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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4 미국 강의 140924성경[신학]

2014 미국 강의 140924

이름 : 관리자(IP:203.90.42.222)

미국 동부 오전강의

미국 동부 오후강의

미국 맨해튼교회

미국 뉴욕교회

미국 뉴저지교회

예배

관리자(IP:203.♡.42.222)

14-10-25 15:00

20140924 미국동부오전a

(강의:이근호 목사)

~와 말씀을 생각할 수 있는 여건이 주님으로 시작했기에 마침과 모든 과정도 주님이 개입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후강의가 교회에서 신약이기 때문에 가정에서는 구약을 생각했습니다. 구약을 하게 된 이유가 신약부터 시작하면 흐름에서 중간부터 시작하니까 앞의 내용이 어떻게 되었기에 예수님 오심이 복음이 되느냐? 복음은 기쁜 소식이거든요.

여기서 질문이 뭐냐 하면, 그렇게 기쁜 소식이라면 천지창조부터 해서 기쁜 소식으로 집어넣으면 될 텐데 왜 예수님 오시고부터가 기쁜 소식이냐는 말입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복음이다. 이러면 되잖아요. 그런데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해놓고 기쁜 소식 이야기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 예수님 오시고부터 시작이 되니까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오시고 난 뒤에 이천 년 뒤에 예수님 오셨습니다. 이야기할 때 듣는 사람이 그걸 생각하셔야 돼요. 아브라함 오시지 말고 예수님 바로 오시면 될 텐데. 그 생각 안 해봤습니까? 아브라함 오실 것 없고, 예수님은 다 이루셨다는데 그 이루심을 앞당겨서 하게 되면 더 편리하지 않습니까. 불필요한 과정을 생략해버리고 바로 아담이 범죄했다. 예수님이 바로 들이닥쳤다. 그래서 천국 가서 자식들 많이 낳아서 천국은 풍성해졌다. 이러면 이야기가 간단한데 어떻게 해서 복음이 예수님부터냐? 왜 그전에는 복음이 아니냐는 그 의문점을 누구나 갖고 있습니다.

이걸 신학교 때 제가 신학교수한테 질문을 했지요. 신학교수가 알 리가 있습니까? 제가 수업시간이 이렇게 질문한 거예요. 마태복음에서 세례요한이 이야기하기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했지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이 신학교에서 배우기를 통치 개념으로 배웠는데 통치 개념이 맞는다면 구약은 하나님의 통치가 아니냐는 말이죠. 구약은 인간의 통치였는가? 아니란 말이죠. 구약부터 하나님의 통치였고 신약신학에서 전통적으로 배우는 것은 에덴동산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라고 이야기했단 말이죠.

그럼 에덴동산이 하나님 나라인데 세례요한이 이야기한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것은 어폐가 있다는 말입니다. 교수님 답변해주세요. 알 리가 있습니까. 몰라요. 어느 누구도 답변을 못하네. 그 이야기나 아브라함 오시지 말고 바로 아브라함 자리에 예수님 오시면 될 문제인데 왜 아브라함 오시고 예수님 오시느냐? 그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에요. 그런 중요한 문제, 일반 교인들도 그런 의문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쉬쉬하고 있으니까 그냥 넘어가는 거지요. 그냥 예수 믿자.

그런데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예수님 이야기거든요. 하지만 도서관이나 일반 서점에서공부를 하게 되면 거기는 예수 이야기가 아니고 이슬람 이야기, 유대교 이야기, 힌두교 이야기, 부처 이야기가 나온다 이 말이죠. 인간의 종교적인 것. 역시 종교에서는 신을 이야기하잖아요. 신을 이야기한다면 왜 인간이, 특히 문화인류학에서는 종교 이전의 신부터 나와요. 알타미라 동굴에 보면 신을 섬기는 내용이 나오잖아요. 왜 그들이 섬긴 신의 내용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정복이 안 되느냐는 그 문제가 또 있어요.

교회에서는 편하게 여러분 하나님 믿습니까? 믿습니다. 누가 만들었지요? 하나님이 만들었지요. 그래요. 이제 신약이 되었으니까 하나 더 추가하세요. 그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입니다. 이렇게 되면 차려놓은 밥상에 그냥 숟가락 하나 얹듯이 예수님 하나 얹으면 완성된 신의 체계라고 그렇게 생각들 하거든요.

그렇다면 다른 종교가 믿는 신, 절대자에다 예수님이 접목이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지요. 접목이 될까요? 접목이 안 되지요. 중요한 것은 이슬람이나 다른 신, 그러니까 철학적으로 말하는 신입니다. 신이란 말은 공통적으로 최고의 인격적인 존재를 말하거든요. 절대적인 존재,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창조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관리 운영하시고 마무리도 그쪽에서 처리하시면서 인간처럼 이성을 가진 인격적인 존재를 신이라 한단 말이죠.

그것은 특수한 종교 말고도 아프리카 토속 민족에도 그게 다 들어있어요. 그래서 그들은 어린양으로 제물을 드리고. 지금도 부두교 같은 경우에서는 피 흘리는 닭의 목을 비틀어서 신에게 드립니다. 그런 자들에서 그리스도가 접목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접목이 된다면 그것은 문제가 커요. 예수님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접목이 안 된다면 문제가 더 커요. 왜 더 크냐 하면 우리가 이방인이거든요. 한국사람, 미국사람은 이방인이에요. 같은 이방인이 믿는 이방종교에는 접목이 안 되면서 특별히 단군의 자손이란 이방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 개념과 접목이 된다면, 그 가운데 뭔가 반칙이, 안 맞는데 억지가 개제돼있어요.

과연 천지 창조했던 조물주에 예수님을 접목시킬 수 있느냐? 아니면 반대로 그 조물주가 너희들이 알고 있던 신이, 신이 아니고 마귀가 조작해준 상상의 절대적 존재, 그것을 철학적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종교적 본성에 의한 하나님, 나의 존재성을 투시한 다른 존재, 포이에르 바하가 이야기했지요. 신이란 인간의 투시라고. 나를 투시한 또 다른 존재를 설정해놓고 거기에 숟가락 하나 얹듯이 부록으로 그러니까 버전을 하나 업그레이드한 거죠. 예수 하나 더 집어넣으면 미흡한 것이 보충되면서 온전한 신의 체계로 삼는 것이 과연 합당하느냐 하는 겁니다.

신학교에서는 합당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왜 그걸 합당하다고 가르쳤을까? 성경에서는 합당하지 않다고 그걸 거부했는데 왜 신학교에서는, 교회사 역사에서는 합당하다고 이야기할까? 그것은 모든 인간들이 나면서 신에 대한 의식이 있기 때문에, 접촉점으로 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신 아시죠? 거기다 예수님 이야기 추가하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구원받은 사람이 됩니다.”라고 함으로써 많은 사람을 교회로 포섭할 수 있는 논리적 전제가 되기 때문에.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여호와를 신봉하는 사람이었고 남들보다 유난히 열심을 내서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게 할까, 남들보다 더 영광 돌릴지를 늘 생각했던 사람이었거든요. 바울이 가말리엘 문하인데 세 가지 유대교 해석 노선이 있는데 그 중 제일 열심이었던 노선이 가말리엘 문하였던 거예요. 가말리엘 문하가 요새처럼 신학 중의 한 부류가 아닙니다. 옛날 유대사회에서는 모든 지혜의 총화에요. 지혜의 총체고 궁극적인 지혜입니다. 그 신 밑에서 경제든 과학이든 거기서 예수든 다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신을 연구한다는 것은 다른 것과 같은 레벨이 아니고 최고에 신에 접근된 레벨입니다.

유대신학을 일반교인들은 모를뿐더러 신학교에서도 안 가르치거든요. 유대신학이 커리큘럼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분들이 바리새인이니 사두개인이니 성경에서 예수님이 욕하고 악마의 후손이라고 하니까 자기도 욕하는 대상인줄 알고 있어요. 유대교가 어떻게 유대교인지 몰라요. 그 유대신학이 얼마나 철저를 기하는지 일반 신학교 나온 사람들은 감을 못 잡고 있습니다. 왜? 그걸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반대하기 위해서 배우지 그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 사상이 체계와 합리화가 얼마나 철저한지 생각 못하고 있거든요.

유대교는 한 마디로 누적된 진리체제입니다. 누적이란 쌓이고 쌓이는 겁니다. 이것은 ‘진리는 역사를 따라서’ 이겁니다. 역사가 진척이 되면 진리가 더욱 더 정확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에 멸망 자체를 신의 뜻이라고 봤거든요. 개신교 신학을 한 사람한테는 유대교인들이 얼마나 하나님 중심인지 상상을 못합니다. 지금도 서점에 유대교에서 잠언서를 해석하고, 창세기를 해석한 책들이 가끔 나와요. 거의 팔리지는 않지만 유대교 해석법이 나옵니다. 탈무드가 아주 대중적인 것이지요. 탈무드보다 더 깊이 있는 주석책이 나와요.

그들의 체계가 뭐냐? 유대교의 원리가 뭐냐? 한 마디로 이겁니다. 토라 중심이라 하는데 우리말로 말씀중심입니다. 말씀중심이란 뭔 뜻이냐 하면, 인간 존재보다 말씀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가만히 들어보면 바로 목회하는 목회자들이 누구나 자기 교회가 가장 완벽하고 제대로 된 교회임을 드러내면서 교인들한테 할 수 있는 최고의 호소가 뭐냐 하면, “여러분들은 말씀중심으로 삽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왜 주셨는가? 쉐마! 듣고 지켜라.”

따라서 인간이 피조 된 목적이 뭐냐? 사람이 사는 존재 이유가 뭐냐?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첫째 되는 목적이다. 이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나오는 제1조항이거든요. 이게 유대교신학에 이미 담겨있다는 사실을 1648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사람들이 아마 알았을 거예요. 그런데 모른 척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것이 잘못됐다는 생각을 그들은 감히 못했을 거예요. 인간의 이성으로 놀라운 진리체제에 경외성에 구멍을 낼 생각을 감히 못했을 거예요.

사람이 상식적으로 뭘 안다는 것은 우선 선배들이 이 대목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했는가를 살펴주는 것이, 선배에 대한 존경심보다도 내 자신의 해석이 옳은지 그른지 평가하는 방법은 결국 선배들의 평가와 대조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기존에 뛰어난 사람들은 이 대목을 뭐라고 해석했는가?

그래서 유대교나 현재 개신교 신학은 다른 게 아니고 선배들이 했던 솜씨에 대한 답습과 장점, 좋은 점을 뽑아서 이 시대를 살지 않은 선배들이기 때문에 혹시 미흡하거나 빠진 부분이 있을 거예요. 그것을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신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이 보충하게 되면 보다 완벽한 체제를 이룬다. 이게 칼 포퍼가 이야기한 거예요. 영국의 실용주의 철학자인 칼 포퍼라고 있습니다. 진리는 항상 과오를 반성하고 거기에 대해 새롭게 개선책을 내놓음으로써 진리는 발전한다는 철학적 논리적 사상이 신학에서 유감없이 적용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개신교에서는 대단한 선배로 칼빈과 루터를 제시하는데 막상 개신교에서는 루터는 별로 관심이 없고 칼빈에게 관심이 있어요. 집사님들이 평신도지만 신학교 사정을 알고 있어야 돼요. 왜 루터는 인기가 없고 칼빈은 인기가 있느냐? 그 이유를 아무도 이야기 안 해주지요. 루터는 교회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시스템 중심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칼빈이 일단 혁명에 성공하고 난 뒤에는 그 다음에는 빨리 조직 정비에 나서야 돼요. 왜냐하면 사람은 보이지 않는 신은 항상 뒷전이에요. 뭔가 결실이 있어야 되고 결실에 가입함으로 신적인 안정감을 누리게 돼있습니다.

진리가 뭐냐? 평신도는 힘들어요. 하지만 진리를 외치는 교회에 등록하게 되면 오늘밤에 죽어도 낙원에 가 있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예요. 특정 제도에. 그러니까 목사들은 빨리 특정 제도화시키는데 그 제도화를 굳히는 것이 뭐냐? 전통적인 해석을 우리는 고수합니다. 그 전통적인 해석을 고수하려면 반드시 무엇과 대비되어야 하느냐 하면, 이런 이단들이 교회사에서 발생했고 지금도 발생하고 있는데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배격합니다. 그렇게 해서 교인들에게 심리적인 안정을 줄 수가 있어요.

우리 교회에 잘 나왔어. 등록 참 잘했어. 큰일 날 뻔 했어요. 대한예수재림예수교, 몰몬교, 통일교. 요새 뜨는 신천지. 내 영혼이 엉뚱한데 갈 뻔했어. 그러면서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이런 좋은 교회를 주셔서. 그렇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게 되면 교회 질서가 유지가 돼요. 그러면 쉽게 목회가 가능합니다. 누구 노리고 비판하는 게 아니고 지금 사정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것이 이미 신학교부터 루터는 별로고 칼빈의 [기독교강요]부터 인기가 있었다는 것은, 그걸 가르치는 교수나 신학생들은 무엇이 궁금하느냐 하면, 어떻게 성경에서 진리를 뽑아내고, 그러니까 진리에서 쉽게 칼빈과 루터가 엑기스를 뽑아내면 뽑아놓은 것으로 주택가 한 복판에 대한예수교장로회 간판을 걸고 그것이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구원에 대한 안정감을 제공할 때까지의 프로세스, 연결고리, 이것이 진리고 이 진리를 실처럼 뽑아내게 되면 논리적인 하자가 없을 때는 교회에서 하는 제직회는 목사 뽑을 때는 ⅔ 찬성이 있어야 됩니다. 일반 집사는 과반수 찬성하면 됩니다. 과반수 찬성하면 된다는 그 이야기는 믿음 없어도 들을 수 있는 말이잖아요.

그리고 돌아가면서 청소합시다. 돌아가면서 청소합시다가 디모데전서에 안 나오거든요. 예레미야에 안 나오잖아요. 그런데 “돌아가면서 청소합시다, 돌아가면서 반찬 해옵시다.”라는 것까지 하나님의 손길로 접촉이 돼있는 진리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것, 그 중간에서 목사는 카리스마가 보유돼야 돼요.

교인들은 자기 할 일이 있습니다. 일주일 내내 바쁩니다. 성경까지 신학 옳고, 그름까지 관심을 둘 수가 없어요. 관심 두면 자기 생계를 포기해야 되니까. 일단은 ‘뭘 해야 됩니까?’까지는 전공자인 목사가 다 해주고 교인들은 어디까지 하면 되느냐 하면, 경상도 말로, “시켜만 주이소.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목사가 시키는 대로 했는데 그것이 어디에 포함돼있더라? 하나님의 진리에 하나님께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충성된 종아, 네가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했구나.”라고 납득이 될 수 있도록 목사님이 우리에게 안심과 평안을 정서적인 안정을 해결해 주시오. 그러면 존경하지 말래도 존경해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목사들이, “여러분 그래서는 안 되고 목사는 섬기는 사람이지 섬김을 받는 사람이 아니니까 직접 성경을 보셔야 됩니다.” “목사님 말씀 맞지요. 하지만 우리가 뭘 압니까? 우리는 봐도 모르니까 이것 믿으시면 오늘밤 천국 가 있습니다. 그것까지 깔끔하게 해주시면, 시켜만 주이소. 나는 목사님 권위를 믿습니다. 영적 목자의 권위로 인정하고 믿습니다.” 이러면 교인들은 죽고 난 뒤에 걱정은 한시름 놨잖아요. 세상에 그런 보험이 어디 있습니까. 든든한 보험 들었으니까 생업에 종사해서 살 수 있거든요.

바로 베버란 사람이 이렇게 했습니다. 자본주의의 발달은 개신교의 정신에서 나온다. 19세기 말에 베버란 사회학자가 그런 이야기해서 대 히트를 쳤습니다. 베버의 사상이 지금도 있어요.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이제는 구원 걱정은 뚝,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게 되면 여러분이 획득한 모든 재화와 재물은 신의 축복의 증거물입니다. 이렇게 한 겁니다.

개신교가 그렇게 편안하게 한 증거는 베버의 주장에 의하면 딱 하나였습니다. 그게 바로 유명한 칼빈의 예정론이었습니다. 구원은 여러분이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에베소서 1장 4절에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택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믿음이 왔습니다. 따라서 믿고 안 믿고 간에 예정론만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해도 구원되기 때문에 교회 운영은 목사한테 다 맡겨두시고 여러분은 교회 목사가 소명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는 치과, 농사짓기, 호텔에서 서빙하기 이것조차 여러분 스스로 탓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소명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열심히 종사한 그것이 목회자가 교회를 통해서 목회하는 것만 소명이 아니고 여러분의 일도 소명이니까 안심 놓고 하시면 소명에 대한 대가는 아니지만 축복으로 여러분의 사랑하는 가족을 평생 동안 먹일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으로서 생계비와 여유 자금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하는 일에 조금도 양심 가책 느끼지 마시고 오히려 신의 뜻을 받든다는 그런 심정으로 간호사하시고 의사하시고 판사하시고 여러분 생업에 종사하시고 군인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것이 미국 같은 데는 미국이 개신교잖아요. 크게 작용했다는 겁니다. 그럼 미국과 유럽의 차이점이 뭐냐? 유럽은 한 단계를 거친 거예요. 신은 귀족을 주시고 귀족과 같은 레벨이 성직자고. 그 다음에 여러분에게 왔기 때문에 여러분이 감히 직접 하나님 뜻을 안다는 것은 건방진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직자를 주시고 귀족들을 주신 것도 하나님이 일부러 해놓은 배치입니다.

미국에 건너온 사람은 귀족, 성직 개념이 날아가고 누구나 성직자고 루터가 이야기한 것처럼 만인제사장설이거든요. 그러니까 미국에서는 자본주의가 거칠 것 없이 질주하고 발휘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걸 역사적으로 증명해준 거예요. 그래서 천주교도 바티칸 천주교와 미국 천주교가 달라요. 역시 여기는 신부에 대한 계급의식이 희박해요. 그런데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은 남미의 천주교는 신부에 대한 권한이 절대적입니다. 헌금은 미국에서 제일 많이 나오고 전 천주교 ⅓이 미국에서 헌금 나옵니다. 바티칸은 미국이 살린다고 보시면 돼요.

그런데 문제는 방금 베버이야기하고 근거 하나 댔는데 예정론이죠. 칼빈은 예정론을 주장하면서 유대교가 말하는 예정론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피지 못했습니다. 칼빈의 예정론이 유대교 예정론과 똑같습니다. 아무도 여기에 대해서 몰랐지요. 이걸 최초로 시비 건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누구냐 하면, 독일의 목회자, 신학자도 아니네요. 박사학위도 없습니다. 목회자 칼 바르트였습니다. 들어본 적 있습니까? 여기 평신도도 계시지만 신학이라 하지 마시고 상식으로 들으시면 됩니다.

칼 바르트와 칼빈의 예정론은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측에서는 그 사람을 자유주의라고 규정했어요. 그러나 다른 교파에서는 이 사람을 보수주의라고 합니다. 동일한 사람이 한쪽은 보수주의가 되고, 한쪽은 자유주위가 됐어요. 같은 대한예수교장로회지만 통합 측에서는 칼 바르트는 보수주의로 취급하고 감리교에서도 그렇고.

합동 측에서 자유주의라고 칭한 이유는 칼빈의 예정론을 안 따랐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칼 바르트의 사상을 연구한 게 아니고 단지 기독교강요에 나오는 칼빈의 예정론과 다르다. 그럼 차이점이 뭐냐? 간단해요. 하나님이 창세전에 우리를 예정했다는 겁니다. 칼 바르트의 예정론을 이야기 안 하고 잠시 거수투표에 들어가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했다.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둘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 집사님 같은 경우에는?

-아니죠.

아니에요? 공부 많이 했네요.

틀렸다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고 어디서 틀렸는지 알아야 되겠지요. 칼 바르트는 이야기합니다. 뭔가 하나 빠졌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예정되었다고 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에게 과연 예정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경로가 이스라엘을 통하지 않고서는 마련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에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이해될까 걱정되는데.

이방인에 대한 창세전의 예정이 이스라엘이란 경로를 통과하지 않고도 예정이 될 수 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 칼 바르트는 예정이 안 된다고 본 것이고. 유럽 자체가 이방이니까. 칼빈 당시에. 로마인이나 게르만 민족은 이방인들이에요. 이방인들은 성경을 다이렉트로 봤거든요.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구약성경 자체가 하나님을 애 먹였잖아요. 그러니까 통째로 빼버린 거예요. 믿음도 없는 인간들, 세상이 이렇게 은혜 받고도 하나님께 대항하다니. 거기에 비해서 로마인과 게르만족은 얼마나 착한지. 이스라엘이 버렸던 하나님을 통째로 믿으니까 그들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직접 우리와 상대합시다. 우린 하나님 믿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사실 게르만 민족은 북방민족이잖아요. 476년인가 로마 멸망하고 난 뒤에는 국교를 기독교로 바꿔버렸어요. 바꾸는 과정에서 그들은 신학이고 뭐고 없습니다. 오딘,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신이 오딘입니다. 오딘의 절대적 존재가 졸지에 성경에 나오는 용어로 바뀌어버린 거예요. 수월하니까. 그리고 선교나 전도하는 사람이 세세하게 신학 따지면 전도 안 돼요. 여러분 알고 있는 그대로 숟가락만 얹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신은 맞는데 빠진 게 하나 있습니다. 그분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만 부록으로 집어넣으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바탕은 남겨둔 채 예수님만 집어넣은 거예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여호와를 믿던 사람이잖아요. 사울이 직접 예수님 만날 때 무슨 소리를 듣습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지금 사울이란 사람이 하는 행동이 본인의 명예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여호와지요. 여호와가 모세와 독대해서 모세에게 말씀을 주신 그 하나님이잖아요. 그 하나님을 믿는 연장선에서 활동한 그것이 예수님을 보태면 될 문제가 아니고, 숟가락 하나 얹을 문제가 아니고 이게 핍박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연장선 위에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 통째로 전부 다 삭제시킨다는 거예요. 내가 알고 있던 여호와가 여호와 아니었음으로 삭제시키는 그 능력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페인트 칠 다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제가 창세기 시작하면서 생각하는 건 뭐냐 하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은 이슬람교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힌두교, 우리나라 아무 종교 없는 무속신앙에서 신의 이름이 조물주에요. 뜻은 모든 세상을 창조하신 분. 교회 다닌 적도 없는 돌아가신 할머니도 알고 있습니다.

이 조물주라든지 모든 것을 예수님이 삭제해요. 삭제하는 근거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그런 식으로 창세기 1장 1절을 해석할 용의가 돼 있느냐?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다가 숟가락 하나 얹는 것처럼 그분의 아들이 예수님이라고 내용을 보태는 것이 아니고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고백하는 내가 예수님을 핍박할 이유로써 작용할 수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이여, 모든 천지만물을 신이 만들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이 고백이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요인인 것을 자인하겠습니다. 누가 나서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 있으니까 눈에 보이니까 창세기 1장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아멘 붙여가면서 받아들이면 이제부터 나는 신자의 생활이 스타트되는 데요? 이게 죄라고요? 마귀라는 유령이 날 속여서 이런 고백을 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과연 그런 건가요? 과연 그렇다는 겁니다. 무슨 수로 이런 고백이 나옵니까. 이건 우리 자존심이 걸린 문제입니다. 40,50년 교회 다니고 목사, 장로 되고 신학박사 되도 이 자존심은 항상 남아 있는 거란 말이죠.

우리는 빠졌다고 생각했어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고백하는 이것도 맞고, 빠진 것이 뭐냐? 골로새서 1장에 보니까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래서 만들었다. 그럼 내가 알고 있는 것도 일단 맞는 이야기고, 거기에 추가해서 예수님이 했다는 내용을 보완해가면 나도 맞고 주님도 맞고. 그로 인하여 옛날보다 더 확실해지고. 그럼 그 동안 믿었던 내 자존심도 유지가 될 수 있으니까 즐겁다.

중세에는 신학과 철학이 구분되지 않았어요. 이건 상식적으로 아는 이야기인데 이 말은 중세 신학이 뭐냐고 물으면서 이미 그 사람 본인도 알지 못하게 중세 철학으로 빠졌다는 생각도 같은 뜻이에요. 신학과 철학이 구분되지 않았다는 말은, 신학을 하고 있다는 말이 철학을 하고 있다는 말과 동일한 말이 된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돼요.

그러면 중세 철학이 뭐냐 하면, 빛에 가까이 있는 사람은 진리에 가깝고 빛에 멀리 있는 사람은 진리와 멀어진다. 이것이 유명한 어거스틴의 신학입니다. 하여튼 중세 때 무슨 이야기만 하면 그 말도 맞는다는 인상을 갖고 있어요. 빛에 가까이 가게 되면 진리에 가깝고 빛과 멀어지게 되면 지옥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발생된 것이 천주교의 연옥설이거든요. 사람들은 천주교의 이론들이 막 나온 줄 알고 있어요. 철두철미한 체계 앞에서 누가 따져도 결국 성경과 연결되도록 해놓고 일곱 성사가 나왔다는 사실을 개신교에서는 공부를 안 하니 모르는데 이런 철학이 돼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못난 사람 죄 짓는 사람에 대해서 저주받는다고 이야기하는 그렇게 선언하는 소위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판결은 정당화돼버려요. 이것이 예수님 당시에 일곱 계급으로 구분되면서 정당화를 유지한 겁니다. 유대교에서 빛에 가까운 사람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었어요. 그들은 말씀과 가까웠습니다. 아까 제가 유대교 해석의 기본이 말씀중심이라고 했잖아요.

따라서 말씀과 접촉을 덜 갖거나 평소에 율법/토라를 적게 보거나 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돈 벌어도 일곱 단계에서 아래 단계에 있으면서 그들을 통째로 죄인으로 분류한 겁니다. 왜? 토라, 말씀이 중심인데 사람은 말씀으로 사는 게 목표인데 어디에 천박한 돈 번다고 나 같은 목사들은 그저 말씀만 하기 때문에 존경을 해야 되고 천박하게 돈만 버는 인간들은 저주받아 마땅하고. 따라서 신의 권위에 입각해서 신의 카리스마에 입각해서 너는 내 말에 꿇으라는 지시와 명령이 정당화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미 어거스틴 체제 자체가 빛과 가까이 있는 사람이 진리에 가깝고 빛과 멀리 있는 사람은 저주에 가깝다. 이러한 사상이 사회적으로 체계화되고 구체화되거든요. 사회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관념의 체제에요. 그래서 이 사회란 희한하게 모르는 사람은 아는 사람에게 굴복하게 돼있고 굴복의 사슬이 연결돼있습니다. 그걸 탈피하기 위해서 자본주의는 사유재산 중심으로 체인이 돼있어서 개인의 재산이 많은 사람은 위에, 적은 사람은 밑에 이렇게 돼있지만 지금 이 시대로 마찬가지고. 정신적으로는 그렇지 않아요. 어쨌든 그 시대는 그렇게 돼있다는 말이죠.

이렇게 되다 보니까 여기서 빛이 있다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과 예수님과 충돌을 일으켰고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천국에 간다고 해서 주님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왔단 말이죠. 거꾸로 올라오니까 단순히 이것은 네 자리 내놓으라는 게 아니라 사상의 방향이 위에서부터 내려오는데 위로 올라가니까 물어봅시다. 어느 쪽이 빛입니까? 현재 인간들이 하나님이 빛이라는 그게 빛입니까? 아니면 예수님 쪽에서 출발한 게 빛이 되는 겁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빛이 되겠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빛이 되면 자동적으로 소위 여호와를 섬긴다는 이쪽은 빛의 반대말, 어둠이 되는 거예요. 이게 요한복음에 처음부터 나와 있다고. 여러분들의 그렇게 보셨던 요한복음의 사상적 환경이 이렇습니다. 뒤집기에요. 빛은 어둠이 되고 어둠이 빛이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을 교회에서 해석을 제대로 한다? 아주 위험합니다. 정말 위험해요. 오래된 장로는 졸지에 어둠이 돼버리고 새로 온 신참이 빛이 되는 수가 생겨버려요. 그러면 그 교회 체제, 정서적인 안정, 심리적인 안정에 혼란이 일어나면 반드시 반발이 반항이 나오게 돼있어요.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예정되었다 할 때 칼 바르트가 하는 이야기가 유대교의 예정론과 차이점이 없다는 겁니다. 유대교는 우리 민족은 하나님으로부터 예정되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이 예정되었다는 성경적 근거가 뭐냐? 바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예정된 거죠. 칼 바르트는 말합니다. 그 언약을 예수님이 다 이루었는데.

그러면 다 이루었다는 말이 그냥 양적으로 미흡한데 완전한 것이 예수님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했다는 말도 맞고 다만 미흡했지요. 이게 틀렸다는 말이 아니고 맞는데 플러스알파 들어가는 식으로 예수님을 넣으면 되는데 예수님이 언약을 완성할 때 어떻게 완성했느냐 하면, 십자가 죽음으로 완성했잖아요. 그런데 십자가 죽을 때 예수님이 피해자거든요. 그럼 피해자가 있다는 말은 가해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부터 시작합니다. 그 가해자가 누구냐는 겁니다. 가해자의 정체가 뭐냐? 가해자가 품고 있던 성경 해석적 사고방식이 뭔지 따져보자는 말이죠. 그것이 뭐냐 하면, 그 당시 우리는 언약으로 하나님이 택해서 창세전부터 예정된 민족이라는 것이 예수님을 가해할 수밖에 없는 동기로 작용한 거지요.

그러면 그 유대인이 누구 후손입니까? 아담의 후손이지요. 그럼 우리는 누구 후손이지요? 아담의 후손이지요. 우리 안에 유대교 있는 거예요.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 이 세상에 있어도 예수님을 가해할 수밖에 없는 가해 동기가 우리한테 발생되고 있다는 겁니다. 신은 우리 편이다. 이건 이슬람 테러집단의 구호 아닙니까. 신은 우리와 함께 있다. 그게 유대교뿐만 아니고 힌두교도 마찬가지에요. 모든 철학이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물론 모든 게.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너희는 내 앞에서 얼마나 의인인지를 생각하지 말고 왜 죄인이어야 하느냐고 내게 물어라.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은 예수님께서 가져가셔서 다 이루셨지만 그 언약의 구체화는 그 언약으로 말미암아 반사된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뭘 해도 죄인 되게 하는 능력으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그런데 죄인 되게 하는 능력이, 우리가 기껏 생각하는 것이 윤리 도덕적 죄를 끄집어내면서 죄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은 피아제 심리학까지 공부 안 해도 일반적 교양공부만 해도 윤리는 진화하게 돼있어요. 도덕과 윤리는 서양역사에서 진화했습니다. 페스탈로치 교육철학은 나중에 피아제 교육심리로 보면 발전되게 돼있어요. 이걸 쉽게 이야기하면 도덕과 윤리라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양심적으로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나의 개인적인 양심이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양심과 어떻게 부딪치지 않을 수가 있느냐? 그게 도덕이고 윤리에요. 사람은 혼자 사는 게 아닙니다.

다음 시간에 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이것은 철학을 공부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게 창세기 1장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와 관련돼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 플라톤이거든요. 플라톤이 신이 창조하고 이 땅에 있는 것은 안개 같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했단 말이죠. 그게 중세 철학까지 연결되고 오늘날

중세 철학이고 뭐고 목사고 뭐고 그냥 장사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양심을 쪼개보면, “집사님, 누가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만들었어요.” “이 세상은?” “이 세상은 나그네지요.” 그게 플라톤 철학이라니까. “그럼 집사님, 생활은 어떻게 합니까?” “그저 이 땅에서 살다가 나중에 죽어서 주님 만나는 게 제 소원입니다.” 그냥 아무 꾸밈없이 어떤 깊은 신학 같은 것 따지지 않고 장사하면서 느낀 양심이 뭐냐 하면, “살아보니까 믿을 놈 없고 그저 믿을 사람은 주님밖에 없어서 나중에 주님께 갑니다.” “주님은 누구십니까?” “주님은 하나님이시오 그리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입니다.”

세례 받을 때 잠시 교육 받으면서 이야기했어요. 목사가 하는 말이, “그것만 알고 있으면 돼요. 집사님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누구시지요?” “하나님이고 인간이십니다.” “왜 인간이 돼야 되지요?” “인간이 되셔야 우리 죄를 대속하기 때문에. 됐습니다.” “합격입니다. 세례 줍니다.” 요새는 그 정도 가는 것도 대단한 목사지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가요.

그런데 그것이 아담이 품고 내려왔던 상식의 이어짐이라고 생각해볼 때 그것을 다시 수술대에 끄집어내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세워놓고 다시 점검을 해야 돼요. 이게 유대교 역사가 아닌가? 내가 믿는 예수님을 내가 싫어하는 요인이 아닌지 점검해봐야 되지요. 점검하는 방식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끄집어내는 게 복잡하지 점검하는 방식은 쉽고 결론은 굉장히 쉬운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습니다. 끝. 결론은 너무 쉬워요.

여러분 피 흘렸습니까? 피 안 흘렸습니다. 피는 누가 흘렸지요? 예수님이 흘렸습니다. 그 피로 우리가 구원받습니다. 왜 그분이 피 흘렸는데 우리가 구원받지요? 그분 피 안에 대신 해주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따라서 그 대신을 받는 자는 가만있어야 돼요. “가만있어 내가 다 해줄게.” 이게 대리 요소거든요. 그런데 문제가 어려워지는 것은 뭐냐? 대신 요소라고 할 때 대신 해줄게라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피를 흘렸다는 말이거든요.

그건 우리가 요구한 게 아니고 우리 아이디어가 아닌데 어떻게? “죄인 이리 와.” “여기 왔습니다.” “너, 조인이지?” “죄인 맞습니다.” “걱정하지 마. 대신 용서해줄게.” 이렇게 말도 해도 될 것을 피를 흘렸다는 거예요. 왜 피를 흘려야 되지요? 말씀으로 되는데. 우리는 알아듣는 사람인데 우리는 거기에 감동할 준비가 된 사람이거든요. “너, 죄인이야.” “저도 압니다. 하지만 밥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지요.” “그런데 걱정하지 마. 내가 다 해줄게.” 피를 빼고도 할 수 있는 문제잖아요.

실제로 자유주의적 교회에서는 피를 다 빼버립니다. 피 자리에 하나님의 사랑을 집어넣었어요. 하나님은 사랑을 베풉니다. 베푸니까 여러분은 죄인이기에 사랑 받아야 구원받습니다. 할 때 그 교회는 주님의 사랑으로 구원받게 돼있어요. 그러다보니까 그쪽 교파 교인들은 감리교, 불교, 천도교 어떤 종교 지도자와도 충분히 대화가 돼요. 모든 종교는 뭘 이야기하기 때문에, 티벳 불교도 마지막으로는 뭘 이야기합니까? 사랑이죠. 요한일서에 하나님은 사랑이다. 산에 정상은 하나라도 어떤 종교로 올라가도 사랑의 길로 가게 되면 다 만나게 된다. 모든 종교는 사랑이거든요. 기독교만 해서는 독선적이 되니까. 신은 사랑이다. 끝.

중간에 뭐가 빠졌지요? 피가 빠졌지요. 그들은 성공회 교수가 지은 이만큼 두꺼운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을 보고 제가 서평한 게 있습니다. 그 두꺼운 책의 결론은 마찬가지에요. 신은 사랑이다. 죄에 대한 우상의 사랑이다. 하여튼 기독교에서 하는 이야기 다해요. 그런데 뭐가 기어이 빠져요? 피 흘릴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도대체 모르겠다는 거예요.

햇빛과 공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태복음에 의하면 하나님의 사랑이고 자비지요. 우리가 사는 것도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이게 참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피가 들어갈 틈이 없어요. 이상하게 피가 왜 들어가지? 피는 그때 유대인들이 흥분해서 죽였구나. 피는 하나에 에피소드고 지금 와서 피 이야기 하지 말자. 그러나 막상 신약성경을 보세요. 히브리서 마지막에 피 언약이라고 돼있어요. 그리고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피로 하얗게 되지요.

이제 첫째 강의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에서 피로, 이게 지금 해결이 안 됐습니다. 사랑에서 사랑이 되면 죄인을 용서할 때 이 죄는 아까 이야기한 윤리적, 도덕적 죄거든요. 그런데 공동체에 따라서 그리고 사람이 나이가 많을수록 윤리, 도덕, 양심이

사람이 자기가 스스로 죄인이라고 간주할 때는 윤리, 도덕적인 거예요. 그럼 윤리, 도덕 앞에 법이 있거든요. 법을 못 지켜서 스스로 죄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만약에 법이 없다면 법이 없는 곳에 죄가 안 나오게 돼있어요. 아까 제가 법이 진화한다고 했거든요. 인도 사람들은 숟가락으로 먹으면 죄가 돼요. 인도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 문화적 요인에 의해서 손으로 먹잖아요.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포크로 먹잖아요. 부모님이 손으로 먹으면 안 된다고 하고.

어릴 때부터 공동체가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못 벗어나요. 그러면 인간들에게 심리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구축된 모든 죄의식은 일생동안 살아온 공동체의 보편적인 윤리체계에서 나온 거지요. 이게 일반적이 아니고 보편적이라 하는데 이건 나중에 시간 있으면 하겠는데 하여튼 대충 알아들으세요.

하여튼 보편적인 윤리 도덕에 그들은 그것으로 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미 보편화돼있었다. 그래서 산상설교에서 뒤집어버린다. 마음속에 간음한 것도 간음이다. 이것하고 쉽시다. 법이 없는데 죄인의식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게 바로 인간은 주님 앞에서 죄인이라 해도 죄인 아닌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10분 쉬고.

관리자(IP:203.♡.42.222)

14-10-25 15:03

20140924 미국동부오전b

(강의:이근호 목사)

전에 이 세상에 인간이 있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인간들이 있어요.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너도 있고, ‘나’와 ‘너’가 있으니까 합쳐서 ‘우리’라고 해버렸어요. 그러면 우리에 해당되지 않은 이것들을 영어로 ‘it’ 그것이라고 해버렸다고. 이런 게 문제가 됐어요. 예를 들어서 너라고 이야기할 때는 나가 먼저 있는 거예요. 나에서 사물로 넘어가면서 나를 사물화 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은 이름을 만든 겁니다. 그 이름을 누가 불렀어요? 내가 부르면서 여기서 의미가 생긴 겁니다. 꽃을 내가 부를 때까지는 의미가 없는 거예요.

사람이 이름을 부르면서 자동적으로 나에게 종속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거든요. 그 하나님은 나에게 종속된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람은 무슨 거짓말을 하느냐 하면, 자기가 기도해놓고 뒤에 주문처럼 붙는 게 있어요. 기도 끝날 때 언제 끝나는 겁니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예수 이름을 기도했지만 거짓말이에요. 방금 기도한 모든 내용은 누구 좋으라고 기도한 거예요? 자기 좋으라고 하나님 이름을 부르면서 하다 보니까 내가 집어넣은 의미를 내가 다시 회수하는 셈이 돼버렸습니다.

주여, 주여. ‘주여’라는 말이 성경이 있으니까 집어넣었고 다시 될 줄로 믿는다고 기대하는 기대치에 대한 응답은, 결국 그 기대치는 옆집 사람들이 부른 거예요? 누가 만들어낸 거예요? 내가 만들어냈지요. 내가 만들어낸 의미를 사물에 이름 붙이듯이 이름을 불러서 한 겁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종속된 겁니다. 이런 것을 성실, 다른 말로 충실이다. 나는 나에게 충실하고 성실해요.

여기에 대해서 이의를 걸 수 없어요. 아담이 자기 부인 보고 이름 불렀지요. 아담이 부를 때 그 여자는 아담 없으면 없어져야 되겠지요. 그러면 아담이 먼저 있고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아담은 항상 생각해요. 저 여자는 내가 이름을 주어서 나한테 종속된 여자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돼있지요. 아담은 그 순간 뭘 잃어버렸습니까? 내가 여자 이름을 부르면서 자기한테 종속된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아담은 하나님이 나의 관계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겁니다.

그것을 한 자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꽉. 자기 인생에 꽉 찬 것, 아까 이야기한 성실, 충실. 게으름아 꺼져라. 나는 나의 게으름을 용납 못해. 이런 식으로 보면 돼요. 모든 인간의 행동은 결국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자기한테 회수하는 식으로 인간은 행동에 나서게 됩니다. 항상 그 의미가 나에게로 되돌아오도록. 심지어 사업에 실패하더라도 내가 실패하니까 아쉽다. 아쉽다는 말은 꽉 차 있었는데 사업에 실패했으니까 빠져나간 거죠.

또 예를 들면 나의 배우자가 죽었어요. 어떤 남자가 자기 아내가 죽었단 말이죠. 자기 아내가 죽어서 자기는 우는데 다른 남자들은 울지 않아요. 그럼 물어봅시다. “내 아내가 죽었는데 당신은 왜 울지 않나요?” 그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미쳤나. 니 마누라 죽었는데 내가 왜 울어?”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내 마누라 죽으면 나도 울 거란 뜻이거든요. 각자, 각자 꽉꽉 차 있어요. 자기 속에 남이 절대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흘러간 1950년대 팝송에 보면, 내 아내와 헤어졌는데 태양은 왜 빛나는지, 파도는 왜 치느냐. 나는 이렇게 아픈데 파도는 치고 한결같고. 여자와 헤어졌는데 새는 전과 같이 짹짹거리고 해는 왜 뜨느냐 이 말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전에 알던 새소리와 아름다운 해도 의미 없지요. 그럼 사랑하는 여자가 죽고 난 뒤에 같이 따라 죽는다는 말은, 더 이상 그 전에 내가 봤던 해와 달과 별들은 그냥 자연이 아니고 현실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누구한테 예속된 현실이었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살아있다는 조건 하에 나는 이걸 현실로 봐주는 겁니다.

자연은 누가 만드는가? 자연 어디 있는가? 자연은 내 안에 있어요. 내가 의미를 줄 때만 자연이에요. 내가 그 이름을 부를 때만 별을 별, 달을 달이라고 불러 줄 때만 “달이 거기 있네. 참 아름다워.” 할 때만 그 달은 의미가 있는 겁니다. 자식이 공부 못하고 있을 때 달은 백날 아름다워도 좋아지지 않아요. 나한테 종족 되는 것. 따라서 종속된 이것을 이제부터 합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했지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이라고 이름을 부를 때 나에게 종속된 하나님이고, 이 천지, 자연도 종속된 것이고, 창조라는 것은 마치 내가 창조가 뭔지 이미 아는 것처럼 건방을 떨면서 세 단어 다 이해하니까 합친 것도 이해한다고, 이걸 ‘믿습니다’라는 말로 우린 그냥 내 것으로 받아들였어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라고 믿고 난 뒤에 갑자기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 멀쩡합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뭐. 아내 죽어도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이 죽여겠지 나와 무슨 관계있어.” 이렇게 멀쩡한 정신으로 정상적으로 됩니까? 안 되지요. 뭐라고 따집니까?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여, 왜 하필이면(Why me?) 저에게 이런 불상사를 주십니까?” 이 말은 아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조건 하에 나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뒤늦게 들통 났어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순수하게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노림수가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단계를 높입시다. 꽉꽉 차 있던 내가 안다는 것을 한 단계 높이면, 비어있음, 뭔가 빈 게 돼요. 비어있다는 것은 내가 아는 세상이 아닐 수가 있다는 겁니다. 사업 망하고 난 뒤에, 가족이 죽고 난 뒤에. 내가 뭔가 완성됐다고 여겼던 것이 아닐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비어있으면 자아가 구멍이 뚫렸는데 그것이 채워졌을 때만 자아가 되거든요. 그런데 뭔가 허전하단 말이죠.

아내가 죽고 난 뒤에 6개월 넘지 않아서 사랑하는 사람을 새로 만나서 이 남자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전처 죽었을 때 하나님 앞에 왜 나를 죽음으로 몰아세웁니까? 이제 살 소망 없습니다.”라고 했는데 당신 만나려고 아내가 죽었구나. 이럴 줄 몰랐다는 것예요. 갑자기 비어있던 것이 채워졌지요. 채워져서 이제 하나님 뜻을 알았다고 장담했는데 두 번째 아내가 바람이 나서 떠났어요. 또 비었지요. 1층에서 2층으로 3층에서 또 비어졌어요.

그런데 아내가 그냥 가지 않고 재산을 챙겨서 젊은 남자 만나서 가버렸을 때 이 남자는 비어있음이 돼버렸지요. 그러면 아내가 죽은 것은 마지막 여생을 행복으로 이어지기 위해서 만났다는 그것은 제대로 세상을 간파한 게 돼요? 몰랐지요. 재산이 날아가고 난 뒤에 또 다시 나오는 용어가 Why me? “주여, 주님을 사랑하고 주께서 저를 사랑하는지 믿습니다. 절대로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나를 이런 식으로 몰아넣는지 이유에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빈자리가 생기지요.

제가 이런 예를 드는 이유가 이겁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를 이 남자는 계속 믿는다고 생각하는데 뭘 생각이 안 나느냐 하면, 뭐는 실감이 안 나느냐 하면,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 17절 말씀처럼 태초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지를 창조했고 모든 목적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라고 할 때 골로새서에 나오니까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글자를 받아들인 것처럼 골로새서 1장에 그 말씀도 자기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구멍이 나고 비어있는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위하여’란 의미가 뭔가 내 중심의 인생과 자리바꿈이 일어나야 된다는 것을 간파하는 거예요.

그동안 중보자가 빠진 거예요. 자기는 중보자란 개념을 1층에 있을 때부터 안다고 자부했는데 구멍이 뚫릴 때마다 도대체 나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걸 믿는 그 믿음을 본인이 믿은 거예요. 그러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리라는 믿는 이 믿음은 절대로 그리스도가 원하는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건 유대교에요. 유대교는 구약성경을 어릴 때부터 다 외웁니다. 하지만 그 유대교에 의해서 예수님이 살해당했습니다. 예수님 자리가 있을 수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자리 비워놓고 예수님 들어오셔도 되는데 그게 아니고 비워놓은 자리에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고 아내는 죽었지만 나는 살아있다는 이 자체를 가위질해서 죽이시는 것을 앞장세워서 주님께서 내가 중보자라고 외칠 줄이야 감히 생각도 못했지요. 나 여기 있고 주님 저기 있으니까 주님 저와 좋은 관계로 악수합시다. 왜? 계속 살아있으니까. 이렇게 예수님과 악수할 줄 알았지요.

선교단체에서 많이 가르치는 구절이 있어요.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 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은 내가 일단 살아있고 그 다음에 안녕하십니까? 예수님이십니까? 저는 아무개입니다. 이렇게 악수하면 함께 살아있는 걸로 생각한 거예요. 자기 인생에 구멍 날 이유가 없거든요.

“여기 앉으세요. 주님 자리라고 만들어놨습니다.” 선교단체에서 동그라미 그려놓고 의자 하나 놓지요. 당신이 중심이 되지 말고 중심은 주님한테 양보하라. 양보하지요, 뭐. 양보하고 자기는 밖에 나가서 주님께 감사하면 되잖아요. 주님 자리를 이 자리입니다. 하고 자기는 이제는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한 거예요. 그것이 꽉 차있는 진리체제를 완수했다고 했는데 왜 Why me? 그렇게 완성된 나에게 구멍을 일으키느냐 이 말입니다. 도대체. 어디서 잘못됐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이름 붙이는 겁니다. 누가? 내가 사물이나 어떤 인물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사람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나에게 종속돼요. 내가 절대자가 그분이 하나님이든 삼위일체든 예수든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하나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름을 불러주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내가 이름을 부르면 안 되고 방향이 반대가 돼야 되지요. 내가 부를 이름 자체가 완전히 붕괴시키면서 그 현장을 만들어가면서 내 이름을 새롭게 불러줘야 될 분이 계신데 그 분은 내가 생각한 체제 속에 안 담겨있지요. 왜냐? 내가 생각한 체제는 나에게 의미로 엮여져있는 체제기 때문에 그것은 백날 기적으로 해도 돌아서면 나 잘남으로 환원되게 돼있어요. “나, 예수님 계시 받았다.” 이러면 안 되거든요. 나 말고 내가 미처 생각 못해 다른 곳에서 찾아오시면서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걸 호명이라 합니다.

알튀세르란 유명한 철학자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사람의 주체란 호출로 말미암아 주체가 생긴다. 사회에서. 누가 나를 불러줄 때 비로소 나는 다른 사람 앞에서 하나에 주체로서 활동하다가 만약에 그 사람이 나를 불러주지 않으면 나는 있어도 죽은 자가 된다는 겁니다.

인터넷에 사이트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아무도 조회수 한 명도 없을 때 나는 이 사회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지요. 아무도 나를 불러준 사람이 없기 때문에. 취직도 그렇고 결혼도 그렇고. 뭔가 나를 불러줄 때 불러준 사람 앞에서 주체로 살게 돼있어요. 하늘나라가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는 거예요. 불러준다는 것이 일시적으로 불러주면 안 되잖아요. 궁극적으로 불러줘야 돼요.

궁극적으로 불러주는 그 대목을 제가 성경 찾아보겠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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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506건 중 1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