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86강, 87강) 하나님의 대노, 최고의 증거 140918
유튜브(86강, 87강) 하나님의 대노, 최고의 증거 140918
이름 : 이근호(IP:119.18.89.5)
86강
87강
이미아(IP:180.♡.97.94)
14-09-22 20:18
86강-YouTube강의(하나님의 대노)140918-이 근호 목사
오늘은 제 86강, 제목은 하나님의 대노입니다. '대노‘란 말은 크게 노한다. 그냥 조금 노하는 것이 아니라 크게 노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성경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크게 노한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스바냐 1장 18절 대목인데요. 스바냐 1장 18절을 보면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신다는 이 성경 대목은, 이 구절을 대하면서 우리네 일상적인 인간들의 사회생활과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짐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크게 화내는 관계라면 아예 이야기 대상도 안 되고 모든 관계가 절단되죠. 니는 니대로 나는 나대로. 보통 싸웠던 사이가 그런 사이잖아요. 화를 냈다는 말은 두 번 다시 너와 상종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출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분노하심을 전제로 하지 않고, 그걸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이란 말에 덥석 미끼 걸려서 따라가게 되면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을 생각하지 못해서 아주 애닳은 그런 분으로 이해되기가 쉽습니다. 우리를 못 건져서 안타까워하시는 분으로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분노하신다는 내용, 하나님께서 화를 내신다는 이 내용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과의 관계 정립에 있어서 뭔가 안 맞는 대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화를 내시는 그 분이, 화를 내시는 하나님이 화를 내실 때에 인간적으로 어떻게 그것을 극복해서 하나님의 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에 우리들이 자신이 없죠. 한 가정에서도 한쪽에서 화를 낸다면 우리는 어떻게든 달래려고 하죠. 그 달래는 방법이 뇌물이나 제물을 바친다든지, 뭐 돈을 한다든지, 뭐 그동안 착한 일을 많이 한다든지, 그런 식으로 해서 상대방 마음을 누그러뜨리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화를 내실 때 그 화를 누그러뜨릴만한 대책을 인간 쪽에서 만들어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실 때에 우리 인간은 그 분노를 누그러뜨릴 대책이 없죠. 그 대책이 없다는 말은 결국은 하나님의 분노는 멈추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대로 우리 인간 사회에 닥치게 된다는 사실을 성경은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출애굽 할 때에, 히브리인들이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냥 애굽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들과 함께 일 년 동안 동거동락 했던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밖에 바름으로 말미암아 그 증거로 사람을 죽이는 천사의 저주로부터 회피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양을 잡으라는 그 아이디어가 인간들의 지혜에서 나오지를 않았다는 거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정작 이스라엘을 사랑하려면 병 주고 약 주는 방식으로 하지 말고 아예 너희들만큼은 어떤 조치를 하지 않고 내가 너희들만큼은 그냥 살려줄게. 이렇게 돼야 될 텐데 하나님께서 자기가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어린양이 죽어야 된다는 그 죽음의 피를 요구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이 인간들이 생각한 하나님 날 사랑하기, 그런 식으로부터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니까 어떻게든 우리를 봐주겠지, 라는 점부터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이 이렇게 만남이 된다든지 엮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에요. 애초부터 인간은 하나님께 “날 사랑해주세요. 날 구원해주세요.” 라고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분명히, 그것을 분명히 해주십니다. 그 분명히 하시는 방식이 바로 하나님의 분노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단 인간과 모든 세계에 대해서 분노를 하십니다. 그 분노하시는 근거는 바로 창조했던 그 창조의 본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분노하는 거죠. 그 분노와 분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멸망에서 그친다는 것이 바로, 멸망까지 이어진다는 것이 스바냐 1장 18절을 읽었던 본문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여 그들의 모든 것을 질투의 불로 다 멸망시킬 것이다. 비록 그들이 은과 금으로 나선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은과 금으로 하나님의 질투와 분노의 불을 사그라들게 못한다고 스바냐 1장 18절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은과 금인데 그것가지고도 하나님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없다는 말은, 인간은 하나님의 분노 앞에 어떤 대책도 없다는 말과 동일한 말이에요.
옛날 시대에 인간의 모든 민족들의 고대 풍습과 종교에 보게 되면 신의 분노로 인하여 흉년이 든다든지, 가뭄이 든다든지, 신의 분노로 홍수가 난다든지 할 때는 그 당시의 토속적인 제사장들이 그 신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방법 중의 하나가 시집도 안 간 정결한 처녀의 심장을 바치든지 피를 바친다든지 어쨌든 간에 인간을 하나님 앞에 공양해서, 드려서 신의 노를 대표해서 다 받는 방식으로 그들은 제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방법은 하나님 앞에 통하지를 않죠.
데살로니가후서 1장 7절, 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신약 시대에 왔다고 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사라진 게 아니고 더 본격화 됩니다. 7절에,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천사들과 함께 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천사들이 올 때 천사들이 하는 일이 뭐냐, 8절에 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신다는 것이 우리나라에 헌법 안에 들어 있습니까? 아니면 학생들 교육하는 학교에 교훈 안에 이런 게 들어있습니까? 아니면 동창회 모임이나 친목회 모임 가운데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치 아니하면 형벌을 받는다는 그 내용이 삽입되어 있습니까? 우리는 이 데살로니가후서 1장 8절의 말씀을 은연중 우리의 눈에 띄는 우리 일상에서 이미 우리는 쉬쉬하면서 그걸 치워버리는 쪽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추석이나 명절날 설 때 가족이나 대가족이 모였을 때에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치 아니하면 모두 다 형벌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어느 가장이 이걸 읽고 이야기한다면 그 명절 분위기가 다 깨질 것입니다. “형님, 또는 삼촌 여기서 그런 소리 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아마 핀잔을 많이 받을 거예요. 우리는 그 핀잔 받게 되면 그 공동체가 깨진다는 것은 너무 상식적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분노의 이야기, 하나님의 진노의 이야기, 복음에 복종치 않으면 형벌 받는다는 그런 이야기는, 이거는 해서는 안 되는 그러한 철칙처럼 그렇게 우리는 몸에 익숙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놓고 우리는 지금 살아가는 것이 정상적이라는 생각이 더 강렬하게 밀려오죠.
사도바울은 거침없이 하나님의 진노와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에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받는다는, 죄진 벌을 받는다는, 예수 안 믿으면 벌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거침없이 해댔습니다. 그만큼 이 세상은 이미 예수님의 복음 앞에서 확정적인 운명을 지니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하나님의 형벌, 주시는 저주, 이걸 빼버리면 하나님의 사랑도 같이 날아가 버리고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도 같이 날아가 버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 못해서 안달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을 보여주심으로서 어떤 인간도 마땅히 구원될 자격이나 권리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므로써 비로소 주님의 사랑과 용서라는 것이, 이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 금, 은보다 귀하다는 것을 사도바울이나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같이 통하는 진리입니다.
이미아(IP:180.♡.97.94)
14-09-24 16:51
87강-YouTube강의(최고의 증거)140918-이 근호 목사
이제는 87강, 제목은 최고의 증거라는 제목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세계를 다녀갔다. 인간을 창조하신 그 창조주께서 또는 만물을 창조하신 그 창조주께서 실제로 인간세상을 다녀간 적이 있습니다. 그럴 때, 진짜 하나님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는 그 증거를 대라고 사람들이 오해하기 마련이에요. 왜냐하면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양상 자체가 확실한 증거가 없이는 안 믿으려는 세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녀갔다면 그 다녀간 증거도, 그 증거가 지금도 아직 남아있다고 그렇게 생각할 것이고, 남아있으면 그 남아있는 그 증거가 뭐냐, 그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하게 되겠죠. 그 증거에 대해서 우리가 성경이라는 이 전체 내용이 다 증거가 되는 겁니다.
성경 전체 내용이 다 증거라면, 성경 전체에 의해서 여러 가지 주제를 다양하게 뽑아낼 수 있다면 결국엔 증거가 하나로 규합되지 못하는 그러한 입장에 있겠죠. 그래서 사도바울이나 신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이 인간세계를 다녀갔다. 다녀갔다면 그냥 다녀간 것이 아니고 뭔가 언질을 주고 다녀간 것이죠. 인간세계의 운명은 이렇게 될 것이고,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줄곧 이야기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진짜 하나님 대신 다른 하나님으로 대체했고, 그 대체된 하나님가지고, 예수가지고, 복음가지고, 진짜 복음도 성령도 아닌데, 그것가지고 사람들은 교회란 이름으로 간판 걸고 마치 천국 갈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들이 있었다.
그런 이야기가 정당화가 되려면 거기에 합당한 증거가 있어야 되고 그 증거는 하나로 규합이 되어야 되겠죠. 사도들이 복음을 앞장세워서 활동을 했습니다. 복음을 앞장세워서. 사도들이 어느 교회가 옳다고 이런 식으로 교회를 앞장세운 것이 아니고 어느 교회, 어느 교회 없이, 심지어 교회라 할지라도 그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것은 교회가 있다는 그 자체가 아니라는 거죠. 교회를 움직이고 교회를 이어지게 하고, 교회를 정당화시키는 것은, 교회가 내세우는 어떤 제도나 규칙이 아니고 복음이 계속해서 거기서 증거 되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 복음은 사도바울에 의하면, 그 복음을 한마디로 말해서 '십자가'라고 그렇게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참된 교회에 소속돼 있느냐를 말 할 수 있는 최고의 증거는 그 십자가 복음이 계속해서 나오고 그리고 그 십자가 복음을 교회 운영의 어떤 용도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 교회. 복음이라면 교회마저 날라가도 복음 있다면 그것이 바로 현재의 교회라고 언급할 수 있는 그런 교회. 그런 교회를 교회라고 이야기 할 수 있어야 참된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십자가가 증거라면, 그러면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만 남아있어야 될 텐데. 십자가라는 것은 신약시대에 이게 좀 나오는 이야기고 구약에는 전혀 없다는 이 말이죠. 그런데 어떻게 십자가가 성경 전체를 대변하는 하나님의 최고의 증거가 될 수 있느냐. 라고 이야기 할 때 우리는 구약에 있는 모든 이야기들을, 신/구약 모든 이야기가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심을 증거 하는 그러한 증거물로 엮어져 있다는 것을 우리가 설명해주어야 되겠죠.
그래서 최고의 증거는 십자가지만, 그 외에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증거들도 최고의 증거와 연결되어 있는, 같이 엮어져 있는 최고의 증거의 한부분이라고 같이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강의를 어디서 문어와 문어발로 설명한 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 구약에서의 이야기가 어떻게 신약의 십자가와 연결되느냐를 하나의 예를 보여주기 위해서 레위기 10장에 있는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되어 있습니다.
요 10장 1절과 2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늘 하나님 앞에서 봉사하던 나답과 아비후라는 제사장이 2절 끝에 보면 “죽었더라”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최고의 증거에 대해서 다시 언급합니다. 최고의 증거가 뭐냐, 인간의 죽음이라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보통 죽음은 그냥 본인이 삭아져서 죽은 거죠. 늙어서 죽은 거죠. 그런데 성경에서는 늙어 죽는 거 말고 특별한 죽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0장 1절에서 2절에서는 그 제사장들이, 나답과 아비후라는 제사장이 어느 날 죽었어요. 어느 날 죽었다는 말은, 그 전에는 안 죽었다는 것을 같이 고려해봐야 합니다.
왜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하필이면 그 날, 그 때에 같이 죽었느냐 하는 말입니다. 왜 그전에는 안 죽었느냐 하는 겁니다. 따라서 레위기 10장 1절에서 2절의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은 결코 늙어 죽는다든지, 우리가 흔히 인간세계에서 죽음이라는 이유로 늙어 죽는다든지, 자살해서 죽는다든지, 연탄가스에 취해서 죽는다든지, 화병에 죽는다든지, 그런 죽음과 포함되지 않는, 특별한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는 겁니다.
따라서 레위기 10장 1절에서 2절에 나오는 죽음은 인간들이 여태까지 알고 있던 그 어떠한 죽음을 배제해버리는, 독특한 죽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독특한 죽음과 최고의 증거물이라는 그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관련성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버지 앞에서 아들로서 저주받아 죽은 죽음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아 죽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죽음도 레위기 10장에서 제가 해석하는 것처럼 인간이 알고 있는 어떤 죽음도 여기에서 배제되어 있죠. 섞이지 않는 죽음이죠. 독특한 죽음이죠. 근데 이 땅에서 인간들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와 지식과 지혜라는 것은 뭐냐 하면, 죽을 때까지 우리가 어떻게 하면 목숨을 유지하고 버틸 수 있느냐에 관한 모든 내용들이 문화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지식체계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그런 지혜와 지식이니까 십자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죠. 왜, 독특한 죽음이니까.
레위기 10장에서 읽었던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는 다른 불을 담아서 분향한 이 순간까지는 본인이 분향할 때 분향한 그 불이 자기를 삼키리라는 것은 예전에 미처 몰랐습니다. 삼키는 것을 알았다 면은 자살한 것밖에는 안 되죠. 나답과 아비후는 본인들이 어떠한 죽음을 죽는 것을 미처 몰랐어요. 모르는데 모른 상태에서 그냥 불이 확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분향하다가 분향 불에 의해서 그들은 죽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불이 나오는데 그 불에 의해서 타죽은 사람만이 비로소 십자가를 증거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저는 그렇게 언급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살려고 하는 반면에 십자가 앞에 선 사람은 내가 십자가 알면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가 아니라 내가 죽을 수 있는, 내가 보여 줄 수 있는 독특한, 성도로서 보여 줄 수 있는 독특한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라는 자세로 십자가 앞에 서게 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거는 자살이 아닙니다. 주님에 의해서 특별한 임무를 담당한 거죠.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의 명하진 않는 다른 불을 바친 것은 분명히 죄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죄도 남들이 아무나 할 수 없는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특수한 죄가 되죠. 이 특수한 죄로 들어가서 나답과 아비후는 특수한 죽음을 오늘날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걸 가지고 언약적 죽음이라고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옛날 레위기 당시에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제사장 되었고, 그 제사장된 신분이기에 그런 언약적 죽음을 보여 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신약시대에 모든 성도들은 일반적인 보통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언약에 의해서 특별한 역할을,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그거는 뭐냐 하면,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들은 이 땅에서 십자가 앞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유일하게 이미 성령을 통해서 알면서 살아가는 그러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가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를 안다는 자체가, 오늘날 성도가 십자가를 보여주는 최고의 증거의 일부로써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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