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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홀로 가시는 길 141023강의요한복음

홀로 가시는 길 141023

이름 : 이근호(IP:119.18.98.57)

이한례(IP:203.♡.42.222)

14-12-01 08:38

가락-요한복음 4장42(홀로 가시는 길)141023a-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복음 4장 42절 시작합시다. 저는 시간 가는 게 이렇게 ..하기 때문에 제가 요한복음 4장 읽어볼게요.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그렇게 돼 있죠. 여자란 사마리아 여자를 말하고 자기가 와서 자기 동네 사람에게 예수님이 메시야다.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같으면 ‘고맙다.’하고 들으면 될 텐데, 42절에 보면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라.”고 했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일종의 믿음에 대해서 누구를 경유하고 거쳐서 너 없이는 우리는 믿음이 안 생겼다는데서 벗어나서 너 빠져도, 너 없어도 이미 우리에게는 믿음이 생겼다고 하는 겁니다. 이 듣는 사마리아 여인이 섭섭할 수도 있겠죠? 요새 같으면 뭡니까? ‘목사님 아니라도 우리 구원받아요.’라는 이야기밖에 안 되거든요. 상당히 섭섭할 수도 있는 문젠데, 여기서 제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사마리아 여인과 그리고 그들 사이에 누가 계신가 하는 그걸 제가 이제부터 시작합니다. 누가 계신가?

누가 계신가? 그 다음에 누가 계신가에서 ‘무엇이 있는가.’로 이어지는 겁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요, 내가 있고 예수를 믿는다 할 때 내가 우선이 돼요? 예수님이 우선이 되죠? 그러면 예수님을 누가 믿습니까? 내가 믿죠. 강아지가 믿는 게 아니죠. 옆에 고양이가 믿는 게 아니고. 내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누가 받는다? 내가 챙기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믿으면 구원 안 되거든요. 성경에서. 왜냐 하면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믿음은 뭔가 와야 된다 말이죠. 내가 믿는 이건 물이다. 나는 다 믿죠. 믿지만 이걸 물이라고 이야기해서 ‘천국 오너라.’ 그런 경우는 없다 말이죠. ‘책상이다.’ 이거 인정한다고 그래 ‘천국 오너라.’ 이러지는 않는다 말이죠. ‘믿습니다.’한다고 천국 가는 건 아니고 그러면 여기 미에로화이바가 있는데 이걸 ‘미에로화이바라고 믿습니다.’한다고 천국 보내주는 거 아니잖아요?

그러면 이제부터 어려워요. 뭐냐 하면 미에로화이바를 믿는 믿음에 추가해서 ‘예수님이 구세주다.‘를 추가해서 믿으면 그게 믿음이냐 하는 겁니다. 이게 믿음이 아니에요. 왜냐 하면 ’미에로화이바가 있다.‘ 이걸 믿는 믿음과 예수 믿는 믿음이 이게 달라요. 왜 다르냐 하면 ’미에로화이바가 있습니다.‘를 내가 아무리 믿어도 이게 나를 치지는 않아요. ’이것이 매직이다.‘ 한다고 매직이 기분 나쁘다고 확 날라 와서 나를 찌르고 하지는 않는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주님께서는 뭘 용납하느냐 하면 ’네가 나를 믿었느냐?‘ 아니면 ’내가 너를 믿게 했느냐‘를 그거 가지고 시비 거신다니까요. 주님께서! 이걸 시비 걸고 나오니까. 왜 예수님께서 시비 거느냐 하면 네가 ’이건 매직이다. 이거는 mp3다.‘ 이런 믿음과 내가 준 믿음이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일부러 의도적으로 분류하기 위해서 그렇게 시비를 거시는 겁니다.

에이, 이왕 어려운 거 더 어렵게 해봅시다. 이해하는 건 여러분 몫이고, ‘내가 나다.’ 믿잖아요? ‘내가 나다.’ 하는 이런 믿음 가지고 주님을 믿잖아요? 주님은 그걸 인정을 안 한다니까요.

예수님 쪽에서 믿음이 오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 쪽에서 믿음이 안 오면 ‘나는 나다.’ 할 때 나는 날 긍정해요. 그러나 주님이 와서 믿음을 줘버리면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졸지에 죄인이 돼 버립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 말을 극단적으로 계속 가겠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죠? 제 논리에 문제 있으면 문제 있다고 이야기해보세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니 우리는 죄인 맞죠? 그럼 죄인이 예수 믿는 그 예수가 옳은 예수일까요? 틀린 예수일까요? 논리상 죄인이 믿는 예수는 이게 가짜에요. 그러니까 이건 보통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이건 흔히 교회서 예수 믿는다고 그냥 설렁설렁 넘어갈 문제가 아니에요. 말씀대로 따져보세요.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내가 예수를 믿어서 그래서 내가 구원받습니다.‘라는 것이 틀려버렸다면 그러면 옳은 믿음은 뭐냐, 진짜 성령을 통해서 에베소서 2장 8절 믿음은 선물이다. 그 선물로 온 믿음의 내용은 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이거에요. 장악! 장악이거든요. 장악이라는 말은 여러분 아시잖아요? 센 쪽에서 약한 쪽을 완전히 덮치는 걸 장악이라 하는데 언어상 아는데 쉽게 설명하게 되면 어떤 총각 남자가 우연히 길에서 어떤 아가씨를 봤는데 그 순간부터 그 총각은 밤에 가서 잠을 못 잔다. 이건 정신적으로 이미 그 여자한테 장악된 상태입니다. 집에 가도 막 그 여자 생각이 나고 그 다음에 그 여자를 만날까 싶어서 전에 봤던 그 사거리에 나가서 혹시나 우연을 핑계로 만날 수 있는가 싶어서 밖에 서있고 이러면 모든 하루 스케줄이 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 쪽으로 막 돌아가죠. 이게 장악당한 거예요.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남들은 우뢰가 울었다고 하는데 번개까지는 모르지만 우르륵 했는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직접 주님과 대화에 나섰다는 겁니다. 그때부터 사도바울은 어떻게 됩니까? 운명 전체가 예수님에 의해서 장악된 거예요. 장악된 상태를 고린도후서에서 일단 설명해 드리고 요한복음 4장 다시 돌아가 봅시다.

고린도후서 4장 8절에 보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이 말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이상하게 기분 좋은 느낌이 드는 게 아니죠? 결국 우리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사태가 일어난다는 이야기거든요. 네가 진짜 네 믿음 이거 미에로화이바를 믿는 그런 믿음인지 아니면 정말 없는 믿음인지 성령을 통해서 주님의 영에 의해서 내게 진짜 선물로 받은 믿음인지를 내가 확인 점검 나서겠다는 것이 주님의 뜻이 되는 겁니다.

그 확인 점검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에게 답답한 일을 당하게 만들고 그래서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어떻게 된다? 낙심할 수밖에 없는데 성령 있는 사람은 낙심할 수도 있는 문젠데 낙심하지 않게 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다음에 “핍박을 받아도 버림바 되지 아니하며” 핍박이 안 와도 되는데 갑자기 핍박이 오는데 우리는 그래서 버림받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거꾸로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해서 결국 이렇게 되게 되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국 누구 좋으라고 우리가 믿게 된 거예요? 나 좋아라고 믿게 된 거예요? 예수님이 예수님 증거 하라고 우리에게 믿음을 아예 일방적으로 퍼부은 겁니까?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가지고 예수님 자기 솜씨를 자랑 질하고 있는 거예요. “저 봐라, 다른 사람은 벌써 넘어졌어. 저 봐라. 다른 사람은 거꾸러졌어. 그런데 얘는 낙심하지 않잖아. 바로 내 솜씨가 어때?“ 이게 뭐냐 장악당하는 겁니다.

그 사거리에서 우연히 만났던 아가씨가 갑자기 어느 날 두 번째 만나서 ‘저, 총각 차비 없는데 돈 5만 원’ 하니까 지금 5만 원 못 바쳐서 환장한 그 남자가 ‘어휴, 이 여신 같은 여인이 나타나다니, 여기 있습니다.’ 할 때 여인이 하는 말이 ‘봐, 이 남자 완전히 나한테 종 되었어. 나한테 정신적으로 완전히 노예된 거야.’ 자랑 질 할 때 나는 자랑 질 하는 것이 기분 나쁩니까? 기분 좋습니까? ‘그 다음에 여자 주인님 뭘 또 할까요? 시켜만 주시면 뭐라도 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올 때 우리는 그걸 사랑이라 하지 않습니까? 사랑의 노예, 그런 사랑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런 사랑 한번 해보고 싶죠.

뭐냐 어떤 사랑을 해보고 싶냐 하면 내가, 내 존재가 짐이 되지 않는 사랑, 내 자체의 존재의 가벼움, 너무나 내가 있다는 자체가 그대 있음으로 나의 대한 무게가 제로가 되는, 날라 가 없어져도 괜찮은 그런 사랑, 어떻게 그런 사랑 없습니까?

바로 성경에서 주님의 사랑이 바로 이겁니다. 구원받는다. 예수 믿고 천국 간다. 이런 것은 이미 그 사랑한테는 다 파묻혀서 그 주님의 십자가 사랑 외에는 전부 다 잡음 이예요. 잡음! 객소리, 쓸데없는 찍찍찍 하는 소리, 세상의 모든 것은 잡음이다. 그리스도 사랑에 뿅! 가리면, 왜 그 사랑을 분석해 보니까 그런 거예요. 인간도 아닌 죄인인 주제를 내가 내 사랑으로 일방적으로 이미, already죠. 이미 너를 영생했기에 이러한 이상한 사태가 네 몸에서 계속 일어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구원문제에 대해서 네가 정신을, 이제는 걱정을 하지 마라. 중요한 것은 네가 보여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얼룩, 그걸 흔적이라 해요.‘내 건드리지 마, 내 안에 예수의 흔적이 있다.’ 고. 제가 주님의 흔적을 얼룩이라 한 이유가 입체 사진을 얼른 보면 얼룩이예요. 그런데 안경 끼고 보면 뭡니까? 입체가 되죠. 그냥 맨으로 보면 얼룩이어서 이게 무슨 그림인지 안 보입니다. 그런데 안경 씨고 보면 입체 사진이 제대로 보이는 것처럼, 남들이 보았을 때는 ‘저게 미쳤나?’ 하지만 주님과 우리 사이는 입체적 관계로서 뚜렷하게 보이죠.

이미 용서했던 그 용서의 위력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존재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어버립니다. 너무나 가볍기 때문에 남들 보기는 ‘답답할 거야, 낙심될 거야, 핍박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영광입니다. 우리는 주님한테 다뤄졌다는 게 영광이죠.

따라서 제가 미국의 맨해튼 교회의 젊은 애들이 어떤 애들이냐 하면 전부 다 예술과 음악, 또는 학문을 위해서 뉴욕에 막 왔던 젊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중반까지의 젊은 사람들, 그런 사람한테 제가 예배시간에 설교하기를 자신의 인생에서 손을 떼시면 여러분 자신이 주의 자체의 인생이란 것을 보여줄 것입니다. 다만 손 뗀다고 놀지는 마시고 주께서 이 일을 시킨 걸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가운데 누가 있냐 하면 동국 연극영화과 수석으로 졸업해서 뉴욕에 유학하는 사람이 있어요. 여자 분인데 영화감독인데 30대 중반인데 동국대 연극영화과이면 우리나라에서 알아주거든요. 그런데 수석 졸업했으니까 얼마나 장래가 촉망돼요? 뉴욕에서 계속해서 브로드웨이에서 공부를 하는 거예요. ‘시킨 것은 시켰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세요. 하지만 그 열심의 결과에 대해서는 본인이 손을 떼야 됩니다.’라고 이야기했어요. 그게 바로 신앙인 거예요.

신앙은 교회 와서 죽치고 기도하는 게 신앙이 아니고 일상의 모든 게 신앙 이예요. 성경에 무슨 교회 모여서 하라고 하는 이런 게 어디 있습니까? 그냥 사는 거죠. 교회에 모여도 신앙이고 흩어져도 서로 나눠면 신앙이고 그런 겁니다.

여기 요한복음 4장 돌아가 봅시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교회 만들었습니까? 전혀 아니죠. 소급해서 ‘우리가 사는 전체가 바로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되나 하는 이유가 되는 그 사람을 내가 너희에게 알려줄게.’라고 했고 그 뒤에 사람들은 ‘이제는 너 없어도 직접 우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 말씀으로 그들이 구원받았으니까 이제는 그 다음부터 요한복음 4장 43절 말씀은 필요도 없는 이야기네, 요걸로 됐으면 구원되었으니까 끝났네. 그 뒤에는 왜 필요한가?

요 뒤의 말씀이 왜 필요한가를 제가 말씀드릴게요. 이들이 믿어서 하나님이 구주인 걸 알게 되었는데, 그러면 알았으면 우리 같으면 끝났는데 왜 뒤의 이야기가 왜 필요한가? 뒤의 얘기는 주제가 뭐냐? 그 뒤의 일은 요한복음 끝나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가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참 성경 자체가 이상하죠. 보통 물건 사고 값을 치르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값부터 치러 놓고 물건을 나중에 가져가죠. 순서가 바뀌어요. 이미 구원 시켜놓고 구원의 근거를 나중에 마련해요. 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소위 복음서가 그래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 바쳐서 구원받았습니까? 아니면 예수 믿어서 구원 받았습니까? 창세기 22장에는 분명히 아브라함이 아들 바침으로써 믿음으로 구원된 걸로 나오고 있지만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누구를 보기를 원했다? 예수님 보기를 원하다가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다는 거거든요. 자기가 아들 바친 행위로 구원받을 거 같으면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아들 바친 그것도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안 된다? 절대로 근거가 되지 못 하는 거예요. 근거가 되지 못하는 거 같으면 안 바치면 되는데 바치기는 왜 바치는가 하는 문제죠.

그건 뭐냐 하면 누가 시킨 거예요. 아들을 바치라고 시킨 그분이 시킨 당사자가 스스로 그 시킴을 받은 아브라함을 건져내기 위해서 십자가에 장차 예수님으로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그 일을 미리 당겨서 보여주는 게 뭐냐 하면 ‘네 아들 바쳐라’가 되는 겁니다.

이게 모형과 실체의 관계인데요. 이걸 모형과 실체보다도 저는 그림자와 작대기라고 설명하는데 이 작대기가 있으면 작대기에 햇빛 비취면 여기 뭐가 비취죠? 그림자가 비취죠. 그림자에 해당되는 여기 아브라함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아들 바치면서 뭘 생각해야 돼요? 내가 아들 바쳤다고 내 행함으로 구원 받는 거는 아닌데, 그런데 나보고 아들 바치라고 했지? 이거는 자기에게 낯선 일이잖아요?

그렇다면 내가 용서 받고 천국 가는 것이 자기에게 낯선 일 이예요? 예상했던 일입니까? 낯선 일 이예요. 성령 받은 성도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 같은 것이 구원되다니 참으로 낯선 일이다.’라는 감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 정도까지 배려 안 해도 되는데’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교회에서 열심히 새벽기도 하는 사람은 뭐냐 하면 ‘이래도 구원 안 줘?’ 협상 테이블에 앉은 것 같아요. 돈 놓고 돈 놀이하는 도박장 오는 것 같이 해서 ‘이렇게 잡아당겼는데도 장땡이 안 나와?’ 이런 식이다 말이죠. 얼마나 예배를 드렸으면 천 번 번제를 드리겠습니까? 이거는 완전히 불교에요. 열심히 하지 말라는 뜻 이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은 열심히 신앙생활 하지 말라는 뜻 이예요.

제가 수요일 날 복음의 3종 세트 이야기해 드렸죠? 기억 안 납니까? 용서하지 마라, 구제하지 마라. 막 살아라. 복음의 3종 세트. 남 도와주지 마라. 용서하지 마세요. 그리고 막 사세요. 이게 복음을 아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첫 번째 남을 용서하게 되면 용서받은 사람은 나의 종이 되니까, 자기가 주인이 되니까. 이거는 자기의 건방만 떨 뿐이고, 남을 구제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을 수 없어요. 왜냐 하면 성경의 구제는 내가 남을 구제하는 게 아니고 구제받은 사람이 자기 것을 잠시 맡아놨다가 도로 나한테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맡아놓은 걸 되돌려줬다고 해서 이게 의가 될 수 없어요. ‘막 살아라‘라는 말은 간단해요. 왜냐 하면 우리가 구원받고 난 뒤에 나의 어떤 행위도 나의 구원에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을 확인 차 나서는 작업에 나서기 때문에 저는 결국은 뭘 해도 막 살 수밖에 없게 돼 있어요.

그래서 사도들의 모든 일들은 막 살았던 사람들 이예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했잖아요? 그 모든 것이 막 사는 거예요. 어떤 것을 해도 자기의 행함이 주께 영광이 되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로 말이암아 영광이 되는 거죠. 베드로전서 4장 11절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기 때문에, 십자가 피로 영광받기 때문에 나의 구제, 기도, 전도, 봉사, 예배 참석, 성경공부, 어떤 것도 영광 안 됩니다. 나의 찬양도 영광이 안 돼요. 시편에 보면 찬양하잖아? 시편에 모든 찬양했던 주체들은 이스라엘 멸망으로 해서 그것이 실패로 끝났어요. 시편에 나오는 모든 찬양들은 이스라엘 멸망과 더불어 다 실패로 끝나버렸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찬양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찬양이 가능해요. 그것이 이스라엘 멸망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예수님과 교체가 되는 겁니다. 십일조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십일조 했는데 망했어요. 십일조란 예수님 자신이 십일조에요. 예수님 자체가 십일조에요. 주님께서는 예수님 받고 우리가 십일조 한 셈으로 쳐줘버린 겁니다. 왜, 예수님은 우리의 대리자니까. 모든 안식일과 십일조는 예수님이 우리 대신 이미 다 값을 다 치렀어요. 극장에 영화관에 갈 때 앞 서 있는 우리 아는 사람이 입장료 다 치러버린 거예요. 뒤에는 줄줄이 그냥 가는 거예요. 십일조 안 해도 영화관에 영화 넣어줘요. 천국 넣어줍니다. 왜, 십일조 한 셈이 되니까. 십일조 이미 다 했는데 자기가 낸다는 것은 유난을 떨고 건방을 떠는 것밖에 안 돼요. 예수님에 대한 모독이라니까요. 안식일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제가 미국 갈 때 장로님한테 그런 이야기했어요. 아니 가족끼리 무슨 돈 거래를 하느냐 말이죠. 주님하고 우리하고 가족이잖아요? 가족인데 돈 거래 합니까? 아니 삼촌과 조카 사이에 조카가 삼촌한테 돈 빌려서 안 갚으면 조카 아닌 겁니까? 여전히 조카 삼촌 관계는 유지되잖아요? 주님과 우리 아들 사이에 돈 안 냈다고 아들 취소하고 그러는 거 있습니까? 없어요. 그리고 가족끼리 무슨 출석 체크해요? ‘너 왜 교회 안 나왔어?’ 체크 왜 합니까? 가족끼리인데. 해외 파견 나가면 아들 아닌가요? 남의 자식인가요? 누가 내 가족이냐? 누가 내 모친이냐?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의 완성 속에 함께 있으면, 예수 안에 있으면 이미 한 가족인데 가족은요 자기가 주 앞에 바치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주님이 우리를 거저주시는 겁니다.

사도행전 한번 봐야 돼, 꼭 이래 이야기하면 자꾸 구라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여기 사도행전 17장 25절에 보면 이거 누가 크게 읽어야 돼요. 작게 읽으면 안 돼.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친히 주시잖아요? 받기는 뭘 받아요? 받아서 주는 없어요. 로마서 11장에 보세요.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네가 줬으니까 복 받는다. 이런 것은 우리 주님한테는 그게 없는 거예요. 누가 구라를 쳤습니까? 교회에서. 무슨 주님이 돈을 받아요? 그래. 아이 참, 친히 키우시는데. 어떻게 키우신다고요? “너 안 바쳐도 구원 돼.“ 그 정보를 알려주면서 키우는 거예요.

열심히 안 해도 구원 받아요. 왜냐 하면 우리가 지금 손을 놀리잖아요? 지금 제가 손 놀리잖아요? 누구 힘으로 돌리는 겁니까? 주님 힘으로 열심히 놀리고 있는데 또 이 열심 말고 무슨 열심을 들여요? 주께서 수동적으로 받는 열심이 전부지, 우리가 능동적으로 한 열심은 주께서 받지 안 해요. 매직 한번 돌려 볼까요? 이거 누가 돌렸습니까? 주께서 돌리게 하신 거예요. 그걸 믿는 거예요. 우리는. 왜, 장악되었으니까. 그 사랑에 장악되었으니까. 물론 여러 번 돌리면 주께서 ‘그만 돌려라.’ 해서 ‘예’ 하고 그만 돌리겠지만.

세상의 모든 발걸음과 머리카락은 주께서 다 세십니다. 어떤 거 하나, 성도의 어떤 것 하나, 1%라도 우리 것이 들어가는 것을 주님이 제일 싫어해요. 내 것이 들어가는 것을. 그거 삭제해 버립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날마다 우리를 삭제하면서 살게 합니다. 이거는 내 자랑 질, 이거는 내가 했습니다. 전~부 다 삭제시키죠. 왜 새로운 사태를 겪게 해서 환란과 핍박과 곤고와 위험이나 칼 이런 게 올 때 우리는 이렇게 합니다. ‘주님 십일조 꼬박 드렸는데 환란은 웬 말입니까? 정말 이래 나오기에요? 제가 이렇게 환란 주시면 헌금할 마음 없잖아요? 왜 이래 나오십니까?’ 그럴 때 주님께서는 네가 헌금을 삭제하는 순간입니다. 환란을 줘야 우리가 그 마음 생겨요. 그거 없으면 우리는 자기 자랑하기 바빠요. 주님 앞에서. 저 사람은 30분 기도하고 저는 2시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30분 기도한 사람은 잘 되고 나는 2시간 했는데 내 딸을 떨어지고 이러면 그 가치가 날라 가 버리죠.

주께서는 조금도, 완전한 제품이라는 것은 뭐냐, 내가 내 구원에 요만큼도 기여한 바가 없음을 알 때 가장 주께서 좋아하십니다. 많이 용서받은 자가 가장 많이 사랑한다. 막달라 마리아가 울면서 모든 걸 던질 때 바리새인들은 비웃었습니다. 많이 탕감 받은 자가 제일 많이 사랑하게 돼 있다. 그 탕감 받은 그 빈 자리의 넓이만큼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꽉꽉 차서 넘치게 돼 있어요. 그래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잖아요. 천국의 원리라는데.

요한복음 4장에서 그 사마리아 여인은 탈락 이예요.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 역할 다했습니다. 이제는 자기 말 먹히지도 않아요. ‘여인아 이제는 그러지 마. 너 말 듣고 예수 믿는 게 아니야.’ 그래서 제가 다시 묻습니다. 도대체 그들 사이에 누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마을 사람 사이에 누가 계신가? 누가? 아, 이게 어려워요. 예수님이 계시죠. 이 본문 말씀에 예수님이 계신데, 예수님이 계신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는 게 아니고 계셔봤자 내가 따로 독자적으로 내가 주체가 따로 필요하다면 그 주님의 주체가 내 주체에 파고들어올 수가 없는데, 이 문제 어떻게 할 거냐 말이죠.

‘주님 여기 나와 함께 있습니다.’ 할 때 쉬운 예가 이거에요. 여러분, 부부를 보통 목사가 주례할 때 뭐라 합니까? 부부는 한 몸이라 하잖아요. 이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요? 부부는 한 몸이 아니에요. 성경에서 한 몸이라 하는 것은 한 몸 아닌 것을 되게 했다는 뜻 이예요. 그 한 몸인 것을 확인해 보세요. 평생 결혼해서 살아보면서 확인해 보세요. 때려죽여도 한 몸이 안 돼요. 점점 갈라져요. 나중에 오래 살면. 기회만 되면 이혼할 준비가 돼 있어요. 양쪽 다. 아니 남자는 기어 붙으려 하고 여자는 떼려고 하지만. 어쨌든지 나이가 들면 남자는 여자한테 기어 붙으려 하고 강아지도 그렇고. 여자는 슬슬 발로 밀어서 틈만 나면 약간의 낌새만 있으면 갈라서자, 미리 나오고 그렇죠. 처음부터 부부가 한 몸 일수가 없습니다. 왜 한 몸이 아닌데도 한 몸이게 하느냐? 다른 경로를 찾아봐라.

다른 경로가 뭡니까? 한 몸 아닌 자를 한 몸이라고 그동안 간주하고 같이 붙어살라고 하신 거예요. 그 한 몸 아닌 것을 한 몸 되게 붙어사는 그 본드를 가지고 복음이라고 한 겁니다. 이야기를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부부가 한 몸도 아닌데 한 몸 되게 하는 것은 주께서 복음적 차원에서 그렇게 붙어 살도록 부부되게 한 겁니다. 따라서 만약에 남편 쪽이나 아내 쪽이 복음을 싫어하거든 거기 얽매일 필요 없고 갈라서라. 야! 이거 복음은 갈라서라니. 그러니까 이거 결혼했다고 결혼 자체에 결혼이란 제도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게 사도의 복음입니다. 목사님 그런 게 있습니까? 이게 고린도전서에 보면 진짜 나와 있거든요. 목사는 엄포를 놓죠. 갈라서면 안 된다고. 그런 식으로 성경을 볼 것 같으면 이혼하고 난 뒤에는 헤어진 사람과 같이 살든지, 아니면 처자하고 살든지 그렇게 하라. 뭐 이런 것도 있고 있는데 실제로 목사님들이 이혼하고 난 뒤에 또는 사별하고 난 뒤에는 이런 조건이 아니고 돈 있는 여자와 골라서 살려고 하죠. 세상의 밑바탕에는 돈이 깔려있죠. 자본주의 사회니.

자본주의 사회란 뭔 뜻이냐 하면 농경사회는 땅이 기초로 돼 있는데 자본주의 사회는 케피탈이 기초가 됩니다. 케피탈 자본 없이는 아무도 꼼짝도 못하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고, 농경사회는 땅 없으면 못 사는 사회라서 출애굽기에 보면 고아와 나그네를 돌보라. 그들은 뭐가 없다? 유리하는 자라 땅이 없는 거예요. 땅이 없으니까 그들은 하늘만 쳐다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그들은 가난한 자가 되는 겁니다. 땅에 대한 생산물, 잉여 생산물, 누적된 생산물까지 없으니 갖고 있는 건 몸과 자식들밖에 없으니 몸과 자식은 뭐로 팔린다? 노예로 팔리는 겁니다. 노예, 종으로 팔리는 겁니다. 종으로 팔리는데 종으로 팔리는 이유가 가장이 죽어서 그렇고, 가장이 죽은 이유가 전쟁 때문에 그렇고 그 전쟁은 하나님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보세요. 하나님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누가 죽었다? 가장이 죽었다. 그래서 파생된 결과가 뭐다? 고아와 과부가 발생됐다. 따라서 자기 가장이 있는 자들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 이 돌보는 것은 누굴 돌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전쟁을 일으켜서 우리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자체에 대한 하나의 혜택이라고 본 거죠.

그러면 고아와 과부는 뭡니까? 희생자, 희생자는 바로 출애굽에서 중보자의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죄 때문에 희생하셨으니 이 말을 긴 그림자로 본다면 ’그때 흔적으로 인하여 고아와 과부가 생겼으니‘ 같은 말 이예요. 그래서 그들에게 잘해주는 것이 곧 나한테 잘해주는 것이다. 이런 정신으로 성경 전체가 맥이 뚫리는 겁니다.

도대체 나 같이 더러운 인간, 나밖에 모르는 돈 밖에 모르는 나를 위해서 누가 돌아가셨단 말이냐? 이걸 물을 수 있는 그런 질문이 형성된다는 말은 이미 이 사람은 성도란 뜻 이예요. 누굽니까? 그 말하는 자체가 뭔 뜻입니까? 나는 내 힘으로 해탈 하겠다. 도 닦아서 구원하겠다. 내 착함과 내 거룩함으로 구원받겠다. 이것을 일찌감치 포기한 자만이 그런 고백이 나옵니다. 내가 아무리 예수 믿고 성령 믿고 아무리 해도 절대로 나는 일말의 거룩과 착함과 의가 나올 수가 없다. 왜 나와 봤자 그것은 내가 했다는 소리, 주체를 내 주체를 거기다 엮어버리니까 이건 자기 자랑한 거밖에 안 되니까. 구제해도 내 자랑, 헌금해도 내 자랑, 전도해도 내 자랑, 모두 내 자랑, 가정이 화목해도 내 자랑, 성경공부해도 내 지식 내 자랑밖에 안 되니까.

따라서 여기 사마리아 여인이 가고 난 뒤에 이 마을 사람들은 그때부터는 ‘나는 구원받았다.’하면 안 되고 나는 내 죄를 위해서 다음 주님은 어떤 조치의 발걸음을 하셨느냐, 그걸 지켜봐야 될 처지에 있죠. 그 이야기하다 이래 오래 걸렸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전달했지만 사마리아 여인이 메시야입니까? 메시야 아닙니까? 메시야를 만난 자죠. 메시야를 만난 자 같으면 다이렉트로 만나면 안 돼요. 반드시 내 대신 돌아가신 십자가를 경유해서 만나야 되죠. 그러면 사람은 사람에게 얽매이지 않는다는 원칙이 여기 수립됩니다. 그 누구에게도 얽매일 필요 없어요. 남편, 자식, 얽매일 필요 없습니다. 주께서 가정되게 했지, 내가 노력해서 그만큼 가정 일궈온 게 아니에요.

인간은 반드시 모든 인간 사이는 틈이 나타나게 돼 있어요. 한 이불 덮은 부부도 마찬가지지만 30년 우정이 어떻고 3년 친구, 우리는 어떤 관계라 해도 항상 틈이 있게 마련 이예요. 그 틈은 내가 메우려면 그 사람이 내 종이 되든지 아니면 내가 그 사람의 종이 되든지 노예가 되든지 둘 중에 하나에요. 그런데 주인 노예가 돼도 역시 갈라져 있어요. 원하는 거 안 주면 주인이라도 찌르게 마련이거든요. 그러면 이러한 모든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라는 걸로 ‘우리’가 되는 겁니다. 너나 나나 같이 주님한테 용서 받은 처지라고 봅니다.

제가 성경에서 참 좋아하는 구절 많이 있지만 더 유난히 좋아하는 구절이 로마서 3장 22절 이예요. 요건 다른 분이 한번 읽어보세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제가 좋아하는 구절은 “차별이 없다” 얼마나 교회에서 차별을 만듭니까? 성경엔 차별이 없다 했어요. 상급 차별 없어요. 상(常)은 있는데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상(常)이지 차별이 없어요. 어떤 사람은 거두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가꾸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의 차별이 있는 게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거두는 것으로 상급 받고 있지만 그 상급은 차별이 없어요. 왜냐 주님의 의기 때문에, 주님의 의로 어떤 사람은 일하기 때문에.

이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주님의 의로 차별이 없다는 말은 인간의 죄는 차별이 있다? 없다? 인간의 죄도 차별이 없고 차이가 없는 거예요. 지금 교도소 가 있는 사람이나 아직 못 가고 있는 우리들이나, 왜냐 갈지도 모르기 때문에. 차별이 없어요. 차이가 없어요. 왜냐 하면 경유하는 게 너의 양과 나의 양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고 경유하거든요. 그리스도를 경유하다 보니까 십자가 앞에서 모든 자는 죄인이나 죽은 자가 되고 산 자는 주님의 의로 인하여 살았으니까 살았다고 하는 자는 다 주님의 의가 들어있고 주님의 의가 다 한분의 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의가 차별이 있을 리가 없죠. 주님의 발가락에 각질이 있다. 뭐 그 정도입니까? 각질이 있더라도 주님의 같은 발바닥인데. 어떤 사람은 손이라도 어떤 사람은 눈이라도, 어떤 사람은 발이라도 다 예수님의 같은 세포 아닙니까? 뜯어보세요. 형태는 발이지만 조사해보면 같은 세포들이잖아요. 무슨 세포에 차이가 있습니까? 어디 있든지 다 그리스도 몸 안에 있는데. 차이가 없죠. 어느 부분에 붙어있다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죠.

차이가 없는 이것 가지고 바로 차이가 있다는 이 세상과 악마의 세상과 싸우라고 주께서는 우리를 이 땅에 성도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냥 우리가 달랑 구원받으려고 있는 게 아니고 구원받고 난 뒤에 우리가 할 일이 있어요. 뭐냐 하면 바로 싸움입니다. 영적 싸움. 사도바울이 “나의 싸움은 육의 싸움이 아니고 형태, 모양새, 겉모양의 싸움이 아니고 중심, 그 사람의 사상, 중심과의 싸움이다.” 꼬라지는 이렇게 못 생기고 꼬라지는 월급이 적다할지라도 대 재벌한테 기죽지 않는 것은 다른 질적인 것이 안에서 작용하고 흐르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은 우리 속에 있는 성질이 어떤 성질인 것을 우리한테 알려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안 보죠. 왜 외형적인 것이 내 자신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그럽니다. 손가락이 여섯 개 있는 사람이 있죠. 육손, 그럼 손가락이 다섯 개 있는 사람도 있죠. 보통 사람. 질문합니다. 총알은 누굴 죽입니까? 둘 다 죽이죠. 그러니 차별이 없잖아요. 맞잖아요. 육손이냐 오손이냐 형태는 달라졌지만 총알 앞에서는 다 죽죠. 주님 앞에서는 다 죄로 말미암아 어떻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희미한 등불 밑에서 백날 해도 다 죽죠. 옥경이나 다 죽잖아요.

죽는데 누가 땡잡은 사람 이예요? 누가 행운 잡은 사람입니까? 죽은 데서 주의 의가 삽입돼서 주의 의로 산 사람만 이게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관계없이 살죠. 우리가 어디서 뭘 하며 어떻게 죽느냐 하는 그건 고갱이나 유명한 타이티에 보면 명화 있어요. 인상주의 화가가 그린 제목에 나오거든요. 타이티 여자들 죽은 거하고 노인들 그림이 있는데 고갱은 죽을 때까지 그 비밀을 모르죠. 사람은 왜 태어나서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는가? 제목이 길어요. 굉장히 긴데, 그 제목 성경 로마서 6장에 보면 다 나오는 겁니다. 죄의 값으로 사망이요, 주의 사망으로 우리가 의인된 거죠. 죄로 말미암아 아담이 사망하지만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또 다른 죽음, 그게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가 의롭게 된 거죠. 그러니까 외형적으로 살아있다. 살아있다. 를 비교하지 말고 나의 죽음과 주님의 죽음과 항상 결부돼서 살아가게 하는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밑바닥으로 바닥재를 통해서 죽음이란 바닥재를 통해서 관계하지, 얼마나 기도 오래하고 헌금 많이 내고 절대로 외형적인 이런 허풍이나 위선가지고 엮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교회는 한 군데밖에 없어요. 어느 교회 나가십니까? 한 군데밖에 없는데 무슨 어느 교회? 주도 하나요 몸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인데 무슨 교회가 있겠어요? 그래서 교회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제가 고민 끝에 어제 수요일 날 교회를 설명할 때 했잖아요? 뭡니까? 번개! 번개란 째고 들어오는 거예요. 우리가 예상 못하게 째고 들어올 때, 번개가 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밖에 없는 교회를 경험하죠.

그런데 번개는 칠 때뿐이지 잡으려고 하면 잡힙니까? 안 잡힙니까? 쳐서 나무가 부러졌지만 부러진 곳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번개가 없잖아요. 번개가 치고 없어졌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니는 교회를 아무리 붙잡아도 그건 교회가 아니에요. 뭔가 치고 빠진 흔적인 뿐이지 그것을 붙들고 그것을 키운다는 것은 그것은 주께서 주신 교회를 모독하려면 그 짓 하라 말이죠. 우리교회 교인이 몇 명이고 헌금 얼마 모으고 선교사 몇 명 파견한다. 예배당 몇 평이다. 이것은 주님이 주신 교회에 대한 모독 이예요. 우리가 소유대상이 안 됩니다. 주님의 교회 때문에 내가 주님이 주신 그 번개 같아 쳐들어 온 교회 때문에 내가 어떻게 달라졌느냐, 이게 중요한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달라졌어요? 나는 의인인 줄 알았는데 남보다 더 잘난 존재인 줄 알았는데 죄인이란 점에서 남하고 별 차이 없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사느냐? 그건 주님의 복이죠. 주님의 기능이고 역할이고 혜택이 되는 겁니다. 이번에 내가 미국 가니까 어떤 한국 사람이 사는 집에 갔는데 집이 여기서 여기까지 50미터가 넘어요. 대지가 아니고 집이 50미터가 넘어요. 한번 달려보니까 7초 이상 걸리는 거 같아요. 엄청나요. 그런데 그 집의 주인님이 복음을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그분이 고백하기를 ‘나는 소유하고 생각하는데 소유가 아니고 하나의 과정인 것을 알았다.’는 겁니다. 과정.

과정. 과정이니까 자기가 자기를 소유하는 게 아니니까. 나는 누구에 의해서 결정됐으니까. 나는 마치 타잔처럼 ‘오호오~’ 이쪽 나무에서 저쪽 나무로 건너가는데 주님을 바라보면서 자기는 그냥 공중에서 공중부양해서 어디 가고 있는 거예요. 누가 붙듭니까? 주께서 붙들어서 나로 하여금 이렇게 살게 하고 이렇게 살게 하는 거예요. 집이 그만큼 넓은 저택에 사는 수모를 겪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 횡포를. 왜 청소하려고 하면 ... 물론 청소는 멕시칸 아줌마가 한답니다. 하지만 그만큼 하려면 신경 써야 되잖아요. 신경 쓰는 그런 수모를 겪게 하면서 어차피 다 빈 손으로 가는데 자기는 그런 역할을 하고 어떤 사람은 미국에 사기 당해서 온 사람이 왜 그리 많은지, 사기 당하는 식으로 가고, 이혼하는 것은 이야기꺼리도 안 되고, 그런 식으로 살게 하셔요. 미국 가봐서 알잖아요. 그런 식으로 하나의 역할이라니까요. 역할 이예요.

인생이 자기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 이런 말이 있듯이 푸쉬킨의 시 있잖아요. 노하긴 뭐 우리는 감사할 뿐이죠. 어차피 남의 인생을 탐을 안 낼 테니까. 하나의 과정이라는 그분이 이야기하는 과정이 중요해요. 그동안 내 인생은 내가 소유한다고 생각했는데 소유하는 게 아니고 과정입니다. 제가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의 주체는 고체가 아니고 액체라는 거예요. 물에 들어가면 흐르는 액체처럼. 그릇이 바뀌면 출렁거리며 튀어나오고 성질내다가 다시 좋으면 고요하게 있고. 도대체 환경 따라서 그때, 그때 달라요. 우리는, 그래서 액체 같은 존재에요.

목사가 칭찬해주면 충성 봉사하고 온 재산 교회다 다 때려 바치다가 삐지면 ‘잘 먹고 잘 살아라.’ 하고 다른 교회 가버리고. 우리는 액체 같은 존재입니다. 누가 날 사랑해주는 사람 없어? 이 세상에 여러분? 그런 건 윤 복희나 하고, 우리는 자꾸 소유하지만 주께서는 명태 치듯이 딱딱하게 소유하게 되면 또 성령의 칼로 다다다닥, 마른 명태로 만들어서 축~ 늘어지게 만들죠. 다시 또 좋은 일 생기면 ‘내가 했습니다.‘ 하고 까불면 또 얻어맞아서 쥐포로 만들어 만들어서 쭉쭉 째지는, 그걸 제가 망사스타킹이라고 했잖아요. 망사스타킹처럼 쭉쭉 째지는 거예요. 상당히 에로틱했던 모양이라. 사람들이 그걸 기억하는 걸 보면.

여기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어떤 코스로 가기에, 그러니까 대리인, 나란 인생은 이미 죄인으로 끝났어요. 죄인으로 그 자리에 있고 나를 놔두고 주께서는 어떤 경로를 밟아서 도로 나에게 찾아오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들었던 이 마을사람들이 주인공이 되는 겁니까? 아니면 제자들과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제자들과 예수님이 바로 주인공이 되는 거죠. 그 이야기부터 4장 5장 6장 7장 계속 나오는 겁니다. 가면 갈수록 누구하고 밀착된다? 주변 사람들은 빼고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가장 멀리 있는 사람 이예요.

나는 누구보다도 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는 그 베드로가 결국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한 번도 아니에요. 세 번씩이나 완전히 삼세판이라. 세 번씩이나 부인하죠. 우리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잖아요. 우리는 띄엄, 띄엄 부인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계신 한 자리에서 손에 도장 찍듯이 ‘내가 저 사람을 저주한다.‘ 했어요. 주께서 꼴아봤죠. 정말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입니다.

요한복음의 전개 과정이 꼭 요셉 같아요. 요셉 본인은 갈수록 일이 꼬이고 안 돼요. 갈수록 점점 감옥소에 가고 잘 되긴 누가 잘 돼요? 가만히 있는 다른 사람이 혜택을 입어버려요. 여기 요한복음에서 가는 것은 주변 사람들이 잘 되는데 막상 그 제자들은 그 속에 누가 있다? 마귀가 들어있어서 제자들은 이제는 주님으로부터 몹시 책망을 받는 과정에서 결국은 마치 우주선이 올라가면서 밑에 있던 보조 기구들은 다 떨어지잖아요. 캡슐만 올리고 밑에 있는 1단계, 2단계, 다 떨어지죠. 오직 마지막에는 그리스도만 올라가는 거예요.

결국 인간의 죄가 주님을 올렸다고 보면 돼요. 구세주로 만들었다고 보면 돼요. 그런 점에서 우리의 죄가 상당히 긍정적 의미가 있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이 원리가 주의 세상 다루기입니다. 그런 시선으로 우리가 세상을 볼 줄 알아야 돼요. 죄가 있는 곳에 주님의 은혜가. 우리가 죄를 느꼈잖아요? 그거 쳐다보세요. 그 안에 은혜도 같이 옵션으로 들어있어요. 죄만 보고 그 죄를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고 죄 졌으니까 헌금 더 보태고 죄 졌으니 기도 더하지 마세요. 죄가 있는 곳에 파헤쳐 보면 주께서 은혜를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그 죄가 유발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한 것이 그것도 주님의 장난인가? 모르지만 주님의 전략으로 우리에게 그런 사태가 일어난 겁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앞으로 보면서 왜 주님께서는 인간과 자꾸 어긋나느냐? 우리는 주님을 믿고 싶은데 주님께서는 네가 백날 따라와서 날 믿으려 해도 절대로 너희 힘으로 나를 믿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는 것과 너와 나 사이에 어떤 모든 갭은 나로 인하여 그것이 연결되는 그 과정을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4장 끝에부터 5장까지 이제 계속 줄기차게 나오게 될 것입니다.

10분 쉬고 합시다.

이한례(IP:203.♡.42.222)

14-12-06 11:50

가락-요한복음 4장42(홀로 가시는 길)141023b-이 근호 목사

제가 아까 얘기 했듯이 예수님이 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못 알아듣습니다. 분명히 믿는데 믿는다 하면 주님이 무슨 이야기하면 ‘우리가 알아.’ 이렇게 돼야 되잖아요? 그런데 비켜 나가요. “네가 나를 믿나?” “믿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래? 그래 자신 있어?” “자신 있습니다.” “자신 있는가 보자.” 나중에 다 떠나버려요.

믿게 되면 이제부턴 우리가 주님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믿어도 주님은 소유 대상이 안 돼요. 왜냐 하면 주께서는 밀어 놓고 주님 쪽에서 우리를 소유하는 방식으로 구원하기 때문에 우리의 아는 지식으로 주님을 내 사람으로, 또는 내 영역 속에 장악되는 것을 주님께서는 일부러 미끄러져 나가버려요.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겁니다. “예수께서 거기 왕의 신하가 있어 아들이 가버나움에 병들었더니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이렇게 이야기가 죽 나오잖아요? 시간 관계상 그 내용을 간추려 말씀드리면 신하의 아들이 병들었잖아요. 병들었을 때에 예수님이 거기 병든 자에게 왔습니까? 안 왔습니까? 안 갔죠. 안 갔는데 어떻게 됩니까? 나았죠. 49절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라고 했는데 그러면 50절 보지 맙시다. 49절 봅시다. 지금 신하가 요구한 건 뭡니까? 예수님께서 여기 계시지 마시고 내 아들 아픈 현장에 오셔서 죽을 내 아들 병도 낫겠습니다. 라는 것이 인간의 짜여 진 이렇게 플레임이라 하는데 곽이죠. 어떤 제도 형태로 짜여 진 그 안에서 ‘주님께서 일 해주시면 제가 납득이 되겠습니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주님의 일은 뭐냐 먼저 우리가 ‘요렇게, 요렇게 해주시고 주님께서 요거 도와주시고 요거 도와주시면 내가 주님께 감사하겠습니다.‘라는 틀이 있는데 그 틀 자체를 주께서는 깨버려요. 깨버리면 만약에 틀 자체를 누가 만들었죠? 우리가 만들었죠. 그럼 우리가 믿는다는 경계가 뭡니까? 바로 요런 식으로 되는 것이 고 때까지의 우리의 믿음의 한계에요. 그런데 그것을 깨버릴 때 우리는 뭡니까? ’아, 내가 생각한 한계가 스스로 그게 전부라고 여겼던 그런 착각에 있었구나. 그게 나의 잘못이다.‘ 하는 것을 깨닫게 되죠.

신하의 아들의 병이 낫고 안 낫고가 중요한 것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가 중요한 거예요. 모든 성경의 병 고침이 그래요. 중풍병자가 병이 나았다. 우리 같으면 중풍병자에게 ‘네가 걸어가라.’ 이야기할 걸 주님께서는 뭡니까? “네 죄를 사하였느니라.” 해서 이건 애초부터 중풍병자 친구들과 중풍병자와 주변의 어떤 누구도 설마 예수님께서 죄를 사한다는 말을 안 할 것이라고 누구나 예측 못했는데, ‘네 병이 나았다.’ 사람들이 기대한 건 그거였어요. 그런데 “죄 사함을 받았다.‘ 함으로 말미암아 중풍 병 나았다는 것은 싹 날아가 버리고 ”저분이 누구시기에 우리 죄를 사하지?“ 관심사가 죄 사함 쪽으로 옮겨놓는 방식으로 중풍병자를 낫게 해버린 겁니다.

이게 바로 주님의 해석 이예요. 만약에 제가 암 걸렸다. ‘주여 이 암 제가 봉사 더하기 위해서 말씀대로 암 낫게 해주시옵소서.’라고 했는데 병이 낫는 순간 나는 회개할 수밖에 없죠. 왜냐 하면 죄 사함이 중요한데 나는 내 자신의 병 나아서 그러니까 병 낫고 난 뒤에 ‘병 나았습니다.’ 간증집회 해서 돈 봉투 얻고 돌아다니면서 설교하고 이렇게 해서 그것으로 생계유지 하겠다는 이런 계획 자체가 이게 바로 내가 잠복돼 있던 나의 또 하나의 죄가 펼쳐진 거죠. 주름 잡힘이 하나하나 숟가락 펼쳐지듯이 잠복돼 있는 내 죄가 펼쳐질 때 유 형철이 죄 못지않죠. 나는 나부터 무조건 살아야겠다는 욕심이 그런 아주 멋있는 종교적인 형태로 간증집회에서 남한테 구원시켜준다는 그런 변명 거리가 얼마나 멋집니까? 주의 일을 한다는 거, 목사 됐다는 이게 얼마나 좋은 핑계거리에요? 그걸 빌미로 나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그 죄가 또 다시 밝혀지겠죠.

그래서 진정한 간증집회는 이겁니다. ‘제가 기도해서 병 나은 이것이 바로 죄였습니다.‘ 이게 간증집회에요. 제가 설교해서 5천 명이 구원 얻는다고 한 이게 바로 죄입니다. 그게 바로 간증 이예요. 그게 유일한 간증집회에요.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요게 전부에요. 그런데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했다 말이죠. 그래서 긴가 민가 했죠. 진짜 그걸 믿었으면 뒤에 “몇 시에?“ 물어 보지도 않을 거다 이 말이죠. 물어봤다는 말은 뭐냐, 결국 그 사람은 믿었다는 것이 뭘 믿었다? 자기 한계 내에 있는 것만 믿었지, 예수님을 믿은 게 아니죠. 내 한계를 도와주는 그런 예수, 나에게 유리한 예수, 내 일에 협조해 주시는 예수, 그 예수를 믿었는데 그 예수가 인간이 어설픈 예수가 되는 겁니다. 그 예수는 계속 빠져나가요. 왜 빠져나가야 하느냐 하면 누구라도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과 잘 결합했고 예수님으로 병 나음을 얻었다 해서 예수님과 같은 패가 아니에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병 낫게 했다는 그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이들에게 손에 붙잡혀서는 안 됩니다. 계속 자기 길을 계속 가야 돼요. 그 가는 길에 다~ 떨어져 나갑니다. 12제자들도 다 떨어져 나가고 막달라 마리아나 여자들도 다 떨어져 나가고 그냥 홀로 가셔야 됩니다. 홀로 가신 이유가 뭐냐, 이겁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은 이 세상에 누구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 매개로 삼아서 나로 인하여 자기를 구원하려고 그래서 하나님 만나려고 갔지만 다 주님 앞에 퇴짜당합니다. 누구만 허락됐죠? 아들만 허락되죠. 그래서 그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저 착합니다. 저 어릴 때부터 십계명 지켰습니다.’ 하는 그 부자도 예수님 앞에서 퇴짜당했죠. 그렇죠? “네 모든 걸 팔고 나를 따르라” 할 때 근심해서 돌아갔잖아요.

모든 인간은 아들이 아니에요. 아들은 오직 예수님만 아들 이예요. 예수님만 아들이지,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만 아들 되기 위해서 어떻게 돼야 됩니까? 나머지는 아들 아니라는 것을 티를 내야 되겠죠. 그래서 이것은 다 떨어져나가야 되는 겁니다. 혜택은 입고 다 떨어져 나가야 돼요.

보세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잖아요? 베드로가 오병이어 떡을 먹었잖아요? 그래도 결국은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하고 떨어져 나가잖아요? 왜, 혜택 입은 거하고 구원하고는 딴 문제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아서 병 고침을 얻고 어떻고 혜택을 입었는데 십자가 피 모르면 지옥 가잖아요? 문둥병 열 사람이 있었는데 열 명 다 문둥병 다 나았잖아요. 돌아온 사람 몇 명밖에 없었다? 한 명 이예요. 얼마나 비능률적이고 비효과적입니까?

그것을 제가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낭비라 했죠. 하나님의 낭비, 하나님은 왜 그리 낭비가 심한지 모르겠어요. 방주 이만~하게 지어놓고 여덟 명 달랑 들어가고 그 빈 공터에 숨바꼭질 할 거예요? 놀이터 할 거예요? 뭐 할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 보게 되면 처음부터 자부하고 아들하고만 여덟 명 들어간다 해놓고 크기는 대따 크게 지어놨어요. 물론 동물 들어가고 거기에 1년 먹을 양식 들어가지만 그래도 그렇게 클 필요가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낭비라 했는데 이건 사실 넘치는 의라고 보면 되죠.

여기서 5장 들어가기 전에 베데스타 못 가에 들어가기 전에 방금 하나님의 낭비라 했는데 그 낭비의 그 기초, 그라운드, 그걸 분명히 보기 위해서 창세기 2장, 3장 이야기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아담이 선악과 따먹기 전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았죠? 아담이 선악과 따먹기 전에 선악에 대해서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몰랐죠. 그러면 물어보겠습니다. 선악을 모르는 상태가 어떤 마음이라고 보십니까? 선악을 모를 때 상상이 안 되죠. 선악을 모른다. 정박아입니까? 아이큐가 한 20돼요? 흐흐 웃으면서 때려놓고도 흐~ 웃는 거. 그게 아담일까요? 안 그러면 바보일까요?

선악을 모른다는 것은 이미 선악을 아는 이 경계선을 넘어온 입장에서 선악을 모르면 이건 바보죠. 그러면 문제는 바보라고 했을 때도 문제 생기는 게 뭐냐, 하나님께서 결국 바보한테 뭐라고 이야기했어요? “선악과나무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게 바보한테 할 말씀입니까? 유치원 애한테 수학의 삼각함수를 이야기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이 말입니다. 풀지도 못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x²+y², y=x²+ax=b의 궤적을 그려라. 이게 요새는 유치원 애도 무서워서, 선행학습을 해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거 이야기하면. 추 사랑한테 그 이야기하면 뭐하겠어요? 추 사랑이 알아듣겠어요? 추 성훈이 딸입니다. 갓난 애가 알아듣느냐 말이죠.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다시 찾아갈 수 있을까? 우리가 그 마음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서 선악을 아는 이상은 다시 그 상태로, 그 상태를 무슨 상태라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무죄 상태라 해요. 죄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무죄 상태는 무슨 상태가 아니냐 하면 의의 상태는 아니에요. 의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낭비, 하나님의 의가 차고 넘치는 거예요. 의라 하면 어려우니까 하나님의 용서가 자비가 넘치는 곳이고,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은 자비고 은혜고 뭐고 몰라요. 죄 없는 상태기 때문에.

따라서 저는 이것을 뭐라 보느냐 하면 이걸 재료로 봐요. 재료라 하는 것은 완성된 물체가 아니고 공작 시간에 키트, 거위로 오려서 조립하듯이 , 조립된 배치 물, 여러 가지 배치 물이예요. 선악과 생명나무, 이게 배치 물이예요. 그리고 또 재밌는 것은 생명나무가 생명이 어디 있다 했습니까? 나무 과실에 생명이 있다는 거예요. 참 신기하죠? 그걸 따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오래 살기 때문에 우리는 허락 못하겠다는 거예요.

무슨 생명이 나무 과실에 있습니까? 무슨 선악을 아는 지식이 나무 과실 안에 있어요? 사과 쪼개 보세요. 그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달콤한 거 들어있지, 선악과 안 들어 있잖아요? 선악 과실이라는 구조와 생명나무 구조, 그게 뭐기에 그게 생명이 되고 그게 뭐기에 선악과가 되면서 뭐기에 정녕 죽음을 유발하느냐, 그게 독약입니까? 독약 같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선악과 따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헉헉, 이래야 되는데.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어땠습니까? 음? 말짱했어요. 아이쿠, 구라였어요.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안 죽으니까 그걸 누구한테 권했습니까? ‘자기야’ 해서 실험을 해보고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좋은 건 남편한테 먹인다고 먹였죠. 그러다가 잘못 먹어서 남자는 요게 나왔다는 설이 있는데 저는 믿지 못하겠습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어요. 저 같으면 안 나왔는데 저는 쑥 넘어갔는가?

정답은 이겁니다. 생명나무 선악과는 그것을 인물화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와 결부돼야 되지,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아니하면 생명나무 선악의 생명은 인간은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경험한 죽음은 죽음이 아니에요. 잠시 죽는 시늉을 할 뿐입니다. 인간은 죽지 않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고통스러워요. 차라리 죽으면 좋겠는데 아무 행복도 안 느끼고 불행도 안 느끼면 그거처럼 속 편한 게 없어요.

욥도 이야기했잖아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이런 고통을 안 당할 걸. 욥을 얼마나 계산적입니까? 나라는 게 없으면 내가 당한 고통도 없고 까짓거 뭐 덜 행복하면 되지 뭐. 내가 자체가 없다면 행복할 이유도 없잖아요? 아예 없었던 걸로 여기면 속 편합니다. 오죽 했으면 김광석이 말했겠습니까? 먼지가 되어. 먼지가 되어, 아예 먼지가 되었으면 이 많은 우울증 고통 다 없어질 건데. 그게 불교잖아요? 한줌의 재가 되어 날라 간다는. 그러니까 기독교에 속지 말고 불교 오라는 겁니다. 왜, 내가 너희를 행복하게 해주리라. 어떻게? 먼지가 되어.

문제는 성경에서 사람은 밟아도 안 죽는다는 사실, 이것처럼 공포스러운 게 없죠. 좀 죽어야 되는데 이 메가지 밟아도 안 죽어요. 무덤에 가도 누구 음성을 듣습니까? 주님의 음성을 무덤에 가서 들어요. 세상에서는 절에만 가다가 죽고 난 뒤에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니까요. 뭐 기독교 신자 없어요. 죽고 난 뒤에는. 주의 음성을 다 들어요. 미리 땅긴 사람은 행운 잡은 거고, 뒤늦게 죽고 난 뒤에 잡는 사람들은 심판 받고. 성령이 미리 땅겨서 온 거예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미리 죄인된 겁니다. 아담 땡 잡은 거예요. 다 여자 덕 이예요. 여자가 따먹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뱀이 와서 유혹을 해줬기 때문에, 뱀의 배치를 누가 했느냐 하면 주님이 배치를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7장 17절, 아까 보셨죠? 하나님께서 짐승으로 하여금 주의 뜻이 응하게 하기 까지 마음껏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준비된 할당의 일을 다 해야 되는 거예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다 해줘야 돼요.

그러니까 마귀가 하는 일은 뭐냐 하면 누굴 고소하는 일 이예요. 그게 쉽게 말해서 ‘얼레리 꼴레리’ 하는 게 마귀가 하는 일 이예요. ‘얼레리, 꼴레리’ 마귀가 그렇게 하잖아요. 마귀가 밖에서 한다고요? 우리 안에서 해요. 우리가 우리에게 벌세우고 징벌하고 채찍질하고 때리고 우리가 우리자신을 나무라고 있습니다. 이게 마귀 일곱 귀신이 한 짓 이예요. ‘너 이렇게 나쁜 짓 했으니까 앞으로 성경 두 장 더 읽어. 기도 30분으로 더 땡겨. 앞으로 교회 일찍 나가. 네가 오늘 성가데 전산 하니까 헌금 1000원 더 보태.’ 이러면 우리가 마음이 갑자기 뭔가 약간 시원한 느낌이 들죠.

이게 바로 부재(존재하지 않음)는 보충이 되는 겁니다. 항상 인생이라 하는 것은 부재에 대해서 보충하는 식으로 인간은 모든 행동을 움직이게 돼 있어요. 인간의 모든 행동이라 하는 것은 미흡한 내 자존심을 딴 걸로 채우기 위해서, 다른 걸로 이 못 다한 것을, 못 다한 사랑을 채운다는 노래도 있지만, 뭔가 내 미진한 것을 채움으로써 자기 완결성을 추구하는 거예요. 나는 나로 인하여 만족케 하는 그 작업에 인간은 나서게 돼 있습니다.

‘여러분 죄인이죠? 의인되고 싶지 않습니까? 의인되려면 기도하고 금식하고 성경보시고 헌금하세요.’ 이런 목사의 말이 교인들은 납득이 되고 동감이 되어서 ‘아멘 할렐루야’ 터져 나옵니다. 이거는 마귀 짓인데 우리는 반대에요. 이미 채워진 것을 우리는 못 다 못 펼쳐서 문제가 돼요. 주님이 주신 것은 그 용서와 사랑을 기껏 짧은 90평생 동안, 기껏 해봐야 그 사랑과 그 넘쳐나는 주의 낭비를, 주님의 은혜를, 다 못 다 써먹어요. 이 죄 짓은 것도 용서, 저 죄 지은 것도 용서되니까,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용서를 다 표현할 수 있겠어요? 표현이 안 되는 거예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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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8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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