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14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7-스피노자
20141014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7-스피노자
이름 : 한윤범(IP:119.192.174.28)
20141014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7-스피노자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스피노자 할 때 이것만 기억하시면 딱 알 수 있어요. 세상의 모든 사유, 생각이라는 것이 혼자 생각한 것이 아니고 주변과 엮여진 생각인 것을 왜 모르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의 신체란 하늘에서 유성 떨어지듯이 뚝 떨어진 게 아니고 다 엮어져서 인간의 신체가 구성된다는 겁니다. 세상이란 서로 상호관계에 의해서 출현된 것이기 때문에 이걸 실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실체라는 것은 독립적일 때 실체인데 독립적인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연관돼있다면 칼로 여기서 여기까지 끊는다는 것이 부자연스럽다는 겁니다. 그럼 이건 하나에 양상이 되는 겁니다. 모양새가 되는 거죠.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이건 스피노자가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제가 알기 쉽게 하겠습니다. 문어가 있는데 문어 다리 하나만 건드렸을 뿐인데 문어가 감각을 느낍니까, 안 느낍니까? 감각을 느끼지요. 그럼 문어한테 “너는 가만있어. 나는 뾰족하게 튀어나온 네 다리를 건드렸지 넙적한 너를 건드리지 않았어.” 그러면 문어가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그 뾰족하게 튀어나온 것이 나의 양상이라고 이야기하겠지요. 문어다리가 실체 중에 하나가 된 거예요. 실체는 문어인데 문어의 양상이 문어다리가 되는 겁니다. 세상에 있는 코끼리, 코스모스, 인간, 해와 달 모든 것은 대자연이란 실체의 양상인 거예요.
여기 150페이지 읽어보겠습니다. [자연은 자기 경계 안에서 폐쇄된 죽은 수동적 기계가 아니라, 다른 자연물과의 유기적 상관관계 안에서 생명력을 유지한다.]
인간이 갖고 있는 생명이 인간의 개인 것이냐는 문제를 스피노자가 제기하고 있습니다. 내 생명이 개인 것이라면 내 생명과 다른 사람 생명과 소통이 될 리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도 할 수 있고 심지어 부부로 살 수 있고 친하게 지낼 수 있고 서로 사랑한다, 미워한다. 미워한다 할지라도 미워한다는 말은 서로 이해하고 있으니까 미워한다는 거예요. 정박아한테 미워한다고 하면 걔가 화냅니까? 그냥 웃지요. 소통이 안 된다 말이에요. 미워한다는 것은 서로 미워한다는 말을 이해하기 때문에 화를 내잖아요. 화를 내는 생명과 내 생명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같지요.
그런데 언제 내 생명이 저쪽으로 갔지요? 내 생명이 절로 간 게 아니고 저 생명이 나한테 온 것도 아니고 나와 너의 생명력 말고 다른 생명력에 의해서 서로 이해하고 납득이 된다면, 그 다른 생명이 뭐냐는 겁니다. 그것이 독자적인 실체가 돼야지 우리는 그 실체의 양상들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스피노자가 제일 싫어하는 사고방식이 데카르트 사고방식인데 정신은 따로 있고 신체는 따로 라는 거죠. 스피노자 신체 치고 정신에 영향 받지 않는 신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심지어 비닐하우스에서 키우는 정신없다고 여기는 채소도 트로트 틀면 작물이 작황이 안 좋아요. 그런데 모차르트 음악, 클래식 음악을 틀면 예쁘게 자라나요. 비트, 박자가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얘들 랩이나 사이키델릭이나 록앤롤 틀면 짜증내고 고요한 음악을 틀면 굉장히 부드럽게 열매가 좋아진다는 겁니다.
우리가 과학적으로 봅시다. 식물은 정신으로 돼있어요, 식물세포로 돼있어요? 식물세포로 돼있지요. 그럼 식물세포질로 들어가면 분자, 나중에 원자로 돼있다. 나오는 게 그것밖에 안 나오거든요. 모든 게 에너지다. 에너지란 자체는 뭐냐 하면, 관찰하는 우리도 에너지고 저것도 에너지고, 우리도 분자로 돼있고 저것도 분자로 돼있고. 분자란 물질이거든요.
그런데 스피노자는 완전 질료, 완전 물질은 없다는 겁니다. 정신과 교류가 되는 물질이지 그냥 물질로부터 물질로 가는 그런 식으로는 이 세상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잘못 해석하고 잘못된 논리라는 것이 스피노자의 철학입니다. 이의 있습니까?
제가 지난 시간에 설명했잖아요. 그냥 강제로 손목을 잡아서 약한 여자들은 강한 남자가 끄집어내면 질질 끌려나오지요. 그런 식으로 나오는 방법도 있지만 문밖에서 “얼래리꼴래리 숙자야, 잘 있었나?” 하면 지가 알아서 문 열고 나오잖아요. 왜 지가 알아서 나옵니까? 언어체계, “숙자야, 너는 못 생겼다.” 이건 물리적으로 봐서 소리에너지에 불과해요. 소리에너지가 공기라는 매질을 통해서 들려오는 거예요. ‘숙자야’ 하면 우리가 익히 아는 한국어 체계에 의하면 이건 숙이란 뜻이고 못 생겼다는 이야기다. 그게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뭔데?
제가 어제 낮에 설교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에 보면,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스타벅스 아르바이트 학생이 커피를 가져왔습니다. 커피를 앞에 두고 하는 말이,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라고 언어체계를 날렸잖아요. 그러면 그 아가씨가 회개합니까? 통곡합니까? 어쩌라고? “아저씨, 커피 마실 거예요, 가져갈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왜 언어체계인데 왜 소통이 안 되지요? “숙자야, 못 생겼다.” 하면 성을 내면서 제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면 밖으로 나옵니까? “우린 절에 갑니다. 교회 안 다닙니다.” 하고 보내버리잖아요.
왜 그래요? 지금 체제가 다른 영역에 있지요. 그래서 십자가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알 수가 없는 거예요. 목사들이 교인들이 안 모여서 교회 운영이 안 되니까 십자가 영역을 포기하고, 포기만 해도 괜찮은 목사에요. 아예 십자가 영역에 들어오지도 않았어. 그런 이야기를 치우고 그들이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김용덕이란 목사가 있답니다. 그 목사가 설교하면서 “십자가가 다가 아니다. 더 나가라.”라고 했다는 거예요. 어떤 분이 저한테 “김용덕이란 유명한 목사가, 십자가에 머물지 말고 더 나가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말이 옳습니까? 목사님 의견은 무엇입니까? 답변을 해주세요.”라고 메일을 보내서 오늘 아침에 그걸 답변을 했어요.
어떤 사람이 이 땅에서 저 땅으로 건너갈 때 배를 탔어요. 배에서 폴짝 뛰어야 할까요? 배에서 춤을 출까요? 그냥 배만 타면 되겠지요. 배에 머물지 않고 갑판에서 뛰어내리면 물에 빠지지요. 이 세계에서 도저히 성령이 아니고는 갈 수 없는 그 세계로 갈 때는 십자가 안에서 가야 되겠지요. 그래서 제가 갈라디아서 6장 14절을 언급했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세상은 죽었다고 했지요. 오직 성령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만 자랑하지요. 그런데 김용덕이란 목사는 십자가에 머물지 말고 더 뛰쳐나가란 뜻이에요. 교회 돈 내고 봉사하란 이야기밖에 더 있겠어요. 말로는 거룩하라고 하겠지만 결국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입니까? 신앙의 솜씨 좀 부려서 교회에 헌금해라. 목사 존경하고. 이상적인 교회, 괜찮은 교회 만들어보자는 그 이야기에요. 자기는 그 교회에서 평생 동안 먹고 살겠다는 그 생각입니다.
지하철 타고 오다보니까 선풍기 커버를 팔았어요. “여러분, 안녕하십니다. 조용히 가시는데 죄송합니다만 제가 좋은 신상품 하나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제 철 지나서 선풍기 보관할 때가 되었지요. 선풍기 어떻게 관리하십니까? 비닐에 넣으면 소용없습니다. 여기에 순국산품 선풍기 커버가 있습니다. 이렇게 자크를 여시고 선풍기를 집어넣으시고 그게 끝이 아닙니다. 뒤에 끈이 있으니까 졸라버리면 먼지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가격은 부담 없는 가격, 이천 원에 모시겠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 안이에요. 모가지를 졸라버려요. 우리를 선풍기처럼 비닐 안에 집어넣고 모가지를 집어넣었으니 빠져나오려야 빠져나올 수가 없지요. 백날 뛰어봤자 십자가 안에서. 십자가가 뭡니까? 우리 죄를 지시고 대신 지신 죽으신 십자가잖아요. 그럼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죄인이 돼야 되고 그 죄를 주께서 계속 용서가 일어나면서 하나님의 의가 번져 나오겠지요. 결국 우리는 주님의 의를 생산하기 위한 재료로 거기에 참여됐다는 이유로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스피노자의 생각은 이거에요. 신체에 정신이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따집니다. 언어라는 것이 눈에 보입니까? 물론 글자는 보이지만 사실은 글자라 하지만 따지고 보면 잉크자국이에요. 종이에 잉크를 묻혔기 때문에 가까이 보면 글자로 안 보이고 무수한 점으로 보이고 더 가까이 보면 점점 뚝뚝 떨어진 점이에요. 점박이뿐이에요. 그런데 멀찍이 보게 되면 그게 뭉쳐서 잉크가 연결된 자국인데,
이게 뭡니까? 잉크자국이 위에서 내려와서 옆으로 퍼진 게 이거잖아요. ㄴ이죠. ㄴ은 어디서 나온 거예요, 신체에서 나온 겁니까? 정신에서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신체를 볼 때 정신이 항상 신체를 해석하는 판단능력이 정신 속에 있잖아요. 그런데 정신은 구체적인 글씨가 없으면 표현이 됩니까? 안 되지요.
“어이, 김숙아.” 하면 김숙이란 말은 혀가 놀리는 거예요. 성대와 혀의 작용, 세포의 작용에 의해서 김숙이란 언어가 나오는데 “김숙아, 잘 있나.” 하는 말을 미국사람이 들으면 알아듣습니까? 그냥 음의 소리는 들리지만 못 알아듣지요. 사도행전 9장에서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내려가지요. 그때 하늘에서 우레가 쳤습니까, 음성이 들렸습니까? 갑자기 하늘에서 ①우렛소리가 들렸다. ②예수님의 음성이 들렸다. 몇 번입니까? 사울과 같이 갔던 사람은 1번이고, 사울에게만 2번이죠. 사울과 그 사람은 현재 다른 지평, 다른 영역에 속한 겁니다. 세상이 이런 거예요. 이게 현실입니다. 이게 팩트에요.
교회에서 목사들이 설교할 때 둘 다 설명해야 돼요. 성경에서는 둘 다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옆에 가는 사람은 우렛소리가 들렸다고 설명했죠. 만약에 그걸 설명 안 하게 되면 성령 안 받은 사람이 성도인 것처럼 앉아있을 수 있어요. 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노아의 믿음이 대단한 이유는 거기에 구원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에요. 노아가 9명 전도했습니까, 10명 했습니까? 8명이지요. 만약에 아홉 번째 태우면 홍수 옵니까? 안 오지요.
어리석은 다섯 처녀, 지혜로운 다섯 처녀 할 때 신랑이 여섯 명이 기름 준비하면 오겠어요, 안 오겠어요? 안 오지요. 네 명이 준비했을 때 오겠어요? 안 오지요. 다섯 명 준비할 때 오셨지요. 왜? 다섯 명만 신부가 돼야 되기 때문에. 네 번째 왔으면 큰 일 날 뻔 했어요. 구원받을 사람 하나 놓칠 뻔했잖아요. 구원은 주님 소관입니다.
제가 이번에 미국동부에서 한 강의에 이런 게 있어요. 누가복음 중풍병자 설명하면서 중풍병자는 병 나으러 왔단 말이죠. 그럼 주님께서 그들이 요구한 대로 “네 중풍병이 나았느니라.” 이러면 될 텐데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렇게 했지요. 지금 사람들이 어디에 주목합니까? 어떻게 낫는지 보자.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주목하는 그것으로 누구한테 주목하게 합니까? 예수님이 처음부터 무엇 때문에 오셨는지 알리기 위해서 중풍병자가 병 고치려고 온 그 상황을 이용해서 관심사를 주님에게로 돌리기 위한 멘트가 나옵니다. “네가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은 주님께서 중풍병 나으라고 오신 게 아니고 죄 사하시려 오신 거예요. 죄 사하는 권세가 주님한테 있는 거예요.
이제부터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지옥 보내고, 어떤 사람은 천국 보내는데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이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의가 없어야 됩니다. 죄 사하러 오신 게 아니고 죄 사하는 권세가 누구한테 있다? 주님한테 있는 거예요. 아까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이 세상에 나 있고 대자연이 있는 게 아니고 안에 뭐가 작용한다? 권세가 있는 거예요. 이 권세는 이미 우리를 지배하는 불순종의 악한 영들 속에 권세에 놓여있지요. 그런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용서하고 어떤 사람은 용서하지 않는 권세가 새롭게 투입된 거예요. 그분이 예수님이잖아요.
그렇다면 목사가 설교할 때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노아가 방주 만들어놓고 아무나 오세요. 하나님께서 다 구원합니다가 아니고 구원될 자만 구원되게 하신다고 노아는 전도를 한 겁니다. 목사님, 노아가 전도한 게 어디 나옵니까? 어디 나오기는요 예수님 말씀 가운데 나오지요. 너희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이것 누가 하고 있었습니까? 이건 노아 가족도 했고 노아 가족 아닌 사람들도 다 하고 있지요.
그런데 뭐가 온다? 홍수가 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고 사고팔고 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홍수를 영원한 심판을 끄집어낼 수 있어요, 없어요? 끄집어낼 수 없지요. 끄집어낼 수 없는 것을 목사가 설교해야 된다니까요. 그래야 못 알아듣는 사람은 못 알아듣게 하고 희한하게 그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희한한 일이에요. 이건 성령의 기적 받은 사람이에요. 그 사람들만 사실은 노아방주에 탈 사람인데 마침 노아 식구 외에는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노아는 아주 깔끔하게 자기 식구만 데려간 거예요.
아무도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이 자체가 문제 있다고 그 속에서 문제성을 끄집어낼 수 있는 능력자는 노아 당시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합니다. 인자가 올 때도 그러하리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세상이 그렇게 하도록 놔두세요. 사람의 관심사가 그것밖에 없다는 걸 아세요. 중요한 것은 주께서 자기 양을 따로 뽑아내는 방법은 뭐냐?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전해서 그렇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는 자체가 이미 죄의 양상이 되는 거예요. 이게 양상이란 말이 이해되십니까? 스피노자의 철학이 어떤 점이 유용한지 아시겠지요.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데카르트는 내가 판단한다. 내가 판단해서 다시 내게로 가져온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논리라면, 스피노자는 나라는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 나를 관통해서 나로 하여금 나를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뜻이에요. 나는 전체의 부분의 불과하다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해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야기를 스피노자는 그런 뜻은 아닌데 나중에 스피노자를 반박할 거예요. 비판할 겁니다. 어쨌든 간에 스피노자의 구조 자체가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포함하는 넓은 전체를 먼저 전제로 해서 그 속에 양상으로서 나를 이야기하면서 내가 나 되기까지 어떤 인과과정과 어떤 관계들이 엮여져있는가를 살피는 그것이 참된 현실을 보는 방식이라는 것이 스피노자의 철학입니다.
데카르트는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를 위한 신으로 끄집어내는 반면에 스피노자는 전체부터 이야기해서 나는 그 신의 활동에 하나의 양상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복음이 아니고 불교입니다. 공사상이거든요. 공사상이 무신론이에요. 결국 스피노자 사상입니다. 모든 것은 신이다. 신은 뭐냐? 인간의 언어로, 인간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기 전체기 때문에 다만 신이란 표현을 안 할 뿐이다. 신이라고 표현해버리면, 신은 언어체계에 속하지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우주를 생각하는 순간에 우리의 정신을 우주를 넘어서잖아요. 신이라고 하면 그 다음에 묻는 질문이 뭡니까? 그러면 신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이게 정신세계란 말이죠. 그러니까 신에 대해서 입 다물고 살아라. 그냥 空, 비어있다고 해버리자. 그러면 남는 것은 관계, 관계성만 남지요. 그걸 업보라고 합니다. 우리가 착한 일하면 언젠가 그 복은 돌고 돌아 우리에게 돌아오게 돼있다. 이게 불교가 절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잖아요.
스피노자의 이런 철학이 개체란 것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개체가 있는데 자기 실체성이 있는 개체가 아니고 주변에 의해서 솟구쳐 올라온 종기 같은 형식의 자아라고 하면서 여기서 뭘 주장하느냐 하면, 스피노자가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윤리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철학에 윤리성이 있는데 그 윤리성이 뭐냐? 인간이 신이 되어라. 불교에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이죠. “인간아, 신이 되어라.”라는 말은 개체가 신이 되라는 말이 아니고 네 주변을 돌아보란 이야기에요. 너의 너 된 것은 네가 잘나서 된 것이 아니고 주변의 업보, 누구의 중보기도, 누구의 도움으로 됐기 때문에 너도 알 수 없는 관계 속에서 너의 모든 것은 알 수 없는 대상, 이웃을 향하여 자비를 베푸는 그것이 진정한 이 세상을 사는 인간이 참된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이상적인 윤리다. 불교에요.
개미라고 무시하지 말고 돌이라고 흙이라고 코스모스라고 무시하지 말라. 너도 나중에 죽으면 코스모스가 될 수 있고 개미가 될 수 있다. 그걸 함부로 짓밟으면 너의 발 뿌리, 너의 손톱을 짓밟는 것과 마찬가지다. 전체로 퍼져있으니까. 아이스크림을 그냥 놔두면 녹아서 테이블에 퍼지지요. 아이스크림 높이가 사라지고 편평하게 빈대떡처럼 퍼지잖아요. 퍼져있는 것을 밟았을 때 아이스크림은 아프지요. 왜? 높아있을 때 그 아이스크림이기 때문에.
만약에 데카르트처럼 돼버리면 인간은 자기 가치가 우선이기 때문에 자기밖에 모르는 윤리가 성립되겠지요. 스피노자 식으로 윤리를 바꾸면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의 개체를 부정하는 동시에 타인에 대한 무한한 자비와 사랑 베풂으로 연결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윤리와 도덕을 다시 해석하고 현 시대에 적용시킨 사람이 들뢰즈의 철학이고 그 다음에 들뢰즈 철학은 그 뒤에 현대철학에서 수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교 쪽에서도 천주교, 기독교 쪽에서도 스피노자 철학을 위대한 철학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나만을 위한 나의 생명이라는 게 없다는 거죠. 내 개체가 내가 실체가 아니니까. 나는 신의 속성에 불과하니까. 그러면 우리가 갖고 있는 생명이란 대자연의 속성을 일부 부여받는 거죠. 그러면 내 생명만 귀한 것이 아니라 남의 생명도 귀한 거죠. 엄마가 되어서 원치 않는 임신을 했다. 내 아이니까 내가 죽여 버린다. 이렇게 되면 이건 자기와 연결된 생명, 곧 자기 생명을 죽인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에 범죄가 되겠지요.
그래서 인간의 실체라는 것, 실체란 뜻은 독자적인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게 실체입니다. 이 실체를 벗어버릴 때 여기서 궁극적인 기반이 나옵니다. 어렵더라도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궁극적 기반, 돌아 나오는 모든 개체, A라는 개체, B라는 개체, 숫자가 하나, 둘, 셋, 넷 늘어납니다. 하지만 전체는 궁극적 기반에서 나왔기 때문에 숫자가 하나에서 나온 겁니다. 실체는 하나 신, 다른 말로 자연.
자연이 우리의 기반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철학 자체가, 아까 이야기했지만 다른 영역이 있다고 했잖아요. 다시 해볼까요. 어떤 커피 심부름하는 아르바이트 학생에게 하나님에게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롭다고 하면, 어쩌라고? 어쩌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빨리 커피나 마시고 돈 지불하세요. 왜냐하면 난 아르바이트비 받아서 내 몸 살리는 그게 전부기 때문에 그 말은 들리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다고 하는 것은, 네가 소속돼있는 그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지금 스피노자에 대해서 비판하는 대목이 아니고 스피노자를 설명합니다. 비판은 조금 있다 할게요. 뭐가 문제인지. 스피노자는 불교라고 했지요. 불교적 입장에서는 궁극적인 기반, 공이든지 신이든지 기반이 있는데 서로 모든 것은 소통이 되고 교환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내 생명이, 생명 앞에 나를 붙일 수 없는 모두의 생명이 되지요. 그 모두 안에 새와 달과 별 모두를 포함한 그걸 대자연, 대자연 속에 묽은 죽처럼 같이 녹아있는 하나의 생명을 부여받은 것이 되지요.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고. 왜 부모한테 효도를 해야 됩니까? 지금 스피노자가 이런 주장을 하는 자신감이 어디서 나옵니까? 모든 인간들은 조상 숭배를 하고 모든 인간들은 결국은 어릴 때는 자기밖에 모르지만 점점 성숙해가면 전체를 보고 전부를 보는 인간의 정신적 발달과 관련돼있어요.
젊은 얘들의 특징이 자기밖에 모르지요. 어릴 때는 서로 싸우지요. 야곱과 에서 보세요. 팥죽 한 그릇으로 형과 동생이 서로 싸우지요. 그런데 야곱이 나중에 어른이 되니까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는 식으로 “형님, 이 모든 것은 형님 것입니다. 형님은 나의 주십니다.”라고 절하니까 에서가 하는 말이, “나한테 줄 것 없어. 네가 복 받은 거니까 네가 가져가라.” 창세기 33장에 보면 둘이 만나서 화해하잖아요. 그만큼 정신적으로 성숙했지요. 이게 뭡니까? 어릴 때는 코앞에 자기 것밖에 몰랐는데 이제는 모두의 것이라고 발전했을 때 스피노자의 철학을 마치 인정해주는 것처럼 진리처럼 동조한 것처럼 느껴지지요.
그렇다면 스피노자가 복음입니까?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이 정말 살아 계신 하나님 맞습니까? 스피노자의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봐라. 하늘을 보고 땅을 봐라. 내가 없는 소리한 게 아니다.” 없는 소리한 게 아니죠. 왜냐하면 비가 와야 곡식이 되잖아요. 그럼 곡식 속에 비가 온 적이 있다는 정보가 포함돼 있잖아요.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말하기를 “봐라. 내 말이 맞잖아.” 땅의 무기물과 하늘의 햇빛과 단비 없으면 어떻게 한 알의 곡식이 되겠어요. 곡식도 그러하듯이 하물며 인간이라는 것이 태어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요소, 역시 인간도 비를 맞아야 되고 공기를 흡수해야 되고. 그 공기, 비, 다 하나님의 은혜고 축복이잖아요. 거기서 인간이 됐잖아요.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자기 말이 맞는다는 거죠.
데카르트는 세상의 모든 만물을 우연적 산물로 봤어요. 스피노자는 필연적으로 반드시 있어야 할 것으로 봤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나한테 사기를 친다. 그럼 사기꾼은 왜 있어야 됩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반드시 있어야 될 사기꾼이기 때문에 나한테 있다고 보는 것이 신을 경유한 신을 통한 참된 인간의 도리라고 본 겁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연에 고개 숙일 줄 알고 겸손하고. 만약에 데카르트처럼 신 따로 인간 따로 되면 동일성이 형성되지 않고 개인마다 동일성이 형성되지 않으니까 모든 것이 다툼과 경쟁과 투쟁의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스피노자가 복음입니까? 스피노자 철학에서 십자가가 빠졌지요. 십자가는 누가 살해당한 거죠. 피해당한 거죠. 어떤 사건이죠. 스피노자 세계에 뭔가 면도날로 찢어진 거죠. 스피노자 세계가 진리 아닌 걸로 드러내기 위해서 누가 면도칼로 찢어버렸습니다. 누가 찢어버렸습니까?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찢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스피노자의 신이라면 그것이 가짜라고 찢어버리는 진짜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죠.
우리는 마귀한테 속아 넘어간 거예요. 대자연 속의 우리끼리 서로 도와주고 이웃사랑해서 잘해보자는 이것이 결국 악마의 작품이었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겉으로 보기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합작해서 죽인 걸로 보지만 예수님 입장에서는 마귀의 사주를 받고 너희들이 나를 죽인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최종 판정을 내려버립니다.
이 말은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뭘 알 수 있다? 지금도 대자연을 이런 식으로 어떤 특징적인 인물적인 요소를 보여줄 수 있어요. 그게 뭐냐? 악령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이 아니면 악령이 나타나지 않아요.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곳에는 반드시 십자가 복음을 못 전하도록 막는 악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 누가 읽어보세요.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은 나타났는데 누구로 나타났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되 나타난 하나님이라면 하나님 품속의 독생자로 나타났지요. 그분이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을 누가 방해합니까? 예수님이 다 이룬 일이 어디서 일어나지요? 십자가 사건이지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누가 방해합니까? 바로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마귀가 방해하지요. 이 세상의 신,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 그 신이 누굴 공격한다? 십자가 복음을 방해하지요. 우리는 깜빡 속을 뻔했습니다. 고상한 최고의 불교적 스피노자의 윤리에 속을 뻔했습니다. 그 고상한 최고 불교적 윤리, 스피노자 윤리에, 그 대자대비에 깜빡 속을 뻔했습니다.
We are the world. 우리는 모두 하나의 세계인 줄 알았는데 십자가가 와서 죄 씻는 권세를 발휘하니까 지옥 갈 사람은 지옥 가고 천국 갈 사람은 천국 갑니다. 오늘날 교회 모습이 마치 민원 제기하는 시민들 같아요. 꼭 구청 공무원은 하나님이고, 민원 제기하는 사람들은 교인 같아요. 멱살 쥐고 흔들고 따집니다. 왜 일을 이따위로 하느냐고 따져요.
하나님이 뭘 잘못했습니까? 지옥 갈 사람을 지옥 보내고 천국 갈 사람을 천국 보내는 것이 그게 그다지도 나쁜 짓입니까? 나쁜 짓 아니지요. 만약에 여러분이 사랑하는 부모님을 지옥 보내면 나쁜 짓이에요? 나쁜 짓 아니지요. 혼자 구원받은 걸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딸이 지옥 간다면 나쁜 짓이에요? 주께서 일을 잘못 처리한 겁니까? 답변해보세요. 괜찮지요. 일 잘하신 거지요. 왜 중보기도하면서 따집니까? 왜 사업 망하게 했느냐고 따집니까? 왜 저희 가정을 파탄 냈느냐고 따집니까?
우리는 데카르트도 되고 기분 좋으면 스피노자, 기분 나쁘면 데카르트, 기분 나쁠 때는 주여, 왜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기분 좋으면 대자대비하게 내가 나 된 것은 은혜라고 자기 것으로 만끽하면서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우리가 데카르트, 스피노자를 공부할 이유가 있어요. 우리 앞에 스피노자 있고 데카르트 있는 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그러면 스피노자의 잘못은 무엇이냐? 바로 레위기를 몰랐어요.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지요. 지상에서 최상의 거룩한 자가 누구지요? 제사장이지요. ○○목사님이 지난 우리교회 오후설교 때 제사장 복장에 대해서 언급했지요. 하늘에서 제시한 거룩과 인간의 최고로 거룩한 인간의 복장도 거룩하고 멋있어 보이는 거룩함이 만나는 자리에서 뭐가 발생되었습니까? 피가 발생되었지요. 제사장 복장에 보석이 부착돼있지요. 보석이란 인간이 가진 물건 가운데 제일 고상하고 화려하고 영광스럽고 거룩해 보이지요. 귀하지요. 그 귀한 것과 인간의 모든 귀한 것으로 하나님의 귀한 것, 거룩을 뚫을 수 있어요? 안 되지요. 진짜 거룩은 뭐냐? 오직 예수님의 피밖에 없습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에는 뭐가 빠졌습니까? 피 빼고 다 있습니다. 요즘 교회의 설교의 특징이 뭡니까? 피 빼고 다 있습니다. 이웃사랑, 하나님의 은혜, 감사함도 있습니다. 그러나 피가 없어요. 스피노자는 레위기를 몰랐습니다. 진짜 하나님을 성령을 통해서 만난 적이 없어요. 그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대자연으로 다시 대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을 상상해서 하나님은 대자연을 왜 만들었는가? 데카르트는 아니다.
그럼 어떤 식이냐?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는 이것이 신의 진정한 유토피아, 신의 세계라고 해서 자기 나름대로 철학을 구성했고 그것이 먹혔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교회한테 비난을 받았습니다만 하지만 나중에 철학자들에게 인기를 얻었고 지금은 대세가 되고 말았어요. 불교의 정신과 통한다고, 동서가 소통된다고 난리도 아닙니다. 서양에도 이런 위대한 철학자도 있다고 좋아들 합니다.
하지만 결국 스피노자, 데카르트는 성령이 아닌 악령에 의해서 제안된 철학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몰라야 돼요? 무시해야 돼요? 제가 아까 분명히 이야기했지요. 우리는 둘 다 이야기해야 돼요. 우리의 몸이 이것에 알든 모르든 이미 여기에 푹 빠져 살아오고 있고 살아왔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피를 여기다 섞으려고 합니다. 피는 절대로 섞이지 않습니다. 바로 이걸 정죄하지 섞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섞어서 피 흘렸으니까 사랑하라 했으니까 사랑하자고 나와요. 피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 사랑이 아니에요. 피는 주님의 지옥 갈 사람 마음대로 보내고 천국 갈 사람 마음대로 보낸다는 주님의 자율권을 우리 앞에 세우는 겁니다.
우리가 황인종입니까? 내가 황인종이라고 하지 마세요. 주께서 황인종 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내가 남자입니까? 주께서 남자 되게 하셨습니다. 더 나가세요. 우리가 사람 됐습니까? 주께서 사람 되게 하셨습니다. 더 나갑시다. 주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셔서 천국 가게 하셨습니다.
끝으로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마지막에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자, 스피노자 철학과 비교해봅시다. 스피노자의 철학이라면 사람도 자랑하고 코스모스도 자랑하고 대자연을 자랑해야 되겠지요. 대자연이 전부기 때문에. 대자연이 전부에요. 부모로 말미암아 내가 생겼고 나로 말미암아 자식이 생겼어요. 그게 전부에요. 인과관계 그게 전부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은 다 너희 것임이라”
스피노자에서 누굴 강조합니까? 너희죠. 그런데 너희는 혼자서 개체로서 우리 자신을 말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 뒤에 보세요.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 장래 것이나 다 너희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너희는 누구의 것이다? 그리스도의 것이죠.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찢어버리죠. 그리스도 때문에 이 세상은 멸망하게 돼있어요. 히브리서 1장 11절에.
세상은 주가 만들었지만 주께서 만들어진 것을 스스로 찢어버리는 겁니다. 이걸 스피노자는 몰라요. 스피노자는 만들어진 것이니까 영원히 갈 것이라고 여겼어요. 찢을 것이라고 상상도 못한 겁니다.
다시 합시다. 우리는 존재합니까, 만들어집니까? 만들어지죠. 만들어진다는 것은 주께서 찢어버리고 죽여도 할 말이 없어요.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주의 뜻이면 죽기도 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십자가 지신 주님의 용도로만 쓰일 뿐이지 이 세상과 섞일 수 없는 사이에요. 소통이 안 돼요. 서로 대화가 안 돼요.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이해가 안 된다니까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리스도 뒤에 나와요. 앞에는 그리스도가 나오고. 신을 이야기하면 엉터리에요. 신이 아니고 뒤에 예수님이에요. 독생하신 예수님. 그래서 제가 자주 언급하는 것이 우리가 차린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듯이 예수님 하나 부록으로 얹으면 안 되고 예수님 때문에 밥상이 쪼개져야 돼요. 다 가짜로 들통 나야 되고 마귀의 수작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더 이상 마귀의 수작에 넘어가서는 안 되겠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제대로 보게 하옵소서. 말씀에 입각해서 보게 하옵소서. 우리가 주의 뜻으로 산다는 것이 아니라 주의 뜻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사도 바울의 소망이 죽는 것이었는데 우리의 소망은 지금 사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여, 어서 죽어서 주와 만나는 것이 우리의 최후의 욕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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