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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40925 미국동부오후a자유게시판누가복음

20140925 미국동부오후a

이름 : 한윤범(IP:119.192.174.28)

20140925 미국동부오후a

(강의:이근호 목사)

기도하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셔서 준비한 말씀의 모임에 전적으로 주님의 승리에 복종하는 시간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중요한 것은 복음이요, 말씀이오니 다른데 마음 두지 않고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가 무엇인지를 가슴에 가득 품을 수 있는 어떤 경계나 방해받지 않는 귀한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누가복음 하겠습니다. 저녁모임은 누가복음 전체를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누가복음 1장에서 시작하면서 성경구절은 1장 68절에서 74절까지 제가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우리 조상을 긍휼이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이스라엘 입장에서 몇 가지 특수한 용어들이 나오는데 이 용어들이 없으면 구원이 안 됩니다. 제가 방금 던진 이야기조차 이방인으로서 참 낯설지요. 왜 낯서냐 하면 이방인 입장에서는 신, 하나님 여기 있고 인간이 있으면 이것으로 하나님 있다는 것은 존재지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도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들은 알아요. 있음과 있음 사이에는 어떻게 연결되고 소통되느냐? 이건 뻔히 알지요. 우리 인간들이 내가 여기 있고 타인이 있으면 대화한다든지, 대화는 기도지요. 그들에게 호의를 베푼다든지, 헌금이지요. 그 사람 앞에 재롱을 부린다든지, 이거는 착함이지요. 착함과 정성과 그리고 요청, 이 세 가지가 있으면 타인은 거기에 응답하게 돼있다는 겁니다. 왜? 내가 존재하는 것처럼 존재하니까. 이걸 합쳐서 존재의 묶음, 존재의 장, 존재의 바탕. 적당한 것은 그걸 존재의 장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누가 있을 때에 집이라든, 나무가 있을 때는 이야기를 안 합니다. 비록 같은 있음이라도 나같이 있음은 아니잖아요. “소나무야, 소나무야. 나에게 그늘이 되어다오.” 이렇게 중얼거리면 좀 이상한 사람이잖아요. 나 같은 인간은 아니니까. 그런데 소나무가 나를 안 만들었지요. 그래서 소나무한테 부탁할 필요는 없습니다. “강아지야, 나에게 양식을 다오.”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강아지도 나를 안 만들었다. 소나무도 나를 만들지 않았다. 그럼 누가 만들었습니까? 여기서 문제가 큽니다. 누가 만들었습니까? 아무도 나를 만든 분이 없지요. 만든 분이 없으니까 사람마다 공통적인 의견 수렴에 나서는 겁니다. 의견을 모아보는 거예요. “누가 만들었지?” “신이 만들었어. 신은 절대자니까.” “봤어?” “안 봤어.” “안 봤다면 이상한데.”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누가 만들었어?” “신이 만들었어.” “그런데 당신이 그 신을 본 적이 있어?” “못 봤어.” “참 사람들 이상하네.”

보지도 않았으면서 있다는 거예요. 보지도 않았음에도 있다고 하니까 그래 신이 만들었다고 치자. 신을 섬기는데 소나무나 돌멩이나 이것에 기도하고 헌금하거나 착한 재롱을 부리진 않잖아요. 그런데 신은 나 같은 자가 있다는 것은 나 같이 생긴 어떤 분이 있는데 그분은 우리보다 능력이 많으시고 창조의 능력을 가졌으니까 그분이 신이라고 치고 신이 먼저 있기에 우리는 신의 모습을 닮았기에 신이 먼저 있고 우리를 만들었고. 따라서 만들었다는 말은, 그분은 너무 위대해서 보이진 않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호의와 재롱과 정성과 정의, 이것을 확장시켜서 신에게 드리자. 따라서 이방인들이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들의 있음은 신에게 접촉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게 맞느냐, 안 맞느냐 하는 것은 서로 물어보면 의견 통일이 되니까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되 신이 만들었다고 하니까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크로마뇽인. 크로마뇽인이 있다는 것은, 진화론이 주장이기 때문에 제가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초기 문화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희박한 상태에서 일단 그들의 이론이 맞는다고 치면 크로마뇽인에서 최초로 신에 대한 예배와 제사가 있었다. 동굴 속에서. 신이 시작한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그 후예니까 그 전통을 이어받아서 모든 민족은 신을 섬기는 겁니다. 그게 발달되면 나중에 죽은 조상신이 신과 합류가 되니까 죽으면 사라지니까 사라진 사람끼리 따로 모이는 어떤 공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게 신의 세계고 그 신의 세계에 합류하는 방법은 후손들이 조상 숭배를 함으로써 조상을 매개로 해서 신에게 우리의 정성을 전달하고 신은 우리가 필요한 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것이 현재 인류문화학에서 내린 결론입니다. 그 증거가 뭐냐? 모든 민족에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조상 숭배였다. 조상이 신이라는 뜻은 아니고 조상이 죽으면 어딘가 합류하는 곳이 있더라. 성경에서는 이걸 음부라고 이야기합니다. 죽은 자들의 집합 장소.

방금 제가 이야기한 이것을 누가 틀렸다고 이야기할 나설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만약에 틀렸다고 한다면 직접 본 사람이 있어서 당신들 무식한 거야. 없는 거야. 이렇게 할 수 있는데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공통점을 동의한 점을 차출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달리 대안이 없기 때문에 동의할 수밖에 없고 동의된 것이 조상숭배고 조상숭배가 유발한 것이 집결력 또는 단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공동체입니다. 그 공동체의 대표적인 결과가 국가공동체, 씨족사회에서 부족사회로 발전하면서 결국 공동체가 된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린 결론은 뭐냐? 고대국가의 특징이 뭐냐? 공통의 신을 섬기는 겁니다. 그걸 제천의식이라고 하죠. 우리나라에 삼한 시대가 있잖아요. 마한, 진한, 변한 그리고 주몽 나오는 동예, 옥저. 우랄알타이 계통에서 나온 한반도에서의 특징은 제천의식이 있었어요. 신을 섬기는 겁니다. 그리고 이건 멀리 갈 것도 없지요. 기독교 오기 전에 한민족의 공통적인 의식이 있었습니다.

죽은 조상과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그건 제사를 통해서 하는 것이고, 그 제사를 통하려면 제사장이 있어야 되는데 그걸 가장이 담당했습니다. 평소에는 술 먹고 살다가도 조상 제삿날이 되면 갑자기 두루마기 입고 그날은 목욕 갔다 오고 티비 놓던 자리 치우고 그곳이 거룩한 성소가 되는 겁니다. 그건 가정이고 그게 마을 단위로 한다면 늙은 느티나무 있는 곳이 갑자기 지성소가 돼버려요. 이것이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초월세계로 집결하는 유일한 방식은 조상을 통해서 이렇게 했습니다.

조상제례, 지금도 아프리카나 많은 연구에 의하면 모든 민족의 공통점이 조상을 통한 신에 대한 접촉이었습니다. 조상한테 잘 보이면 후손이 복을 받고. 지금도 기독교에서는 교회 다녀도 이 신화적 잔재가 남아있지요. 교회 다니면 조상제례가 졸지에 추도예배로 바뀌지요. 추도예배가 죽은 조상을 위함입니까, 자기를 위함입니까?

조상숭배가 무엇의 집결에 도움이 된다? 현재 있는 공동체에요. 작은 단위는 가족이고 보다 큰 단위는 집안이고 그렇겠지요. 조상숭배를 하게 되면 흩어져 있던 결혼한 형제들이 다시 모이면 우리 가문은 뼈대 있는 가문이라는 걸 재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요. 만약에 조상숭배를 거부하면 그 집안에서 왕따 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물론 자기가 배부를 때는 왕따 당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아쉬울 때 갑자기 사업을 망했을 때 누가 도와줍니까? 여러분 외로울 때 윤복희가 도와줍니까? 여러분이에요? 내가 외로울 때 누가 도와줘요? 여러분이 누굽니까? 호적 파내라 백날 해도 역시 아버지는 아버지고, 자식 도울 사람은 부모밖에 없고 아무리 원수처럼 싸우더라도 형제간밖에 없어요. 그러면 그동안 왜 그렇게 잘난 척하며 조상제례에 참석 안 했어요? 기독교라고, 교회 다닌다고? 절 안 해도 좋으니 와서 참석해서

결국 눈에 보이는 가족들의 공동체에 집결해줘야 나중에 새로 결혼한 새댁한테 교육을 시켜서 우리 집안은 15대 선조가 이항복인데(경주 이씨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훌륭하고 임진왜란 때 우리 조상은 이런 소리를 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할 정도로 뼈대 있는 집안인 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이게 이방인들의 신과의 접촉방법입니다. 혼자 사는 게 아니죠.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에요. 인간은 사회 없이는 못사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사실은 펼쳐봐야 아무 의미 없는 거죠. 왜? 우리의 본성은 내 가족, 내 집안, 내 공동체, 내가 아쉬울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그 공동체가 멀리 있는 신보다도 나한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보탬이 된다는 말이죠.

만약에 우리 집안이 기독교 집안이라면 감히 불교로 전환할 용기 없고, 만약에 우리 집안이 불교라면 함부로 명절에 교회 다닌다고 함부로 못 끄집어내지요. 그 경계, 그 한계를 자신만만하게 넘어섰습니까? 인간은 못 넘어섭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란 말이 맞아요.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게 아니니까. 혼자 있어도 가족 생각하고 아내에 집에 있어도 바깥의 남편 생각하듯이 사람은 혼자서 못 삽니다. 살 수가 없어요. 비록 다투고 형제간에 싸우더라도 내 핏줄을 버린다? 죽으려고 환장했어요? 왜 핏줄을 버립니까. 안 돼요. 아버지가 있음으로 유산 하나라도 받고 마지막 늙어가면서 유일한 소망은 유산 받는 거잖아요. 참, 나라법이 좋아서 딸이고 아들이고 골고루 나누게 된 시대가 되었지만. 살아있을 때 부동산 하나라도 챙기고 현찰 챙겨야 되지.

하나님이란 결국 결집력에 대한 상징물이었다. 사실은 하나의 구실에 불과하지요. 그렇다면 이방인에게 신이란 공동체가 유발한 상징물이다. 이거는 제가 내린 결론이 아니고 모든 학자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신은 꼭 필요한 거예요. 그 말은 사람은 공동체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목사님,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잖아요. 그건 이스라엘을 몰라서 그래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안 믿습니다. 그럼 뭘 믿는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 유대나라는 결집력을 믿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어려울 때 미국 유대인들이 헌금하는 이유가, 그 나라가 있어야 자기 정체성이 확보가 되니까. 사람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니까.

그게 우리의 전제인데 그런 입장에서 누가복음을 펼친다? 뭐 하려고? 뭘 위해서 펼치지요? 이렇게 체계를 갖추었는데 뭘 얻겠다고 펼칩니까? 이렇게 전제로 보면 누가복음을 펼치는 이유는 간단한 거예요. 내가 생각했던 그 신이 구체적으로 계시를 줬다니까 그 계시를 통해서 내가 속한 공동체가 복을 받아 잘 될까 싶어서, 그 속에 있는 나도 덩달아 잘 될까 싶어서, 그분이 천국을 만들었다니까 그곳에 갈 수 있겠다 싶어서 그렇게 하나님을 믿은 거죠. 그런 마음으로.

본론은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지금까지는 서론이고. 서론부분을 다시 요약하게 되면, 이방인 입장에서 이미 신이라는 것이 무슨 용도로 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뻔히 아는 입장에서 내가 소속돼있는데 나와 가족과 단체가 잘 되기를 바라서 신이 필요하다는 그런 입장에서 집 나간 아들과 딸도 하나님 믿는 가운데 믿음의 가정이 된다는 그런 필요에 따라 신을 찾고 있는 입장에서 성경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이 주어졌을 때 이 누가복음은 현재

여러분, 곽이라고 알지요. 박스. 이미 곽은 짜여졌어요. 성경으로 내용을 채우면 된다는 아이디어가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되지요. 그러면 곽이라는 박스, 테두리는 절대로 건드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 우리 집에 들어올 때 주의해야 됩니다. 하나님 믿어드릴 테니까 이 정도는 안 건드리고 그냥 곱게 우리 일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식으로 되는 겁니다.

-그러면 창세기에서 뱀을 통해서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이 되리라고 해서 하와와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되기 위해서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그건 잘 몰라요. 확실치 않습니다. 하나님 되기를 원해서 따먹었는지 안 그러면 먹음직, 보암직해서 따먹을 때 결과에 대해서 뭔가 확정된 게 없어요. 그건 창세기할 때 합시다. 이것만 말씀드리고 넘어가겠습니다.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지요. 그런데 아담이 죽어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죽어본 적이 없지요. 그리고 눈이 밝아진다고 했는데 밝게 보인다는 걸 본 적이 없지요. 없는 상태에서 동기유발이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본인이 뭘 경험해야 그게 되는데

-조상신을 숭배한다고 해서 결국은 자기 자신 안에 자기가 신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투영되는 것이 아닌가, 해서

아닙니다. 그건 곤란해요. 연관돼있는 걸 해볼게요. 출애굽을 할 때 애굽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사람이 출애굽에 대해서 동기유발이 되겠느냐 하는 겁니다. 애굽이 전부인데 무슨 출애굽을 해요.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출애굽을 원하는 게 아니고 애굽의 정권이 바뀌어서 노예생활 벗어나서 예전처럼, 인간은 아는 게 과거밖에 없어요. 미래에 대해서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과거에 괜찮은 시절로 되돌아가기를 원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지 애굽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은 하나님 아이디어지 히브리인들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출애굽할 때 누가 당황했느냐 하면, 히브리인들이 당황했어요. 그래서 다시 자꾸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잖아요. 그래서 출애굽은 하나님 작전인지 히브리인들의 소망이 아니라는 거예요. 사람이 천국을 기대한다는 것은, 사람은 천국을 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사람들이 기대하는 천국은 실제 있는 천국이 아니고 자기가 살아가면서 괜찮다고 여기는 그런 경험들의 집합, imf 터지기 전으로 돌아가면 저는 천국으로 봐주겠다는 것밖에 없지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누가복음은 이방인들 눈에 보이는 것은 현재 같이 살고 있는 공동체가 우선이에요. 그런데 읽었던 본문에서 특이한 용어가 나온다. 이방인들의 존재 개념이 아니고 나는 여기 있고, 누가 만들었지? 신이 만들었고 만든 신을 우리가 믿으면 우리 집안은 죽어서도 함께 한다. 그런 아이디어가 아니고 특수한 용어가 나오는데 그 특수한 용어가 72절에 보면,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이것 설명해야 돼요. 이 설명이 상당히 중요한데 언약을 기억한다는 말은, 언약을 누가 기억한다는 말입니까? 사람이 기억한다는 말입니까? 언약을 내린 당사자가 기억한다는 말이지요. 말로 하면 어렵고 행동하면 쉬워요. 이 지우개가 집사님 지우개지요. 제 지우개 아니지요. 집사님께서 이 지우개를 던져요. 보니까 내 지우개가 아니에요. 그냥 길을 간단 말이죠. 그런데 집사님을 아무리 찾아도 지우개가 없어요. 어디 있지? 했는데 지우개를 주웠을 때에 이것은 자신이 던진 지우개를 자신이 기억하여 건지는 게 되지요.

하나님이 언약 던져서 구원하는 아이디어가 인간의 아이디어입니까, 하나님의 아이디어입니까? 하나님의 아이디어지요. 그럼 인간이 관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니기 때문에 이걸 주울 필요도 없고 건질 마음이 안 들지요. 주께서 자기가 던진 언약을 자기가 도로 회수하고 건지면서 완성하면서 나온 부대효과, 부대효과란 용어가 어려운데

부대효과는 ktx 지나갈 때 치마 입은 여자 분이 앉아있다고 가만있는데 치마가 날릴 때 이걸 부대효과라고 해요. 뭐야. 방금 뭐가 지나갔어. 가만있는 내 치마가 흔들려. 그럼 옆에 있던 할머니가, “아가씨 다리 자랑하려고 치마 들췄어요?” “할머니, 왜 그래요.” “다리 예쁘다고 약간 들었잖아.” “그렇게 몰아가지 마세요.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집사님, 구원받으려고 교회 나갔잖아.” “왜 그래요. 그런 적 없습니다.” 부대효과입니다. “공동체 복 받으려고 같은 예수 믿어서 가족끼리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 전도대회 할 때 나갔었잖아.” “왜 그래요. 저 모함하지 마세요. 제가 유발하지 않은 사태에 대해서 원인제공자로 몰아가시면 곤란합니다.” 부대효과입니다.

ktx가 지나갔는데 왜 치마가 흔들지요? 사실은 하나님께서 언약 던져놓고 줍는데 옆에 있는 볼펜까지 주울 때 걸어든 이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이야기, 그걸 전리품이라고 해요. 우리는 전쟁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우리는 애굽에 살고 싶어요. 우리의 과거의 기억 속에는.

프로이트는 의식을 두 가지로 나눴습니다. 무의식과 의식으로 나누었는데 그 사이에 전의식이란 것도 있고. 의식은 아무리 연구해도 무의식에 다가설 수 없습니다. 무의식이 잠잠할 때 무의식이 활동하면서 나오는 것이 꿈이고 꿈을 의식세계로 바꾸기 위해서 의식세계가 알아먹도록 꿈을 조작하는데 조작된 편집내용이 꿈이 되는 거예요. 꿈은 꿨지만 해석은 불가합니다. 해석이 안 돼요. 해석한다는 것은 의식세계에서나 통용되지 진짜 무의식에는 근처도 안 갔지요.

꿈같은 나의 본성이 해석이 되면서 사람은 정신병이 나아요. 그래서 정신병이란 뭐냐? 표현하지 않은 표현이 표현되면서 정신병이 낫습니다. 정신병에서 못 나으면, 어어어어. 말을 해. 내가 왜 그런지 내 마음을 표현을 못할 때 표현이 터지는 순간 그 사람의 정신병은 나아버린 거예요. 자녀 가운데 뭔가 어려울 때 문을 닫잖아요. 문 닫지 말고 대화로 하자. 대화를 하면 그 아이는 치유가 돼버렸어요. 그런데 너무 답답하면 문 닫아 걸고 게임에 빠져버려요. 치유가 안 되지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몰라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 세상은 인간이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웠으면 기껏 집안이나 공동체에 의지하겠습니까? 쉴 새 없이 ktx가 지나가거든요. 바람이 불거든요. 바람이 불면서 너무 흔들리니까 도대체 정신을 못 차려요. 대충 미친 상태에 빠져요. 그럴 때는 교회 나와서 기도하면서 부르짖는데 부르짖는 것도 성경적으로 맞고 그런 것도 없어요. 그냥 한 맺혀서 터져 나오는 거예요. 그냥 짐승이 부르짖듯이 터져 나오는 거죠. 누가 손대고 있었던 겁니다.

너를 이렇게 만든 게 누구야? 말을 못하지요. 말을 못하던 것이 말이 트일 때 그것이 바로 언약이 접촉할 때입니다. 누가 지나간 걸 몰랐는데 ktx가 지나간 걸 안 순간 치마가 약간 들린 그 아가씨는 비로소 정상인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ktx가 방금 지나갔구나. 나라는 인생, 누가 지나갔어요. 누구냐? 언약의 하나님이 지나갔습니다.

목사님, 그럴 것 같으면 언약의 하나님이 그냥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지나가지 말고 보이는 상태로 다가오게 되면 문제 해결 간단하지 않습니까? 보이는 상태로 지나갈 수 없어요. 왜냐하면 사람은 보는 것을 신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만약에(만약이란 말이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이 신으로 나타나게 되면, “저나 나나 똑같은데 뭐.”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예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지내왔습니다. 참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예수님을 랍비라고 했지요. 랍비가 뭡니까? 신은 때려죽여도 아니고 그냥 훌륭하신 분이지요. 당신을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하더이다. “그래. 베드로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사람들 말이 맞아, 틀려?” 여기서 베드로에게 갑자기 ktx가 지나갑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베드로가 자기 본심이 아니고 부대효과로 아주 엄청난 말을 해버렸어요. 그 말은 뭐냐? 우리 인생은 주님의 효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네가 알게 된 것은 혈육이 아니요 하나님 내 아버지시니라. 이 세상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베드로의 간접적인 고백을 통해서 알려줬습니다.

이제 진짜 본격적으로 강의 시작합니다. 미국이니까 What happened? 세상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전혀 종교적이지 않지요.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지요. 다만 무슨 일을 느낄 때나 관심 있는 거예요. 그걸 두 자로 하면, 뭐지? 이걸 모르는 사람은 뭐, 뭐, 뭔데? 뭐지, 무슨 변화지? 옆에서 변화는 무슨 변화, 이 사람 갑자기 왜 이래. 갑자기 이렇게 변했어. 가만있어 봐. 뭐지?

다메섹에 내려갈 때 사도 바울과 일행이 같이 내려갔잖아요. 지금 주님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우레가 쳤어요. 그런데 갑자기 사도 바울이 땅에 엎드렸고 장님이 됐습니다. 사도 바울이, “뭐지?” 하니까 옆에 사람이, “뭐야. 우레 쳤는데.” “아니야. 분명히 나한테 음성이 들렸어. 사울아, 사울아.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니라.” 이런 부대효과가 일어난 겁니다. 이 세상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누가복음 시작하면서 이 이야기부터 하고 싶은데 마침 이틀 간 버지니아 비치에 비가 왔지요. 그 예를 들겠습니다. 비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 살고 있습니다. 혹시 비 오라고 요청한 분계십니까? 없지요. 비가 오게 되면 특징이 그냥 당한다는 겁니다. 지금 비가 온다는 말을 하는데 정확하게 이야기합시다. ‘우리는 비 옴을 당한다.’ 이렇게 말해야 돼요. 왜냐하면 비 오라고 먼저 요청하고 하나님이 내리시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자기 마음대로지요.

우리는 비가 오니까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비 내리고, 눈 오면 눈 내린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비 왔다고, 눈 왔다고 우리 운명이 바뀌지는 않잖아요. 만약에 우리의 운명이 바뀌는 소나기가 온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겠습니까? 비 올 때 “나는 이제 천국 가.” 이럴 리는 없을 거예요. 눈 올 때 “나는 드디어 천국 가.” 이런 사람 없지요.

그런데 언약이 내리게 되면 갑자기 졸지에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일을 일으킨 부대효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때 우리의 태도는 이겁니다. 뭐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그러면서 황급히 누가복음 1장 68~74절을 읽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이 세상은 결국 뭐냐 하면, 언약을 던져놓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언약을 만드는 부대효과로 이 사람한테는 이게 바로 내가 그동안 몰랐던 현실 전부요, 현실 그 자체, 올 현실이에요. 그러면 코앞에 있던 나의 사업체, 아이 키우기, 얘 공부하기, 이건 부분 현실이죠.

“하나님, 우리 얘가 감기 걸렸어요? 비 내리시면 안 되는 것 아시죠.” 이렇게 요구할 입장이 못 돼요. 감기 걸렸는데 하필 비가 오다니. 그래서 감기 더 들었어요. “와이미. 주여,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우리는 항상 당하고 살면서도 우리를 당하게 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려울 때만 잠시 눈 돌릴 뿐이지 평소에는 나만의 것, 나의 공동체, 나의 가족, 눈앞에 있는 그것을 박스로 만들고, “신이시여, 이 박스 다치지 않게 잘 키워주세요.” 이런 식으로 믿어왔던 것이 이방인 신이라고 누가복음의 언약서는 이방인은 상상도 안 하는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라, 이스라엘 나라는 없습니다.

그래서 현실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지? 그 내용만 알면 우리의 강의는 끝났어요. 뭘 버려라? 나만의 현실을 현실 아닌 걸로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버려라. 참된 현실, 모든 현실이 있다면 우리가 거기에서 누리면서 살면 되지 그 현실을 독자적으로 따로 상자를 만들어서 그 안에서 폐쇄적으로 담겨서 살게 되면 스스로 현실에 대해서 충돌하는 바가 되기 때문에 가련한 인생입니다. 현실도 모르고 자기 욕구, 욕망밖에 모르는 그래놓고 평생 40, 60, 70을 살았다고요? 어떤 분은 90까지 사시는 분도 있어요. 들은 이야기인데 90 되도 안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그렇게 살면 뭐합니까? 90까지 살아도 자기밖에 모르는데. 기껏 안다는 게 자기 가족, 공동체 그리고 기독교 하나님이라는 것은 내 가족, 식구 지켜주는 보디가드 같은 하나님, 그건 바로 이방인들의 하나님이에요. 상상의 가짜 하나님, 내 존재가 확장되어 생긴 하나의 투사체에 불과한 겁니다.

투사체하니까 생각나는데 어릴 때 만화 봤는데 굉장히 신기한 게 있었어요. 배트맨이 있는 옥상 하늘에 배트맨 그림자가 비추더란 말이죠. 어릴 때 신기했죠. 사실은 옥상에 조명기구설치하면 만들 수 있는데.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신입니다. 내가 있는 현장에서 나만을 위한 신은 내가 죽는 순간 이것도 커져버리지요. 내가 죽는 순간 내가 한동안 신이라고 여겼던 것도 같이 공중에 날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란 사람은 아주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내가 있고 난 뒤에 하나님 있지 하나님 있고 내가 있지 않다. 가장 정확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내가 정확하다. 달리 이야기하면, 내가 죽으면 내가 믿던 하나님도 같이 날아가 버린다. 하나님 믿지 말고 하나님 잘 믿는 나 자신을 믿고 살아라. 이게 근대주체사상의 시작입니다. 데카르트 전제가 기독교 세계관에서 나온 거죠.

언약의 하나님은 전쟁을 했고 그 전쟁은 사람과 의논한 바 없고 일방적으로 전쟁을 했고 그 전쟁의 부대효과로 말미암아 우리가 납치를 당했다고 할까요, 건짐을 받은, 서 있다가 손으로 낚아챔을 당한 거죠. 들어가 보니까 안에 ktx 열차를 타고 있어요. 저쪽 칸이 아브라함 칸이고, 이쪽 칸이 다윗 칸이고, 제12호에 보니까 십자가 칸이 있는 거예요. 어느새 혈육이 아니면 갈 수 없는 아브라함 자손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 자손 아닌 자가 영적으로 이미 아브라함 자손의 열차에 동승을 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창문을 바깥을 보니까 나 같이 생긴 사람들이 그대로 코앞에 있는 자기 현실, 자기 가게, 자기 가족만 챙기면서 오늘도 24시간 그것만 집착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럴 때 외칩니다. 다윗의 언약이 어떻고, 아브라함언약이 어떻고 하면, 바깥사람들이, “뭐, 뭐라고?” “다윗의 언약, 아브라함의 언약을 하나님 스스로 던지고 하나님 스스로 완성하면서 구원이 되었어요.” 저 안에서 저 사람이 뭐라는 거야. 여기 72절 봅시다.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언약을 기억하지요. 언약을 교회에서 이야기하기가 참 난처해요. 이방인들은 나의 존재로 신을 섬기는데 충분하다고 보는 겁니다. 나 존재한다. 누가 만들었지? 조물주가 만들었다. “하나님, 거기 잘 계시지요? 죽어서 만납시다. 정성, 열심 드릴게요. 성의표시 하겠습니다.” 내가 이웃사람에게 잘하듯이 내가 다른 존재에게 좋은 관계 유지하듯이 남한테 하는 내 성의와 모든 걸 표출하게 되면 그것이 신에게 도달되면 신이 복을 주실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자기를 위한 약속을 만들어내지요. 물론 그 가운데 자기 돈 사기 친 사람 빨리 죽으라고 포함됐지만 그런 식으로 하는 거지요. 하지만 그것은 내가 지어낸 배트맨, 몽상이고 환상에 불과하지요.

그렇다면 누가복음 1장 전체 줄거리는 뭐냐고 물으면 간단해요. 하나님이 던진 언약을 회수하면서 그동안 구원받았다고 자처는 이스라엘을 밀어내고 그 밀어낸 빈 공간에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들로 하여금 구원의 ktx를 태우는 작업을 할 수 있는 근거 확보에 누가복음의 주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밖에 있는 사람은 진짜 하나님, 모세가 독대한 여호와 하나님이 만든 그 노선에 집어넣는데 근가 필요해요. 왜 근거가 필요하냐 하면 이들은 언약도 모르고 그냥 자기밖에 모르는 죄인이거든요. 그것도 마귀에게 속하고. 이 죄인을 의인으로 전환시키는 근거가 필요한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 속에는 죄인인데 의인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제부터 이 땅에서 만들어 가시는 그 작업을 누가복음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북 치고 장구치고.

누가복음이 어렵지만 쉽게 말해서 북 치고 장구치고 혼자 다 하시고 성령 보내시는 부대효과로 말미암아 우리는 내가 하지 않은 일에 공짜로 참여하게 된 거예요. 혼인잔치 때 길에서 놀고 있는데 원래 잔치할 손님들은 소 키운다고 안 와, 자기 장가간다고 안 와, 밭을 샀다고 안 와, 본 자손들은 다 초청 거절하고 초청되지 않은 거리에 있던 빌어먹고 아무 가치 없고 현실구성에 전혀 보탬이 안 되는 자를 무작위로 무조건 불러다가 아들의 혼인잔치에 집어넣고 거기서 일방적으로 천국을 확정지어버리는 그 이야기가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듣는 이스라엘 사람들, 유대인들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너, 아니란 거죠. 그리고 네가 저주했던 이방인들이 너희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식으로 이제부터 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오셨다는 겁니다.

방금 이런 이야기가 구원받는 우리와 사전에 조율이 있었습니까? 없었지요. 우리는 주께서 그런 효과를 줄 몰랐어요. 우리는 조상숭배라는 공동체 그리고 가족중심의 내용물로 꽉 차있기 때문에 특정민족이 믿는 여호와라는 특정종교가 여기에 삽입할 틈이 없어요. 여지가 없어요. 내 종교 관리하기도 바쁜데 어디 그런 걸 수입해서 합니까? 오면 튕겨버리고 오면 튕겨버리죠. 아무리 튕겨도 들어오게 되는 방법도 누가복음 안에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누가복음 하면서 그걸 찾아볼 거예요.

“아, 나는 예수 안 믿습니다.”라고 강력하게 거부하는 거부 능력마저 극복하고 만약에 방파제를 파도가 넘치면 어떻게 됩니까? 타고 들어오지요. 누가 허락 받고 들어오세요? 할 정도로 우리 허락도 없이 타고 들어와서 완전히 덮쳐버리는 거예요. 이것을 아까 제가 누구 허락받고 여기 비 내립니까? 라고 할 수 있습니까? 모든 현실은 절대로 우리 허락 받지 않고 일어난 일들이에요. 우리는 그냥 당한 겁니다. 매일 당하고 살아요. 그래서 제가 설교할 때 했지요. 뭘 했다고 이야기하지 말고 앞에 하나 붙여라. 당했다고 이야기해라. 이렇게 살라는 거예요.

만약에 로또 당첨되거든 1등 당첨됐다고 하지 마시고, “오늘도 부대효과로 1등 당첨되도록 당해버렸다.” 얘들이 만약에 복음을 안다면, “엄마 오늘도 전교 1등 당했어. 2등이 양보해주는데 미치겠어, 정말.” 그렇게 되는 거예요. 물론 그런 얘를 기대하진 마세요. 걔나 나나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자기 자랑질 하기에 급급하지 안 하거든요. 우린 어떤 경우에 당했다고 하느냐 하면, 내 기대에 못 미칠 때 당했다는 거죠. 나는 그만한 위치에 있지 않은데 재수 없어서 당했다는 거죠. 이제는 재수 있는 것도 당했다는 걸로 바꾸세요. 오늘도 당신 같이 미인을 아내를 만나는 그런 일을 당했다든지, 이렇게. 처녀는 결혼을 좀 당하면 좋겠고, 총각은 장가 당하길 바랍니다.

소나기 올 때 우리와 의논한 적 없습니다. 소나기뿐이겠습니까, 비 오고 눈 오고 뿐이겠습니까? 사실은 우리 운명도 당해서 확정된 천국 가기입니다. really? 누가복음이 말해줘요. 누가복음 구원할 자를 구원하고 또 한 가지 구원받지 말 사람을 기어이 추방시키는 상반된 작업이 예수님을 통해서 재배치가 되고 조정이 되게 돼있습니다. 현실을 언약 완성에 맞추어서 조정하기, 누가복음의 주체입니다. 테마입니다.

그 테마는 예수님이 얼마나 많은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자신이 아버지께 받은 그 테마, 일방적으로 건지고, 일방적으로 퇴출해버리는 그 테마가 주님의 모든 사역과 말씀 속에 담겨있어요. 그래서 구원받으려고 누가복음을 보지 마시고 이미 부대효과를 받아서, “뭐지? 왜 갑자기 내가 예수에 관심이 있지?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지?”라고 보신다면 누가복음은 의외로 대단히 쉽습니다.

그 쉬운 작업을 10분 쉬고

첨부파일 : 20140925 미국동부오후a.hwp (51.5K), Down: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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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8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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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