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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40927 미국동부오후f자유게시판-

20140927 미국동부오후f

이름 : 한윤범(IP:119.192.174.28)

20140927 미국동부오후f

(강의:이근호 목사)

노아의 전도방법은, 인간이 집착하는 모든 것을 끊는 방법이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수선하고 이럴 때 갑자기 홍수 온다는 거예요. 이 직업이 얼마나 중요해요. 직업이 없으면 생계가 안 되잖아요.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방주 만드는 소리라는 것. 그러면 방주에 들어오는 사람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들어오겠습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더 황당한 게 시집가고 장가가고, 이걸 포기할 용기가 돼있는 사람만 방주에 들어간다. 이건 방주에 들어오지 말라는 말과 똑같은 겁니다. 가려면 가란 말이야.

그래서 제가 십년 전부터 이야기했지만 전도란 오지 말라는 것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전도란 “가세요. 오지 마세요. 당신 올 데가 아닙니다.” “저는 가겠습니다.” 오지 말라니까요. “모든 걸 포기하고 오겠습니다.” 그러면 오세요. 하지만 이것 챙기고, 저것 챙기려면 오지 마세요. 그건 우리가 용납해도 저쪽 분이 용납 안 해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할 때 노아 때와 같이 인자의 때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고 두 사람이 잠을 자도 한 사람은 포착되고 한 사람은 둔다. 두 사람이 쟁기를 간다. 쟁기를 간다는 것은 노동을 한다는 거예요. 똑같은 노동에 똑같은 연금 받고 살아도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한다. 그것은 재산을 포기하고 직업을 포기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재산을 가지던 부자가 되던 연금을 받고 이문을 더 얻고 하는 이것보다 더 좋은 것,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아는 사람은 구원받고 이것이 중요하니까 주여, 도와주소서. 이것은 땡 탈락이에요.

주님의 자존심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 이렇게 돼있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다음에 나오는 용어가 우리의 모든 것은 잘라 버립니다. 나의 이름을 잘라버리지요.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거기서 나는 이미 탈락이에요. 나의 이름, 나의 자존심 다 탈락이에요.

노아는 예배당 크게 지을 때 수천 명 들어올 줄 알았는데 달랑 여덟 명이고 그것도 자기 식구밖에 오지 않았어요. 아무도 오지 않았어요. 미치지 않은 이상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노아를 가지고 노아언약이라 하고 그 노아언약을 믿음에서 발현된(난로가 발갛게 되는 것 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원하지 않은 것을 보고 믿을 수 있는 초인적이고 초월적인 그런 현상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접촉점? 없습니다. 주의 선물로만 가능하고 눈에 띠고 믿어지는 것, 그것이 방주입니다.

일단 방주로 노아는 구원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비 올 때 사람들은 뭘 준비하겠습니까? 사람은 과거를 알기 때문에 방주를 준비할 거예요. 땡 탈락입니다. 홍해는 두 번 다시 벌어지지 않고 방주는 두 번 다시 만들지 않습니다. 홍해 경험 사람, 홍해 올 줄 알았지요. 그 다음 요단강 준비돼있습니다. 홍해는 자동문이에요. 서면 열리는데 요단강은 죽어야 열리는 것. 똑같은 문제를 작년에 출제된 문제를 올해 내지 않습니다.

성경이, “네가 이래도 올래?” 그런 이야기에요. 결국 주님은. “잘 먹고 잘 사는데 미쳤어? 왜 예수를 믿어?” 지금 이런 이야기를 안 믿는 자들이 하는 게 아니고 주님 쪽에서 한다니까. 네가 뭘 보러 왔던가? 좋은 옷, 그것 왕궁에 있어.

예상 외로 믿는 자가 주님을 모독하고 있다는 현상이에요. 믿는 자가 주님을 남보다 존경할 줄 알았는데 도리어 예수님이 하는 일을 조금 안다는 이유로 더 생활면이나 실천면에서 주님의 가치를 훼손시키고 있지 않는가? 복음을 전하는 목사 자신이 복음을 모독하고 시답지 않게 여기고 자기의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지 않는지 늘 생각해야 돼요.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원치 않는 길을 간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게 믿음의 ktx 노선에 있는 사람들이 다들 그래요. 같은 일을 반복 안 시켜요. 그러면 흉내 내기가 가능하거든요. 테레사 수녀가(거의 구원받았다고 보진 않는데) 만약에 인도에서 구제해서 천국에 갔다면 그때부터 구원을 쉬워요. 구제하면 되니까. 그런데 어떤 인간도 행해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 이상 행함을 모아도 구원 안 되기는 마찬가지인 거예요. 예배 앞자리 앉아서 구원받았으면 누구다 앞자리 앉으려고 프리미엄 오백 만원 붙어요. 가난한 자는 밀립니다.

그런데 특정 방법이 행함이 결코 구원을 제공할 수 없도록 주께서 그렇게 만들었거든요. 행함 없이 구원받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누구도 구원되는데 아무도 구원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에브리바디 구원, 노바디 구원. 미국 와서 말도 안 되는 영어, 세관 통과하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영어도 된다는 사실.

늦게 왔으니까 다시 해보면, 성경에서 구원이란 그냥 손에 쥐어주는 게 아니고 네가 귀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스스로 그것을 영생보다 귀하지 않다는 사실을 본인이 이미 수용하고 있는지 물으면서 주시는 겁니다. “버리면 구원받습니까?”라고 할 때 버린다는 행위도 구원에 아무 보탬이 안 되고 쓸데없는 짓을 한 거죠. 버리지 마시고 간직하시되 간직하시나 버리는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은 주어지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구원받습니다. 세리나 창기 직업을 버리던 안 버리던 강도짓을 버리던 안 버리던 아무나 되는데 구원은 아무나 되는 건 아니에요.

인간 입장에서 로또처럼 당첨된 자는 구원되는데 그것이 우연인데 그 우연이 주님의 입장에서는 우연이 아니고 아무나 주지 않겠다는 그 귀중함, 이것은 개나 돼지한테 줘서는 안 된다는 그것을 엄중히 고수하라는 쪽으로 “너만 줄게.” 하고 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받은 것이 주님의 결단에 의해서 준 것인지 그 심정을 안 다면 이 구원은 아무나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들었다고 해서 구원이 아니다. 보기는 보아도 본다고 해서 구원이 아니고, 구원이란 네가 들었다 봤다는 행함과 연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사야 말씀, 보았는데 깨닫는데 이르지 못하고, 들었는데 믿지는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해서 인간 선에서 구원을 받아낸 자격이나 방법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죠.

이제 본격적으로 누가복음 한 구절 읽어보겠습니다. 2장 22~24절,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이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이 말씀으로 오늘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여기서 제가 포인트로 잡은 것은 23절에 첫 태에 처음 난 남자. 그러니까 남자가 몇 명이죠? 숫자로 치면 2가 됩니까, 3이 됩니까? 1일죠. 이걸 성경은 맏이라고 해요. 회사에서 맏이란 말 씁니까? 아니죠. 맏이란 말은 가족에서 쓰죠. 그러면 제가 이 질문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 가족이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있습니까? 질문 자체가 좀 엉뚱한 질문이죠.

우리의 상식은 내가 있고 내 가족이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것은 상식에 맞는 것 같지만 상식에 안 맞아요. 왜냐하면 부모 없는 자식이 있습니까? 없지요. 가족이 우선이고 내가 있지요. 그런데 왜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족이 먼저 있다는 생각이 안 들고 반드시 내가 있고 가족은 나를 도와줘야 한다는 후차적 순서로 자꾸 밀리게 되지요? 뭔가 잘못된 생각이 안 들어요, 이 세상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하나님 저에게 은혜를 주시면 제 가족도 구원시키겠습니다. 마치 순서가 나로부터 해서 가족으로 나가는 순서로 하는데 그 순서가 하나님 앞에 동의가 될 순서냐에 대해서 저는 반대합니다. 그것은 주께서 원하는 순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첫 태에 첫 남자, 이게 맏이거든요. 맏이가 있다는 말은 본인이 원치 않아도 나 이전에 내가 소속된 가족이 먼저 있다는 것을 말해주지요.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내가 믿고 내가 구원받지 내 가족이 먼저 구원받아서 그 가족에 소속되어서 구원받을 생각을 우리는 잘 안 하게 되는 겁니다.

유명한 구절, 사도행전 16장 31절에 예수를 믿어라 그러면 누가 구원받죠? 너와 네 가족이 구원받죠. 가족이 우선이 된다면, 다시 말해서 내 가족이란 건 애초에 없고, 가정이 있음은 맏이가 있음으로 증명이 되고 그 맏이가 있는 가족에 일원이 될 때 우리는 구원을 받는 겁니다.

여러분이 익히 아는 이야기를 먼저 하겠어요.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습니다. 그 말 맞는 말이죠. 그 예수님이 누굽니까? 로마서 8장에 예수님은 맏이잖아요. 그러면 말을 바꿉시다. 우리의 맏이로 인하여 내가 구원받는다는 말은 이미 천상의 패밀리를 주님이 준비했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나부터 우선이니까 가족은 나의 어려움을 도와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가족을 위해서 내가 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안 합니다.

그런 것을 요 근래 티비 프로그램에 추사랑이라든지, 이희재 아들 둘, 송일국 아들 셋을 통해서 분명히 압니다. 얘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고 이런 소리 안 하거든요. 이상하게 인간은 뭔가 태어날 때부터 문제성이 있어요. 저는 그것을 신앙적 장애자라고 해요.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장애자. 단지 에너지가 넘치니까 에너지 방향이 자기의 편함과 행복을 위해서 쏟아지니까 그게 장애자가 되는데 그런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을 세상에 누가 장애자라고 합니까? 없습니다.

오히려 피아제라는 심리학자는 그것을 장려했지요. 인간이 시민으로 산다는 것은 자의식이 빨리 발달했다. 스스로 설 수 있는 자의식이 발달했다. 스스로 설 수 있는 자의식이란 가족도 자기한테 유리할 때 가족이지 불리할 땐 차버리라는 거거든요. 네가 중요해. 너보다 중요한 건 없어.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가족이 중요해. 네가 가족에 속하지 않으면 네 구원도 없는 거야.

그러면 우리 가족의 책임자가 누굽니까? 맏이지요. 맏이라는 영생을 얻는 중대한 자리는 우리가 준비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지요. 하나님께서 맏이란 이름을 준비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특수한 가족을 준비한 거예요. 누가복음은 가족에 관한 이야기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모두 다 특별한 가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2절 다시 보겠습니다. “모세의 법대로” 부연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독대해서 준 하나님의 법은 틀린 말 아니죠. 같은 말이죠. 모세의 법대로. 하나님이 주신 모세의 법의 지향점은, 같은 말입니다. 모세가 받은 율법의 목표는, 같은 말입니다.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 드디어 율법과 주께서 지정한 맏이, 첫 남자와의 만남의 시간, 카이로스, 만남의 때가 온 겁니다. 뭐 하려고? 하늘나라 준비된 패밀리를 만들려고 만났지요. 율법은 맏이 만들기에 집중된 방향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걸 실패한 이유가, 율법은 내가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 자체가 이미 실패가 돼버렸죠. 율법의 방향은 준비된 맏이를 향하여 가게 돼있는데 이것을 요한복음 5장에 의하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책인데 유대인들은 내가 살기 위해서 만든 거예요.

모든 율법이 예수님 맏이 되는데 소비한다면, 나는 뭐냐? 이걸 ‘상징’이라고 합니다. 요 근래 이걸 라캉이란 학자가 밝혀냈습니다. 인간은 상징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실재가 아니다. 인간이 생각한 것은 모두 상징인데 그것은 뭐냐? 자기 것이 아니고 살아오면서 듣고 보았던 것이 집대성하여 그것이 나의 정신세계를 꽉 차고 있다. 바깥에 있는 것이 상징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도 상징이다. 우리는 상징이기 때문에 내가 누군지 모르고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죽을 때도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어 버려요.

상징이란 말은 실재가 아니란 말이죠. 진짜 그 인간이 아니란 말이죠. 마치 돋보기에 빛이 모이듯이 돋보기 같은 역할로 모든 율법을 집중시키는 특정한 인물이 있어요. 그분이 마지막 아담이에요. 우리는 마지막 아담이 아니라니까. 마지막 아담이 따로 있고 마지막 아담을 드러내기 위해서 모든 율법은 달려가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오해하기를 자기 살리기 위해서 율법이 왔다고 생각하고 자기는 지킴으로써 구원되고 하나님께 영광 된다고 그런 오해를 한 겁니다. 자기는 안개인데 상징이란 실체가 없어요. 있어도 없어도 그만입니다.

여러분, 성만찬 해본 적 있습니까? 성만찬 할 때 그 떡과 그 잔이 예수님의 피던가요, 예수님의 몸이던가요? 천주교는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몸이다. 그런데 개신교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이것 상징이다. 만약에 떡을 먹다가 놓쳤다. 그러면 예수님을 다치게 한 것입니까? 그렇게 되면 그 떡은 상징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이 변형된 거죠. 잔을 마시다 좀 흘리면 예수님의 피가 흘려진 거예요.

그걸 우리는 상징이라고 하지요. 예수님의 상징은 몇 그램이냐, 또는 몇 리터냐고 의미를 두지 않지요. 우리는 의미를 두지 않지요. 그저 주께서 죽으신 날 그 밤을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 주께서 죽으셔서 우리가 영생 얻었다는 것을 표하는 그냥 상징물이란 말이죠. 상징물을 들여다보세요. 분명히 거기에 바이러스 있고 대장균 있을 수도 있지요. 예수님의 더러운 몸에 더러운 피에 세균, 바이러스 퍼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예수님께서 이런 더러운 것은 주다니? 이렇게 하지 않지요. 상징은 상징이니까. 실체가 아니니까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거예요. 상징이 상징으로서의 가치는 실재와 관계성, 거미줄처럼 연결될 때만 비로소 실재로부터 의미를 부여받는 겁니다.

우리요, 우리요? 맏이가 있음에 우리가 의미 있지 맏이 없으면 구원 못 받습니다. 로마서 8장 보세요. 맏아들 구원해서 우리를 구원하는 거예요. 우리는 양자고. 내가 교회 다니고 내가 예수 믿어서 내가 구원받는다. 성경에 그런 구원 없습니다. 맏이에 소속돼요.

제가 첫 번째 날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아버지를 모르면 아들을 모른다고 했어요. 그런데 아버지를 아는 분이 예수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에요. 만들었다고 아들이 아니에요. 예수님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린 아들이 아닙니다. 모든 율법은 예수님, 아들 만들기 위해서 집중하지 만약에 날 구원하려고 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선악과 따먹을 때부터 생명나무 가는 길을 막아놓질 않습니다. “선악과 따먹었어요? 내가 실수했네. 사랑의 하나님이 그것까지 생각 못했어요.” 하고, “실수했어요? 다음엔 조심하세요.” 더욱 더 활짝 열어놓고 생명나무 마음껏 따먹으라고 했을 겁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생명나무와 선악과는 한 통속이에요. 생명나무가 영원히 못 따먹는 나무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너 같은 존재에게 생명나무를 허락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사상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획은 뭡니까? 인간은 이미 창조했고 그런데 인간이 없다면 기존의 인간을 흙으로 돌려보내고 상징물에 불과한 것을 드러내고 진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만이 참된 창조의 원리에 합당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야 될 분은 죽었다가 살아남으로써 그분 보좌 옆에 기념수, 생명나무 가로수가 연못과 더불어 요한계시록 22장에 펼쳐지잖아요. 그게 누구 덕입니까? 우리 먹고 살라고? 아니에요. 어린양 기념하라고. 어린양만 참된 실재물이고 그분의 가족에 편입되지 아니하면 누구도 생명나무 거기에 갈 수 없는 겁니다.

주께서 생명나무 못 가게 하고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가게 만들고 이름도 아담으로 지어서 만들고 주께서 모든 말씀을 주셔서 누굴 만드느냐 하면, 생명나무 따먹을 자격과 나눠줄 자격이 있는 새로운 인물을 율법이 맏아들이란 개념으로 이 땅에 이스라엘 속에 실시한 겁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 이게 바로 복음의 비밀입니다.

예수 믿어라. 구원받는다. 그런 복음 없습니다. 로마서 10장 13절 누구든지 주를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그게 누구에요? 주에요, 주. 주라니까. 모든 언약이 율법에 속했다는 그래서 생겨버린 주에요. 우리를 찾고 있던 마귀를 홀로 이겼다는 그 주에요. 주라는 단어 외운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지가 이름 부른다고 뭔지도 몰라요. 그냥 예수 이름 흉내 내서 된다면 앵무새도 되겠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주 예수, 주 예수.” 그럼 앵무새 구원받았네??

제가 첫날에 이야기했지요. 지금 우리가 아는 현실 말고 어떤 다른 전체 현실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는 겁니다. 그걸 누가복음이 보여주고 있지요. 가족이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가족이 있습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제가 있습니다.” 네가 있다는 말하지 마. 너는 없어질 존재기 때문에 이름을 아담으로 지었기 때문에 그런 말 하는 게 아니요. 혹시 가족이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뽑았지요. 열두 제자가 가족입니다. 없는 가족, 맏아들 되신 분이 친히 만듭니다. 어떤 자리? 야곱의 자리에서.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인자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했지요.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인자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나다나엘 네가 볼 때가 있으리라. 주께서 가족을 만들었지 날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 가족에 오려면 나는 상징물에 불과한 것을 동의하고 죽여도 괜찮다는 동의가 있어야 돼요. 수술동의서에 사인하듯이 예수님 가족이라면 죽어도 좋다고 동의서에 사인해야 돼요. 성령께서 사인을 대신 해버리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사인하나마다 성령께서 일방적으로 예수님의 가족으로 살게 하십니다.

우리 힘으로 지옥을 구경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세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 모든 의사와 의견과 요구는 주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갈취당하고 박탈당했기 때문에. 마치 내가 착하고 싶어도 아담 속성 때문에 죽였다고 여긴 욕심이 새로 나오는 것을 통해서 나는 욕심의 왕 노릇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이제는 그 욕심마저 처리하시고 주님의 욕심이 아담의 욕심을 대신해서 나는 너를 기어이 건지겠다는 의지 천명과 강렬한 의지를 그 사랑을 마귀가 와도 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난처한 입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남은 것은 욕 얻어먹는 거예요. 싫으면 말고. 배짱도 무슨 배짱? 똥배짱. 그러한 배짱 장사 성도에게 꼭 필요합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할 때 인자가 도적같이 오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하면서도 이것보다 더 중요한 상황 속에 내가 놓여있다는 것을 우리가 믿으면 되는 겁니다.

의사, 판사, 수학박사, 교수 짓을 하면서 진짜 진리를 아는 사람은 이것보다 중요한 것이 나한테 있음을 나는 주님의 가족임을 알 때 그 사람은 수학박사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낙타되면 안 돼요. 그러면 천국 가는 구멍이 열리지 않습니다.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다고 하신 그분의 가족이 된다면, 가족의 이름으로 무사통과가 되는 그런 시스템을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셨습니다.

제가 그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그 대목이 누가복음 2장에 나와 있습니다. 누가 2장 48,49절을 읽어봅시다.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아이고, 사춘기도 아니고 되바라졌지요. 사흘 동안 찾았어요. 112 신고하고 여기저기 전화 다하고 전단지 인쇄해서 전봇대에 붙이고 뿌리고. 말이 사흘이지 72시간입니다. 엄마, 아빠 애간장 다 녹았어요. 그런데 다행스럽게 찾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하는 말이,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너는 어디 소속이다? 너는 아빠, 엄마 소속이라고 언급했지요.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길을 잃어버린 이유가 뭡니까? 아빠는 아빠가 아니요 엄마는 엄마가 아닙니다. 아빠, 엄마는 본인의 가족이 우선인데 저는 우선되는 가족이 따로 있습니다. 잃어버림이 됨으로 엄마, 아빠는 내가 소속된 가족을 비로소 발견할 것입니다.

그래서 49절에 하는 말이,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찾는다고 또 문제에요. 부모가 자식 찾는 것이 당연한 거지요. 그 당연함 때문에 노아의 방주에 안 들어갔다니까. 그 놈의 당연 때문에, 당연함.

아이야 우리 가족은 중요하고 너는 거기에 소속돼있으니까 중요한 우리 가족부터 챙겨야 되지 않느냐는 것이 예수님의 아버지, 어머니의 의견이었고 예수님의 의견은 뭐냐 하면, 지금 번지수를 잘못 찾았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보다 내가 더 중요해야 돼요.”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아버지, 어머니가 뭐라고 합니까? “그래서 너를 찾은 거야.” “아버지, 어머니 나를 찾지 말고 내 아버지를 찾아야지요. 내가 아버지 있는 곳에 내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아버지가 있는 곳이 어딥니까? 간단한 문제인데. 예수님의 아버지 있는 곳이 그 당시에 성전이지요. 성전에 왔으면 제꺽 예수님을 찾았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가족은 성전을 경유하지 못하고 내 아들이니까 나 말고 다른 아버지 없고, 나 말고 다른 엄마가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게 상징물의 특징이에요. 우리가 실체고 우리가 실재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아니에요. 노, 노, 노. 아빠, 엄마 왜 이러십니까? 노, 노, 노.”

사람이 무슨 수로 이런 인식을 가질까요? 성령이 아니면 도저히 이런 발상이 나올 수가 없어요. 그동안 여러분은 신앙생활 누굴 위해 했습니까? 자기 자신 구원받기 위해서 했어요. 결국 우리는 본문에 의하면 주님을 찾은 게 아니고 나를 찾았지요. 나를 다치지 않기 위해서 주님을 보디가드 삼기 위해서 찾아다닌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것이 평생 우리의 철칙이었습니다.

심지어 나를 지옥 보내도 지옥 가는 나는 끝까지 살아남을 겁니다. 그런 비장한 각오로 살아왔습니다. 신이시여, 나를 지옥 보낸다할지라도 신은 버릴지라도 나는 나를 버릴 수 없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내가 왜 존재하느냐? 내가 생각한다는 이것이 중요하기에 내가 생각하는 이상은 모든 일은 내가 생각한대로 현실과 내세관과 천국은 내가 결정할 것이다. 주께서는 가려면 가라. 똥배짱이에요. 그래. 그렇게 살아라. 방주 만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들어가지 않는 사람의 그 고집.

그리고 소위 방주 안에 들어선 사람들도 사실은 방주 안에 있으면서 홍수 맞으면서 그 의를 몰랐습니다. 언제 알았는가? 홍수 끝나고 난 뒤에 동승한 짐승들 가운데서 더러운 짐승과 정결한 짐승을 같이 실었지요. 우리 같으면 어느 걸 숫자 줄이겠습니까? 깨끗한 것은 번식시키고 더러운 것은 줄여나갈 텐데 노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깨끗한 걸 잡아서 오히려 희생시켜서 더러운 것도 공짜로 구원 얻는 혜택을 누리는 이것이 하나님이 전략이었다는 걸 보여주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세기 8장에서 깨끗한 것을 잡아서, 그것 때문에 희생물로 실었던 거예요. 깨끗한 것을 잡아서, 다시는 물로서 심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은 너희가 날 때부터 악함이니라.

도대체 우리는 교회에서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오늘도 시간 때우고. 예배라는 상징물은 상징물로 때우는데. 저는 가본 적 없지만 중국에 이런 게 있답니다. 상징물에 적절한 예가 있어요. 중국의 어떤 황제가 자기가 죽고 난 뒤에 자기 영혼 지켜달라고 흙으로 말과 병사들 수만을 만들어서 무덤 안에 포진해놨다는 겁니다. 진시황 때지요. 그렇게 한지 벌써 천 년 지났잖아요. 그 중에서 한 명이라고 부활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부활 안 되지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은 맏아들에 속한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 맏아들을 세웠다는 말은, 맏아들 중심으로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겁니다. 그 가족을 만드는 절차와 방식은 옛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을 준 그 방식을 그대로 반복을 해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잡았지요. 이삭을 잡으라고 해놓고 살렸지요. 이건 뭐냐? 장차오실 우리의 맏아들도 그 모습대로 오신다는 거예요. 자신을 죽음에 넘겼다가 부활한 모습으로 오시지요. 이삭은 똑똑한 줄 압니까? 이삭은 자기 취향대로 맏아들에게 모든 축복을 물려주려고 하다가 결국 자기를 속인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전달됨으로 말미암아 이삭은 뭘 보여주느냐 하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역할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줬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올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위대한 영웅? 아니요. 흠모할 게 있다? 아니지요. 출세한 사람? 아니지요. 대단한 사람? 아니지요. 흠모할 것도 없고 보잘 것도 없고 모든 사람이 외면해버린 쓸데없고 무가치하다는 것, 제발 무가치한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에 보면, 성전을 사람들이 필요 없다고 갖다버린 돌 하나, 하나가 쌓여서 성전이 된다는 거예요. 사람이 버린 돌이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된다. 이 증거를 끄집어내라면 한도 없고 끝도 없어요.

그 많은 증거를 다 어디에 묻어놓고 가짜 예수가 교회에 주인이 돼버린 이 사실, 누가 그렇게 만들어냈어요? 마귀가 메시아를 제작해낸 겁니다. 그리스도를 반대하기 위해서 유사 그리스도로 마귀가 만들어냈습니다. 그 이야기가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옵니다. 너희가 좋아하는 마귀는 양의 탈을 쓰고 악마의 앞잡이들이 직원들이 이 땅에 와서 활동한 결과가 너희들이 좋아하는 가짜 예수, 가짜 복음, 가짜 성령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나는 진짜 예수, 진짜 성령이다. 증거대라고?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내가 약한 데서 강함이라. 아무것도 빼낼 게 없는 그것이 주의 사도의 증거가 된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3장에 보면 이렇게 합니다. 예수님이 약하심으로 십자가 졌지요. 그러면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이 땅에서 누가 봐도 약한 분이죠. 따라서 이용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희 속에 그런 예수를 믿는지 스스로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이야기하지요.

아버지께 대든 사춘기인지 모르지만 성질 더러운 소년 예수님. 방금 한 이야기 어버이날 설교입니다. 사람들이 기대하고 듣고 싶어 하는 걸 주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원하는 그리스도는 이미 많이 있습니다. 강한 예수 믿어서 자기도 덩달아 강해지겠다는 거예요. 그런 예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종의 형체를 지녀서 낮아지기를 어디까지 낮아지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그걸 포기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너희는 누구 마음을 품으라? 최홍만, 양준혁, 박찬호, 류현진, 금메달 그 마음이요? 그게 귀한 거예요? 이건희? 하면 된다는 조폭 마음 품을까요? 어떤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까? 이 마음을 품으라. 누구 마음? 어디가 가장 낮아진 마음인지 그것 찾으란 말이죠. 그게 신앙생활이에요.

“주여, 지금 이 신분이 나한테 과분합니다. 어울리지 않습니다. 내가 진짜 아무것도 아닌 상징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유일하게 보여주는 실재물은 어디 계십니까? 내가 상징물이라는 것을 지적해주시는 유일한 상징물이 아닌 분은 어디 계십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요.

십자가는 돈을 교회에 바치는 시간이 아니고 가난하게 되는 게 아닙니다. 가난하다고 약한 게 아니에요. 가난하면 돈 더 밝혀요. 그것은 결코 가난한 자가 아니고 집념이 강한 자에요. 뭐가 약한 자냐 하면, 나 같은 상징물에 돈이란 이런 상징물도 같이 내가 약한 것처럼 이것도 나를 강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 말고 다른 것을 생각할 때 그게 정말 어린애 마음, 약한 마음, 그야말로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그런 마음, 빈 마음이 되는 거예요.

누가복음은 그런 쪽입니다. 맏아들께서 어떻게 이 땅에 오셨나? 그 맏아들은 가족을 만드는데 가족을 만들기 위해서 뽑은 숫자가 열두 제자. 자기는 야곱의 자리에. 그러면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은 야곱입니다. 자신이 맏아들, 야곱의 자리에서 자식을 낳게 되면 이스라엘, 국가가 되거든요. 이스라엘 국가는 지파의 이름이 아니고 열두 지파 아버지의 이름이죠.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이죠.

야곱은 어떤 점에서 자기가 상징물인지 아느냐 하면, 이삭은 자기가 원하는 자를 밀려고 했지만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됐지요. 먼저 된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되지요. 야곱의 경우에는 어긋맞게 한다고요. 우리 같으면 어긋맞게 하면 오십견 걸린 사람은 당겨서 못합니다. 자리 바꾸면 될 것을 의도적으로 한다는 과정이 중요한 거예요. “너희들은 이것 하고 싶지 하지만 이걸 알면 구원 못 받아.” 나중 된 자가 큰 자인 것을 알아야 돼요. 에브라임과 므낫세 자리를 바꾸지 않고 어긋맞게 축복하는 것은 바로 내가 이런 주님의 과정에 의해서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주님의 맏아들 되는 과정은 하나님의 가족이 아니고 가족 밖의 인간들이 오해할 내용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 주변에 있던 유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예수님을 무가치하다고 배격하지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한다는 어떤 언질이나 어떤 기대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에게서 찾을 수없기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내용이에요.

이것만 하고 첫째 시간 쉽시다. 맏아들이 있지요. 맏아들만 있으면 안 되잖아요. 가족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러면 맏아들과 가족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는 문제가 남게 됩니다. 그것은 맏아들을 맏아들 되게 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어요. 그 관계가 그대로 이어지게 되면 이들은 가족이 됩니다. 다른 방식, 다른 길은 없어요. 아버지께서 맏아들 만드는 방식만 다시 반복하면서 우리가 맏아들의 한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아버지가 맏아들 될 때 하늘에서 뭐가 내려왔습니까? 맞아요. 성령이 내려왔지요. 그래서 어제 이야기했지요. 누가복음은 성령으로 시작해서 사도행전까지 계속 이어진다고. 누가복음 지은 저자와 사도행전 지은 저자가 동일하게 누가입니다. 그 전체 흐름은 성령에 의해서만 아들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해요. 베드로가 예언하기를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이 오게 되면 젊은이들은 예언하고. 그게 인간의 솜씨가 아니고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 구약은, 율법에 초점이 있으니까 그때는 성령이 안 오니까 지상의 육적인 방식으로 표현된 방식이 있어요. 그게 시형제결혼법이란 게 있어요. 시형제결혼법이란 것은, 형이 자식을 낳지 못할 때는 여분의 동생, 그것도 장가가지 않은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형의 자식을 낳는 방식입니다. 잘 기억하세요. 본인이 씨가 없을 때는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기어이 아들을 이어가는 방식을 시형제결혼법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남자가 무정자증이에요. 아들이 기업을 이어야 되는데 자식이 없으니까 곤란하잖아요. 그럴 때 동생의 정자를 받아서 형수를 통해 아들을 낳아 기업을 잇겠다는 방식, 시형제결혼법이 그겁니다. 그것을 <청담동스캔들>에서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몰랐지요. 동생의 정자를 정자은행에 보내서. 그걸 알고 부인 난리 났어요. 복음과 관련해서 드라마 보시면 재미있어요. 그러면 교체가 되지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같은 형식이 생긴다 말이죠. 왜 그렇게 했는가?

10분 쉬고 합시다.

첨부파일 : 20140927 미국동부오후f.hwp (51.5K), Down: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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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86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