛을 일방적으로 소경에게 선물하신 그 믿음으로 졸지에 두 갈래로 나타나더라 입니다. 빛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지, 빛을 믿어준 자신의 믿음이 아닙니다.캬 이것을 누가 도대체 믿겠습니까? 소경이야기,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 귀신들린자 이야기, 강도 만난 자 이야기, 노아의 세 아들 이야기, 아벨과 가인의 제사 이야기, 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천국은 바로 족보 싸움이요, 보호자 싸움이요, 씨앗 싸움인 것을 말하는 이유는 예수님만 실체로 남기고 모든 것은 그림자이기에 그림자는 실체만을 증거하고 은혜만 남기는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된 믿음을 펼치는 겁니다.(예정)주님, 주님은 고집스럽게 예수님이 심은 씨앗을 찾고 계십니다. 그 씨앗 곧 믿음은 예수님의 마음을 담은 십자가로 고정 되었습니다. 십자가야 말로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아버지의 지혜를 담은 은혜인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엔 그 십자가는 저주의 자리요 죽음의 자리요 한 믿음 하는 자들도 십자가 앞에서 그 믿음들이 다 탄로가 나는 줄 압니다. 모든 은밀한 비밀이 여기서 탄로가 나며 모든 은혜가 여기서 되찾음을 갖게 되니 하나님의 지혜가 십자가의 도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무모하게 우리 죄를 짊어진 그 십자가 사건이 절대 어리석고 무모한 것이 아닌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되찾겠다는 일관된 예수님의 믿음이기에 예수님의 믿음만이 다 이루신 것을 주님의 믿음으로 알게 하소서. 어떤 믿음도 예수님의 믿음 외에는 다 거짓이고 그 믿음을 흉내내어도 은혜의 세계로 인도하지 못하니, 예수님의 믿음만으로 인도 해주시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믿음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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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9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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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