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25 미국동부오전c
20140925 미국동부오전c
이름 : 한윤범(IP:119.192.174.28)
20140925 미국동부오전c
(강의: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형상이야기가 교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다뤄졌습니다. 그것은 교인들에게 할 말이 있어요. 목표가 있어요. “여러분,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회복하세요.” 간단한 문제에요. 목회가 뭐냐? 잃어버린 하나님 형상 회복하기.
교인들은 당연히 궁금하지요. “형상이 무엇이며 회복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형상은 하나님의 진면목, 참된 본성인데 청조 때는 있었는데 그 뒤에 잃어버렸거나 잠복되었거나 그렇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성령을 받게 되면 성도가 되게 되면, 하나님을 본받으라.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대로 그 거룩을 회복하시면 여러분은 드디어 신앙생활의 목표점을 제대로 찾으신 겁니다. 특히 에베소서 5장에서 새사람을 입어라. 하나님 형상을 입어라. 너희는 전에는 어둠이었더니 이제는 빛의 형상을 입어라.
따라서 목회 목적도 확정되었습니다. 믿는 것은 사람의 뜻으로 안 되고 성령에 의해서 되지만 그 다음에 성령 받은 사람에게 삶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 형상을 본받으라는 것으로 확정되었다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러면 교회라는 것은 믿음 생겼다고 구원받았는데 교회 나올 필요 없습니다. 그러지 마세요. 왜냐하면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과제가 주어졌는데 교회 등록하시고 봉사하시면서 잃어버렸던 하나님 형상을 형제들의 모임을 통해서 회복하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본래 구원의 완성에 부합되는 겁니다.
그렇게 단출하게 정돈되면 여기는 어떤 하자도 없고 완벽한 신앙생활의 스케줄이 짜여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다들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있거든요. 그런 주장을 할 때 제일 큰 두 가지를 놓치고 있는 겁니다. 이 주장은 이천 년 교회 역사 가운데 계속해서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주장해왔던 건데 그들은 두 가지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첫째는, 유대교의 사상과 일치됨에 대한 무지. 유대교 신학은 뭐냐 하면, 홍해가 갈라지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입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동행하셔서 구원을 받는 상태에서는 추가적으로 율법이 주어지는 겁니다. 맞지요. 홍해 건너갈 때 율법 없었습니다. 홍해 건너고 난 뒤에 하나님이 모세를 시내산으로 인도하지요. 시내산에서 그 유명한 돌판이 제공되면서 줄줄이 돌판 중심으로 율법이 주어지는 겁니다.
사실 출애굽기, 레위기 설명하려면 율법을 설명할 때 왜 돌판에 십계명만 써있고 다른 계명은 안 써졌는지 그 문제도 다뤄야 돼요. 그것 궁금하지 않았습니까? 하늘나라에 돌이 모자라서 그랬던가요? 안 그러면 모세가 들고 오기에 너무 무거워서 십계명만 새기고 나머지는 외워서 가라고 된 걸까요? 이러한 차이점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왜냐하면 책에 나오질 않아요.
맛 좀 보여드릴까요? 왜 돌판에 십계명만 써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10초 동안만 말씀드릴게요. 돌판이 있어야 깨어짐이 성립되기 때문에. 깨어짐에서 새로 시작하자.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너희들 내 백성이야.” 백성이 듣고, “예. 주의 백성 맞습니다.” “아니야. 내가 보기에는 아니야.”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냈잖아요. 그러니 주의 백성 맞잖아요.” “네 속에 애굽 요소가 가득 들어있어.”
만약에 무슨 일만 일어나면 무조건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때는 수박도 있었고 부추도 있었고 향신료도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로 끌고 가냐? 만나, 메추라기, 이제 지겹다. 질린다. 차라리 뭐가 그리워져요? 애굽에 맞춘 몸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자칭 자기를 출애굽했다고 여기는 무리에 대해서 너희들은 출애굽을 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홍해는 뭔데? 출애굽이잖아요. 지리적으로 애굽이란 공간을 벗어나서 빠져나왔으면 출애굽이 아니냐. 하나님은 그게 아니고 애굽의 확장이라고 보는 겁니다.
자기 바지에 잉크물이 들었으면 그 사람 바깥에 산보하면 길바닥에 잉크물이 가는 곳마다 묻어나겠지요. 애굽에 살던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칭 새로운 나라에 대한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막상 그들이 가서 발 딛었던 그곳은 애굽의 확장이었고 애굽의 본성의 발휘였습니다. 애굽이 확장된 것이지 그 애굽에서 조금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애굽과 애굽을 벗어남의 경계선은 어떤 지점이냐? 단순히 지리적 지점이냐? 아닙니다. 어린양의 죽음과 합치된 인생을 맛볼 때 벗어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제사법입니다. 제사법은 특수한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아까 목사님 병 이야기하니까 가슴 아프지만 특수한 죽음이 전제돼요.
어제 오후에 강의하면서 죽음 이야기를 초반에 안 끄집어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어요. 기어이 끄집어내지 않는데 성공했지만. 처음 만난 사람에게 죽음 이야기해버리면 실례고 너무 잔인한 이야기 같은 거예요. 살아도 죽었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끄집어내요. 교인들이 더 잘 살려고 교회 오지요.
기존교회에서 성화론할 때 성스러움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이런 분에게 물어요. 이 땅에서 성스러워질래요, 이 땅을 벗어날래요? 둘 중에 하나만 고르세요. 이 땅에서 내가 이 정도로 대단한 존재, 이 정도로 내가 착해질 수 있구나. 자기가 착해지는 그 모습에 자기가 반하는 것이 소원이십니까? 아니면 훌쩍 제대하는 게 소원이십니까? 사람은 자기가 위대해지기는 게 소원이지 떠나기를 싫어해요. 떠나더라도 자랑 좀 하고 떠나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그러니까 떠나기보다는 차라리 성스러운 쪽을 택해서 남한테 기죽지 않으려는 그러한 성스러움의 욕구가 작용합니다. 수도원 수녀들이 그러거든요.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수녀원에 뛰어드는데. 사실 수녀원에도 그런 여자는 싫어해요. 수녀들도 공부 잘해야 되고 환경 낮으면 차별대우가 심해요. 똑똑한 수녀는 대우받고.
성스러움이란 애굽에서 익힌 버릇이에요. 주님의 성스러움은 다른 차원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 경계선이 뭐냐? 방금 이야기했듯이 어린양이 죽어서 문설주에 바른 피의 어린양과 합치된 인생을 살 때 경계선인데 그것은 이미 먼저 죽었지요. 어린양이 먼저 죽으시고 그 어린양에 동참함으로써 비로소 출애굽이 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죽으면 안 되잖아요.” 하잖아요. 그래서 대신 죽는 죽음을 반복시키는 장치가 바로 제사법이에요. 그 제사법을 쓰려면 희생, 죄에 대한 주님의 용서니까, 죄와 용서의 만남이니까 죄의 기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십계명이 주어지는 겁니다. 십계명이 주어지면서 돌판이 깨어지지요. 그 뒤에 십계명 안 주어지면 또 주어지지요. 그러면 주어진 십계명 안에 뭐가 품어져 있느냐 하면, 이미 십계명을 못 지키는 걸 확정된 상태에서 십계명을 안겨줍니다.
그러면 로마서 3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죄 되게 우리의 모든 입을 저주 앞에 두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모든 율법 주는 것이나 출애굽하는 모든 기능이 어디에 투입되느냐 하면, 코끼리나 코스모스가 아니라 어떤 주체, 인간에게 투입되는 겁니다. 그 인간은 그냥 인간이에요.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그냥 인간이라 하지 않고 언약의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참 어려운 용어가 나왔어요. 주체. 이것을 영어로 하면, self인데 셀프는 ego와 다릅니다. 그래서 언약의 자아가 아니고 언약의 주체가 돼버려요. 언약의 자아와 주체의 차이점이 뭐냐? 알아듣든지 모르겠다. 할 수 없어요. 알아서 들으세요. 여러분 알아들을만하다고 믿습니다.
자아는 영어로 we가 아닙니다. I가 돼버려요. 그런데 주체는 분명히 셀프라고 돼있지만 사실은 we 안에 셀프가 돼요. we 안에 셀프와 we 없는 셀프의 차이가 뭐냐 하면, 그냥 셀프면 나의 개성은 내가 살아온 인생이 내가 되지만 언약 안에 셀프가 되면 외부에서 마련된 그 자아가 그대로 들어오는 겁니다. 그게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형상이 우리 속에 우리 허락도 없이 그냥 침투해버리지요.
그게 우리 믿음은 죄로 깨어져야 되고 예수님이 지상에서 다져진 믿음이 우리 믿음으로 들어오고, 예수님의 소망이 우리 소망으로 대체 되고 주님이 아버지와 관계한 그 사랑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을 대체해버립니다. 그러면 요한일서에 나오는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했다는 겁니다. ‘헌집 다오 새집 줄게’가 성립되는 거예요. 그러면 헌집을 고물로 받아들이고 새 것을 주는 모든 작업에 주님께서 관여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주체를 발생시키는 새 언약의 특징이에요.
이로써 개인 구원은 없어요. 집단 구원 이외는 개인 구원은 없어요. 찾아오기는 개인으로 찾아오되 we라는 확정된 속성으로 우리에게 집어넣기 때문에 찾아오는 순간 나는 에고/자아가 아니고 셀프가 되는 겁니다. 우리 속에 내가 되는 겁니다. 나의 속성은 강탈당하고 일반적 속성, 주님과 더불어 있는 그리스도 몸과 지체된 그 속성이 우리 속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형제를 대할 때 그냥 대하지 않고 경유해서 대하는 겁니다.
머리 되신 주님을 대하게 되면 내가 죄인 된 것처럼 저분도 죄인이다. 그런데 저분은 어떻게 구원받았을까? 그 경유를 다시 그리스도고 당겨오면 주님의 피로 용서받은 입장으로 나에게 만남이 이뤄졌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만약에 피자를 못 먹는다. 그러면 어제 저녁에 한 것처럼 저분은 피자를 못 먹는 에고가 아니고 피자 못 드시는 셀프를 예수님으로 부여받은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저분의 개성이 아니죠. we라는 고물 소속이기 때문에 저분이 만약에 편찮다하면 내년에 내가 동일한 것을 할 수 있고, 저분이 만약에 창기라면 나도 내년 되면 창기 될 속성이 있고, 저분이 강도라면 나도 강도 될 속성이 공유돼있지요. 그러니까 어떤 죄인이라고 어린양의 피로만 구원받은 한 형제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형제 되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은 친교단체, 친목회로 끝나버리는 겁니다.
에고가 모인다고 we가 되는 게 아니거든요. 중국에서 이 강의하는데 중국 목사들이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I 모이면 we가 되는 게 우리 상식이잖아요. 그게 아니고 I를 깨야 준비된 we가 있는 겁니다.
오늘 주인 되시는 집사님이 피자를 준비했는데 그것도 모르고 제가 집에서 피자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준비된 피자에 대한 내가 사적으로 모독한 게 되거든요. 이미 we 안에 거룩이 있는데 내가 따로 성스러운 욕구를 발휘시켜서 이 정도로 착합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에 대한 모독이에요.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몰라요.
키르케고르란 유명한 기독교 실존주의 철학자가 이야기하기를 예수님이 착하다고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독이라고 했어요. 그것은 주님을 빙자한 자기 착함의 우회적인 과시거든요. 이렇게 되면 이천 년 신학 다 바뀌어야 돼요. 어디가 틀렸다는 게 아니라 다 뒤집어져야 돼요.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은 거예요.
그러면 유대교 신학은 뭐냐? 홍해를 건너온 것은 하나님의 기적으로 구원받았다. 이제부터 율법을 준 것은 구원받은 사람끼리 율법을 지킴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유대교 신학이라는 것을 그전의 사람들은 몰랐던 거예요. 칼빈이 성화론을 주장하면서 그게 바로 이미 선배들, 유대교 신학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연장이란 것을 몰랐던 겁니다. 천주교와 싸우느라 바빠서. 유대교를 반복한 거예요. 기독교적 유대교가 돼버렸어요. 그게 바리새인 되는 거예요. 누가누가 잘하나. 금요일 다섯 시에 어린이방송처럼 제목 자체 누가누가 잘하나에요. 교회 와서 누가 헌금 많이 하고, 기도 오래하고, 누가 목사님 잘 섬기고, 누가누가 잘하나.
두 번째 문제가 뭐냐 하면, 형상을 잃어버렸잖아요. 형상을 되찾는 경로는 잃어버린 경로를 밟아가야 돼요. 그런데 잃어버린 경로를 완전히 무시하고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윤리, 도덕으로 시도하게 되면 이것은 세상적인 철학적 형상론입니다. 그건 세상적 윤리, 도덕이에요. 정말 형상을 잃어버렸다면 그걸 되찾는 방법은 잃어버린 경로를 밟아나가서 되찾게 돼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드라마에 보면 출생의 비밀이 있어서 엄마가 자기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재혼했다. 그런데 버려진 딸의 아버지 직업이 소매치기여서 소매치기했다. 그런데 우연히 남자친구를 통해서 엄마가 살아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만나고 난 뒤에는 너무 잘 살아서 어떤 이질감을 느껴서 “난 엄마라고 부르기 싫어.” 이건 셀프가 아니고 에고가 되겠지요. 자기는 자기로 인한 주체, 엄마 없는 에고를 임시적으로 주체성, 셀프라고 한 겁니다. 그러면 엄마의 자리가 엄마를 만날 때 진정 엄마와 화합하려면 그때 엄마가 왜 자기를 버릴 수밖에 없는지 엄마를 이해해줘야 되지요. 그런데 이미 엄마와 떨어진 상태에서 형성된 자기 주체로 엄마를 싫다고 하면 곤란한 겁니다. 방금 예는 케이블에 나오는 [유나의 거리]라는 게 있어요.
-목사님, 에고와 셀프를 한국말로 어떻게 표현될까요?
에고는 자아, 셀프는 자기. ‘자기야’라고 하는 오글거리는 것 있잖아요.
-개별자?
개별자는 집단과 연관해서 하는 용어고. 개별자라는 것은 어떤 집단을 먼저 전제로 하고 하는 거예요.
-we가 집단으로 보면? 우리라고 이야기하시니까.
집단에서 개별자로 돼버리면 부분집합으로 들어갈 수 없어요. 이 정도만 하면 돼요.
지금 제가 하는 것은 애굽에서 나올 때 에고로 나왔다가 이제는 하나님 이름으로 하기 때문에 자기 이름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에고 시대는 날아가고 주님의 이름으로 대신 표현해야 될 셀프로 살아간다는 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라는 집단체제 안에서 구원받는 거예요. 집단체제를 아까 말한 것처럼 예수님을 경유해서 창기, 세리도 구원받고 하려면 그것을 경유하는 분은 집단이 아니고 한 명이어야 합니다. 그것을 구약에서는 여호와 이름으로 또는 하나님 이름이라고 합니다.
지금 신학교 교수들도 어려워서 안 가르치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차이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아무도 가르친 적이 없어요. 책에도 안 나옵니다. 구약에는 분명히 하나님과 하나님 이름이 구분돼있는데. 알려드려요?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이름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언약의 실행자에요. 그래서 이름의 특징이 뭐냐 하면, 지상에서 활동하시는 분을 이름이라 해서 그 이름은 존재라는 표현을 하지만 사실은 존재가 아니고 기능입니다. 바람 같아서 붙잡을 수가 없어요. 이름은 우리를 붙잡을 수 있지만 우리는 그 이름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름은 기능적이기 때문에 환경 따라서 계속 기능이 바뀌어요.
율법 지키라고 해놓고 율법 지키면 죄가 되는 기능으로 또 바뀝니다. 언약궤를 앞장세우면 적들이 물러간다고 해놓고 언약궤 앞장세우다가 블레셋에 언약궤를 빼앗깁니다. 그런 관점으로 구약 전체를 통으로 뚫어야 돼요. 민수기 10장에 나오지요. 왜 언약궤 앞장세우면 적들이 물러간다고 해놓고 그걸 곧이곧대로 믿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 앞장세우다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빼앗겼지요. 왜 하나님은 이랬다, 저랬다 하느냐는 말이지요. 성경에서 일관성을 뽑아내지 못하게 되면 설교하는 본인이 혼란스러울 정도입니다.
두 번째 해봅시다. 잃어버린 경로를 밟아서 잃어버린 경로로 돌아가야 된다. 따라서 자기 엄마를 만날 때 “엄마는 날 버렸어.” 이렇게 하지 말고 옛날에 왜 나를 버렸는지 무엇 때문에 버렸는데 엄마가 버릴 때 아빠는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 때 엄마는 나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통감하면서 그 사람은 엄마와 셀프로서 제대로 된 결합을 할 수 있습니다.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난 뒤에 당신 같은 남자는 두 번 다시 보기 싫어. 울고불고 하는데 상대방 말도 들어봐야 되거든요. 안 들어보고 일방적으로 상해서 그렇게 하면 정말 극단적인 경우가 생기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린 그것마저 버림이 아니고 구원하기 위한 재료로 활용하신다는 겁니다. “잃어버려도 괜찮아.”라고 해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됩니다. “주님이여, 이번에 제가 너무나 나쁜 짓을 했어요.” 할 때 주님은 나쁜 짓을 해도 괜찮다고 하면서 구원을 해주시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 예를 들 때 제가 한 동안 든 예가 뭐냐 하면, 아프리카 밀림에 가면, 날아가는 파리가 나무 밑에 있으면 긴 혀가 나와서 양탄자 굴리듯이 접어서 입 속으로 집어넣는 그런 동물 있잖아요. 도마뱀도 있고 그걸 전문하는 게 있어요.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범죄 했습니다. 나무 밑에 있어요. 파리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혀 돌돌 감아버린 겁니다. 돌돌 감을 때 이렇게 범죄한 것까지 필요한 범죄였다는 겁니다. 구원에 필요한 범죄를 우리가 저지른 거예요. 필요해서 범죄했다 이 말입니다. 더 심하게 이야기해서 죄 지어야만 하는 존재가 인간이란 뜻이에요. 유일한 인간은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아담은 예수님의 표상이다. 그냥 모델이었고 그림자였고 진짜 인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인자, 사람의 아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