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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4 여름 수련회 140803강의[수련회]

2014 여름 수련회 140803

이름 : 이근호(IP:119.18.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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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203.♡.42.222)

14-08-09 09:40

2014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1강

(강의:이근호 목사)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시작하지 않는 일이 되게 해주시고 마무리도 주로 마무리되는 그런 말씀의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애굽기는 글자 그대로 애굽에서 떠나는 기록이거든요. 떠나는데 있어서 반대파가 있었습니다. 적이 있는데 적은 애굽이라고 성경에는 나와 있습니다. 지금은 실제적인 애굽은 없습니다만 옛날에는 있었지요. 애굽이란 나라가 있었던 이유가 이스라엘이 있기 때문에 단짝을 이루려고 애굽이 있습니다. 한쪽이 사라지면 저쪽도 사라지지요. 이스라엘이 사라지면 애굽고 사라지고. 애굽이 있다는 말은 반대쪽에 그림자로 이스라엘이 있다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이번에 수련회에서 옛날 출애굽이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에 출애굽의 정신은 무엇이며 지금은 출애굽의 정신을 어디에 적용할 수 있는가? 대략 그런 쪽으로 정리하시면 되는 겁니다.

애굽이란 나라에서 이스라엘이 나오면서 애굽과 이스라엘로 분리됩니다. 이것이 출애굽 정신, 출애굽 사상, 출애굽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이 옛날이야기잖아요. B.C.1400년경인 옛날이야기를 알아야 되는 이유는, 그 출애굽 정신에서 메시아가 오셨거든요. 메시아는 출애굽 정신으로 실시한다. 또는 적용한다는 등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메시아, 예수님은 출애굽 사상으로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는 말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느냐고 물어야 되지요. 예수님은 출애굽으로 하더라. 예수님이 출애굽한다면, 옛날에는 애굽이 있었고 이스라엘이 있었는데 지금은 예수님이 개입하셔서 애굽과 이스라엘이 구분된다면 지금의 애굽은 누구며, 지금의 이스라엘은 누구인지 그것까지 제시되어야 되죠.

그냥 예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한국말로 ‘예수’고 영어로는 ‘JESUS’라 하고 그러면 어느 쪽을 따라야 합니까? 어떤 문자나 기호를 암기한다고 해서 거기서 구원의 능력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도 그런 설교 했습니다만 암기한다든지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기계가 하는 짓이거든요. 부속품이 있는 기계. 인간은 60조개의 세포가 있고 세포마다 dna가 있고 그 dna를 디옥시리보핵산이라고 보통 학교에서 배우거든요. 그게 기계란 말이에요. 기계를 쪼개보면 역시 그 안에 기계가 있고 더 쪼개면 거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기계가 있는 에너지 장으로 넘어가지요. 양자물리학으로 넘어가면 그렇게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양자물리학이고 화학이고 간에 퉁 쳐서 이야기하게 되면 기계입니다. 기계란 원인과 결과, 외부에서 자극을 주면 반드시 반응을 나타나게 돼있는 자동화과정을 거치게 돼있어요.

그래서 암기한다든지 교육을 한다는 것은 정확한 결론을 유발하기 위해서 사람을 기계처럼 다루는 식으로 세상은 양육되는 겁니다. 그것이 일종에 애굽이라 할 수 있고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도 하나에 일하는 기계였습니다. 멈포드라는 사회학자는 말하기를, 옛날에는 기계가 사람을 대신했을 뿐이다. 지금에 노동자는 고대사회에서처럼 일하는 기계에 불과하다. 그럼 더 나아가서 일을 부리는 자본가는 기계 아닌가? 그것도 마찬가지로 기계다. 결국 남는 것은 매트릭스, 정보와 기계로 구성돼있는 세상, 그 세상의 특징은 탈출할 길이 없다는 것. 탈출할 길이 없다면 탈출 안 하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속 편하게 살다가 지옥 가는 거지요. 안 하면 되니까, 출애굽을 몰라도 되니까.

그래서 출애굽은 굉장히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러운 겁니다. 기계한테는. 기계에 고향이 있습니까? 기계의 고향은 공장이지요. 애굽에서 애굽을 낳았고 아담이 자손을 낳은 거예요. 기계가 기계를 낳은 겁니다. 무슨 고향이 있습니까. 복제만 있을 뿐이지요. 제조만 있을 뿐이지 어떤 고향은 없어요.

여러분, 지금 출애굽 보면서 이상하지 않습니까? 모세가 와서 가자. 히브리인들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어디로?” 몰라? 이게 무슨 말이에요.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은 탈출을 원했던 게 아니고 정권교체를 원했던 겁니다. 너무 압제를 받으니까 같은 백성으로 이주민 취급받지 않고 토박이들과 동등한 대우해달라. 이걸 요구했지 여기서 나가자. 나가긴 어딜 나갑니까? 여기가 전부인데 나갈 필요도 없지요. 나갈 필요 없는 그들에게 나가자고 하니까 모세가 대단히 수상히 보였던 겁니다. “너, 어느 별에서 왔어?” 모세가 도민준입니까?

지금 출애굽 자체가 이건 종교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종교의 목적은 행복에 있지 탈출에 있는 게 아니거든요. 행복하자면 종교생활하면 돼요. 그러나 탈출해야 되겠네. 탈출하겠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탈출은 어떤 경우에 해당되느냐 하면, 어디 다른데 갔었는데 갔다가 와보니까 재미없어서 왔던 대로 가자. 이미 탈출해야 될 지역이 입력돼있다면 그때나 탈출이란 말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가본 곳도 없는데 나가자. 어디로? 몰라. 그럼 그 자리에 있게 되는 거예요.

여기서 정리해봅시다. 출애굽은 없습니다. 출애굽 자체가 인간에겐 없어요. 성경에 있잖아요. 성경에 있어봐야 기계가 성경을 모방할 뿐이에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용어들, 교재에 보면 ‘언어의 병기창’이라고 했는데 병기창에 보면 무기들이 나오잖아요. 막 쏟아진다고. 칼, 총, 활 등이 있잖아요.

사람들은 이 땅에서 행복하기 위해서 인간의 상상력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성경의 용어들을 다 차용합니다. 십자가, 언약, 예수, 메시아, 율법, 로마서, 하나님의 의, 십일조, 안식일, 십계명, 온갖 것 다 끌어 모아서 행복하자. 이렇게 나옵니다. 탈출하자가 아닙니다. 다시 이야기해서 탈출하려면 탈출할 장소를 미리 가본 사람에게나 여기보다 그쪽이 낫다고 할 수 있는데 가본 적도 없는데 무슨 탈출이 됩니까?

죽어서 천국 가자고요? 그런 사람에게 묻고 싶어요. 죽어 봤어요? 어디서 상상의 신화의 세계를 펼칩니까? 죽어봤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 말고 실제로 죽어서 갔던 천국을 봤느냐 말이죠. 19세기에 스웨덴의 스베덴보리라는 이상한 신비주의자가 있어요. 요새 그 사람 책도 나오는데, 펜시콜라나 그런 사람들 같으면 그런 구라도 되는데

어쨌든 출애굽 자체는 우리의 숙제도 아니고 특히 우리의 관심사도 아닙니다. 우리는 출애굽 의사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나의 자유를 훼방하지 않고 마음껏 성깔대로 살게 해주는 보장된 국가체제, 공동체체제. 결국 그것은 우리의 행복을 추구할 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현대철학까지 이구동성의 외치는 것은 뭐냐 하면, 착하게 살아야 된다. 왜? 그래야 행복하니까. 이게 칸트의 이야기에요. 소통해야 된다. 왜? 행복해야 되니까.

행복해야 된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깔아버려요. 이랬든 저랬든 행복하지 않다는 겁니다. 행복하지 않으니까 교회에서 하는 말이, “지금 행복하지 않지요. 조금만 참으세요. 주님 재림하시면 행복해질 겁니다.” 주님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려고 오시는 분입니까?

맨날 골프에서 지는 사람에게 메시아는 어떤 메시아에요? 한번쯤은 큰 내기에서 이길 수 있도록 행복을 보장하는 메시아에요. 쌍꺼풀 없어서 수술했는데 마음에 안 들 때 그때 주님은 어떤 주님입니까? 어느 밤에 쌍꺼풀 천사가 와서 박아주는 그런 예수에요. 그러니까 행복의 조건이 다 다르기 때문에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의 예수가 다 다릅니다. 메시아가 다 달라요. 교회마다 다 달라요. 지금 구원파의 행복은 뭐냐 하면, 재산 손해 입지 않는 거예요. 기계가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 정말 이상스럽습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했듯이 출애굽의 모든 기획안, 그리고 거기에 대한 모든 아이디어는 히브리인들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아이디어는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출애굽 정신으로 왔다면 그 예수님은 와도 사람들이 못 알아보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알아볼 수 없습니다. 알아볼 수 없기 때문에 못 알아먹는 예수 대신에 알아 먹히는 예수를 교회에서 생산하고 상품화해서 사업적으로 판매하면 되는 거예요. 예수는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줄 겁니다. 그 구호만으로 충분하거든요.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에서 하는 말이, “나는 떠나고 싶다.” 이거거든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여기 섰다면 뭐라고 합니까? “여러분, 예수 믿고 떠납시다.” 그러면 여러분은 딸 시집가야 되고, 방금 무사히 제대해서 뒷바라지해야 되는데 떠나긴 뭘 떠나요. 혹시 여기 팔십 이상 되신 분 있습니까? 치매 걸리기 전에 떠나면 괜찮아요. 그러나 아직 치매 안 걸렸잖아요. 왜 떠나요. 할 일이 많은데. 그 이야기는 뭐냐 하면, “예수님 저리 가세요.” 그 말 외에는 다른 말이 아닙니다.

이쯤해서 정리해봅시다. 한 것도 없는데 정리는 해봅시다. 출애굽은 뭐냐? 두 가지에요. 하나님의 개입과 하나님의 개입이 없음. 있음과 없음, 그겁니다. 끝. 이번 수련회 끝났습니다. 출애굽의 아이디어는 절대로 인간들의 생각이 아닙니다. 인간들의 생각은 자기 존재의 행복이에요. 마아슬로우의 욕구설에 의하면, 인간은 나로 인하여 행복하면 최상의 욕구입니다. 불교에서는 해탈이라고 하는데 나, 여기 있음 자체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돈도 필요 없고, 권력도 필요 없고, 출세도 필요 없고 나, 여기 있음 그 자체로 계속해서 우려먹을 정도로 행복하다면 그것이 바로 해탈의 상태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개입의 없을 경우에 그렇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개입이 있다면 그 행복 뚝, 그 행복 쓰레기통에 집어넣어. 왜 집어넣어야 됩니까? 너는 행복할 권리가 애초부터 없다는 것을 치밀하게 보여주면서 주님 있는 곳에 데려가겠다. 그러면 백성들이, “그럼 주님 따라가면 행복합니까?” 방금 내가 조건을 달았잖아. 행복할 권한이 없다고. 그러면 우리가 따라갈 목적과 동기가 없잖아요. 따라갈 만한 의지가 동하도록 뭔가 고생한 보상이 있다는 그런 유인책이 없는 거지요. 그럼 왜 불러냅니까? 하나님이 하는 계획에 대해 무작정 말려드는 그것으로 끝이에요. 주가 주 되심에 의해서 피조물은 군말하지 말고 피조물은 피조물 자체를 위한 피조물일 수 없고 창조하신 분에 의해서 우리는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처음에 히브리인들이 나올 때는 자기는 애굽을 떠났다고 생각한 거예요. 지금은 안 그렇습니다만 옛날 국민학교 입학식 할 때 아동들의 가슴에 수건 하나 늘어져있지요. 그때는 콧물이 왜 그리 많이 나던지 콧물이 나오면 닦으라는 거예요. 콧물이 떨어질 듯 말 듯 하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간장을 타게 만들어요. 지금 히브리인들은 애굽에서 떨어진 게 아니고 애굽의 캡슐 안에서 흘러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애굽은 껍데기도 애굽, 속 내용도 애굽이지만 이스라엘은 껍데기는 벗겨졌는데 알맹이는 오히려 애굽적 요소로 노출된 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광야로 가는 겁니다.

주님이 구원 이야기를 해도 인간은 기계기 때문에 구원을 자기 행복을 위한 조건으로 전부 왜곡해서 차용하기 때문에 그들의 말하는 구원, 여호와, 하나님, 어떤 기적, 그 모든 개념은 쓸데없는 자기 합리화에 불과합니다. 어쨌든 제가 말하는 것은 모른다는 이야기에요. 몰라야 되고 모른다는 겁니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거예요. 납치된 겁니다. 하나님 앞에 무조건 납치된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아무 이유도 모르고.

그래서 그들은 누가 부러웠냐 하면, 차라리 떠나기 전에 살던 옆집에 있던 애굽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워요. 걸핏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 거기는 부추도 있고, 마늘도 있고, 양념이 잘 된 모양이에요. 그리고 정력에 좋다는 것은 다 있고. 거기다 수박 있잖아요. 수박 좋다는 것은 여러분 다 아시죠. 요샌 전 국민이 건강매니저가 되어서 하여튼 해독주스부터 해서 모르는 게 없으니까. 좋은 것은 애굽에 다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 몸은 어디에 맞춰져 있느냐 하면 애굽의 건강식품에 맞춰있는 겁니다. 우리는 애굽에서 뭘 익히느냐 하면, 인간이 살려면 이런저런 조건은 갖추고 살 때 행복하다는 그 구비조건을 이미 온 몸에다 짊어지고 온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그것과 의도적으로 어긋나게 거기에 부합되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우리 괜히 나왔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모세 일파 죽이고 돌아가자. 우리의 행복이 있는 곳은 그곳밖에 없다.” 세상적인 행복이 콧물처럼 늘어져서 그들은 지금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출애굽이란 어색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의 억지가 욕 얻어먹는 기행문이 출애굽기입니다. 그러면 억지스런 일은 안 하겠습니다. 하면 안 되지요. 왜냐하면 오실 메시아, 예수님께서 출애굽 정신을 품고 작용하실 때 그게 참된 진짜 메시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행복에는 관심 없고 그냥 손목 비틀어서 가자고 하면서 그리고 가기는 가되 이런 꼴로는 천국 가면 못 사니까 천국에 맞는 삶으로 바꾸어서 그렇게 하자고 끌고나간 겁니다.

알기 쉬운 예로 아침에 예를 들었는데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0장에서 천국은 이와 같으니, 어떤 사람이 포도농사를 짓는데 일꾼이 모자라서 놀고 있는 사람을 아침 10시, 12시, 오후 3시, 5시에 불렀다. 조건은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 주겠다고 데려왔습니다. 나중에 주인이 품삯 계산하면서 5시에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줬습니다. 그 사람은 한 시간 일했어요. 아침에 온 사람은 여덟 시간 일했어요. 그러니까 제일 늦게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이니까 아침에 온 사람은 여덟 시간 일했으니까 8데나리온 얻겠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처음에 온 사람까지 한 데나리온을 줬습니다.

세상에서는 불합리하다, 말도 안 된다고 하겠지만 주님 생각은, 너희들이 원하는, 너희들의 합리는 뭐냐? 노동시간에 따라서 보수가 비례해야 된다. 두 시간하면 두 시간만큼, 네 시간하면 네 시간만큼. 이미 그것을 주께서 익히 아시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천국은 이와 같으니. 바로 천국과 그리고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어디서 차이 나는지 보라. 내가 노동한 만큼 나한테 보상이 주어진다는 그 생각 자체에서 죽어도 못 벗어난다. 탈출, 어림도 없다는 거예요. 왜? 노동시간과 비례해서 보수 받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 이미 구축되어 있는 진리이기 때문에. 너무나 상식적이기 때문에. 노는 인간이나 일하는 인간이나 똑같이 품삯을 준다는 것은 너무 불합리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걸 아시고 천국의 원리가 얼마나 너희들 생각과 차이 나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차이 나는 정도가 아니라 배척당할 정도로 낯선 원리를 집어넣습니다. 이번 수련회의 제목이 [낯선 경계선]입니다. 낯설다는 말은 천국은 기계 같은 인간이 아무리 상상해도 정말 우리의 생각한 그 외의 요소로서 ‘낯선’이란 표현을 했고, 그 다음에 왜 경계선이라 했느냐 하면, 경계선이란 말은 우리말로 금을 긋는다.

이 교재를 읽어보셨습니까? 처음에 존재의 바다부터 해서 무슨 소린지 지만 알지 알아듣지 못하는 글들을. 그리고 이걸 하나하나 한다는 것은 끔찍스럽지요. 이것 하나도 안 합니다. 존재의 바다에서는 어떤 사건도 하나의 과정으로서 끝나는 거예요. 사건이란 것이 지나가면 없다는 것이 존재의 바다의 특징이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존재의 바다에서는 경계선도 없고 금도 없어요. 금이라 하는 것은 식스팩 거기나 있지 실제로는 나중에 밥 많이 먹으면 그 마저도 다 지워지잖아요.

존재의 바다에서는 존재가 우선이기 때문에 존재와 존재를 그어놓는 그 경계선도 일시적이에요. 사건이라고요? 이순신 장군이 있다는 말은 잘못된 말이에요. 이순신 장군이란 존재는 이 땅에 있었었다. 그 말은 지금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일으킨 해전 사건도 지금은 존재가 되어 없어요. 이순신 장군의 사건은 지금 [명량]이란 영화로 사건화 돼있지 명량 가면 일본군 나옵니까? 그냥 영화지요. 영화 보고 나면 우리는 다시 존재로 가볍게 돌아옵니다. 남자 보기에는 재미있는데 여자가 보기는 재미 하나도 없더라. 이런 소문 막 들리고. 저는 안 봤습니다만.

경계선은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 있더라도 세월이 약이라고 지나가게 되면 다 묻힙니다. 그 배 이름을 얼마나 잘 지었어요. 세월호. 혹시 우리가 컨테이너 많이 실어서 물에 빠지더라도 국민 여러분, 잊어주세요. 세월에 묻히고 팽목항 앞에 묻혀버려요. 남는 것은 사람의 존재의 일부로 남아있는 기억뿐이지 지금은 태풍으로 넘실거리고 이미 사건은 지나가고 사건이 남긴 잔해만 있는데, 무슨 일 있었어요?

만약에 물에 빠진 그 사건 있을 때 강원도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 나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칩시다. 그리고 어제 깨어낫다고 칩시다. 그 사람이 바다에 가면 뭐가 있겠어요? “오, 바다다.” 끝이에요. 기억나지 않으니까. 사람은 기계기 때문에 노쇠합니다. 노쇠하게 되면 충격 준 부속품 하나를 떼어내면 그 충격의 사건은 날아가고 남는 것은 존재밖에 남지 않아요.

그래서 세상의 학문들, 과학, 철학, 의학 등 모든 학문들은 존재의 바다에서 살만큼 살다가, 멋있게 살다가 그냥 사라지면 여러분은 그걸로 족합니다. 행복합니다. 그렇게 가르쳐요. 눈에 보이는 존재가 우선이기 때문에. 살 때는 멋있게 살다가 죽을 때는 그냥 죽어버리면 그것이 세상을 초월한 사나이로서 멋있는 인생입니다. 끝. 그게 전부에요. 프랭크 시내트라가 불렀던 [My Way]에서 마지막 커튼이 쳐지는 날, 나는 살만큼 살고 제대로 살았다고 그 내용이 거기에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존재의 바다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사건, 특히 십자가 이야기할 때 불교 쪽에선 한심스럽기 짝이 없지요. 이순신 장군의 1592년 임진왜란이나 B.C.30년경의 십자가 사건이나 그것도 역사 중에 한 사건으로 흘러가면 다 사라지는데 왜 자꾸 그걸 들먹이느냐? 제가 들먹였습니까? 사도 바울이 들먹였지. 사도 바울이 들먹였습니까? 예수님이 들먹인 거예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기와 같은 존재인 줄 알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란 존재는 죽으면 사라지고 주님도 나와 같은 존재기 때문에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주께서 다시 부활하셨단 말이죠. 그들은 부활 소식을 듣고 뭐라고 생각했느냐 하면, 내 존재가 길게 늘어질 수 있구나, 안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존재에서 사건으로 이동해요. 사건으로 이동할 때는 반드시 치러야 될 절차가 있습니다. 죽음이에요. 그러면 죽으면 천당 갑니까? 우리가 죽는 죽음은 존재의 연장에서 존재가 사라지면서 죽음이기 때문에 그 죽는다는 것도 존재가 없는(무존재), 어쨌든 죽음이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내가 없는 상태를 죽음이라고 표현하거든요.

사람이 괴로울 때 뭐라고 합니까? 이 괴로움을 잊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뼈 보세요. 신경조직도 없지요. 세상에 그렇게 편한 게 어디 있어요. 사람은 기껏 생각하는 게 존재에서 나왔기 때문에 죽음도 존재의 일부로 거둬주는 거예요. 그래서 죽어도 못 가요. 베드로가 주님 가시는 곳에 죽어서 가겠습니다. 너는 죽어도 못 와. 죽어도 안 되는 거예요.

사건이 적용된 그 죽음만이 사건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건과 존재의 차이점은, 사건은 존재에 포착되지 않고 존재의 손아귀에 쥐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불쑥불쑥, 그걸 우연. 우연의 반대말은 필연. 필연이란 말은 존재에서는 이 세상에서는 원인과 결과, 이것밖에 없어요. 그런데 우연은 그야말로 예상치도 못하게 내 존재를 차고 들어와서 개입해서,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출애굽은 개입이라고. 사건으로 개입하면 나는 예상 못했다는 그것이 약점으로 등장해요. 하나에 실패로 등장한다니까. 내가 실패될 수 있다.

이 사건을 예상 못했다는 것은 전부를 알지 못한다는 뜻인데 전부를 알지 못하면서 행복을 논한다는 것은 뭔가 미흡한 것은 남겨놓고 나머지로 행복을 추구했기 때문에 이것은 항상 오류가 될 수 있고 뭔가 모순이 쳐들어오게 되면 순간적으로 완전히 헛 살아온 것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요. 왜? 세상의 전부를 모르기 때문에.

욥이 그런 사람이었잖아요. “하나님이여, 왜 아무 죄도 없는 나한테 고난을 주십니까?” 하나님의 답변은, “나귀 낳을 때 너 있었나?” 갑자기 나귀 임신 문제에 대해서 거론하고 있습니다. 지금 욥은, “왜 제가 아파야 됩니까? 죄도 없는데.” 이러고 있는데, “네가 염소 새끼 낳을 때 있었나?” 산후조리원입니까? 여기서 염소 새끼 이야기를 왜 해요. “별 자리 정할 때 네가 있었나?” 왜 그걸 이야기하십니까? “네가 전부를 알아? 모르면서 그걸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나한테 나대고 있느냐?” 이 말이에요.

전부를 모르면 입 다물고 가만있지 마치 이 부분만은 자기가 전공분야인 것처럼 착각해서 이것만은 정답이라고 우기면서 왜 정답에 부합되지 못하느냐고 요구한다는 것은, 전부를 아는 차원에서 시행되는 것과 일부만 알고 시행되는 차원과 다르다는 거예요. 그 소리 듣고 욥이 마지막에 어떻게 합니까? “주여, 제가 입 다물겠습니다.” 입 다물겠다는 말도 하지 말아야 돼요.

“욥아, 황무지에 비가 오는 이유를 아느냐?” 황무지는 염소를 키웁니까, 채소를 키웁니까? 아무것도 경작하지 않는 땅에 비가 와야 될 이유가 없잖아요. 주님께서 그걸 물으시는 것은, 인간이란 작자들은 모든 것이 자기한테 의미가 되는 것만 질문을 해대서 주님한테 해답을 요구한단 말이죠. 그게 얼마나 억지냐 말이죠. 우리 얘가 의대를 갈까요, 법대를 갈까요? 그건 부채도사한테 물어야 되지요.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권리의 바탕을 우리는 태어나서 아는 것은 존재밖에 몰라요. 주님은 소급해서 원천적으로 우리의 태어남을 존재로 취급하지 않고 사건의 일부로 취급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출애굽 사건에 본의 아니게 이미 말려든 상황인 것을 소급해서 출애굽이란 계시를 통해서 일러줍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 다니는 것은 내가 다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다니게 하시는 거예요. 주체가 바뀌는 겁니다. 기도하는 게 아니고 기도하게 하시고 헌금 하는 게 아니고 헌금 하게 하시는 거예요.

과부의 두 렙돈은 과부가 두 렙돈밖에 없기 때문에 칭찬받을 짓을 한 거예요. 제가 전부를 드렸다는 것에 대한 칭찬이 아니고 이걸 하게 하신 것은 주님이 하게 하셨다는 것을 칭찬하신 거예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하고 난 뒤에 죽은 이유는 헌금의 주체가 본인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우리가 주체가 주님이라고 생각하고 헌금하지요. 여러분, 그럴 능력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다에 배 지나가면 물결이 일어난다고 그 물결이 동결 됩니까? 배 지나가고 30분 지났는데 물결이 얼음 되었나요. 바다에다 액화질소를 부었습니까? 지나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고요해지지요. 주께서 사건으로 사시미 칼로 찔러도 돌아서면 우리는 존재의 바다에 원상회복이 돼요. “주여, 헌금을 성령에 의해서 제가 했습니다.” 이러고 있다고. “성령에 의해서 제가 헌금했으니까 이것만은 영광이 되겠지요.” 그럼 주님이, “그렇게 해서 뭘 원하는데?” 정신분석학에선 그걸 케 보이(Che Voui)라고 해요.

네가 뭘 노리고 그런 행동을 하지? 이걸 묻는 겁니다. 그걸 사람들은 모른다는 거예요. 모르면 가만있으면 되는데 인간의 정신을 그렇지 않아요. 모르면 환상을 동원해서 그 구멍을 메워버려요. 메워놓고 나는 이것 때문에 행복하다고 우기는 꼴이 가관이란 말이죠. “주의 영광을 위해서 교회 다녔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정말 주의 영광을 위해서 교회 다녔다면 메시아 필요 없습니다. 네가 알아서 천당 오너라. 이렇게 될 거예요.

우리는 어떤 한 순간도 어느 한 시점도 주님의 용서 없이 천국 갈 수 있는 그러한 요건은 주님은 우리한테 허락한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건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사건을 사건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존재로부터 시작해서 존재를 부정하는 새로운 날카로운 십자가 사건이 꽂히는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돼있어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라는 고백을 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좀 오래 산 사람의 배 들춰보면 온 천지에 그어있어요. 나이 어린 아이들은 배가 조용한데 그 옆에 아버지는 등어리에 다 그어져있어요. 돈에 고개 숙이다가 주님한테 당해서 칼자국 있고 출세하려고 아부하다 주님한테 멍들고. 모든 게 온통 주님이 그어버린 경계선, 사건의 흔적들이 가득 찰 때 그건 훈장입니다. 그게 많을수록 자기 자랑 안 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을 할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찬송하지요. 성경은 기호와 언어로 돼있단 말이죠. 기호는 기존의 언어 창고에서 가져온 거예요. 기존의 기호와 언어는 인간에 인간을 위한 공동체 사회를 만들면서 서로 의사소통을 위해서 역사, 시간의 흐름 따라서 정립된 거예요. 따라서 그것을 차용한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숙달된 의미를 적절하게 반복하는 것밖에 안 돼요. 다시 말해서 존재를 대변해주는 것이 기호와 언어에요.

성경 원어연구요? 성경은 원어라는 게 없어요. 이제야 말한다. 왜 그러냐 하면 고대 언어의 특징은 경계선이 불분명하거든요. 인간의 언어라는 것은 개념이 있어야 되는데 그 개념이 다양하게 파생되려면 문명이 그만큼 발달해줘야 돼요. 문명이 발달할수록 새로운 신조어를 개발해야 되는 거예요. 그 신조어에 이미 우리는 몸에 젖어있습니다. 신조어가 없는 고대 언어로 된 성경책을 내놓고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면, 물어본 사람이 사기 당하려고 환장을 한 거예요.

언어의 파생어가 계속 번지는데 지금 인간이 멈추고 있습니까? 계속 갈래갈래 개별화가 되는데 그 개별화 푹 젖어있는 우리가 그만큼 개별화 되지 않은 듬성듬성 개념을 잘랐던 그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서 고대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지금의 자기 행동을 정당화해요? 말도 안 되는, 진짜 사기를 쳐도 그런 사기가 어디 있어요. 교수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자기 밥벌이하려고 그런 짓하는 거예요.

성경에서 어떤 구원이라든지 십자가라는 개념을 차용할 때 주님께서는 존재에서 나온 개념이기 때문에 선을 그어버려요. 선을 그으면 두 동강나지요. 예를 들면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리아나 마르다가 예수를 믿는다고 했거든요. 그건 거짓말이거든요. 왜 거짓말이냐 하면, 자기 오빠 죽었다고 주님 멱살 쥐려고 달려드는 그게 믿음입니까? “주님, 내 오빠 왜 죽였습니까?” 존재에서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고 했지요. 죽음이란 뭐가 다가와야 돼요? 모든 개념은 언약이 담겨서 하나님에 의해서 죽음이 왔을 때 그것만이 죽음이지 인간이 아는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아담이 선악과 따먹을 때 갑자기 게거품 물고 죽었습니까? 멀쩡했어요. 이건 뭐예요? 약사가 이것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했는데 안 죽으면 고소할 겁니까?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그 죽음은, 네가 죽는다고 해서 경험될 죽음이 아니고 장차 이 말씀대로 죽어야 될 분이 따로 온다는 뜻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진정한 죽음인 이유가, 그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게 죽음이에요. 모든 성경 언어는 십자가를 경유해요. 십자가가 새 언약의 완성이기 때문에.

인간은 죽을 수가 없습니다. 죽는 날에 다 호출해요. 남자들은 알아요. 꿈꿨는데 제대 분명히 했는데 다시 입영영장 나오면 끔찍합니다. 그것만 끔찍한 게 아니에요. 죽어서 이제는 교회도 안 다니고 예수 안 믿어도 된다고 자부했는데 마지막 날에 예수님한테 호출 받아서 명단 보고, “26번 아무개 지옥 가!” 이렇게 나온다면, 이건 빼도 박도 못하지요.

마리아가 신앙이란 용어를 사용했어요. 이 용어를 사건으로 자릅니다. 자르면 절개 면이 생깁니다. 이 자르는 데서 진짜 신앙이 나와요. 중요한 것은 누가 자르느냐는 겁니다. 누가 자르겠어요? 인간 쪽에서 볼 때 사건으로밖에 소개할 수밖에 없는 천국에서 오신 분이 존재의 바다에서 칼 쥐고 너희들의 신앙이란 것은 잘라버립니다. 그러면 그 신앙은 신앙이 아니었지요. 잘라줌으로써 이 절개 면에서 진짜 신앙이 나옵니다.

신앙과 더불어 나오는 말씀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절개 면에서 나오지요. 나올 때 이 말씀을 우리가 지켜야 된다?? 지킬 수가 없지요. 존재는 못 지켜요. 결국은 이 말씀이 배태되도록 그것이 나오도록 우리는 철저하게 존재의 일부로서 이용당한 거지요. 베임을 당한 거예요. 그러니까 피동적이고 매사가 수동적이에요. 주님은 말씀의 칼로 요리조리 다 잘라버립니다. 삼겹살은 삼겹살대로 등심은 등심대로 우리는 잘릴 때 말씀의 칼로 잘라질 때 그 속에서 우리가 미처 예상 못한 새로운 개념이 나오는 겁니다.

또 디모데전서에 보면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돈을 사랑한다. 그걸 존재로 보게 되면, “주님이여, 돈을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기존에 존재의 바다에서 알고 있던 그걸 모방해서 하는 거예요. 주님이, “너 돈 없이 어떻게 살래?” 그러면 이 말씀,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뭡니까? 그건 우리가 지킬 게 아닙니다. “그럼 저는 어떻게 됩니까?” 못 지킨 사람이 되지요. “못 지키면 천당 못 가잖아요.” “네가 천당 왜 가야 되는데? 갈 이유 있나?” 관계자 외에는 출입금지 돼있어요. 창세기 3장 21절에. 우리가 들락날락하는 곳이 아닙니다. 갈 수 없는 곳이에요. 천국은 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으로 따로 만든 게 가짜 천국입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 갑니다. 가짜입니다.

성경에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고 나와 있지요. 그 말씀은 사건이 와서 우리를 잘라줘야 그 말씀이 그 말씀이구나. 다시 말해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은 잘라보니까 부자 되도 갈 수 있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개념이. 너무 황당해서 안 믿어지지요.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돈을 사랑하는 내 주체를 부정한 상태에서 돈이 억만금 주어줘도 감사히 멋있게 쓰라 이 말이에요. 왜? 부자 되도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상 온갖 명품을 사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상태에서 뭘 사도 그건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게 돼요.

10분 쉬고 합시다.

관리자(IP:203.♡.42.222)

14-08-09 09:43

2014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2강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 기획안이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획안이었다는 이야기를 했고 하나님의 기획안은 하늘나라를 만드는데 있어서 지상에 있는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서 납치할 이유가 있는가? 전쟁할 때 승리자가 저쪽의 선량한 백성을 노예로 신분 바꾸어서 일시키잖아요. 로마제국이 키워졌는데 하늘나라에 일꾼이 모자라서 사람을 납치한다는 것은 SF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고 꼭 하나님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는 겁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이스라엘을 전리품이라고 하거든요. 이것은 전쟁이 꾸준히 있어왔다는 뜻이에요. 전리품, 전쟁이 일어나야 발생되는 노예잖아요. 이스라엘 자체가 너는 나의 노획물이고 전리품이다. 그러면 천국이 어디 있느냐 하면, 전쟁을 하신 여호와 이름이 노획물을 옆에 배치해놓고 내가 거룩한 성소로 지정하겠다고 나와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제가 첫째 시간에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해서 끝이라고 했지요. 이것이 수련회의 모든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자기 계획을 일방적으로 작업해서 모든 것을 완성시킨다 했는데 개입이니까 여기서 더 나가보잔 말이죠. 개입할 때는 하나님의 행동이지요. action. 하나님의 행동이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의 행동을 그냥 행동이라고 해버리면, 예를 들어서 빈 벌판에서 아무도 없는 외로운 곳에서 공을 차거나 밴드 만들어서 고함치고 노래 불러도 아무도 뭐라 그러지 않아요. 그런데 새벽 2시에 밴드 연주를 한다면 신고 들어오고 난리 나잖아요. 경찰이, “당신이 밤중에 주택가에서 노래하면 되겠어요?” 그럼 그 사람이, “내 행동이 뭐 어때서?” 그럼 경찰이, “당신 행동은 당신 마음대로지만 주변의 이웃에 대해서 생각해봤느냐?”고 나온단 말이죠.

전쟁이란 결국 하나님의 행동만으로 일어나느냐?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행동이 성과를 얻지 못하도록 대적하는 숨겨져 있는 행동이 반격해서 나오겠지요. 그럴 때 전쟁이 되고 이 전쟁에 가담하는 분을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겁니다. 출애굽기 15장 4절에 보면, 전쟁에 참여한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이런 신학적인 용어를 우리가 왜 알아야 되고 이 소리를 들어야 되는지 물으신다면, 신약에서 사도가 하는 말이, 예수 믿으라는 게 아니라 앞에 뭔가 붙어요. ‘주’ 예수를 믿으라. 주 예수를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 ‘주’라는 것이 그냥 주인이라는 우리가 아는 존재적 개념이 아니고 제가 첫째 시간에 계속 이야기한 것이 뭐냐 하면, 뭔가 이 땅에서 사건을 존재에다 금을 그어서 낯선 경계선을 자꾸 만들어내는 주인공을 ‘주’라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걸 진작 이야기하지 하지만 성경 전체가 이 이야기를 했는데 교회에서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책에서 다른 건 다 버리면 예수만 찾아서 “내가 예수를 믿겠습니다.” 하면, 오늘 밤 네가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해서 구원이 돼버리는 겁니까? 용어 하나 외워서. 남묘호렌게쿄에요? 주문 외우면 저절로 효과 보는 그런 겁니까?

주문이란 말이 나왔는데 이게 인간의 타고난 미신입니다. 기호와 문자가 나한테 자동적으로 효과를 준다는 겁니다. 타로 점처럼. 이것은 얼마나 인간이 형식에 집착하는가를 보여줍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말라고 하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형식문제거든요. 나의 이미지를 만들지 말라. 나를 위해서 어떤 모습이나 형상도 만들지 말라. 이 말을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어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만들고 섬기면 우상숭배다. 미신이죠.

800년경에 동방교회에서 우상철폐하고 부수는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났거든요. 성상파괴하면서 자기 집은 왜 안 부수는지 몰라. 그리고 성경대로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본인들이에요. 본인을 도끼로 내리까라는 거예요. 하나님과 관련되어 나온 모든 이미지는 우상입니다. 그래서 나 외에 다른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점점 더 이스라엘 역사가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그것이 성취 불가능한 말씀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형상인 하나님의 형상, 곧 인간은 십자가에서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한 존재로 발각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한 분이 죽음으로써 모든 인간은 다 죽은 것이다. 이제 살 수 있는 사람은 죽은 자를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된 자만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개념에 있어서 왜 그걸 부수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이 저것은 하나님답다. 그것을 종교학에서는 신이라고 하지 않고 ‘신성’이라고 해요. 신을 달라도 신성은 하나니까. 복음이 아니고 종교학에서. 산이 있다면 그 진리의 산에 불교로 올라가나 기독교로 올라가나 모이는 곳은 한 곳이다. 왜? 신성을 동일하기 때문에. 그래서 신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다. 거룩하다, 고상하다, 전능하다, 아름답다 등 미학적으로 해야 한다고 하거든요.

이런 이야기를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인간은 뭔가 자기 초월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성을 끌어당겨서 강제로 엮어서 엮인 내가 신성에 의해서 끌려올라가는 것처럼 신을 마음대로 표출하고 표현하고자 본능에서 나왔기 때문에 모든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거예요.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너희들은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형상, 이미지를 만들게 되어있는 필연적 존재라는 겁니다.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새삼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율법을 어기고 왔음을 새삼 너희가 파악하라는 겁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3:19)

자기를 신성화한다. 이건 모든 종교의 모티브에요. 초라한 자기의 모습과 대비되는 나의 인격과 나의 품위에 부합되는 새로운 제2의 자아를 상상하게 돼있습니다. 인간에겐 타고난 거예요. 말려도 안 돼요. 지금 교도소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전부 다 비록 사회 탓으로 왔지만 나는 아직도 양심의 쪼가리는 남아있다. 옆에 있는 죄수한테 자비 행해서 구원받습니까?

전쟁을 통해서 구원받습니다. 주 예수의 주가 구약 때부터 줄기차게 너희들이 알지 못한 그러면서 배후에서 지배해왔던 보이지 않는 악마와 싸워서 승리한 열매가 너희들이다. 그래서 너희들은 나의 노획물이고 나의 전리품이다. 그 사이에서 인간이 고매하고 아주 경건해 보이는 인간의 품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이 날아가 버렸어요. 종교가 종교답게 사회에 대해서 기여하려면 종교인들이 깨우쳐서 돈과 명예에 대해서 초월하여 정부가 손대지 못한 구석구석을 자비의 손길을 베풀게 되면 사회는 결코 종교인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누가 이런 소리를 합니까? 마귀가 그런 소리해요.

교회에 공부방 만들고 노인복지해서 정부 예산 따내고 해볼까요? 그런 식으로 하는 겁니까? 그런 걸 이미 하고 있고 줄곧 해오고 있습니다. 서유럽, 동유럽 모든 교회들이 해왔습니다. 왜? 교회가 너무 오래되다보니까 피곤해요. 교회 자체가 자기 건물 모습처럼 전부 찌질 해졌어요. 쾰른에 가면 무려 150년 동안 지은 쾰른 대성당이 있습니다. 관광객들 오지요. 그런데 보게 되면 참 초라해요. 지하에 동방박사 해골이 왜 있습니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인간이 아는 역사는 과거입니다. 과거는 지금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마음 놓고 과거를 볼 수 있는 현재 사는 사람을 호쾌하게 증명해주는 것들이에요. “나는 옛날에 태어났으면 큰일 날 뻔했어.” 자기만족에 빠지게 하는 것이 과거의 박물관이에요. “이 시대에 여자로 태어났으면 조졌네.” 지금의 자신의 모든 것이 행복이 충만한 상태임을 과거의 비참한 시절로 돌아가서 해석하면서 반대급부로 자기 행복을 챙기겠다는 수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다니는 교회도 수십 년 지나가면 예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교회역사를 자랑합니다. 이 역사를 역사로 키우기 위해서 박물관으로 키우기 위해서 현물을 더 내시기 바랍니다. 역사는 여러분의 자랑이고 자존심이라고 설교하거든요. 자식들에게 쓸데없는 유산 남기지 말고 그 돈으로 예배당에 헌금해서 자식들에게 경건의 모범을 보여주시면 자식들이 여러분을 존경할 것입니다. 잘도 존경하겠다. 그 돈을 교회 바쳐서 목사가 다 떼먹고 도망가고. 다시는 벌초하나 봐라. 사후 보복을 당할 수가 있어요.

전쟁이란 개념이 들어가면서 우리는 어떤 데서 선을 넘었느냐?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이웃 봉사해서 경건 된 삶을 살자는 그 차원에서 이미 벗어나버렸어요. 우리는 전쟁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고 평화를 원하는 사람이거든요. 그 평화를 다른 말로 하게 되면, 아부 또는 굴종. 이 자리만 유지된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는 양보의 미덕, 비겁하게 생존에 집착하면서도 그것을 평화로 위장하는 우리의 솜씨만 빛날 뿐이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람이 회개하고 반성하게 되면 회개하면 할수록 자기는 훌륭한 사람으로 업그레이드된다는 딜레마에 빠져요. “넌 반성 안 했지만 난 반성했어. 넌 나쁜 짓해도 반성 안했잖아. 나는 곧장 반성한다고.” 뭐예요? 누구 약 올릴 일 있습니까. 납득이 되는 신앙생활은 마귀한테도 먹히지 않아요. 왜? 수준 낮아서. 마귀는 수준 낮아서 우리와 상대를 안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마귀를 뱀처럼 지혜롭다고 하거든요. 마귀가 겁내는 분은 딱 한 분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임성한 작가? 아닙니다. 오로라 공주? 아닙니다. 출생의 비밀, 뿌리를 알고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은 마귀에서 입 다물라고 하지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입 다물라.” 어디서 알아듣지 못한 소리를 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몰라. 소통이 안 되는 이야기를 자기들끼리 하고 있는 거예요.

전쟁은 자기들끼리만 합니다. 전쟁은 자기들끼리만 해도 승자가 다 먹기. 완전히 카지노입니다. 올인해서 승자가 다 가져갑니다. 돈 놓고 돈 먹기. 이 세상은 인간 빼고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의 도박판이고 게임판입니다. 그게 욥기에 나와요. 주님께서 욥에 대해서 이 세상에서 욥보다 믿음 좋은 사람 못 봤다고 하니까 마귀가, “욥이 부자고 건강하니까 행복하니까 주를 섬기지 다 빼앗아보세요. 원망할 것입니다.” 그럼 내기해보자.

남의 노름판에 멀쩡한 욥이 날벼락을 받은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욥이 대들었다? 이것은 갑자기 피조물이란 자리를 망각한 겁니다. 어느 날 개가 침대에 올라오고 개가 수박 들고 하면, 이건 그야말로 사건입니다. 개 데리고 보신탕집에 가니까 개가 자기 친구 고기를 먹겠다고 포크 들면 보통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 세상이 영적으로 구분되지 않고 혼돈돼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가 망하는 길인지 자기를 살리는 길인지 분간도 못하고 들이대요. 남 예수 믿는다고 하면 덩달아 예수 믿고, 십자가 믿는다면 덩달아 십자가 믿고. 온 몸에 어디서 주워왔는지 쓰레기 천지에요. 나중에는 어느 걸 꺼내야 될지 몰라. 왜 그걸 끌어 모으는 줄 알아요? 자기 전쟁한다고.

자기 전쟁을 이름 전쟁이에요. 결국 전쟁은 이름 전쟁이거든요. 누구 이름을 걸고 하느냐? 어떤 사람은 자기 이름, 또 어떤 사람은 그걸 감추는 묘한 방법으로 나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우리 집안은 보통 집안이 아니고 뼈대 있는 집안이라는 식으로 자기 가문을 빛내는. 안중근 의사처럼 조국을 위해서. 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정계를 은퇴한 경기도지사하신 분. 뭔가 자기 이름을 걸고 하는 전쟁이에요.

이름이 어디서 나오느냐? 그건 몰라요. 이름은 무에서 나왔습니다. 무는 유의 밑바닥을 무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철학에서. 그러니까 우리 상식에서는 존재가 있고 그 다음에 존재를 지칭해서 이름을 붙이는데 이게 문제가 돼요.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강아지가 있다면, 오늘부터 나는 너를 강아지로 부르겠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피조세계의 이름을 부르지요. 너를 강아지로 부르겠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네가 부른 강아지를 지배하라고 돼있어요. 창세기 1장의 구조가 그렇게 돼있어요.

이름을 부르니까 이름을 부를 때는 좋았어요. 인간이 마귀의 수하에, 죄에 지배되고 난 뒤에는 자기가 이름을 불렀다는 이유 때문에 그 강아지는 내 이름을 위한 내 소유가 돼버렸어요. 차지하고 정복하는 것이 내게 귀환, 귀속하는 쪽으로 모든 것을 행동하게 돼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이 결국 영적 전쟁이거든요. 주님과 악마의 전쟁인데 악마가 누굴 앞장세웠느냐 하면, 인간을 세웠어요. 인간의 이름이 등장해요. 인간의 이름에 대해서 대응하기 위해서 하나님도 자기 이름을 가지고 이름 있는 곳에 뛰어들어서 한바탕 전쟁을 벌인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와서 제가 누구 이름으로 가오리까 할 때 지금까지는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너에게는 이야기한다. 출애굽기 3장 16절에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다.

여호와란 내가 계획한 것은 반드시 스스로 알아서 이뤄낸다는 겁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고 스스로 사건을 유발시키는 자란 말이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다 나와 관련되어 일어난 사건인 줄 알라는 말입니다. 이제부터 존재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사건으로 다가와서 사건을 앞장세운 이름이냐 아니면 내 존재로 버티고 있는 이름이냐? 그 사건과 존재의 싸움 또는 인간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의 싸움 다른 말로 하면 나의 자존심과 주의 자존심의 싸움, 거기서 패배 당함을 안다면 그 사람은 주님에 의해서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패배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티는 사람은 지옥 가서까지 계속 버텼을 사람이에요.

그래서 정리하면 구원이란 뭐냐 하면, 주님께서 본인 스스로 설정한 그 계획에 모든 것이 말려들어서 순간순간 수시로 모든 상황과 모든 사태 속에서 내 이름이냐, 아니면 내 이름이 아니냐는 그 전쟁의 감을 느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신자에요. 신앙생활이라고 해서 구제하고 하는 게 아니고 이번 일에 대해서 제가 주체입니까, 아니면 주님이 주체입니까? 이렇게 물음이 나오도록 상황이 그렇게 몰려가는 것, 그게 수동적 신앙생활이에요. 신앙생활은 수동적 밖에 없어요. 능동적 신앙생활은 없어요. 왜냐하면 성령이 주관하기 때문에 수동적 신앙생활을 지금 정상적으로 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지금 집사님이 커피를 마시는데 이 커피가 내가 힘주어 마시는 거예요? 주께서 마시게 하는 거냐? 평소에 마실 때는 전혀 못 느껴요. 그런데 마시는데 누가 가져가면 내가 마시려고 하는데 가져가느냐? 갑자기 주체가 내가 돼요. 주께서 마시게 하는데 니가 왜 가져가? 그건 맞아요. 그 순발력을 인위로 조작하면 기계의 숙달로 나왔기 때문에 그것도 가짜입니다. 이게 아주 어려워요. 순간을 포착해서 순간이 지나가면 존재로 바뀌기 때문에.

처음에 교회 나와서 찬양하라 하면 찬양 가락 보고 해요. 누가 음이 잘 맞는지 제 음을 찾아가는지 피아노 반주가 빠르진 않는지 피아노 반주 무시하고 목사가 지 마음대로 찬송을 부르는지 이런 것이 눈에 들어온단 말이죠. 그런데 정작 주님이 주체가 되는 찬양은 사실 따지고 보면 랩밖에 없어요. 결국 늙어서 혀 안 돌아가면 가락 안 맞으면 랩으로 끝나거든요. 시골 할머니들 찬양하는 것 보세요. 완전히 랩입니다. 랩인지 민요인지 판소리인지 분간이 안 되잖아요.

사람이 열심히 소프라노, 알토 다 지키겠다는 그 틈새 속에는 찬양을 통해서도 나의 자존심을 상처 받을 마음이 없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인간이 자기 이름이 있는 이상은 그 이름을 스스로 배신할 짓은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역사란 자기 이름을 사수하는 시간적인 긴 여정이거든요.

그래서 성경에서 복음이란 주의 이름, 주의 이름 배웠지요. 주의 이름은 존재의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써 사건을 유발했던 개입하신 그분의 이름이죠. 따라서 주의 이름을 존재로 받으면, 존재의 특징은 존재는 존재를 소유한다고 했지요. “나는 5년 전에 예수 믿었었지.” 뭐예요? 5년 전부터 주님을 갖고 다녔지. 코카콜라입니까? 주님을 갖고 다니게. 주님은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주님한테 지적 받고 있지. 어떤 점에서? 주님은 내 존재의 사수에 대해서 가만두지 않고 늘 간섭하시고 개입하셔서 너는 존재가 아니고 이미 사건에 편입되었어. 모든 사건이 주님의 사건을 증거하는 증거자로서 살아가게 된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복음이 주의 이름이거든요. 복음은 전쟁을 하는 주의 이름이기 때문에 반드시 적군이 있지요. 두 번째 시간에 우리가 원리를 배웠습니다. 하나님이라 할 때 인간의 품위 같은 것은 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전쟁을 유발시켜서 전쟁 노획물과 전리품이 바로 백성이라고 했지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이미 에베소서 4장에 나온 이야기이에요. 우리 존재를 지켜주시는 주님은 없어요. 오히려 우리 존재를 난도질해서 경계선으로 사건화 시키는 주님밖에 없는데 사건화 되는 이유가, 사건으로 찾아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필연이 아니고 우연이에요.

반드시 주님은 적군을 유발시킨다 말이죠. 그 적군의 특징이 바로 나의 이름, 나의 존재의 의미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10장에서는 적이 뭐냐 하면, 비난받지 않겠다는, 비난받기 싫다는 이런 모습들이 주님에 의해서 적군 계열로 분류가 됩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비난받기 싫어하는 쪽으로 행동하게 돼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비난받아도 구원받으면 되잖아.” 하는 게 주님 생각이에요. 네가 창기야, 네가 세리야, 네가 강도야? 그게 무슨 상관있어. 오늘밤에 낙원에 가면 되지.

“주여, 왜 비난받아야 됩니까?” 그건 네 이름을 소유하기 때문에 비난이라는 것을 의식하게 돼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내 이름이 통째로 주의 이름에 편입돼있다면 예수님을 비난했던 비난이 오게 되면 우리는 오히려 요한복음 15장에 의해서 세상이 너를 미워하거든 도리어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마태복음 팔복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마지막에 나와 내 복음을 위해서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다. 옛날 선지자들도 욕 얻어먹었느니라. 오히려 욕 얻어먹고는 로또 당첨된 줄 알라, 복 받은 줄 알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마태복음에서 나온 그 내용이 보편화 된 것이 사도 바울의 로마서 복음입니다. 거기에 보면 사람들은(유대인들) 자기 의를 추구하다 보니까 하나님의 의를 힘써 거부하고 자기 의만 챙긴다. 자기 의가 뭐냐 하면, 나는 어떤 식으로든 비난받기 싫다는 모습이죠. 비난받기 싫다면 그 사람이 하는 전쟁은 오직 자기 이름을 유지하는 전쟁 외에는 다른 전쟁으로 간주하지 않을 겁니다.

무엇이 진리냐? 관심 없어요. 내 마음이, 영혼이 안 다치는 그것이 내 편이고 다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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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727건 중 2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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