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문등 레위기 강의
2014 문등 레위기 강의
이름 : 관리자(IP:203.90.42.222)
2014 문등 레위기 강해 140826
관리자(IP:203.♡.42.222)
14-09-18 08:55
레위기 문등 제 1 강
레위기4장32-35절입니다.
“그가 만일 어린 양을 속죄 제물로 가져 오려거든 흠 없는 암컷을 끌어다가 그 속죄제 희생의 머리에 안수하고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잡아 속죄제를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죄제 희생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는 전부를 단 밑에 쏟고 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 어린양의 기름을 취한 것같이 취하여 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의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과정이 매우 복잡합니다. 현대인에게 복잡한 것은 짜증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어린양 제물 바치면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이렇게 됩니다. 레위기 시작하자마자 끝났습니다. 어린양을 잡으면 중간과정을 거쳐 마지막에 사함을 얻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용서함을 얻으리라. 어린양을 바치면 용서함을 얻으리라가 되는 겁니다.
레위기는 어린양을 바치면 용서함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빠진 부분을 한번 적어 보겠습니다. 누구에게, 그리고 어떻게 바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데 어떻게 바칩니까? 공중으로 짐승 던질까요? 어떻게 바칠까요?
세 번째, 어린양이 중심인데 어린양 외에 또 바쳐야 될 제물이 있느냐, 또는 인물이 있느냐? 이 인물이 누구인가? 제사장입니다.
네 번째, 제일 중요한 것은 어린양 바쳐 용서함을 받는데 여기 앞에 ‘속죄한즉’ 이라는 단어가 35절에 나옵니다. 속죄와 용서는 각각입니다. 속죄와 용서의 차이점은 용서는 너는 나에게 용서를 받았다는 결과를 의미하고, 속죄란 값을 지불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이 모든 말씀을 누구에게 말씀 하셨는고 하면 레위기 1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분명 레위기가 간단하다고 했습니다. 어린양 바치면 용서받는다. 그런데 어린양 바치는 것과 용서받는 사이에 부수적인 요소들이 마구마구 첨가 됩니다. 그래서 레위기가 점점 복잡해지고 다양해지고 늘어납니다. 특히 레위기는 스토리도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회막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모세가 살아 있습니까, 죽었습니까? 죽었습니다. 지금 모세가 없습니다. 또한 장막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있다고 간주합시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있어서 있음은 내가 거울을 보고 내가 있다는 것을 느낄 때에 그 있음과 같이 있을 때에만 있음으로 쳐 주는 겁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 있다고 할 때 그 있음은 내가 여기 팔짝팔짝 살아 있다는 그 있음을 가지고, 손에 만져지고 눈에 보이고 열기가 나고, 대화가 될 때 있음이 됩니다. 귀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없다는 말이 맞습니다. 귀신은 손에 안 잡히고, 눈에 보이지 않고, 사진으로 찍히지 않습니다. 귀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있음이라는 범주 속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귀신이 없다는 말이 맞는 말이 됩니다.
만약 귀신이 있으면 우린 없는 존재가 됩니다. 동일한 범주에 넣으려면 공통된 개념이 들어가야 됩니다. 내가 있다는 것은 눈에 보이고, 사진으로 찍히고, 거울에 보이는 것, 이것이 있는 겁니다. 질문합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울을 보면 거울에 누가 비췹니까? 본인이 비췹니다. 거울 앞에 서면 내 상이 거울에 비췹니다. 그렇다면 거울 속에 내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만일 거울 속에 내가 있다면 내가 둘이 됩니다. 거울 속에 있는 것은 내 상, 내 이미지가 있지요. 내가 만일 거울 앞을 떠나 버리면 거울 속에 내가 있나요, 없나요? 없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수학자 루이스 캐럴(Lewis Caroll)이 지은 동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거울 앞에서 내가 사라졌는데 거울에 내가 남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고양이는 대답하고 천천히 사라졌는데 처음에는 꼬리가 점점 없어지더니 마지막으로 웃는 얼굴이 조금씩 사라졌습니다. 그렇지만 고양이의 웃는 입은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랄 일입니까?
바로 성경이 그런 것입니다. 내가 먼저 있고, 모든 것은 나로 말미암아 투영된 것들입니다. 질문하나 드리겠습니다. 전도사님이 절 보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전도사님이 생각하는 저랑, 제가 생각하는 저랑 동일할까요, 다를까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면 제가 한국에 가버린 후 전도사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나는 제가 아니고 전도사님이 꾸며내고 조작한 것이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항상 내가 먼저 있음에 나의 기억도 거기에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레위기를 볼 때 내가 레위기를 백독했다, 천독했다, 은혜 받았다라고 하지만 사실은 레위기 속에 들어 있는, 거울 속에 들어 있는, 진짜 레위기 주인공 되신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고 단지 자신이 레위기를 보면서 느낀 인상입니다. 레위기를 보면서 얻을 것은 얻겠다, 이익 되는 것을 찾겠다, 레위기를 통해 구원받겠다는 것들을 뽑아낸 것들의 집합 이것을 나의 있음, 나의 존재에 집어넣어 나는 레위기를 알았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합니다.
성경은 거울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성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거울 속에 들어가지 않고 성경을 보게 되면 나는 관찰자가 됩니다. 창세기 구경하기, 출애굽기 구경하기, 레위기 구경하기, 민수기 구경하기가 됩니다. 성경 열 번 읽기, 마태복음 다섯 번 읽어보기를 하는 것은 있음, 즉 내가 여기 있기에 내가 읽어보고 은혜 받겠다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절대로 자기 부정, 자기 부인이 안 됩니다. 성경은 오히려 자기 긍정을 더욱더 단단하게 해 줍니다. 성경 때문에 나는 없는 존재라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성경 속에 있는 그분이 진짜 있음이고 나는 그분이 만든 임시적인 것, 안개 같은 배치물이 내 인생이지, 성경이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분을 위해 있다는 고백이 나오려면 성령을 받아야 됩니다. 성경을 가지고 이것을 어디에 이용해 먹을까 하는 것은 성경 해석자체가 잘못된 해석입니다. 나 있음을 시작점으로 삼겠다. 나 있음을 죽기 살기로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게 되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하나님은 나를 지켜주시는 분이니 나랑 거래합시다.’가 생략되어 있지요. ‘우리 흥정합시다. 나를 지켜주시는 한 나는 하나님께 영광돌리겠습니다.’ 이미 나라는 것이 더 강하게 의식되고 있는 이상 하나님은 항상 나를 위해 뒷일 해 주는 비서 같은, 종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레위기를 하면서 레위기를 달달 외우고 레위기 말씀에 충실했던 이스라엘이 멸망당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구약은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레위기를 몰라서 멸망당했습니까?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레위기도 외우고 시편을 달달 외웁니다. 그런데 망했습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망한 것으로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망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본인이 왜 망했는지를 모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알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망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망한 정도가 아니라 더 심도가 깊어집니다. 사울은 여호와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면서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이는 일이 자신이 믿는 여호와에 대한 최고의 충성이라고 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할 수 없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더 높이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하는 방법 중 하나가 예수 믿는 자를 이단으로 규정해 잡아 죽이는 일을 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알 수 있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인간이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머리 빚고 있는데 그 모습이 죄란 말입니까? 거울 보는 것도 죄입니까?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데! 머리스타일 바꾸고 화장하는 것이 죄입니까?
사울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죄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목이 마르니 물 좀 주시겠습니까? 물이 여기 존재하네요. 나는 내 존재만 알았는데. 물의 존재가 나에게 다가와 나에게 의미가 될 때에 물이 나에게 존재하는 겁니다. 목마르지 않을 때는 물이 옆에 존재하더라도 나에게는 존재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필요치 않으면 절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는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말로 자기 존재를 지탱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말은 이스라엘은 망했지만 우린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상을 깨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대표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내용을 한마디로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내가 여기 있음을 근거로 해서 내 잘되기 위해 레위기를 바라보는 것은, 마치 우리가 거울을 보는 것처럼 내가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레위기라는 거울을 통해 되받아 온 것뿐입니다. 레위기 속에 전혀 들어가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레위기 속에 누가 들어 있다는 말인가?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레위기 속에 계신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레위기에 예수님이 나오지 않는데 어떻게 당신은 예수님이 들어 있다고 하느냐? 그것은 여기에 ‘어린양으로 인하여 사함을 얻으리라’가 되어 있죠? 어린양으로 인하여 사함을 얻으리라는 말씀, 즉 수많은 사람들이 레위기를 읽고, 연구했지만 자기 이익을 위해 관찰자로 본 겁니다. 이 말씀이 나에게 어떤 이익이 있을까? 하나님께 어떤 복을 받을까?
복을 받을 때 어떤 식으로 해야 복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식으로 자기 존재 위주로 생각해서 봅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만이 어린양과 속죄를 자기인생에 적용시키셔서 레위기라는 율법을 온전히 다 이루었습니다.
레위기, 하나님의 말씀, 율법이라는 것은 장차 예수님 자신만이 하실 일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레위기 지키지 마세요.’가 됩니다. 이것은 기쁜 소식입니다. 건방떨지 마시고 레위기 지키지 마세요. 레위기는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 지켜서 거룩해질 것 같으면 예수님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오신 것도 모르고 레위기 지켜서 거룩하겠다는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실패한 정도가 아닙니다. 오신 메시아 되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내가 알고 있던, 그들이 원한 메시아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죽였습니다. 성경을 읽으세요. 그러나 지키지는 마세요. 그런데 사람들은 지키지 말라는 소리를 듣고 아예 성경을 읽지 않으려고 해요.
성경을 읽고 여러분 생애에 도움 되라는 식의 몸짓을 보여주세요. 그리고 그것을 잊으세요. 그것은 여러분 생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초신자가 계신데 이런 이야기하는 것이 참으로 곤란합니다. 성경을 가지고 교회 충성하시고 봉사하시고 여러분의 길에 빛이 되고 등불이 됨을 이야기해야 되는데, 지키지 마세요가 나오니 제가 말하기 곤란합니다만 이 교회는 주님이 관리하시기 때문에, 목사님이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관리하시기 때문에 주님 말씀대로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자주 보시되 지킬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다른 분이 다 가져가셨습니다. 다른 분이 다 가져가서 다 지키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 어떤 하나의 율법이라도 지킬 여지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것만 아시면 됩니다. 우리는 왜 우리 실력대로 성경말씀을 지켜서 거룩하지 못하는가를 평생에 걸쳐서 여러분들이 이제는 생활을 통해서 삶을 통해서 보여주어야 됩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행해서 절대로 거룩한 적이 없음을 고백하는 것을 네 자로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벌, 곧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데 아직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살려주시는 것은 바로 저주받아 마땅한 그 사람을 카펫으로 깔아놓고 그 위해 예수님이 내가 어린양이다, 내가 속죄할 수 있으며, 나의 일방적 권한으로 너희를 용서했다는 것을 그 카펫 위에 지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위에서 주님이 지근지근 밟아나가는 것을 증거하는 사람, 그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고 주의 증인이 됩니다. 어린양이 되시고, 속죄해 주시고 용서하시는 모든 기능이 레위기 4장 32-35절에 나오지만, 이것은 이 밑에 카펫처럼 깔려 있는 우리 자신이 나름대로 내가 지키셔 거룩하겠다는 모든 것을 지근지근 밟아 버리시고 내가 이미 다 이루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여기 들어오시지 않으면 우린 관찰자가 됩니다. 관찰자란 기본적으로 자기 존재가 우선입니다. 자기 존재가 우선이라는 말은 내 가치는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다. 나 잘난 맛에 살아가겠다는 겁니다. 나 잘난 맛에 살아가겠다는 이 말을 어떤 철학자는 세자로 이야기했습니다. 아주 정확히 이야기했는데 바로 ‘동질성’입니다. 동질성이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동일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주체의 확장으로 봅니다.
쉽게 말하면 ‘나는 무엇무엇이다.’에서 ‘나는 무엇무엇 답다.’ 로, 더 나아가면 ‘나는 무엇무엇이기에 가치 있다.’가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 없이 그냥 거울 보듯이 봅니다. 거울을 보면 내 모습 그대로 비췹니다. 그러면 우리는 관찰자가 되고 관찰자가 되면 성경을 보면서 무엇을 확고히 하게 되는고 하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동일한 나다, 나는 무엇 무엇답다. 나는 무엇 무엇답기 때문에 가치 있고, 그러기에 나는 구원받는다는 식의 자기 주체성을 확고히 합니다.
예를 들면, 엄마가 자녀에게 ‘야, 공부해, 숙제해’라고 할 때, 여섯 살부터 좀 컸다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엄마가 뭔데 나에게 숙제하라고 해.’라고 나옵니다. 그러면 엄마가 말하기를 너를 낳았고, 젖을 먹였고, 밥 먹였고, 유치원 보내 주었기 때문에 네가 커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여섯 살 먹은 아이가 너무 천재입니다. 나이는 여섯 살이지만 행동은 나이 육십 육세입니다. 엄마는 어제의 엄마와 오늘의 엄마가 늘 다르다는 것을 왜 이해 못해. 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람은 그때그때 달라집니다. 나라는 것은 채 썰 듯이 쪼개져 파편이 나 있습니다. 사람은 어제와 오늘이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기억으로 날마다 새롭게 조립합니다.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안개라고 합니다. 안개라고 하면서 시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인간이란 없다. 60 살았으면 59년 다 날라 갔습니다. 90되면 89년 다 날아갔습니다. 지금 여섯 살 되었습니까? 5년 11개월 29일이 다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그러면 다 날아간 것입니다.
우리는 존재라 생각했지만 존재가 아니라 없습니다. 유일하게 있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있음에 우리가 가담됨으로 우리는 영원히 있는 겁니다. 그것을 영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계심에 내가 있습니다. 이렇게 됩니다. 주님이 창조하심에 비로소 제가 있습니다가 됩니다. 주님이 살아계시기에 저도 지금 숨 쉬고 있습니다가 됩니다. 참새를 누가 키웁니까? 우리는 참새를 누가 키우는가에 대한 정답을 자연, 생물시간에 참새 어미라 배웠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6장 26절을 보면 참새를 주께서 키우신다고 합니다.
그러면 들풀은 누가 키웁니까? 하나님이죠. 이제 심화학습 응용문제에 들어갑니다. 솔로몬의 옷과 들풀 중 어느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더 있음에 가깝습니까? 들풀입니까, 솔로몬의 옷입니까? 들풀입니다. 좀 더 나가 봅시다.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이 아름답습니까, 거울 앞에 선 내가 아름답습니까? 어느 것이 더 아름답습니까? 솔로몬도 들풀에게 기죽었다면 우리는 말할 필요도 없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먼저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십니다. 만일 구하지 않으면 너는 들풀보다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그 나라와 의를 구해야 됩니다. 그 나라 의를 구한다는 말은 이 땅에 주님의 의가 없고 주님의 나라가 없다는 말입니다. 학교에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여러분들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중요하기 때문에 부모님을 속 썩이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중요하면 여러분 속에 퍼져 있는 아버지 엄마가 중요하고, 여러분이 속해 있는 국가가 중요하고, 여러분이 장차 가질 직장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여학생이라면 앞으로 더 멋진 남자친구를 만나는가는 지금 공부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왜냐? 여러분은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 이의를 다는 학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타고 났습니다. 그래, 역시 내가 중요한데 선생님도 여기에 동의해 주시는구먼, 그리고 집에 가면 아빠 엄마가 너는 공부 잘해야 돼. 라고 합니다. 아빠 엄마가 머리 좋은데 공부 못하면 엄마 아빠를 웃음거리고 만드는 거야, 우리 가정은 중요한 가정이야, 난 너 때문에 살아, 너 공부 못하면 나 죽을 거야. 라고 심리적 압박을 가하면서 우리끼리 우리 끼리를 외칩니다.
그 우리끼리가 중요합니다. 그 우리끼리가 모였던 대표적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스라엘에게 레위기를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레위기를 덥석 물었습니다. 그렇다. 우리끼리 우리나라 잘되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구나. 율법 내용을 보니 거룩하라고 하니 우리가 거룩하게 되면 우리가 원했던 복은 거룩을 근거로 해서 다 주어지겠지.
이렇게 오해해서 다 망했습니다. 망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거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룩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존재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의 주제를 좀 고상하게 표현하면 ‘언약이 품고 있는 거룩이 스스로 어떻게 등장하는가?’ 이것이 레위기의 주제입니다. 언약이 품고 있는 거룩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거룩이 없습니다. 언약이 주어질 때 거룩이 찾아왔고, 그 거룩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접촉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이 스스로 날개를 펼칩니다. 우주선이 달에 착륙할 때 다리 같은 것들이 나옵니다. 언약이 올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 덩어리가 오는 것이 아니라 언약이 정착되기 위해서, 언약자체 안에서 펼쳐지는 언약 구조가 나옵니다.
착륙구조는 언약이 스스로 거룩을 펼치면서 안착되는 식입니다. 그 펼치면서 나온 것이 무엇이냐? 어린양을 희생하여 속죄가 되어 용서를 베풀겠다는 식입니다. 이 용서는 어디에서 나온 용서입니까? 거룩 자체에서 나온 용서입니다. 그 거룩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언약은 있음이 되고, 언약에서 나온 착륙구조도 있음이 되고, 이것이 있음이 된다면 우리는 이 있음 때문에 우리는 없다, 없다가 쏟아져 나와야 합니다. 없는 바탕위에 거룩이 있을 때 이것을 두고 거룩한 사람, 성도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말씀 보세요. 지키지 마세요. 말씀보시고 내가 왜 거룩하지 않고, 내가 왜 의인될 수 없는가를 아시고, 그 알게 하시는 작업이 나의 있음을 없는 존재로 바꿉니다. 만약 이렇게 되지 않으면 나는 있음이 되고, 있음이 되면 여기에서 주체가 발생되고, 주체가 발생되면 동질성이 유지되고, 이 동질성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행함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더 높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를 증거하는 자기 우상화하는 식이 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입니다.
신이시여, 우리 이스라엘 잘되기 위해서 오셨군요? 주님 말씀은 진짜 이스라엘은 내가 품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여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니 천국 가겠지요? 예수님 말씀은 저 이방인 백부장이 천국을 차지하고 너희들은 천국에서 쫓겨 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8:1-13).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며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8:8-9).”
백부장에게는 도대체 누가 있고, 누가 없습니까? 자신에게 명령하시는 분만 있고 자신은 없습니다. 여러분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천국이 어떤지 본 사람을 보면 됩니다. 이사야 6장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천국을 봤습니다. 그곳에 있는 천사들이 어떤 자세를 하고 있습니까?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창화하여 가로되(사6:2)”
날개를 어떤 용도로 사용합니까? 자기를 가리는 용도로 사용합니다. 그것이 천국입니다. 천사는 자기를 가립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가릴 날개가 없으니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하는 겁니다. 그때 천사가 와서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이사야에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이사야의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 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했습니다.
인두로 입술을 찌집니다. 그것이 거울속입니다. 이사야 6장에 나타났을 때 우린 거울 밖에서 그것을 보면서 저것이 내 존재 가치에, 생존에 무슨 도움이 될까? 보니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신다는 말씀은 도움이 되는데, 처나 자식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고, 자기를 부인하고, 이런 말씀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마트폰 넘기듯이 쓱쓱 넘어 가는 겁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관찰자의 모습입니다. 그 세계, 거울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데 자기 자신이 이용해 먹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잘난 존재인가를 확인하게 위해서 성경을 보는 겁니다. 예배 참석하고, 성경보고, 기도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서 남은 죽어도 나는 얼마나 살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 확인합니다. 남의 가정은 다쳐도 내 가정은 다치지 않아야 하고, 안산에 있는 아이들은 세월호에 사라져도 내 집안은 결코 사라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놓여 있는 세상 그 자체입니다.
여기에 대해 문제 있다고 언급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들 각자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나 잘되기 위해 신을 믿고, 신을 믿으면 지금보다 복 받아 더 잘되고 그것 외에는 아무 생각 없이 교회 나옵니다. 오직 나의 존재함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레위기를 펼치니 이 말씀이 왜 나왔는지 모릅니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려면 그냥 용서하면 될 간단한 문제를 왜 복잡하게 어린양이 나오고 제사장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왜 복잡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끼어들 수 없는 부분을 하나님께서 직접 해내시기 때문입니다. 레위기의 모든 말씀은 우리가 해야 할 기능이 아니고 주께서 홀로 담당하실 기능을 레위기에 미리 알려 주신 겁니다.
레위기를 보세요. 지키지 마세요. 만일 지키려 한다면 망합니다. 거룩하게 되려고 하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거룩하면 거룩할수록 자신에 대한 집착과 자기 동일화는 더욱 더 강열해서 완전 마귀가 되어 버립니다. 누구든지 날 건드리면 용서하지 않겠어. 점점 더 자기 경직화, 우상화, 콘크리트가 됩니다. 자기 자신을 동상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여러분들은 레위기가 성경 뒷부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 의미심장하게 보셔야 됩니다. 레위기가 전부가 아닙니다. 레위기가 하나의 문제라면 해답은 따로 있습니다. 수학문제를 풀려면 해답을 보고 문제를 풀면 빨리 풀 수 있지요. 해답 없는 문제지를 누가 사겠습니까?
레위기는 해답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 해답을 우리는 모릅니다. 그냥 문제만 던져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시로 그 답이 바깥으로 튀어 나와 우리를 치게 됩니다. 우리를 치게 될 때 우리는 아파요. 몹시 아파요. 왜 아프냐 하면 내 뜻과 내 소망이 부서지기 너무너무 아파요. 교회 올 때 은근히 노리고 왔던 것, 하나님을 믿고 행운을 잡고 나는 출세한다는 아름다운 무지개 같은 꿈과 비전과 아름다운 이상 자체가 주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지옥 가는 길임을 우리가 알게 되면 아파요. 아프니까 청춘이잖아요. 아프니까 성도입니다.
성경보고 아파할 때, 내 뜻이 꺾어질 때, 무산될 때, 아플 때 아프게 하신 분이 해답으로서 우리에게 이미 접촉이 되어 있습니다. 너는 나를 버릴지라도 나는 너를 버리지 않겠다는 하나의 기호요 신호입니다. 제발 거룩하지 마라. 이것이 너를 거룩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외에는 우리가 거룩한 세계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다시 레위기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말씀하셨습니까? 성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질문 다시 드립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 같고, 왜냐하면 하나님은 안보이기 때문에 애매모호해요. 지금 성막은 없습니다. 모세도 죽어 없어졌습니다. 이순신 영화는 있지만 이순신 장군 없지요. 그렇다면 성막도 없고 모세도 없다면 하나님도 없다가 되지 않겠습니까?
성막 없다, 모세 없다, 하나님 없다는 것은 누가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까? 내가 있다는 것 때문에 성막, 모세, 하나님은 없는 셈이 됩니다. 그래서 레위기에서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들이 있다고 여기는 이곳에 침투하기 위해 모세를 성막에서 부르신 겁니다.
모세는 백성들 눈에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시로 눈에 보이는 모세에게 반항합니다. 홍해가 가로 막혔을 때, 물이 없을 때, 먹을 것이 없을 때, 고기가 먹고 싶을 때마다 원망합니다. 애굽이 좋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모세에게 닦달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아는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경유해서 백성들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 자기 존재에 준해서 직접 모세에게 달려듭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경유해서, 보이지 않는 분을 경유해서, 마치 없는 존재인데 나보다 더 있는 존재를 경유해서 백성에게 다가갑니다. 이 백성을 어떻게 감당하라고 나에게 주셨습니까. 라고 하지요.
이 모세에게 준 것이 레위기입니다. 그렇다면 레위기와 모세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모세는 레위지파에 속합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오시면서 모세뿐만 아니라 그들 눈에 보이는 특정지파에게 기능을 줍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모든 기능은 장차오실 예수님이 하실 기능입니다. 그 기능을 레위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기능이 무엇인가? 이것을 설명하면서 첫째 시간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민수기3장보겠습니다. 제가 그림을 하나 그리겠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수족관입니다. 수족관 안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사자? 코끼리? 아닙니다. 물고기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레위기라 했을 때 우리는 관찰자입니다. 그 속에는 점선으로 있는 어떤 분이 계십니다. 어떤 분이 어린양과 속죄제물의 모습으로 가면서 수족관 안에서만 미래를 향해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수족관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관찰자로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수족관 안에 계신 분을 알고 있는 모세가 등장합니다. 모세가 백성을 볼 때 곧장 보는 것이 아니라 수족관에 계신 예수님을 경유해서 본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 변형되실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두 분이 계셨지요.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베드로 입장에서는 모세는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함께 등산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변화산(다볼산)이 588미터입니다. 모세 엘리야가 함께 할 줄 생각도 못한 겁니다. 살아 있었던 겁니다. 사람은 내가 여기 있다고 하니 죽지요. 내가 없다고 생각하면 영원히 죽지 않아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라는 말씀이 빈말이 아닙니다. 죽는다고 하는 것은 마귀가 우리에게 협박 공갈치는 겁니다. 심지어 불신자도 죽지 않습니다.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7-29)”
한번 태어나면 안 죽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안 죽습니다. 연세 많으신 분들이 고생하는 이유가 안 죽어서 고생해요. 요양병원에서 있는 돈 다 까먹고, 링거 맞고, 젊어서는 살아 보겠다고 했지만 늙어서는 죽겠다고 하지만 자식들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호수 꽂아 국가가 주는 보험금으로 고생을 더 시킵니다. 이제는 갈까 하지만 다리미 두 개로 털썩 하여 다시 심장 뛰게 하여 또 살게 합니다. 이 세상이 감옥입니다. 이 세상이 교도소입니다. 여자들은 교도소에서 임신하여 자식을 낳은 겁니다.
지금 수족관에서 예수님이 달리고 있습니다. 모세의 장점이 무엇인고 하면 모세는 백성도 보이고 예수님도 보인다는 겁니다. 양쪽이 다 보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중보자적 기능이라고 합니다. 중보자는 양쪽을 다 보는 겁니다. 모세가 양쪽을 다 보기 때문에 모세 같은 지파, 즉 레위지파를 통해서 장차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속죄가 되고 어떻게 용서가 되는지 메커니즘(어떤 대상의 작동 원리나 구조) 그 과정을 레위기에 담아 두어서 모세 같은 레위지파를 통해서, 제사장을 통해서 어떤 행동을 보여줍니다.
장차 오실 예수님이 다 이루실 것을 광야에서부터 보여줍니다. 이것을 모형과 그림자라 합니다. 이쯤에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경을 보세요. 지키지 마세요. 성경 속에 뭔가 살아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그 꿈틀거림과 나의 살아 있음을 비교할 때 나의 몸을 가려야 할 지경입니다. 내가 사는 것은 내 존재의 가치만을 위해 살아가지만 그분은 그런 못된 죄인을 용서하기 위해서 꿈틀거리고 계십니다.
그 레위지파에 대한 일이 민수기 3장에 나와 있습니다. 12,13절입니다.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스라엘은 열 세지파가 됩니다. 열 세지파가 되면서 따로 한 지파를 끄집어냅니다. 열두 지파가 되면서 12라는 숫자가 한 지파로 응축되면서 하나의 지파가 하나이신 하나님을 대표해서 만납니다. 레위지파는 대표자 자격으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레위인들에게 바치라 하셨습니다. 또한 레위인들은 그 십일조 받은 것의 십일조를 제사장에게 바칩니다(민18:26-28). 제사장은 릴레이 최종주자로 자기 몸을 하나님께 바침으로, 속죄제물을 드림으로 십일조가 무사히 하나님께 전달이 됩니다.
이렇게 십일조가 전달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사는 땅이 하나님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 땅에 세금을 낸 겁니다. 그 땅이 하나님의 땅, 약속의 땅인데 임대차 계약을 해서 품꾼으로 살아가야 할 자들이 이스라엘이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들 자신의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의 것을 전달하는 임무를 가진 자를 장자라 합니다.
그래서 장자는 몽땅 다 가지고, 둘째 셋째는 장가도 못갑니다. 큰 형 집에 머슴살이해야 합니다. 그런데 장자가 아들 없이 죽었을 때 둘째 동생은 형수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아 그 아들을 맏이의 자식으로 올립니다. 홍길동처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은 맏아들로 오시는 분, 맏물로 오시는 분에게 우리가 종속됨으로서 그 맏이가 중보자 되심으로 우리는 영원히 주님의 영광과 함께 존재하는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 과정에 필수적인 것은 속죄와 사죄입니다. 죄는 죗값을 치르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그 죄 값을 다 치러 주셨습니다. 우리의 십일조로, 헌금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참석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값은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 값에 근거해서 우리에게 용서가 주어지는 그 메커니즘, 그 과정마저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그리고 지키지 마세요. 이미 다 이룬 상황을 괜히 우리 손톱 떼 묻히지 마세요. 묻히면 거룩을 흠집 내는 겁니다. 100% 온전한 새언약이 포함된 거룩 앞에 말도 안 되는 자신의 거룩을 내세우면 그것은 자기 자랑이 됩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마세요. 레위기는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는 그냥 당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밀려오시면 우리는 그 피를 증거하는 널려있는 카펫 같은 인생이 됩니다.
민수기 3장41-43절
“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난 것의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를 계수하니 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함을 입은 처음 난 남자의 명수의 총계가 이만 이천 이백 칠십 삼명이었더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가 이만 이천 이백 칠십 삼명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자가 레위인보다 이백칠십 삼인이 더 많습니다(46). 이렇게 되면 레위인은 이만 이천 명입니다. 하나님께서 고의적으로 남기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자가 레위인보다 이백 칠십 삼인에 더 많기 때문에 이들을 속하기 위해 매명 오세 겔씩 취하되 성소의 세겔대로 취합니다. 이 속전을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줍니다. 모세가 레위인으로 대속한 이외의 사람에게서 속전을 받았습니다(민3:49).
여기에서 273*5=1,365 세겔 됩니다. 각 지파의 숫자가 레위지파 숫자보다 이백 칠십 삼명이 더 많은 것은 레위지파의 존재 이유가 속전하기 위해 대표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냥 의사를 반영하기 위해 대표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표자가 없으면 속죄가 안 됩니다. 그 레위지파의 대표자가 제사장이고 제사장의 대표자가 장차오실 예수님입니다.
레위기가 무엇일까요?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우리에게 회상하면서 옛날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자진해서 돈 들여서 값을 치루셨습니다. 본인이 값을 치렀다는 사실을 수족관에서 나타내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구원받고 영생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할 것이 없음을 알게 하십니다. 또한 그 다음부터는 왜 할 것이 없을까? 뭘 해도 거룩하지 않기 때문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거룩해지려는 것조차 내 존재에 입각해서 만들어내는 자기 우상화 작업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서 이미 다 이루어진 사실에 대해 감사하라고 예수님이 미리 가셔서 주님의 영으로 모세를 통해 레위기를 말씀하신 겁니다.
레위기 속에서 예수님이 얼마나 세세하게 일하시는가? 레위기 속에서 어떻게 활동하시는가 하는 것은 십분 후에 하겠습니다.
관리자(IP:203.♡.42.222)
14-09-18 08:57
레위기 문등 제 2강
첫째 시간에 속죄와 용서함을 구분했습니다. 속죄란 값을 치르는 것을 말합니다. 또는 대신 치른다고 해서 대속이라고도 말합니다. 값을 치르는 것과 용서 받는 것을 왜 별개로 할까요? 어떤 분이 값을 치렀다고 그 치른 값의 효과가 전달될 때 우리가 접근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값을 치렀네, 그렇다면 이제 용서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덥석 무는 것은 우리에게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 저 값을 치른 것을 내가 가져야지. 라고 생각하여 덥석 가질 수가 없습니다.
값을 치렀습니다. 그 다음 그 값을 치른 효과를 가져가는 것은 셀프가 아닙니다. 그냥 그 자리에 있으세요. 값을 치른 것을 쟁반에 얹어 먹는 것까지 주께서 하셨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지신 것을 나의 신념과 강한 집념으로 내가 결사적으로 믿어야지. 라고 해서 붙잡힐 십자가가 아닙니다. 만일 이렇게 되면 구원파의 질문 “당신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에 걸려들면 많이 당황하게 됩니다.
값을 치르고 적용하는 것까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택배는 집에 없으면 내가 있는 곳까지 따라와서 배달해 줍니다. 이것까지 약속해 주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9).” 이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제가 과거에 대구에 있는 역사가 백년이 넘은 교회에 가서 수련회를 하는데 그 수련회 주제가 전도하기입니다. 그곳에서 ‘여러분 전도하지 마세요.’라고 했습니다. ‘전도한다고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전도하지 않아도 주님께 택한 백성은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믿을 때에, 내가 설치지 않아도 주께서 분주하게 일하시는 것이 느껴지신다면 그것이 바로 전도자의 모습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그 교회 설립자 자손이 화가 나서 뒤에 있는 제 책을 다 치워버렸습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보험회사 영업사원이라면 열심히 해서 한 사람이라도 가입하게 하여 실적을 올려야 하겠지만 우리는 보험회사 영업사원이 아닙니다.
만일 사도바울이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시키려고 했다면 절대로 십자가 복음 이야기를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이라도 더 건지시려면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7-38)”라는 말씀을 하시면 안 되겠지요.
주께서는 모종심어 놓은 자기 백성만 데려 가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님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한 사람만 데려 갑니다. 혹시 이 중에 복음 아는 사람 있습니까? 물어서 있다고 하면 그 사람만 데려 갑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이 사도행전 마지막에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게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이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행28:26-27)” 라는 말씀을 지금 드리는 겁니다.
저도 알아듣겠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갑습니다가 됩니다. 복음을 알아들으면 세상에서는 비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오히려 복음을 못 알아듣는 사람이 세상에서는 정상인입니다. 당연히 그러해야 합니다. 제가 이 말씀드리는 것은 여러분들이 전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주눅 들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전도하지 않았다고 너 저 바깥 어두운 곳에서 손들고 영원히 꿇어 앉아 있어. 라고 하지 않습니다.
노아가 몇 명 전도했습니까? 노아가 평생 전도한 사람은 일곱 명입니다. 말이 일곱 명이지 그냥 자기 가족입니다. 그런데 노아가 천국 가서 벌 받았습니까? 방주는 크게 지어놓고 들어 온 사람은 자기 식구뿐이고 온통 동물들만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것이 너희 가족 전세 배냐? 왜 너희들만 탔느냐고 책망 받고 벌 받았습니까?
도리어 반대입니다. 아홉 명 전도할까봐 아찔했습니다. 열 명 전도하지 않은 것을 너무 잘했어.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24:38,39)”
노아의 방주를 보면서 그 어느 누구도 물 심판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만 관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한다고 노아가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노아의 믿음을 히브리서에서는 대단한 믿음으로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히11:7)”
노아를 본받아라. 전도하지 마라, 전도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친히 분주히 일하신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도바울처럼 나를 붙들고 분주히 일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붙들고 일하시기 때문에 본인이 전도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하게 하시는 조치에 의해서 전도합니다. 결국 나의 일은 없고 내 평생에 주님의 일만 남도록 주님의 일에 집어넣습니다. 그것이 내가 하는 전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는 전도입니다.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귀한 것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모두 다 귀하게 여깁니다. 그 생명 같은 돈을 교회에 내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헌금을 하게 하실 때 우리가 헌금하는 순간 내가 얼마나 돈에 대한 애착이 지독하냐를 다시 한 번 느끼게 하십니다.
헌금할 때 덜덜 떨면서 딸 피아노 레슨비 지불해야 하는데, 떨면서 헌금 내려고 하는데 전화 와서 아이가 아파 병원에 가야된다고 할 때 얼른 목사님 다음에 봅시다. 라고 하면서 헌금하지 않고 가버립니다. 그때 목사는 그것 주고 가지, 그것 내고 가지. 라고 하면 다음에 낼게요. 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음엔 다 잊어버립니다. 목사와 사모는 그것만 기억하는데 헌금하는 것 잊어버리면 목사는 또 아이고, 손해 봤구나. 합니다. 돈이 근본이 되지 않는 인생은 없습니다. 모든 문제는 돈으로 시작되고 돈으로 끝납니다. 얼마면 되겠어? 사랑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하지요.
이 속죄와 사죄에 대해서 주님께서 제물을 마련하셨습니다. 또한 ‘주께서 용서하십니다. 이것이 약속입니다.’ 라고 했을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이 들으면 ‘그래서 어쩌라고’ 라고 합니다. 성경 공부하면서 상대가 어떻게 말하는가를 예상해서 답변할 것까지 준비했는데 상대가 그래서 어쩌라고 하니 갑자기 말문이 막히면서 자손심이 확 상합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에 대해 답변해야 내 실력을 보여줄 것인데 예상 못한 돌발 질문이 나왔습니다. 전도하기 위해 많이 준비했는데 한 번에 다 날아갈 판입니다. 그러면 다음을 기약해야 됩니까?
그 ‘어쩌라고?’에 대해 답변을 제시해 드립니다. 민수기3장38절입니다. “장막 앞 동편 곧 회막 앞 해 돋는 편에는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진을 치고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를 대신하여 성소의 직무를 지킬 것이며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일지니라.”
죽음이 코앞에 있습니다. 속죄했습니다. 용서 받았습니다. 상대가 ‘어쩌라고’ 할 때, 죽음이 네 코앞에 있다고 해야 합니다. 죽음에 완전히 포위 되었습니다. 죽음이 있습니다. 사람이 늙어서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나이를 따지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죽을 수 있습니다. 죽음이란 내가 소멸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사는 삶과 다른 삶을 또 살아야 됩니다. 태어 날 때 삶이 애굽의 삶이라면 죽은 후에 사는 삶은 약속의 땅이 됩니다. 그래서 죽음과 삶을 수평적으로 출애굽 사건을 통해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그냥 건지시는 것이 아니라 애굽에 한번 푹 적셨다가 약속의 땅에 데려갑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서의 기능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기능입니다. 기능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기능 없는 존재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도가 성도되는 것은 기능 때문입니다. 성도는 주님이 하시는 기도와 전도와 헌금 등 모든 것을 기능하기 위해 있습니다. 예배참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보내셔서 여기 참석하신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기능인데 그 기능은 구출, 탈출, 구원의 내용을 보여주는 기능입니다.
출애굽의 전제, 탈출의 전제는 갇혀 살고 있음입니다. 이것이 기정사실화된 구출입니다. 어디에 갇혀 있습니까? 가족, 가문, 국가에 갇혀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구체화된 형식들입니다. 가족과 가문에 갇혀 있는 것을 자기 이름에 갇혀 있다고 봅니다. 기독교도 관련 없고, 다른 종교와 관련 없는 어떤 자식이 어릴 때 아버지와 싸워 가출했습니다.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들은 미국에서 성공해서 돌아 왔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묘지에 소주와 오징어를 갖고 애인과 함께 갑니다. 묘지 앞에서 ‘아버지 불효자가 이제 왔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보고 싶은 성공했습니다. 옆에 있는 여자는 재벌 삼세인데 이번에 상속자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여자에게 ‘자기야 잘해’라고 하면서 무덤 앞에 절을 합니다. 그러면서 아버지 지켜보세요. 제가 사랑하는 여자와 잘 살겠습니다. 라고 하지요. 장보리인지 무슨 보리인지에 나오지요. 역경을 이겨내고 한복에 장인이 되어 잘 살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모든 드라마의 주제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입니다. 내가 속해 있는 나의 가문과 내 가족, 이 이름을 위하여 평생 몸 바치기로 작심하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보여주는 기능은 내 이름의 영광을 위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은 잘도 외웁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누구 이름입니까? 아버지의 이름이지요. 우리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지요.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은 우리가 착하게 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만나처럼 이미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어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이름이 어디있습니까. 라고 묻지 마세요. 우리는 내 이름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짓밟고 있습니다. 내가 움직이는 곳마다 아버지의 이름을 내 이름으로 짓밟고 있습니다. 이것도 월급이냐. 하면서 짓밟고 있고, 아들 성적이 30점 나오면 이것도 성적이냐. 하면서 짓밟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희생의 업적을 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 때문에, 내 이름을 먹칠한다는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 주신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는 말씀을 우리는 짓밟고 있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족한 줄로 알라는 말씀을 우린 남들처럼 먹어야 하고 남들처럼 입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욕심 때문에 짓밟고 있습니다(히13:5).
교회가 무엇입니까? 자기 거울만 들고 오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수족관 속에서 움직이시는 피 묻은 주님의 손을 보면서 왜 속죄물이 되셨는가? 어떻게 내가 저분 때문에 용서 받았지? 속죄물이 되시고 용서하신 그 은혜 속에 들어가려는 우리가 어디에 갇혀야 됩니까? 자기 이름에 갇혀야 되지요. 신약에 오면 이것을 한 자로 ‘죄’라고 합니다. 죄에 갇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갈3:22)” 갈라디아서 3장23절에서는 율법아래 갇혔다고 하십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 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율법이 없는 곳에는 죄가 없습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롬4:15).” 우리로 하여금 죄의 그물망 속에 머물게 하십니다.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지만 그 자유의지는 죄 짓는데 사용되는 자유의지만 있습니다.
갇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살아온 것이 죄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 없지만 우리는 무엇을 느낍니다. 두려움을 느낍니다. 무슨 일을 해도 두렵다는 식으로 죄 있음이 드러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이렇게 행동하면 저주 받을 수 있어. 하늘나라 CC TV가 온 세상에 쫙 깔려 있습니다. 내가 예배시간 늦은 이유와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다 알고 계시니 이것을 하나님이 벌하기 위해 화요일 바이어 만나는 것을 꼬이게 하실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음 주엔 더 일찍 오도록, 성가대 빠지지 않도록, 주일학교 성실히 봉사하게 조치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체를 두고 알 수 없는 두려움이라고 합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것을 미지의 X라고 합니다. 알 수 없는 두려움, 자꾸 무엇인가에 쫓기고 있습니다. 성공했다고 남들이 이야기 하는데 그 성공이 나의 두려움을 쫓아내지 못하는 성공이라면 그 성공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모든 것을 가졌는데 못 가진 것이 더 크게, 더 많이 보일 때 그것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작은 산이 있어 올라가 보니 그 뒤에 에베레스트 산이 보입니다. 에베레스트에 올라 보니 그곳에 먼저 올라온 사람이 당신은 어느 코스로 왔느냐고 묻습니다. 먼저 올라온 사람이 제일 어려운 코스로 왔다고 합니다. 자신은 제일 쉬운 코스로 올라 왔는데. 이럴 때 결핍을 느낍니다.
수영장 갔을 때 자신은 수영 못하는데 어린 아이가 선수처럼 수영을 할 때, 오기가 나서 자유형으로 두 번 왕복하겠다고 다짐해서 수영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수영장에 수영선수가 나타납니다. 어느 곳이든 도착해 보면 그곳엔 도사들이 먼저 자리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낚시, 화투, 레이스 도사들이 가득 있습니다. 도대체 언제 우리가 기죽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그 두려움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미지의 X에서 왔습니다. 나의 영광, 나의 만족을 위해, 결핍을 채우기 위해 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그 결핍을 채우고, 그 차이를 줄여나가면 나는 성공한 사람이라고 타인에게 보여 줄 수 있다는 자기 이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가련한 존재가 우리입니다. 가문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가문의 영광을 훼손하지 말라고 세뇌 받은 것이 우리의 정신세계를 구축했습니다. 무엇을 해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