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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사도행전63강(고난과 구원), 마태복음 54강(죽음) 140731강의사도행전

사도행전63강(고난과 구원), 마태복음 54강(죽음) 140731

이름 : 이근호(IP:119.18.89.5)

공은주(IP:175.♡.147.179)

14-08-14 18:14

대전140731-행23장11절(고난과 구원)63강 - 이 근호 목사

사도행전23장 11절 읽어보겠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 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바울이라는 사람, 예루살렘 그리고 로마 나옵니다. 그림을 그려보면 여기 예루살렘이 있거든요. 가이사랴, 욥바, 현재 한창 전쟁하고 있는 가자 지역 밑에 지중해에 있는 안디옥, 터키반도 있어요. 사도바울이 지금 어디와 있느냐 하면, 여기 예루살렘에 와있어요. 1차, 2차, 3차 끝나고 난 뒤에 여기에 와있습니다. 그 다음의 절차에 대해서는 아시다시피 여기서 체포되어가지고 섬으로 해서 로마로 가는데 이 사도바울이 가는 모든 행적이 누가 개입하는가 하면, 성령께서 이끄시고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사도바울 오기 전에 누구한테 먼저 임했느냐 하면, 예수님에게 임했지요. 예수님과 성령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예수님은 구체적인 인물이 나옵니다. 구체적인 인물이, 인간상을 보여줍니다. 눈, 코 다 있어요. 성령은 그런 게 없어요. 성령이 예수님은 유일하신 메시아라고 인정하고, 예수님에게 활동을 시킨 그 활동을 성령이 회수를 해가지고 사도바울에게 그대로 줬다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바울만 주는 게 아니고 구원받아야 될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성도가 아닙니다. 로마서8장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니다. 요건을 확정지어놨어요.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그 사람이 어떤 후회할 일인지 실수한 일인지 어떤 행동이라든지 이런 것에 대해서 일체 책임을 묻지를 않습니다. 어떤 실수, 비자를 놓쳤다든지 이런 거, 어떤 후회 실수에 대해서 하나님은 일체 거기에 대해서 문제를 삼지 않아요. 고구마나 강냉이가 들 맛있다. 이런 거 있잖아요. 예를 들면.

인간의 인생에 일어날 어떤 것, 이 세상에서 있던 어떤 것도 묻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지 않은 사람은 성도 아니지요. 성령이 임하지 않은 성도 아닌 사람이 구원받으려고 한다면 아주 힘든 자기 관리, 자기 절제를 총동원 다해야 돼요. 그래도 실패해요. 그래도 안돼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방금 성령이 와서 예수님께 임했다고 제가 언급했잖아요. 사실은 예수님은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다른 사람들의 형편이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예수님이나 그들이나 같은 인간이라, 이렇게 편하게 생각했는데 성령이 오셔서 활동하고 난 뒤부터는 이들의 정체가 들어나요. 성령 없이 천국가려고 하는 자들의 정체가 드러나는 겁니다.

성령을 안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계속해서 미워하고 공격하고 핍박하게 되어있어요. 그 핍박하는 근거가 뭐냐 하면, 나는 잘났다는 겁니다. “나는 잘났다. 나는 그동안 열심히 살았노라, 후회할 일은 줄이고 실수는 줄이고 거의 완벽할 정도로 최선을 다하여 살았다.” 라는 쪽이 예수님을 미워하게 되어있어요. 제가 요 상황, 요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예수님에게 일어난 것만 사도바울이나 성도에게 오는 것이 아니고 요 상황, 요 이야기가 세트로 전부가 우리에게 성도에게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이 주어졌을 때, 누가 여기에 대해서 제일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가 하면, 바로 성령 받은 우리 본인들이 힘들어합니다. 왜냐 하면, 안 맞는 옷을 입어보세요. 굉장히 어색하잖아요. 그래서 인간이 천국 가는 것은 굉장히 어색해요. 요번에 수련회의 주제가 ‘출애굽속의 그리스도’잖아요. 그 히브리인들이 애굽에 살 때는 편했습니다. 나오고 난 뒤에 모든 게 어색하고 안 맞아요. 자기가 생각했던 그 생활이 아니고 몸에 안 맞는 것 같아. 뭐든지.

성도가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천국가면서도 성도 본인이 영 어색해하고 이 성령의 생활을 굉장히 낯설어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요번 교재 제목이 ‘낯선 경계선’이라했어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둘로 구분하는데 구분할 때는 반드시 경계선이 생기는데, 그 경계선은 내가 예상한 경계선이 아니고 낯설게 등장한 경계선이에요. 굉장히 어색해요.

사도바울도 처음에는 사울이었잖아요. 사울도 예수님을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고 난 뒤에 사람이 완전히 바뀌었지요. 사람이 바뀌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가 정신 차려서 똑바로 산다는 말이 아니고 이 상황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수용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내의 예상 같으면 이리 살지 않는다. 분명히 자기 고집이 있고 자기 계획이 있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이게 내 뜻대로 되지를 않아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강력한 반발과 거부감이 생기다가 결국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아야 된다는 사실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그 시점이 있습니다. 그러면 내 뜻대로 안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작업이 뭐냐 하면, 사도바울로 하여금 독자적으로 내 힘으로 살수 있다는 상황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마련하지 않는 거예요. 그게 23장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이 이 예루살렘에서 이야기를 하니까 거기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아주 분개를 했지요. 그 유대인들이 분개를 했어요. 특히 사두개인들이 바리새인들이 고소를 했지요. 23장7절을 읽어보면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이니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둘 사이가 서로 의견이 차이 나는데 사도바울을 재판하는데 있어서는 그들과 한 목소리로 사도바울을 없애자는 겁니다.

그런데 요런 상항은 여러분이 들어보니까 예수님 재판도 마찬가지에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은 논리가 다르기 때문에 구원의 이론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싸우다가 예수님 죽이는데 대해서는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공격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성령께서 예수님을 다루었고 예수님에게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덤탱이로 사도바울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바울은 그런 상황을 자기가 실수한 거예요? 잘못해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습니까? 아니지요.

일반교회 교인들이 목사한테 사기당하는 이유가 “니가 행동을 똑바로 했으면 하나님께서 이런 징벌을 안 준다.” 이 말에 스스로 그 늪에 말려들어요. 제가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보겠습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성령이 주신 이 상황을 성령 없이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지요.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오해하기를 ‘아! 성령이 왔으니까 나는 구원받았다.’ 하고 자기 구원받은 것만 챙기는데 그게 아니고 성령이 올 때는 예수님에게 있었던 그 상항을 우리에게 줘버린다 말이죠.

그러면 그 상항이 뭐냐 그 상항은 ‘나는 내 힘으로 살아야지. 내가 앞으로 똑바로 정신 차리고 살아야지.’ 라는 것을 허용 안 해준다는 거예요. 그리고 뭘 느끼는가 하면 이것은 어떤 내가 실수한다든지 잘못을 저지른다던지 큰 죄를 지어서 벌칙으로 주어진 상항이 아니고 전혀 이것은 내가 똑바로 섰음에도 불구하고 어처구니없는 상항들이 밀려왔을 때 우리는 해석을 ‘그래, 내가 잘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앞으로는 잘해야지. 하나님! 앞으로는 참 잘하고 기도도 잘하고 성경도 많이 보고 앞으로 예배 참석하고...’ 자꾸 이런 식으로 자기 행동을 이런 어려운 상항은 내 잘못된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 연관 짓는 그 연관을 잘라버려야 돼요.

그거 안 자르면 일곱 귀신 다 들어옵니다. 마귀 다 들어와요. 그걸 잘라버려야 된다고요. 그러면 그런 상항을 왜 주느냐, 원인과 결과를 끊으라고 준 거예요. 끊으라고. 니가 똑바로 한다고 해서 이런 상항을 안 벌어지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벌어져야 할 상항이기 때문에 니 행동 같은 것은 없다. 그걸 받아들여야 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구원은 우리의 행동과 상관없이 구원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 사실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동과 우리가 믿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믿든 안 믿든 간에 믿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구원이 된 겁니다. 그 속에서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믿어야지.’ 하는 것을 포기하도록 촉구를 하지요.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 받아야지, 라는 것을 버리세요. 그걸 버려버리면 그게 믿음이에요. 20대에서는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지만.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두 가지의 꿈 버전이 있는데, 한 가지 꿈 버전은 뭐냐 하면, 군에 갔다 온 남자들이 꿈을 꾸는데, 제대를 분명히 한지 5년이 되고 10년이 됐는데 꿈에 아직도 제대를 못해가지고 달력에 가위표 그리면서 제대 빨리 해야 되는데 힘들어서 못하겠다. 깨어보니까 식은땀이 나면서 어휴! 제대했구나! 하는 경험. 제대했구나! 하는 그 버전. 이게 군대 꿈 버전. 두 번째는 실제로 군에 있으면서 군에 제대하는 꿈을 꾸는 것. 이건 아주 아찔한 상황입니다. 군에 제대했다고 휘파람부는데 “빨리 안 일어나!” 보니까 아직 군에 있어. 꿈이 더욱 더 나를 힘들게 해요. 꿈이 없었으면. 이 세상은 인간이 만들어낸 꿈이거든요. 이 세상 자체가.

그런데 인간은 꿈만 꾸어요. 꿈 외에는 다른 현실은 없습니다. 인간이 어떤 상상을 하던 하나님이 보시기에 꿈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꿈속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 꿈의 주인공은 나에요. 제대했느냐, 안 했느냐, 항상 주인공은 그 상황에 이익이라든지, 실용도, 가치, 효과 항상 그것에 대해서 판단하고 점검하고 측정하고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그 따지는 주인공은 누구냐 하면, 남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에 환상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환상을 꿈을 늘 만들어서 현실을 만들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바보 같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이 환상을 꿈을 꺾어버리고 예수님이 만든 상황을 덤탱이로 퍼부어야 되지요. 그게 ‘낯선 경계선’이란 말이죠.

우리가 꾸는 꿈대로 하게 되면 ‘저걸 얻기 위해서 나는 어떤 노력을 하면 돼?’ ‘남들은 저런 노력을 해서 얻었다는데 나는 어떻게 하면 돼?’ 라고 생각하거든요. 이건 뭐냐 하면, 역시 주인공은 내가 되고 ‘저걸 얻기 위해서 나는 이만한 노력하고 이만한 훈련과 연습을 하면 되겠지.’ 이렇게 생각한다고요.

그러니까 이건 항상 어떤 결과에 대해서 누구와 연관되어 있어요? 나와 내 행위와 연관되어 있지요. 이게 애굽생활이거든요. 이게 버릇으로 되다 보니까 구원받는 것도 내 행동 똑바로 해야 구원받지, 내 행동 잘못하게 되면 나는 중간에 믿음이 없구나! 하고 하나님의 화를 돋궈가지고 잘릴 수가 있다 말이죠. 잘리지 않기 위해서는 행동을 조심하고 지독한 악은 안 저지르게 조심하고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꿈이에요. 그게 꿈이고 그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에요.

여기 8절 다시 보겠습니다.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뭡니까? 둘 다 꿈이거든요. 둘 다. 둘 다 꿈인데, 왜 꿈이냐 하면 구원은 내가 무슨 논리와 이론을 획득하느냐에 따라서 내 구원은 그걸로 결정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고 그 말씀을 내가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구원은 내가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해석하게 되면 나는 구원받는다. 이리 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그게 바리새인이고 사두개인이에요. 그런데 제가 그 말하면서 가만히 들어보니까 바로 오늘날 우리 이야기 아닙니까?

복음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정립하고 있으면 내가 구원받는다. 그게 바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연장이에요.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고요. 수백 번 이야기합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면, 구원은 예수님의 능력의 효과입니다. 구원은 우리 손을 떠났어요. 우리가 어떻게 주님 앞에 잘 보이면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님의 능력이 임해서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능력이 임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내가 내 인생의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내 인생 스스로 손을 놔버리고 그냥 가벼운 존재의 무게 이런 거잖아요. 그냥 새털처럼 나는 거죠. 물론 창공을 날 때 날씨가 더워서 문제이고, 자장면 살 돈이 없어서 문제인데. 어쨌든 먹고 싶은 것은 그리 많은데 돈은 없고. 어쨌든 창공은 나는데 내 욕망 때문에 내 욕심 때문에 짜증은 나는데 어쨌든 그 자체도 구원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수시로 손 좀 놔라. 이걸 수영 가르칠 때는 힘 좀 빼세요. 수영할 때 힘 좀 빼라는 거예요. 힘주니까 앞으로 빠지고 뒤로 빠지는 거예요. 처음 운전할 때도 힘을 빼야 돼요. 운전할 때 완전히 핸들이 부서지도록 쥐고 있더라 말이죠.

바로 제가 말하는 천국은, 구원은 우리는 오랫동안 지옥 같은 세상을 살기 때문에 천국은 우리 몸에 익숙하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힘이 들어가요. 요거 잘못하면 요번 주 벌 받을까 싶어서 바짝 힘이 들어가요. 착한 일한다고 삼성이 이기나 프로야구 보다가 아, 이 때 기도해야 돼. 기도하면 임 창용이가 9회 초에 8:7로 이기고 있다가 2점 홈런 맞고 역전됐는데 9회 말에 봉 중근이가 와가지고 동점해서 역전됐다. 삼성이. 그래서 넥센하고 게임해서 4:5에서 5점으로 됐다. 이런 거. 이거 프로야구 좋아하는 사람은 바짝 신경 쓰거든요. 신경 쓰면서 힘이 들어가는 거예요. 망해라, 망해라, 박한이 망해라. 힘이 막 들어가요. 힘이 들어가면 마치 자기가 힘을 줘가지고 승리한 것처럼. 그러니까 나무에다가 노란 리본 달면 세월호 애가 살아옵니까?

인간은 주어진 모든 현실 있잖아요. 야구와 배 빠지는 것, 그걸 자기가 꿈꾸는 꿈으로 강제로 잡아당기기 위해서 힘을 써요. 내 뜻대로 됐으면 좋겠다. 강제로. 투표할 때 얼마나 힘주고 찍습니까? 이번에 승리해야 된다고. 어떤 힘이 들어가서 내가 뭔가 기여했다는 것, 내 인생에서 약간이나마 내가 기여했을 때, 사람은 무엇을 보느냐하면, 타인의 비난으로부터 벗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인간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타인입니다. 남들의 비난. 이걸 쉬운 말로는 꼴좋다, 는 비아냥을 아는 겁니다. 꼴좋다~ 꼴~좋~다. 사람은 여기에 대한 강박증이 있어가지고 이것 때문에 잠도 못자는 겁니다. 벌벌 떨면서 할 소리도 못하고 항상 초조하고 스트레스를 받아요. 남한테 비난 받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것을 로마서에서는 ‘자기 의’라고 하지요. 로마서10장에서 바리새인 사두개인 나오는데 로마서에서 바리새인, 사두개인 합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유대인은 자기 의에 복종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가 들어올 자리가 없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바리새인, 사두개인은 서로가 적대관계지만, 사도바울 보기에는 둘 다 같은 쪽이에요. 뭐냐 하면, 절대로 남으로부터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왜? 나는 가치 있으니까. 이게 바로 우리한테 어울리고 우리 몸에 딱 맞아요. 그런데 천국은 이걸 버리라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난데없이 이유도 없이 무조건 비난 받을만한 상황이 찾아갈 것이다. 그런 상항이 너희에게 찾아갈 것이다. 라고 찾아올 때, 주님 찾아오신 줄 알아라. 주님이 찾아오신 걸 알아야 돼요.

아무 이유도 없이 억울해도 너무 억울해요. 특히 못생긴 연예인들이 이유 없이 잘생긴 팬들한테 욕 얻어먹는 것처럼. “저들 TV에 나오지 말라. 못생긴 게 왜 나오느냐” 하지요. 못 생긴 사람이 태어날 때는 “하나님이여, 저를 못 생기게 하옵소서.” 소녀의 기도 드려가지고 그래서 못 생겼어요? 아니잖아요. 주어진 거잖아요. 주어진 거니까 남들이 못 생겼다! 못 생겼다! follow me. 팔로우 미! 잘생긴 사람이 못 생긴 사람한테 따라오라고 하니까 수술을 해가지고, 성형수술을 왜 합니까? 못 생겼다는 것이 자기한테는 무엇으로 느껴진다? 그게 비난으로 느껴지는 거예요.

그게 왜 비난이라고 본인이 느끼느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따지는 것은. 못 생겨도 천국 보내주겠다는데. 강도가 돼도 창녀가 돼도 보내주겠다는데. 왜 니는 이런 천국의 삶을 살아야 될 너희가 왜 남들이 너희에게 못 생겼다고 하니까 돈 들여서 코 고치고, 평소에 모든 것이 남들이 나를 비난할까봐 사전에 비난 받을 요소를 제거하는 쪽으로 시도하는데, 그게 내가 만든 꿈의 세계에요. 그게 또 하나의 애굽이 되고, 그렇게 되면 비난 안 받아요? 또 생겨요. 비난은 또 생긴다고요.

남녀사이에서 남자가 여자를 모르고 여자가 남자를 모르는 게 딱 하나가 있어요. 뭐냐 하면, 남자가 여자를 사귈 때는 나한테 필요한 여성의 요소만 그걸 따오면 된다고 생각하고 여자가 남자 사귈 때도 내게 없지만, 남자한테 있는 걸 따오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둘 다 사귀고 보면, 그 뒤에 따라오는 빈 깡통들이 왜 그리 많은지.

여자를 사귀니까 여자의 가정에 문제점이 많은 것까지 이제는 신경을 써야 된다니까요. 차라리 몰랐으면 안 써야 될 신경을 처음에는 이뻐한다, 사랑한다, 어떻고 하다가 나중에 좀 사귀다보니까 슬슬 고민을 풀어내는데 듣는 내가 감당 안 되는데, 도대체 나에게 3단계로 괜히 만났어, 괜히 만났어, 후회되는데, 드디어 헤어질 타이밍 찾고 있는데, 양 쪽 다 못 참어. 처음에는 서로 장점과 좋은 것만 이야기할 때, 시간가는 줄 몰랐지요. 오빠 자장면 좋아해? 사줄게. 이럴 땐 양쪽이 좋았지.

그 다음부터는 즈그 집구석 이야기하는데 과연 계속 상종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지금 결정내리기 힘든데. 조금 사귀다보니까 이게 상당히 받아들이기 곤란한 버릇들이 나오는데. 고치라고 하니까 오히려 된 통으로 당했는데. 결혼식 할 때 시끄러운 깡통 달잖아요. 내가 생각하는 의미는 깡통은 뭐냐 하면, 사람 몸만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평생 그 여자, 그 남자에 붙어있는 깡통 같은 쓰레기도 같이 용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 이거에요. 내가 지어낸 의미니까 믿지 마세요.

오늘 강의 이렇습니다. 우리는 몸만 달랑 천국 가는 거예요. “주님이여, 보고 싶었습니다. 이 땅에서 고생 많았습니다. 죽으면 우리 천국 골인 되지요? 고맙습니다.” 이것만 하지요. 주님께서는 니가 그래가지고는 오지를 못한다는 거예요. 달린 게 너무 많아. 빈 깡통들이 너무 많이 달렸어요. 남한테 비난 받는 거 싫어해. 남한테 싫은 소리 듣는 거 싫어해. 남한테 자랑 질하고 싶어 해. 남한테 지 잘난 거 과시하고 싶어 해. 이게 육신의 열매라고 하는 거예요. 육신의 깡통이거든요.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이런 게. 딸그닥, 딸그락, 온통 시끄러워요. 특히 아들 둘이 새로 왔을 때 온 집안이 얼마나 시끄럽겠나 상상해도 그래요. 같이 딸려온 깡통들이.

그러니까 이걸 개인적으로 잘못이라고 바꾸지 않고 잘못해도 책임 안 물을게, 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그걸 언제 고쳐요? 무슨 수로 고쳐요? 속에서 계속 나오는데. 이 육적인 것이. 일체 책임에 대해서 안 물을게. 그럼 어떻게 하느냐, 내가 너한테 책임을 안 물을 테니까 너도 너 자신에 대해서 포기하고 살아 달라. 그럼 포기를 어떻게 하느냐, 됩니까? 안 되지요.

그러니까 사도바울로 하여금 어쩔 수없이 죽임을 당하는 상황으로 몰아넣습니다. 사도가 잘못을 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했던 그 상황이 그대로 덮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11절에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 한 것 같이 어디 간다? 로마에서 간다. 로마 티켓 끊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로마라는 것은 사도바울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자기는 지금 로마에 갈 생각도 못 하고 있어요. 못 하고 있는데 누구의 계획입니까? 주님의 계획이지요. 자기는 로마에 최고속정 타고 가고 싶어. 로마까지는 특급 열차 타고 가고 싶어. 이스탐블에서 파리까지 가는 거. 그거 타고 싶어. 로마는 어떻게 갑니까? 완전히 뭐로 간다? 죄도 없는 죄수가 돼서 로마가고 있어요.

결국은 뭐냐 하면, 층이 두 개 있습니다. 둘이 마주보고 있는데 위 세계는 천국이고 아래 세계는 현재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은 어떤 지점이 있어요. 이건 데카르트의 좌표라는 게 있어요. 항상 2차원에서는 x와 y만 있으면 그 지점을 정확히 찾아낼 수 있어요. 네비게이션 찾을 때 x, y 거기다 축 하나, z까지 하게 되면 높이, 길이, 폭 요것만 있으면 지점이 딱 있잖아요. 그 존재하는 존재의 지점을 정할 수 있다 말이죠. 자기는 이 지점밖에 몰라요.

그런데 위 동네 주님께서 너는 예루살렘뿐만 아니고 어디 간다? 로마에 가야된다고 이미 로마에 있는 사도바울,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바울을 로마로 이동하는 그 지점을 이건 어느 세계에서 정했습니까? 위 세계에서 정해버렸지요.

그러면 사도바울은 본인의 의사를 타진하는 거예요? 부탁한다, 제발 가줄래? 이런 겁니까? 가야만 하는 거예요? 가야만 한다 말이죠. 이게 바로 성령 받은 성도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이 가야만 한다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 나중에 소급해서 알지요. 내가 로마에 온 것은 내 뜻이 아니고 주님의 뜻이다.

그렇다면 지금 재하가 오스트리아에 있는 것도 소급해서 보지요. 내가 온 것은 주의 뜻이다. 그렇게 생각하라는 거죠. 그러면 내 뜻대로 안 왔기 때문에 어떻게 됩니까? 내가 해야 될 일만 주어졌지 내가 앞으로 어떤 계획을 하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다 부질없는 허망한 꿈에 불과한 거죠.

매일같이 일거리와 숙제가 주어지는 것은 맞지만, 이렇게 해서 어떻게 된다는 것은 그것은 내 일방적인 남한테 일방적인 주장인데 그 주장에는 반드시 뭐가 포함되어있어요? 남한테 비난받지 않는 조건하에 아름다운 무지개 꿈을 상상하게 되어있어요. 이걸 라캉은 상상계라 합니다. 상상계.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요.” 이게 상상계에요. 그러면 저 사람처럼 됐다고 자부하는 것. 고게 상징계라고 하는 겁니다. 상징계.

예를 들면, 권운이라는 분이 있지요. 나이 40인데, 광주에서 국회의원 된 사람. 그 사람이 처음에 수사과에서 수사과장 이었지요. 사법고시 합격해서 특채해서 수사과장 된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압력을 받기 시작해서 압력 받았다고 고발할 때에 그 사람의 마음은 그거에요. ‘에이, 이거 때려치우고 국회의원이나 할까?’ 그런 마음이 분명히 있을 거다 말이죠. 있었으니까 나왔지요. 수사과장으로 있으면서 ‘내가 국회의원 되어야지’ 하는 것은 ‘저것 봐라, 너희들이 나를 욕하지만, 봐라, 국민들이 나를 국회의원 되라고 했잖아.’ 그 때 뭔가 복수도 되고 내가 비난 받는 것도 다 회복이 되면서 결국은 나는 떵떵 거리며 비난 받지 않는 나로 성공한 케이스를 그리워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민주당의 공천 받아서 국회의원 됐다 말이죠. 당선자 됐잖아요.

그러면 그 국회의원자리가 지가 옛날에 수사과장 했을 때 자리하고 동일한 느낌일까요? 아닐까요? 절대로 동일한 느낌 아닙니다. 왜냐 하면, 그 자리에 딱 서는 순간 ‘아! 기껏 이런 것을 원했던 거야? 이것을 내가 원했던 거야? 이런 거야?’ 이리 되는 거예요. 뭔가 목표를 정해놓고 목표가 됐다는 순간 남들은 박수를 치는데 본인한테는 허무와 허탈이 밀려오면서 ‘아! 내가 이 정도로 만족할 내가 아닌데. 그렇다면 내가 지금 뭘 또 목표로 해야 되지?’ 또 꿈을 꾸게 되는 거예요. 항상 자기 꿈을 찾아서 떠나야 돼요. 그 자리에 머물지를 못하고. 조수미 같은 사람은 성공하면 시집가야지, 처음에 이태리 유학 갈 때 얼마나 성공하고 싶었겠어요? 목적을 다 이루었어요. 다 끌어 모았어요. 그런데 어느새 나이가 50. 다 이루었는데. 과연 본인이 행복하다고 봅니까? 시집간 언니가 부럽다는 거예요. 선배가 부럽다 그러지요. 그러면 선배가 “시집을 안 갔으니까 그런 거야.” “니가 희망으로 남아있을 때 행복해. 막상 시집가봐. 시집가서 아이 둘 낳아 봐. 과연 행복한지.”

그래서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니가 로마에 가리라, 하는 순간부터 사도바울은 로마에 가는 것은 누구 뜻이다? 주님의 뜻이 되어버렸지요. 주님의 뜻이 되니까 자기는 뭐가 빠져야 돼요? 내가 생각한 꿈은 어떻게 되어야 돼요? 접어야 되지요. 접어야 되면서 무조건 로마에 가기만 한다면 내가 죄수로 가던지 풍랑이 일어서 빠져 죽던지 간에 자기는 거기에 대해서 손을 놔야 돼요.

다시 봅시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섰잖아요. 사도바울은 예수님 소속이지 본인이 예수님을 믿으면 안돼요. 이것은 본인이 예수님 믿는다는 것은 자기 꿈이 따로 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한 것밖에 안돼요. “주님이여, 내가 반드시 로마에 가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객기를 부리면 안돼요. 로마에 가는 것은 주님 소관이지 자기 소관이 아닌 겁니다.

제가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수요예배를 하게 되면 제 딸이 생중계로 예배를 참석해요. 그게 뭐냐 하면, 주님이 주신 예언은 인간이 그 예언을 이루려고 하는 그 순간부터 인간의 힘으로는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예언이 만약에 나쁜 예언이라면 보통 전개를 어떻게 합니까? “아하, 안되겠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다 피할 길이 있지.” 이리 하잖아요. 주님께서 주신 예언은 인간이 피하려고 하는 그 순간부터 이미 예언에 말려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것이 나쁜 예언, 내가 생각하지 않는 내 마음에 안 맞는 자칫하면 남한테 비난받을 수 있는 내 결과가 나쁘게 될 수 있다는 그걸 겁내서 피하는 순간 그 예언을 피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진작 그 예언이 노렸던 그 지점으로 출발한 게 돼버려요. 그 이야기했거든요.

그러니까 나중에 예배마치고 화상통화하면서 다시 딸이 질문하는 거예요. “그러면 요나의 예언은 아빠의 말처럼 그런 게 아니고 요나의 예언에 의하면 니느웨 사람들이 심판 받는다고 분명히 40일 지나면 심판 받는다고 했기 때문에 요나 선지자를 보냈는데 그들이 그 예언을 듣고 졸지에 예상 밖의 회개를 해버리니까 심판이 되는 게 아니고 심판이 취소가 됐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예언을 듣고 회개하니까 예언이 폐할 수도 있네. 그것은 어떻게 되는 거지?”라는 질문을 하는 거예요. 아~ 그래서 제가 “야, 제대로 듣기는 들었구나!” 그 점을 한 번 설명해볼게요.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굉장히 괴롭히죠. 그 때마다 성경에 뭐냐 하면, 이런 일을 행한 것은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아버지가 주신 고난 받고 십자가부활은 이것은 확정된 예언입니다. 그 예언에 대해서 제자들이 싫어하지요. “아니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런 파탄 안 됩니다. 우리가 있잖아요.”라고 하는 그 모든 것이 예수님 홀로 그 예언을 이루고 나머지는 다 떨어지도록 하는 거예요.

신약성경에서 내용은 이거에요. 예수님만 홀로 아버지 뜻을 이루고 예수님 붙들고 구원받고자 하는 것은 강제로 다 우두둑 다 떨어지게 만들어놓고 그 떨어져야 자력으로 구원되지 않았다는 것이 확정되고 난 뒤에 주님께서 자신의 영을 자신의 마음을 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이 된다면 이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고 순전히 주님의 공로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자들끼리만 모여서 뭘 이룬다? 천국을 이루는 거예요. 이게 신약 성경의 핵심이에요.

그러면 일반교회는 반대로 가르친다고 생각하면 되지요. “여러분들이 똑바로 안 살면 벌 받습니다. 벌 안 받으려면 미리 알아서 하세요.” 이것은 완전히 지옥행이죠.

주님의 예언은 이미 창세전부터 택한 자는 절대로 어떤 경우라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 다시 다 살리게 되어있어요. 그걸 딱 들을 때, 이건 내 솜씨도 아니고 내 시도와 내 조심성도 아니고 주께서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을 믿어지는 사람만 그것이 해당되는 사람이거든. 그러면 그 믿어짐이 어떻게 되어야 돼요? 내 힘으로 그걸 이루려는 모든 것이 사실은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게 아니고 남한테 비난 안 받으려는 자기 의의 기본 아담의 타고난 육적인 죄악에서 나온 사고방식이 “주님이여, 내 힘으로 구원을 따내겠습니다.” 하는 요 종교적인 사고방식이 바로 악마가 준 사고방식이다 이 말이에요.

그런 점에서 예언은 변경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아까 그 딸이 질문한 거 봅시다. 그렇다면 요나의 니느웨 사람들이 반드시 망해야 되지 않겠느냐, 라고 이렇게 질문을 해요. 그래서 내가 참 좋은 질문을 궁금한 질문을 잘 끄집어냈다고 하고 설명해줬어요. 뭐냐, 선지자가 소속이 어디냐 하면, 이스라엘이에요. 구원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구원은 이들의 몫이에요. 이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이들에게 누가 찾아왔기 때문에? 언약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뜻이고 언약이 없는 이방나라는 뭐가 돼요? 그 자체로 저주고 지옥이죠.

왜냐 하면, 이스라엘이 착하고 예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있으면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되고 언약이 없으면 가짜신과 함께 있기 때문에 우상이기 때문에 이것은 해당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요나는 어느 선지자입니까? 이스라엘 선지자죠. 그러면 이스라엘만 언약이기 때문에 이스라엘만 구원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의 포인트입니다. 이스라엘만 구원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니느웨성 죄 때문에 심판받는다는 소식을 전하거든요. 요나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요나를 니느웨에 가라고 이야기했어요. 요나는 너무나 신약 적으로 잘 알기 때문에 이스라엘만 잘 되면 되지, 남의 나라 심판 받던, 구원 받던 자기는 관계없거든요.

그래서 요나는 안 갑니다. 안가고 다른 방향으로 다시스로 가버리죠. 반대방향으로 가요. 갈 이유가 없다니까요. 이유가. 왜냐 하면, 구원은 이스라엘의 구원이기 때문에 니느웨가 심판받는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잖아요. 나쁜 짓했으면 벌 받아야지요. 그런데 딸이 요런 걸 모르는데, 예언이 도로 이스라엘로 복귀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예언을 니느웨를 위한 예언이라고 오해를 한 거예요.

요나는 뭐를 오해하느냐 하면, 우리 이스라엘은 자동적으로 구원되는 줄로 오해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이스라엘만 잘 챙기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요나가 니느웨에 심판을 전할 때 갑자기 하나님이 니느웨를 회개해가지고 심판을 면제해 버렸지요. 구원을 해버린 거예요. 면제하니까 요나가 삐져버린 거예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삐졌다는 말은 결국은 요나가 소속된 뭐가 문제가 있다는 겁니까? 이스라엘이 문제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개하기 위해서 잠시 외유하게 한 거예요. 바깥을 다니게 한 거예요. 따라서 요나가 하나님 뜻을 명하여 어기고 가는 그것이 진짜 하나님께서 내심 오해했던 하나님의 은혜의 업그레이드를 수행하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포함이 되는 겁니다.

예수 믿지 마세요. 예수 믿지 않는 그것이 내 힘이 아니고 주님께서 믿게 하심을 아는 하나의 과정이 되는 겁니다. 예수 믿지 말라 해가지고 진짜 안 믿는 사람은 원래부터 그 사람은 안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내가 안 믿어야지 함으로서 믿는 사람은 그동안 믿은 것이 내 야망, 남한테 비난받기 싫어서 주의 능력을 받아가지고 잘되게 되면 주께 모든 영광을 돌리겠다는 협상안을 제시하면서 실은 내 욕망을 달성하는데 하나님의 일을 빌리고자 하는 내 형편이 나아지는데 남한테 칭찬받는 멋있는 미래상을 위해서 약간 하나님을 도용하는데 사용했던 사기성 믿음이었습니다, 를 고백하게 하는 계기로서 믿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오늘부터 예수 믿지 마세요. 예수 믿지 않으면 처음에는 믿지 않는 게 굉장히 편해요. 왜냐 하면, 우리는 애굽의 몸으로 길들여졌기 때문에.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이상하게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시지요. 그 때 나오는 찬송가 있지요.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그 노래 부를 때 얼마나 울어야 됩니까? 얼마나 깨졌으면 사귀는 여자도 헤어지고 모든 게 깨질 때, 탄식하면서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내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사실은 집사님이 요새 많이 불러야 되는데. 너무 계획이 많아. 사건이었어요?

12절에 봅시다.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겠다. 사람은 먹는 이유가 살기 위해서 먹는데 밥을 안 먹겠다는 말은 니가 살아있는 한 살아있는 꼴을 못 보겠다. 니가 살아있으면 내가 죽을게. 이런 식이에요.

그러니까 보세요. 이것이 누구에 의해서 되는 겁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된 거죠? 그럼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만약에 사도바울이라면 우리는 어떤 마음 듭니까? “주여, 제가 또 무슨 잘못했다고? 이런 미움을 왜 제가 덤탱이로 뒤집어써야 됩니까?”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11절입니다. 네가 예루살렘에서 이런 당했던 것에 없이 반드시 어디 가서 복음 전한다? 로마에 전한다. 지금 이 상태로 가버리면 전할 복음이 없어요.

예루살렘에서 수모를 당한 상태에서 자기 힘 다 뺀 상태에서 로마에 가야 로마는 지금보다 더 혹독한 악마의 세력이 사도바울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그 악마의 세력 앞에서도 호호 하하 거릴 수 있는 사람 되려면 이런 수모를 당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작당을 한 사람이 13절에 몇 명입니까? 40명이나 있어요. 이것을 누가 들었느냐, 바울의 생질이 들었어요. 누나의 아들이. 그래서 바울에게는 누나가 있다는 게 드러나는데. 16절에 바울의 생질이 이것을 알고 사도바울에게 이야기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사도바울이 힘도 없으니까.

사도바울을 호위하는 천부장, 천부장이 뭐냐, 천명의 부하를 거느린 군대계급을 천부장이라 해요. 백부장은 몇 명이겠습니까? 100명. 천부장에게 알려서 천부장이 사도바울을 지키고 보호를 해주는 겁니다. 그렇게 보호를 하는데 보호하는 이유가 사도바울이 로마시민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고 난 뒤에 23절에 보면, 밤3시에 지금 같으면 밤9시쯤 때에 가이사랴까지 갈, 가이사랴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아까 했지요. 예루살렘이 있으면 지중해 있고, 욥바 있고, 가나지역 있고, 요단강 있고, 사해있고, 갈릴리 바다 있고, 여기서 여기까지 호위를 하는 거예요. 가이사랴에서 배타고 로마로 다른 죄수들과 호송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혼자 달렸습니까? 누구하고 달렸습니까? 죄수와 함께 달렸어요. 사도바울이 로마에 갈 때도 재판 받을 때, 죄수와 함께 하는 거예요. 죄수와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구원받는 사람은 이 땅에서 남들로부터 비난 받는 것을 너무 개의치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범죄 해놓고 죄를 지어놓고 걸리는 것은 완전히 운이에요. 속도위반하고 걸리는 것도 운이고. 경찰한테 걸리는 것도 운이고. 그 운을 운명이라고 하면 큰일 납니다. 자칫하면 도망가다가 매실 밭에서 나란히 누워가지고 죽는 수가 있어요. 왜 세상은 주어진 대로 살아야지 왜 도망치고 왜 그래요? 그게 뭐에서 나왔다? 자기는 남한테 비난받으면 안 돼! 라는 악마적인 악마가 그 사람을 그렇게 망치고 있습니다.

그 사람 뿐 만이 아니고 모든 현재 점잖게 그냥 평소에 살아가는 일반 사람도 자기 의가 있다면 정말 그것은 스스로 힘든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IP:175.♡.147.179)

14-08-21 10:28

대전140731-마16장24절(죽음)54강 - 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16장24절, 25절 해봅시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짧은 글이지만, 따지고 들어가면 엄청 어려운 이야기죠. 뭐냐 하면 십자가 지고 따라오라 하는 것은, 십자가라 하는 것은 십자가만 지는 게 아니고 죽으라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사람이 죽을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를 따져 봅시다.

사람이 죽을 수 있느냐, 사람이 자살한다고 해서 죽을 수 있느냐, 사람이 자살해도 못 죽어요. 안 죽어요. 왜냐 하면, 이 세상의 죽음은 주님이 독점해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 앞집에 살았던 부자가 죽어서 지옥에 갔지요. 그 부자가 죽었던가요? 살았던가요? 살아있지요. 그러니까 지옥에 간 부자는 자아 죽음이 불가능한 거예요.

그런데 거지 나사로는 돼요. 천국 가는 사람만이 오늘 본문이 된다고요. 왜냐 하면, 본인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해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분명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지고 이것이 인간으로서는 되지를 않습니다. 왜 안 되느냐 하면, 자기 부인이란 말이 어렵기 때문에 자기 부정이라 합시다. 자기 부정.

나는 자기 부정이다. 나는 아니다. 라고 했을 경우에 과연 성공적으로 자기 부정을 했는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자기 부정의 저촉을 안 받는 또 나가 여기에 판정을 내려야 될 게 아닙니까? “아, 요번에는 자기 부정이 잘 됐어!” 라고 하던지 “아, 오늘은 자기 부정이 잘 안되는데.” 라고 한다면 내가 나를 닮은 또 하나의 나를 따로 이렇게 설정을 해서 늘 관찰입장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은 나 말고 또 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 말고 나가 없는데, 나한테 들어오면 나는 나 말고 또 나를 내가 또 만들어 내게 돼요. 인간은. 샤르트르는 이걸 가지고 적자존재와 대자존재로 나누는데 참 어려운 말이에요.

적자존재라 하는 말은 있는 그대로만 있는 것. 돌멩이 같은 것. 타일, 선풍기 이런 것. 그런데 대자존재는 뭐냐 하면, 나를 있는 그대로를 보지 않고 내가 뭔가 대상을 만들어 놓고 대상을 한 번 거쳐서 나를 따지는 것. 그게 인간은 적자존재가 아니고 대자존재라는 거예요. 내가 되고 싶은 나를 따로 뭔가 대상으로 만들어 놓는 거예요. 이 대상은 어디서 따오는가 하면, 남들에게서 따와요. ‘아, 저 사람처럼 됐으면.’ 재아가 바이올린 켜는 것 보고 아이들이 ‘선생님처럼 잘 쳤으면 좋겠다.’ 전부다 대자존재기 때문에 그렇고, 선생님은 그걸 알기 때문에 “잘 봐! 잘 봐! 똑바로 봐! 어떻게 하는지 똑바로 봐!” 해서 “이 모습이 너희의 장래 모습이야.” 라고 일치시키려고 애를 쓰는 게 교육이라고 하는 거죠.

문제는 이 대자존재가 “나는 저 사람처럼 되어야겠다.” 할 때 그런 선택하고 고르는 것을 어디서 가지고 오느냐 하면, 바로 부모로부터 가지고 와요. 부모라든지 존경하는 선생님이라든지 그런데서 찾아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 사람처럼 바이올린 켜면 안 되는 거야, 저 사람은 제대로 켜는 거야.” 라고 교육 받는 것이 세뇌가 되어있으니까 거기에 대해서 자기의 판단력도 그 범주 안에서 이렇게 굳어져버린 겁니다. 이걸 가지고 편견이라고 하고 편견은 반드시 뭘 낳게 되는가 하면, 오만을 낳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유명한 소설에 보면 오만과 편견이란 말이 있지요. 오만과 편견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것은 그 질문은 제대로 된 질문이에요. 왜냐 하면, 내가 되고 싶은 나를 100%내가 결정하지를 못하고 나도 어디서 들은 풍월로 “나는 너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우리 부모가 원했어. 우리 아빠가 원했어.” 이런 식으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너는 절대로 이런 사람이 되면 안 되고 이런 사람이 되어야 돼!” 라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 범위 안에서 그 범주 안에서 우리는 타인에서 내가 되고 싶은 모델을 찾습니다. 모델을 찾는데,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객관’이라 합니다. 그럼 ‘주관’은 뭐죠? 내가 주관이고 객관을 찾거든요.

그러면 이 객관은 변하겠어요? 안 변하겠어요? 이건 수시로 변하지요. 수시로. 그래서 젊은 애들이 사귄다 하면 안 믿습니다. 수시로 변하거든요. 자꾸 객관의 대상이 변한다 하거든요. 대상이 변한 게 아닙니다. 본인의 주관이 이제는 시들해. 신선미가 떨어져. 본인의 주관이 바뀌니까 이것도 매력 포인트가 떨어져 버려요. 매력 인센티브가 다 달았어. 노후화 됐어요. 이걸 가지고 피곤함이라 합니다. 우리 관계가 왜 이렇게 느슨해지고 피곤해지고 잠시 헤어지는 게 좋겠다. 이리 또 나오고. 하여튼 20대는 불안정하기 짝이 없어요. 결혼해도 글쎄요. 100% 믿지 못할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변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변해야 돼요? 자기가 사라졌다고 생각해 봅시다. 저 사람은 나한테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없다고 생각하면 그러면 그 사람의 있음 자체에 대해서 내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심하니까 너무 빠른 단계니까 낮았다. 내가 많이 낮았다고 생각한다면 상대방은 나보다 더 월등한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되겠지요.

그러면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예수님께서는 뭐냐 하면, 제자들보고 하는 말이 “너희들이 나를 따르고자 하느냐?” “예 썰!” “나를 믿느냐?” “믿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들 한 번 낮춰봐라. 어디까지? 십자가 지고 죽어봐라.” 결국은 뭐냐 하면, 너희들이 알고 있는 예수는 진짜 예수가 아니라는 겁니다. 너희들은 주관이 만들어 낸 너희 입맛에 맞는 하나의 객관으로서의 객관화된 대상화된 예수에 불과하지 진짜 예수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참된 예수는 뭐냐 하면, 그 진짜 예수를 모르는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자기 제자를 삼았고 그걸 구원해 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입장이 뭐냐 하면, 전혀 구원이 안 되는 인간을 지금 구원해 내야 된다는 그 어려운 과제를 아버지께 받은 겁니다.

만약에 강아지가 이 집에 하나 있는데, 강아지가 너무 외롭다 말이죠. 그래서 어느 날 ‘저 강아지가 만약에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하는 순간 어떻게 됩니까? 그 강아지를 사람으로 만들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강아지로 사람 만드는 기계가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강아지가 자기 딸처럼 느껴집니까? 주인이 개가 되면 되는 거예요. 본인이 개가 되면 되는 거예요. 개가 되면 촌수가 맞아요. 개로 됐다고 여기다가 갑자기 뭔가 이렇게 하면 “이 개가?” 하면서 때릴 거다 말이죠. 갑자기 또 사람행세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성도 만드는 그 방식과 우리가 스스로 자신이 성도되기 위해서 낮추는 방식이 너무나 다릅니다. 왜 다르냐 하면 정반대에요. 예수님은 우리를 부인하게 만드는데 우리는 자기가 스스로 부정했다고 여기는 대단한 자아상을 점점 더 자아를 높이게 돼요. 남이 하지 못한 마음 낮추기를 내가 해 내다니? 나는 얼마나 위대하냐, 이건 반성하고 회개하면 할수록 상대적으로 누가 높아져요? 점점 더 자기가 위대해지는 겁니다. 이건 반드시 반대의 결과를 낳아버려요. 그러니 이 본문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어려운 정도가 아니고 불가능하지요. 일단 이렇게 정리합시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지고 이것은 일단 인간으로서는 안 되는 겁니다. 이것은 안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걸로 딱 정한 겁니다.

그러면 이 말씀대로 안 되는 사람이라면 구원도 없는 거예요. 지옥 가는 겁니다. 우리가 못하는데 주께서는 목표가 있어요. 개 같은 너를 반드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예수님의 자기 숙제, 자기 목표가 있는 겁니다. 아주 끈질겨요. 아주 끈질기게 하는 겁니다. 그 방식을 우리가 캐치해야 되는 거예요. 분명히 내 힘으로는 안 되는데 주님은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신 거예요. 고 되게 하실 때, 그 과정 메카니즘이라 하는데, 그 절차, 그것을 우리가 간파해 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의 예를 들어 봅시다. 아까도 했지만 자살을 할 때, 자살을 하게 되면 사람은 자기가 죽음을 맛본다고 자살하기 전에 생각했지요. 자살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이미 죽음이라는 것을 안다고 생각했던 그 죽음과 같은 선상에 있는 게 자살입니다. ‘아마 내가 이렇게 약 먹으면 저렇게 죽을 거야.’ 살아있는 인간이 죽는 죽음은 기껏 자기가 시체가 되는 어떤 남이 늙어죽는 시체, 요 시체가 인간이 알고 있는 죽음의 끝입니다. 시체 되면 나중에 백골 화 되지요. 십자가 마을에 보면 80%의 백골화 나와요. 20%에 걸려들었어요. 이것 때문에 유 병언을 알아차린 거예요. 20% 마지막 가기 전에 낚아챈 거예요. 갑자기 이 세상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거예요. 인간은 백골화 되게 되면 그것이 자기가 아는 죽음의 끝이에요.

백골, 바짝 마른 뼈, 뼈보니까 어떻습니까? 뼈 될 생각이 안 듭니까? 왜냐? 뼈는 신경조직 없지, 그러면 아프겠어요? 안 아프겠어요? 안 아프지요. 날씨가 더워도 땀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안 나지요. 세상에 그런 편한 게 어디 있습니까? 자식이 애먹이지 시가집 애먹이지, 친정 애먹이지, 제일 좋은 것은 자살하면 되는 거예요. 왜? 백골이 되게 되면 누가 뭐라고 비난해도 지는 죽어버리면 그만이지, 죽으면 그만인데 뭐.

모든 질고와 수고함과 무거운 짐을 다 벗는 방법은 자살, 바짝 매력이 당기지 않습니까? 남자친구가 헤어지고 갔다. 그럼 생각나는 것은 차라리 이 괴로움을 한강에 뛰어내리죠. 왜냐 하면, 사람은 이상하게 현재에 사는 것이 아니고 과거에 살고, 과거에 모든 것을 바친 남자가 그것을 갖고 튈 때, 내 그 과거는 도대체 어디서 찾습니까? 모든 정과 마음과, 정주고 마음 주고 다 줬는데. 배신이 때려버리면 나는 어디서 찾아요? 다 가져가버렸는데. 나는 껍데기만 남았는데. 돼지 껍데기는 맛이나 있지. 껍데기는 살 의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목적이고 계획이고 다 가져가버렸는데. 자식이 죽고 난 뒤에 우울증 약을 먹는 이유가 뭡니까? 자식이 자기 전부다 말이죠. 그러면 그 아이가 바다에 빠졌으면 팽목항에 가서 바닷물만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니 없이는 나는 못 살겠다.

왜냐 하면, 인간은 적자존재가 아니고 대자존재기 때문에. 강냉이도 아니고 돌멩이도 아니고 인간은 희한하게도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되지 못하면 우리는 마지막으로 차라리 하나의 뼈가 되고 싶고 흙이 되고 싶고 돌이 되고 싶어 해요. 대자존재에서 적자존재로 돌이키고 싶어 해요. 이걸 프로이드는 밝혔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죽음의 본능으로 움직인다. 모든 인간의 행동 속에는 뭐가 들어있다? 내가 죽어야 된다는 게 포함이 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남한테 욕할 때도 자기한테 욕하는 것이고 살인하는 것도 자기 자신을 죽이는 방법이에요. 화내는 것도 차마 자기가 자기한테 화를 못 내고 타인에게 화를 내는 거예요. 남편이 직장에 갔다 와서 “에이 씨~” 하고 밥상 엎는 것은 자기의 화를 자기에게 때리는 대신 그 분풀이를 집안 식구에게 푸는 겁니다. 그게 약점으로 걸리니까 과음하고 폭음하게 되지요. “아이고, 술 먹고 잊어야지.” 술 먹지 마세요. 이게 술 먹다가는 나, 당신을 죽이고 싶다는 표현이에요. 내 뜻대로 안되니까 차라리 내 뜻대로 안 되는 꿈속에서 사니까 꿈도 꾸지 않는 하나의 뼈가 되고 싶다. 이런 자살 충동이 이 땅에서는 화, 분노, 폭력 이리 나온다 말이죠.

그러니 누가 죽여줘야 돼요? 주님이 죽여주지 않으면 우리는 기껏해야 백골화되는 게 전부인데 이건 우리가 살아있을 때 기껏 우리가 아는 죽음의 한계가 이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오늘 말씀대로 하면 우리는 반드시 죽어야 되잖아요. 25절 보세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우리 목숨을 잃어야 되지 않습니까? 기껏 잃어봐야 백골 이것밖에 안되는데 잃은 겁니까? 안 되잖아요.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 우리를 제대로 된 죽임을 죽여주십니다. 어떻게 죽이느냐, 산채로 죽여 버려요. 산채로. 절대로 죽지 않게 하는 그런데 죽은 자로 간주하게 하시는 방법을 씁니다. 결국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이 죽음에 관한 겁니다.

어떻게 죽이느냐 하면, 제대로 된 죽음에 접근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율법이에요. 우리는 율법까지만 갈 수 있지, 율법 안에 관통해서 율법이 주는 죽음까지 도달할 수가 없어요. 예를 들면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처음부터 주께서는 죽음 이야기를 꺼냈어요.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따먹었잖아요. 멀쩡하잖아요. 주님께서 “어? 실수했네.” 이리 하는 겁니까? “저, 인간 왜 안 죽지? 분명히 내가 독약을 발라놨는데 왜 안 죽지?” 이리 합니까?

선악을 아는 그 자체가 이미 죽음 속에 들어온 셈이 돼요. 선악을 아는 자체가. 죽는 것이 목숨 끊어지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고 악마와 닮아 있는 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악마는 선악을 알아요. 악마가 죽는 거 봤어요? 악마는 지옥가도 안 죽어요. 사람도 안 죽어요. 마지막 죽은 사람들도 다시 그 날에 선인과 악인으로 다 주께서 호명을 하게 되면 무덤에서 주의 음성을 듣게 되면 죽은 자리에서 다시 다 살아나게 되어있어요. 이게 안 죽으니까 뼈다귀가 된다고? 차라리 뼈다귀 시절이 좋았지. 뼈가 힘줄 생겨서 다 일어나면 골치 아픕니다. 죽은 유 병언이 보고 싶습니까? 예수 안 믿으면 다시 만납니다. 지옥에서. 그래서 구원 파한테 편지 보내세요. 유병언씨는 죽지 않았다. 살아있다.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 분간 안 될 거예요.

지금 마귀는 그 자기가 알고 있는 죽음을 안 가르쳐주기 위해서 인간이 눈에 보이는 적자존재로서의 죽음, 대자존재의 죽음이 아니고 적자존재로서의 죽음이 마지막이라고 자꾸 그렇게 사람들에게 유포를 시켜놓습니다. 분명히 인간은 대자존재거든요. 그 대자존재까지 죽음을 끌어당겨보면 이것은 해답이 없어요. 나는 죽었는데 죽어있는 나를 쳐다보고 있으면 나는 죽은 거예요? 산거예요? 죽은 놈은 가짜고 나는 살았다고 보는 거예요. 그걸 보고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영혼이라고 해요. 영혼. 영혼이 누구 영혼입니까? 내 영혼이잖아요. 죽은 육체는 누굽니까? 내 육체라고. 그러니까 내 육체는 영혼이 아니기 때문에 잠시 육체를 빌린 거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반납해버리고 영혼이 살아있으면 이것은 내가 100% 살아있는 거죠. 왜냐, 영혼은 생각하고 사고하고 느끼고 이 모든 것은 영혼에서 이루어지니까.

그래서 불교에서는 어떻게 합니까? 죽고 난 뒤에 49제를 드리잖아요. 49제가 뭐냐 하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아버지 그만 구천을 헤매시고 이제는 갈 자리에 가세요. 죽은 자들 집합하는 그 수용소에 가세요. 괜히 와가지고 끄적 끄적하면 우리의 일이 안됩니다. 미련이 있더라도 아버지가 어머니 보고 싶더라도 엄마의 잠자는데 꿈에 나타나지 마시고 꿈에 작별인사하세요. 여보, 이제 안 나타날게. 이리해서 보내고 엄마도 마음정리하고 그게 77=49제, 49일 되는 날이에요. 무슨 귀신이 카렌다에 저촉 받아요? 도대체 인간의 상상이라 하는 것은 만화 같아요. 만화 같아. 천주교도 마찬가지고요.

보세요. 전부 다 속고 있어요. 그래서 마귀는 뭐냐, 어떤 경우라도 죽으면 안 돼. 죽으면 니가 적자존재가 되기 때문에 돌이 되기 때문에 너가 아니야. 그러나 죽기 전까지는 너기 때문에 그러니까 너는 절대로 죽으면 안 돼! 그런데 죽으면 안 된다는 그걸로 인하여 어떻게 됩니까? 점점 더 뭘 그리워하게 되어있어요? 죽으면 안 된다는 것이 이미 죽도록 되어있는 우리의 몸과 서로 충돌되기 때문에 현실입니까? 아닙니까? 현실이 아니거든요. 죽으면 안 돼가 현실이 아니에요.

우리는 뭐가 현실입니까? 날 때부터 죽음을 향하여 브레이크 없는 벤츠타고 내려가는 거예요. 완전히 내리막길이에요. 내리막길. 완전 내리막길 치닫고 있습니다. 가속도가 붙어요. 나중에 세월이 가도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너무 속도가 빠르면 치매 걸리면 멍청해져 버려요. 봄인지 여름인지 계절도 몰라요. 막 내려가 버려요. 요양병원에 다 집합돼 있지요. 그 다음에는 어디냐, 그 다음에는 마귀가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왜냐, 마귀 본인이 죽음이기 때문에. 마귀가 있는 곳에 곧 모든 죽는 자는 합세가 되어있습니다.

주님께서 죽고 난 뒤에 베드로전서에 보게 되면 음부에 갔다가 살아왔잖아요. 이미 주님께서는 음부를 이미 경험하시고 다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잖아요. 그러면 우리로 하여금 천국 간다는 것은 우리로 무슨 경험을 해야 돼요? 음부에 간 경험을 해야 돼요. 왜냐, 우리 자체가 이미 선악과 따먹은 후손이기 때문에 우리 자체가 음부의 세력이 계속 출몰하고 계속 완전히 뿜어져 올라와요. 우리가.

이게 선악에 대한 지식입니다. 점점 어려워지네요. 쉽게 해봅시다. 25절을 보게 되면,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했지요.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했지요.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라, 했지요. 이것은 사람들이 나쁜 짓했다는 말이 아니고 인간 자체가 스스로 구원하고자 할 것이고 따라서 인간 자체가 필히 스스로 구원에 실패할 것이다. 라는 겁니다.

구원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가 결국은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증명해 주는 행위라는 거예요. “그러면 구원하려고 안 해야 되겠네.” 인간은 안 할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내가 구원 안 받고자 하는 고 시도자체도 사실은 나를 그런 방식으로 구원하고자 하는 얄팍한 수법의 또 하나의 다른 수법에 지나지 않아요. 그리 되는 겁니다.

“나, 구원 안 해. 나 구원 안해야지.” 이건 완전히 치매 걸린 노인이 뻣대는 것과 똑같아요. “나, 이제 죽을래. 밥 안 먹고 죽을래.”는 제발 밥 줘, 밥 줘, 하는 소리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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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9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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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