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140923-행26장14절(기적)65강 - 이 근호 목사
대전140923-행26장14절(기적)65강 - 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175.116.147.179)
대전140923-행26장14절(기적)65강 - 이 근호 목사
사도행전26장14절하겠습니다. 13절부터 보겠습니다.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뒤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사도바울이 경험했던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빛이 있었습니다. 빛이 굉장히 해보다 밝은 빛이었다. 해보다 더 밝은 빛이었다는 것은 사도바울의 망막이 날아간 거죠. 아예.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비취니까. 빛만 비취고 사라진 것 같으면 UFO처럼 생각하겠는데 거기서 음성이 들렸지요. 그런데 그 음성이 우우우 그런 음성도 아니고 음음음 음성도 아니고 모르는 음성도 아니고 분명히 요새 같으면 한국말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표준말로 이야기한다 말이죠. 그런 이야기하는데 그 이야기 내용이 사도바울에게 쏙 오래 동안 기억되도록 그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그 기억 내용이 뭐냐, 그 히브리 방언이라 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이렇게 생각하면 되고요, 그 다음에 사울아, 사울아, 너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핍박이 되려면 상대방을 멱살을 쥔다든지 상대방을 지금 밑으로 누르고 때릴 때 눌린 사람이 하는 말이 “오, 당신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이리 되는데 지금 핍박당한다는 그 분이 지금 빛을 비춰서 사울의 눈이 지금 완전히 장님 되었잖아요. 그러면 더 센 분이란 말이죠. 센 분이 어떻게 약한 인간한테 핍박을 받는다고 주장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니 사울에게는 이게 좀 엉뚱한 이야기고 자기가 거기에 동의하기가 곤란하지요. 그러면 자기는 언제 빛 대신 주님을 핍박했습니까? 이렇게 이야기 할 게 아니고 자기가 이렇게 하는 행동들을 봐야 되지요. ‘지금 내가 뭘 하고 있지?’ 지금 사울이라는 사람이 뭘 하는 일이죠?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중이죠. 한 번 적어볼게요. 지금 사울은 누구하고 상대하는가 하면, 같은 인간들하고 상대해요. 상대하면서 핍박을 가하게 됩니다. 이것은 핍박당하는 자는 힘이 없고 사울은 뭐가 있습니까? 핍박할 만한 힘을 갖고 있지요. 그러면 사울은 힘을 가진 자가 되고 핍박당한다는 말은 그 만한 힘한테 눌린다는 뜻이에요. 힘없음이 되지요.
그러면 갑자기 여기서 사울에게 빛이 내려온 거예요. 빛이 내려와서 빛에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지금 이들을 대변하고 이들을 대표하는 발언을 하신 거예요. “사울아, 니가 지금 행동하는 행동이 곧 나를 핍박하는 행동이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이렇게 된 거예요. 사울은 좀 약해보이는 사람을 공격했는데 예수님은 사울이 자기를 핍박하는 걸로 그런 체제, 시스템으로서 지금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자, 이 사울에게 주변사람들이 왕, 신하, 여러 유대인들이 있겠지요. “사울아,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 라고 하니까 “왕이시여, 아그립바 왕이시여, 저한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라고 지금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걸 제가 쉽게 이야기해드릴게요. 지금 번역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왕 당신이 내 말 듣기 전에는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당신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왕이시여, 잘 들으소서.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비로소 내가 알려드리겠습니다. 내가 옛날에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면서 비로소 그 때에 사울은 처음으로 예수 믿는 자와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야말로 이 사람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냥 핍박한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하나님 중심이지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으로 한 겁니다. 요게 중요하기 때문에 빨간 걸로 해볼게요. 사울은 옛날에 무슨 중심이었다? 하나님 중심이었다. 하나님 중심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거예요. 지금도 이슬람나라에서는 하나님 알라신 신 중심이잖아요. 힌두교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이게 틀려먹었다는 거예요.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는 거예요. 만약에 하나님 중심으로 살게 되면 반드시 누구를 핍박하게 되어있는 구조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이다. 뭐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라고 이런 식으로 살아가게 되면 반드시 그 사람은 지금 실제로 이 세상을 운영하시는 분을 핍박하는 양상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순복음 교단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 중심이에요. 하나님 섬깁니다. 이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설교하기 때문에 이들은 필히 누구를 공격하게 되어있어요? 예수님을 핍박하는 중입니다. 현재진행형이지요. 지금 핍박하는 중이에요. 핍박하는 중인데 그들은 뭐냐 하면, 사람들을 내가 믿는 하나님 중심으로 다 포섭을 하고 종속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예수는 어떤 예수냐 하면, 이미 그들이 차려놓은 밥상에다가 숟가락만 하나 얹어놓는 거예요. 예수라는 숟가락만 얹으면 이게 온전한 기독교가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숟가락만 얹으면. 그러나 예수님이 그 밥상에 들어가면 그 밥상은 완전히 엎어져버려요. 왜냐 하면, 인간들이 하나님 중심이라 하는 것은 실은 이게 실상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나 중심이에요. 나 중심. 자기의 자존심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 중심이라면 반드시 나 중심을 인정해야 되는데 예수님 중심이라면 내 중심이 허용이 안돼요. 왜냐 하면, 예수님은 썩어빠진 나 때문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예수님 중심이라 하는 것은 나를 지적하는 중심이거든요. 남을 나쁘다고 하지마라, 내가 보기에는 니가 나빠, 우리 자신을 삿대질하고 손가락질하고 우리 자신을 비난하는 쪽으로 세상은 돌아가는 겁니다. 사울아, 사울아 니가 나를 왜 핍박하느냐,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사울은 자기는 옛날에 하나님 중심이었는데, 그 하나님 중심이었던 것 때문에 도리어 예수님과 접촉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었다는 거예요. 하나님 중심이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을 핍박하는 양상으로 예수님과 만나게 되었다. 예수님은 누구냐, 나로부터 핍박 받으신 분이고 나는 누구냐, 나는 이 세상을 운영하시는 주님을 한참 핍박하면서 살아오고 있는 그런 나. 나는 나다! 라고 하지 말고 앞에 핍박하는 나! 누구를? 예수님을 핍박하는 나로서 모든 인간은 나로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 이 사실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세움으로서 비로소 나도 몰랐던 이런 존재를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우리는 주님을 핍박하는데 핍박하는 자에 대한 주님의 대처는 그게 용서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걸 적어보면 핍박에 대해서 마중 나오는 것은 ‘용서해주심’ 무엇을? 그것을. 그것이라 하는 것은 바로 나 중심에 핍박하는 것을 용서하시는 분으로서 우리는 비로소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냐? 병고치고 물 위를 건너시고 아닙니다. 예수님은 누구시냐, 나를 용서하시는 분이에요. 예수님이 만약에 병 고쳤다 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이용할 생각을 할 겁니다. 건강할 때는 이용 안하지만 몸도 아프고 돈도 없고 이럴 때는 병원에 가기도 싫고 주사 맞기도 싫고 “주여, 기도할 테니까 내일 아침에 멀쩡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항상 이용하고 싶어 하거든요.
그런데 우리 재아씨한테 물어볼까, 내일 모레 간다니까 건강하게 되면 죄를 지어요? 안 지어요? 건강해도 죄 짓지요. 건강해도 죄 짓습니다. 부자 되면 죄를 지어요? 안 지어요? 죄 짓지요. 가정이 화목하면 죄를 지어요? 안 지어요? 죄 짓지요. 그렇다면 주께서는 어떤 분이다? 용서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건강한 가운데 죄를 찾아내고 부자 된 가운데 뭘 찾아내고? 죄를 찾아내고. 가정화목가운데 죄를 찾아내서 주님께서는 접촉제로 사용해서 만나게 해주시지요. 그런데 인간은 내 중심이기 때문에 “하나님, 건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자 되어서 감사합니다. 가정화목해서 감사합니다.” 이런 것으로 자기는 축복 받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은 순복음 그쪽에서 하는 짓이고 진짜 축복은 ‘아, 내가 이런 이런 것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이것이 바로 내가 미처 몰랐던 죄였구나!’ 내가 만약에 건강하게 되면 아픈 사람을 얏 보게 되고 내가 부자 같으면 가난한 사람을 저주받았다고 이야기할 것이고 내가 가정화목하게 되면 남이 불행한 가정보고 비웃게 되고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핍박이 된다는 사실이에요. 이게 핍박이 돼요. 그러니까 사울이 만났던 예수님이 사울과 예수님의 관계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의 시작이라 보면 돼요.
예수님이 가셨던 그 십자가의 의미를 사람들은 몰랐어요. 몰랐는데, 그걸 처음으로 사도바울에게 건드리면서 찾아오신 거예요. 지난주일 낮 설교 들어보셨어요?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자기를 좀 안 건드렸으면 좋겠다. 이 청소년 젊은 사람들이 소망이 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유일한 소망이 있어요. 제발 좀 간섭하지 말란 말이야. 이것 때문에 빨리 어른 되고 싶어. 부모가 자식한테 간섭하는 이유는 자식 잘되라고 하는 것도 있지만, 제일 큰 문제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그래요. 사고 치면 돈이 나가. 남한테 피해를 입히면 돈이 나가요. 부모가 돈 벌 의사가 없으면 집구석에서 드라마 보며 그냥 잠이나 자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잠 깨워가면서 나가는 이유는 자식들 먹여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거든요.
그러니까 부모 입장에서는 내가 이렇게 밖에 나가는 것이 경제적 활동해서 나가는데 니가 보탬은 안 될지언정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다고 피해까지 입혀버리면 부모로서는 힘마저 완전히 무너지게 되는 거죠. 부모가 자식을 잘 키우는 이유가 경제적 부담을 덜 지고 이제 내가 안 키워도 누가 대신 좀 데려가주면 좋은 신랑 데려가 주게 되면 경제적인 부담이 훅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잘 키워야 돼요. 잘 못 키우면 안 데려가니까. 안 팔리니까. 노예 시장에. 인간시장에 안 팔리니까. 잘 키워놓고 예쁘게 키워놔야 서로 경매 붙어서 데려가니까 그래서 세상이라는 것은 마르크스가 그런 주장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아는 거예요.
윤리고 도덕이고 그 밑바닥에는 뭐가 있는가 하면, 돈이 있어서 일단은 생존이 되어야 신앙이고 종교고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삼위일체고 찾지 돈도 안 되는데 무슨 교회를 가고 해요. 그래서 교회 오는 사람이 돈 더 벌게 해달라고 오는 거예요. 돈을 덜 버는지 아니면 내 인생의 짐을 다른 사람이 대신 좀 가져가가지고 내가 짐을 안 져도 나는 책임 다했다 소리 듣고 싶은 그런 게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병고치고 물위를 걸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좋아들 했습니까? 오병이어 할 때는 환호성을 불렀고 물 위를 걸을 때 제자들은 놀랬지요. “야, 진짜 우리가 대박 터트렸구나! 우리 지켜주실 분을 지금 함께 동행 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세상에 부러울 게 없어라.” 이리 됐다 말이죠. 하지만 주님께서 원하는 것은 인간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생존이 아니고 용서해주심이에요. 용서해주심.
용서가 되어야 그 다음에 뭘 얻느냐 하면, 생존이 아니고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교회가 뭐해야 됩니까? 용서를 이야기해야 되겠어요? 생존을 이야기해야겠어요? 어느 쪽이 목적이 되어야 돼요? 용서가 목적이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뭘 끄집어낼 수 있어야 돼요? 죄를 끄집어내서 예수의 피로 이미 용서받은 생명을 갖고 살아갑니다. 이렇게 해야 되는데, 사람들은 생존을 갖고 갑니다. 이리되면 이것은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다 똑같이 목숨 귀한 거 다 아니까 이런 이야기는 절에서 하는 이야기나 교회에서 하나 아무 의미도 없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 만났는데 한 달 수입이 얼마 늘어났어요? 사도가 주님 만나고 난 뒤에 아가씨 만나서 결혼했습니까? 도대체 예수님 만나고 그가 이익 본 게 뭐가 있지요? 어떤 것을 이익 봤어요? 없지요. 사도가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자기가 이익 본 것은 없지만, 변화된 건 있습니다. 뭐냐 하면, ‘나를 잊어버린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렸어요. 삼층천에 올라갈 때 그 이야기하지요. 내가 삼층천에 올라갔는데 그가 누군지를 모르겠다.
내가 더 이상 나를 생각할 권한이 나한테는 없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내 인생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내 인생은 없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어요. 내 인생은 없는 거예요. 내 인생은 없다는 말이 사도의 편지 속에 이렇게 되어있어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이렇게 표현되어 있어요. 내가 사나 죽으나 내가 죽는 것, 사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신경 쓸 권한은 나한테는 없다. 내가 백년을 살아도 내가 백년을 살았다 할 권한은 없습니다. 내가 이십년 살면, “에게, 이십년만 살았어요.” 하고 항변할 권한도 나한테는 아예 박탈당했습니다.
이것을 나를 잊자. 하는 이 이야기, 내가 생각할 권한이 없다. 이걸 가지고 아까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일 때, 예수님은 이걸 뭐로 봤습니까? 자기에 대한 핍박으로 봤지요. 그리고 사울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달라진 게 뭐냐 하면, 바로 ‘나를 잊자.’라고 했잖아요. 이걸 갈라디아서 2장20절에서는 이것을 자신의 죽음으로 본 거예요. 자신의 죽음.
그러니까 이걸 두 개로 연결시키면 전에는 예수님을 핍박했는데 지금은 예수님한테 매일같이 죽어줘야 될 나, 생긴 나를 또 주께서 나를 죽여 버리지요. 나를 죽인 현장에 비로소 주님의 살아계심이 나타나는 겁니다. 내가 죽지 아니하면 내가 살아있는 게 되어버려요. 내가 나를 이렇게 없애버리면 주님이 살아있는 게 돼요.
그래서 중국의 마술 연극할 때 보면 옷을 여러 겹 입어가지고 한 바퀴 돌때마다 여자 무용수들이 옷이 바꿔지잖아요. 아주 신기한 재주를 부리잖아요. 옷이 열 개가 몇 초도 안 걸려서 바뀌잖아요. 내가 없어지면 주님 여기 있다. 짜잔~ 자기를 없애는 순간 주님의 삶이 자기로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삶은 자기 삶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를 잊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달라지지요.
그런데 오늘 이야기요, 빛이 있었다. 그 다음에 사울아, 사울아, 하는 음성이 들렸다. 이것을 사람들은 보통 기적이라 한다 말이죠. 기적. 그러면 요 사건을 다시 한 번 조립하게 되면 무엇과 무엇으로 되어 있느냐 하면, 빛+음성 되어있지요. 빛이 있었다. 음성이 있었다. 이게 기적입니까? 뭔가 빛이 있었고 빛 속에서 음성이 들렸다. 이걸 만약에 기적이라고 본다면 사람들은 이 기적이,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정리해야 돼요. 요새 이상한 버릇이 되어가지고 설교하고 난 뒤에 다시 정리하게 되지요. 동영상 끊기면 다시 하듯이. 돌아서면 다 잊어버린다 하니 돌아서지 말지. 다시 하겠습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사도바울이 기적을 설명하면서 이걸 뭐라고 했습니까? 결국 끄집어낸 것이 용서와 그리고 무엇의 만남? 죄의 만남이라 했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사람들은 기적을 할 때, 뭐로 정리하느냐 하면, 빛과 음성으로 자기 자신의 만남 이렇게 본다 말이죠. 제가 설명할 때는 죄와 용서의 만남으로 했다 말이죠. 왜냐, 핍박이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너는 핍박하고 주는 용서하거든요. 찾아와줬다는 것은 용서인데.
사람들은 이렇게 기적을 죄와 용서로 보지 않고 이것을 하나의 윤리체제로 봐가지고 이건 생각 안하고 빛과 음성의 체제로 본다는 것은 인간의 죄와 용서를 알 수 있는 그런 세계관이 있는 게 아니고 인간에 있는 것은 무슨 세계관이다? 이걸 가지고 ‘물리적 세계관’이라 해요. 물리적 세계관이라 하는 것은 세상을 하나의 물리적 체제로 보는 겁니다. 과학 체제로. 물리적 체제로.
그러면 빛이 있었다. 하면 사람들의 궁금증이 뭐냐 하면, 그 빛의 강도가 몇 도였을까? 이리 보는 거예요. 룩스가 몇 룩스일까? 왜 그게 궁금한가 하면, 그런 빛과 똑같은 빛이 오게 되면 나는 주님을 만났다는 기적으로 간주하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음성이 몇 마디고 그 음성의 떨림이 어떻고 그 음성을 녹음해놨으면 어떤 남자의 음성, 그런 것이 궁금한 거예요. 그게 궁금하다는 말은 내 자신이 이미 물리적 세계만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가 기도해서 병이 낫다 하면, 기도할 때 손가락 지압을 어느 정도 누르면서 하면 되고 누르고 난 뒤에 시간상 몇 분 동안 기도하면 되고 기도하고 난 뒤 그 사람 머리에서 떼고 난 뒤에 몇 시간 뒤에 병의 호전이 있었으며 그 기도할 때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몇 개 들어가고 주님이라는 단어는 몇 개 들어가며 단어를 쓸 때 표준말을 썼느냐, 경상도 사투리로 했느냐, 그걸 신경 쓰고 그걸 그대로 흉내 내고 모방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인간은.
안수 할 때 정수리에 하느냐, 앞면에 하느냐, 뒷면에 하느냐, 정수리로 할 때 소리의 톤은 어느 정도하느냐, 데시벨은 몇 데시벨로 하느냐, 이렇게 해가지고 그걸 모델로 만들고 싶어 하는 거예요. 주여! 주여! 믿씁니다! 침을 튀겨가면서 하는 게. 그러면 눌린 병자는 가만히 있는 게 아니고 미니까 흔들리잖아요. 흔들리니까 “주여! 성령이 오니까 흔들립니다. 감사합니다. 따라하세요. 따라하세요.” 이게 바로 물리적 세계에서 나오는 거예요. 기적이라는 게. 이런 물리적 방법이 왜 효과가 있는가 하면, 당하는 사람도 물리적 세계에서 나름대로의 어떤 기대하고 있는, 기적이 일어나는 현상에 사전에 짐작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걸 둘이 조율이 된 겁니다. “니 이런 거 원하잖아. 이런 거 해줄게.” 이리 된 거예요. 힘의 에너지를 가해가지고.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박수를 치게 되면 신경조직에 얇은 벽에 모이게 되니까 자꾸 쳐보세요. 열기가 온 몸에 퍼지면서 몸에 퍼지면 몸이 뜨거워지지요. 뜨거워지면 성령에 열 받았다고 보는 거예요. 불 받았다고 보는 겁니다. 박수치면서 예수 믿습니다! 이리 한다 말이에요. 지 혼자 열 받고 몇 분 안 되어 열 받았다 말이죠. 룰루랄라 말 좀 빨리 해버리면 방언이 터지고.
제가 분명히 말합니다. 기적이라 하는 것은 죄 모르고 용서 모르고 나는 핍박하는 자고 주님은 핍박한 자를 용서하시고 이거 모르면 기적 들어오지도 않은 사람이에요. 전부 다 사기꾼이라 보면 됩니다. 전부 다. 목사 자체가 사기꾼들이라 보면 돼요. 당신들 원하는 걸 해 줄 수 있다는 게 목사들의 시작이거든요. 그리고 목사가 이렇게 하게 되면 집사나 권사들도 지도 인간, 나도 인간, 나도 저 정도는 하겠다고 따라 하게 되면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가 믿음 있으니까 나도 믿음 있다. 목사가 구원 받았다. 그럼 나도 구원 받았다. 그럼 나처럼 못하는 사람은 그건 믿음 없는 사람이고 지옥 간다. 내가 불쌍히 여겨야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교회에서. 교회에서 갑자기 계급이 생겨버리지요. 뭐가 기적이냐, 기적을 말씀드립니다. 기적이란 나의 핍박과 주님의 일에 대한 훼방을 극복되는 현상이 기적입니다. 주님의 세계관, 주님의 홀로 하는 이 세계관에 대한 나의 반항과 나의 불평과 나의 항거, 항거를 누가 극복하십니까?
주님이 일을 하시면서 주님께서 나의 주님에 대한 훼방과 주님의 일에 대한 방해를 주께서 극복하셔서 찾아오신 현상이 바로 기적입니다. 뭐가 기적이냐, 선풍기 시원한 바람 나오는 것도 감사한 게 기적이죠. 왜? 선풍기는 에너지로 돌아간다. 이게 물리적 세계에요. 선풍기는 전기를 꽂으면 전기에너지가 있어서 돌아가게 되어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더워서 쩌죽어도 되는데 선풍기 마련해 주셔서 시원한 바람해주시니까 이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요, 혜택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게 감사될 때, 이게 바로 진정한 기적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충분히 선풍기는 주님과 상관없이 ‘선풍기는 내가 전기 꽂아서 돌아간다.’ 라고 생각하는 이 세상이 인간이라고 여기는 나의 세계관을 주님께서 친히 극복하시고 그것이 바로 주의 일에 대한 훼방인 것을 깨닫게 하시면서 찾아오시는 그 현상이 바로 기적이다 이 말입니다. 문장은 길었지만 이해되시겠습니까?
세상만사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사람들에 의해서 운영된다. 이것은 기적이 아니지요. 이것은 흔히 다 느끼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라는 어느 것도 사람들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하는 그 생각에 나도 동조하고 나도 동의하는데 ‘그게 아니야, 그게 바로 나를 핍박하는 것이야.’라는 그런 느낌을 가지고 용서하시기 위해서 찾아와 주시는 것을 느낄 때, 이게 바로 기적입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났는데 한 달 월급 얼마 올라갔습니까? 없지요. 뭐 달라진 게 있습니까? 결혼했습니까? 없지요. 주님의 기적을 받았지만 사도바울이 달라진 게 뭐가 있습니까? 나는 죄인이고 오직 주님은 나를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것. 창세전에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그 사실을 알 뿐이죠.
세상적인 관점에서 뭐를 더 부자 되고 더 건강하게 되고 그런 거 없잖아요. 주의 복음 전하는 거 피곤하기만 하지 도움 되는 거 뭐가 있어요? 그러면서도 사도는 나는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 안에 기적 속에서 떠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본인이 알고 믿게 된 거죠. 내가 뭘 해도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내가 평가내리거나 힘들다고 내가 뭔가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돌아서면 다 잊어버렸지요? 사도바울은 예수 만나고 난 뒤에 달라진 게 뭐가 있습니까? 자기가 자기한테 요구할 권한이 있다? 없다? 없어졌다? 왜? 자기 인생이 아니고 누구 인생이기 때문에? 주님의 인생이기 때문에.
제가 어릴 때, 우리 어머니나 할머니들이 반짇고리 하는 게 있어요. 반짇고리 알아요? 실하고 가위하고 단추하고 담는 통 이걸 반짇고리라고 해요. 바지 뜯어지거나 이불 호청 할 때 요거 할머니들이 어머니들이 열어가지고 거기에 세트로 다 들어있는 게 이걸 반짇고리라고 해요. 고 반짇고리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하면, 옛날 우리 어머니가 옷 가게를 하고 그랬는데, 뭐가 들었느냐 하면, 고슴도치 같은 비슷한 게 있었어요. 바늘이 촘촘히 꽂혀있어요. 바늘 크기가 다 다르니까. 호청 꿰맬 것이냐, 와이셔츠 단추 달 것이냐, 양말 구멍 꿰맬 것이냐에 따라 바늘이 다 달라요. 이것이 예수 믿고 난 뒤에 달라진 거예요. 예수 믿고 난 뒤에 우리가 이런 모습이에요. 주님의 지적과 그리고 용서가 우리가 반짇고리에 있는 것처럼 바늘 꼽는 꽂이에 있는 것처럼 항상 주님 앞에 쑤시고 있다는 것을 느껴지는 것, 이게 기적입니다. 바늘=말씀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보게 되면 우리는 늘 이렇게 주님 앞에 당해야 되고, 당해야 되는데 피가 묻어있는 피의 바늘로 피가 우리 속에 용서로 작용할 수 있도록 이렇게 늘 쑤셔주시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지요. 나 잘남의 증인이 아니고 예수님의 증인 되는 겁니다. 아까 재아한테 물어봤거든요. 연주회 마음에 드느냐고 물어보니까 좀 아쉽다고 했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아무리 잘해도 늘 아쉽게 만들어요. 아쉽게 만들음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것. 내 뜻대로 되고자 하는 생각조차도 이것은 잘못됐다는 겁니다. 내 뜻대로 되어야 된다는 그 생각자체가 아직도 자기를 잊지 못하고 있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겠다는 옛 품성이라는 것을 바늘로 콕 찍어서 이야기해주시는 겁니다. 이미 그 뒤에는 용서가 따라오는 거예요.
사람이 자기를 잊지 못하면요, 사람은 스트레스 받아요. 사람이 왜 잠이 안 오고 왜 불면증 걸리고 우울증 걸리느냐 하면, 자기 문제를 자기가 해결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주일 오후 설교 때 그런 내용을 했거든요. 주님으로부터 “너, 아무것도 아니야.” 그 한소리만 들어도 다 고쳐질 병이에요. “너, 아무것도 아니거든.” 너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음성만 딱 들려오고 그런 내면의 소리만 들려온다면 그 자체로서 세상의 모든 문제는 순간 다 해결되어버렸어요.
사람이 어떤 문제를 갖고 있다는 것은 “내가 지금 이 정도로 무너질 인간이 아니지.” 이것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주님께서 답변은 간단해요. “니가 뭔데?”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박 태환 자기가 체전에서 금메달 딴다고 하다가 3등, 얼마 전에 사격 대표 선수권에서 금메달 딴 권총의 사격의 신은 7등, 지금 국민들이 박 태환! 박 태환! 이러고 있으니까 자기도 뭐 된 줄 아는 기라,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때, 17살 먹은 고등학생이 금메달 두 개 땄잖아요. 사격에서. 항상 “니가 뭔데? 니는 나를 핍박하는 존재에 불과해.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니는 아무것도 아니야. 용서해 주니까 니가 지금 거머리처럼 살아가고 있지 용서 없으면 너는 진작 죽었어. 밥 먹고 숨 쉬는 게 어디 니 공로인 줄 아나? 용서의 공로지. 용서한다는 것은 니는 죄인이야.”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그런 뜻으로 살아라 이 말이죠. 시편51편에서 다윗이 이야기하기를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는 겁니다.
“뭐지? 뭔데? 내가?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만약에 밤에 잠이 안 온다. 잠 잘 이유 없어요. 밤새도록 눈 뜨면 되지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이렇게 헤아리지 말고요, 나는 잠을 자서는 안 된다, 잠 잘 자격도 없다, 나는 잠을 자서는 안 된다 하고 벌써 5분 뒤에 자고 있어요. 나는 절대로 잠자서는 안 돼! 나는 잠 잘 자격도 없어! 하면 벌써 잠자고 있다고요.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살지 못하는 것은 주변이 가만히 두지 않아서 그래요. “니가 이 정도는 되어야지. 니가 이 정도는 되어야 너를 보는 사람들의 기대감을 충족시켜 준다.” 이런 것 때문에 굉장히 우리가 힘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은,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이 세상은 누구 중심이다? 하나님 중심 아니지요. 나 중심 아니지요. 모든 인간이 다 싫어하는, 모든 인간이 다 싫어하신 분의 세상, 이게 세상입니다. 그 분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라 하는 것을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4장11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궁핍 한다 할지라도 이것은 내가 만든 궁핍이 아니기에 나는 그것조차도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것은 뭐냐, 나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만 살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함께 있기에 주님이 살아있기에 내가 사는 것이지 나는 주님한테 붙어있는 우표딱지 같은 존재에요. 본 소포는 주님인데 그 소포가 있다는 것을 여기 주님과 함께 있음을 표시하는 표시로서 그냥 우표 같은 존재로서 그냥 붙어있는 존재입니다. 우표 자체가 소포물은 아니잖아요. 소포물을 이동하기 위한 이동의 표시로서 우표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내가 나의 주인공이 아니다 말이죠. 나의 인생의 모든 내용은 주님이 다 압수해가고 있지 내가 따로 떼 내어가지고 요거는 나만의 인생이라고 따로 보따리 챙길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빌립보서 4장3절에 보면, 놀라운 말씀이 나와요.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그 이름들이 어디에 있다 했습니까?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다. 제가 지난주일 낮에 설교했잖아요. 생명책이라 하는 것은 나를 살리는 책이 아니고 누구를 기념하는 책이에요. 누구를 기념합니까? 주님을 기념하는 책이 곧 생명책이에요. 주님을 기념하기 위해서 모인 명단들이 생명책의 명단들입니다.
예를 들면, 윤봉길의사 기념탑 발기 위원회라고 나올 때, 주인공은 누굽니까? 윤봉길의사잖아요. 그 밑에 비석에 있는 것은 윤봉길 의사를 빛내기 위해서 사회의 인사들이 돈으로 헌금으로 참여했다는 표시가 비석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높이는데 우리가 주님을 높이는 자로서 부름을 받았다는 식으로 주님 기념책에 이름이 있으면 그것이 생명책이고 고 관계는 계속 영원토록 이어지기 때문에 그 관계가 그대로 이어지게 되면 그것이 바로 그리운 금강산이라, 그리운 천국이죠.
그리운 금강산, 그 가사에 보면 가사가 상당히 난해해요. 그 첫째 가사가 뭐냐 하면, 누구의 주재런가, 이 세상의 진정한 테마, 주제가 뭐냐 말이죠. 누구의 주재런가, 가사가. 사람들이여, 우리 민족이 불러야 될 테마는 금강산이다. 이런 뜻이에요. 한국 사람들아, 금강산 위주로 살자 이 말입니다. 누군가 생각해야 될 주된 개념이냐 하는 겁니다.
사도행전 다시 돌아가 봅시다. “사울아, 사울아, 니가 핍박하느냐” 아주 기이한 이 기적은 마지막 최종 분석하게 되면 뭐 + 뭡니까? 빛 + 음성이 아니고 죄 + 용서에요. 따라서 꼭 빛이 안 오고 병이 안 낫고 부자 안 돼도 월급 더 오르지 않더라도 십자가 자체가 거기서 죄인과 용서를 한데 이야기하면서 다가오는 게 그게 십자가 피다. 십자가의 피는 용서의 피고 나를 죄인으로 만드는 그 사건이 십자가인 것을 받아들이면 그 사람이 사도바울과 똑같이 지적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게 성령 받은 사람의 증거입니다.
내가 뭘 해도 죄인이니까 이 죄인 된 나에 대해서 드디어 신경을 뚝 끊어버리자. 신경 끊어버리고 눈을 뜨게 되면 주여, 오늘은 뭘 할까요? 오늘은 어떤 걸 연습할까요? 이것은 누굴 보기 위함이 아니고 누구한테 기대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목적은 지금 내가 농사짓는 게 목적이 아니고 장사하는 게 목적이 아니고 이것이 피아노라면 이건 주의 일로서 하는 거예요. 바이올린은 그걸로 하는 거예요. 얼마나 잘 쳤나 안 쳤나 그것은 아까 했잖아요. 항상 아쉽다. 남들이 박수를 열렬히 쳐도 아이고, 아쉽다! 항상 아쉽고 그렇지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당부가 인간들아, 내일 일을 생각하지 말라. 내일 염려는 내일하고, 내일 염려는 내일하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푹 자라 이 말입니다. 왜냐 하면, 내일 살지 안 살지는 내 손에 맡기고 내일 살아서 내일 누굴 만나고 만나야지. 그것은 나한테 일임해야지 내 소관이지 니 소관 아니다 말이죠. 내일 동창생 만나가지고 이바고 해야지. 그런 것은 하지 말고 그냥 내일 맡기고 오늘 푹 자라 말이죠.
사람은 뭐냐, 사람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다. 참, 이거 생각해 보면요, 그동안 이 인간 세상이 우리를 얼마나 핍박해왔습니까? 얼마나 우리를 힘들게 만들었습니까? 안 살아도 되는데 우리가 살고 있어요. 미치겠어요. 안 살아도 되는데 우리가 지금 살고 있다니까요. 제가 마음 같으면 사라지고 싶지만, 주께서 살려주니 또 할 일이 있으니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허무주의일까요? 허무주의 아니에요. 이게 허무주의 아니고 이게 바로 기쁜 소식입니다.
허무라는 것은 없다는 거잖아요. 복음은 있음입니다. 주님이 지금 있어요. 주님이 살아계셔서 있다. 증거 대라. 내가 여기 있잖아요. 내가 여기 살아 있잖아요. “아이고, 밥 먹고 살겠지” “아니, 주께서 밥 먹여 주셔서 살지요.” 그래서 제가 언젠가 설교했지요. 피동성, 수동성, “주께서 해주셔서 했다.” 항상 ~~했다. 하지 말고, 앞에 ‘당’자를 붙여서 우리는 항상 당하고 삽시다. 주님 앞에 당하고 살아요. 오늘도 커피 한잔 먹음을 당했고, 오늘도 배 먹음을 당했어요. 우리는 늘 당했어요. 우리의 자랑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사실이 그렇기 때문에. 주님 앞에 설 때, 내가 자랑한다는 것이 주님한테는 용납이 안 되기 때문에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주님만 자랑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지금 칭찬 받지만, 이 일이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그만 해!” 하면 끝나는 거예요.
어쨌든 이 14절의 말씀은 하나의 산위에 있는 저수지처럼 이 물이 바깥으로 퍼지지요.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복음의 저수지가 되어가지고 이걸 쪼르르 해가지고 사도바울이 가는 곳에 이 복음의 물줄기가 온 밑에 있는 마을에 퍼지게 되어 있다. 이게 로마까지 가고 스페인까지 가고 유다와 사마리아 땅까지 퍼지는 거예요. 바울만 그런 게 아니고 여기 12사도 다 내려오지요. 12사도가 내려오는 요 과정이 굳어지고 동결되고 얼음이 되어버리면 이게 바로 성경입니다. 사도가 죽으면 더 이상 성경은 없습니다. 마지막 사도가 누굽니까? 마지막 내려온 사도가 사도요한의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내용은 이미 확정됐지요. 어디서 나온다? 모든 성경해석은 바로 어디서 나온다? 십자가 복음에서만 나오기 때문에 이 성경을 해석하는 설교자나 모든 이해하는 교인들은 오직 십자가 경로가 어떤 식으로 구체화 되고 퍼졌는가, 결국은 십자가로 되돌아가는 설교가 되어야 됩니다. 십자가로. 교회로 들어가면 안돼요. 여기 교회가 있는 게 아닙니다. 여기는 십자가 있어요. 교회도 없어요. 십자가 있습니다. 십자가 흘러가는 그 흔적과 자국이 교회일 뿐이지, 소포가 있는데 우표가 우표 자랑하면 안 되잖아요. 실제 소포 내용을 자랑해야지요. 소포 뜯어놓으면 우표 한 장 들어있습니까?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 예수님이 계셔요. 우리를 뜯어보면 예수님이 있어야지 우리 뜯어보면 내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 들어있으면 안돼요.
어떤 사람은 뜯어보면 아주 녹음기 달려있어요. 나는 잘났다. 나는 잘났다. 삐삐 나는 잘났다. 안되잖아요. 그러면 뜯어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잘났고 니는 못났다. 니는 못났고 나는 잘났다.” 이게 안에 녹음되어 있어요. 이게 기적입니다. 이게 기적을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 17,18절 읽어보세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세상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그것도 자신 만만하게. 마치 사실인 것처럼. 그러나 사도는 진짜 사실 맞지요. 그러나 사도를 안 믿는 사람은 마치 사실인 것처럼 그렇게 들리겠지요.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은 우리가 현재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을 사도가 지금 앞서 이야기한 게 되지요. 이것만 유일한 현실이라고 인정하는 거죠.
왜 사도가 이야기합니까? 돌아서면 잊어먹으니까 또 이야기해볼까요. 저수지에서 사도는 뭐라고 해요? 저수지에서 물이 흘러 내려가는 밑에 민가까지 흘러가는 그 물줄기에 해당되면서 성경이 있다 했지요. 이 성경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물줄기에서 뭐가 내려옵니까?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죄사함을 믿어 거룩하게 되었고, 마지막에 무엇을 얻는다? 기업을 얻는다. 기업이란 용어는 사실 현대에서는 잘 안 쓰는 용어인데, 요거 이야기하고 10분 쉽시다.
기업이라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약속을 받을 때, 약속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 기업이라는 거예요. 그것은 10분 쉬고 마태복음 하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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