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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예수님에 관한 구원 141024강의마가복음

예수님에 관한 구원 141024

이름 : 이근호(IP:119.18.98.57)

서경수(IP:118.♡.139.27)

14-11-04 09:39

광주 강의(2014. 10. 24) 8-1

마가복음 2장 19절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금식 하느냐, 안 하느냐의 주도권이 손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신랑에게 있지요. 구약에서는 말씀 지키는 것이 인간에게 주도권이 있는 반면에 신약에서는 예수님께 주도권이 있습니다. 신랑이 중요하다는 거지요.

사람들이 신랑을 기다린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신랑으로 등장하면 자동적으로 신부의 자리도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자리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고, 천국의 자리를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만들어요. 예수님이 자신의 자리를 만들면 동시에 옆에 신부의 자리가 만들어집니다.

신부 자리가 없는 신랑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이미 자신이 구원할 자리를 고려해서 활동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 자리에 누가 들어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21절에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고 했어요. 신랑이 오면 자동적으로 옆에 새로운 자리가 마련되고, 신랑이 없다면 그 옆자리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쪽에서 내가 시작한 구원의 자리는 없는 겁니다.

내 구원의 자리는 없습니다. 이 사실이 구원의 자리를 만드는 재료가 됩니다. 우리는 없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예를 들어, 식당에 갔는데 자리가 없어서 다른 식당으로 가야겠다고 나서는데 주인이 "이리로 오세요."하면서 자리가 없다는 사람들을 위해서 새로운 자리를 만들 때, 그 때 그 사람은 식당에서 밥 먹게 된 모든 은혜와 공로는 없는 자리 마련해 주신 주인에게 돌리겠지요. 주님은 이런 전략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면 이미 있는 자리를 가지고 잘 해보겠다고 자신을 수양하고 도를 닦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구원을 해 줘도 자기자랑이 될 뿐입니다. 이런 사람을 탈락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미 구원 받았다고 자부하는 자들에 대해 21절, 22절을 말씀합니다.

22절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 바리새인들아, 너희들은 나를 감당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구원을 챙기려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복음이 감당이 안 됩니다. 그것을 '찢어진다'고 표현한 거예요. 뭔가를 소유하려고 장바구니에 담았는데 천이 찢어지니까 다 쏟아져버리지요.

유대인, 바리새인이 이렇다면 왜 우리에게는 복음이 들어왔는데 안 찢어지고 보관할 수 있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 천이 옛 천에 속하지 않고 새 천, 또는 새 부대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신랑이 생기면 자동적으로 신부의 자리가 생기듯이 예수님이 포도주가 되었다는 말은 그 포도주를 담을 부대도 같이 만들어집니다. 따라서 유대인, 바리새인처럼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행위는 주께서 찢어버립니다.

구원은 찢는 작업입니다. 유대인, 이방인 구분이 없습니다. 이방인들 역시 천국에 가고 싶어 합니다. 이방인도 나름대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평생을 법을 지키며 살고,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고 이런 것이 있는데, 복음이 들어오면 이런 것들이 다 찢어지지요.

이것을 정리하면, '하나님은 구원시켜 주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구원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구원시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주님 구원의 자료가 됩니다. '구원시켜 주지 않겠다면 우리도 억지로 구원 받을 마음은 없습니다.' 하고 돌아서는 것이 아니고, 구원시켜 주지 않음으로써 '어찌할꼬?'를 유발시켜 구원을 위해 노력한 나의 모든 행위가 전혀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도록 하십니다.

구원에 대한 은근한 기대가 절대로 구원에 보탬이 안 되는 쪽으로 조치를 하십니다. 구원은 100% 주께서 알아서 다 하시는 겁니다. 인간의 구원을 찢는다고 했는데,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소굴 만들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박을 먹을 때 쪼개서 먹을 수도 있지만 체크무늬 모양으로 잘라서 먹는 방법도 있지요.

주님은 우리의 속을 파서 예수님 자신의 구원을 담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구원을 담은 그릇이 되지요. 이렇게 되면 우리는 '내 꼴'이 구원 받는데 전혀 지장이 안 됩니다. 세리나 창기, 강도라도 구원 받는데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의 속을 팠습니다.

예수님이 삭게오의 집에 갔는데, 그 전에는 집에 돈이 있었겠지만 이제 구원이 그 집에 있습니다. 천국은 예수님이 가시는 곳곳이 천국입니다. 우리가 가는 곳이 천국이 아니고,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이 천국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늘을 버리고 땅에 내려오심으로, 예수님의 움직임, 예수님의 동선이 천국의 동선입니다.

만약 우리가 쳐다봐서 천국에 간다면 내가 쳐다 본 것이 공로가 되어 천국에 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안 쳐다봤으면 구원 못 받을 뻔했다.' 이렇게 된말 말이지요. 그러니까 주님은 쳐다보는 방식 말고 그냥 일방적으로 내려오는 방식을 취해서 우리 속을 파고 들어오셨어요. 그렇게 해서 100% 당신이 다 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늘 확인시키십니다.

이렇게 되면 내 인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 인생은 없고 주님의 구원을 보여주는 인생만 우리에게 있을 뿐이죠. 우리의 속이 겉을 주관합니다. 우리의 속을 파서 그 안에 십자가가 들어갑니다. 십자가는 죄 용서와 관련이 있지요. 흔히 ‘탕감’이라고 하는데, 탕감이 의미가 있으려면 내가 스스로 탕감할 수 없는 죄, 내 탕감의 능력을 넘어서는 죄를 날마다 저질러야겠지요.

내가 나쁜 짓을 했지만 이보다 더 큰 착한 일을 하면 나쁜 짓이 상쇄되어 사라지잖아요. 그러면 안 돼요. 우리는 죄를 짓되 내가 감당 못할 죄를 지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바퀴벌레가 보여서 밟아 죽였는데 나중에 보니까 어머 바퀴벌레입니다. 그 광경을 본 새끼 바퀴벌레는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이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죄가 아닙니다.

차를 운전해 가는데 갑자기 어떤 차가 끼어들 때, 입에서 거친 욕이 나오는데 그 차는 이미 가버렸어요. 심한 욕설을 한 잘못을 그 사람을 만나서 용서를 빌어야 하는데 그 사람을 만날 수 없으니 그 죄를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 죄를 감당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하는가? 그 때는 주님이 매일 우리 죄를 탕감해 주시면 되지요.

탕감 받을 때의 그 기쁨은 세상에서 어떤 수모를 당해도 개의치 않을 정도로 즐거워요. 우리의 모든 죄를 주께서 매일 탕감해 주시니까 매일이 주님과 함께하는 날이에요. 그러니까 날짜가 진척이 안 돼요. 매일 새날입니다. 왜? 매일 탕감 받는 날이니까요. 매일 곗돈 타는 날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통장이 365개가 있고, 이것이 전부 정기 적금이라 만기일이 다르다면 매일 은행에서 전화가 옵니다. “만기 된 것이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매일 이런 전화가 와서 매일 즐겁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매일 죄의 탕감을 받고 있습니다.

정기예금보다 더 좋은 예금이 뭔가? 탕감 받은 통장. 이 통장을 늘 가지고 있으면 돼요. 가을이 되면 가을이 되어서 짓는 죄가 있지요. 낙엽 떨어지는 가을에는 남자들이 짓는 죄가 있어요. 부둣가에 가서 떠나간 여인을 생각하면서 추억에 젖는 죄. 그 죄 다음날 탕감 받습니다.

시시때때로 짓는 우리의 죄가 매일 탕감을 받으니 100% 주의 은혜로 구원 받는 것입니다. 탕감이란 내가 죄를 지었는데 주님이 내 죄를 일방적으로 처리한 것입니다. 가락교회 강의에서 제가 어려운 질문을 던졌어요. ‘선악과 타먹기 전의 아담과 하와는 어떤 정신 상태냐?’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선과 악에 대한 의식이 생기는데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선과 악에 대한 의식이 없지요? 선과 악에 대한 의식이 없다는 말을 이미 선악을 알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도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선과 악에 대한 의식이 없으니까 바보천치입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바보천치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인데, 이건 안 맞는 것 같고.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어떤 마음을 가졌는가?’ 하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전에는 자의식이 성립 안 되기 때문입니다.

자의식은 마귀가 갖고 있어요. 마귀가 하나님께 대들 때 그 심리는 ‘나는 나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7장 8절에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게 바벨론이 스스로 한 말입니다. 바벨론은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악마의 지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악마의 소리입니다.

선악과 따먹으라고 부추기는 마귀는 알아요. 선악 체계를 갖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 신이 되었다는 말이지요. 선악을 알면 신처럼 돼요. 마귀가 이미 신처럼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되어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없다고 하시면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냈어요.

우리와 같이 되었기에 쫓아내겠다는 것은, 인간은 선악을 알게 된 악마의 길을 밟아가기 때문에 악마와 같이 결탁할 일이 없다고 해서 추방하는 겁니다. 악마는 생명나무를 따먹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쫓아냅니다.

그럼 악마에 대한 하나님의 대처는 뭡니까? ‘내가 사랑하는 자는 예수다.’라고 했어요. 악마는 자신을 쳐다보는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앞장세워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예수를 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고 마귀는 거기에 대해 삐친 거예요. 왜 내가 아니고 예수인가?

세상의 현실은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이 주냐, 아니면 이것에 대해 반대하느냐?’ 이 양대 세력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말려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밀고 있고, 마귀는 스스로 가라고 하고. 석가모니가 죽을 때 유언처럼 한 말이 이것입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불교는 ‘네가 주인이 되어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주인이다.’라는 것이지요. 이게 마귀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에 대해서 “내가 신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사랑하는 자는 오직 예수다.”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을 앞장세우지요.

따라서 예수님을 앞장세우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귀의 집결지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이용해서 구원 받으려는 것도 마귀 짓입니다. 인간은 구원을 생각하지 말고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 결과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은 예수님의 주 되심의 여파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감히 구원 받겠다는 생각은 우리를 에덴동산에서 쫓아 낸 취지에 반하는 것입니다. “날 구원해 주옵소서.”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마귀가 시킨 거예요. ‘구원 받아서 죽은 후에 좋은 곳에 가야지.’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합니까? 인간 구원의 의지를 꺾어버리지요.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 받고자 하는 구조 자체를 폭파함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합니다. 바울의 말이 참 어렵지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고 했는데, ‘외에’라고 잘라내는 대목에 내가 구원 받겠다는 생각도 잘려 나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하신 결과가 ‘나’여야지, 내가 구원을 소유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나의 가치를 내가 따로 소유하는 것이 됩니다. 구원은 주님이 알아서 만드는 것인데 그것을 ‘나에게 주세요.’ 라고 하는 것은 내가 주님과는 따로 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말씀에 어긋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만 알기 원한다.’고 했는데 거기에 슬쩍 ‘나’를 가져다 붙이면 가룟 유다의 꼴이 됩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는데, 주님이 내게 해 주신 것이 뭐있습니까?” 주님을 하나의 대상으로 보고 자기 것을 끝까지 챙기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구원 안 받겠다는 말입니까? 구원 안 받겠다는 말도 너무 건방진 말이에요. 주님이 주시겠다는데 안 받겠다고요? 내가 거부한다고 안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입니다. 어떤 과정? 주께서 이미 우리를 구원했다는 증거로 남은 필름입니다. 필름이 스스로 자기를 자랑하면서 “예쁘지?” 이럴 필요 없어요. 남들이 보는 것이지요. “이 얼룩이 뭐지?” 하고 3D 안경을 끼고 보니까 십자가만 보이지요. 십자가만 보이게 하는 필름, 그것이 바로 구원 받은 자의 실존입니다.

그래서 선악과 알기 전 아담은 하나의 배치물입니다. 어떤 배치물인가? 생명나무, 선악과, 아담 부부, 뱀. 이들은 기능이 소중합니다. 무엇을 만들어 내는 배치물인가 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싸운다는 하나님 본래의 시나리오를 작성하기 위해서 있는 작품들입니다.

바보가 아니고 그들은 본래의 자의식은 없고 하나의 관계로 얽혀 있는(선악과와 얽인 아담과 하와, 생명나무와 얽힌 아담과 하와, 뱀과 얽힌 아담과 하와) 영역으로써의 역할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는 “나는 나다.”가 나와요. "나는 부끄럽습니다. 저 여자가 따먹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부부가 두 몸이 아니고 한 몸이었습니다. 결혼해서 부부가 되어도 한 몸이 아닙니다. 한 몸이 아닌데 한 몸의 기능을 하게 하십니다. 둘 사이에 예수님이 개입해서 둘이 한 몸이 되게 했지 절대로 한 몸이 아니에요. 어떤 식으로든지 한 몸인 것을 찾아보세요. 찾을 수 있는지? 찾을 수 없습니다. 동상이몽입니다.

그런데 왜 안 헤어지는가? 주께서 못 헤어지게 그동안 붙여놓았기에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고전7:15).”고 했어요. 결혼의 굴레에서 해방시켜주는 복음도 있습니다. 이혼 가능함. 그래서 정 이혼하고 싶으면 계속 복음을 전해서 상대가 그것에 반대하도록 몰아세우면 됩니다. 그러나 너무 전략적으로 하지는 마세요.

22절에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라고 했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다 일리 있는 말씀을 해요.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는 바보가 없잖아요. 들어보면 맞는 말인데 이상하게 듣는 사람은 기분이 나빠요. 포도주는 예수님 본인을 이야기하고, 낡은 부대는 낡은 것이니까 역사와 전통을 붙들고 있고, 그것을 유지, 보완, 지탱하려는 의지가 강한 것이고, 결국 내 인생은 내가 끌고 왔다는 자에게 주님의 복음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 속을 파내서 그 속에 주님의 아지트를 만듭니다. 그 증거가 뭔가 하면,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죄 뿐입니다.”라는 고백이 늘 나오는 거예요. 죄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나는 죄 뿐입니다.’가 나옵니다. 불신자는 죄가 나오고, 신자는 ‘죄 뿐입니다.’가 나옵니다. 다르지요? 한 쪽은 독자적으로 나오고, 다른 한 쪽은 그리스도 때문에 유발된, 폭로 당하듯이 주님의 삽질에 의해서 나왔을 때,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미 이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성도는 성령께서 삽질을 해서 죄를 퍼내고, 불신자는 ‘나는 의인이다.’ 라고 하면서 나오는 것은 죄만 나오지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소위 백화점 VIP고객한테 유럽의 명품을 팔면서 포장을 시장 난전에 채소 담는 비닐에 담아주는 사람은 없어요. 포장과 내용물이 같은 품위가 되어야지요. 복음을 담을 포장지를 우리가 마련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찢어지고 주께서 우리 속을 파내서 들어오는 방식입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첫 번째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는 제자들이죠. 제자들에게 이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도록 주께서 붙들고 갑니다. 제멋대로 회원 탈퇴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하고 세 번이나 부인해도 못 빠져나가요. 왜? 이 말씀(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겨야 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주님 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도 끝까지 찾아가셨지요. 그리고 “평안하냐?”고 물었어요. 귀신도 이런 귀신은 없어요. 석가모니에게 제자가 물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됩니까?”라고. 석가모니가 대답하기를 “불은 불타는 연료가 소진되면 불도 사라진다.” 그러니까 불타는 연료는 육체고 그 육체가 죽으면 불도 사라진다는 것이지요.

석가가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후손이기에 악마의 대변자입니다. 전혀 존경할 것이 없어요. 부처 존경하는 것은 마귀를 존경하는 것과 같습니다. 공자도 석가도 모르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성경에는 뭐라고 말합니까? 죽어도 안 죽어요.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무덤 속에 가도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옵니다.

지금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처소가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신랑 옆의 신부 자리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주님이 창세전부터 알아주는 사람이냐, 버림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가 이것이 문제고 이 모든 결정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 하십니다.

그러니까 내 인생에서 내가 손을 떼는 것이 맞습니다. 내 인생은 주님 손에 있는데 왜 내가 책임을 지려고 합니까? 손을 떼야지요. 그 손 떼는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를 누가 관리합니까? 무화과나무 자기가 관리를 못합니다. 열매 맺을 때도 아닌데 열매 없다고 저주하면 그냥 저주 받아야 됩니다. 무화과나무처럼 인간도 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그럼 제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나는 너를 버리지 않는다.” 이것이 사랑이에요.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은 사랑 제공자가 책임지기 때문에 환란, 곤고, 핍박 그 어떤 것이 와도 끊어지지 않아요.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끈질긴 사랑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환란과 핍박을 주시는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난데없는 어려움이 왔을 때는 주께서 내 속을 파고 들어와서 아지트를 만들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럴 때는 우리 속에 뭔가가 출렁이고 있음을 느껴야 합니다. 마치 여자가 임신했을 때 뱃속에서 태아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듯 느껴야 됩니다. 주님이 내 안에서 나를 조종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새 포도주와 날은 부대를 구분할 필요가 있잖아요. 이 명제를 던져 놓았는데, 모든 결과는 이 명제 안에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라고 할 때, 이것은 분석 판단이라고 합니다. ‘총각’이란 말 안에 자체적인 풀이나 나오게 되어 있어요. ‘나는 포도를 좋아한다.’고 하면, 내가 포도를 좋아하는 것은 남들은 몰라요. 같이 지내면서 시간을 보내면 알 수 있지요. 이것은 종합 판단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포도주가 무엇이고, 낡은 부대가 무엇인가를 먼저 던져놓고 뒤에 풀이하는 식으로 나옵니다. 낡은 부대는 뭔가?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비롯한 모든 율법은 인간에게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다.’ 이것이 새 포도주입니다. 그럼 새 부대는 뭔가? 주께서 안식일을 지켜서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우리가 안식일 지킨 자가 될 때 이것이 새 부대입니다.

그래서 남들이 묻기를 “안식일 지키고, 십일조 했습니까?” 라고 하면, “예. 주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라고 답하는 것이 새 부대에요. 복음을 담기에 충분합니다. 전혀 부대가 터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십일조를 내가 했습니다. 소득의 10%를 했습니다. 주일날 일찍 교회에 갔습니다.” 이런 부대는 다 찢어집니다.

사실 우리도 찢어졌기에 새 부대가 된 거예요. 인간은 옛 부대밖에 없어요. 그런데 주께서 찢고 새 부대로 교체했기에 우리는 옛 부대도 알고 새 부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돈이 없을 때는 돈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데 돈이 생기면 있는 돈을 유지하기 위해서 돈을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넥타이도 5천 원짜리 넥타이는 별로 신경 안 쓰도 되는데, 이탈리아 명품 최고급 넥타이를 선물로 받은 것은 신경이 쓰입니다. 사람은 물건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나는 나를 사랑했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갑자기 내가 좋아하는 물건이 생기고, 내가 좋아하는 돈이 생겨요.

복음을 듣고 어떤 사람은 '그러면 안식일을 안 지키면 되잖아.' 라고 하는데,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안식일을 안 지키는 것 중 어느 것이 나에게 기쁨을 주겠습니까? 교회 갔다 오는 것이 기분 좋습니까, 안 가고 집에 쉬는 것이 기분 좋습니까? 갔다 오는 것이 기분 좋다면 그 사람은 교회 갔다 왔다는 것을 신앙이 있고, 남들 보다는 더 노력했다는 것에 대한 만족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일이 있어서 주일 예배에 불참하면 뭔가 불안하고, 또 한 주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져도 벌어지게 되어 있어요. 내 차를 누가 추돌한다든지, 길을 가다가 넘어진다든지 등등. 그러면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혹시 내가 뭘 잘못한 일이 있어서 이런 일이 벌어졌지? 이번 주일 예배를 빼먹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구나.' 또는 '기도를 제대로 하지 않았더니 이런 일이 벌어졌구나. 앞으로는 주의하자.' 이렇게 돼요.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주님께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가치를 높이는데 주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집에 강아지를 키우는데, 어떤 사람이 그 강아지를 발로 찬다면 어떤 기분입니까? 내 몸 아닌데 차든 말든 나는 상관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내 몸을 차는 것같이 느껴지지요.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은 강아지 키우는 것과 같아요.

율법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나의 영토를 보호하고 나의 것을 지키는 재료가 됩니다. 왜냐?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선악만 남아 있습니다. 마귀만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선악과를 가진 것이 아니고 선악과의 노예로 살아 온 것입니다. 마귀의 종으로 살아 온 거예요.

마귀의 종으로 살아 온 우리가 이제 자유롭게 살겠다고 자유선언을 한다고 마귀가 놓아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주셔서 우리가 이제 복음을 아니까 율법은 안 지켜도 된다고 해도 결국 우리는 법 감정에 노예가 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폭로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이것을 익히 아시고 주님은 안식일을 거론합니다. 안식일이 거론되면 유대인들만 긴장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사람들은 말고 천국 가는 우리는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면 됩니까?" 라고 나오겠지요.

막상 안식일 지키는 것에 대해 거론하면 제자들이 안식일을 지킵니까, 예수님이 지킵니까? 주님이 일방적으로 다 지켰지요. 그러면 그 소리 듣고 제자들은 본인이 능동적인 존재가 아니고 피동적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살짝 기분이 나쁘지요. 예를 들면 풍랑이 일었습니다. 풍랑이 일어나기 전에는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불안에 떨면서 예수님을 깨워 예수님으로부터 믿음 없는 자들이라고 꾸중을 들었을 때, 제자들 입장에서는 풍랑 일어나기 전, 자신들이 믿음 없다는 것이 폭로되기 전의 상태를 유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겠지요.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내가 미처 모르는 지독한 자기사랑에 빠져 있다는 것을 삽으로 찔러 퍼내고 그 자리에 콩나물을 심던지 장미를 심어서 그곳에서 생명을 피워내는 겁니다. 이 때 우리는 아픕니다. 이런 아픔이 있어야 성도입니다. 안식일 지키는 것에 대해 주님이 정답을 말씀하셔도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이나 아무 감각이 없어요. 하지만 제자들은 점차 느낌이 오지요. '아, 이래서 우리가 죄인이구나.'를 알고, 다른 사람은 전혀 모르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주께서 일방적으로 지켜야 될 이유를 몰라요. '그러면 우리는 뭔데? 내가 선한 주님을 선하게 모시겠다는 이 선함은 뭐야?' 이게 바로 죄입니다. 이것은 자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원래 자의식은 없어야 되는데 선악과 따먹고 독자적인 선언을 해버린 겁니다. "나도 신이다. 하나님도 내 허락 맡고 일해야 해." 이렇게 나오니 문제가 생긴 겁니다.

이런 독자적인 흔적이 뭔가? 선악과 따먹은 것에 대해 "여자가 따먹으라고 해서 먹었습니다."라고 아내 핑계를 대고, 둘 이 있어도 부끄러워서 치마를 만들어 하체를 가리고 했지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지요. 이 말은, 그냥 그대로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거지요. 구원받은 성도의 모습은 어떤 경우에도 주님 앞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 주님의 용서를 훼손하면 안 되니까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와야지 '부끄럽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자존심 챙기는 것밖에 안 됩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27절)."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안식일을 내가 준수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안식일의 완성이라고 인정할 때 그것이 곧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알아 모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겁니다. 교사의 경우는 평소에 학교에서 일할 때, 병아리 같은 아이들을 주님이 보내 주셨다고 믿으시고 말썽꾸러기라도, 별난 학부형을 만나도 주님이 보내셨다고 인정하면 주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보내신 분의 작용을 인정함으로 주도권을 주인에게 돌리고,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이렇게 하면 주님의 일이 됩니다. 쉽지요? 학생은 공부하면서 주께서 시키신 일이라고 믿으면 그것이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거짓 복음을 듣고 '이것은 십자가 복음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도 주님의 일이 되고.

우리는 비록 주의 일을 드문드문 하지만 주님 입장에서는 우리가 주의 일을 안 할 경우는 한 순간도 없습니다. 잠을 자고, 길을 걷고 무엇을 하든지 간에 다 주의 일이죠. 심지어 우리가 죄를 지을 때도 주의 일입니다. 여기에 대해 화를 내는 사람은 자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이런 말을 해야 합니다. "너는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너 자신을 사랑해서 예수님 이용하는 자일뿐이다."라고. 이런 사람에게 죄인임을 드러내는 필살기는 "죄 짓는 것도 주의 일이다."라는 말입니다.

10분 쉽시다.

(2014. 11. 4. 08:32 녹취 마침)

서경수(IP:118.♡.140.180)

14-11-18 09:19

광주 강의(2014. 10. 24) 8-2

안식일은 예수님이 혼자 다 지키고 우리는 지키는 자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 때 우리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우리 나름대로 안식일 지킨다고 힘쓴 것에 대해 구멍을 뚫어 삽으로 퍼내고(우리가 안식일 지켰다는 것을 죄의 모습으로 드러내고), 빈 공간에 예수님 자신이 지킨 안식일의 효과를 채워 넣으면 우리는 안식일 지킨 적도 없는데 안식일을 완벽하게 지킨 사람이 돼요.

그럼 안식일을 완벽하게 지키면 구약에서 어떤 혜택이 주어집니까? 안식일을 지키면 그 다음 일주일은 그 땅이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1, 2, 3, 4, 5, 6, 7로 끝나요. 8, 9는 없어요. 7로 끝나고 그 다음 날은 또 1로 시작합니다. 주기적 반복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안식일을 완벽하게 지킨 의인으로 간주된다는 말은 안식일 지킨 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받는 입장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주님 덕분에 우리는 아무 한 것도 없이 의인이 받아야 될 모든 혜택을 다 누리는 입장에 있습니다. 제가 독일에 갈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늦게 공항에 가서 비행기 좌석이 없어요. 없는데 1등석을 주었어요. 네덜란드 항공인데 인천공항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가는데 1등석으로 갔어요.

나는 1등석이 그렇게 편하고 좋은 줄 처음 알았습니다. 이처럼 안식일 지키지도 못한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안식일 지킨 혜택을 얼마나 엄청나게 누리겠습니까? 이것은 우리를 즐겁게 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고 주님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기 위해서, 포도주를 드러내기 위해서 거기에 맞춤 부대를 따로 만들어 내는데 우리가 들어가는 겁니다.

이제 3장으로 넘어갑니다.
1-2절에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 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세상에서는 병을 고친 결과가 건강이잖아요. 그러나 주님이 병 고친 결과는 죄 사함으로 나옵니다. 따라서 병들었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이 사람 속에 죄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당시 유대인에게 죄를 씻어주고 혹은 심판하는 것은 누구의 몫입니까?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장차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아가 오셔서 할 일입니다.

사람들이 병 고침 받으면 기껏 건강을 회복한 것으로 만족합니다. 어떤 사람이 (까맣게)병에 들었습니다. 이 사람이 기대하는 것은 (하얗게)병이 낫는 것이지요. 이 사람이 병이 들었다는 말은 그 전에는 건강했다는 말이잖아요. 그러면 이 사람이 건강할 때 자기 속에 시꺼먼 것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압니까, 모릅니까? 모릅니다.

주님께서 이 사람을 병들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이 사람의 소원은 다시 건강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합니까? 병을 고쳐 주시지요. 그러면 이 사람은 시꺼먼 것 따로 있고 그것을 낫게 해주는 주님이 옆에 따로 계시고. 위에는 ‘건강한 나 → 병든 나 → 다시 건강한 나.’ 이런 식으로 간다면, 밑에는 ‘병든 나 → 나 말고 다른 분이 나와 함께 있네.’ 이렇게 됩니다. 한 사람으로 시작했다가 두 사람이 등장하지요. 이것이 바로 주님의 구원 방식입니다.

분명히 나밖에 없었는데 나를 용서하는 분이 계속 따라붙을 때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주와 함께 산다는 것으로 본인이 느껴지지요. 이것이 바로 성령 받은 성도의 특징입니다.

이렇게 되면 본인이 병이 들었든 건강하든 그것에는 관심이 없고, 죄 용서 받는데 관심이 있지요. 이 말은 건강해도 정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건강해도 정상이 아니고, 병들어도 정상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인데, 이 비정상인 나를 주께서 날마다 탕감해 주시니 그 사랑에만 감사를 드리겠지요. 이것이 주님이 자기 백성을 다루시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이 병 고치는 기적인 이것으로 다 풀립니다. 이제 좀 더 나가봅시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주님이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것을 몰래 합니까, 공개적으로 합니까? 공개적으로 해요. 그러면 다른 그림이 그려집니다. ‘인간은 자기 속에 죄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가 병이 들었다. 그래서 건강을 회복하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내가 건강하든 병이 들었든 그리스도가 함께 계신다.’ 이런 식으로 정리할 수 있지요.

이 사실 전체를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 한 거예요. 제가 질문합니다. 주님 오신 것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입니까, 예수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함입니까? 예수님 자신을 위함입니다. ‘내가 이 땅에 와서 마귀의 권세에 놓인 자를 어떻게 건져내는지 봐라.’ 구원은 구출입니다. ‘너희가 탈출 못한 세상을 나만 탈출 성공했다.’ 이것입니다.

의존교회 사이트를 보면 이미아 성도가 김명현 목사님 설교한 것의 중요한 대목을 요약해 놓았어요. 창세기 37장에 보면 요셉이 형들에 의해 팔려가지요. 그래놓고 형들이 요셉을 어떻게 봅니까? 팔린 자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짐승에게 물려 죽은 것으로 위장하지요. 아버지 야곱의 입장에서는 아들 요셉은 이미 죽은 자지요. 그런데 창세기 45장에 보면 요셉이 보낸 수레가 와요. 그 수레를 보고 난 뒤에 야곱은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이 살아있는 것으로 알지요.

이 수레가 십자가에요. 예수님은 이 땅에 잠시 살다가 죽은 분으로 알았는데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는 말은 주님 보낸 수레가 우리 앞에 당도한 거예요. 그러면 요셉은 어디에서 탈출한 것입니까? 형제들의 시기와 미움으로 애굽에 팔려갔는데, 애굽이라는 그 권세,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바로의 권세, 시기, 모함, 모든 억울함 그것을 딛고 애굽의 주가 되지요. 이 언약의 정신이 나중에 히브리인에게 덮치면 그것이 출애굽이 되는 겁니다.

죽은 자가 갇혀있는 자를 탈출시키는 유일한 중보자가 되는 방식. 이 정신이 출애굽 정신이고, 어린양의 피를 통해 구원합니다. 이것을 요셉의 피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요셉을 누가 죽였습니까? 형들이 죽였지요. 자기를 죽인 형제를 도로 살려내는 피, 탈출을 가능케 하는 피. 이것이 바로 요셉이 보낸 수레입니다.

3-4절 봅시다.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 말씀은, 이 세상이 생명을 살리는 동네가 아니고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세상의 실체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 건져내는 방식이 숨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공개적으로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단순이 자기 백성을 구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탈출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요셉의 수레처럼.

갈수록 수렁에 빠지는 요셉의 운명이 나중에는 놀랍게도 애굽의 1인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뭔가가 개입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꿈을 꾸었습니다. 꿈은 외부에서 개입된 것입니다. 외부에서 개입된 야곱 언약은 야곱에 의해서 시행되는 것이 아니고 장차 오실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야곱 언약의 수행자고 다윗 언약의 수행자입니다.

다윗 언약의 완성자가 다윗이 아니고, 모세 언약의 완성자가 모세가 아니고, 아브라함 언약의 완성자가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쳤다고 해서 그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 보기를 기다렸다가 보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 언약을 지킬 분이 예수님이라면 그 예수님이 아브라함 인생가운데 어떤 흔적을 남깁니다. 그 흔적 남긴 것이 바로 수풀에 수양이 있었고, 더 놀라운 것은 이삭이 아브라함의 주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원래 혈육적으로는 아버지가 아들의 주가 되는 것이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자식이 아버지를 살려내요. 왜냐? 자식이 그리스도에 더 근접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죽었다가 살아나는데 아브라함은 거기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과정에서 진짜 아브라함 언약의 완성자가 이런 속성을 가지고 오실 것이란 사실을 앞당겨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지런히 행했지만 그 행위는 삭제되고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는 바울의 고백과 동일한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구원에 내가 기어한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공개적으로 함으로 주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이들의 정체를 밝히고 이들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본인과 비교를 시키는 겁니다. “나를 죽여라.” 예수님을 죽여야 인간들의 정체가 드러나요. 예수님이 죽으니까 예수님 무덤을 군병들이 지켰어요. 3일 만에 무덤 문이 열리고 예수님은 살아나셨어요.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 시체를 찾습니다.” “내가 예수니라.” 여자들이 놀라서 떠나갔어요. 놀랬다는 말은, 주님 말씀은 들었지만 전혀 믿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부활을 믿을 수 없어서 놀란 상태에서 제자들에게 갔는데 제자들로 놀랐어요. 이 때 주님이 찾아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은 선지자와 모세의 글에 예언한 말씀을 왜 못 믿느냐?”고 하셨지요.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계속 잔소리를 하십니다. 주님이 죽었다가 다시 산다는 말씀을 하신 기억은 나는데 그 말씀이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말씀으로 들었어요. 기억은 나지만 ‘설마 그렇게 될 줄이야.’ 그 이유가 뭔가 하면, 인간은 자기가 속한 세상을 전혀 몰라요. 주님을 배척한 동일한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는 이 세상을 우호적으로 봅니다.

주님을 죽인 세상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 우호적이고 좋게 봐요. 돈만 있으면 살만한 세상이고, 조금만 양보하고 협력하면 살맛나는 세상이라고 여깁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안식일을 말씀하시면서 너무 오버하고 있어요.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하셨어요. 그 당시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이것이 문제지, 생명하고는 관련이 없다고 본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은 자를 살려내야 그것이 제대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은, ‘이번에 안식일 지켰으니 다음에 또 지켜야지.’ 이런 수준이 아닙니다. 이것은 법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은 이미 법을 완성한 상태에서 완성의 혜택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식으로 일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죽어도 다시 사실 분이 이 땅에 오셨다고 보면 됩니다.

예수님은 죽기 전에 미리 말씀하셨지요. ‘내가 죽은 후 3일 만에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그 과정을 다 보여주셨어요. 여러분이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탕자 비유에서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허랑방탕하지 않았으면 아버지가 탕자를 기다리겠습니까? 안 기다리지요. 아버지에게는 탕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허랑방탕한 그 과정이 중요한 거예요. “너 같은 짓을 해도 나는 너를 용납한다.”는 거예요.

그 아들이 탕자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오버하듯이 그 아들을 영접해 주는 겁니다. 만약 그 아들이 탕자가 아니었다면 금가락지를 끼워주고 살진 소를 잡고 하지 않았을 겁니다. 탕자였기 때문에 반가워하며 그를 영접했던 겁니다. 그 과정 자체가 용납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함으로써, 모든 인간은 율법 아래서 용서할 수 없는 자인데 하나님이 생명이란 차원에서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성경을 보면 이상하게 느껴지는 구절이 참 많은데, 그 중에 간음한 여인이 잡혀 왔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했어요. 그러면 우리 같으면 손에 잡았던 돌을 놓고 주님 곁에 있으면 좋잖아요. 그들은 마음이 찔렸잖아요. 그러면 자기 마음을 찌른 분과 함께 있으면 본인도 용서받고 좋을 텐데, 그들은 다 주님 곁을 떠났어요.

왜 떠납니까? 오늘 본문도 ‘안식일의 완성은 사람을 살리는데 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면 바리새인들이 이런 예수님 말씀을 듣고 화를 내야겠어요? 사실은 반가워야 되는데 그들은 화를 낸 거예요. 그 이유가 뭡니까? 율법을 지켜서 그 가치로 천국에 가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셔야 해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인간도 퇴자 맞아요. 모든 인간을 퇴자 시키는 이유가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예수)만 받아들이기에 다른 사람은 퇴자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매개가 되어, 자기 선함을 모아서 그것으로 천국 가려고 시도하는데 하나님은 아들이 아니면 천국 문을 열지 않습니다. 아들만이 아버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믿는 모든 종교는 다 마귀가 만든 것입니다. 진짜 영생은 하나님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예수님이 계신 곳에만 계시고 인간들의 머릿속에 있는 하나님은 가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믿는 교회는 가짜입니다. 십자가만 이야기하는 교회는 사람들이 안 모입니다. 하나님 존재를 이야기해야 모입니다. 가서 빌려고.

6절에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을꼬 의론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죽인 세상이 우호적인 세상이 아님이 드러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주, 대구 그 어느 곳도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이 100번 다시 오신다 해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100번 다 예수님을 죽일 세상입니다.

가을을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하면서 좋은 때라고 합니다. 내장산 단풍이 장관이라네요. 그러나 주님을 죽이는 세상입니다.

7절에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동행하시는 이유는 그 사람들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어떤 세상이기에 그곳에서 못 빠져나오는가? 아니 우리는 빠져나올 생각조차 못하지요. 죽어도 이 세상이 좋아요. 주님이 어떻게 죽으셨는지 관심이 없고 나만 행복하면 됩니다.

이런 세상에 산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겠지요? 인간은 그 누구도 예수님 죽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내가 어떻게 재미나게 살까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기에 인간 자력으로는 출애굽 할 수 없고,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쳐주셨고 귀신들린 자도 건강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이 자체가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모습입니다. 오직 내 건강에만 관심이 있다는 거지요. 요즘 케이블 TV를 보면 온통 건강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예수님의 병 고침은 귀신을 끄집어내기 위함입니다. 11절에 귀신이 예수님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했어요. 그래서 귀신이 구원 받았습니까? 아니지요. 귀신이 왜 구원을 못 받는가 하면 이미 한차례 전쟁이 있었고 거기에서 귀신이 패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령 죽으리라.’는 것은, 이미 선악과를 기준으로 해서 하나님께 대든 천사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마귀가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마귀가 이미 그 기준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뱀의 후손과 인간의 후손은 빠져요. 인간의 후손은 없어요. 여자의 후손이거든요. 뱀의 후손은 악마지요.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입니다. 인간은 여기에 끼어들지 못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병을 고치면서 결국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배후를 끄집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귀신들입니다. 그래서 귀신들도 복종하면서 엎드려 부르짖지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아주 훌륭한 고백을 했네요. 마치 신앙고백을 하는 것 같습니다. 사도신경에서는 "내가 믿사오며"라고 하지만, 주기도문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데, 나에게 우리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왜냐? '내'가 믿으면 기도할 때 항상 나의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이방인의 기도밖에 되지 않고, '우리'는 새롭게 만든 이스라엘이 아니면 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복수지요. 그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나(단수)가 있어서 그 나 중심으로 모일 때 우리가 됩니다. 그 '나'가 누구냐?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예수가 될 수 없는 이상은 우리가 될 수 없지요. 그 될 수 없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되게 하실 때, 이제 나를 위한 기도는 없고 우리를 위한 기도뿐입니다.

이미 귀신이 있고 귀신이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인간은 ‘나’라는 것은 없고 전부 ‘우리’에 속합니다. 이 우리의 우두머리는 사단입니다. 사단이 만든 우리, 영적 공동체에 그들은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나오지요. 오 목사님이 이 본문으로 설교 하셨지요. 저는 미국 어떤 호텔에서 밤 10시에 생중계 봤는데, 감동의 눈물이 잠시 밀려왔어요.

인간들이 병 낫게 해달라고 하는 그 배후에 귀신들이 인간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만 보면 자기에게 필요한 것, 아쉬운 것만 채워달라고 요청해요. 예수님이 누군지 그런 것에는 관심 없고 나만 잘되면 누구든지 믿겠다는 그런 종교적 본성, 능력 있다고 소문나면 붙들고자 하는 마음. 이것은 주님을 위함이 아니고 내가 나를 살리고자 함이지요.

내가 살고자 해도 이것은 ‘나’가 아니고 사단이 만든 ‘우리’라는 울타리에 갇힌 상태이기에 안 되지요. 그런데 여기 귀신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막3:11).”라고 했어요. 야고보서 2장 19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그런 믿음은 구원 얻을 믿음이 아니라 지옥 갈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귀신이 예수님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사단이 시킨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아니라고 하면 구원 됩니까? 구원은 내 구원 중심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구원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했는가? 구원의 주체가 예수님이 되어야지 직접 나에게 오면 안 됩니다.

우리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마귀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에, 나를 지배하는 마귀를 다스리고 척결하고 장악하는 주님의 십자가 능력이 덮친 결과로 우리가 구원 된 것입니다. 내가 구원을 소지하는 것이 아니고.

“주여, 병 낫게 해주십시오.”라는 심보는 자기 존재를 지키려는 것입니다. 존재는 소유가 있어야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내가 건강을 소유해야 나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꾸 필요한 것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이런 철없는 모습이 바로 귀신에게 묶여있다는 것이고 귀신이 조작한 ‘나’란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귀신을 쫓아내지요. 그러면 귀신은 말하기를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사실은 그 뒤에 이런 말을 해야 돼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우리를 멸하러 오셨군요.” 이 때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입 다물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귀신과 상대할 때 인간들은 이 말을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귀신을 인정하지 않아요. 천상천하유아독존인데 무슨 귀신이 있어요? 귀신도 없고 사단도 없다는 것이 귀신 들린 자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주님은 이 사실에 대해서 누구와 상대합니까? 사람들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인 사단과 상대를 합니다. 따라서 주님이 귀신과 상대하는 말은 절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인간은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 원인을 인간은 알 수가 없어요. 알 수 없어야 그들은 예수님을 오해한 상태로 따르고, 결국 민중들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죽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간으로 왔기 때문에. 인간으로 왔는데 귀신은 예수님을 인간으로 생각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뭡니까? 귀신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귀신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되고, 이미 예수님 능력으로 귀신에게서 건짐 받은 성도의 입에서 나와야 합니다. 신학자들이 이 부분을 설명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과 상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 배후인 마귀를 상대하는데 신학자들은 마귀라는 말을 싫어해요. 우리 이성으로 납득해서 예수님을 알아서 믿음으로 구원 받는 식으로 나가야 그 신학이 교회에 먹혀들고 자신들이 인정을 받기 때문이지요. 그러기에 귀신을 거론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간 이성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이기에.

예수님은 귀신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인간을 구원하러 오셨지요. 귀신을 회개케 함이 아니고 인간을 회개케 하시는데, 인간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오해할 수밖에 없지요. 오해해야 그들의 죄를 거두어서 예수님이 대신 짊어질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들이 왜 끼어드느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하시는 일에 귀신들이 끼어든다는 것은 예수님 일을 방해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예수님께 “주님, 우리와 상대합시다.”라고 하고, 주님은 “나는 너희들과 상대 안 해!” 인간은 악마에 의해 이미 망가진 자들입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건지러 오셨기에 그 외의 것들과는 상대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12제자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다 예수님을 버립니다. 12가 왜 나왔는가 하면 야곱의 언약 때문입니다. 야곱의 자식이 12명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그러면 야곱을 위하여 이스라엘이 있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을 위하여 야곱이 있는 겁니까? 이스라엘을 위하여 야곱이 있어요.

왜냐? 이삭이 아브라함을 살립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살리는 거예요. 그 뒤에 나오는 이스라엘은 ‘우리’가 되고 아브라함은 ‘나’가 됩니다. ‘나’에서 ‘우리’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12지파가 이스라엘입니다. 이 이스라엘과 대비되도록 12제자를 뽑은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러면 12제자는 각각이라도 그들을 구원하는 방식은 예수님을 경유하기 때문에 12제자는 한 분을 추종해야겠지요. 12제자가 한 분을 추종하는데 12제자 중 가룟 유다가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나 그는 지옥에 갔습니다. 이 말은 뭔가 하면, 예수님의 속성 중에 천국으로 인도하는 속성도 있지만 지옥으로 보내는 속성도 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건지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 아닌 자를 지옥에 보내는 작업도 병행하십니다.

12제자를 뽑았지만 그들을 실패합니다. 왜 실패하는가? 옛날 12지파의 실패를 재현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12제자는 왜 이스라엘(12지파)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마13:14).”

마태복음 13장에서 이런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자신들이 마치 이 말씀은 깨닫게 되었다고 여깁니다. 대표적으로 베드로가 놀라운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이 고백 자체가 마치 자신은 구원을 받은 사람인줄 알았어요. 자기 고백이 자기 존재의 구원과 관련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 고백은 주님의 존재와 관련되어 있어요. 왜냐? 이 세상은 주님 구원이 우선이고 그 한 분의 구원에 딸려 와야 이스라엘로 구원받습니다. 12제자는 좀 기다려야 해요. 예수님을 먼저 구원한 후 구원했다는 표시로 성령을 받게 될 경우에만 12제자들이 성령에 딸려 와서 진짜 교회가 되고 참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잠시 기다려야 해요. 처소가 마련될 때까지. 베드로가 목숨 걸고 주님 가신 곳에 따라가겠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올 수 없다고 하시면서 ‘내가 다시 온다.’고 했지요. 왜 다시 옵니까? 12제자는 천국에 합당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자들을 왜 뽑았는가? 그들이 죄를 지어야 그들의 구원은 100% 주님의 공로로만 된 것임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2제자를 일방적으로 불렀습니다. 부른 이상은 주께서 내치지 않습니다. 물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팝니다. 19절에 보면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자러라.”고 되어 있지요. 그 다음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뭔가 하면, 12제자와 관련 된 이야기입니다.

12제자가 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뭔가? 귀신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예전에 사람들은 예수님께 병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지요? 하지만 사람들이 귀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귀신이 예수님께 말을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11절).”라고 했지요.

12제자는 이제 친히 자기 입으로 말하기를 “예수님,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집디다.”라고 해요. 그 때 예수님은 “하늘에서 귀신 떨어지는 것 좋아하지 말고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어요. 제자들은 많은 경험했어요. 그 경험을 통해서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 또 발생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나는 복음을 안다고 하는 그 순간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복음의 깊이에 나아가도록 하십니다. 귀신들이 하늘에서 떨어졌으니까 제자들은 자신들이 주님과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니었습니다.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봐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했고 제자들도 다 떠났습니다.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능력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예수님이지요. 그러면 제자들은 허수아비에요. 만화 영화에 나오는 가제트 형사 알지요? 누가 범인을 잡습니까? 형제가 잡는 것이 아니라 강아지와 강아지를 끌고 다니는 소녀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합니다. 그런데 그 공로를 가제트 형제가 다 가로채지요. 실제로 그 형사는 허수아비입니다.

제자들은 허풍만 떨다가 조금도 자기 영역 밖으로 나가지 못해요. 귀신이 주님 때문에 떨어졌지 제자들 때문에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정글에서 사자 앞에 가는 토끼 꼴입니다. 남들이 자기(토끼)보고 절을 하니까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줄 착각한 거예요. 그 절은 자기에게 한 것이 아니고 뒤에 있는 사자에게 한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가 ‘이제 나는 예수님을 확실히 믿고, 이만하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데 큰 착각입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구원 받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을 부르신 분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그 구원하시는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귀신이라는 존재가 얼마가 그동안 우리를 속여 왔던가를 느끼게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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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8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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