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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사도행전64강(사도의 변론), 마태복음 55강(맏이) 140821강의사도행전

사도행전64강(사도의 변론), 마태복음 55강(맏이) 140821

이름 : 이근호(IP:119.18.89.5)

공은주(IP:175.♡.147.179)

14-09-17 17:25

대전140821-행24장1절(사도의 변론)64강 - 이 근호 목사

사도행전24장은 읽어본 사람 같으면 별로 재미없다 느껴질 거예요. 어떤 점에서 그런가 하면, 사도바울이 1차, 2차, 3차 그리스하고 터키 갔다 왔잖아요. 갔다 와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예루살렘으로 가요. 그림으로 그리면, 지금 여기 터키고 현재 가자지역 전쟁 벌어지는 곳이고 이스라엘, 요르단, 시리아가 있는데 예루살렘은 여기 있고 가이사는 이 동네에 있는데 1차, 2차, 3차하고 이렇게 안디옥 갔다가 밑으로 내려와요. 예루살렘에 간다 말이죠. 헌금을 전달하고 그런 일이 있어서 갔는데 사도바울이 등장했다는 그 소문을 듣고 이 동네에 유대인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리스 이 동네에 유대인들이 많았어요. 왜 많았느냐 하면, 전에 이스라엘이 바벨론이 멸망할 때, 다 흩어졌어요. 도망치고 잡혀오고 다 흩어져버렸습니다.

지금 이라크 전쟁 있는 바벨론인데 수사라는 곳에 바벨론이 있는데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갔다가 나중에 70년 만에 그 후손들이 돌아오는 사람도 있었고 돌아오지 않고 “이왕 사는 거 단골도 많은데 뭘 가, 그냥 살지.”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어요. 돌아온 사람은 몇 명 되지 않고. 이만 몇 명이 돌아온 거예요. 나머지는 많았고 어차피 돌아오나 안 돌아오나 상관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이 전체가 전부 다 헬라 식 의식이 사고방식이 생활방식이 변화하고 말았어요.

왜냐 하면, 헬라라 하는 게 뭐냐 하면, 알렉산드리아 하는 북쪽에 알렉산드리아대왕이 있었거든요. 그 사람이 이 전체를 점령을 해놓고 이 그리스식 또는 헬라식 이 사람들의 풍토가 이 동네를 전부 다 점령을 해버렸습니다. 사실은 나라가 분산된 것 같지만, 사실은 나라가 문화가 하나가 돼서 여기 사나 저기 사나 상관없이 전부 다 이 예루살렘도 전부 다 헬라 식으로 생활 풍토가 바뀌었어요.

요새 말로 하면 K-팝으로 유행으로 바뀌었다. 클래식은 날아가 버리고 K-팝으로 아이들이 전부 다 바뀌었다 보시면 돼요. 아가씨들은 전부 다 반바지 입고 다니고 지금도 한복입고 없잖아요. 요새 여 전도사들 위에는 하얀 거, 밑에는 까만 주름치마 입은 여 전도사들 없지요. 전부 다 세련됐잖아요. 그 세련됐다는 말이 신문화를 받아 들였다. 신식이다 말이죠. 상투 묶지 않고 전부 다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여가지고 문화만 그런 게 아니고 사고방식 전체가 그렇게 변했습니다.

그런데 그 헬라가 누구한테 망했느냐 하면, 162년경인가 로마한테 다 망했어요. 로마한테 점령당한다고요. 그럼 헬라식이 아니고 로마식이네? 그런데 헬라식, 로마식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로마가 땅은 점령하되 문화는 오히려 헬라를 더욱 더 장려해 버려요. 헬라식을 장려한다는 게 이게 무슨 의미인가 하면, 유일한 신을 인정하지 않는 사고방식입니다.

인간은 각자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신을 믿든 안 믿든 지 맘 대로라. 이게 헬라철학의 기본이 뭐냐 하면, 세상을 누가 만들었는지 그것은 인간은 모르기 때문에 신이 만들었다 치고, 그 다음에 신은 신이고 인간의 사는 목적은 신을 믿는 게 목적이 아니고 행복입니다. 자기 행복이에요. 행복하십니까? 행복이 코앞에 닥쳐온 나의 삶의 이유요, 목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신을 믿어서 행복 한다면 신을 믿을 용의가 돼 있지만, 신을 믿는 것이 행복하지 않다면 그 신 말고 다른 신으로 교체될 가능성이 많던지 아니면 아예 신을 안 믿던지 그렇게 하는 거죠.

그 당시에는 신을 안 믿을 수는 없는데 믿는 척은 해요. 왜냐하면 신을 안 믿으면 세상의 모든 것이 가는데 마다 신에게 제사 드려서 행운을 따내는 그런 풍토에서는 신을 안 믿어버리면 사람들에게 어떤 밉상을 받는가 하면 나는 어떤 규례와 법률도 지키지 않습니다. 나는 내 하고 싶은 대로 깡패같이 다 하는 인간입니다. 이렇게 낙인찍힐 수가 있어요.

신을 믿는다는 것은 그래도 나는 양심은 챙깁니다. 그런 뜻이고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는 말은 나 건드리지 마! 나는 내 맘대로 산다. 그렇게 위선되기 때문에 평판이 안 좋아요. 아무리 강도 같은 인간도 신은 다 믿어요. 신을 믿는 게 뭐냐 하면, 자기 양심만큼은 아직까지 고귀하니까 날 무시하지 마라 하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요새 의리! 의리! 하는 거 있잖아요. 그러니까 의리가 대신 신을 믿는 것으로 대충 때우면 됩니다.

나는 개망나니 아니라는 뜻에서 오, 신이시여! 그래서 월드컵 축구하게 되면 한 골 넣고 난리나지요. 그렇게 내가 막되어먹은 인간은 아니라는 뜻이에요. 분위기가 그런 거예요. 하지만 뭐는 인정 못한다? 유일신. 유일신은 인정 못해요. 왜냐 하면, 유일신을 인정해버리면 나머지 신은 신이 아니고 귀신 나부랭이밖에 안되니까. 어떤 특정 신을 믿게 되면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 상대방에 대한 다른 신에 대한 인격모독으로 간주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의 정책은 뭐냐 하면, “니가 원하는 종족이 믿는 신은 니 맘대로 믿어라. 믿되 세금은 바쳐라.” 이런 겁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지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 그 당시의 분위기가 그래요. 그런 입장에서 이 헬라의 철학 또는 로마 철학의 모토는 뭐냐 하면, 나는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느냐, 인간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그 행복의 방법에 대해서 그 당시에 유행했던 것이 두 가지 있었지요.

하나는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성경에 나오지요. 이 두 가지가 있는데, 스토아학파는 뭐냐 하면 평정심을 유지하면 행복해진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정신적인 쾌락을 추구하면 그것이 행복이다. 이런 논리에요. 둘 다 신을 인정합니다. 에피쿠로스는 신을 인정 안하는 것 같지만 신을 인정해요. 이런 것이 온 천지에 유행을 했어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굉장히 호응도가 좋았지요. 왜냐 하면, 국가도 아닌 나의 행복은 누가 알아서 챙기면 됩니까? 본인이 알아서 챙기면 되는 거예요. 자기의 행복은 자기가 알아서 챙기면 된다 말이죠.

그러니 유대인들은 이런 상황 속에서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들은 이런 사상을 충분히 그들은 받아들였지요. 받아들였는데 이런 사상들이 온 천하에 퍼졌기 때문에 특히 유대인들은 이런 보통 인간, 속물 인간과 다른 뭔가 특출한 정통을 유지함으로서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격이 높은 인간이라고 뽐낼 수 있는 그런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그런 식으로 했거든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의 차이점이 뭐가 하면, 사두개인들은 귀족들입니다. 귀족들이라 하는 것은 돈이 많은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은 정통적으로 사독이니까 다윗 혈통의 제사장이다, 이렇게 유지해서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것을 독점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 드리면서 아까 이야기했지만, 이 속물들, 행복밖에 모르는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유일한 하나님의 전통을 지키니까 얼마나 자부심이 있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헬라 문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생활은 헬라처럼 살아요. 살면서 남들이 안 가진 뭔가 특출한 하나를 가짐으로서 뽐낼 수 있는 그것이 하나의 권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겁니다.

지금도 그런 것이 방송에 보면 그런 사람들이 참 많이 나와요. 어떤가 하면, 카이스트의 화학을 전공한 교수인데 그것도 하지만, 등산하나는 끝내준다. 이런 거 있잖아요. 그리고 어떤 대학교수인데 특별히 해독주스 연구하는 사람 그리고 우리 고등학교 친구인데 영남대학교 전자학 교수인데 자기 전공 하고 따로 뭘 하느냐 하면 수맥 찾는 거 해요. 남들이 하는 거 다하고 남들이 안하는 특수한 것을 가짐으로서 어떤 특권의식을 갖고 있는 자들이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바리새인은 약간 다른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이 세속에 헬라 이것은 안 된다는 거예요. 사두개인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아니야, 우리는 전통을 지켜야 돼! 거룩과 속물을 어떻게 겸해? 겸하면 안 돼! 그러면 하나님이 싫어하는 거야.”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현세적이라서 부활도 없고 천국도 없고 그래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죽어다가 부활하는 것도 믿고 모세오경뿐만이 아니고 다른 것도 다 믿어야 되고 사두개인을 겨냥해서 철두철미하게 신앙적으로 살아보자, 하는 게 바리새인입니다. 이 두 개를 합쳐서 이걸 가지고 산헤드린 공회, 요새말로 하면 국회의원 공회라. 이 산헤드린공회가 이들이 하나의 본산이 돼요. 예루살렘 자체가 전체 흩어진 유대교에 본산이 되는 겁니다.

세계 태권도 본산이 어디입니까? 우리나라잖아요. 세계에 있는 태권도 사범들은 전부 다 옛날에는 태권도 협회에서 파견된 사람들이잖아요. 양궁은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잘하잖아요. 우리나라 출신의 양궁 코치들이 각 나라에 파견돼 있잖아요. 그들이 양궁을 하도 잘하니까 전부 다 한국 코치가 다 가있으니까 그 코치들이 올림픽 되면 다 만나지요. 한국말로 이야기하고. 형님 잘 있었습니까? 하고 만난다고요.

유대교의 본산은 산헤드린이 있지만, 회당이란 게 있어요. 온 천지에 지점처럼 유대인들이 흩어져가지고 돈은 세속적으로 벌고 신앙은 속물에 안 들고 우리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자손이기 때문에 전통을 지키겠다고 항상 총 본산 되는 예루살렘을 언젠가 생각하면서 일 년에 한 번씩 오지요. 유월절 날 절기 때 한 번 방문해가지고 성전에 가서 애들 한 번 데려가서 교육 한 번시키고 다시 일상은 저 쪽 고린도나 또 돈 벌러 가고 그런 형편에 있어요. 그게 로마시대인데 이미 문화는 로마문화가 아니고 헬라문화에요. 헬라문화의 특징이 뭐다? 인간은 어떻게 하면 행복해 질수 있을까? 신은 인정해요. 신은 인정하되 자기 행복을 위해서 있는 신만 인정하는 거예요. 더 쉽게 하기 위해서 행복은 정신적으로 이성적으로 따지고 점치는 것은 대나무 꽂혀있는 점쟁이한테 사주팔자 이런 거 보고 결혼한다고 하면 궁합보고 하는 거예요. 교회는 나오고 궁합보고 하는 거예요. 그런 입장이다 말이죠.

그런데 그런 입장에다가 사도바울이 1차, 2차, 3차에서 전도를 하니까 사도바울이 이 세상의 헬라문화를 공격한 게 아니고 예를 들어서 이 세상은 헬라문화는 더럽다. 인간의 행복이 전부가 아니야. 여호와의 말씀 율법을 지켜야 돼, 이렇게 이야기했다면 사도바울이 욕 얻어먹을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없는데 사도바울이 헬라의 잘못은 아예 말하지도 않고 유대인 자체가 이것이 지옥백성이라고 공격을 해댔다 말이죠. 그것도 가는 곳마다 회당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말이죠.

그러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뭐가 잘못됐는데?” 이리 나오는 거예요. 뭐가 잘못되었느냐, 사도가 하는 말이 “너희들 입장에서는 잘못이 발견되지는 않지만, 이미 약속대로 구약의 말씀대로 오신 메시아가 너희들 율법을 준수하는 너희 유대인으로부터 살해당한 사건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알고 있던 율법에는 전부다 마귀 적이다.” 라고 사도바울이 단정해버렸지요. 가는 곳마다 이야기했더니만, 그게 소문이 났어요. 사도바울 잡아 죽이라는 소문이 났어요. 예수님 왔을 때 따라온 것처럼 사도바울도 따라와서 예루살렘에서 전부 다 사도바울을 체포해버립니다.

사도바울이 거기서 8일정도 있으면서 조용히 있었어요. 별 일없이. 성전에 가가지고 헌금 전달하고 성전에 가서 약속대로 예식을 하고 결례를 하고 이렇게 나왔는데 각 처에서 왔던 그 소문, 풍문으로 들어가지고 사도바울이 보통 인간 아니고 유대인을 완전 말살할 인간이라는 소문을 들으니까 누가 선동하고 누가 분위기를 험악하게 몰아가는가 하면 바로 먼데 있는 헬라지역에 있는 헬라파 유대인이라 해요. 여기에 사는 사람들이 유대인이고. 그래서 헬라파 유대인이 있고 예루살렘 유대인이 있어요. 어쨌든 헬라파 유대인들이 와서 죽이라고 선동을 하니까 이게 아주 치안이 그만 소동이 일어나게 된 거예요.

그럼 소동이 일어났고 분쟁이 일어나면 그 책임은 누구한테 있겠습니까? 괜히 시비건 그들에게 책임이 있지 사도바울은 책임이 없다 말이죠. 그래서 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분개해서 체포해버렸어요. 체포를 하니까 그 때 무슨 일인데 치안이 이렇게 어지러우냐 하고 천부장, 백부장이 와가지고 조사를 해보니까 사도바울은 아무 소리 안하니까 그 쪽에서 “쳐 죽일 놈입니다. 죽여 마땅합니다.” 나오더란 말이죠. 예루살렘에서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로마 입장에서는 종교적인 문제는 문제가 아니고 치안이 불안하게 되면 이것은 로마 중앙 정부로부터 로마 총독이 책임추궁당합니다. 질서 하나 못 잡느냐 말이죠. 질서 안 잡히면 군대를 파견해야 되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들어요. 반란이 일어나게 되면 군대를 파견해야 되잖아요. 그러면 그 비용이 많이 든다 말이죠. 교통사고가 벌금 내는 이유가 뭡니까? 교통사고 일어나게 되면 거기에 대한 치료 비용들이 많이 들어가요. 그래서 벌금을 내게 되어있는데.

그러니까 치안하기 전에 소동일어나기 전에 알아서 평정해줘야 이게 능력 있는 총독이 되는 겁니다. 그럼 나중에 승진할 수 있어요. 이 나라 말고 다른 데서 높여 승진할 수 있고. 그래서 바짝 긴장이 되는 겁니다. 하여튼 소동이 일어났으니까 원인 제공자를 어떻게 해야 돼요? 빨리 체포해가지고 왜 이랬어? 왜 이랬어? 물어야 될 필요가 있지요. 소동이 일어났을 때 보니까 사도바울 때문에 소동이 일어나니까 사도바울이 위험하거든요.

천부장이 ‘아이고, 저 한 사람밖에 없는데 죽여 버려?’ 이렇게 생각했는데,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나는 로마시민권 있다.” 다시 말해서 한국에 있는 미국 대사관 직원이다. 와 똑같은 소리에요. 그러니까 로마시민 같으면 보호를 해줘야 돼요. 로마시민권은 함부로 받는 게 아니에요. 공로를 많이 세웠던지 아니면 출생 자체가 로마에서 출생 했다든지 그럴 경우에만 로마시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함부로 돈 준다고 로마시민이 되는 건 아니에요. 돈 주고도 살 수 있지만.

그래서 이게 총독이 있는 곳에 가이사라는 곳에 총독이 있어요. 예루살렘에서 데려온 겁니다. 데려왔는데 문제가 사실은 문제의 원인제공자가 사도바울이 했지요. 괜히 돌아다녀가지고 유대인 분위기 다 깨났으니까 결국은 뭐냐 하면, “유대교는 악마의 종교다.” 이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유대교를 개선합시다.” 이 정도해도 때려죽일 판인데 유대교는 메시아를 죽인 마귀의 앞잡이다. 이리 나오니까 보통 문제가 아니지요. 나라 전체가 들썩이는 겁니다. 유대교의 정신 지주가 단결되지 않으면 전체 소관이 헌금이라 던지 이런 전체가 문란 되어 버리는 거예요. 전 세계 태권도 협회가 문제가 생기잖아요. 그래서 이것은 사수를 다하고 살아가기 위해서 자기 유대교 조직에 흠집 되는 것은 안 되지요.

그러니 유대나라는 총독이 있고 총독 밑에 자치 민족의 아그립바왕이 있어요. 왕이 있고 아그립바왕이 있고, 아그립바왕은 사두개인 개통에 제사장이 있어요. 이 제사장이 치안을 담당하고 왕이 있고 그 다음에 총독이 지배받고 총독은 치안과 세금문제에 관여하기 때문에 이 민족들의 종교 문제는 왕과 제사장이 알아서 해결했어요.

그런데 여기에 사도바울이 로마시민이기 때문에 총독 관저가 있는 가이사에 와버리니까 누가 찾아오겠어요? 아그립바왕하고 제사장이 와가지고 재판 빨리 해서 죽이라고 하겠지요. 만약에 저 사울이란 사람을 안 죽여 버리면 우리가 계속 소동 일으키면 당신 총독이 무능력자, 치안도 제대로 통제 못하는 무능력자로 혹평 받아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좌천될 수가 있어요. 실제로 좌천됐어요. 사도바울 잡힐 때, 벨릭스가 총독이었는데 약간 무능하거든요. 그 다음의 총독이 25장에 보면 베스도가 다시 도임했지요. 새로 온 사람이 베스도란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 24장, 25장은 이렇게 상당히 사회적 문제이고 정치적 문제 이야기로 계속 죽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계라 해서 십계명 같은 교훈을 얻으려고 보는 사람한테는 상당히 별로 흥미 없는 그런 대목이 될 거예요. 그런데 이 24장, 25장 이 과정 속에서 사도바울한테 저 사람들이 왜 그리 너를 가지고 못 잡아먹어 그렇게 안달이냐 할 때, 사도바울이 변론하면서 내놓은 이야기가 있어요. 그게 복음이에요.

지금 여기 베스도가 왔을 때, 새로운 총독이 새로 왔거든요. 오고 난 뒤에 아그립바왕하고 버니게 이 사람이 찾아오고 그리고 고소했고 그 이야기가 25장 계속 나와요. 24장 1절에 보면 아나니아라는 대제사장이 더둘로라는 변호사, 말 잘하는 사람, 더둘로를 데려와 가지고 고소하는 내용이거든요. 총독이 바뀔 때마다 사도바울은 또 자기 변론을 두 번이나 해야 되는데 자기 변론을 하는 그 와중 속에서 복음이 나오는 거예요. 그 복음이 나오는데 그 복음의 내용이 뭐냐가 중요하다 이 말이죠. 그 복음의 내용이 뭐냐 그거 하고 그 뒤에 사도바울이 말하는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죽 나오는 그 내용하고 그게 연관성이 있어요. 공통 소리가 있다 말이죠. 그게 뭐냐 하는 겁니다. 궁금해요?

그게 뭐냐 하면, 저 쪽에서 고소하기를 “나사렛 괴수라는 이단을 사도바울이 선전하다 보니까 우리 유대인들이 자기 정통적인 종교가 공격받으니까 이렇게 소동이 났습니다. 그러니까 총독이여, 당신이 사도바울이 종교적으로 어떤 교리이냐 들을 필요도 없고 지금 딱 한 가지만 생각하라.” 는 거예요. 어쨌든 저랬던 간에 지금 소동이 일어났잖아요. 그럼 소동이 일어났으면 소동의 원인을 제거하면 당신은 능력 있는 행정관이 되는 거예요. 그들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지요.

지금 종교 문제는 초점이 아니라는 거예요. 어쨌거나 저랬거나 지금 많은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싫어하니까 싫어해서 소동이 나니까 소동의 원인을 제거해 버리면 소동은 잠잠해 지니까 당신은 중앙정부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니까 빨리 조치해달라는 거예요. 그 사람의 변론을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거예요. 들어보면 또 종교얘기 나오는데 뭘. 예수님 이야기 또 나오는데. 그러니까 그 사람한테 발언권 주지 말고 우리말대로 해가지고 이 아그립바왕하고 아나니아라는 제사장 이 사람들은요, 종교문제와 관계없어요. 뭐냐 하면, 어쨌든 간에 백성들의 요구조건을 충족해가지고 평화롭게 질서가 유지되면서 장사해도 장사가 잘되고 세월호가 바다에 빠진 그 문제가 일반사람한테는 장사가 안 된다는 겁니다. 몇 개월 동안. 진도에 있는 사람은 고기도 못 잡고 손해배상하려하면 유 병언이 죽어버리고 그 아들한테 손해배상하면 되는데.

그러니까 지금은 뭐가 문제인가 하면 아까 했지요. 헬라의 철학이 뭐라고요? 인간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질서가 안정되고 내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해서 돈 벌면 이게 행복이잖아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걸 속물이라고 이야기했지요. 속물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막상 뭐는 관심이 없다? 진리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뭡니까? 말로만 속물이 아니고 헬라는 아예 속물이고, 소위 속물 아니라고 여기는 유대인들이 사도바울이 보기에는 마귀 앞잡이다, 이 말입니다. 진리 문제에 대해서는 마귀 앞잡이다 말이죠.

제가 이렇게 정리하니까 정리가 좀 되지요. 뭐냐 하면, 진리문제, 진리, 진리, 하나님, 하나님, 아브라함 백날 이야기해도 사실은 그들은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정작 진리에 대해서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현재 사도바울 한 사람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들은 관심 없어요.

사도행전은 성령이 와서 일을 하지요.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서. 성령께서는 무엇을 반복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왜 죽었느냐 하는 것을 반복합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결국은 무엇의 반복이라 할 수 있습니까? 이 땅에서 성령 받은 사람이 반복해서 받아야 될 사건들을 지금 사도바울이 또 미리 받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성령 받았잖아요. 그래서 이 땅에 와서 수모를 당하지요. 수모를 당할 때, 예수님을 고소했던 사람들이 결국 그 당시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원수였지만, 예수님 재판하는 데서는 완전히 친구가 되었지요. 거기다가 누구까지 들먹입니까? 본디오 빌라도까지 개입시키지요. 본디오 빌라도는 세숫대야에 손 씻어가면서까지 “나는 죄 없데이. 나는 분명히 뺀다.” 하고 발 빼고, 자기 아내는 “여보, 꿈자리가 사납더라.” 해가지고 발 빼려고 했건만, 발 빼집니까? 안 빼지지요.

전부 다 진리 문제라고 하지만, 사실 진리 문제가 아니고 갈라 먹기! 세상 권력과 돈에 갈라먹기 문제로 마지막 귀찰 돼요. 완전히 도달되는 거예요. 그래서 설교시간에 했잖아요. 뭐라 해도 결국 마지막 문제는 돈 문제에요. 목사가 교회 나가면서 “나는 복음을 전했다.” 이렇게 하면 장로가 조용히 불러가지고 “얼마면 돼?” “큰 거 한 장이면 돼!” 그러면 아무소리 없는 거예요.

어느 인간이 돈에서 벗어납니까? 어느 인간이 애굽에서 벗어납니까? 애굽이 좋은데. 애굽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도 없어요. 왜? 좋아도 너무 좋아 이 세상이. 세상이 싫어지는 경우는 딱 한 가지밖에 없어요. 자살 직전 세상이 싫지. 아직까지 살고 싶다는 말은 세상이 좋다는 말이에요. 정말 세상이 나를 가만두지 않고 몰아넣을 때는 마지막 결정은 뭐냐, 자살하는 거예요. 고 때만 출애굽하는 거예요. 그러면 자살하는 사람은 출애굽되는 겁니까? 자살해도 출애굽 안돼요. 세상이라 하는 것이 사도행전 24장, 25장 이 이야기가 세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실제적인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 믿고 하나님 잘 섬겼다고 해서 세상을 환상처럼 날아가는 게 아니에요. 신명기1장에 보게 되면 정탐꾼이 미리 정탐하잖아요. 미리 정탐하는데 가보니까 텅텅 비어있는 줄 알았더니만 세상에, 그 나라가 건장한 군대로 꽉 차있고 건장한 장대 같은 큰 인물들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을 때, 완전히 이스라엘은 모세를 원망할 수밖에 없어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너무 과대한 욕심을 부렸다는 겁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저도 하고 싶어요. 천국 간다고요? 너무 과도한 욕심 아닌가. 어제 수요 설교 때 했지요. 반석 밑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반석 밑에 물이 없어요. 터져야 되지요. 반석이 터진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반석이고 그리스도께서 깨질 때, 예상 밖의,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 말고 주님이 동일한 현실인데 동일한 실제인데, 주님은 다른 관점으로 봤을 때, 비로소 세상의 전부가 이미 출애굽 된 상태인 것을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받은 상태인 것을 아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함으로서 구원 받은 게 아니고 관점만 바뀌니까 이미 구원 받은 걸, 괜히 졸았잖아요. 내 행동가지고 구원 안 될까봐 졸았고 괜히 겁냈거든요.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사도바울이 총독 앞에서 두 번이나 자기 변론하면서 안에 담겨있는 복음의 내용이 뭐냐 그걸 설명하는 거예요. 그걸 설명하면서 사도바울 정도가 되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 같으면 좀 복음 전하는데 길을 홍해바다처럼 쭉 쭉 갈라져가지고 뭔가 자기 뜻대로 수월하게 복음 전하게 해줘야 되는데 이건 더 반대에요. 갈라졌던 바다도 도리어 자꾸 더욱 더 험한 물결로서 파도로서 세파의 파도로서 더 세차게 강하게 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자포자기하게 만들어요. 꼭 욥 같아. 욥이 믿음이 좋으면 애들도 잘되고 돈도 더 벌고 몸도 건강해야 될 텐데 단지 믿음 좋다는 그 이유 때문에 자식 열 명 다 죽고 자식 열 명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 재산 다 날리고. 자기 몸은 온 천지에 종기나가기고 기와 장으로 벅벅 긁고 있고 그것도 몸이 괴로워하고.

특히 네비나스라는 철학자가 언급한 핵심이 인간의 현실을 분해하는 열쇠 구멍 같은 요것만 틀어버리면 현실이 다 풀리는 고 지점을 네비나스 철학자는 그걸 뭐로 보는가 하면, ‘잠’으로 봤습니다. 욥기에 보면 욥이 잠을 못 자요.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는 잠을 못 자서 그래요. 사람이 잠이 있다는 것은 이미 내 몸은 내 몸이 아닌 거예요. 왜냐 하면 잠 잘 때 보면 잠 오라, 잠 오라, 해서 잠이 오는 게 아니거든요. 강제로 주께서 재워줄 때만 잘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거예요. 이게 아니니까 수면제 먹는 거예요.

내가 내 인생을 관리하니까 내 몸은 내 게 아니라는 순간이 사람이 그런 순간이 있어야 되는데 밤에도 내 몸은 내 거라고 쥐고 있으니까 이게 얼마나 비현실적입니까? 놔야 되는데. 절벽에서 손을 놓듯이 놔야 잠이 오는데 이게 잠 잘 때 잠 잘 자려고 자꾸 애를 쓰다보니까 잠이 안 오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직접 관리 키운다는 증거는 인간이 잠을 잘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잠 자도록 해주시는 거예요. 지가 잠 자려면요, 죽어도 새벽 2시반돼도 잠 못 자요.

잠을 자야 단절이 일어납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와 완전히 다릅니다. 어제는 하나님이 어제로 마감했고 서류 마감했어요. 끝났어요. 오늘은 오늘치의 하루만 있을 뿐이고. 그래서 90년 살아서 연세가 90세입니까? 달랑 남은 인생은 하루만 남아있어요. 14살도 하루였고, 95세 돼도 하루였고, 인간은 그저 하루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성경에 나옵니다. 손 펴면 손바닥이 보이지만, 손을 다시 오므리면 손바닥이 없잖아요. 없는 것같이 우리 인생은 살아도 없는 거예요.

없다는 순간을 우리가 잠 잘 때, 이미 없다는 것을 이미 체험하고 있어요. 우리 몸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잠 잘 때는 우리는 내가 주동적으로 나설 수 없어요. 이걸 가지고 자율신경이라 해요. 자율신경은 두 가지가 있지요.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 잠 잘 때도 인간의 내장은 움직이게 되는데, 움직이는 것은 바로 자율신경에 의해서 움직이지 나의 이성에 의해서 또는 기억이나 지식에 의해서 움직이는 게 아니거든요.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것은 바로 인간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도바울이 두 번이나 이야기한 거예요. 예수님은 부활했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보기에는 나사렛 이단이라 하는데 그 이단이라는 분이 지금 살아 계시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살아 계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뭐냐 하면, 절대로 살아 있는 게 해당이 안 됩니다. 이 예수님은 주무시지 않아요. 우리는 잠을 자는 순간 사실은 우리가 그 우리는 살아있는 게 아니고 잠자는 순간 우리가 숨 쉬는 것은 살아있는 분이 살려주는 조건하에 살아있는 거예요. 밤에.

따라서 이 세상에는 나라고 하는 사람은 절대로 살아있지 않아요. 그냥 하루 살다가 죽어야 돼요. 어두움과 함께. 서서히 잠이 오면서 마취되면서 그냥 죽어버려야 돼요. 내일 아침에 깨어날까, 안 깨어날까 고민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아마 고민할 때는 안 잘 때, ‘내일 면접이 있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서 넥타이는 뭐로 매지?’ 지금 잠을 못 자고 있는 거예요. 지금 오늘의 연장이에요. 계속해서 내일까지. 그러니 긴긴밤을 하얗게 새잖아요. 잠을 안 잤어요. 그러니 몸이 심신이 피곤하지요.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들은 정상적으로 잠을 못 자요. 잠을 못 자니까 처음에는 수면제를 한 두알 먹다가 그것도 안 되니까 많이 먹다가 더 많이 먹어 죽잖아요. 그렇게 되지요.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내가 만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고소하는 것은 그들이 고소할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있는 건 아니다. 왜냐 하면 나는 목격자이기 때문에. 목격자이기 때문에 어떤 법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주님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으로 인하여 모든 세상에 일어나는 그 긴긴 인류의 역사가 예수님 살아계심과 다 엮여져 있다는 사실을 사도바울이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 베스도가 돈을 바라고 자꾸 혹시 또 뇌물 줘서 빼달라고 돈 바라고 초청해가지고 그 부활의 이야기 좀 듣고 싶다고 이렇게 해요. 혹시 뇌물이나 줄까 싶어서 기대해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24장, 25장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26장까지 계속돼요.

26장 8,9절 봅시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그 다음에 14절요.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뒤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사도바울로 하여금 체포케 해가지고 체포해서 변론하라고 길을 주니까 변론에서 나온 이야기가 결국 무슨 이야기입니까? 로마가 어떻게 잘되고 유대교가 어떻게 평화롭고 그런 거 아니지요. 그리고 행정을 잘하고 질서유지하고 그것도 아니다 말이죠.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오직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이죠.

그렇다면 보세요. 오늘날 교회에서 복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누구한테 고소당하고 누구한테 심판받겠어요? 바로 목사 장로들한테 심판받는 거예요. 왜? 그들의 관심사는 무엇에 있습니까? 교회가 조용해야 돈 들어오고 교회의 치안이 유지되어야 돈이 들어오고 교회가 커지고 그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돈 많이 벌어가지고 행복하다. 이리 되지요. 아까 처음에 행복 이야기했지요.

모든 지역이 다 헬라철학에 물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의 본성과 부합되는 거예요. 인간의 본성이 뭡니까? 나는 어떻게 하면 행복하겠느냐,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무슨 이야기합니까? “행복 같은 소리하고 있네.” 니가 행복을 논할 자격이나 권한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부활했다는 말은 우리는 죽었다는 이야기거든요. 부활했다 우리는 죽었다. 살아있는 것은 부활하신 분이 살려주니까 사는 거예요. 살려주는데 두 가지가 있어요. 주님의 희생이 묻혀서 살면 ‘십자가 능력으로 살았구나!’ 하고 예수님을 증거 하는 식으로 살게 되고, 십자가 피가 안 묻은 사람 같으면 ‘아이고 내가 왜 살았지? 아이고 그런 건 문제가 아니고 살아있는 이상 행복해야지.’ 이것만 생각한다고요. ‘내가 왜 살아있지?’ 그런 거와 관계없고 일단 살아있으니까 오늘 하루도 즐겁게 살자 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게 아니고 “주께서 부활하셨기에 부활의 능력으로 오늘도 나를 하루치 일정을 이렇게 부여받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주의 부활의 능력이고 십자가의 죽으신 사랑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소망은 “어서 이 몸이 떠나서 주님과 함께 만나고 싶습니다.” 이런 쪽으로 세상을 살아간 거예요.

이야기 들으면 굉장히 간단하지요. 기초는 뭐냐, 헬라철학이었다. 헬라철학은 모든 인간은 동의한다. 동의의 뜻은 뭐냐, 사람은 어디서 태어나고 그런 건 다 필요 없고 죽어서 그것도 나중 문제고 사두개인처럼 그것도 나중 문제이고 부활도 없고 천국도 없고 살아있을 때 행복하게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이게 에피쿠로스학파 스토아학파 특징이 뭐냐 하면, 사람이 죽으면 다 헤어져버리고 몸이고 뭐고 산산조각 다 나는 거예요. 에피쿠로스학파 같은 경우는 영혼은 몸에 붙어있기 때문에 몸이 죽으면 영혼도 날아가고 없다는 거예요. 완전히 불교지요. 불교.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좋아해요. 왜 좋아하는가 하면, 고귀한 인간이 이성과 머리로서 수천 년 짜낸 마지막 해답이 그거기 때문에, 어디서 왔느냐 가느냐를 묻지 말고 나우(NOW) 지금 뭐를 마시고 뭐를 키우면 행복 하냐 이것만 생각하고 뭐만 들으면 행복 하냐 이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걸 코앞에 있는 것 밖에 모른다 하지요. 젊은이들의 특징이 코앞에 있는 것 밖에 몰라요. 그래서 젊은이들은 고민이 없어요. 코앞의 것 밖에 모르기 때문에 코앞의 저쪽은 신비로 남아요. 저 산 넘어 뭔가 좋은 일이 있을까. 그러니까 희망이 있으니까 인간은 행복해지는 겁니다. 그런데 요양병원에 간 노인네들 행복하십니까? 이미 이 세상을 살아보니까 저 산 넘어 나 같은 노인네 또 있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 저 산 너머 저 골목 뒤에는 미국이란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미국가면 한국이 그립고 한국에 가면 미국이 그립고.

젊은이들은 꿈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 젊은이들 자체가 스스로 꿈을 만들어내요. 그래서 고민도 없고 그저 즐거움, 행복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하루 하루치를 계속해서 철없는 그들을 지금도 살려주고 있지요. 하지만, 그들은 영적 세계까지 관계없고 코앞에 있는 것. 눈앞에 있는 것. 어떻게 행복 하는가, 그 행복은 불교, 스토아학파나 에피쿠로스학파 이론에 의하면 이겁니다. ‘자아실현’ 그걸 천상천하유아독존. 이 세상에 나밖에 없다. 나만 행복하면 모든 게 행복하다는 거예요. 그 철학, 그 사상이 이 세상이 로마식으로 헬라식으로 다 덮여져있어요.

그래서 다니엘에 보면 세상에 바벨론, 메대, 바사, 헬라마케토니아, 그리고 최후의 왕국의 제국이 뭡니까? 로마지요. 로마. 처음에는 바벨론이고 마지막은 로마지요. 그 로마의 사상이 요한계시록에서 마지막 끝 사상이에요. 그 로마사상이 뭡니까? 바로 행복이잖아요. 행복 하는 방법에서 로마인들은 만들어 낸 게 용기와 덕과 지혜와 충성 또는 절제 요 네 가지를 가르치고 자식에게 훈육하고 사회에 젊은이에게 훈육하게 되면 그들은 행복해진다는 겁니다.

그런 것의 대표적인 것이 100℃강연 하는 게 있어요. 내가 이렇게 좌절하고 힘들었지만 용기를 잃지 않고 내 하고 싶은 일에 매진했습니다. 오늘날 이런 성공적인 삶이 되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다 동의하고 끄덕이지요. 그런데 그 안에 사도바울이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게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저주받을 지옥의 사상이라고 이야기하겠지요. 그것 때문에 고소하는 거예요. 아마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했다면 100℃강연 듣는 사람들이 고소해서 법원에 가서 소동이 일어나는 거예요. “죽여라! 묻지도 말고 죽여라!” 판사가 있다가 “저 사람들이 니를 고소하는데 니는 왜 가만히 있느냐?” 사도바울이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십니까” 또 이리 나온다니까요.

그러니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분이 계심으로 말미암아 세상 전체가 그 분 중심으로 다 그물망처럼 짜져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행복하느냐 묻지 말고 행복이고 뭐고 사실은 진작에 죽어야 될 존재가 여기에 있는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진작에 죽어야 될 존재가.

누구 교통사고 죽었다고 좋아하지 마세요. 우리도 진작에 죽어야 되고 어제 밤에 자는 잠에 돌아가셔도 아무 우리로서는 항의할 권한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은혜로 또 살려주시되 하루 하루치를 늘 살려주시는 겁니다. 살려주면서 사도바울을 고소하고 예수님을 고소한 그들의 무리 속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사도바울의 복음입니다.

너희들이 무엇 때문에 고소하느냐, 너희들이 왜 나를 고소하느냐, 그런 게 있지요. 손오공에 나오는 저팔계, 저팔계가 “왜 너희들은 나를 미워하느냐” 하는 거 있지요. 왜 자꾸 나를 싫어하느냐, 미워하느냐 이 말입니다. 사도바울을 왜 미워해요? 너희를 미워하는 게 아니고 세상 자체가 예수를 미워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뭘 받는다? 저주를 받는다. 우리가 얼마나 큰 축복을 받은 겁니까. 큰 부활의 능력을 받은 겁니다. 진짜 로또에 당첨된 겁니다. 주를 사랑하는 이 마음 감사해야 됩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IP:175.♡.147.179)

14-09-24 17:48

대전140821-마16장27절(맏이)55강 - 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16장26절 봅시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요 대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보고 이렇게 이야기할 때, 우리의 뿌리를 보고 이야기하신다, 이리 생각하시면 참 간단해요. 우리의 뿌리. 근본. 인간은 살아온 만큼 자꾸 뭘 놓치느냐 하면 자기의 근본을 잊어버려요. 잊어버리고 그 근원이 어디 있는가도 몰라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어릴 때를 벗어나서 이제는 어른이 됐다고 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보기에는 인간 자체가 오히려 잃어버린 근본을 찾아가는 식의 인생입니다. 살면 살수록 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탈바꿈되기 시작해요. 그게 뭐냐, 흙입니다. 목숨이라 하는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흙이 되기 이전에 갖고 있던 것을 가지고 목숨이라 하지요. 흙이 돼버리면 목숨 자체가 의미 없잖아요. 하나의 물질인데 무슨 목숨이 있어요? 살아있을 때 목숨이잖아요.

예수님께서 이야기할 때 우리의 뿌리보고 이야기하는데 그 뿌리는 사실은 우리의 발바닥에 있는 게 아니고 우리의 머리위에 있다 이리 보면 돼요. 점점 더 자라나니까. 우리가 본의 아니게 우리가 그걸 알던 모르던 간에 점점 더 우리는 우리의 본래의 자리로 찾아가는 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몰아넣어요.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본래의 모습으로 집어넣습니다.

이 사실을 이야기하려면 제가 방금 사람을 그렸잖아요.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입니다.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이건 대구에서 한 건데, 두 사람이 있습니다. 이게 인간입니까? 인간들입니까? ① 인간이다. ② 인간들이다. 몇 번이죠? 인간들이 되죠. 왜냐 하면, 두 사람이니까. 1+1=2, 두 사람 되지요. 그런데 여기 강아지가 있으면 강아지와 비교해서 이들은 뭐예요? 인간들이에요? 인간이에요? 인간이 되지요. 사람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자신이 인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인간으로 보는 거예요. 인간으로.

인간으로 보니까 나는 인간이다. 이렇게 돼버려요. 사실은 이게 잘못된 말이죠. 나는 철수다. 나는 근호다. 이렇게 돼버려요. 인간이라는 게 없습니다. 인간들만 있어요. 인간은 없거든요. 그런데 인간이라는 추상명사를 사용해 버려요. 이 추상명사 때문에 평생토록 허상에 억매여 살아요. 허상에.

그래서 예수님은 뭐냐 하면, 이건 성경에 나오는 원리니까 공식이니까 잘 보세요. 인간이란 어떤 경우에 인간이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있을 때만 인간이에요. 하나님의 형상이 있을 때만. 창세기에. 왜냐 하면 인간을 만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거든요. 형상이 있을 때만 인간인데 하나님의 형상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골로새서 1장에 의하면. 예수님이 형상이거든요. 그럼 누가 인간입니까? 인간은 오직 이 세상에 한 분밖에 없어요. 인간은 예수님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참 인간이라 하는 것은 어떤 조건이 있느냐 하면 자기를 만드신 창조주를 아는 조건하에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빼놓고 창조주 아시는 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는 인간을 유사한 인간, 인간을 모방한 인간, 인간도 아니면서도 인간인 척하는 인간들, 이들은 사실은 흙이지, 아담 자체 이름이 흙이거든요. 흙이지 인간이 아님을 알려주기 위해서 뭐를 수시로 집어넣는가 하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집어넣습니다.

기존 교회에서 언약이야기를 잘 안하는데요. 물론 언약이 뭔지를 몰라서도 안하겠지요. 언약 이야기를 해야 될 이유가 있어요. 언약 앞에서 인간이 될 때, 인간은 두 종류가 돼요. 성경적으로. 하나는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있고 이스라엘외가 돼요. 언약 앞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호칭을 얻게 된 것은 잘나서가 아닙니다. 착해서가 아니고. 언약이 삽입되어서 그래요. 포카하고 화투의 차이점이 뭐지요? 즐긴다는 것은 같은데 그림이 하나는 동양화고 하나는 서양화가 다르지요. 이스라엘이 포카라면 이스라엘외의 모든 나라는 화투가 되는 거예요. 왜 이스라엘은 포카가 되느냐 하면, 거기에 그림자체가 언약적 그림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금 오늘날 교회 예배당에 사람들이 올 때, 나는 평소에도 인간인데 교회 왔으니까 교회 온 인간이다. 이러면 안돼요. 나는 평소에 인간이라고 우겼다는 거예요. 그럼 평소에 교회 오기 전에 인간이라고 우겼던 근거가 뭐냐 하면 바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배운 게 뭡니까?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게 나오거든요. 우리는 대전시민이고 대구시민이고 대한민국 국민이고 저 북쪽에 있는 사람은 북쪽 인민들이고 이쪽은 대한민국 국민들이고 이미 우리는 이것을 철떡 같이 배웠고 우리는 태극기 휘날릴 때 눈물 흘렸고, 우리가 류현진 공 잘 던지고 그리고 박찬호 잘 칠 때, 우리는 다 감격했어요. 왜? 대한민국 사람이니까. 금메달 딸 때, 우리는 박수 쳤고, 감격스러웠고 이 근호 한 골 넣을 때는 좋아들 했잖아요. 월드컵 때. 왜 그랬습니까? 축구선수 이 근호 있어요.

뭐가 빠졌어요? 언약이 빠졌지요. 그게 같은 화투하고 전부 다 화투놀이 한 거예요. 언약 없는 교회가면 교회 자체가 뭐냐 하면, 화투에요. 교회 자체가 화투에요. 인간도 아니면서 인간인 척 했던 거예요. 인간들끼리 만나서 노래방에 가고 술 먹고 야구하고 축구하고 놀았던 거예요. 얼마 전에 연주까지 했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니에요. 아! 이게 중요하네. 아무리 연주하고 피아노치고 해도 이스라엘은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뭐가 있기 때문에? 언약에 의해서 언약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에 이게 딱 나오거든요. 다른 사람이 참 좋겠네, 하는데 좋은 게 아니에요. 냉정하게.

이 언약은 마치 고문할 때, 지지는 화로 불 같아요. 니 죄를 알렸다! 이 인두. 이 인두가 뭐냐 하면, 율법이에요. 인두가 율법입니다. 지난 낮 설교에 민수기 이야기하면서 고라 자손들이 대들었잖아요. 우리 다 같이 평등하게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았는데 니만 자꾸 대장질하느냐, 우리도 같은 레위인인데 우리도 제사장 좀 하자, 너희 아론 모세집안만 하지 말고 우리도 좀 하자. 라고 대들다가 죽었잖아요. 그런데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나와서 하는 말이 레위인이 작은 일이 아니고 큰일이라 했잖아요. 어떤 점이 큰일이냐 하면, 바로 다른 백성과 달리 까불면 이렇게 저주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 일이 얼마나 큰일이냐 말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은 우리가 주의 일을 해가지고 복 받는다 할 때, 내가 잘되는 걸 갔다가 복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고 주님 살아계시기에 까불다가 나는 이렇게 망했다 하는 그걸 증거 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성도되게 하신 겁니다. 이게 보통 작은 일이 아니고 큰일인 겁니다. 다른 화투장 같으면 하나님께서 돌아보지도 않아요. 이게 포카기 때문에 주께서 관심 많이 갖는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12장에 보면 뭐냐 하면, 니가 남의 자식이 아니고 내 자식이기 때문에 내가 너한테 징계한다는 말이 나와요. 징계는 다 받는 게 아니다. 특별한 자가 받는데 그 특별한 사람이 누구냐, 진짜 아들에게만 징계가 오지 나머지는 징계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지옥 불에 가야될 인간인데 지옥가면서 징계할 일이 없지 않습니까? 히브리서12장 8절에.

다시 해 봅시다. 이스라엘이 참 좋겠다. 하지 마세요. 이스라엘은 무서운 율법이 있어요. 율법이 무섭다는 걸 증거 하는 게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특별한 택함 받은 백성에게만 주어지는 겁니다. 이 율법의 기능은 뭐냐, 인두처럼 우리를 찌지는 거예요. 니 죄를 어떻게 찢는다? 니 죄를 알렸다! 그러면 온 천지에 인두한테 베인 고문 받은 자국이 남겠지요. 그 모습가지고 어린양 바쳐라 이 말입니다. 그럼 어린양이 니 모든 흠집을 인두를 지진 흠집이 싹하고 언제 찢어졌었지? 하고 싹 사라지는 거예요. 7월10일 대 속죄일 날. 대제사장이 복장을 특별히 차려입고 일 년에 단한차례 들어갑니다. 들어가서 염소의 피나 소의 피를 그 언약궤에 뿌리게 되면 저 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든 백성들은 전부 다 죄가 일 년치가 한꺼번에 다 날아가 버려요.

그 제사장이 신약에 오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바로 그 일을 한 거예요. 어떤 분이 이런 중요한 질문을 했어요. 법궤를 들고 가는 틀 채가 있어요. 이걸 레위인이 들게 되어있어요. 그럼 법궤만 그렇게 들게 되어있고 나머지 기구들은 뭐냐 하면, 수레로 실어서 이동하게 되어있습니다. 사무엘상6장에 보면 그 대목에서는 법궤가 수레로서 가게 되어있어요. 그 사람 질문이 왜 이렇게 드는 것을 레위인만 드는 겁니까? 이게 질문이에요. 질문이 두 가지인데, 왜 다른 것도 거룩한데 법궤만 달랑 들고서 가게 되어있습니까? 같은 질문이에요. 급한 질문입니다. 해가지고 제가 또 급하게 해줬어요.

이스라엘의 율법책에서 일반 백성이 있고요, 그 다음에 백성은 12지파입니다. 이스라엘이 12지파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한 지파 더 있지요. 13지파지요. 12지파를 대표하는 지파인데, 레위지파에요. 그래서 레위지파의 모든 숫자는 12지파의 숫자를 1:1 대응하게 되어있어요. 신기하게. 한집안 대표자 나오고 레위지파 나오고 맞아 떨어지게 되어있어요. 레위지파가 이 백성을 대표하는 지파다. 레위지파는 둘로 나눕니다. 하나는 레위지파 있고, 하나는 제사장이 있다 말이죠. 그러면 이스라엘은 무슨 나라이냐 하면, 이스라엘은 왕이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민주주의도 아니에요. 우리가 알고 있는 나라는 언약의 나라거든요. 언약의 나라에 구조가 어떻게 되어있는가, 언약의 나라는 제사장 나라로 되어있어요. 제사장중심체제로 되어있어요. 제사장중심체제.

제사장 중심 체제라 하는 것은 일반 백성들이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다? 없다? 만날 수 없다는 겁니다. 뭔가 경유해야 돼요. 전달 전달해야 되는 겁니다. 제사장은 레위지파한테 전달하고 레위지파는 레위지파 제사장에게 전달하고, 이 전달하는 방법을 따라서 뭐가 전달되느냐 하면, 십일조가 전달돼요. 십일조 할 때, 십일조라 하는 것은 소득의 10%낸다고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더 따지고 보면 이게 뭐냐 하면, 뭘 내는가 하면 맏물을 내요. 맏물. 처음 익은 것을 양쪽으로 십분의 일이 되는 거예요. 이 맏물을 내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맏이를 통해서 받겠다는 겁니다. 맏이를 통해서.

이것은 왜 그런가 하면 지난주일 오후에 설교했지만, 에서하고 야곱하고 엄마 뱃속에서부터 싸웠지요. 재미있는 것은 싸움이 무슨 싸움인가 하면 둘이 쌍둥이인데 왜 싸웁니까? 누가 맏이가 되고 누가 나중이 되느냐 그 싸움이에요. 그럼 우리 현재 가정에 입장에서는 아이고 첫째해라, 벌초나 많이 해라. 나는 둘째해가지고 첫째 아들은 아버지 많이 모시고 나는 편히 있을란다. 이리 되겠는데 그 당시의 유대인은 그게 아니에요.

맏이가 되게 되면 둘째 셋째는 그 집안의 종이 되는 거예요. 결혼도 못해요. 결혼도 못하고 맏이 집안의 머슴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맏이가 결혼을 했는데 자식이 없다. 그럴 경우에만 둘째가 형수하고 결혼해가지고 자식을 낳되 그 자식은 자기 자식이 아니고 형 자식으로 들어갑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그리고 형은 아버지의 재산 몽땅 다 가지고 갑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헌법이 얼마나 좋은지. 유언 백날 해봐요. 나의 재산은 몽땅 나를 섬겼던 큰 아들한테 준다고 공증의 공증을 받고 우리나라의 변호사 도장 다 찍어도 죽고 나면 똑같아요. 유언? 소용없어요. 딸이고 아들이고 똑같아요. 대한민국은 그래요. 그러나 그 때는 형이 다 가져갑니다. 왜냐 하면 맏이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전수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땅이 하나님이 주신 땅인데 그들은 임대차 계약 했거든요. 그래서 그 땅은 이스라엘 땅이 아니고 하나님의 땅인데 그걸 분배해가지고 대대로 하나님의 땅을 상속하는 식으로 그냥 임대차 계약하는 식으로 땅만 가꾸고 거기에서 나오는 소산물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은 땅 주인에게 세금조로 드리는 거예요.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 살리기 위해서 누가 대신 나왔습니까? 그 어린양이 누굴 대신해요? 둘째 셋째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고 그 집안의 맏이를 대신하죠. 그 맏이를 대신하여 죽은 대신 그 맏이는 누구 소유가 되는가 하면, 이게 그 집 소유가 아니라 여호와의 소유가 되는 겁니다.

요번 출애굽 할 때 했지요. 십일조라 하는 것은 결국은 맏이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돈으로 표현한 그래서 신약의 십일조는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신약에서는 십일조가 얼마입니까? 몇 퍼센트입니까? 묻는 게 아니에요. 십 프로입니까? 묻는 게 아니고 십 프로 그런 거 없어졌어요. 그건 율법에 속하는 거예요. 신약에서는 그 십 프로가 누구냐 말이죠. 예수님입니다. 로마서8장에 보면 맏아들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게 되거든요.

맏아들은 예수님이지, 예수님께서 맏이가 둘째, 셋째 다 가져간다 했지요. 따라서 맏이가 모든 율법을 언약을 완성하게 되면 그 밑에 둘째, 셋째는 덩달아 천국 갑니다. 요게 바로 공식이에요. 원리에요. 지가 금식했다. 기도했다. 소용없습니다. 지가 기도 금식하게 되면 지가 자기 행동을 계속 믿고 의지하게 돼요. 나는 기도를 몇 일했다. 금식을 몇 일했다. 교회를 얼마나 세웠다. 강의를 얼마나 많이 했다. 그거 믿지 마세요.

우리가 믿을 분은 인간들이 아닙니다. 뭡니까? 인간들이 아니고 인간을 믿어야지. 유일한 인간은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만 인간이에요. 우리는 그냥 양자에요. 인간도 아닌 걸 성령 받아서 아버지라 부르게 된 양자로 들어가는 거예요. 야곱하고 에서하고 싸웠던 게 그 싸움이에요. 누가 몽땅 차지하느냐 에요. 누가? 도 아니면 모에요. 다 먹는 거예요. 올인 이에요. 올인. 한 사람이 다 가져가는 거예요. 2등, 3등 필요 없어요. 다 가져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삭이 야곱 할 때, 우리 같으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픈 손가락 없잖아요. 그러면 일부 중요한 것은 주고 두 번째 왔을 때, “니가 에서가? 아이고, 내가 참 속았구나! 미안하다. 어이, 야곱아 네가 가지고 간 거 반 정도 형 줘라.” 우리 같으면 이래도 되는데 이삭이 뭐라고 합니까? 미안하다. 이삭은 뭘 아는가 하면, 이 축복이 내가 주고 말고가 아니라 배후에 나에게처럼 이삭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이 나를 가지고 움직인다는 사실을 이삭이 본인이 인정해요. 자기는 분명히 큰 아들 에서한테 다 밀어주고 싶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걸 믿어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어서 야곱에게 몽땅 다 가게 만든 겁니다.

그 방법이 거짓말했던 둘이 짜고 했던 그것은 인간의 개입은 의미 없어요. 거짓말 했던 뭐든 그 문제고 어쨌든 결과적으로 야곱이 맏이가 되는 겁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하나님이 만들지요. 야곱의 아들 중에서 유일한 아들은 요셉밖에 없어요. 그런데 요셉이 죽잖아요. 야곱한테는 자식이 없어요. 요셉이 죽었어요. 완전히 막장 드라마라. 죽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막장드라마 돼가지고 살아났어요. 항상 이것처럼 반석 밑에는 물이 없다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항상 은혜이야기 할 때는 반드시 없는데서 있게 하셨어요.

우리가 기대하고 노리는 것은 전부 다 없애버려요. 기대하지 마세요. 한국의 음악계 기대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일시키는 대로 놀지 말고 열심히는 하되 쓸데없는 기대는 아예 안하는 게 좋아요.

이스라엘에게는 언약이 있습니다. 포카에요. 그런데 이방인에게는 언약이 없습니다. 그냥 화투판입니다. 따라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 쪽에만 인간이 나타납니다. 이방인에게는 인간이 없어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 쪽에서 인간이 나온다 했는데 이스라엘이 인간을 배태하고 난 이스라엘이란 자체도 너도 인간 아니야, 하고 차버리지요. 토사구팽 [兎死狗烹] 이지요. 실컷 개 몰고 사냥해 놓고는 나중에 사냥개도 잡아먹어요. 개는 필요 없어요.

자, 그렇게 하고 25, 26절 봅시다. “25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는 말이 이제 이해되시겠습니까? 이 목숨은 니가 알아서 챙기라는 말이 아니고 니 목숨 말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 우리 목숨 말하는 게 아니고 누구의 목숨만 목숨이다? 예수님의 목숨만 목숨이고 그 외에는 목숨도 아니다. 온 천하 백날 줘도 나를 잃어버리면 목숨을 잃어버리면 그 딴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에요. 25절과 언급해서 이야기를 해줘야 돼요.

25절 없이 26절만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만 달랑해버리면 이것은 마치 다른 불교에서 하는 이야기나 똑같아요. “사람이 명예를 얻는다고 얻는 게 아니에요. 사람이 출세한다고 행복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의 진짜 자신을 찾을 때, 진짜 모든 걸 얻는 겁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거와 똑같은 거예요. 명예도 헛되고 권력도 헛되고 돈도 헛되고 진정한 자아를 찾는 이것이 참된 자아를 얻는 겁니다. 이것은 불교 쪽이에요. 불교나 뉴 에이지 쪽 종류의 종교에요. 그런 기독교 목사들 참 많아졌어요. 하도 이거해도 돈이 안 되고 저거해도 돈이 안 되니까 뭐 새로운 거 없나 해가지고 돈 벌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그걸 가지고 “새 생명 운동”이라 하는 거예요. 새 생명, 용어 자체가 얼마나 우리가 찾던 거예요. 비록 돈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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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9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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