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24 미국동부오전a
20140924 미국동부오전a
이름 : 한윤범(IP:119.192.174.28)
20140924 미국동부오전a
(강의:이근호 목사)
~와 말씀을 생각할 수 있는 여건이 주님으로 시작했기에 마침과 모든 과정도 주님이 개입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후강의가 교회에서 신약이기 때문에 가정에서는 구약을 생각했습니다. 구약을 하게 된 이유가 신약부터 시작하면 흐름에서 중간부터 시작하니까 앞의 내용이 어떻게 되었기에 예수님 오심이 복음이 되느냐? 복음은 기쁜 소식이거든요.
여기서 질문이 뭐냐 하면, 그렇게 기쁜 소식이라면 천지창조부터 해서 기쁜 소식으로 집어넣으면 될 텐데 왜 예수님 오시고부터가 기쁜 소식이냐는 말입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복음이다. 이러면 되잖아요. 그런데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해놓고 기쁜 소식 이야기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 예수님 오시고부터 시작이 되니까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오시고 난 뒤에 이천 년 뒤에 예수님 오셨습니다. 이야기할 때 듣는 사람이 그걸 생각하셔야 돼요. 아브라함 오시지 말고 예수님 바로 오시면 될 텐데. 그 생각 안 해봤습니까? 아브라함 오실 것 없고, 예수님은 다 이루셨다는데 그 이루심을 앞당겨서 하게 되면 더 편리하지 않습니까. 불필요한 과정을 생략해버리고 바로 아담이 범죄했다. 예수님이 바로 들이닥쳤다. 그래서 천국 가서 자식들 많이 낳아서 천국은 풍성해졌다. 이러면 이야기가 간단한데 어떻게 해서 복음이 예수님부터냐? 왜 그전에는 복음이 아니냐는 그 의문점을 누구나 갖고 있습니다.
이걸 신학교 때 제가 신학교수한테 질문을 했지요. 신학교수가 알 리가 있습니까? 제가 수업시간이 이렇게 질문한 거예요. 마태복음에서 세례요한이 이야기하기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했지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이 신학교에서 배우기를 통치 개념으로 배웠는데 통치 개념이 맞는다면 구약은 하나님의 통치가 아니냐는 말이죠. 구약은 인간의 통치였는가? 아니란 말이죠. 구약부터 하나님의 통치였고 신약신학에서 전통적으로 배우는 것은 에덴동산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라고 이야기했단 말이죠.
그럼 에덴동산이 하나님 나라인데 세례요한이 이야기한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것은 어폐가 있다는 말입니다. 교수님 답변해주세요. 알 리가 있습니까. 몰라요. 어느 누구도 답변을 못하네. 그 이야기나 아브라함 오시지 말고 바로 아브라함 자리에 예수님 오시면 될 문제인데 왜 아브라함 오시고 예수님 오시느냐? 그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에요. 그런 중요한 문제, 일반 교인들도 그런 의문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쉬쉬하고 있으니까 그냥 넘어가는 거지요. 그냥 예수 믿자.
그런데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예수님 이야기거든요. 하지만 도서관이나 일반 서점에서공부를 하게 되면 거기는 예수 이야기가 아니고 이슬람 이야기, 유대교 이야기, 힌두교 이야기, 부처 이야기가 나온다 이 말이죠. 인간의 종교적인 것. 역시 종교에서는 신을 이야기하잖아요. 신을 이야기한다면 왜 인간이, 특히 문화인류학에서는 종교 이전의 신부터 나와요. 알타미라 동굴에 보면 신을 섬기는 내용이 나오잖아요. 왜 그들이 섬긴 신의 내용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정복이 안 되느냐는 그 문제가 또 있어요.
교회에서는 편하게 여러분 하나님 믿습니까? 믿습니다. 누가 만들었지요? 하나님이 만들었지요. 그래요. 이제 신약이 되었으니까 하나 더 추가하세요. 그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입니다. 이렇게 되면 차려놓은 밥상에 그냥 숟가락 하나 얹듯이 예수님 하나 얹으면 완성된 신의 체계라고 그렇게 생각들 하거든요.
그렇다면 다른 종교가 믿는 신, 절대자에다 예수님이 접목이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지요. 접목이 될까요? 접목이 안 되지요. 중요한 것은 이슬람이나 다른 신, 그러니까 철학적으로 말하는 신입니다. 신이란 말은 공통적으로 최고의 인격적인 존재를 말하거든요. 절대적인 존재,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창조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관리 운영하시고 마무리도 그쪽에서 처리하시면서 인간처럼 이성을 가진 인격적인 존재를 신이라 한단 말이죠.
그것은 특수한 종교 말고도 아프리카 토속 민족에도 그게 다 들어있어요. 그래서 그들은 어린양으로 제물을 드리고. 지금도 부두교 같은 경우에서는 피 흘리는 닭의 목을 비틀어서 신에게 드립니다. 그런 자들에서 그리스도가 접목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접목이 된다면 그것은 문제가 커요. 예수님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접목이 안 된다면 문제가 더 커요. 왜 더 크냐 하면 우리가 이방인이거든요. 한국사람, 미국사람은 이방인이에요. 같은 이방인이 믿는 이방종교에는 접목이 안 되면서 특별히 단군의 자손이란 이방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 개념과 접목이 된다면, 그 가운데 뭔가 반칙이, 안 맞는데 억지가 개제돼있어요.
과연 천지 창조했던 조물주에 예수님을 접목시킬 수 있느냐? 아니면 반대로 그 조물주가 너희들이 알고 있던 신이, 신이 아니고 마귀가 조작해준 상상의 절대적 존재, 그것을 철학적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종교적 본성에 의한 하나님, 나의 존재성을 투시한 다른 존재, 포이에르 바하가 이야기했지요. 신이란 인간의 투시라고. 나를 투시한 또 다른 존재를 설정해놓고 거기에 숟가락 하나 얹듯이 부록으로 그러니까 버전을 하나 업그레이드한 거죠. 예수 하나 더 집어넣으면 미흡한 것이 보충되면서 온전한 신의 체계로 삼는 것이 과연 합당하느냐 하는 겁니다.
신학교에서는 합당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왜 그걸 합당하다고 가르쳤을까? 성경에서는 합당하지 않다고 그걸 거부했는데 왜 신학교에서는, 교회사 역사에서는 합당하다고 이야기할까? 그것은 모든 인간들이 나면서 신에 대한 의식이 있기 때문에, 접촉점으로 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신 아시죠? 거기다 예수님 이야기 추가하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구원받은 사람이 됩니다.”라고 함으로써 많은 사람을 교회로 포섭할 수 있는 논리적 전제가 되기 때문에.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여호와를 신봉하는 사람이었고 남들보다 유난히 열심을 내서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게 할까, 남들보다 더 영광 돌릴지를 늘 생각했던 사람이었거든요. 바울이 가말리엘 문하인데 세 가지 유대교 해석 노선이 있는데 그 중 제일 열심이었던 노선이 가말리엘 문하였던 거예요. 가말리엘 문하가 요새처럼 신학 중의 한 부류가 아닙니다. 옛날 유대사회에서는 모든 지혜의 총화에요. 지혜의 총체고 궁극적인 지혜입니다. 그 신 밑에서 경제든 과학이든 거기서 예수든 다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신을 연구한다는 것은 다른 것과 같은 레벨이 아니고 최고에 신에 접근된 레벨입니다.
유대신학을 일반교인들은 모를뿐더러 신학교에서도 안 가르치거든요. 유대신학이 커리큘럼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분들이 바리새인이니 사두개인이니 성경에서 예수님이 욕하고 악마의 후손이라고 하니까 자기도 욕하는 대상인줄 알고 있어요. 유대교가 어떻게 유대교인지 몰라요. 그 유대신학이 얼마나 철저를 기하는지 일반 신학교 나온 사람들은 감을 못 잡고 있습니다. 왜? 그걸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반대하기 위해서 배우지 그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 사상이 체계와 합리화가 얼마나 철저한지 생각 못하고 있거든요.
유대교는 한 마디로 누적된 진리체제입니다. 누적이란 쌓이고 쌓이는 겁니다. 이것은 ‘진리는 역사를 따라서’ 이겁니다. 역사가 진척이 되면 진리가 더욱 더 정확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에 멸망 자체를 신의 뜻이라고 봤거든요. 개신교 신학을 한 사람한테는 유대교인들이 얼마나 하나님 중심인지 상상을 못합니다. 지금도 서점에 유대교에서 잠언서를 해석하고, 창세기를 해석한 책들이 가끔 나와요. 거의 팔리지는 않지만 유대교 해석법이 나옵니다. 탈무드가 아주 대중적인 것이지요. 탈무드보다 더 깊이 있는 주석책이 나와요.
그들의 체계가 뭐냐? 유대교의 원리가 뭐냐? 한 마디로 이겁니다. 토라 중심이라 하는데 우리말로 말씀중심입니다. 말씀중심이란 뭔 뜻이냐 하면, 인간 존재보다 말씀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가만히 들어보면 바로 목회하는 목회자들이 누구나 자기 교회가 가장 완벽하고 제대로 된 교회임을 드러내면서 교인들한테 할 수 있는 최고의 호소가 뭐냐 하면, “여러분들은 말씀중심으로 삽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왜 주셨는가? 쉐마! 듣고 지켜라.”
따라서 인간이 피조 된 목적이 뭐냐? 사람이 사는 존재 이유가 뭐냐?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첫째 되는 목적이다. 이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나오는 제1조항이거든요. 이게 유대교신학에 이미 담겨있다는 사실을 1648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사람들이 아마 알았을 거예요. 그런데 모른 척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것이 잘못됐다는 생각을 그들은 감히 못했을 거예요. 인간의 이성으로 놀라운 진리체제에 경외성에 구멍을 낼 생각을 감히 못했을 거예요.
사람이 상식적으로 뭘 안다는 것은 우선 선배들이 이 대목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했는가를 살펴주는 것이, 선배에 대한 존경심보다도 내 자신의 해석이 옳은지 그른지 평가하는 방법은 결국 선배들의 평가와 대조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기존에 뛰어난 사람들은 이 대목을 뭐라고 해석했는가?
그래서 유대교나 현재 개신교 신학은 다른 게 아니고 선배들이 했던 솜씨에 대한 답습과 장점, 좋은 점을 뽑아서 이 시대를 살지 않은 선배들이기 때문에 혹시 미흡하거나 빠진 부분이 있을 거예요. 그것을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신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이 보충하게 되면 보다 완벽한 체제를 이룬다. 이게 칼 포퍼가 이야기한 거예요. 영국의 실용주의 철학자인 칼 포퍼라고 있습니다. 진리는 항상 과오를 반성하고 거기에 대해 새롭게 개선책을 내놓음으로써 진리는 발전한다는 철학적 논리적 사상이 신학에서 유감없이 적용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개신교에서는 대단한 선배로 칼빈과 루터를 제시하는데 막상 개신교에서는 루터는 별로 관심이 없고 칼빈에게 관심이 있어요. 집사님들이 평신도지만 신학교 사정을 알고 있어야 돼요. 왜 루터는 인기가 없고 칼빈은 인기가 있느냐? 그 이유를 아무도 이야기 안 해주지요. 루터는 교회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시스템 중심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칼빈이 일단 혁명에 성공하고 난 뒤에는 그 다음에는 빨리 조직 정비에 나서야 돼요. 왜냐하면 사람은 보이지 않는 신은 항상 뒷전이에요. 뭔가 결실이 있어야 되고 결실에 가입함으로 신적인 안정감을 누리게 돼있습니다.
진리가 뭐냐? 평신도는 힘들어요. 하지만 진리를 외치는 교회에 등록하게 되면 오늘밤에 죽어도 낙원에 가 있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예요. 특정 제도에. 그러니까 목사들은 빨리 특정 제도화시키는데 그 제도화를 굳히는 것이 뭐냐? 전통적인 해석을 우리는 고수합니다. 그 전통적인 해석을 고수하려면 반드시 무엇과 대비되어야 하느냐 하면, 이런 이단들이 교회사에서 발생했고 지금도 발생하고 있는데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배격합니다. 그렇게 해서 교인들에게 심리적인 안정을 줄 수가 있어요.
우리 교회에 잘 나왔어. 등록 참 잘했어. 큰일 날 뻔 했어요. 대한예수재림예수교, 몰몬교, 통일교. 요새 뜨는 신천지. 내 영혼이 엉뚱한데 갈 뻔했어. 그러면서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이런 좋은 교회를 주셔서. 그렇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게 되면 교회 질서가 유지가 돼요. 그러면 쉽게 목회가 가능합니다. 누구 노리고 비판하는 게 아니고 지금 사정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것이 이미 신학교부터 루터는 별로고 칼빈의 [기독교강요]부터 인기가 있었다는 것은, 그걸 가르치는 교수나 신학생들은 무엇이 궁금하느냐 하면, 어떻게 성경에서 진리를 뽑아내고, 그러니까 진리에서 쉽게 칼빈과 루터가 엑기스를 뽑아내면 뽑아놓은 것으로 주택가 한 복판에 대한예수교장로회 간판을 걸고 그것이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구원에 대한 안정감을 제공할 때까지의 프로세스, 연결고리, 이것이 진리고 이 진리를 실처럼 뽑아내게 되면 논리적인 하자가 없을 때는 교회에서 하는 제직회는 목사 뽑을 때는 ⅔ 찬성이 있어야 됩니다. 일반 집사는 과반수 찬성하면 됩니다. 과반수 찬성하면 된다는 그 이야기는 믿음 없어도 들을 수 있는 말이잖아요.
그리고 돌아가면서 청소합시다. 돌아가면서 청소합시다가 디모데전서에 안 나오거든요. 예레미야에 안 나오잖아요. 그런데 “돌아가면서 청소합시다, 돌아가면서 반찬 해옵시다.”라는 것까지 하나님의 손길로 접촉이 돼있는 진리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것, 그 중간에서 목사는 카리스마가 보유돼야 돼요.
교인들은 자기 할 일이 있습니다. 일주일 내내 바쁩니다. 성경까지 신학 옳고, 그름까지 관심을 둘 수가 없어요. 관심 두면 자기 생계를 포기해야 되니까. 일단은 ‘뭘 해야 됩니까?’까지는 전공자인 목사가 다 해주고 교인들은 어디까지 하면 되느냐 하면, 경상도 말로, “시켜만 주이소.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목사가 시키는 대로 했는데 그것이 어디에 포함돼있더라? 하나님의 진리에 하나님께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충성된 종아, 네가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했구나.”라고 납득이 될 수 있도록 목사님이 우리에게 안심과 평안을 정서적인 안정을 해결해 주시오. 그러면 존경하지 말래도 존경해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목사들이, “여러분 그래서는 안 되고 목사는 섬기는 사람이지 섬김을 받는 사람이 아니니까 직접 성경을 보셔야 됩니다.” “목사님 말씀 맞지요. 하지만 우리가 뭘 압니까? 우리는 봐도 모르니까 이것 믿으시면 오늘밤 천국 가 있습니다. 그것까지 깔끔하게 해주시면, 시켜만 주이소. 나는 목사님 권위를 믿습니다. 영적 목자의 권위로 인정하고 믿습니다.” 이러면 교인들은 죽고 난 뒤에 걱정은 한시름 놨잖아요. 세상에 그런 보험이 어디 있습니까. 든든한 보험 들었으니까 생업에 종사해서 살 수 있거든요.
바로 베버란 사람이 이렇게 했습니다. 자본주의의 발달은 개신교의 정신에서 나온다. 19세기 말에 베버란 사회학자가 그런 이야기해서 대 히트를 쳤습니다. 베버의 사상이 지금도 있어요.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이제는 구원 걱정은 뚝,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게 되면 여러분이 획득한 모든 재화와 재물은 신의 축복의 증거물입니다. 이렇게 한 겁니다.
개신교가 그렇게 편안하게 한 증거는 베버의 주장에 의하면 딱 하나였습니다. 그게 바로 유명한 칼빈의 예정론이었습니다. 구원은 여러분이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에베소서 1장 4절에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택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믿음이 왔습니다. 따라서 믿고 안 믿고 간에 예정론만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해도 구원되기 때문에 교회 운영은 목사한테 다 맡겨두시고 여러분은 교회 목사가 소명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는 치과, 농사짓기, 호텔에서 서빙하기 이것조차 여러분 스스로 탓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소명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열심히 종사한 그것이 목회자가 교회를 통해서 목회하는 것만 소명이 아니고 여러분의 일도 소명이니까 안심 놓고 하시면 소명에 대한 대가는 아니지만 축복으로 여러분의 사랑하는 가족을 평생 동안 먹일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으로서 생계비와 여유 자금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하는 일에 조금도 양심 가책 느끼지 마시고 오히려 신의 뜻을 받든다는 그런 심정으로 간호사하시고 의사하시고 판사하시고 여러분 생업에 종사하시고 군인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것이 미국 같은 데는 미국이 개신교잖아요. 크게 작용했다는 겁니다. 그럼 미국과 유럽의 차이점이 뭐냐? 유럽은 한 단계를 거친 거예요. 신은 귀족을 주시고 귀족과 같은 레벨이 성직자고. 그 다음에 여러분에게 왔기 때문에 여러분이 감히 직접 하나님 뜻을 안다는 것은 건방진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직자를 주시고 귀족들을 주신 것도 하나님이 일부러 해놓은 배치입니다.
미국에 건너온 사람은 귀족, 성직 개념이 날아가고 누구나 성직자고 루터가 이야기한 것처럼 만인제사장설이거든요. 그러니까 미국에서는 자본주의가 거칠 것 없이 질주하고 발휘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걸 역사적으로 증명해준 거예요. 그래서 천주교도 바티칸 천주교와 미국 천주교가 달라요. 역시 여기는 신부에 대한 계급의식이 희박해요. 그런데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은 남미의 천주교는 신부에 대한 권한이 절대적입니다. 헌금은 미국에서 제일 많이 나오고 전 천주교 ⅓이 미국에서 헌금 나옵니다. 바티칸은 미국이 살린다고 보시면 돼요.
그런데 문제는 방금 베버이야기하고 근거 하나 댔는데 예정론이죠. 칼빈은 예정론을 주장하면서 유대교가 말하는 예정론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피지 못했습니다. 칼빈의 예정론이 유대교 예정론과 똑같습니다. 아무도 여기에 대해서 몰랐지요. 이걸 최초로 시비 건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누구냐 하면, 독일의 목회자, 신학자도 아니네요. 박사학위도 없습니다. 목회자 칼 바르트였습니다. 들어본 적 있습니까? 여기 평신도도 계시지만 신학이라 하지 마시고 상식으로 들으시면 됩니다.
칼 바르트와 칼빈의 예정론은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측에서는 그 사람을 자유주의라고 규정했어요. 그러나 다른 교파에서는 이 사람을 보수주의라고 합니다. 동일한 사람이 한쪽은 보수주의가 되고, 한쪽은 자유주위가 됐어요. 같은 대한예수교장로회지만 통합 측에서는 칼 바르트는 보수주의로 취급하고 감리교에서도 그렇고.
합동 측에서 자유주의라고 칭한 이유는 칼빈의 예정론을 안 따랐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칼 바르트의 사상을 연구한 게 아니고 단지 기독교강요에 나오는 칼빈의 예정론과 다르다. 그럼 차이점이 뭐냐? 간단해요. 하나님이 창세전에 우리를 예정했다는 겁니다. 칼 바르트의 예정론을 이야기 안 하고 잠시 거수투표에 들어가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했다.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둘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 집사님 같은 경우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