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행 10"34-43 (구원론의 변화)
Re..행 10:34-43 (구원론의 변화)
이름 : 이근호(IP:)
구원론의 변화
2004년 7월 21일
본문 말씀: 사도행전 10:34-43
10: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10:35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줄 깨달았도다
10: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10:37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10: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10:40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10: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10:42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10:43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획득하고자 하는 의도로 덤벼들 수가 있습니다. 평소에 자신이 궁금했던 점을 성경을 통해서 얻고자 합니다. 그럴 때 사도를 마치 자신의 스승으로 간주해 봅니다.
그런 와중에서 사도라는 그 영적인 스승의 입장을 고려해 보기도 합니다. 즉 우리들은 그냥 성경에서 성경 지식만 취득하려고 하는 반면에 사도는 참으로 그 복음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친다는 겁니다. 목사의 교만은 공부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이 정도라면 독자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충분하게 수행할 수 있다고 여기면 이런 독립선언은 사도들의 인생과 전혀 다른 겁니다. 그들은 복음을 그냥 기능적으로 적용시킨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복음이 뭐기에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 말입니까?
이런 생각까지 들면 때로는 우리 자신도 사도들처럼 복음을 위하여 생의 전부를 걸어보기로 다짐을 해봅니다. 하지만 이것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사도처럼 그렇게 복음을 위하여 전폭적으로 헌신하려고 해보다가 세월이 지나고 상황이 바뀌면 적당한 핑계를 찾고서는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는 것이 흔히 있는 일입니다.
"열심히 해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구나. 하지만 그동안 순수하게 복음을 위해서 살겠다고 다짐하고 헌신한 업적은 하나님도 인정해 주시겠지"라는 위안으로 스스로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사도의 헌신이나 사도의 용기를 본받아 흉내낼 생각에 멈춰서면 아니 됩니다. 여기서 보다 더 안 쪽까지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누가 베드로로 하여금 그 길을 가게 했느냐?"하는 점입니다.
사도행전의 전체 주제는 '예수님의 주되심'입니다. 그냥 이름만 하늘에 매달려 있는 주님이 아니라 실제로 부지런히 이 땅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베드로와 고넬료를 한 자리에 모으시는 그런 활동을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만약에 이 점을 놓친다면 주님의 일을 마치 사도들이 독점 하청 받아 일하는 식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즉 예수님의 공적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공적을 탐구하려고 하고 그 공적을 그대로 흉내내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님은 사도나 고넬료나 모두 한 주제로 쏠리게 하십니다. 그 주제는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의 공적입니다. 예수님은 이러 이러한 일을 하셨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공적이 너무나 중요해서 주님은 사도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 오직 이것만을 전 세계를 향해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소용돌이란 모든 것이 한복판으로 끌어당기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나 고넬료가 자의에 의해서 예수님 공적을 열심히 탐구하자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신 주님께서 그들은 이렇게 예수님 공적 중심으로 모이도록 조치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작정 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의 뜻은 깊이는 무한정이지만 결코 혼란스러운 분은 아니십니다. 고넬료를 사도 베드로에게 맡긴 것도 아니요 사도 베드로를 고넬료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를 예수님의 공적 앞으로 모이도록 일하십니다.
물론 사도는 누구를 가르칠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28:19-20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남들을 가르치는 가운데서 도리어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몰랐던 예수님의 뜻을 보다 더 깊고 완벽하게 이해케 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와 만나고 난 뒤 변화된 것이 있습니다. 고넬료와 만나기 전과 고넬료와 만나고 난 후의 구원론에 있어 다른 견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고넬료와 만나기 전에 어떤 구원관을 갖고 있었습니까?
유대인들은 나름대로의 심판 기준이 서 있고, 설사 이방인이 구원받는 한이 있더라도 어디까지나 유일무이한 거룩한 제사장 나라라고 자처하는 자신들을 거쳐야 가능하다고 여겼던 바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도 그대로 적용시켰습니다.
즉 "예수님에게 고침 받은 자는 모두 마귀에게 눌린 자들이다. 따라서 아직 예수님으부터 고침을 받지 못한 자는 누구든지 마귀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소식은 우리 사도들을 통해서 유대 나라 밖으로 나간 적이 없기에 바로 이방민족은 모두 마귀 들린 자이며 구원될 자라고 볼 수 없고 오직 우리 사도들이 나서야 비로소 그들은 마귀에게 풀려 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고넬료로 말미암아 그 규칙과 원칙이 다 깨어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즉 비록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이방민족 속에 하나님의 백성이 있다는 것은 그동안 유대인 중심의 구원론이 결코 하나님에게는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고 있음을 증명하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유대인들이 인수 인계 받아 자신들의 중간 대리점 역할을 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겁니다. 구원이 유대인으로부터 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원자가 유대인으로부터 왔다고 해서 그 유대인들이 자동적으로 구원이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구원을 독점할 권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위하여 메시야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메시야에 의해서 선택받은 백성이 있음을 알려주려 오신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그 택한 백성들마저 자기를 위한 메시야가 아니라 도리어 메시야의 공적을 위한 택함을 받은 백성이라는 위상을 갖게 되는 겁니다.
쉬운 예를 들면, 예정론에 대해서 장시간 강의를 다 듣고 난 뒤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목사님이 나열하는 구원받은 사람의 규정에 꼭 들어맞는 사람이니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이 맞지요?라고 말입니다.
이 분은 아직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곡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마치 고넬료를 만나기 전의 베드로의 견해와 같습니다. 이 사람이나 베드로는 구원론을 지상의 증거를 규합해서 그것으로 하늘까지 이어지는 구원론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져 있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구원하는 것이 메시야께서 벌리시는 구원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 구원의 조건을 일단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다고 여기는 유대인들이 타인의 구원까지 결정지을 바탕이 되는 셈입니다.
즉 "나처럼 구원받았으니 당신도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사람이 맞군요"라는 식으로 결론 맺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고넬료는 사도 베드로의 구원을 일방적으로 전수받는 식으로 구원되어야 하는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고 난 뒤부터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자인했습니다. 그 고백이 34-35절에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줄 깨달았도다" 결코 유대인들이 구원받는데 이방인들이 곁가지 들어가서 구원받는 식으로 구원론을 정리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로 여전히 구원의 기준은 소위 구원받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공통점에서 도출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분명히 우리 교회에서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이 세 사람이다 자신만만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중의 한 사람이 주님을 노골적으로 배반하고 세상으로 떠나버렸다"라는 경우가 발생됩니다. 이렇게 되면 처음 그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당해 구원된 자'라 장담하던 그 기준은 있으나마나 하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기준일 뿐입니다.
따라서 고넬료를 만다고 난 뒤에 베드로의 구원관은 다음과 같이 바뀌고 맙니다. 즉 구원은 사도나 먼저 믿었다는 자들이 판단하고 가르치고 전수해서 확정짓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단지 주님께서 구원해놓은 자들이 있음을 차후에 확인할 뿐이라는 겁니다.
즉 기준에 있어 특정인을 표준삼아 나와서는 아니 된다는 겁니다. 심지어 베드로 자신에게도 나와서는 아니 되는 이유는, 베드로 자신이 고넬료와 만남으로 인해 그동안 가지고 있던 구원관이 주님으로부터 수정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고넬료의 입장에서 마찬가지이고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서로 서로에게 마찬가지 상황 안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여기서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이라고 하면서 자기네들 사도들을 지칭하게 됩니다. 따라서 진짜 택한 자는, 타인을 향해 구원을 구걸하는 자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신 예수님으로 인해 선택되었기에 예수님의 공적으로 구원받았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럴 때 오직 주님의 공적으로 믿는 자들끼리 서로 주님 안에서 교통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을 위해서 예수님은 예수님의 공적 속으로 자기 형제를 쓸어 담고 계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의 일을 대행하는 자가 아니라 단지 지금도 택한 백성을 주님 쪽으로 열심히 모으시는 그 활동의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