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14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7-스피노자
20141014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7-스피노자
이름 : 한윤범(IP:119.192.174.28)
20141014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7-스피노자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스피노자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데카르트 다음에 스피노자 이야기하면서 데카르트가 한 이야기를 전제로 해서 스피노자가 언급했으니까 우리도 그 노선을 따라야 되겠지요. 데카르트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했지만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까 다시 한 번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데카르트는 가장 확실한 게 뭐냐? 확실한 것을 왜 알아야 되는가? 확실한 것을 알아야 사람이 정서적으로 안정이 될 것 아닙니까. 확실한 걸 모르면 사람이 살아도 불안하지요. 확실한 것, 진리지요. 진리를 알게 되면 이 세상에서 어떤 낭패나 일이 있더라도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니까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데카르트란 사람이 확실한 게 뭔지를 곰곰이 생각한 거예요.
만약에 “저기 사람이 있네.” 해서 가 보니까 사람이 아니고 마네킹이었다. 뭐가 잘못된 거예요? 멀리서 보니까 사람인데 가까이 가보니까 마네킹이었다. 그럼 멀리서 보는 것이 어떤 사물이든 확실하지 않지요. 그럼 인간이 본다는 것도 문제가 있다는 거지요. 그 다음에 들리는 것, 비 소리인 줄 알았더니만 가까이 들어보니까 차 소리였다. 이것도 오류가 발생되지요. 사람들이 눈으로 보고 듣는 것도 최종적으로 확실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내가 책을 읽는다. 굉장히 확실해 보이지요. 그런데 나중에 깨보니까 꿈이었다. 분명히 새벽 2시 47분에 책을 읽고 있었는데 깨보니까 책을 읽고 있는 게 아니고 침대에 누워있었던 거예요. 그럼 책을 읽는다는 것은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지요. 그럼 꿈을 꾸면서 이건 꿈이다, 꿈 아니라는 판정이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지요. 꿈에서 깨야 가능하지요.
그럼 더 나아가봅시다. 꿈에서 깨서 꿈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침이 돼보니까 또 하나에 겹으로 조작된 꿈이라면 그건 현실이 아니죠. 꿈속에서 꿈을 꾸고 꿈을 꾼 속에 또 꿈이 있고 그 속에 또 꿈이 있다면, 거울 속에 거울 있다면, 그 전체가 어디 것이 진리라고 확정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요. 인간은 확실한 것도 꿈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해볼 때 이것도 확실하지 않다.
그 다음에 이걸 생각해봐요. 지금 스피노자 하기 전에 데카르트 이야기하는 겁니다. 데카르트 이야기해야 스피노자가 그 다음에 이야기되기 때문에.
‘2+3=5’다. 확실하지요. 6일리 없고, 4일리 없기 때문에. 2+3=5는 분명하고 진리다. 이게 수학이거든요. 수학적 공식은 진리다. 따라서 수학을 믿으면 우리는 마음 편하다고 생각해봐도 문제는 뭐냐 하면, 2+3=5라고 하는 것이 악령의 조작이라면 악령이 나를 기만하고 놀리는 거라면 과연 수학적 진리가 확실성을 줄 수 있느냐는 겁니다. 악령이 우리를 갖고 논다면 그것도 안 되지요.
그래서 데카르트가 생각한 게 이겁니다. 기만을 당하고 놀림을 당해도 놀림을 당하고 있다는 이 생각의 주체, 이것만큼은 어떤 경우라도 우리가 의심할 수 없다고 되는 겁니다. 놀림을 당하더라도. 2+3=8인데 악령이 속여서 5라고 우겨도 기만당하고 꿈을 꾸고 이것이 비 소리인지 차 소리인지 마네킹인지 인간인지 늘 생각을 하는 나는 절대로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이지요. 그래서 데카르트는 뭐냐 하면,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만큼은 절대로 변함이 없는 확실한 것이라고 해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할 동안만 진리기 때문에 내가 생각이 멈추고 생각이 중지되는 사태가 일어나면 어떻게 됩니까? 그때를 보통 사람이 언제라고 보지요? 죽는 상태지요. 내가 죽어버리면 내가 생각한 모든 것도 같이 사라지잖아요. 만들어진 내가 있고 내가 하나님 믿는다면 하나님 믿는 것도 언제까지 유효하냐 하면, 나를 존재로 생각하고, 천천히 생각해봅시다.
지금 뭐가 확실하다고요? 내가 현재 여기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그것만큼은 확실하죠. 그러면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존재로서 나를 존재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것도 내 존재에서 입각해서 보면 확실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만약에 죽어서 내 생각도 사라진다면 내가 믿는 하나님도 예수님도 사라지지요. 그렇다면 내가 믿는 하나님은 가짜에요, 진짜에요? 이것도 보장할 수 없네요. 그렇게 되지요.
데카르트가 이야기하는 확실성이란 것은, 그걸 의식 속의 실재성이라 하는데, 내가 의식할 때 나를 생각할 때 그 안에서만 유효한 확실함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내재적 확실성이라 하는데 내 안에 있을 때만 확실한 거죠. 그렇다면 내가 죽으면 바깥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죽었다면 모든 사람이 통곡합니까? 안 하지요. 내가 상처를 입고 마음이 아프고, 내가 사기를 당하고, 내가 이혼을 당하고, 내가 직장을 잃고 해도 세상은 어떻습니까? 마치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새는 짹짹거리고 하늘은 들에서 반짝거리고 태양은 비출 때 그동안 우리는 무슨 짓을 해온 겁니까? 혼자 확실하다고 몸부림친 것밖에 안 되잖아요.
우리가 신앙 생활한다는 것이 일종에 몸부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세요. 성경에 마태복음 6장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이 있어요. “공중의 새를 보라. 친히 기르시나니” 친히 길러주시지요. 참새가 육과 혼과 영을 따지고 의지와 감정과 이성을 따지면서 주님을 잘 믿으려고 애를 썼습니까? 안 썼지요. 참새가 나는 뭐로 구조돼있으면 어떻게 신앙생활하고 헌금은 어떻게 하느냐고 따진다고 길러줄 하나님이 참새를 안 길러줍니까? 그럴 리 없지요. 참새가 어떻게 날든지 상관없이 주께서는 길러주실 때까지 길러주시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참새를 이렇게 기르시나니 너희일까 보냐?”라고 했단 말이죠. 하나님께서 참새를 기르시고 들풀을 기르시듯이 친히 너희를 길러주실 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해야 됩니까? 담백해야 되지요. 요란 떨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저한테 늘 묻는 이야기가, “목사님, 신앙생활 어떻게 하고, 기도생활 어떻게 하고, 헌금생활 어떻게 하고, 전도생활 어떻게 하고, 예배는 일주일 몇 번 참석해야 됩니까?” 자꾸 물으시는데 정작 그것 안 한다고 하나님께서 안 길러주십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신앙이 뭐예요? 주께서 길러주시는 대로 그냥 살면서, 이게 막 사는 거거든요. 주께서 친히 길러주시나니 담백하게 받아들이면 그렇게 살면 되잖아요. 뭘 그렇게 요란을 떱니까. 그래서 헌금할 때는 헌금 하지 않은 양 헌금해야 되고, 전도할 때는 전도하지 않은 양 전도해야 되고, 예배 참석할 때는 예배 참석하지 않은 양 해야 되고, 찬양할 때는 찬양 안한 양 해야 돼요. 왜? 괜히 내가 찬양 열심히 하는 덕분으로 주께서 더 길러준다는 그러한 티를 내면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저것 하지 않더라도 주께서 오늘도 길러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벤츠 타고 어떤 사람은 걸어오겠지만. 주께서 길러주시는 거예요. 주께서 들풀로 길러주시는 겁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너희도 길러주시는 거예요. 물론 인간이기 때문에 특별히 더 요구하는 사항이 있습니다. 그 나라 그 의를 구하라. 이것은 바로 참새와 들풀에게 주신 사명이 아니고 인간이기에 주신 사명이 뭐냐? 십자가. 너희들 죄 때문에 피해자로 살해당했다는 이 사실을 품고서 살라는 겁니다. 품고 살게 되면 이렇게 돼요.
아까 참새는 하나님께서 기르시나니, 이걸 십자가 성령을 알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우리의 삶은 뭐냐 하면, 십자가의 희생 덕분에 오늘도 살아갑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보통 인간,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냥 조물주가 기르시나니, 이렇게 되지요. 그러나 신앙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피 흘려주심으로 오늘도 살았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골로새서 1장 13절에 보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예수님을 살해한 유대인에게 아들의 나라라는 개념이 있겠어요? 없지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들의 나라. 이 아들은 바로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죄 사함을 얻었다고 14절에 나와 있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되지요. 우리가 생각한 천국은 천국이 아니지요. 그 천국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들의 나라로 바뀌었는데 그 아들이란 분이 어떤 분이냐 하면, 우리의 죄 사함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그분의 나라로 바뀌었잖아요.
그럼 이야기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참새를 친히 기르시잖아요. 그럼 참새가 하나님 앞에서 태도가 어떻습니까? 길러주신 대로 그냥 담백하게 길러주시는 줄 알면 되지요. 그렇다면 아들의 나라, 천국 가야 될 사람, 예수님의 나라에 갈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대로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덕분에 참새 같이 들풀처럼 십자가 희생의 덕분으로 그 능력으로 오늘도 길으심을 받는다는 걸 담백하게 받아들이시면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뭐 유난을 떨고 요란을 떨 이유가 없지요. 나 알아달라고 기도할 이유가 전혀 없지요. 신앙생활 잘한다고 티내는 식으로 할 필요가 없지요.
지금 데카르트가 모르는 게 뭐냐 하면, 가장 확실한 것이 무엇이냐고 따져보니까 가장 확실한 것이 뭐냐?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과 존재함을 내가 알고 있다는 것, 의식한다는 게 확실하다는 겁니다. 이런 확실성을 따라서 될 문제점이 뭐였습니까? 이것이 언제까지 이렇게 돼요? 우리가 살아있을 때까지는 내가 생각하고 살아있는 걸 믿는다고 하면 되는데 내가 죽고 난 뒤에는? 죽고 난 뒤에 생각이 이어지는지 멈추는지 모르잖아요. 왜냐하면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은 안 죽었을 때에 조립한 논리이기 때문에 죽고 난 뒤에는 자기의 모든 논의하는 바의 한계 밖의 일이란 말이죠.
제가 미국 가기 전에 영어공부 좀 했거든요. 미국에 가서 보니까 발음을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뻐러라고 하는데 서산의 뻘인 줄 알았어요. 빠다를 뻐러라고 해요. 그걸 어떻게 압니까? 한계 밖인데. 무슨 뻘, 갯벌의 뻘인가. 그게 아니고 우리가 알고 있는 빠다. 그래서 속으로 영어를 제대로 사용해라. 내가 아는 영어를 사용해야지 너희들 아는 영어로 하면 못 알아듣잖아. 이 말이 얼마나 억지입니까. 왜냐하면 내가 기껏 생각한 영어는 내 귀에 들려오는 영어만 영어고 진짜 미국에서 쓰는 영어는 나한테 안 들어오는 거예요. 내 한계 밖에 있는 겁니다.
사람이 살아 있잖아요. 데카르트가 주장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가장 기본이 뭡니까? 나는 살아있다. 밥 먹고 살아야겠다. 그게 전부잖아요. 그게 하나님 나라에 통합니까? 그게 통할 리가 있어요. 내 영어발도 안 통하는데 내가 살아있으면서 이게 진리다, 이게 하나님이다, 그게 통하겠어요? 안 통하지요. 안 통하니까 주께서 죽으신 거예요. 이 철딱서니 없는 것들아. 내가 죽어야 산다. 니가 알기는 뭘 알아. 이런 식으로 돌아가셨다 이 말이지요.
십자가가 뭐냐 하면 이겁니다. 내가 계속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는 기관차인데 기관차에 정면으로 충돌해서 부셔지는 게 십자가에요. 내가 안다는 것, 내가 행했다는 것. 우리는 내가 살아있는 이상은 나의 마지막 고귀한 가치, 이것만큼은 놓지 않겠다는 가치만 쥐고 있는데 그게 십자가가 와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완전히 박살나고 부셔지는 거거든요. 인간들이 아는 십자가는 조작된 십자가인데 마귀의 십자가인데 바로 나의 가치를 유지시켜주는 십자가. “주여, 내가 십자가를 믿습니다. 예쁘지요.” 이렇게 유난을 떠는 십자가가 가짜 십자가에요. 진짜 십자가는 아예 밟아버려요.
정육점에 가게 되면 무시무시한 기구가 보일 거예요. 정육점은 조명시설부터 해서 엄청나요. 벌건 조명 켜놓고 여기에 기다란 S자 고리 보셨습니까? 여기에 부위별로 걸려있지요. 그런데 고리에 걸려있는 고기들이 죽기 전에 뭐했습니까? 꽥꽥거리며 돌아다녔잖아요. 그때가 좋았지. 그런데 도살장에서 죽고 나니까 어떤 꼴이 됐어요? 갈고리에 처량하게 묶여서 걸려 있잖아요. 이게 십자가에요. 우리가 이 땅에 기도 좀 했니, 강의 좀 했니, 설교 좀 했니 하고 돌아다녀도 십자가에 걸려들면 이래 가지고(카메라 비춰야 되는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개코라고 그래. 그게 십자가 앞에서 무슨 소용 있어요. 주님께서 십자가 앞에 인간의 모든 것을 묵살한다 했어요. 묵살한다는 말은, 이스라엘 자체가 모든 개성의 묵살입니다. 왜냐하면 어린양이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장자를 살릴 때 어린양의 피 발렸는지 그것만 보지 개인이 달리기를 몇 초에 뛰며 아이큐가 150이며 이런 것 물어서 “아이큐가 150이에요? 살려줘야지.” 이래서 살려줍니까. 달란트가 다섯 개고 여섯 개고 그것 때문에 살려줍니까?
십자가, 어린양 피, 어린양의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은 동일하게 죽어 마땅한 존재로 하나로 통일돼버려요. 죽었는데 꿈틀거리면서 “나는 예쁘지요” 하면 안 돼요. 제가 미국에서 설교하면서 이 이야기를 했단 말이죠. 온갖 재롱을 다 떨었지요. 예배 시간에. 주님 앞에서 귀요미, 이런 것 하지 말라 했어요. 왜 자꾸 재롱을 부리느냐 말이죠. 십자가 앞에 모든 개성은 묵살되는데 얘가 둘이고, 하나밖에 없고. 그게 기관차 앞에서 충동해서 피바다, 박살났는데 거기서 키가 얼마고 잘 생기고 현빈 닮았고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무슨 십자가 앞에 신앙생활이 통합니까, 안 통합니까? 안 통해요.
유대인들이 신앙생활 할 줄 몰라서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까? 그들은 신앙생활에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온갖 인간이 할 수 있는 거룩이라는 것을 다 끄집어내고 다 실시해봤고 다 그것을 유포시켰고 신앙생활을 통일시켰습니다. 율법으로 의롭고 율법으로 거룩하기 위해서 그들은 온갖 최고의 노력을 경주한 사람들이에요. 철저하게 자기 관리와 자기 절제를 했던 사람입니다. 그게 주님 앞에서 오히려 주님을 죽게 한 원인이었고 요인이었어요.
우리 신앙생활 제대로 합시다. 십자가 능력 받아버리면 모든 인간이 살아온 인생의 모든 경륜과 경력이 다 묵살됩니다. 우리는 죽어 마땅한 존재고 하나님께 버림받아야 될 존재지요. 그래서 우리의 자리는 십자가 앞에서 브레이크를 걸고 스톱이 됩니다. 그리고 판정받아야 돼요. 너는 나로부터 버림받아야 돼. 죄 값은 사망이죠. 주님께서 융통성 부리는 줄 압니까? 죄 값은 사망이에요. 우리는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죄인으로 태어났지요. 죄인으로 태어났던 죄를 지었든 상관없이 죄가 있는 곳에 저주가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저주받아 마땅하다고 당연하게 여기는 겁니다.
제가 미국 뉴저지 목요일 강의에서 본문이 뭐냐 하면,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여러분, 이것에 아멘 하세요?” 물어보니까 한 사람이 멋도 모르고 아멘 했어요. 그게 아멘이 돼요? “주여, 제가 주에 끊어져 저주받는다 할지라도 동의합니다.” 이게 아멘 될 이야기입니까? 그게 아멘 안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나 살기 위해서 예수 믿었다는 본색을 드러낸 거예요. 이건 아멘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고. 아멘 안 하기는 뭐 하죠. 주의 말씀인데. 아멘 되는지 시험해볼까요? 내가 저주를 받아 끊어질지라도 나는 원하는 바로다. 아멘 하십니까? 말씀대로 실시하니까 아멘 해야 되고, 그걸 아멘 하려니까 진짜 저주받아 지옥 가면 나만 손해 볼 것 같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분이 제가 설교하고 내려가니까 이런 이야기해요. “목사님, 국정원 직원 같습니다.” 난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가만 생각해보니까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것처럼 남들이 안 찾는 구절 뽑아서 그런 것 같은데
어쨌든 간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고 예수고 전부 데카르트에서 나왔다는 것을 인정하자. 데카르트를 공부하는 이유가, 사실은 은밀히 숨겨져 있고 우리가 의도적으로 숨기려 하는 우리의 본색이란 말이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 세상에 뭐라 해도 신이고 뭐고 언 놈 봤나? 보이지 않는 것보다 진짜 보이는 것은 뭐다? 보이고 느껴지는 것은 뭐가 출발점이다? 내가 여기 있잖아. 꿈을 꾸든지 내가 악령한테 기만을 당하든지 기만당하더라도 나는 여기 있잖아. 이것만큼은 확실하고 진리다. 이 이야기를 데카르트가 했는데 데카르트만의 이야기냐 하는 겁니다. 제 이야기는. 데카르트 몰라도 평소에 살아가는 모든 모습이 이 모습이잖아요.
살아있기에 기껏 아는 기억과 체험은 살아있을 때만 있는 그것도 제한적으로 자기 동네 몇 십 키로, 미국 가면 몇 천 키로까지 그것도 자기만 아는 동네만 다닌 경험밖에 모르는 우리가 그것으로 진리를 구축할 수 있습니까. 조성할 수 있느냐 이 말이죠. 주님의 계획이란 것은 우리가 느끼는 한계 밖에서 계속 실시하고 있습니다.
주일 낮에 이야기한 것을 이것과 관련돼있기 때문에 다시 할게요. 사람이란 엄마가 임신해서 몸이 태어났어요. 제가 어려운 말이 아니라 쉬운 말합니다. 잘못됐으면 잘못됐다고 이야기해보세요. 사람이 덩치 클수록 세상을 보는 점점 더 증가한다고. 이게 지금 데카르트 이야기입니다.
데카르트는 사람의 신체, 신체니까 물질이잖아요.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을 나눕니다. 데카르트가 하는 이야기와 제가 하는 이야기가 같은 이야기에요. 신체가 커지면 커질수록 정신도 폭이 넓어지지요. 맞지요. 그런데 이 말에 문제가 있어요. 사람의 신체 발육이 언제 완성됩니까? 29살로 봅시다. 두뇌세포가 마감되는 게 29살 때에요. 신체는 그 전에 완성되지만. 29살에 세포가 완성됐습니다. 그럼 29살에 보는 세상이 그 인간의 완벽한 정신세계입니까, 아니면 더 나갑니까? 당연히 더 나가지요. 그러면 신체 따로 놀고 정신 따로 노는 것 맞지요.
29살 먹은 사람의 식견이 40살보다 나아요? 못하지요. 왜? 40살 되면 그만큼 온갖 경험들이 늘잖아요. 그러면 세상 보는 눈과 인상도 점점 더 깊어지고 넓어졌으니까 그만큼 철이 난 거예요. 자기 딴에 29살에 철이 났고 세상 안다 하지만 실패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보면 너무 철이 없다는 소리를 41살 먹은 사람한테 들을 것이고 그뿐만 아니고 본인이 29살 때 했던 그것을 본인이 12년 더 살아서 41가 되었을 때 41살 사고방식으로 29살 때 자기 자신을 검토해보세요. 그게 철이 있는 행동인지. 뭐라고 합니까? 참 그때 철이 없었다고 하잖아요. 연예인들이, “20살 때 막 살았습니다. 후회됩니다.” 40,50 되어서 그냥 나오잖아요. 그러면 50 되면 다 압니까? 어때요? 60 돼야 돼요. 70 되게 되면, 50 때 알았다고 여긴 것이 다 철딱서니 없는 걸. 70 되니 이렇게 보이는 걸. 그렇게 되는 거예요. 확실한 건 뭐가 확실한 거예요?
데카르트가 정신 따로 신체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을 이중으로 보는 거예요. 신체가 놓여있는 세상과 정신이 놓여있는 세상이 따로 있는 거예요. 제가 물을게요. 여러분, 인간이 큽니까, 지구가 큽니까? 당연히 인간보다 지구가 크지요. 그럼 지구가 큽니까, 태양계가 큽니까? 당연히 태양계가 크지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태양계를 생각하는 내 사고방식이 큽니까, 태양계가 큽니까? 내 정신세계가 더 크잖아요. 태양계를 생각하는 동시에 태양계 너머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우주가 큽니까, 내 정신세계가 커요? 내 정신세계가 더 크지요. 우주라고 여기는 것을 생각하는 동시에 우주 너머도 또 생각하는 것이 내 정신세계에요,
그렇다면 데카르트는 말합니다. 인간은 신체와 영혼으로 돼있는데 신체와 영혼이 따로 분리돼있으면 사람이 아니거든요. 붙어있어야 된다. 누가 붙게 해주셨을까? 데카르트가 우리한테 질문한 겁니다. 신체와 영혼이 어떻게 붙어 있느냐? 데카르트는 정답을 이렇게 말합니다. 신이 날마다 창조해서 붙어있다. 굉장히 믿음 좋아 보이잖아요. 다른 말로 하면 신이 아니고서는 정신은 육체에 붙어있을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고서는. 이 말은 인간의 힘으로 내 신체와 정신을 관리 대상이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로 통합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보세요. 신이 하나님이 인간으로 만들었다면 그리고 인간은 신체와 영혼으로 돼있단 말이죠. 둘이 됐다는 말은 서로 안 섞인다는 말이죠. 여러분, 2란 말을 구태여 쓴다는 것은 1이 아니란 뜻이거든요. 2란 말은 이게 1이 아니고 1+1이 2잖아요. 1이 두 개 나란히 있어야 2가 된다. 데카르트는 1이 아니고 2를 이야기하겠다. 영어로 two를 이야기하지 one을 이야기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보세요. 2를 이야기했다는 자체가 우리 사고에서 이미 2가 발생됐지요. 그렇다면 아무리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 됐다고 하지만 우리는 출발점이 하나로 출발한 게 아니고 둘로 갈라지게 해놓고 억지로 붙여서 하나라고 우기는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사람이 정신, 정신이라고 하지만 정신은 태양계까지 넘어서고 우주까지 넘어서지만 실제적으로 신체는 한계가 있단 말이죠. 배고플 때 밥 줘야 되고 밤 되면 잠자야 되고 시차 적응 안 되면 잠이 오고 이게 정신으로 될 문제입니까. 심지어 신체가 탐을 낸다, 신체가 뭘 한다면 정신이 못 말리지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길 가는데 옛날에 내 돈 떼먹고 도망간 사람과 닮았어요. 그럼 그 사람이 좋아 보입니까, 미워 보입니까? 미워 보이지요. 미운 것을 내 정신이, 그러나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 하면 좋아집니까? 여러분 미워하지 않는다는 게 좋아진다는 뜻일까요? 아니잖아요. 미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미웠으면 그런 소리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미운 마음을 감추기 위한 방편으로 “나는 저 사람을 미워하지 않아.”라는 구실로 비겁하나 변명을 늘어놓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 말은 안 믿는다는 뜻이거든요. 담백하게 주께서 저를 기르신다고 하면 될 것을 믿습니다는 뭔 뜻이에요? 떨어져 있는 것을 억지로 붙여서 주의 믿음으로 하나 되려고 내 쪽에서 애를 쓰는 거예요. 그게 참새의 믿음이고 그게 들풀의 믿음이겠어요. 안 믿어지니까 들킬까 싶어서 눈치 못 채도록 믿습니다, 믿습니다, 한다고.
여러분이 시어머니 연세가 됐으니까 며느리가 와서 “시어머니, 내가 시어머니를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이게 뭐예요. “너 하던 대로 해. 괜히 어색해. 티나.” “티나요?” “그래, 티나.” 시어머니도 마찬가지에요. 그냥 대하면 될 걸 “나는 너를 딸처럼 생각한다.” 딸처럼 생각한다는 말은 딸처럼 생각 안 한다는 뜻이에요. 미쳤나. 딸이 있는데 무슨. 너무 심하게 하더라도 이해하라는 뜻이지 그게 딸이겠어요.
문제는 그거에요. 언어세계는 현실을 표현 못해요. 예를 들어서 데카르트가 이야기했거든요. 빨갛다. 사람들은 빨갛다고 하면 못 받아들입니다. 뭐가? 장미가 빨갛다. 그렇지 장미를 집어넣어야지. 빨갛다는 말은 홀로 있지 못하고 앞에 주체가 붙어요. 장미가 빨갛다. 또 하나 예를 들면, 본다. 누가? 내가 본다. 그래야지. 나라는 주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활동성을 가로막아요. 하나님이 빨갛게 하시고 하나님이 보게 하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은 비실제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들리고 누가 본다? 내가 본다. 뭐가 빨갛다? 장미가 빨갛다. 하나님 시선 말고 내 시선을 따로 가져가야 비로소 납득이 되는 그런 언어체계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도 우리가 관심이 없으면 비가 온지 안 온지 몰라요. 가족이 죽어서 슬퍼서 울고 있는데 밖에서 “엄마, 눈이 와.” 슬퍼서 울고 있는데 눈 오는 게 들어오겠어요? 안 들어오지요. 나중에 장례 치르고 가보니까 뽀드득 뽀드득 눈밭을 걷고 있을 때 눈이 왔구나 하는 거예요. 그럼 눈은 왜 보냈지요? 가족 위로한다고 하나님께서 위로한답시고 부조조로 눈 보냈습니까? 그런 거예요? 안 그렇지요. 그럼 눈은 왜 온 거예요? 하나님 자기 마음대로 내린 거예요. 그게 주의 이름이에요.
주기도문 설교를 이번에 했거든요. 세상은 주의 이름으로 했는데 우리는 내 이름으로 한 것만 고집하기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한 것들을 다 놓치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기도하면서도 감사하지 않아요. 왜? 내 고집대로 됐는지 확인하느라 바빠서 정작 주께서 주신 것을 다 놓쳐버려요. 그러니까 우리가 주의 이름 붙여봐야 그건 거짓말이고. 내 이름으로 내 욕망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주께서 주신 감사거리를 다 짓밟아버렸어요.
해를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도대체 세상에서 몇 명의 인간들이 해 빛남 속에서 인자하심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별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편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별 보면서 주께서 참 인자하시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누가 있어요?
인간은 데카르트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내 존재로부터 출발하면서 날 살리기 위한 모든 수완과 방법들을 신이든 예수든 좋다. 누구든지 날 살리면 나는 다 수용하겠다고 자기를 위해 사는 이런 인간이 무슨 신앙생활입니까? 자기를 신봉하는 자기를 섬기는 종교인으로 자기를 신으로 받들어 모시고 종교생활을 하는 중입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끝을 봤어요. 인간의 한계를 들춰냈습니다. 데카르트가 이렇게 신이란 언급을 했지만 사실 사람들은 그 신을 빼고 이야기했지요. 인간의 정신은 신을 찾아가고 1이 아니고 2니까 분리 됐으니까, 인간의 정신은 신을 찾고 인간의 신체는 다른 원칙과 원리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데카르트 이후에 드디어 그러한 진리체제가 등장했으니 바로 과학입니다. 뉴턴의 물리학이 등장하지요. 인간의 신체는 하나에 점에 불과하고 점과 점의 모든 관계는 만유인력의 법칙, 에너지 힘의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체는 양으로 다뤄지는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패션디자이너가 옷을 만들 때는 자신의 가치를 담아서 만들어내지요. 그런데 철 지나도 안 팔리면 땡처리하지요. 그때는 질을 따지는 게 아니고 양을 따집니다. 무게 달지요. 옷 무게 달아서 50킬로 만 원씩 해서 땡처리로 넘어가잖아요. 아울렛에서 70~90% 세일로 골라잡아 부담 없는 가격 천 원에 모시겠다고 하지요.
만약에 그 사실을 처음에 그 옷을 만든 패션디자이너가 봤다면 마음이 어떻겠어요? 자기 작품이 땡처리가 아니고 자기 존재 자체가 이 땅에서 아무런 질적인 가치를 부여받지 못하고 그냥 무게 달아서 땡처리 당한다고 인식되겠지요. 이게 바로 데카르트가 남긴 결과가 이렇습니다. 데카르트가 그렇게 함으로써 정신적으로는 신을 찾되 실제적인 모든 세상 움직임은 과학적인 양으로 따지자.
자, 전쟁을 합니다. 전쟁을 할 때 개인의 존엄성, 인격을 고려하지 않지요. 다만 저 나라의 석유를 어떻게 빼내서 내 것이 되게 되면 에너지 자원 고갈에 이르지 않는다는 생각에 석유 있는 나라를 침범한다면, 그 말은 석유를 빼앗긴 사람은, “주여, 그런 것 빼앗겨도 우리의 정신을 하나님만 믿으면 됩니다.”라고 생각할까요? 생각 안 하지요. 가져가세요. 이럽니까? 우리는 순교하겠습니다. 이건 초대교회 이야기고. 초대교회도 기독교고 분명히 중세도 기독교인데 같은 기독교인데 근세도 유럽은 기독교 국가인데 왜 초대교회는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는데 왜 14세기 이후에 유럽은 에너지와 땅 싸움이 벌어집니까? 어떻게 된 거예요?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정신, 정신,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이미 주도권이 어디로 빼앗겼어요? 정신도 주도권이 아니고 정신도 밥을 먹여야 정신 차리니까 우선 먹고 보자에요. 신체 위주지요. 에너지가 있어야 신체는 사니까. 그럼 에너지 앞에서 신체는 뭡니까? 에너지를 많이 확보, 쉽게 말해서 돈을 많이 가진 신체와 돈 없는 신체와 이건 돈으로 결정 나는 그러한 오늘날 자본주의사회가 됐잖아요.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여자가 수태해서 아기를 낳았을 때 그 몸은 커가면서 자기 나름대로 세상을 볼 때 내 몸 여기 있고 나를 살리는 것은 대자연이다. 이렇게 생각했지요. 실제로 눈으로 보세요. 여러분, 저 있고 대자연 하늘 있잖아요. 건물 밖에 나가면 대자연이 있잖아요. 그뿐이지요. 제 말 맞지요. 그런데 갑자기 문을 열고 구청 공무원이 와서 “사흘 안에 이 집 비우세요.” 한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계산 하에서 새로운 요소가 들어왔지요. 그게 무슨 요소입니까? 내가 있고 대자연이 있고 살만큼 산다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구청직원이 왔을 때 그걸 성경에서는 권세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아기가 태어날 때 권세를 고려합니까? 안 했지요. 그런데 갑자기 내 몸 여기 있고 하늘에 별 뜨고 달 있고 코스모스 피고 아름다운 게 전부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감히 나에게 지시와 명령을 하는 권세가 등장하는 거예요. 그런데 웃기는 것은 그 권세에 대해서 “니가 뭔데?” 하면 되는데 갑자기 뭐라고 합니까? “일주일만 봐주세요.” 거기에 굴복하는 나는 뭐냔 말이죠. 이상하지 않아요?
다시 봅시다. 내가 있고 대자연이 있다. 세상 구성요소에 뭔가 빠진 게 있었죠. 뭘 집어넣어야 돼요? 내가 있다, 대자연이 있다 그 안에 뭔가 어두운 권세가 나를 지배한다. 그런데 그 권세가 눈에 안 보이잖아요. 지금 구청 공무원이 와서 사흘 안에 빼라고 할 때 구청 공무원 안에 심장이 네 개입니까, 코가 일곱 개에요? 아니지요. 구청 공무원 집도 우리와 똑같은 가정이란 말이죠. 제 말 이해됩니까?
너 있고 나 있으니까 대자연 안에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나한테 명령을 하는 거예요. 명령을 하면, “이게 미쳤나?” 하고 거부하면 되는데 우린 거부를 못하고 있다는 말은 어느새 우리가 고려하지 요소가 있는 거예요. 그게 권세인데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그게 어두움의 권세인 거예요. 에베소서 2장에서 그때 네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복종했다고 하지요. 우리는 어두움의 권세에 복종한 거예요. 그것을 태어나면서 몰랐지요. 살아가면서 점점 느끼지요. 세상은 뭡니까? 예수님 말씀 그대로지요. 눈에 안 보이지요. 안 보이는 게 우리 신체를 지배할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데카르트가 연구해서 그걸 뽑아낼 수 없습니다.
데카라트 말이 맞습니까, 예수님 말씀이 맞아요? 제가 문제 던집니다. 예수님을 죽인 것이 바리새인입니까, 어두움의 권세입니까? 어두움의 권세지요. 어두움의 권세가 바리새인 배후에 있는 악마였단 말이죠. 악마는 천사는 안 보여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에 너의 아비는 마귀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바리새인은 우깁니다. 우리 아비는 아브라함이라는 겁니다. 누구 말이 맞아요? 바리새인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이에요, 악마에요? 그것은 같은 인간이라면 누구 편을 들 수밖에 없습니까? 유대인이니까 바리새인이 맞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너의 아비는 악마라 할 때 그 악마를 경유할 수 있는 어떤 정신적 신체적 방법이 우리한테 내장돼있습니까? 우리한테 그런 게 없지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다는 게 얼마나 불가능한 일이냐 이 말입니다. 제 말은. 내장되어 믿는 예수는 악마가 시킨 예수에요. 그게 아니고 내가 증명할 수 없고 해명할 수 없는데 주께서 너는 그동안 악마에 속했다고 해주는 그 통보가 믿어진다는 것은 주의 성령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냥 피동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참새가 하나님이 기르신다는 걸 안다면 그건 참새가 연구해서 안 게 아니고 그게 사실이기 때문에 주께서 한 일 속에 포함됐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전에는 우리가 마귀에 속했지만 지금은 예수님의 용서와 은혜에 지배받고 있고 이미 천국은 시작됐다는 것이 믿어진다는 주께서 그렇게 활동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를 끝내면서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빨갛다. 장미가. 본다. 누가? 내가. 그 주체 자리에다 데카트르는 하나님을 집어넣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고 했는데 그것이 옳지 않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데카르트가 이미 나로부터 시작한 입장에서 하나님을 거론해도 결국은 내가 진리확보차원에서 한 것밖에 안 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에요.
그 하나님 자리에 뭘 집어넣으란 말입니까? 인간이 알 수 없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집어넣어야 아들의 나라로 가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나라로. 그만큼 우리는 우리 힘으로 구원될 수 없는 자요, 우리는 죄 값으로 지옥에 가야 마땅하다는 그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서 그런 우리를 주께서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그걸 우리 삶의 주체로서 담백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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