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경쟁 141017
말씀 경쟁 141017
이름 : 이근호(IP:119.18.98.57)
김창길(IP:203.♡.117.234)
14-11-17 11:53
서울 의존교회141017a (말씀경쟁)―이 근호 목사
디모데전서 4장 12절부터 보겠습니다.
딤전 4: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딤전 4: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딤전 4:15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딤전 4:16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우리가 보통 사람들에게 잔소리를 할 때는 그 사람이 더 잘되라고 잔소리를 하잖아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이미 이러한 잔소리, 또는 이러한 말씀을 이것을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이것을 안 한다고 해서 구원 안 되는 것도 아니거든요.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바르게 사세요. 라고 할 때에 그 듣는 사람이 하는 말이 바르게 살면 구원 해 줍니까? 이렇게 나올수가 있거든요. 당신, 바르게 살아요! 이렇게 하면 듣는 사람이 그러면 바르게 살면 구원해 줄 겁니까? 라고 한다면 하나님 쪽에서 너 구원 문제는 네가 바르게 사는 것하고 상관없어, 그렇게 이야기할 경우에 구원해 주지도 못할 것을 뭐하러 바르게 살라고 잔소리를 하십니까? 살 때 어떻게 답변해야 됩니까?
구원이라는 것이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 어떻게 됩니까? 예수 십자가 피를 믿음으로 용서받는 것 맞잖아요. 그렇다면 뒤늦게 잔소리를 한다는 게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잔소리를 한다는 말은 그대로 지키라는 말인데 지켜서 구원 안 될 것 같은데 구원안되는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왜 하죠? 그러면 그것 지키면 구원해 줍니까? 어허 그건 아니야! 그렇다면 지키라는 이야기를 왜 합니까? 이렇게 이렇게 살으라는 이야기를 왜 하죠? 그 이유가 모호한 겁니다.
또 한 가지 생각은, 구원이 안 될 것 같으면 이러한 언급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구원이 안 될 사람에게 네가 이것을 지켜라! 지키면 구원해 줍니까? 너는 애초부터 구원될 사람이 아니야, 그렇다면 구원이 안 될 사람에게 그것을 지키라는 말도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의 말은 구원될 사람에게도 무엇을 하라 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면 왜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너는 가르침의 말과 행실과 사람과 믿음의 정절에 대해서 믿는 자의 본이 되고 하는 이러한 추가적인 이런 언급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상당히 중요하지 않은 문제처럼 느껴지지만 막상 제가 그렇게 운을 떼니까 해결이 쉽게 되지 않을 것 같은 문제가 등장하죠. 저 구원받았으니까 목사님, 저 보고 잔소리 하지 마세요! 라고 할 때 목사님은 뭐라 해야 됩니까? 여러분, 교회에 일찍 오세요! 일찍 오라는 잔소리 하지 마세요! 저 예수의 피로 구원받았어요. 이렇게 댓구할 때 목사님은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되느냐 말입니까? 아이고 구원받은 것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해야 됩니까? 구원받았으니까 안와도 괜찮아요!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또는 구원받아도 교회에 늦게 오면 지옥 갑니다. 그렇게 이야기해야 됩니까?
막상 그런 댓구에 대해서 할 말이 변변치 않죠. 성경에서 예수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만 해야 되는데 왜 늦게 성도의 본이 어떻게 연수함을 어기지 못하게 하고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에 대해서 정절을 지키고 뭐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구태여 추가해서 해야 되는 이유, 궁금하죠?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보고 이야기한 게 아니에요. 우리 속에 있는 주님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주님이 주님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상당히 어떻게 보면 중요한 문제에 포함이 될 수가 있는 문제입니다.
성도는 성령이 와 있어야 성도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열심 낸다고 말씀대로 지켰다고 해서 성도 아닙니다. 성령이 임해야 됩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때부터 누가 우리를 대표해서 주님과 관계를 하느냐 하면 우리가 아니고 우리 속에 있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영을 주신 예수님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삼위일체 사이의 그러한 교류에 의해서 상호소통이라 하는데 성부 성자 성령의 상호 교류에 의해서 우리는 주님의 구원 목적을 주님이 알아서 처리 해 나가시는 겁니다.
그러면 그러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됩니까?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손을 떼어야 되는 겁니다. 관여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내 일에 내가 관여 안하기입니다. 이게 어떻게 들으면 굉장히 편하게 느껴지는데 그런데 사실은 내 일에 내가 관여를 하지 않으면 누가 가장 불편해 하느냐 하면 막상 우리 자신이 가장 불편해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아침 일찍이 여행을 가야 되는데 아침 일찍이 일어나려면 누가 깨워줘야 되잖아요. 깨워줄 때 우리가 잠을 안자고 있는 이상은 성냥개비로 눈을 뜨게 해서 눈을 안 감는다든지 이런 경우는 내가 알아서 깨는데 내가 일단 잠을 자게 되면 잠잔 상태에서 내가 스스로 잠을 깨서 일어나는 법은 없어요. 태양이 깨운다든지 아니면 짹짹거리는 새소리가 깨운다든지 아니면 방에 있는 다른 식구의 발소리에 의해서 내가 깬다든지 이렇게 되지 스스로 알아서 깨어나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외부의 자극이 있어야 돼요. 예를 들어 외부의 자극이 뭐냐 하면 해가 솟아오르는 거죠.
평소에 우리의 몸이 익숙해지니까 그래서 우리가 구름낀날, 비 오는 날은 늦잠 자잖아요. 해가 안뜨니까 잠을 잔다는 것은 이미 우리는 나에게 손을 뗀 상태입니다. 뗀 상태에서 대자연의 흐름에 우리 자신을 맡긴 샘이 되는데 그게 확실히 생활의 리듬이 아침 되면 깨어나는 몸이 되기 때문에 알아서 깨어나게 되는 거죠. 일단 잠을 자게 되면 외부에서 깨어줘야 되는 겁니다. 본의 아니게 우리는 우리 자신에서 손을 뗀 샘이 됐는데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실천과 완성은 창세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어느 대목도 우리가 이 말씀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얻게 되어 있어요.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잔소리 하는 것은 자식이 그 잔소리를 들어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죠. 예를 들어서 그냥 학교 갔다 와서 그냥 방에 들어보니까 엄마가 야, 손씻고 발씻고 방에 들어와! 라고 했을 때 그 아이가 손씻고 발 씻고 방에 들어오게 되면 그래, 그렇게 해야지 하고 부모가 일단 자기 뜻에 일치한다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선언을 해 버리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발 씻고 손 씻고 들어와 하면 우리는 우리가 아는 차원에서 발씻고 손씻고 들어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지킨 것으로 간주합니까? 간주 안 해 줍니까?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자리가 생각한 기준대로 지키지 주님의 기준에 합당하도록 지킬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는 없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그래요.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홍해를 가를 때도 그것은 모세가 지팡이를 들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께서 하나님의 신이 모세에게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이 드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발걸음도 세시고 머리카락도 세신다고 되어 있죠. 지금 우리가 신앙이라는 게 뭐냐 하면 우리가 성경 말씀대로 잘에 따라서 잘 따른 몸을 하나님께서 제공해서 합격통지서 받아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신앙은 처음부터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 돌아가거든요. 모든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 책임 하에 있느냐 하면 누구 관리 하에 있느냐 하면 주님 관리 하에 있어요. 그래서 성령을 주신 거예요.
사람들이 성경에서 로마서 나올 때 나는 성령 받았다! 주께서 은혜로 한다. 이렇게 하다가 디모데전서에 이런 대목이 나와 버리면 갑자기 자기가 이 말씀을 지킨다고 나서고 거들목거리고 그래요. 그것은 앞뒤가 안 맞는 겁니다. 처음에 예수 믿을 때도 손을 뗐으면 이런 말씀에도 손을 떼어야 됩니다.
12절에 누구든지 내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라는 말씀에 대해서 인간적인 디모데가 느끼는 그 기준하고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하고 같을까요? 다를까요? 이게 달라요. 늘 달라요. 그 이유가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원칙이 있어요. 이 원칙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반드시 무엇을 통해서 주어지게 되느냐 하면 여러분들이 지금 알고 있지만 복습한다고 생각 하시고 제 말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이 우리에게 올 때는 반드시 중보자를 통해서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중보자가 우리를 용서하실 때만 중보자가 아니에요. 모든 말씀을 실천할 때도 반드시 중보자가 개입하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 25절을 보면 히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구원받는 데는 누가 관여한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기도해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누가 개입한다는 말입니까?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이 개입하시죠. 예수님이 개입할 때 어떻게 개입합니까? 그냥 아무 일도 안하고 멍하니 개입하는 겁니까?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시는 겁니까? 뭘 하죠? 히브리서 7장 25절에 뭘 하십니까? 친히 기도 하시죠. 그리고 우리가 지금 살아있는 것이 내 기도 덕분입니까? 주님 기도 덕분입니까? 주님 기도 덕분 맞지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한국교회는 왜 자신의 기도 덕분에 구원받는다고 그런 식으로 분위기로 몰아가는 이유가 뭡니까? 흔히 중보기도 해서 여러분들이 멀리 있는 자식이 여러분들이 기도 해서 멀리있는 자식이 편안히 있습니까?
당진에 있는 따님이 사모님이 기도 해서 결혼까지 골인하게 되었습니까? 어떻습니까? 그러면 딸을 위해서 기도 한 적이 없어요? 부모가 돼서 늘 기도 하죠? 그런데 기도 덕분에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사모님 기도 덕분입니까? 주님의 기도 덕분입니까? 주님 기도 덕분이죠. 주님 기도덕분인데 사모님은 왜 기도 합니까? 사모님이 기도 하는 것은 주님이 기도 하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사모님이 기도 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그 말씀에 반응을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반응이냐 하면 이 말씀을 누가 지킨다고? 내가 지켜야지! 라는 반응을 필수적으로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주의 말씀에 대해서 어떤 성과를 남기려고 하는 그런 의도 우리는 숨길 수가 없어요. 주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말씀 주셨죠? 제가 지키겠나이다. 다른 사람은 안 지켜도 제가 지키겠나이다! 제가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제가 미국뉴욕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사마리아 여인 가지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 사마리아 설교 내용 가운데 왜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빼돌리고 단독으로 사마리야 여인을 만났느냐? 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선입견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주게 되면 왔다! 하나님의 계시! 해서 주의 계시를 드디어 우리가 지킬만해서 주셨다 하는 그 지키는 실천하는 솜씨를 보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은 충동을 반응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원받는 것은 자기들은 구원받는 것은 자기 힘으로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왜냐 하면 당나귀가 말한 것, 홍해 갈라진 것, 여리고 성 무너진 것, 천지창조,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힘으로 안 되죠.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애굽에서 나오는 것은 절대로 우리의 능력이 아니고 주의 은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주어진 십계명 있잖아요. 그 십계명은 일단은 구원받은 사람 같으면 이제는 구원받은 티를 낼 수 있는 방법이 십계명을 준수함으로서 너는 합격이고 준수 못하면 너는 불합격이라는 식으로 그 사람들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인 거예요.
왜 문자적이냐 하면 십계명이나 신명기를 보면 이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을 받고 못 지키는 사람은 저주 받는다고 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처음부터 너는 못 지켜! 너는 저주 받아야 돼! 이렇게 나오신 게 아니고 지키면 복을 받고 라고 이미 지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미 말씀 안에 새겨 담아서 자기들에게 줘 버렸다 말이죠. 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그 가능성을 비친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는 옮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뜻으로 그들은 받아들인 겁니다. 그런 순간 그들은 무엇을 놓쳐버렸느냐 하면 그들은 중보자, 하나님 이름이 그들과 동행한다는 사실을 깜박 놓쳐버린거예요.
사람이 말씀을 지켰다고 착각하는 순간부터 중보자가 빠져버리면 그것을 가지고 이방민족이라고 합니다. 중보자가 빠져버리면 필히 인간은 우상숭배 하도록 되어 있어요. 중보자가 빠져 버리면 필히 살인하게 되고 있고 필히 간음하게 되어 있고 필히 탐내게 되고 있고 필히 부모공경 안하게 되어 있고 필요 거짓 증거하게 되어 있고 필히 도둑질 하게 되어 있어요. 중보자를 거치지 아니하면 그렇습니다.
옆에 어떤 집사님이 앉아있다면 그 사람의 머리 모양이 잘 나왔고 자기는 머리 모양이 못나왔을때 비교가 되잖아요. 비교되면서 무엇을 생각합니까? 예배 시간에 낮에 예배 끝나고 물어봐야지 집사님 어느 미장원에서 그렇게 머리했습니까? 물어보는 거예요. 뭘 거치지 않았죠? 중보자를 거치지 않았죠. 중보자를 거치지 않으면 반드시 탐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 말이죠. 그들 유대인들은 십계명을 자기를 보고 준 것이 아니고 그들과 함께 있는 중보자를 보고 줬다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알지를 못했어요.
제가 아까 강의 초반에 이 말씀은 중보자로부터 줬다 했을 때 여러분들은 그것을 내가 그런 이야기할 줄 알았어! 이렇게 생각했습니까? 헐! 무엇이? 그런 이야기가? 이런 생각이 든다 이 말이죠. 중보자와 함께 있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성령이 함께 있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중보자가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게 되면 모든 말씀은 우리보고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중보자보고 지키라고 준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을 보세요. 그리고 지키지 마세요.
만약에 중보자가 없다면 제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뭐라 하겠습니까? ‘그거 참 잘 됐다! 이제는 이근호 목사님 말씀 듣고 나는 절대로 안 지킨다.’ 이것은 안에 누가 없다는 뜻입니까? 자기 안에 자기 밖에 없다는 뜻이에요. 자기 안에 중보자가 없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왜 중보자가 지키지? 나도 같이 지키란다, 왜? 주님은 하나님이니까 잘 지키는 거고 나도 못지않게 지켜 볼란다! 그러면 그 사람은 중보자가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이 말씀을 준 것은 예수님과 우리를 경쟁시키는 겁니다. 경쟁시키면 뭐가 남지요? 차이가 나지요. 그 차이 남을 통해서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밑에서 위로 숨어 있는 십자가가 다시 평면으로 드러나는 하나의 방편으로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이게 제가 빈말이 아니에요. 구약 이스라엘이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십계명을 주고 율법을 줬을 때 그들은 나름대로 지킨다고 하면서 무슨 생각이 날려버렸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존재가치의 의미를 날려버린겁니다. 가장 쉬운 예가 민수기 10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35절에 보면 민 10:35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민 10:36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언약궤를 만들었을 때에 이 언약궤의 그 효과와 의미라는 것은 언약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동행하고 있는 여호와의 이름이 어떻게 활동하고 움직이냐를 언약궤 활동의 움직임으로서 표현될 수가 있는 겁니다. 모세가 놋뱀을 들었죠. 모세가 놋뱀을 든 것은 장차 예수님이 이 지상에서 하늘로 죽었다고 부활한 것에 표상으로서 미리 모세에게 그런 일이 있었죠. 그러면 모세가 든 놋뱀은 결국은 모세와 함께 동행하고 있는 그때 그 당시 중보자, 하나님의 이름의 활동상을 놋뱀이 들은 곳으로 그 시대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이렇게 보시면 옳은 해석이 되는 겁니다.
구약에는 중보자가 없다고요? 아니 있어요. 누구입니까? 여호와의 이름이에요. 주의 이름이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주의 이름이 어떤 활동을 하느냐를 보여 주기 위한 하나의 활동상을 보여 주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면 오늘 안양 강의에서 언급을 했습니다만 십계명을 어디에 세기죠? 1번 플라스틱에 세겼다. 2번, 종이에 그렸다. 3번 돌판에 세겼다. 몇 번입니까? 십계명은 어디에 세깁니까? 돌판에 세기죠. 그러면 돌판은 자기 몸에 세겨진 십계명에 대해서 주도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혀 없지요. 돌판은 그냥 돌이고 거기다가 세기신분은 누구십니까? 돌은 물체이고 세기신분은 인격적인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돌 판을 세웠잖아요. 그러면 그 돌판이 말씀을 소유한 겁니까? 소유한 것이 아닙니까? 절대로 소유한 게 아니죠. 오히려 누가 소유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 돌 판에 글을 세기신 하나님이 소유권이 있죠. 돌판을 주셨다는 말은 예레미야 31장에 보면 이제 돌판에 세긴 말씀이 누구를 돌판으로 사용하느냐 하면 장차 오실 하나님의 백성들, 구원받은 사람을 돌판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마음의 돌판을 사용하는 거예요. 거기다가 주께서 친히 성령으로 오늘 본문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세겨 버리면 이 말씀의 실천력과 주도권은 우리한테 있습니까? 주님한테 있습니까? 주님한테 있는 거예요.
너희가 연수함을 업신여기지 말라 하는, 나이 적음을 업신여기지 말라 하는 이 말씀은 우리가 실천한다는 말이 아니고 기어이 내가 너로 하여금 연수함이 없게 만들겠다는 그런 뜻이에요. 왜?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기 때문에요? 주도권이 주님한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씀을 보세요! 지키지는 마시라는 이 말입니다. 말씀을 보시고 지키지 않을 때 우리가 손을 뗄 때 비로소 우리의 나의 나됨은 누구의 작품이냐 하면 내가 나한테 손댄 작품이 아니고 온전히 100% 주님의 작품입니다.
우리가 아시다시피 십자가 피로 100% 구원받는다는 그 사실에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가 거기에 개입되는 것을 원했을까? 원하지 않았을까요? 절대로 원하지 않죠. 절대로 원하지 않습니다. 김명현 목사님 따님이 결혼한다고 하는데 주례가 없다고 하니까 제가 주례를 미리 당겨서 해 드릴게요.
노아 홍수때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갔습니다. 왜 시집가면서 왜 장가가면서 왜 방주에는 안 들어갔습니까? 안 들어간 이유가 뭡니까? 내 인생은 누가 관리하기 때문에? 누가 관리한다? 내 인생은 나 말고 관리할 자가 있다? 없다? 없다는 그것이 아담의 타고난 죄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따 먹으면 너는 신처럼 되리라는 그러한 마귀가 단지 말로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이게 구체적으로 우리 인간이 죄진, 죄의 왕노릇하고 있는 지배받는 식으로 이미 이 지상은 구체화되고 말았습니다.
그 구체화되는 사실중의 하나가 에베소서 2장에 나오는데 ‘엡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고 자진해서 손들고 나오는 세상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세상 사람은 뭐라 합니까? 너는 누구의 권세에 있었지? 하면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나요? 내 인생 내가 관리했습니다. 누가 감히 나를 다스립니까? 저 마귀 몰라요. 저, 주님 모릅니다. 지금까지 내가 아는 것은 어릴 때는 부모가 관리했지만 지금은 컸으니까 내 인생 내가 관리합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그 때는 공중권세 잡은 자를 이미 따랐다고 하죠. 그런데 본인은 뭡니까? 나는 누구를 따른 적이 없고, 나는 아무도 따른 적이 없고 나는 내 인생을 내가 친히 꾸려 나갔다고 주장하죠. 둘중에 누구의 말이 맞습니까? 불순종의 아들 가운데서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는 주의 말씀이 맞아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스스로 노동해서 지금껏 내가 이렇게 살아간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물론 성경 말씀이 맞죠. 그런데 왜 인간들은 어떤 권세를 따랐다는 그런 체험을 왜 못하고 있죠?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경말씀이 진실이라면 우리가 그 진실을 알아야 할 텐데 우리는 모르고 있죠.
다시 말해서 주의 말씀이 아무리 있어도 우리는 이미 내 현실이 따로 있기 때문에 주의 말씀이 눈이 가려져 보지를 못하는 거예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는 가운데 거기에 인간에 뭐가 끼어들 자리가 없어요? 노아 방주가 끼어들 자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끼어들지를 못해요. 왜? 끼어들려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그 모든 것과 방주 만들기가 이렇게 하나로 끼어들 성질의 것이 아니에요.
따라서 간단히 이야기해서 주께서 주시는 이 모든 말씀은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내가 내 인생 살아가는 것과는 전혀 동화될 수 없고 소통이 안 되는 그런 식으로 말씀을 준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이 성경말씀을 지키려고 덤벼들더라 말이죠.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소리에요. 아이고, 목사님 불신자는 그렇지만 신자 같으면 말씀을 지켜야죠.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신자나 불신자나 우리가 못 지킵니다. 왜? 우리가 익히 아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여기에 너무나도 잘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잘한다는 말은 주의 말씀은 못한다는 말이에요. 까짓것 장가도 가는데 주의 말씀을 못 지켜? 못지켜요.
주여, 저 장가가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이것은 나는 하나도 못하겠습니다. 하는 사람만 주의 말씀을 지킬 수 있습니다. 왜? 남들이 다 하는 것을 못한다는 말은 남들과 다른 안목과 다른 시선가지고 결혼을 보고 시집 장가를 보고도 사고팔고를 보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장사해서 사고파는 것이 내 힘으로 할 것같으면 우리는 주의 방주,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장사하면서 사모님이 장사하지만 장사하면서 이것은 내 힘이 아니고 주께서 손님을 몰아줘야 온다는 그 사실, 안목을 가지고 있다면 장사하는 것도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시는 힘으로 한다는 것을 믿는다면 주의 말씀대로 주께서 주시는 힘으로 하고 방주에 들어가는 것도 주께서 은혜 주셔야 한다는 것 그것을 창세기에서 노아는 은혜로 둘둘 감았더라! 이겁니다.
노아는 세상의 모든 사람과 차이점이 뭐냐, 노아가 똑똑하다가 아니라 주의 은혜로 둘둘 감겨 있어요. 그러니까 방주를 만들고 거기에 들어갈 수도 있고 그리고 그것을 타고 홍수 속에서 살아남을 수도 있었던 겁니다. 방주에서 나오고 난 뒤에 ‘내가 똑똑하긴 똑똑했지’, 이렇게 하지 않고 주의 은혜였습니다. 할 때에 히브리서 11장에 노아는 믿음의 반열에 포함이 되어 있는 겁니다. 에녹처럼 노아처럼, 노아가 믿음으로 뭘 만들고? 노아가 믿음으로 방주를 만들고 노아가 믿음으로 방주를 만들었다 하는 것은 믿음은 자기 아이디어가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인생이 이 자리에 오는 것과 강의 하는 모든 것이 우리 힘이 아니고 주의 힘인 것을 아신다면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단언합시다. 주의 말씀을 우리는 못 지킵니다. 지키지 마세요! 오늘의 복음입니다. 지키지 마세요. 이것은 중보자가 지킬 말씀이에요. 왜? 우리는 중보자를 늘 의지 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말씀 지키느냐고 얼마나 애썼습니까? 보니까 애쓴 얼굴도 아니고 뭐 막살라하니까 막산 얼굴인데…….
막 살라는 말이 어떤 분이 제가 가락교회에서 막살라고 할 때 대번 질문이 들어왔어요. 목사님, 그 막산다는 것을 저는 알겠는데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오해 할 소지가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솔직하게 질문을 해 줘서 얼마나 감사한지 다른 사람들은 뒤에서 욕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렇게 현장에서 이야기를 해 주니까 얼마나 감사한지요. 주의 말씀이 그래요. 주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알아들으라고 주신말씀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에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오해를 하고 있어요. 주께서는 사랑이 많아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 그런 주님은 없습니다. 주님은 자기의 일을 했지 우리 살리는 일을 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아들하고 일했지 우리하고 일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주님이 아버지와 맺어져 일한 부대효과죠. 열차가 슁 지나가니까 갑자기 치마가 흔들리는 것, 이게 부대효과에요. 뭔가 수반된 효과로서 구원받는 겁니다. 이게 뭐지? 누가 지나갔지? 누가 오셨지? 누가 오기는요? 성령이 왔지요. 어떻게? 바람 같이 왔다가 우리를 납치하고 갔죠. 그때부터 우리 속에는 바람이 들었다, 성령이 들은 거예요.
우리는 바람 난 여자, 바람 난 남자, 우리는 바람 난 존재에요. 성령이 오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인생을 내 마음대로 못 살아요. 바람이 주도적으로 바람이 부는 데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부는 대로 가더니만 우리가 느끼는 것은 세상만사는 내 뜻대로 또는 내 힘으로 내가 관리해서 될 인생이 아닙니다. 내가 내 인생 관리하게 되면 우리는 넓은 길 밖에 안가요. 절대로 좁은 길을 못갑니다. 우리는 안갈 거예요. 하지만 좁은 길로 안 간다면 그것은 영생에 이르지 못하는 겁니다. 좁은 길로 간다는 것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의 뜻대로 했기 때문에 우리는 좁은 길을 통과해서 영생에 이를 수 있는 겁니다.
좁은 길이 고생하고 그런 길 아니에요. 좁은 길이 뭐냐 하면 왜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 되는 거예요. 그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내 뜻대로 하게 되면 우리는 지옥 갑니다. 왜? 타고 난 것이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용익 목사님 말씀처럼 우리의 최고의 필살기는 죄짓는 겁니다.
제가 뉴저지에서 수요일에 설교를 하면서 예를 들었는데 망사스타킹 예를 들었는데 다 끝나고 그 다음 목요일에 어제 기억에 남는 주제가 뭡니까? 하고 무심코 물었는데 전부 다 웃으면서 망사 스타킹입니다. 하는 거예요. 그것을 왜 기억하지? 했는데 사실은 제일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망사스타킹이 신지 않으면 조밀하죠. 그런데 신게 되면 엉키 성키 늘어져서 찌져지듯이 그냥 다리만 훤하게 보이잖아요. 그처럼 우리라는 주체에 주님이 와 버리면 우리는 찢어지고 주님만 훤하게 보여진다는 식으로 그런 예를 든 겁니다.
주님이 일을 하는데 있어서 시작도 주님이고 마무리도 주님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원칙인데 다른 말로 어려운 말로 본래성, 오리지널,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원칙이 오리지널이에요. 그런데 구약사람들은 아담이 죄가 있기 때문에 말씀에 대해서 자기가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가 지키려고 하니까 율법을 보면서 무엇이 자극을 받느냐 하면 자기 속에 이미 내장되어 있는 불순종의 역사들에 있는 그 악마성이 자극을 받아요. 자극을 받아서 먹든지 마시던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하는 이 모든 일을 그동안 내가 한 식대로 내가 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기에다가 십계명 주어지니까 제사법 주어지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것을 누가 해요? 평소에 내가 생활이 먹고 마시고 내가 알아서 했거든요. 기껏 할 줄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 자기가 하는 거예요. 이번 달 결혼은 누가 하게 했습니까?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이러면 주께서 영광이 되겠죠. 이것은 내가 알아서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네가 알아서 계획하게 하신분이 누구냐? 하고 물으면 그것은 아는 바 없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뭐가 빠져있죠? 중보자가 빠져있죠.
그러면 우리가 알다시피 이 세상 모든 것이 주님을 위해서 만들어졌죠? 그러면 주님이 빠져 버리면 그 사람은 현실적 입니까? 망상 가입니까? 망상가죠. 현실을 전혀 감을 못 잡으니까 자기 상상만 생각한 거예요. 사람들은 자기 상상만 생각하면서 살아가면서 뭐라 하느냐 하면 참, 현실주의라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실은 망상가인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그저 코앞에 있는 자기 밖에 모르면서 자기는 가장 누구보다도 진실, 사실 그대로 보는 대로 믿고 산다는 거예요.
그러나 노아의 방주는 절대로 보는 대로 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그 히브리서 11장에 있는 반열의 노아는 자기도 놀랄 일을 한 거예요. 자기도 깜짝 놀랄 일을 한 겁니다. 주여! 방주 만드는 것이 내 뜻이 아닙니다. 네 뜻이 아니지 그래, 내 뜻이지, 너는 그냥 돌판이야 방주 만들기를 두두둑 재봉틀로 박았어! 우리는 하나의 천이고 주께서 배봉틀로 평화시장 봉재공장 하루 18시간 박는다는 시장 한번 가 보세요. 얼마나 손 발 놀림이 빠른지 서울 천개천 옆에 광장시장 가보면 이불 파는데 있는데 지나가면서 봤어요. 도사에요. 이불을 만드는데 도사에요. 두둑둑 두둑둑 박자 맞춰가면서 만들어요.
주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돌판으로 우리에게 새깁니다. 그 말씀이 예수님의 중보자의 말씀이에요. 구약에서는 말씀이 막혔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죄속에다가 주의 피로 주의 말씀으로 새기니까 죄는 죄대로 드러나고 그 죄를 용서하신 말씀의 완성은 같이 드러나고 따라서 주께서 피를 흘리신 것은 이제부터 피가 어떤 말씀에 준해서 피를 흘려야 되는지 이유를 알려줄게, 세상 사람들이 너희 연수함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씀을 디모데가 지킵니까? 못지킵니까? 디모데가 못지키죠. 그런데 디모데는 못지키면서도 그 말씀을 지킨 사람으로 되게 하신분이 누구십니까?
그 분이 바로 디모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중보자의 영, 주의 성령입니다. 그것을 디모데전서 4장 14절에 이렇게 합니다. ‘딤전 4: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디모데 외적인 요소가 삽입되어 있죠. 그게 뭡니까? 장로회에서 안수 받을 때 받았던 예언으로 말미암아 예언된 그 무엇, 그게 뭐에요? 은사, 성령의 은사에요. 주도권을 누가 갖고 있습니까? 성령의 은사가 갖고 있습니까? 디모데가 갖고 있습니까? 성령의 은사가 갖고 있습니다. 어떻게? 디모데야, 우리 경쟁하자! 네가 이 말씀을 지킬 수 있는지? 만약에 디모데가 이 말씀을 지킬 수 있다면 디모데한테는 디모데전서 4장 11절에서 16절이 더 이상 그 이후에는 그 사람에게 필요치 않습니다.
왜? 자기가 다 지켰는데요 뭐, 사람이 초등학교 2학년 되면 1학년 책을 유지합니까? 아니면 버립니까? 2학년 됐으면 1학년 책을 버려야죠. 성경책을 지켜버리면 우리는 나중에 성경대로 지켰다는 사람들 성경책이 이렇게 두꺼우면 안돼요. 나중에는 얇아야 돼요. 왜? 나머지는 다 지켰으니까요. 다 지켰는데 자기는 이제 3학년인데 1학년 초보 책을 뭐합니까? 찢어서 책거리하고 다 보내버리고 이제는 자기가 아직도 못 지키는 거 있잖아요.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사랑하지 마라는 그렇게 못 지키는 것 몇 개만 남겨두고 요한계시록 몇 개 남겨두고 얇아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죽을 때까지 성경책이 두껍죠. 이 성경책이 두꺼운 것은 이 두꺼운 책이 성령을 통해서 한꺼번에 우리 마음 안에 동일하게 장렬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용광로처럼 뿜어내고 있어요. 어떤 때는 요한계시록이 12장이 뿜어져 나오고 어떤 사태가 일어나면 요한복음 1장이 뿜어져 나오고 어떤 경우에는 예레미야 3장이 뿜어져 나오죠. 예를 들어 요한복음 1장이 뿜어져 나올 경우가 어떤 경우 입니까? 자기가 전도했는데 안 먹힐 때 요한복음 1장이 뿜어져 나오죠. 빛이 왔으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아하, 이 타이밍이 그 타이밍이구나! 나는 그냥 세상은 어두움이고 나는 빛이라는 것을 그냥 지식으로 알고 있었는데 막상 아는 친구가 있어서 간만에 밥까지 사주면서 은근히 노려서 복음을 전했더니만 전하자마자 대번에 튕겨 나와 버려요. 튕기는 방법이 뭔지 알아요? 나는 절에 간다. 이렇게 튕기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교회에 관심 없다. 이렇게 튕기는게 아닙니다.
나도 복음 알거든! 이게 튕기는 방법입니다. 나도 복음 알거든! 그 복음이 그 복음이 아닌데 그래, 나는 죄인이야! 이래야 되는데 나도 복음 알거든! 이게 뭐에요? 복음을 Have, 소유, 복음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복음은 가지는 게 아닙니다. 복음 안에서 굴복당해야 되지 복음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에요. 우리는 가질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아까 이야기한 것을 계속해 봅시다. 멀리 있는 자식을 위해서 기도 했다. 이제는 바뀌어야 되죠. 내가 멀리에 있는 자식을 위해서 매일같이 지금도 기도 하고 있는데 그 기도 덕분에 내 딸이 이렇게 잘 있다는 착각, 그 착각하라고 우리는 오늘도 멀리 있는 딸을 위해서 기도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제2, 제3의 디모데에요. 우리 속에 있는 은사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속내를 다 밝혀내면서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해 봐라! 안 해 보고 주께서 하신다고 하지 말고 해 보고 진짜로 경험해 보고 과연 이 세상이 어두움이며 사람들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실을 성경대로 되고 있음을 우리는 감사하고 기뻐해야 됩니다.
우리는 내 뜻대로 돼야 하나님의 뜻이 발휘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그것이 주의 뜻대로 된 거예요. 내 뜻대로 된다면 우리는 마치 자신이 뭔가 의미 있는 것처럼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안 되는 그것이 바로 주의 뜻대로 잘 되고 있는 유일한 증거예요. 세상은 내 뜻대로 안되고 주님 뜻대로 되는데 그 뜻이라는 것이 주의 말씀대로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 뜻대로 되면 뭐가 가려집니까? 주의 말씀을 우리가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내 뜻대로 안되기 때문에 세상은 주의 뜻대로 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세상은 어두움이다. 세상이 어두움이라는 것을 우리가 언제 압니까? 사기 당했을 때요. 그리고 내가 분명히 실력이 있어서 취직이 돼야 되는데 빽이 있는 낙하산, 하필 내 자리에서 끊어서 나는 1년 동안 시험 준비한 것이 허사가 되고 엉뚱한 다른 사람이 내 자리 차지해서 취직될 때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때 항의 합니다. 주여, 어찌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라고 한다면 주님께서는 히브리서 11장 말씀을 드리데 십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였다, 보세요. 주의 말씀대로 됐잖아요. 네가 이 땅에서 성공할 생각하지 마라! 이 땅에서 성도는 성공할 그런 배경이 안 된다. 너는 나그네다, 떠나라, 그리고 네 소망은 보이지 않는 소망, 그 나라 의를 사모하라! 그것은 마태복음 6장, 로마서 8장 막나오네요. 어떤 경우에? 우리가 내 뜻대로 안될 경우에요 그동안 잠자고 있던 말씀들이 이제는 새롭게 살아나서 우리에게 새로운 체험들을 한껏 안겨줍니다.
그렇게 될 때 ‘맞습니다. 모든 것이 주의 뜻대로 된 것이 맞군요!’ 동의하면서 감사하는데 우리는 3초갑니다. 다시 3초 지나고 난 뒤에 ‘그래도 되게 해 주면 얼마나 좋겠나!’ 되게 해서 뭐 할 건데요? 오래 살고 싶은데, 그래서 또 빌립보서 1장 튀어나옵니다. 나의 소원은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또 그 말이 튀어나오죠. ‘집주인한테 사기 당했어요. 갈 때가 없어요.’ 그때 마태복음 9장 말씀이 생각납니다. ‘인자는 머리둘곳이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딸이 애를 낳았는데 산후조리원이 차서 갈 때가 없어요. 그때 뭐를 생각합니까? 누가복음 2장에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났다, 세상은 이미 말씀대로 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워낙 우리가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한다고 우기는 것 때문에 그 주께서 주신 감사의 말씀을 깡그리 무시하고 차버리면서 우리는 주의 뜻이 안 된다고 얼마나 항의 하면서 대들면서 살아왔습니까? 주님께서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만이 주님이 주신 말씀대로 됨을 깨닫게 하는 식으로 그들에게만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안 되는 특별 축복을 해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특급 칭찬입니다. 어떻게 네 뜻대로 안되지 속상하지? 특급 칭찬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고 실패해도 성공이에요. 그게 주 안에 있는 특혜입니다. 실패를 해도 그 실패 자체가 성공했다는 사실, 왜냐? 우리 성공이 아니고 주의 말씀대로 성공했다. 여러분, 중보자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혼자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있는 나의 그림자가 나의 그림자가 아니고 함께 있는 분, 주님의 그림자를 우리는 매일같이 비추고 있습니다. 내자리가 내가 자리가 아니고 주님의 자리인 것을 우리는 늘 자꾸 잊어버려요. 노아의 방주 때,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할 때 갑자기 홍수가 들이닥친 것처럼 결혼은 하되 주를 잊지 않는 주께서 시킨 결혼식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울 의존교회141017b (말씀경쟁)―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아까 오리지널이요, 원칙은 확정된 거죠. 확정됐는데 인간에게 주어질 때에 인간은 가기 자신이 나름대로 갖추어 졌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핀트가 안 맞죠. 인간이 생각했던 것은 이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 인간이 생각한 것은 자기가 따로 나는 나라고 확정을 지게 되면, 복습을 해 봅시다. 나는 나라고 할 때 뭐가 빠졌어요? 답변하기 곤란하죠. 나는 나라고 할 때 뭐가 빠졌다고 했습니까? 중보자, 중보자가 빠진 거예요.
중보자가 빠지니까 나는 나라고 할 때 나는 막살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막 안 살았는데 주님께서 피 흘리셨습니까? 막 살기 때문에 피 흘리셨잖아요. 그러면 피라는 것을 경유를 하게 되면 우리는 막 살게 돼요? 막 안 살게 돼요? 본격적으로 막 산 존재임을 확인하게 되죠. 그럴 때 우리는 유동적인에서 고정적인 존재가 되게 됩니다. 어떻게? 막 살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고정됩니다. 누가 고정되기 때문에? 중보자가 고정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중보자를 고정해 버리면 우리는 막살아서 막사는 것이 아니고 애초부터 주님보시기에 무엇을 해도 막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최종 확정된 가운데 중보자를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 만남이 우리의 구원이 되는 거죠.
cf에 이런 것이 있어요. 밀레의 이삭줍기, 그 명화에 보면 이삭줍기에 아줌마가 세 명이 나와요. 저기서 종소리가 땡하고 어떤 아줌마는 서 있고 뒤에 두 명의 아줌마는 이삭을 줍는 그런 모습이 있어요. 밀레의 이삭줍기 알죠? 넓은 프랑스 초원에서 농사짓는 고된 하루를 마치면서 아이고 허리야 하면서 이삭 줍는 것이 있는데 명화를 관람하는 어떤 아가씨가 아줌마 옷을 갈아입고 거기에 뛰어들면 세 명의 아줌마가 몇 명됩니까? 4명되죠. 상당히 재미있는 현상 아닙니까? 그림 밖에 있는 그림 관람자가 옷 갈아입고 뛰어 드니까 갑자기 그림속의 세 명이 있어야 될 그림이 4명이 된다는 물론 이것은 cf의 장난입니다. 하지만 상당히 신기한 일이죠. 그 신기한 일이 일어난 거예요.
우리는 이 땅에서 ‘나는 나다’ 인생은 내가 관리한다고 했는데 성령의 은사를 받고 난 뒤에 우리는 어디에 쑥 들어갔습니까? 예수님의 세계 속에 예수 안에 쑥 들어갔지요. 거기에 들어가니까 우리는 졸지에 예수님 안이라는 그림 속에 우리는 뭐가 됩니까?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서 구원시킨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이 하나의 죄인을 불러서 구원하는 주님이 오셨다는 것이 하나의 밀레의 그림이라면 그것을 관람하는 그림밖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그림 안에 속하지는 못하고 밖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보면서 뭐하라고 하겠습니까? 그래, 나는 죄인이야, 내가 이런 이런 죄를 졌기 때문에 죄인이야! 라고 할 때 그러면 그것은 100% 죄인입니까? 아니면 한 20% 죄인입니까? 자기가 기억하는 죄만 죄인이라 했기 때문에 나머지 80%는 죄인입니까? 죄인 아닙니까? 80%는 죄인이 아니죠. 그러면 80빼기 20같으면 60% 여분의 착함이 있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은 죄인이에요? 착한 사람이에요?
결국은 선악과 논리에 의해서 그 사람은 착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왜냐, 죄인을 부르러왔는데 바리새인들은 아무리 봐도 이레의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기도 했는데 도대체 자기가 자기 죄를 발굴해도 발굴할게 없어요. 왜? 완벽하니까……. 사울이라는 사람은 자기는 뭐라 했습니까? 나는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이라 했죠. 그 말은 의인중의 의인이었죠. 율법의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졸지에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그림 속에 뛰어드니까 졸지에 나는 죄인 중에 괴수가 된 거죠. 세상에 이런 일이에요.
이게 바로 은사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뭐 재산 5조, 10조, 15조, 이건희? 지금 눈만 껌벅거리고 있어요. 그리고 죽으면 지옥가고요. 그게 인생 성공한 겁니까? 우리는 그 삼성그룹, 그것을 성공의 모델로 삼아서 그것을 달라고 하지요. 오늘 본문을 보세요. 12절에 보면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믿는 자에게 뭐가 되고? 본이 되지요. 그런데 삼성그룹의 이건희는 무슨 본이에요? 믿지 않는 자의 본이 됐죠. 그러면 믿는 자는 어느 쪽으로 갑니까? 삼성그룹 쪽으로 가야 돼요? 안 그러면 디모데가 있는 쪽으로 가야 돼요? 디모데가 있는 쪽으로 가야지요. 그런데 디모데 있는 쪽은 디모데가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디모데는 죄인중의 괴수라, 그러면 우리도 뭐하면 됩니까? 죄인중의 괴수로 살면 되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복음이 어디 있습니까?
죄를 더 지어야 돼요. 아직 죄 지은 것 가지고 멀었어요. 죽을 때 까지 죄를 지어야 돼요. 전도하는 죄, 헌금하는 죄, 성경 공부하는 죄, 강의 하는 죄, 애들 잘 키운 죄, 시집보내는 죄, 자식을 위해서 기도 한 죄, 아까 이야기했죠. 자식을 위해서 기도 하면서 나는 내 기도 덕분에 내 자식이 잘 됐다는 의식이 물컹물컹 올라오는 그것이 주의 기도로 살아간다는 이 사실과는 이 중보자의 업적과는 서로 충돌되고 배치된다는 그 차이가 바로 우리가 주께서 드러내고자 하는 죄, 그게 바로 주님의 축복이죠. 내가 죄인 되게 하는 그것이 바로 그 축복입니다. 해봐라 그리고 죄인 돼라! 하지만 이미 그 죄는 용서받은 자에게만 제공해 준 특급 칭찬, 특별 축복이에요.
그래야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감사하게 되죠. 내가 찬거리 샀다, 이것도 주의 십자가 은혜로 주신 거고 하늘에서 비가 왔다, 그 물방울 하나하나 한 방울이 주의 십자가의 은혜로 온 겁니다. 제가 안양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지옥에 가면 물 한 방울이 얼마인줄 알아요? 돈 주고 사도 물 한 방울 없어요. 얼마나 없었으면 손가락에 물방울 떨어뜨려 달라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지옥 가기 전에 세상에서는 흔한 것이 물이잖아요. 그 물을 누가 줬습니까? 주님이 십자가 희생으로 주신 물이에요.
그 물을 보면서 십자가를 생각하지 못 했습니다. 지옥가면 달이 있습니까? 달이 없습니다. 지옥가면서 해 없어요. 지옥가면 별 없습니다. 그런데 시편 136편에 보면 뭐라 되어 있습니까? 달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달 속에 들어 있다는 겁니다. 달이 있는 게 우리는 그냥 있는 줄 알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목표로 달이 있는 거예요. 세상의 천하 모든 만물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 있는 달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달보고 떴냐? 이렇게 돼 버려요. 별을 보고 거기 있구나! 이렇게 생각했지 거기서 인자하심을 뽑아낼 수가 없습니다. 왜? 우리의 인자하심은 내가 만든다고, 내가 만들어야 된다는 이 죄 때문에 나한테 잘 해주는 것만 인자라고 하는 그 고집, 그러다가 우리는 주님을 경유하게 되면 모든 게 인자고 모든 게 감사고 은혜인데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을 줘야 이게 은혜이고 감사라고 고집부리는 고집성 때문에 우리는 달을 봐도 인자를 뽑아내지 못하고 별을 보고도 인자를 뽑아내지를 못해요.
제가 미국 강의하면서 저한테 불렸던 노래가 노사연의 님 그림자에요. “저만치 앞서가는” 달은 떴는데 님은 앞에 가고 님 그림자 있는데 자기가 사는 재미는 바로 님그림자를 밟아가는 그 재미가 있는데 지금은 그 님이 없다는 거예요. 그 님이 없으니까 다시 그 님이 보고 싶다는 그런 내용의 가사가 님 그림자입니다. 요새 부쩍 대중가요가 입에서 많이 나와요. 뉴저지 예배시간에도 대중가요가 인용됐죠. 우리는 나가 아니고 주님의 우리 가운데 하나 있다고 하면서 했던 말이 같은 하늘 어느 곳에서도 우린 서로 잊지 하세요 하는 백지영의 잊지 말아요. 하는 노래,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어도 나를 잊지 마세요. 우리는 같은 하늘에 있는 거예요. 이미 하나의 교회입니다. 잊지 마세요.
주님의 원칙은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관리한다고 하기 때문에 이게 항상 변화되죠. 새로운 요소가 있으면 탐내고 싶고 새로운 요소가 있으면 저거 때문에 욕심내고 더러운 요소가 오게 되면 나는 인간도 아니야 하고 자살하려고 하고 좌절했다가 까불었다가 거들먹거렸다가 또는 낙담하다가 도저히 내가 좀 잡을 수가 없네요. 이 좀 잡을 수 없는 우리에게 원칙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사가 와 버리면 우리는 유동적인 것이 뭐로 바뀝니까? 고정적이 됩니다. 그 고정적인 것이 바로 이건희 회장의 고정적 보다 더 위대한 본,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은 이와 같은 그 본을 주께서 디모데로 하여금 그렇게 만들어 내고야 말겠다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이에요.
이것은 디모데에게만 국한 된 일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 국한 됩니다. 모든 세상 것이 내 뜻대로 안될 때 비로소 내 뜻대로 안 되는 그것이 바로 내 뜻과 상관없이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하나의 증인으로서 우리를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순간 우리는 드러나는 겁니다. 내 뜻대로 안 돼도 주의 뜻대로 구원됐잖아라는 자랑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 행함으로 구원되지 못했지만 주님의 행함으로 구원되는 게 맞잖아 라고 자랑해 주시기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나는 나다가 아니고 세상 사람들이고 나는 주님에 의해서 나는 주님 다른 나가 돼야 되요. 지금의 나는 주님에 의해서 깨어지고 주님께서 따로 고정적으로 마련한 생명책에 있는 그 나를, 우리의 나로 새롭게 바꿔 치기 해 준 겁니다.
야곱이 남한테 지기 싫어해요. 그런데 우리가 로마서 9장에 보면 야곱은 야곱이 있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누구를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야곱을 사랑했죠. 그것을 하나님이 따로 장만한 예수님 안에, 중보자 안에 있는 야곱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나타난 야곱은 천방지축 자기 밖에 몰라요. 그래서 야곱은 속여서라도 자기한테 유리한 것은 다 시도 합니다. 어느 날 밤에 드디어 야곱은 어떤 사내를 만났어요. 야곱은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열심을 다해 낯선 사내와 싸웁니다.
그럴 때 하나도은 야곱을 속입니다. 원래 야곱의 주 특기는 남을 잘 속이는 겁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야곱을 속여 버렸어요. 어이고 힘이 세내! 어이고 지겠네! 이러니까 야곱은 신이 났습니다. 그래, 이 참에 내 것을 굳건히 지키고 말리라! 해서 야곱은 그 사나이에 대해서 내 것을 탐내는 공격하는 자로 완전히 단정을 해서 더욱더 확신을 가지고 전력을 다하여 야곱이 자기 속에 들어있는 자기만을 지킨다는 내 것은 내가 지킨다는 속을 완전히 드러내는 그 순간 야곱의 환도 뼈를 쳐 버리죠. 그게 뭐냐 하면 야곱의 속내, 죄성이 완전히 드러난 그 순간이 바로 야곱이 진짜 야곱과 교체되는 순간인거예요.
야곱은 그 순간 죽었습니다.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 장소를 브니엘이라 내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장소가 브니엘이에요. 나는 하나님 만나서 죽었는데 나를 죽인 하나님께서 따로 준비된 야곱, 이스라엘을 현재 욕심 많은 나와 교체시켜 주면서 나에게 준비된 하나님의 영생을 주셨다는 이 방식이 앞으로 오는 모든 성도가 구원받는 방식입니다. 마음껏 막사세요. 그 막사는 그 경계선에서 막사세요. 그 경계선에서 십자가 피가 왜 약하게 피 흘렸느냐는 이유가 비로소 새록새록 내 뜻대로 느껴 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는 순간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는 내가 나를 살리는 그러한 속성이 자극을 받아요. 12절을 봅시다.
딤전 4: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믿는 자의 본, 그리고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해서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우리는 믿는 자 되기 위한 작전에 도립하게 되어 있어요. 먹던 술도 안 먹고 피던 담배도 끊어버리고 교회도 일찍 와서 봉사하고 믿는 자의 본이 된다고 헌금도 십일조하고 다 합니다.
그리고 나쁜데 나이트클럽 그런데 안갑니다. 왜냐 하면 믿는 자의 본이 되기 위해서 다합니다. 안할 수가 없어요. 주께서 그렇게 만드니까 실컷 해 놓고 결과는 이만큼 착한 일 했으면 이제 은근히 기대하는 주께서 내가 진짜 원하는 돈이나 어떤 권력이나 이런 것을 주셔야 되는데 실컷 믿는 자의 본을 다 했는데 주위로부터 핀잔 받고 오히려 집안에 우한이 생기고 믿음생활하고 잘 했는데 직장에서 추방돼서 쫓겨나고 실컷 공들여놨는데 아무 효과 없이 돈 들어갈 구석 생겼을 때에 그때 우리는 주여, 왜 이렇게 착한 저를 모질게 못되게 구십니까? 주께서 뭔가 일처리 잘못하신 게 아닙니까? 했을 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자기의 대속 물을 주신 주님의 사랑과 너무나 대조적인 나는 나 살리기 위해서 봉사하고 믿음의 본을 가졌다는 그 본색이 들통 나게 되면 비로소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나밖에 모르는 인간을 이미 우리를 구원했기에 십자가 증거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자기 밖에 모르는 자기 자존심만 챙기는 자기 가치만을 챙기는 짓거리를 하게 하셨군요! 그것 자체가 바로 축복이고 그 자체가 이 땅에서 우리가 성공한 겁니다. 그게 바로 믿음의 본이에요.
믿음의 본은 바로 회개입니다. 그렇다면 아까 질문한 것, 목사님 그렇게 막살라고 하면 남들이 오해하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에 이제 답변할 때가 됐죠. 막살라고 하면 딴 사람들이 오해합니다. 하는데 그 오해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내가 알아서 바르게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다 오해하라고 제가 막 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중보자 없이 중보자 빠지고 내가 알아서 이 말씀을 지키겠습니다. 하는 사람은 화나고 삐지라고 막 살라고 한 겁니다. 그런데 중보자가 있는 사람은 처음부터 우리가 막 살게 되어 있는 존재인 것을 막살라는 가운데서 우리는 평생을 확인하게 되죠.
막사는 삶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막살았는데 주님은 막 구원했죠. 막 사는 나와 막 구원하는 주님, 그 주님의 그러한 매치가 주님의 계획이었고 구원의 성사였습니다. 그게 바로 그렇게 막살면서 느껴지는 것을 가지고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의 정절에서 비로소 본이 되는 거예요. 내가 죄인으로 들어났을 때 비로소 말씀은 성취된 겁니다. 진짜 믿음은 내가 믿음 없음을 고백하는 그 순간이 진짜 믿음이에요.
진짜 사랑은 나는 전혀 누구를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이 폭로 될 때 진짜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게 어디로 온 사랑인지 내가 죄인이고 나는 어느 누구도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 때 그때 어떤 것이 나오느냐 하면 사랑은 온유하고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고, 남 투기할게 뭡니까? 자기가 못난 인간인데 뭘 남을 투기합니까? 사랑은 자랑하지 않고, 자랑할게 있어야 자랑하죠?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고, 교만할 게 있어야 교만하죠.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내가 나한테 무례한데 나같이 무례한 자가 없는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자기의 존재의 자체가 감사한데 무슨 거기에 이익을 챙깁니까? 성내지 아니하고, 아이고 주님한테 실컷 성냈는데 뭐 남한테 성을 안내요? 성내다가 혼났는데요. 그 다음에,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나 자체가 악한데 나보다 악한 게 어디 있는데 또 악한 것을 생각해요. 없지요. 그 다음에,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나 자체가 불의인데 내가 최고의 불의인데 더 이상의 불의가 어디 있습니까? 진리와 함께 기뻐 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을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믿는다는 말은 세상 되어진 것이 예수님의 뜻대로 된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주께서 계획한대로 이루어 질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며, 안 견디면 어떻게 할 건? 어차피 죽은 인간인데요. 사랑은 언제까지 떨어지지 아니하고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폐하고…….
그러니까 제가 고린도전서 13장을 쭉 이야기한 것이 14절에 보면 네가 장로회때 받은 그 은사 예언된 것, 고린도전서 13장에 예언된 그 사랑의 은사가 너한테 작렬한다는 사실을 늘 확인하라는 그런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