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없는 땅 2004년 8월 1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7:14-20
Re..마 17:14-20 (믿음이 없는 땅)
이름 : 이근호(IP:)
믿음이 없는 땅
2004년 8월 1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7:14-20
17:14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17: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7: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17: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17:19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신약 성경에는 예수님이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우리는 왜 성경에서 예수님을 자꾸만 앞장 세우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사실상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예수님은 하등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늘 "그 까짓 것", 혹은 "네 까짓 것"이라고 비아냥대면서 아예 있으나 마나하는 존재로 취급해 버리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아니더라도 너무나도 중요한 관심사들이 많습니다. 가정과 사회와 국가의 각종 문제들이 혼재해서 들이닥치고 있습니다.
처리해야 될 문제 거리가 그만큼 많다는 것은 예수까지 생각해 줄 여력이 별로 없다는 말도 됩니다. 각종 모임에서 예수까지 챙길 마음이 들지 않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알고 부터 평생 따라다니는 성경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것이다"라는 고린도전서 16:22의 말씀입니다. 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는가 말입니다. 하나님은 평소에 우리들이 얼마나 분주하게 지내는 줄 뻔히 아시면서도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평소에 예수님까지 신경을 쓸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아시면서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곧 평소의 우리 자신에게 무슨 큰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즉 우리가 어떤 성경 구절을 놓고 풀이하고 해석하든지 간에,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가 있다'는 이 말씀에 일치되지 아니하면 우리의 성경 해석은 잘못된 겁니다.
왜 하나님은 예수 중심으로 저주를 규정해 놓으신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너무나도 자기 자신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악마의 행위에 대해서도 마치 악마를 우리 자신들을 상대로 공격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은 참으로 터무니없는 오류입니다. 우리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부터는 이미 좋든 싫든 상관없이 악마의 하수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주인이 자기 하수인을 공격하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인간들에게는 선악적 사고방식이라고 복잡한 그물 같은 것이나 던져주면 그만입니다. 인간들은 선과 악의 체제 밖에 아는 것이 없기에 죽으나 사나 그 체계를 가지고 이웃을 상대하고 하나님을 상대하고 국가를 건설하고 사회를 다져나가고 가정을 꾸며나갑니다.
이 선악의 밧줄로 짠 그물은 일종의 덫입니다. 그 덫에서 헤어 나오려고 헤매면 헤맬수록 더욱 더 그 그물은 자신의 모든 것을 조이기 마련입니다. 선을 행하고자 하면 할수록 그 현장에 예상치도 못한 악 적인 요소들이 본인 속에서 튀어나옵니다.
그러한 단점을 제거하고자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본인은 점점 자신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긴장 속에서 자신을 칼날처럼 갈기 위해서 애를 써야만 합니다. 이러한 연이은 노력에 대해서 본인이 원하는 반대급부가 제 때에 주어지지 않았다고 여기면 항상 마음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불만을 잠재울 수 없게 됩니다.
즉 점점 더 거룩해지는 자신에 대해서 합당한 대우를 하나님께서 제공하지 않고 있다는 불만 같은 것이 생겨나게 됩니다. 오히려 악마는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이러한 선악 체제에 더욱더 매이게 하기 위해서 간증이 될만한 축복거리를 적당하게 뿌려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콩고물을 바라고 그 사람은 더욱더 그 덫 속에서 대외적으로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자아를 생산하는데 열중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삼아서 모이도록 생각을 그렇게 가져가게 됩니다.
그런데 실상은 하나님은 인간하고 상대를 안 합니다. 신앙이란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간 자신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하고만 상대한다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악마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악마가 노리는 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귀신들린 자식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아버지가 나옵니다. 예수님께로 왔다가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 안 계시고 그 시각에 산밑에 있는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도 아무리 애써도 귀신을 쫓아내지도 못하고 병도 낫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에 불만을 품은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 그동안 일을 다 고자질해 버립니다. 이 점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얼마나 더 이 세상에 있어야 하는가?"하고 탄식을 터뜨립니다.
평소에 인간들은 예수님을 별로 여깁니다. 꼭 필요하다고 여기지를 않습니다. 그러다가 가정에 우환이 생기고 자기 직장에 어려움이 생기면 예수님 찾고, 하나님 찾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 자체가 예수님 보시기에 '패역한 세대상'에 해당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중심적으로 살면, 자기 인생에 있어 애환이나 괴로움이 생기면 그것을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저주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 힘으로 그 저주를 철회시키도록 애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이 바로 패역한 이 세대에서도 통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전혀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다가 자기 가정사에 관심사가 터지면 그제야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관심시가 아니라 여전히 자기 자신의 일이 주된 관심사가 될 뿐입니다. 이것은 믿음 행위가 아니라 선악 사고방식에 입각해서 하나님 앞에 겸손한 일과 낮은 마음과 고분고분한 착한 태도를 취하여 그 덕으로 일을 해소해 보자는 노력에 불과합니다.
이 점에 있어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예수님의 일을 대행자라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겁니다. 모두다 예수님에게 관심 없다는 것에는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탄식이 터집니다.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하는 겁니다. 이 말씀은, "내가 없이는 되는 일이 없다는 점이 너무나도 명백할 정도로 이 세대는 너무 자기들 사정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악마는 예수님만 상대합니다. 사도행전 19:15에 보면 악마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당연히 귀신을 추방하고 그 사람의 아들을 낫게 하셨습니다.
성도가 알고 있어야 될 사항은 이 세상이 결코 자기 중심이나 사람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이라는 겁니다. 이 점은 악마도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믿음이란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박아놓은 파이프와 같습니다.
그 관을 통해서 오직 예수님의 의만 흘러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도 선물로 말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 사람 속에는 자기의 의가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가 주도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성도는 의의 종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패역한 세대를 향하여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라고 독촉합니다. 즉 믿음이 있고 없고를 어떤 식으로도 정립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라는 말씀의 취지가 무엇입니까?
겨자씨란 인간의 눈에 띄는 사물 가운데 극단적으로 작은 것을 소개할 때 하는 표현입니다. 만약에 겨자씨보다 더 작다면 아예 없는 축에 드는 겁니다. 없음과 있음의 경계선을 이루는 크기가 바로 겨자씨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보고 '믿음이 적다'고 하셨지만 예수님 보시기에는 믿음이 아예 '없는 축'에 속하는 겁니다. 이것은 믿음의 선물을 받은 쪽과 믿음의 선물을 받지 못한 쪽을 확연하게 구분 짓겠다는 겁니다.
믿음이 있는 쪽은 20절의 말씀처럼 놀랄만한 일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세상을 예수님 중심으로 보면 뭐가 보일까요? 옛날 하나님은 방주에 들어가지 않았던 죄로 인하여 사람들을 다 물에 빠져 죽게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괴팍한 정도를 넘어서 이상스러운 하나님이십니다.
뿐 만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는 인간이 애써서 만든 모든 문화와 문명을 모조리 불덩어리 속에서 다 태워지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나는 소멸하는 불이다"고 하셨습니다. 소멸하는 불 앞에 선 인간은 그야말로 한 줌의 재가 그 진실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그동안 살아온 겁니까? 모든 것이 예수님이 친히 기도하신 덕분에 심판에 유보되어 온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얼마나 예수님을 무용지물처럼 취급해 왔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우리들을 위하여 그동안 은혜를 아끼지 않고 베풀어 왔습니다. 사람이란 자기 탓이요 못되면 남 탓으로 돌립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 중심으로 사고가 전환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왜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받는지를 알았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되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