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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데카르트 140916강의[신학]

데카르트 140916

이름 : 이근호(IP:119.18.89.5)

한윤범(IP:119.♡.174.28)

14-09-19 10:25

20140916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6-데카르트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데카르트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1596~1650까지 54살을 사시다 돌아가신 분인데 데카르트란 말을 제가 쓰게 되면 우리 생각에 “지는 뭔데?” 이런 생각이 들겠지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인데 뭐 대단한 게 나오느냐. 이 사람이 철학에서는 유명해요. 그런데 복음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이런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복음을 알기 전의 토양이 철학 토양이에요. 복음을 알았다는 말은 뒤돌아볼 때 내가 그동안 어떤 세계에서 살았는가를 다시 새삼스럽게 파악되는 겁니다. 옛날 데카르트가 살던 철학은 뭐냐 하면, 반드시 신의 존재를 전제로 해서 진리를 파악하게 돼있어요. 신의 존재를 포함해서 진리를 파악하는 게 철학이란 말이죠. 요즘 같으면 신의 존재를 집어넣어서 이야기하게 되면 이걸 철학이라고 하지 않지요. 신학이라고 하지요. 신학전공자가 목사, 신학교수들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철학과는 다르지요. 신의 존재를 전제로 해서 진리를 뽑아낸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신이 있다는 이야기냐? 신이 있다는 이야기로 마감될 것 같으면 간단하겠지요. 그런데 신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는 말은, 그냥 신이 있다는 말로 끝나는 게 아니고 “신이 계시다면 인간은 살아야 되는가?”라는 것조차 철학에 속한다는 말입니다. 요즘 21세기에서는 전부 교회가 할 이야기를 그 당시에 철학가가 하지요. 그래서 데카르트가 살던 시대가 우리가 생각하는 무신론적 시대가 아니고 데카르트가 만약에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 사형 당하던 시대입니다. 신이 계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이것까지 끄집어내는 것을 포함한 것이 그 당시 철학입니다.

여기서 궁금한 게 뭐냐 하면, 그 당시 신학은 뭐냐? 그 당시 신학은 교회를 어떤 식으로 유지하고 뭘 채워서 운영할 것인가가 신학에 해당되는 겁니다. 성당에서 신부들이 하는 이야기의 초점이 뭘까요? 제 설교와 강의를 들으면서 지내는 어떤 천주교신자가 있어요. 그분이 저한테 메일을 보내면서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나와요. 도저히 성당에서 설교를 못 듣겠다는 겁니다. 우연히 설교를 듣고 복음을 접하게 되니까 자신이 성당을 다녀야 될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어제도 메일이 와서 답장을 했는데 질문이 뭐냐 하면, 성당을 계속 다녀야 되느냐, 아니면 다른 성당에 가야 되느냐, 아니면 교회를 가야 되느냐? 조치를 해달라는 그런 이야기에요.

그래서 제가 답변하기를 처음에 강의할 때와 똑같은 이야기에요. “나는 성당에 다니지 않고 교회 다닌다.” 이걸로 하지 마시고 그동안 내가 무슨 정신으로 성당에 다녔는지 다시 한 번 돌아봐야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떠난 자리를 돌아보지 아니하면 똑같은 자리에 또 갈 수 있고 설사 복음만 교회라 할지라도 자기 엉덩이가 앉는 순간 성당이 될 수 있어요. 만약에 복음을 아는 교회에 다녀서 감사하다고 헌금을 듬뿍 해버리면 그 교회는 졸지에 그 사람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옛날 자기가 돌아온 곳을 되돌아보지 아니하면, 철저하게 분석하지 아니하면 옛날에 자기가 살아오면서 익혔던 교회 운영방식대로 밀어붙일 테니까 그거는 교회가 아니고 성당이 될 가능성이 많다는 말이죠.

예를 들면 주일학생 때 크리스마스에 빵 얻어먹겠다고 잠시 교회 다녔던 사람이 열네 살에 공부한다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나이 사십이 되어서 사업에 성공해서 다시 교회 갈 때 일곱 살부터 열네 살까지 들었던 부흥사나 목사의 설교를 그대로 간직하고 사십 대 초신자의 모습으로 교회 간다면 어떤 교회를 원할까요? 옛날식의 보수적 교회를 원할 거란 말이죠. 그렇게 되면 자기가 떠났던 교회를 다시 고수하게 되니까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 처음부터 새로 시작합시다.

데카르트를 하는데 이분이 신학에서는 유명하지 않고 철학에서는 유명해요. 그래서 신학에서는 데카르트는 철학자기 때문에 관심 둘 필요 없다고 도외시해버리거든요. 그런데 데카르트가 살던 시대가 신을 인정하던 시대에요. 그 당시 철학이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난 뒤에 신의 존재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고 신이 있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것까지도 철학에서 다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 신학이 없었는가? 있었지요. 그 신학이 뭐냐? 이 사람은 사제가 아니거든요. 그 당시 신학은 개신교든 성당이든 교회를 어떻게 유지하고 운영할 것이냐? 여기에 도입되는 체제가 신학이 된 겁니다. 요약하면 그런 거예요.

그 당시 데카르트란 철학자가 신의 존재를 전제할 때 신이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아니까 자기는 공부를 많이 해서 체계적으로 신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윤리적 문제까지, 성도의 삶까지 철학에서 다루었단 말이죠. 그때 데카르트는 그 당시 신학의 눈치를 보지요. 프랑스 같은 경우에는 대세가 천주교니까. 만약에 교회가 이야기한 것과 어긋나면 데카르트는 사형당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데카르트는 교회가 이야기하지 못하면서 철학자는 일반대중, 교회 운영책임자 말고 일반 사람들이 그 당시 관심사를 자기 체계 속에 포함시켜줘야 돼요. 그러면 교회 눈치 보고 세상 눈치 보고 둘 사이를 섞어놓는 중매쟁이, 중보자 같은 역할을 할 때 교회로서는 데카르트의 이론에 만족하지 못하지요. 사제의 말에 무조건 아멘하고 무조건 따라가야 되지 똑똑하다고 해서 가르치고 벗어나면 안 되잖아요. 데카르트 하는 말이, 그대로 했습니다. 일반교인들은, 신부들의 이야기야 듣던 소리 또 듣고 귀찮고. 뭔가 이 시대에 정말 궁금한 것을 해결해달라고 할 때 제가 있잖아요 하고 나설 수 있고.

그럼 그쪽에선 점차 신부들이 가르침보다 철학자의 가르침을 따르겠지요. 그때부터 신학의 세계에서 철학자의 세계로 이동하는 겁니다. 이동하면서 교회의 권위로부터 좀더 자유롭고 싶은 인간들의 발달된 정서와 맞아떨어지는 겁니다. 이제는 꼭 교회에 안 나가도 된다는 것, 그리고 사제가 아니더라도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제공될 수 있는 시대에 접했다는 것을 그들의 몸소 경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를 신학자로 하지 않고 철학자라고 하는 겁니다. 이제부터 신학을 버리고 철학의 시대에 돌입했다는 겁니다. 이 말은 오늘날 이 시대의 철학은 신이라든지, 예수라든지 이런 이야기가 안 나와야 되잖아요. 하지만 이 시대가 막 떨어지는 시기기 때문에 그들은 철저하게 신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신의 존재 증명을 다 하면서 인간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것인가? 마지막 윤리문제까지 여기서 거론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궁금하게 그 당시 성당에서 뭘 했느냐? 데카르트란 사람이 이야기하기 전에 그들 나름대로의 주장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데 이걸 아셔야 돼요. 성당이나 교회의 책임자로 있는 운영자, 소위 신부, 사제들은 새로운 것을 언급하는 것은 못내 두려워해요.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이 두려워서?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예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지도 않고. 뭐가 두려우냐 하면, 선배들이 가르친 이데올로기, 사상, 민중들을 지배했던 지배권을 그대로 유지해야 거기서 밥벌이를 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근대소설의 주제 중에 하나가 조선시대에 유교적 풍토에서 몸과 마음을 망쳐버린 여인이 신문학을 접하면서 어떻게 거기서부터 탈출하는지 그런 내용이 있어요. 그걸 계몽주의라 합니다. 가르쳐서 정신 차리게 만드는 계몽주의. 우리나라도 [자유부인](정비석, 1954년 1월부터 8월까지 서울신문에 연재된 작품)이라는 소설이 나왔잖아요. 그 소설이 히트(소설책으로 발간되었을 때 4만부가 단기간에 팔렸다.) 친 이유가 뭡니까? 이미 사람들이 응어리졌다는 거예요. 뭔가 새로운 게 없는가 하고 있는데 그런 소설을 읽음으로써 자기 꿈을 대신해주는 것처럼 기분이 굉장히 시원하지요. [별들의 고향] 같은 소설이나 영화, “오랜만에 누워보는군.” 이런 대사가 뭔가 현재 젊은이들의 정서를 대변해줄 때 사람들은 인습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느끼는 겁니다.

그러면 신부들도 연구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신부들은, 자기가 신학을 연구하는 자체가 스스로 신부이기를 포기해야만 하는 시대에요. 왜냐하면 교회가 운영된다는 것은 항상 일정하게 틀에 맞춰서 움직이게 돼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기계 같은 사람들이거든요. 성만찬은 어떻게 해야 되고, 앉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되고, 하루에 기도는 몇 번 해야 되고, 일년에 고해성사는 몇 번 받아야 되고 이미 기계적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만약에 신부 쪽에서 자진해서 뭔가 약간에 유동성을 허용한다면, 진리체제로 잡혀있는 그 권위를 소유하고 있다가 신부 쪽에서 그것에 약간 틈을 주면 그것을 버리고 성당 안 다닐 가능성이 있어요. 성당에 안 다닌다는 말은 성당에 돈을 기부할 기회를 상실한 거예요. 그럼 성당운영이 어렵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군대조직보다 더 심한 조직이 신부조직이에요. 전기고문까지는 안 하겠지만 정신적으로 철저하게 천주교의 전통, 교회법대로 모든 걸 해야 돼요. 제사장 이상으로 완벽하게 갖추어진 규약대로 복장부터 해서 하루 일과(수도원처럼), 모든 것이 정해져있어서, 정해짐을 확정으로 보면, 그냥 권위가 아니고 유일한 권위, 그 배후에 유일한 하나님의 권위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신부는 하나님 앞에 사람의 영혼을 드리는 아버지로서 있는 겁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흔들리면 어떻게 돼요? 안 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권위가 흔들리지 않는 한 신부의 권위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신부의 권위를 유지해주는 것은 그동안 완전무결하게 내려온 전통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성경이 우선이 아니고 전통이 우선이에요. 해석도 전통 안에 들어있어요.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하는 것은 선배들의 해석했는지 그 전통만 따오고.

신부들 행사할 때 보면 추기경이 했던 기도문을 복사해서 전국 성당에 날리면 성당에서 그 기도문 그대로 읽어요. 거기에 참석한 교인들은 그걸 듣고 주정헌금 내고 도장 찍고 집에 가면 구원받은 거예요. 참 편하지요. 그래서 교회를 실제로 운영하고 유지하려면 권위가 있어야 되고 권위는 틀에 이미 확정된 그러한 내용 외에는 말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만약에 신부가 틀어지면 그 신부는 가차 없이 잘라버립니다. 신부를 파직시키지요.

우리가 보기에는 그 사람들 숨 막힐 것 같지만 그게 오히려 좋아요. 왜냐하면 가만있기만 하면 구원받으니까. 얼마나 편해요. 성당에 와서 신부가 주는 떡을 혓바닥 내밀고 먹기만 하면 구원받는데 세상에 그것보다 간편한 게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기계 같지만. 그들은 오히려 교육수준이 낮은 쪽에서는 오히려 그런 것을 반기는 거예요.

지금도 교회 오래 다닌 연세 많은 권사들, 장로들 보세요. 조금만 다른 소리 하면, 부목사가 신학하고 공부 좀 했다고 다른 소리하면 대번 당회장한테 가서 “부목사 내보내라. 교회 분위기 다 흐리게 만들었다. 저런 인간 때문에 젊은아들이 교회를 안나오잖아. 옛날식대로 하란 말이야. 당신이 시켜서 옛날식대로 그 틀에서만 하라고. 1대지, 2대지, 3대지, 아멘, 끝. 무슨 강해설교? 필요 없어. 위대하신 부흥사님 하신 대로 하라고.” 그렇게 장로들, 권사들이 요구한다니까요. 특히 부산은 고신 측에서 그렇게 하지요.

왜 그렇게 하느냐? 생각 안 해도 되니까. 한 번 그런 법에 매이게 되면 몸이 거기에 맞춘 몸이 되게 되서 편해요. 십일조 하다 안 하면 되게 처음에는 찝찝해요. 6개월 가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거든요. 십일조 안 해도 벌 안 받는구나. 더 놀라운 것은 십일조 안 하니까 창고 차고 넘쳐요. 이건 땡 잡은 거지요. 십일조 안 해도 되고 십일조 한 약속대로 창고는 넘치고 땅 샀는데 땅값 막 오르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데카르트가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지금부터 데카르트가 이야기한 걸 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 숨 막힐 지경에서 데카르트는 상당히 자기 목숨의 위태로움을 감지하게 됩니다. 굉장히 위험하든 것.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데? 존재 인정해도 소용없어요. 신의 말씀 따라 살자는데? 그것도 필요 없어. 교회가 전통적으로 시킨 대로 안 하면 아무리 성경적으로 옳은 소리해도 잘립니다. 스피노자가 그랬고 많은 사람들이 그랬어요. 브루노란 사람은 화형 당했어요. 신이 세상의 중심이라 했는데 그것 때문에 잘렸어요. 네가 뭔데 그런 소리하느냐? 교회가 시키는 대로 해야지 네가 아는 체하느냐. 그래서 잘리는 거예요.

그것은 그 사람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교회의 모든 정신은 사제가 쥐고 있어야 되지 사제 외에 다른 사람이 쥐고 있는 것은 교회 유지와 운영의 책임자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겁니다. 자기 자존심과 관련돼있는 거예요. 집사가 성경을 많이 알 때 목사는 죽이고 싶어요. 이건 자존심과 관련되니까.

근대 신학이라고 해서 교재에 보면 데카르트가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데카르트에 대해서 그냥 언급하여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저런 이야기했습니다, 하면 들어도 다 잊어버려요. 데카르트가 뭘 한 사람이냐고 한다면 딱 한 가지만 이야기하게 되면 데카르트 전부를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을 쓰겠습니다. 이성으로 체계화시키기, 이게 데카르트의 주장입니다. 이성으로 체계화시키기와 그 당시 천주교 성당에서 말하는 신의 체계와 같을까요? 그 당시 천주교회의 이론은 신의 활동(성)이에요. 그런데 데카르트는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이성으로 체계화시키기. 신의 활동성과 이성으로 체계화시키기, 같은 것 같은데 뭔가 달라 보이잖아요.

데카르트 시대가 16,17세기거든요. 이미 상인들이 장사를 해서 많이 발전한 거예요. 이태리에서 장사해서 많은 이득을 보던 그게 유행하면서 북쪽으로 옮겨가서 네덜란드에서 새로 장사해서 이득을 많이 남긴 거예요. 이제는 온 유럽이 토지, 땅에 묶이지 않는 땅에서 나온 것으로 권위 세우던 시대는 지나고 상업을 통해서 돈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돈을 관념적으로 이야기하면 가치라고 합니다. 돈이 가치라면 어떤 인간이 가치 있는 인간일까요? 돈 많은 사람이 가치 있는 거예요. 그런데 교회에서는 신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가치 있는 인간이거든요. 그런데 분위기가 십자가운동 이후에 돈이 생길 때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고 심지어 돈을 가지니까 신부도 굽실거리고 국왕도 전쟁을 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니까 신의 권위 있다는 국왕마저 돈 빌리러 오고 하니까 기분이 얼마나 좋겠어요.

돈이 가치니까 가치는 노동해서 얻는 게 아니지요. 가치는 가치에서 가치가 나오는 거예요. 흔히 말하는 것처럼 돈 놓고 돈 먹기에요. 그걸 금융자본주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은행이 돈 어떻게 법니까? 은행에서 곡괭이 들고 농사짓습니까? 은행이 자기 돈으로 삽니까? 맡긴 돈을 불려서. 은행이 돈 버는 이유가 다른 게 아니에요. 남이 준 돈으로 늦게 주면 돈 벌어요. 늦게 주되 많이 받은 이자보다 적은 이자를 줘서 나머지로 은행이 유지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봉이 김선달이지요. 자기는 없는 거예요. 그 시대가 열린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 이야기를 듣겠어요, 안 듣겠어요? 물론 신을 믿는 분위기기 때문에 성당에 나가기는 하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옛날에는 성당에서 기도하게 되면 복 받습니다. 가치 있다고 했는데 이제는 실질적으로 손에 쥐는 가치를 원하지 정신적인 가치는 너무 지루하고 탈색했어. 구닥다리. 재미 하나도 없어. 교회 다니는 재미보다 돈 버는 재미가 더 좋아요. 다들 경험하고 계시지만. 교회 목사를 하고 있다는 말은 돈을 못 벌었다는 말이에요. 기회만 되면 목사 버리고 돈 벌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요. 사모님이 만약에 큰 사업을 하는데 도와달라고 하면 교회는 아르바이트로 하고 도와줄 수도 있고.

옛날에 믿던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이 이런 점에서 좋은 겁니다. 성경에 보면 다 나와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안 나와 있는 그 대목, 우리를 두 겹, 세 겹 가리고 있는 그것이 교회사를 통해서 이미 다 드러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성경 해석의 특징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안 믿으면서 믿는 척하는 자의 역사가 이스라엘 역사에요. 자기들은 분명히 믿는다고 생각하고 실제 써먹었는데 이게 자기 원대로 안 먹히는 거예요. 언약궤 있으면 승리한다고 했는데 언약궤를 실제 전쟁에 써먹었는데 빼앗겼다니까요. 많이 당황했지요. 교회에서 은혜 받고 실전에 써먹으려고 하니까 전혀 먹히지 않는 거예요. 물건 팔 때마다 기도하고 해도 안 되는 겁니다.

어제 공부 마치고 식당에서 식사하는데 분명히 세 사람인데 오십 중반 된 남자는 목사고, 그 옆에 오십 초반 된 여자는 사모고, 그 앞에 나이 칠십 대 사람은 장로에요. 어떻게 아느냐? 불고기 시켜놓고 기도를 3분 동안 하는데 기도 내용을 다 들었어요. 3분이 의외로 길어요. 주제는 이거였습니다. 불고기 사주는 장로님께 힘주시옵소서. 그래서 돈 잘 벌어서 더 사달라는 그거에요. 장로님 강건하게 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잘 되게 해주시고. 그걸 3분 동안 하는 거예요.

돈이 돈 먹고 가치가 가치를 낳는 이 시대에 이들은 교회 다니면 짜증나고, 그러니까 그들이 돈을 가졌잖아요. 그러니까 보세요. 교회에서는 뭘 앞장세웁니까? 신의 활동성, 세상은 신이 움직인다. 신이 주체로 돼있는데 이미 16세기에는 돈을 버니까 누가 주인공 돼요? 교회에서는 신이 주인공인데 여기선 인간이 주인공이지요. 마음 같으면 성당 안 나가고 싶어. 그 시간도 아까우니까. 아까 돈이 돈을 벌려면 시간을 자꾸 지연시켜야 되니까. 시간이 곧 돈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이 돈 벌었다는 거잖아요. 그 당시에 벌써 유대인들은 돈 벌기 시작한 거예요. 유대인들은 교회 안 다니까. 자기들 회당에 나가니까.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자 받는 자는 지옥 간다고 이야기한 거예요. 이런 세상 사정 알기 때문에.

그들이 왜 안 갈 수밖에 없느냐 하면 이미 우리 몸이 교회에서 하는 유일하신 신의 권위를 배역하고 있는 거기에 대한 신의 모든 절차를 독점하고 있는 사람들이 성찬식 해야 되고 일곱 개 성사 다 치러야 되고 때마다 고해성사 안 하면 지옥 간다고 확정을 했기 때문에. 성만찬에 참석 안 하면 연옥에 떨어진다고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몸 자체가 거기에 익숙해서 가기는 가야 되는데 내가 돈 벌 수 있는 기회를 포기도 못하는 거예요.

교회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도 없고 자기를 포기할 수 없는 중간에서 누가 이것을 잘 정당화시킬 수 있는 어떤 분이 등장한다면 좋겠지요. 그래서 데카르트가 유명한 거예요. 철학이란 게 할 일 없는 사람들의 사변적인 장난이 아니지요. 시대에 부응이고 시대의 요구에 의해서 철학이 되는 겁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해봅시다. 교회는 신의 활동성인데 데카르트는 이성으로 체계화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데카르트는 신을 안 믿네? 데카르트는 그런 공격에 대해서 다 대비했지요. 이 이성은 어디서 나왔는가? 신에서 나왔다고 끝나지요. 교회에서는 액센트가 신에 있지만 데카르트는 이성에 두면서 신과 연결시키면 그만이거든요. 이성으로 체계화시켰다는 말은, 나의 재주로 돈 벌어서 얻은 가치는 정당하다는 말이에요. 이렇게 쉽게 했는데, 이해되시죠.

내가 노동해서 돈 번 것은 이건 누구한테도 빼앗길 수 없는 나만의 정당한 나의 가치다. 이걸 인정해달라는 거지요. 그런데 교회에서는 인정하지 않지요. 신이 주신 은혜로 받은 것을 교회에 돈 내라고 하니까 짜증나는 거예요. 그러면 돈은 내기 싫고 이 가치는 유지하고 싶을 때는 데카르트가 있잖아요. 데카르트는 뭡니까? 이성으로부터 체계화시킨 것은 신으로부터 나온 거예요.

그러면 내가 내 재주, 똑똑한 나의 지혜로 여기서 고등어를 팔면 잘 팔릴까, 안 팔릴까? 고등어를 소금으로 간하면 안동사람도 먹겠지. 하고 나온 게 안동 간 고등어잖아요. 태백산맥 넘어가는 험준한 그 길을 걸어서 춘양 5일장이나 안동 5일장에 팔면 돈 벌었잖아요. 그래서 번 가치를 정당화, 인정해달라는 거지요. 내가 이렇게 하면 돈 벌겠다는 그 지혜가 인간의 이성이란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똑똑함은 나에게 신께서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서 이성적 똑똑함으로 결과적으로 돈 벌었다. 이게 뭐가 나쁘냐 이 말입니다. 게으른 놈은 고등어 두 마리 잡지만 나는 많이 잡아서 소금 쳐도 안동에서 팔아서 부자 되었다. 이게 남보다 더 뛰어난 머리는 신의 은총이고 신의 은총은 나에게 부자 되라는 요구에 부응한 것밖에 없는데 뭐가 잘못된 것이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은 게으른 사람한테나 하는 말이지 나한테는 해당 안 된다.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그러니까 바티칸에 바치라 이 말입니다.

이제는 그럴 필요 없이 돈은 가진다고 돈 되는 게 아니고 돈이 돈 버니까 가진 돈으로 금융사업을 벌이면 애 안 써도 돈이 돈 벌어주니까 세상에 이런 기회를 보고도 놓치면 바보지요. 무궁화호 타고 가는데 잔치에 쓰려고 계란을 백 개를 만들었다. 그런데 하필 그 칸에 수학 여행하는 학생들이 삶은 계란 찾는다면 그 순간 어떻게 합니까? 한 개에 이천 원에 팔면 되잖아요. 그 기회를 왜 놓칩니까? 하나님 주신 기회를.

데카르트는 이성으로 체계화시킨 이것도 정당하다고 본 겁니다. 그러면 이성으로 체계화시키려면 이성과 신을 연결해야 되겠지요. 어떻게 연결하는지 데카르트의 방법을 따라가 봅시다. 신이 있고 여기에 이성이 있는데 어떻게 연결되는가? 신은 참 선이고 참 진리죠. 이건 교회에서 데카르트를 공격해도 공격할 게 없지요. 하나님은 참 선이고 진리기 때문에. 진리는 확실하지요. 신은 모든 게 확실합니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지요. 인간을 만들 때 인간 속에 신이 주신 확실한 것을 찾아내면 되지요. 그 확실한 게 뭘까요? 인간이 현재 갖고 있는 것 중에 진짜 확실한 게 뭐냐?

데카르트는 자기 철학을 이렇게 펼쳐갑니다. 2+3=5. 사람들은 이걸 확실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렇게 되면 데카르트는 남보다 뛰어난 점이 없어요. 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왜? 악령이 나를 속여서 2+3=6인데 자꾸 5라고 속였기 때문에 5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삼각형은 변이 세 대다. 이것도 악령이 와서 이야기해버리면 네 개인데 셋이라고 속일 경우가 있어요. 이럴 경우는 확실하지 않아요.

그 다음에 철은 딱딱하다. 이것도 악령이 와서 속이면 물렁물렁한데 딱딱한 경우가 있어요. 실제로 그런 경우가 있거든요. 팔이 잘려서 없는데 아프다고 느끼는 거예요. 이것은 정신적 장애로 생긴 경우에요. 그리고 꿈속에서 분명히 무서웠는데 깨보니까 꿈이잖아요. 그런데 꿈속에 있을 때 이것은 꿈일까요, 아닐까요? 꿈은 아니지요. 그처럼 우리 인생 자체가 꿈일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것도 확실치 않아요.

그래서 데카르트는, 옛날 어거스틴이 이야기하고 그전에 고르기아스가 이야기한 게 있는데 의심함으로서 진리에 접근한다는 대목이 있어요.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거예요. 모든 것을 의심했을 때 진짜 의심할 수 없는 게 나와요. 바로 내가 지금 의심하고 있다는 생각, 그 생각과 당사자는 의심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생각하기에 그게 바로 나다. 그 유명한 문장이 뭐냐?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것, 이건 분명 명료한 것, 그것을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원래 ‘고로/그러므로’란 말이 없는데 뒤 사람들이 붙인 거예요. 생각하는 당사자가 나다.

그러면 모든 걸 의심해도 의심하지 않는 것은 의심하고 있는 나는 나를 부정할 수 없다. “나, 지금 생각하는데 생각 안 하는 중이야.” 이건 말이 안 되지요. 꿈이라도 관계없어요. 악령이 와도 마찬가지에요. “너, 지금 생각하고 있지. 생각 안 하고 있었네.” 이럴 수는 없다. 악령이 온다 할지라도 내가 악령을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은, 자의식은 수정이 안 되지요. 그걸 데카르트가 군에서 졸병 시절에 알았어요. 졸병이라도 무시하지 마세요. 깨달을 수가 있어요.

지금까지는 이해되시겠지요. 확실한 걸 잡는 거예요. 확실한 것을 잡아서 교회에서 공격해도 막을 수 있고 동시에 대중들이 기대한 것도 만족한 거예요. 네가 생각하는 네 자신은 확실하다. 이 말은 하늘에 있는 신이 너에게 어떤 지혜를 줬는데 네가 신을 믿을 게 아니고 네 속에 있는 지혜를 믿는 것이 곧 신을 믿는 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천주교 가서 돈 안 내도되는 거예요. 이제는 지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도 그걸 신의 뜻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도 매우 정당해보이고 옳게 보이게 것을 주지요.

드디어 교회로부터 인간의 주체사상, 인간의 자율적인 사상으로 분위기가 경제적으로 바뀌었지만 아직 교회 사상까지 바뀌지 않은 입장에서 데카르트가 나서서 근대주체사상이 시작되는 겁니다. 제가 이쯤 이야기하면, “그전에는 왜 생각하지 못했지?” 하지만 그전에 그런 생각하면 바로 일반 사람들이 반대해요. 그들은 자신의 가치는 교회가 정해주기 때문에 돈이나 재산이 있어도 교회가 구원받는 유일한 매개체에요. 신의 진리를 독점적으로 아는 그런 시대기 때문에 그들이 나서서 데카르트를 죽이라고 할 거예요.

하지만 이미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구닥다리 교회 권위에 짜증나는데 데카르트가 교회 발을 끊어도 되는 그런 새로운 철학체계를 주니까 데카르트 철학을 품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거예요. 참된 것이 내 안에 있다. 뭐가 참되냐? 내가 참되다. 듣기만 해도 신나지 않습니까. 내가 참되다고 여기는 이것이 신의 뜻이 되는 거예요. 그걸 실체라고 합니다. 철학에서 실체란 말은 독자적으로 독립적으로 존재가 인정받는 걸 말합니다. 데카르트는 실체를 둘로 나눴어요. 무한한 실체는 보나마나 신이고 유한한 실체는 인간이죠. 어쨌든 무한하든 유한하든 실체니까 독자적인 자기의 가치를 지켜낼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본 겁니다.

이 확실한 생각을 사유의 실체. 실체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생각의 실체와 물체. 물체는 연장의 실체, 공간적으로 확장시키는 성질을 말합니다. 연장이란 말을 왜 사용했을까? Extension, 늘어난다. 왜 물체에는 무게, 크기, 형태란 말을 안 하고 연장이란 말을 했을까? 형태, 크기는 변해요. 날씨 따라 온도 따라 변하잖아요. 그리고 아무리 딱딱해도 불에 넣으면 쇠도 녹잖아요. 실체가 변하면 안 되거든요. 실체가 변하는 걸 실체가 갖고 있는 속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본의 아니게 철학적 용어를 듣고 있습니다. 속성, 실체, 속성에 나타난 그 모습을 양상 또는 양태, 그걸 우연적 속성이라고 이야기해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우유성. 우연이니까 붙잡으면 안 돼요. 꿈같은 거니까. 우연을 통해서 우연을 만들어내는 진짜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야 돼요. 그건 어떤 물체가 있다는 것은 공간에서 어떤 자리를 점유하고 있다는 거예요. 점유하고 있다는 것은 공간적으로 연결돼있다는 겁니다. 데카르트가 보기를. 그래서 모든 물체에 변하지 않는 실체는 연장돼있다. 늘어나거나 줄어들거나 하여튼 연결돼있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두 가지의 속성이 있다. 사유와 연장. 이것은 실체에서 나왔지요. 실체는 독자적인 존재. 독자적이니까 자신이 뭘 하든 장사를 하던 농사를 짓든 내가 결정할 수 있어요. 이 실체가 인간인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무한한 실체가 있어야 돼요. 인간은 스스로 만들지 못하지요.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창조합니까? 누가 창조해요? 신이 창조하잖아요. 무한이 유한을 창조하고 인간은 안에 신과 같은 실체, 변하지 않는 독자적인 요소가 있는데 사유와 연장으로 돼있다. 사유는 마음껏 생각하고 연장은 마음껏 변화시킨 자유와 정당성은 인간에게 보장이 된다.

결국 이 말은 뭘 활짝 열어놓은 거예요? 하고 싶은 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19.♡.174.28)

14-09-19 10:26

20140916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6-데카르트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교회로부터 인간이 정신적 자유를 얻었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거든요. 그 신남이 결과적으로 무엇을 야기 시키느냐 하면, 초월적 자아로 나아가게 만들어버렸어요. 초월적 자아라고 해서 우리가 더욱 더 신처럼 되겠네. 용어 자체로는 굉장히 멋있어 보이잖아요. 쉽게 말해서 자아는 없다는 겁니다. 자아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초월적 자아라는 말은 아주 쉽게 이야기해서 내가 누구냐에 대해서 관심 둘 그런 형편이 못 된다는 겁니다. 이 세상사는 게. 내가 누구며, 신이 뭐며. 어디 쓸데없이 그런데 신경 써. 한 푼이라도 버는데 신경 써야지. 이게 초월적 자아에요. 자아를 잃어버린 거예요.

처음에 자아를 잃어버리면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몇 개월 지나면 그게 편해요. 오뉴월에 개 팔자라고 하잖아요. 개가 자아를 잃어도 편하게 보이지만 인간이 자아를 잃으면 기계. 말이 기계지 부속품입니다. 이건 기름 치면 잘 돌아가다 기름 떨어지면 또 기름 쳐야 되고. 이게 내가 기계인지 생물인지 분간도 안 되는 시대에 돌입되는 겁니다.

이 원인을 설명하고 그 다음에 데카르트 철학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원전 오백 몇 년 경에 밀레토스란 지역에서 철학이 처음 등장합니다. 그전에는 신학도 아니고 신화에요. 신화라는 말을 설명해야 해요. 신화란 인간을 만드신 분들의 세계, 신들의 세계에요. 옛날 초창기, 어떤 연도에 의하면 기원전 이만 년인데 알타미라 동굴에서부터 흔적들은 도대체 나를 누가 만들었으며, 중요하기 때문에 적어볼게요. 해와 달 이것들을 누가 만들었으면 형제들은 누가 만들었으면 죽고 난 뒤에 어디에 합류하느냐? 이게 옛날부터 인간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니까 앞에 뭐가 붙어요? 누가.

이게 밀레토스 철학을 시작하면서 무엇으로 만들었지? ‘누가’가 떠나버렸지요. 누가 자리에 내가 들어가지요. 내가 세상을 분석하면 그게 진리가 되니까. 이게 철학의 시대에요. 신나지요. 왜? 이제는 신에게 양이나 염소나 제물을 드릴 필요 없기 때문에. 신화시대 때는 여신들이 와서 양이나 소를 잡았어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1호, 파르테논 신전, 그리스 아테네에서 계속 올라가고 있는 거예요.

원래 철학이 터키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탈레스란 사람이 누가 만들었지? 물이 만들었어. 아니야. 불로 만들었어(헤라클레이토스). 공기가 만들었어(아낙시메네스). 네 가지 요소, 물, 불, 공기, 흙으로 돼있어(엠페도클레스). 네 가지가 서로 사랑하면 들러붙고 미워하면 떨어지고 분리되게 돼있어. 엠페도클레스가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엠페도클레스 이 사람 주장이 부부 사이에 사랑하면 붙어 자고 미워하면 각 방 쓰잖아요. 보통 결혼하고 3년 내에 각 방 쓰고. 자의에 타의에 의해서. 왜 각 방 쓰게 되느냐 하면 얘가 울게 되면 남편이 직장 가야 되는데 잠을 못 자잖아요. 그게 버릇이 되어서 이젠 얘 그만 낳아도 계속 각방 쓰고.

세상의 모든 것이 사랑한다는 것은 융합이고 미워한다는 이별이죠. 그 당시에는 인간도 자연물 중에 하나기 때문에 인간을 통해서 다른 자연물을 유추해서 연결시킬 수 있다고 본 겁니다. 자연이란 너무 위대하기 때문에 그 위대한 원리를 인간에게만 줄 리가 없다. 인간에게 준 원리를 동물, 식물에게도 준다면 전부 다 대자연 세계가 동일한 원리에 의해서 붙었다, 떨어졌다 하니까 그게 사랑과 미움으로 표현하자. 이 사랑과 미움이 현대물리학에서는 힘, 뉴턴은 작용과 반작용의 힘으로 물리화시킨 거예요.

어쨌든 간에 세상은 그렇게 된다는 말은, 누가가 사라지고 무엇으로 만들었지? 이렇게 되므로 사람들은 자기가 분석하게 되고 분석은 반드시 최종적인 판단에 이르게 됩니다. 결론을 내리게 돼있어요. 그러면 이제부터 인간의 생각은 신이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관심 없고 네 생각이 옳은가, 내 생각 판단이 옳은가? 어느 판단이 넓은 변화를 누가 많이 수용해서 설득력 있게 설명하느냐는 그 판단은 우위에 서고 뭔가 제한적으로 판단되는데 다른 것은 그 법칙에서 위배될 때 탈락이 되는 겁니다. 굉장히 과학적이죠.

한 번 이렇게 해보니까 되더라. 그럼 다른 사람이, 또 해보라고 하거든요. 또 해보니까 또 되고, 다른 곳에서도 되면 그건 진리가 되는 겁니다. 어떤 권사가 안수 하니까 병 낫더라. 그럼 직접 가서 해보라고 이야기해야죠. 시연하게 되면 효과 있고 그렇지 않으면 무당 되고. 그렇게 되니까 권사 쪽에서 그걸 반박하기 위해서 될 때 카메라로 찍는 거예요. 카메라 들고 간증집회 다니면 카메라가 나오니까 눈으로 보니까 “저 권사는 손 얹으면 병이 낫는구나.” 그렇게 되면 진리를 품고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 사람이 만약에 한 달에 병든 사람을 다섯 사람을 건졌다면 그 사람은 그 간증바닥에서 기적으로 영웅이 되느냐 하면, 여섯 번째 사람이 나올 때까지 자기가 승리자가 돼요. 그런데 그 뒤에 사람이, “다섯 명? 난 한 달에 열 명 고쳐.” 하면 또 그 사람 쫓아가는 거예요. 그 시대가 철학의 시대였어요.

철학의 시대는 어떤 주장을 하게 되면 당신 주장이 옳은 것 같지만 이런 경우에는 안 맞습니다. 하고 반박해서 내놓게 되면 탈락이 되고 반박한 사람이 우위에 속하는 겁니다. 그게 박사학위 논문이에요. 계속해서 옛 것으로 새로운 요소를 집어넣으면 새롭게 진리가 증거가 되면서 이 시대에 인간의 역사란 진리와 문명이 점점 진보 쪽으로 나아가는 그런 시대가 되지요. 그게 처음에 서양에서 철학이 발생된 원리입니다.

그럼 터키 쪽에서 철학이 발달된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지금 이라크에 수메르란 나라가 있었어요. 기원전 삼천 년경입니다. 수메르에 아카이드 민족이 있었고 아카이드 민족을 쳐부순 나라가 구 바벨론 나라. 그 바벨론이 이 시대를 점령했을 때 수메르나 바벨론에서 어떤 식으로 거대한 국가를 운영했는지 19세기까지는 몰랐는데 발굴하면서 드러난 사실이 뭐냐 하면, 메소포타미아(두 강 사이란 뜻)란 지역에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두 강이 만납니다. 만나다보니까 여기 아라랏 산에서 비가 많이 오면 범람이 되지요. 범람이 되면 형제, 일가친척 간에 필지(자기 소유의 정해진 땅)가 있는데 이게 홍수로 둑이 무너지면 니 땅인지 내 땅인지 알 수가 없게 됐지요.

그래서 국가에서는 측량술을 발달시킵니다. 측량술은 기하학이 발달해야 되잖아요. 기하학적으로 공간분석에 들어가는 겁니다. 공간분석을 하면서 농사를 지으면서 고기를 잡으면서 느끼는 것은 현재 자기 딛고 있는 공간 말고 다른 공간이 머리 위에 있어요. 머리 위에 있는 공간은 농사짓는 게 아니니까 내버려두자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가 언제 올지, 태양이 어떤 뜰지, 달이 언제 지고 뜰지, 이건 조수간만의 차를 계산해야 되니까.

공간이란 개념이 땅의 개념에서 벗어나서 하늘의 공간까지 확장되거든요. 그래서 바벨론의 측량에 보면 일 년을 365일로 봤어요. 얼마나 정확합니다. 그리고 60분, 일년을 12계절, 이 계절을 농사짓기 위해서 하늘의 천체, 별자리, 달자리, 전체와 연관을 시키다보니까 시간이 그냥 시간이 아니고 공간에 도움 되는 시간으로 도입되는 겁니다.

여러분, 고양이가 시계 찹니까? 내 사료 줄 때는 언제지? 그래서 데카르트가 있는 거예요. 인간의 영혼이란 무한한 실체로부터 유한에게 주신 것이다. 인간이 자꾸 교회에 가서 성경만 붙들게 아니고 네 속에 있는 신이 주신 것을 활용하라. 데카르트가 철학자로서 인기 얻을 만 하지요. 뭔가 뻥 뚫린 것 같지 않습니까.

성경 몰라도 가치가 있는 존재로 살 수 있고 그 가치는 교회 와서 신부한테 잘 보여서 가치 있는 게 아니고 신으로부터 온 가치가 아니고 신이 다른 통로로 가치를 주는데 그 가치가 재물과 돈이었다는 겁니다. 부자 되는 것이 신이 나를 많이 사랑한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자는 부자 되고 미워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신으로부터 사랑받은 티를 내기 위해서 돈 많이 벌었다는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아주 신이 났어.

그렇게 데카르트가 인기 있으니까 데카르트가 밉상 받는 거예요. 교회에서 교인들이 안 오니까 왜 그런지 보니까 데카르트라. 누가 좋아했는지 알아요? 왕들이 좋아했어요. 그 당시 교회 교황 권위와 국왕 권위가 누가 세냐고 싸우고 있었는데 이제는 국왕이 교회 권위를 무시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왔으니까 얼마나 좋아했겠어요. 신부를 반기던 공주들이 철학자를 반기는 거예요. 그 뒤에 스피노자, 라이프니치, 홉스, 루소. 루소 같은 경우에 인기 있었습니다. 나중에 칸트 이런 사람들 대중들에게 큰 인기 있었어요. 이미 시대가 자본주의 시대로 번지면서 그렇습니다.

시간이란 것이 인간의 편리를 위해서 측정이 되게 되면 시간과 공간을 합쳐서 대자연이지요. 대자연의 모든 것은 인간이 분석한 셈이 되지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바벨론 나라가 굉장히 오래 지속됐거든요. 오래 지속됐다는 말은 진리에 이야기에요. 뭔가 해보니까 금방 안 되더라. 이건 원리가 아니에요. 그런데 해보니까 오래 가더라. 그럼 원리가 되는 겁니다. 나라가 이런 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측량하니까 그 당시 신을 믿었으니까 신이 우리나라를 신의 뜻에 부합되도록 복 받으라고 간주했기에 우리나라를 부강케 하고 오랫동안 평화를 유지하게 했다고 이런 식으로 신에 대해서 소급해서 반추, 거울에 비추해서 신의 뜻으로 생각하고 다시 수용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제가 옛날 바벨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뭔가 가정에 화평하고 잘 될 때는 복 받고 있는 중이고 가정에 우환이 있으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 가만있어 봐. 지난번에 헌금 얼마 냈더라? 예배시간에 장난 쳤나? 신에 대해서 특별히 소홀한 게 있는지 살피게 돼있어요. 따라서 교인들의 문제는 뭐냐 하면, 신의 일과 자기 일을 구분하니까 이런 스트레스를 받는 겁니다. 그저 성경말씀처럼 먹고 마시는 것도 신의 일이라고 여기면 구분할 필요 없는데 자꾸 교회 가서 하는 일은 신의 일이고 나머지는 무조건 내 일이라고 하다보니까 뭔가 일이 꼬일 때는 신을 노하게 한 일이 없는지 생각하게 마련이지요.

시간과 공간을 이미 점유하는 이 사상이 터키까지 와서 드디어 철학이 시작이 됩니다. 누가 만들었느냐가 아니고 무엇으로 만들었느냐가 되죠. 그리스에 아테네가 있어요. 보통 철학의 중심을 아테네로 보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철학의 시작은 터키 밀레토스부터 시작됐고 언제 아테네로 중심 이동하느냐 하면, 소크라테스가 나타날 때부터 드디어 소크라테스가 철학의 중심이 되는 겁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이 세상은 무엇으로 분석되느냐 하면 이게 무신론이 돼버려요. 물론 소크라테스는 신을 인정합니다만 강조점이 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에요.

무엇으로 만들었느냐는 것은 일종에 신에 대한 독립 같지 않은 독립 쪽으로 자기가 독립하니까 그 다음 문제가 뭐냐 하면, 그 당시에 모든 인간들을 묶는 결속력은 신에 대한 예배였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에서 여신 같은 사람들이 벌벌 떨면서 신탁을 받아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 근처에 마약 종류의 식물들과 광물이 있다는. 그걸 먹고 뿅 가거든요. 그걸 신의 계시를 접했다고 본인이 주장하는 게 아니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오니까 그게 장사가 되거든요. 그러니까 그 다음부터는 수시로 그걸 먹고 벌벌 떨고 있으면 신과 접선을 한 순간으로 보고 마약을 먹었으니까 기분 좋고 웃으니까 지껄이는 대로 막 나와요.

그건 국가가 유지되는 힘이에요. 종교가 하나라는 건. 그래서 만약에 그 공동체에서, 인구가 몇 명 되지도 않거든요. 왜 그리스가 몇 명 되지 않느냐 하면 그 지역이 산악지역이라서 제각기 도시국가를 만든 거예요. 도시국가들끼리 처음으로 민주주의가 발달할 수밖에 없어요. 자기들끼리. 노예를 안 끼어주고 소위 자유시민들만 투표해서 민주주의를 만들었습니다. 그런 신탁을 받는 입장에서 인간들이 만약에 신을 부정하면 결국 여기서 결속력이 자기 권리주장하면서 다 깨지겠지요.

옛날 국가에서는 하도 먹고사는 것이 다들 아슬아슬해요. 얼마 전에 중국 갔는데 중국의 등소평의 공로가 뭐냐 하면, 그 많은 사람을 먹여 살렸다는 게 공로랍니다. 어떻게 먹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안 굶고 살린 것만 해도 최고라는 거예요. 옛날 고대국가는 몇 명 굶어죽어야 나머지가 사는 생산력밖에 안 돼요. 비료도 없지요. 모든 게 척박해요. 따라서 도시국가가 붕괴한다는 것은 호시탐탐 이웃나라의 정보를 살펴서(단결됐는지) 무조건 전쟁해서 노예로 삼아야 돼요.

여러분, 구약을 읽으면서 낯설다고 느낀 점이 뭡니까? 이건 뭐 시도 때도 없이 전쟁하지요. 전쟁 없이는 자기 국민을 살릴 수 없어요. 왕이 해야 될 책무가 그냥 밥이나 먹고 살려주는 거예요. 그게 안 되면 침략을 해야 돼요. 침략해서 노예 만들고. 노예 팔아서 유지한 나라가 에돔 나라였습니다. 에돔 나라에 팔린 노예의 태반이 바로 이스라엘 유다나라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화내서 에돔을 영원히 저주하지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에 다 나와요.

결속력이 떨어져서 침략을 당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이러한 분위기가 도시국가의 위기를 가져온 겁니다. 그때 어떻게 우리는 하나가 될 것이냐? 이것은 국가윤리. 윤리를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한 겁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에는 세상은 무엇으로 만들어졌지? 이 이야기하다가 소크라테스에 와서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는 겁니다.

여러분, 방금 제 이야기 들으면 좀 이상하지요.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는 이야기가 무슨 경과가 있고 난 뒤의 이야기지요? 인간이 신에게 무관심한 경험을 하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나오지요. 참 희한하지 않습니까? 신 앞에 설 때 뭐가 없어진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가 안 생긴다는 말이지요. 그걸 아셔야 돼요. 왜 철학이 요즘 신학을 배척하는지 아셔야 돼요. 왜 데카르트가 철학의 아버지라 했는지 아셔야 돼요. 인간이 신을 버리지 않으면 신을 안 찾게 돼있어요. 굉장히 아이러니해요.

어릴 때부터 제사 드린 집안에서 교회 간다는 이유로 제사 안 드려보세요. 집안 식구들의 반발은 물론이고 본인도 굉장히 괴로워요. 꼭 제사 안 드려야 잘 믿는 것이냐? 그럴 때 목사한테 묻지요. 제사 대신 뭔가 없습니까? 추도예배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그게 지금 데카르트가 이야기해서 환영을 받았던 이야기에요. 신을 떠난 인간은 바로 주체자가 된다는 거예요. 주체란 말은 칸트가 썼고, 그전에 나온 말이 아까 이야기했지요. 실체. 실체의 특징은 독자적인 것에 의미를 뒀다. 교회는 신이 주신 의미를 받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독자적인 것, 독자적이란 말은, 예수고, 성령이고 모두 다 나의 타자, 나의 타인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철학이야기만 하면 딱딱하니까 성경이야기 잠깐 해볼게요.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했지요. 거기서 참 이상한 게 있어요.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책망 받는 사람이 누굽니까? 제사장과 레위인이지요. 원래 제일 책망 받아야 들을 자가 누구이어야 돼요? 강도이어야 해요. 그런데 그 이야기에서 강도 이야기 안 나오지요. 제사장이나 레위인 입장에서는 그냥 지나가도 책임 없지요. 본인이 강도 아니잖아요. 강도 만난 사람 옆을 지나간 사람이지 강도는 아니거든요. 내가 그 사람을 때리거나 돈 빼앗지는 않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책임을 묻는 거예요. 율법에 의하면 남을 해코지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율법의 본정신은, 남이 당했던 것을 네가 책임지란 겁니다. 그러니까 네 속에 너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들어있다는 거예요. 이게 율법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 되는 겁니다. 내 속에 누가 있다? 우리가 들어있는 겁니다. 그런데 신을 떠나 내가 돼버리면 내 안에 그냥 나만 달랑 남아있어요. 그래서 명절에 동서지간에 모여도 우리가 아니고 내가 속한 우리가 되지요.

명절에 시가집에 갔는데 시어머니가 하는 말이, 큰 동서 자랑하고 해서 삐져 가버리면 이 시가집에서 내가 빠지면 우리가 아닌 거예요. 처음부터 우리 안에 우리가 없어요. 신을 떠난 이상은 우리가 없고 나만 달랑 있다니까요. 백날 동창회 모여 봐야 우리가 성립이 안 돼요. 중국 문둥에서 이야기했잖아요. 우리라는 것은 나로부터 시작한 우리는 연결될 사다리가 없어요.

우리 속의 우리는 예수님에서 출발할 때 나밖에 모르는 인간을 주님이 속하는 우리에 넣어줄 때 이게 구원이고 천국이고 영생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내가 만든 우리를 포기해야 되는 겁니다. 누구든지 천하 아비나 자식이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 아비나 자식이나 남편이나 나와 상관있기 때문에 그 자체를 우리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우리는 진짜 주께서 준비한 우리와 충돌을 일으키게 돼있습니다. 서로 화합이 안 되고 자존심 주장하면서 튕기게 돼있어요.

만약에 여러분 엄마가 교회 권사투표에서 떨어졌어요. 그럼 그 교회에 다니겠어요? 잘 먹고 잘 살라고 하면서 안 다니잖아요. 그러니까 개척교회 목사들 고민이 그거에요. 한쪽 집안에서 왔기 때문에 뭔가 조금만 삐지면 한쪽 자리가 다 나간다니까. 권사투표에서 떨어진 그 사람 패들 다 나가버렸다고. 시골 같으면 권씨와 최씨가 있다면 최씨가 나가면 권씨만 남아요. 우리는 그걸 몰랐지요. 데카르트를 알 때까지.

데카르트가 교회의 잔소리에 시달린 대중들을 설득하게 위해 만든 철학이 결국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로마서 1장 28절 그 말씀을 그대로 인류역사 속에 노출시킨 계기가 데카르트가 되는 겁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는 싫어하고 하나님 믿기는 싫은데 권력 자체가 하나님 믿는 분위기기 때문에 믿기는 믿어야 되는데 하나님을 믿는 척하면서도 두 가지를 다 옹호해줄 수 있는 대안이 데카르트 철학이 돼버린 겁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게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유일한 진리다. 그럼 나는 진리를 품고 사는 사람이죠.

우리는 꿈을 품는 게 아니고 사랑을 품는 게 아니고 이미 존재 자체가 진리에요. 내가 여기 있음이 진리에요. 완전히 불교에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불교신자에요. 천상천하유아독존입니다. 이미 동양사상에서는 그걸 밝혔지만 서양은 기독교중심이기 때문에 중세기 때문에 그걸 못 밝혔지요.

그래서 데카르트 이후에 르네상스 시대, 르네상스는 이미 14세기부터 시작됐지만 르네상스는 중세의 신 중심의 세계에서 다시 고전으로, 기독교 오기 전에 로마 그리스 신화 시대의 장점을 채택하는 그 분위기가 르네상스 또는 신고전주의라고 합니다. 르네상스에서 나오는 게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그 다음에 나온 게 사실주의, 표현주의, 낭만주의가 나옵니다.

바로크라 하는 것이 원근법에 따른 문양, 빛을 이용한 기법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상적인 정신은 자유성입니다. 이 자유성은 신으로부터의 자유에요. 신으로부터의 자유가 현실화되는 것은 교회로부터의 자유지요.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전체적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신으로부터의 의미를 제거해버리고 의미는 내가 만든다. 요즘 20대의 사상이지요. 내가 하는 게 나한테 의미가 되는 거예요. 신? 그 소리 치워라. 신이 따로 나한테 의미를 주는 게 아니고 내 의미는 내가 만들고 신이라는 것은 이 의미가 맞는지 죽고 나면 만나야 되니까 그게 걸리니까 정당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신을 걸쳐놓는 것이지 사실 모든 의미는 내가 만들어요. 내가 만드니까 항상 나의 의미로 갇혀지고 말아요. 우리로 안 나와요. 친구들 만나봐야 결국은 나밖에 모릅니다. 얼마나 의리가 없었으면 의리를 찾겠어요.

데카르트 철학은 신으로부터 이성과의 연결고리였습니다. 교재에 나온 대로 하게 되면, 내가 나를 기만함으로써 존재한다. 같은 취지에요. 고르기아스의 회의주의.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하고 의심하면서도 의심한 걸 다 삭제하고 결국 마지막 남아있는 앙금, 그게 뭐냐? 의심하는 나는 의심할 수 없다. 이걸 실체라고 했어요. 실체란 만져지는 거예요. 두 번째는 만져진다는 것을 내가 생각한다는 것.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인간은 생각과 만져지는 것, 연장이죠.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 이 두 가지를 이야기해놓고 내기하는 거예요. 내 말 틀렸으면 틀렸다고 이야기해봐. 틀리지도 않았는데 반박하지 마. 틀렸거든 반박해. 나한테 시비 걸 시간 있거든 이 이야기에 대해서 잘못 된 것은 반박하라고 자신만만하게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런 주장을 펼침으로서 그 뒤에 확실한 것을 근거로 해서 그 다음부터 뽑아내는 모든 것은 이걸 근거로 했기 때문에 그것도 동시에 진리가 되는 거죠. 먼저 기초부터 완벽하게 갖춰놓으면 완벽함에서 뽑아내는 것도 완벽에서 나온 속성들이기 때문에 완벽한 거예요. 그만큼 자신만만하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데카르트가 만져진다, 생각한다고 했는데 반박해보세요. 그 뒤 철학자들이 반박 다했습니다. 그중에서 현대철학자들이 어떻게 반박했는지 보세요. 훗설이란 현상학자는 반박을 이렇게 합니다. 만져진다, 생각한다고 할 때 누구를 위함이냐? 나는 이걸 만졌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게 반박이에요. 누구 좋으라고 생각하느냐 말입니다. 나 좋으라고 생각하지요. 그 다음에 나는 만졌다. 그걸 왜 나한테 이야기하는데. 이 옷 예쁘지? 그걸 왜 나한테 이야기하는데. 그건 나 좋으라고 하는 거죠.

그럼 데카르트 주장에 의하면 이 세상에 나만 존재해야 되는데 나 말고 다른 사람도 존재하고 해도 달도 존재하지요. 데카르트 철학은 전체를 아우르는 철학이 되지 못하고 자기 잘난 척하는 자기만을 위한 철학이 돼버렸단 말이죠. 이렇게 돼버렸단 말이죠. 현대철학에서. 그러면 현대철학이 그렇게 반박했으면 대안이 있을 게 아닙니까. 이렇게 나밖에 모르는 삭막한 사회가 됐으니까 나와 네가 소통할 수 있는 소통의 윤리와 도덕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의 윤리와 도덕은 어떤 경우에 생긴다 했습니까? 인간이 신으로부터 떠나는 상태에서 외로우니까 도대체 내가 누군지 모르고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까 신에게 돌아가기는 싫고 현재 사는 것이 그런 존재가 남들도 지 잘났다고 지 주먹 흔드니까 힘 약한 인간은 얻어맞기 쉽거든요.

홉스란 사람은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라 했습니다. 긴장을 늦추면 패배하고 정신 차리면 산다는 거예요. 정신 차려! 고3 되어 정신 차리면 대학 가고 못 차리면 대학 못 들어가는 거예요. 만약에 동창회에 열 명 나왔으면 적이 몇 명입니까?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니까 그 순간 아홉 명이 적이 생긴 겁니다. 반갑다 친구야. 해놓고 돌아서서는 잘난 척하기는. 밉살스럽다. 동창회 가기도 겁나. 어떤 새로운 적을 발견할지.

홉스란 철학자가 참 중요한 이야기를 했는데 세상이 있고 그 안에서 투쟁하는 게 아니고 투쟁하는 그 자체가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도 그런 세상에 기여한 바가 되지요. 무슨 뜻이냐 하면 세상이 있는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이건 착각이고 환상이라는 겁니다. 세상은 없어요. 길에서 누굴 만나잖아요. 두 사람 만난 현재 존재하는 세상이에요. 시장 가면 물건 사라는 것과 만나잖아요. 그게 내 세상이에요. 그런데 그 세상을 있다고 보지 마시고 투쟁 자체가 세상으로 보시면 세상 자체가 더 분명히 보인다는 겁니다.

만약에 남편이 왔는데 들어왔다는 이야기도 없고 나갔다는 소리도 없고 그냥 그림자처럼 유령처럼 지내게 되면, 남편 있습니까? 없지요. 없는 것 같아. 아무 대화가 없으니까. 그런데 들어오자마자 “배고프다. 밥 내놔라.” 하면 그게 세상이에요. 그게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아이가 방문 닫고 방에서 게임만 하게 되면 아이는 없는 거예요. 부모는 아이를 잃어버린 겁니다. 그런데 아이가 문 열고 엄마 어떻고 어깨 주무르고 하면 살맛이 나는 겁니다. 세상은 내가 나에게 의미를 주기 때문에 그 의미에 세상이 딸려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란 나밖에 모르는 세상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힘 약한 사람, 없는 사람, 돈 없는 사람은 맨날 무시당하고 천대받거든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런 것은 중세 때 있었습니다. 그게 오늘 강의하는 이유에요. 중세 때 가난한 사람이 있었지요. 가난한 사람이 행복했을까요, 불행했을까요? 어려운 문제입니다. 행복했었어요. 왜 행복했을까요? 교회에 가게 되면 네가 가난한 것도 신에 합당한 자리라고 여기는 순간 그게 실체가 되고 주체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을 떠난 이후에 주체가 생겼잖아요. 그럼 그 전에 인간은 없었는가? 있었지요. 그 사람의 행복은 신이 부여한 은혜의 자리에서 마음껏 행복했어요.

사극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양반 저것들 패버리지. 상놈들은 안 패고 뭐하나.” 그러면 안 돼요. 왜냐하면 상놈은 상놈일 때 가장 행복해요. 그렇게 길들여졌으니까. 남편이 바람피우고 패악질하고 폭력에 도박하면 자식들이 이혼하라고 하잖아요. 이혼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니에요. 그 남자의 아내로 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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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727건 중 2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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