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일그러진 목자
우리들의 일그러진목자왜 하필이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인가?지난 주에 예수님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제자들의 믿음 서열 다툼 속에 미약하기 짝이 없는 젖먹이를 앞장 세우셨음을 배웠습니다. 이 어린아이란 돌이킬 수 있어서 어린아이가 아니라 돌이킬 수 없어서 어린아이를 제시합니다. 어린아이 같이 될려고 돌이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는 이단입니다. 어른 중에 어린아이처럼 된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늘 불가능한 것을 주장합니다. 가능성이 있는 것을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얼마 전에 이웃 사랑에 대한 논쟁을 하다보니 한 가지 배운 것은 이웃 사랑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의 일반적인 성향이 예수님의 믿음에 기초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에 기초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웃 사랑은 자기 생각에 자기가 할 수 있다고 보기에 예수님의 말씀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를 마치 자신이 믿는냥 착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의 믿음의 세계를 증거하지 않고 자기의 믿음을 주장하는 겁니다.어린아이와 같이 돌이켜 된 어른은 없습니다. 그럼 뭡니까? 그 이웃 사랑을 하자 라고 주장하는 자는 영웅이 되고픈 겁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어쩔수 없이 믿음을 과시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가고 이끌어 가는 겁니다. 그들의 믿음이 말이죠. 마치 주를 사모하는 열심이 주를 죽이는 결과이듯 말이죠. 왜 이 아이러니가 생길까요? 주를 사랑하게 되면 왜 우리는 주님을 죽일까요? 사랑하는데? 왜 죽일까요? 나는 사랑해서 죽음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말리고픈데, 예수님은 그런 말리는 나를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십니다. 왜 나의 염려와 걱정을 이해 못하실까요? 분명 주님의 일을 위해서 주님을 만류하는데 왜 주님은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다고 하실까요?분명한 것은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 밀어붙이고,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의 믿음으로 밀어 붙인다는 겁니다. 일치하느냐? 전혀 아니올시다. 완전 반대입니다. 왜 그런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의 순수하기 짝이 없는 사랑이 넘치는 믿음을 거부하시고, 예수님은 수 많은 인간의 믿음을 등 뒤로 하고, 어떤 믿음의 위인도 가지 않는 저주의 길로 가십니다. 그 이유도 간단합니다. 인간의 믿음을 거짓임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은 예수님이 99마리의 양보다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모습을 통해서 인간의 믿음이 예수님의 믿음과 일치 될 수 없는 이유를 선한 목자 비유와 더불어 알아보고자 합니다.( 마 18:12-14, 눅 15: 3-7) (요 10장)(눅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우리는 천국의 비유 또 예수님께서 선택하신(믿는) 자에 대해 언급하실 때에 귀를 쫑긋 아니세울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해결해야 할 내 믿음의 문제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그런데 이 자기열심으로 가득찬 나의 큰 믿음 앞에 가로막고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참으로 아쉽게도 그냥 구원하면 참좋겠는데, 구원에는 조건이 없다고 했으니 더더욱 우리가 원하는 조건에 딱 맞는데, 늘 우리 앞에 가로막고 있는 것이 바로 구원은커녕 삐딱하기 짝이 없고, 늘 부정적이며 늘 저주스럽고 더럽기 짝이 없는 공포의 십자가가 떡 버티고 있는 겁니다. 곧 죽음이 가로막더라는 겁니다. 그 십자가는 빈공터요, 텅텅빈 저주받은 광야입니다. 여기에 대한 불만을 믿음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수도없이 늘어놓고 있습니다. 빨랑 빨랑 빠져나오지 않고 왜 머무느냐? 그러니 당신네들은 이단이다 라는 겁니다. 광야는 통과용이고, 십자가는 통과용인데 왜 뭐무느냐 말이죠. 그러나 성경은 최종목표이기에 세례요한(광야의 도끼맨)도 욕먹고, 예수님(십자가 상에서 강도 킬러)도 욕먹고(마 27:42, 막 15:31), 그 예수님에게 꽁꽁 묵여 끌려다니는 철가루 들도 같은 욕(고전 4:9)을 먹는 겁니다. 뭐물러서가 아니라 왜 빼버리냐 라고 없애버리냐 라고 주장하셔서 욕먹는 겁니다. 그래서 이 없애고픈 것을(십자가) 더 자랑하라고 하시는 겁니다.(갈 6:14)우리를 구원하실려면 이것을 없애 주셔야지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인데, 없애기는커녕 더 가차이 더 가까이 몰고 가십니다. 완전히 반대입니다. 구원이 아니라 죽이기로 작정하신 듯 합니다. 버리기로 작정하신 듯 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외친 말은 딱 하나입니다. " 이제 와서 버릴껍니까? " 그러나 이 잃어버림을 아는 자, "없음"을 아는 자는 백번 버려도 할 말 없습니다 라고 벌벌 떨면서 두려워 합니다 (오호라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아무리 봐도 버릴려는 여호와의 일관적인 행동 앞에 그들은 하나님과 씨름 합니다. 어떤 씨름요? 한 쪽은 죽일려고 달려들고, 또 한 쪽은 우쨋든간에 살아남을려고 합니다.(얍복강 창 32장) 두 씨름 장사의 싸움이 실내체육관 모래판에서가 아니라, 넓고 넓은 사막 한 복판에서 둘이 끙끙 거리며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야곱은 자기를 찾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찾습니다. 이 먼지 뿐인 광야에서 나올 것 다 나옵니다. 땀과 열심으로 안질려고 빠득빠득 버티고, 여기서 이기지 못하면 죽는다는 온갖 만감이 교차되는 초긴장의 싸움이 바로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씨름 싸움입니다. 누구든 붙잡고 싸워 이겨야하는 불운의 운명을 이스라엘은 짊어진 겁니다. 뭐든지 붙잡아서 넘어뜨려야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 마저도 넘어뜨려야 합니다. 넘어뜨렸는데도 안 죽고 다시 살아나면 그 분만 믿으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 씨름에서 드디어 이스라엘을 찾아 내셨습니다. 자 제가 왜 광야 이스라엘을 언급하냐 하며는 바로 인자(人子)는 자기 백성을 반드시 구원하시는 분이기에 그 인자가 찾는 대상이 누구냐 하면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누구든지 다 알겠죠. 그러나 문제는 인자가 찾는 그 이스라엘이 이 땅에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반문 합니다. 우리들 아닙니까? 초대교회의 새이스라엘, 오늘날 수 많은 개혁 교회, 건전한 교리와 건전한 신학의 정통주의를 이어받은 정통개혁교회가 아니냐고 반문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인자(人子)가 찾는 자기 백성은 없습니다.이 없다는 것은 우리는 절대 인정을 못합니다. 그러나 이 없음은 우리의 심각성이 아니라 인자(人子) 만이 느끼는 심각성입니다. 그래서 찾아 헤멥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여기에 많은데 왜 없다고 하시는지, 그러니 찾는 이유를 모르는 겁니다. 헤메시는 이유를 모르는 겁니다. 그저 "없음"의 심각성 보다, 이 "있음" 위에 "있음"을 더하는 생각 뿐입니다. 우리야 찾고파도 보여야 찾죠. 예수님 만이 그 없는 자를 찾으시는 겁니다. 찾는 다는 것은 예수님만이 필요성을 가지고 있지, 우리는 그가 왜 찾는지, 그럴 필요 있는지, 여기 있는 99마리 양은 예수님 눈에는 도대체 뭔지, 왜 다 놔두고 유독 없는 잃어버린 한 마리만 찾고 헤메는지 그 찾으시는 그 이유를 도대체 알 길이 없습니다.자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표현 하시면서 구약과 별개의 활동을 펼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일관된 활동을 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 백성을 반드시 찾아서 구원하신다는 인자의 활동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찾는 대상이 우리는 이 땅에 발 딛고 서있는 반드시 존재하고 눈에 보이는 우리 일거야 라고 당연히 생각 하는데, 그 인자(人子)는 이 땅에 없는 이스라엘을 찾아 헤맨다는 것이고 그 없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왔다는 겁니다.이게 도대체 뭡니까?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없는데 찾는다는 겁니다. 있는 존재를 찾아야지 찾음이 효력이 있는데, 없는 존재를 찾아서 구원한다?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 아닙니까? 그런데 이 고스트 시나락 오픈 짭짭 사운드가 성경이요. 오히려 눈에 보이고 이 땅에 발 붙이고 있는 나 자신을 이스라엘로 보게 하는 성경 해석은 엉터리 라는 겁니다.인자(人子)의 나라는 이 땅에 애초부터 없었던 자들을 찾아서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그 예로 가인의 족보는 이 땅의 존재입니다. 그러나 아벨의 족보는 없는 겁니다. 그들은 남아 있질 않고 공중 분해 된 것인지, 도대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휙 휙 사라져버린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마치 불병거 타고 하늘로 간 엘리야를 찾듯이 말이죠. 다시 말해서 인자(人子)는 이 땅의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존재론적으로 언급 조차 할 수도 없는 역사의 밖의 인물, 역사의 산물인 역사 언어 밖의 인물입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어떤 인간의 언어에도 도저히 포착 될 수 없는 하늘에서 내려온(묵시적인) 분으로써 자기 백성(하늘에서 난 자, 요 1:13)을 찾으러 오신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찾는 이유를 알 길이 없습니다. 또 그 찾는 자기 백성 조차 지금 회개해서 거듭난 존재가 아니라, 이 땅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애초부터 생명책에 기록된 하나님 께로 난(묵시적인) 자기백성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 백성인 겁니다. 인자란 분리(구분) 된 자요 인자의 백성 교회도 분리(구별)된 자입니다.땅에서 하늘로 올라갈려는 우리는 창세전에 기록된 생명책의 이름을 과거로 보고 있고, 지금의 나 자신의 신앙의 삶을 현재로 보고 있고, 앞으로 회개하고 증인이 되어 구원받아 천국 갈 자신을 미래에 두어서 시간적인(역사적인) 틀 안에서 자기 구원을 목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종교영웅을 꿈꾸며 살지만, 자기 열심으로 살지만, 오로지 자기 존재 챙기기 뿐이지만,(빌 2:21)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하늘에서 내려온 인자(人子)는 창세전에 생명책에 자기백성의 이름을 기록한 분이요, 지금의 땅에 속한 나의 믿음을 철저하게 짖밟고 죽이려 달려드는 분이요(내 속에 들어와 나를 공중 폭파 시키고 자기자신 인자의 모습만 남기심-나를 없애기가 목적, 자기 부인), 그 죽은 나를 질질 끌고 다니며 함께 지옥의 저주인 십자가를 지고 죽고, 다시 그 저주의 십자가에서 함께 사는 분이(갈 6:14) 인자라는 메시야 라는 겁니다. (빌 2: 5-11).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남.(고전 4: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잃어버림을 통해 되찾음의 모습을 지닌 분이 인자라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잃어버림도 모르니 찾아 헤메시고 되찾아 기버 뛰는 저 인자를 알 길이 없는 겁니다.그래서 자기 일과 그리스도 예수의 일이 늘 충돌합니다. 자기 믿음과 그리스도 예수의 믿음이 충돌하며, 자기의 천국과 예수님의 천국이 싸우고 있고, 자기의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님이 서로 맞지가 않는 겁니다. 자기의 교회와 예수님의 교회도 완전 반대입니다. 저런저런 자기의 예수님(메시야)과 예수님의 인자(人子)가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데요? 즉 우리는 생존, 살려고 믿는 것이고, 인자는 나와 함께 죽자고 믿음을 주시는 겁니다(이것이 아가서 주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이 땅에서 생존하다 버티다 버티다 안되면 천국에 아파트 입찰 당첨 확신이 오면 그 때에 손 놓겠다고 여유만만하게 이 땅의 연장선인 천국을 믿지만, 인자는 그런 천국 꿈도 꾸지 말라고 지금 당장 십자가로 가자고 목덜미 붙잡고 우리의 의견도 묻지 않고 막무가내로 우리 손을 뿌리치고 멱살잡고 가자고 보채는 겁니다.이런 메시야의 모습이 철저하게 인자의 모습을 띤 것은 아무도 포착 못하도록 역사가 눈치 못채도록 도저히 감잡을 수 없도록 하신 겁니다. 이렇게 보채고 때쓰고 안달해하고 성질 급하신 인자가 얼마나 다급하게 일을 처리하시는지, 아무도 모르게 자기 일을 진행 하시는 겁니다. 즉 이 땅에 없는 자, 잃어버린 자를 찾는 다는 것은 99마리에 만족치 않는 다는 겁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찾으심은 인자만의 필요성이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찾고 또 찾고 헤메고 헤메시는지, 여유로운 우리는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습니다.잃어버림 이라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인자(人子)만이 발을 동동 구르는 애탐, 마음이 타들어 가는 구구절절한 안타까움입니다.(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8)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눅 15:9)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곧 회개, 돌이킴 은 우리 속에 원래 없던 겁니다. 인자의 마음이 우리 속에 들어오니 예수님의 믿음이 우리 믿음을 밀치고 들어오니 그 잃어버림의 심각성을 알게 되는 겁니다. 왜 간절히 찾고 헤메는지. 그럼 알게 되면 그 안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됩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같이 찾아 헤멜수 있는 겁니까? 아뇨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나의 앎 자체를 부서뜨리는 분도 인자요, 찾아 헤메는 분도 역시 인자입니다. 같이 찾아 헤메고픈데요? 그 욕구 말릴수 없지만 헤메고 찾아 보세요. 영접하기는커녕 그 잃어버린자를 자기 손안에 가둘려고 할겁니다. 즉 육의 자랑을 못버린다는 겁니다. 즉 기쁨은 우리의 기쁨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의 찾은 기쁨입니다. 그럼 난 뭐냐? 에이 독선적이다 자기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네 ! 대부분 개혁교회들의 불만이 이겁니다. 잃어버림도 없어놓고 그 기쁨에 참여하겠다는 그 교만함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그럼 잃어버림이 있었으면 참여할 수 있다는 겁니까? 여기서 다들 오해하는 것이 자기 라는 존재가 자꾸 있다고 보니까? 존재해 있는 자기 따로, 예수님 따로 그래서 예수님 기쁨 따로 내 기쁨 따로 서로 각각 개인이 그 기쁨을 나누어서 각자 누리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잃어버림 자체가 뭔지를 모르기에 자꾸 자기 존재를. 예수 믿는 자기를 따로 챙기는 겁니다. 그럼 불교의 무소유 일까요? 불교의 무 사상? 무소유 하겠다는 자기 자신은 여전히 있는 겁니다. 오히려 그런 무소유 하겠다는 자신이 부처 곧 신이 되는 경지에 도달한 해탈의 상태이겠죠. 이것을 불교인이든 기독교인이든 유대교인이든 천주교인 이든 그들의 믿음 세계를 통해 추구하고픈 최종 목적인 겁니다. 신 따라잡기왜 그런 오해가 생길까요? 그것은 인자(人子)를 여전히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자는 자기의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러 온 분이 세상에나 만상에나 그만 없어져 버렸습니다. 잃어버림을 받은 겁니다. 우리는 있다고 우기면서 인자(메시야)를 기다리고 있고, "있음을 믿습니다" 라고 외치고 있으나, 성경은 바로 그런 우기는 자들에 의해 잃어버렸다고 말씀 하십니다.성경은 있다고 "있음"을 주장하는 그런 우리들에게서 완전히 지워진 분이 바로 인자(人子)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난 받는 인자 (사53장) 그럼 우리가 믿는 인자(메시야)는 뭡니까? 마 4장에 나오는 마귀가 준 3가지 선물 속의 인자(메시야)입니다. 돌을 떡 되게 하고, 성전꼭대기에서 떨어져도 천사가 손으로 탁 받쳐서 다치지 않는 슈퍼스타 지저즈, 모든 영광을 함께 나눠먹는 이 멋들어진 사이 좋은 이웃이 되자고 손내미는 것입니다. 구원자로써의 백점이것이 무엇이냐 "있음"에 "있음"을 더 있게끔 불멸 토록 하는 믿음이 마귀가 제시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행함(믿음)도 "있음"을 향한 것이 전제된 것이지, 믿음의 행함이 없음을 향할 수 없습니다.바로 그 없음을 향한 믿음이 인자만이 펼치시는 믿음입니다. 그것이 99마리의 양 아니라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입니다.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이란 양이 있기는 있으되 숫자가 적은 한 마리, 그 한마리 라도 찾을려고 하고 있기에 "있음"이 아니냐 라는 우리의 믿음이 알아낸 눈치챈 진리가 아니라, 실상 그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은 없다는 겁니다.이 "없음"을 모르면 찾음도 모르는 겁니다. 설마요? 그냥 잃어버린 것이니까 찾은 거지, 없다는 말은 좀 심한 겁니다. 논리상 맞지 않습니다. 없는데 우에 찾습니까? 숫자가 적은 것이겠죠?. 아 어렵네.그래서 잃어버림 아닙니까! 잃어버림 자체가 없어졌고, 사라졌고, 무 존재며, 의미를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없는 겁니다. 그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조주의 개입이 있는 겁니다앞에서 다룬 것 같이 예수님은 인자의 나라를 소개 하실때에 소자 곧 어린아이 같이 돌이키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간다고 했습니다. 그 소자란 작다, 미약하다, 낮은자이다. 라고 보는 것은 우리 해석이기에 그 해석 대로 낮은자 될려고, 미약한 자 될려고, 작은자 될려고, 섬기는 자 될려고 달려들껍니다. 방금 제자들이 서로 다투어 천국에서 큰 자 될려고 싸운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소자 될려고 싸우고, 미약한 자 될려고 경쟁하며, 섬기는 자 될려고 달음박질 할껍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가요? 결국은 천국에서 누가 누가 큰 자인가 입니다.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믿음에서 말씀 하시는 어린아이란 없는 겁니다. 소자도 없는 겁니다. 섬기는 자도 없는 겁니다. 낮은 자도 없는 겁니다.그럼 도대체 뭡니까? 지난 주에 섬기고 소자고 낮추고 그렇게 설명 하고선. 모순 아닙니까?네네 그랬습니다. 바로 이겁니다. 어린아이도 예수님을 말하고, 소자도 예수님을 말하고, 낮은자도 예수님을 말하고, 섬기는 자도 예수님을 말하는 겁니다. 다른 자는 없습니다. 우리는 흉내도 못 냅니다.(모든 만물은 주로 시작해서 주로 말마암아 주로 돌아가기에(롬 11:36) 주만 증거하고 다 누락(자기부인)입니다.) 섬김이란 윤리적 섬김이 아닌 주를 앞장 세우고 자신은 뒤로 탈락 시키는 것임. 그런데 그 예수님을 우리는 없애버렸습니다. 섬길려고 달려들지 말고 섬김을 받아 보세요. 내가 없애버린 그 인자(人子)로부터 딱 한번 만이라도 한 번 섬김을 받아 보십시오. 그런데 나 자신을 섬길려는 자가 세상에 어디있습니까? 없는 겁니다. 이 없음의 현실을 심각하게 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꾸 싸우는 겁니다. 왜 큰 자 될려고 싸우는 겁니다. 단 한번도 섬김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서로 섬겨서 큰 자 될려고 싸우는 겁니다. 세상에 세상에 섬길려면 그냥 섬기면 되지 자기 목숨 버릴 필요 까지야 무엇있겠습니까? 대신 저주 받고, 대신 핍박받고, 대신 처형을 받은 것입니다. 섬김은 이 분 외에는 없습니다.제발 낮아지지 마시고(불교인이 교회에 너무 많죠) 낮아짐을 당해 보시길 바랍니다. 단 한번 만이라도 낮아짐(낮추심)을 당해 보시면 다시는 낮아지기 싫을 껍니다. 내 계산에 의한 내가 참을 수 있고 견딜 수 있는 낮아짐은 종교인들의 주특기입니다. 그 보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자의 낮아짐은 어느 누구도 흉내못내는 겁니다. 보상은 커녕 고통 그 자체입니다. 인자의 낮아짐은 누구보다 싫은 겁니다. 우리가 그를 낮추어서 죽여버렸는데 우리가 죽인 그를 도리어 절 낮추어 주소서 라고 다가가는 자 없습니다. 누가 광야에서의 낮추심을 당하고 싶습니까? 고통뿐이요, 원망 뿐이요, 실망 좌절 뿐인데요. 곧 죽음입니다. 그래서 죽은 겁니다. 광야 속의 이스라엘을 비웃는 자가 누구입니까? 오늘날 교회입니다. 손가락질 합니다. 자신들은 지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고 있는 줄 전혀 모르고서 손가락질 하는 겁니다.낮음도 소자도 섬김도 한 마리 잃어버린 어린양도 "있음"을 겨냥해서 달리는 것이 아니라 "없음"을 겨냥해서 달립니다. 모든 것을 빈공터 텅텅빈 사막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광야의 십자가입니다.결국 구약도 십자가 정신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예수님은 인자를 통해 증거 하신 겁니다. 기드온의 300명의 용사를 뽑는 장면도 적군이 있고, 아군이 있고, "있음"과 "있음"의 싸움이 아니라, 적군은 있지만 아군은 없는 전쟁을 펼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아직도 많다고 해서 자꾸 짤라내고 짜르고 없애고 없애서 나온 군사입니다.(삿 7:1-8) 아직도 많으니 4절 (삿 7:2)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인간의 믿음은 반대이지요 채우고 채워서 있는 것에 더하는 방식의 믿음, 믿음 위에 믿음을 더하는 방식이지만 그래야 이길 수 있다고 집착하지만, 예수님의 믿음은 없애고 없애서 자꾸 물 없고, 양식 없는, 원망하기 뻔한, 배신 때리기 좋은 곳만 골라 가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다 도망치는 겁니다. 믿음에 믿음을 자꾸 더 없애는 방향으로 가시더라는 겁니다. 제자들이 3년 동안 예수님의 믿음의 훈련을 받고 결론은 믿음 하나도 남은게 없더라입니다. 인간의 믿어보겠다는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을 예수님이 속시원하게 밝히신 겁니다. 엽기적인 그녀보다 더 엽기적인 분입니다.예수님의 믿음이 맞나요? 절대 배신 안때리겠다는 우리의 믿음이 맞나요? 구약이나 신약이나 모든 인간의 모습은 한결 같았습니다. 다윗이라고 더 나은게 없고, 애굽의 바로 왕이라고 해서 더 못한 것 없습니다.애초부터 이 땅에 발 딛은 나는 없는 겁니다. 이 "없음"의 실체를 알려주시려고 예수님이 직접 인자가 되시어 우리 모두를 끌고 "없음"을 향해 달려가십니다. 너희의 실체는 원래 없는 거야 라고 외치시는 겁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러 헤메이시는 겁니다. 우리 기억엔 지워버린 것인데, 없이해 버린 것인데 찾아 헤메시더라는 것입니다.요셉이 구덩이에 빠지므로 이제 편애받던 요셉은 형제들에게 없어진자요 죽은자와 방불한 자입니다. 아비 야곱에게는 더 이상 살아있는 자가 아닙니다. 죽은자 곧 없는 겁니다. 없음.(창 37:33-35). 요셉은 유다의 아이를 담보로 해서 이 잃어버림의 의미를 알 때까지 뺑뺑이 돌립니다. 옳타구나 나는 틀렸고, 니가 옳도다 라고 잃어버림을 아는 자 유다가 중재(섬김)자로 나섭니다. 또 베냐민 담보물로 해서 유다와 유다 아이의 생명 결탁을 확대해서 베냐민과 야곱의 목숨까지 결탁 시켜 자꾸 "없음"을 확대해서 섬기는 종이 누구인가를 알게 할려고 뺑뺑이 돌립니다. 서로가 잃어버린 자를 찾고 있습니다. 유다는 베냐민과 담보물인 자기 아들을 되찾을려고 하고 있고, 야곱은 베냐민 마저 죽일 순 없다고 베냐민을 되찾고픈 겁니다. 그러나 없습니다. 양쪽 다 잃어버린 요셉은 기억도 없습니다. 없는 겁니다. 네네 완전히 사라진 자입니다. 하나님은 그들 속에 이미 죽은 자를 다시 살려냅니다. 진짜 잃어버렸던 자가 그들을 구원하는 겁니다. 없는 자가 뿅하고 나타나서 말이죠. 담보물인 유다의 자식, 베냐민이 구원하는게 아니라. 그들이 죽음 속으로 빠뜨린 요셉만이 그들을 구원합니다. 그 종은 바로 인자입니다. 섬기는 자는 인자입니다. 남을 구원하는자 만이 섬기는 자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앞서서 보내신 겁니다. 섬길려고, 구원 할려고, (창 44장 45장) (시 105:17)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시 105:18)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시 105: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시 105:20) 『왕이 사람을 보내어 저를 방석함이여 열방의 통치자가 저로 자유케 하였도다』 불임여성인 사라는 여자로써는 이제 없는 겁니다. 태가 닫힌 것을 왜 강조합니까? 잃어버림을, 지워진자, 선택과 상관 없는 자, 복과 상관 없는자, 없는 자라는 겁니다.(히 11: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아벨의 족보도 없음을 향해 돌진 합니다.(죽었더라 족보. 창 5장) 그 목표가 에녹에서는 진짜로 뿅하고 없어집니다. 매직쇼입니다. 세상에 없더라(창5:24) 라는 말씀 뿐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족보도 "없음"을 향해 간다는 겁니다. 인간의 족보는 있어야 전수 됩니다. 없으면 큰 일 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족보는 없음의 연속입니다(다섯 여인, 곧 이스라엘(선택된자)에게 남자에게 모든 인간에게 "없음"으로 취급받은자. 버림받은자). 인간이 끼워 맞출 수 없는 족보입니다.예수님의 믿음도 마찬가지요, 믿음의 선배(히11장)도 마찬가지요, 자기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누락"을 향해 달려갑니다. 없는 겁니다. 자꾸 없는 곳을 향해 달려갑니다. 자기를 없애는 쪽으로, 잃어버림 받는 쪽으로, 인간의 기억 속에 지워짐을 받는 쪽으로, 죽은자(소멸된)와 방불한 쪽으로, 저주를 받아 온 갖 수모를 겪는 쪽으로 가더라 라는 겁니다. 곧 십자가입니다. 잃어버림입니다. 광야교회입니다(행 7장).가짜 믿음, 곧 인간의 정통 믿음에서 만들어 낸 믿음은 "있음"을 향해 달려갑니다. 천국에 자기가 있어야 함을 믿고 달려가는 겁니다. 자기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쪽으로(제자의 큰 자 되기 다툼-마귀의 2번째 선물), 영원히 불멸하는 천국입성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입성입니다(가나안이 원수 천국인 줄 모르고 말이죠). 자기 믿음을 콘트롤하여 영원히 세세히 이름 떨칠 수 있는 모세와 같은 종교영웅이 되도록 떠미는 겁니다. 이것은 선택 중의 선택이요, 구원 중의 구원이기에, 열심만 있는 신앙이라면 누구든지 구원받는 절대 버림받지 않는 구원중심입니다. 이중 삼중 선택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있기에 선택이 가능한 겁니다. 없으면 선택이고 구원이고 인자고 메시야고 하나님이고 뭐고 다 없는 겁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믿음을 거는 겁니다.그래서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을 버립니다. 뒷감당 그런거 없는 겁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존재가 있기에 뒷감당 신경 써야 합니다. 베드로가 그래서 잡은 겁니다. 가버리면 우짜냐 라는 겁니다. 예수님 자기 자신 마저도 없음으로 달려갑니다.그러나 교회는 예수님 있을 때에 시작이 아니라, 예수님이 없어진 후에 시작입니다. 예수님이 있을 때에 같이 "있음"으로써 교회가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없고, 제자들의 믿음도 이젠 다 바닥 났고, 교회가 생길 근거를 전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없고 없고, 다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 99마리의 그 무리들도 다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고요한 사막만이 있을 뿐입니다. 아 옛날이여. 물 위에서 같이 출발했던 그 때가 좋았더라? 아닙니다. 물 속에서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다 물에 빠뜨리시므로 시작하는 겁니다. 못 일어나면 그동안의 잠간 물 위를 걸은 믿음은 가짜였던 겁니다.(모세의 출발 물 속, 이스라엘의 출발 홍해 물 속) 곧 심판 속에서 출발입니다. 죽음 속에서 출발. 피흘림 속에서 출발.그 때에 시작이다는 겁니다. 물 속에 잠길 때에 교회는 시작합니다. 물 속에 잠기면 없어져 버리는데 시작이라뇨? 그러니까 교회이지요. 교회란 없음을 지향합니다. 모든 "있음"을 부정하고 "있음"을 추구하는 모든 탐욕, 구원의 탐욕, 천국의 탐욕, 이웃 사랑의 탐욕, 이런 우상들과 붙임을 당해 싸움을 펼치는 군사들입니다. 예수님만 남기고 다 불살라 버립니다. 자기 자신도 태워버립니다(입다의 딸, 아브라함의 제사, 다니엘과 그의 세친구들). 그런데 예수님도 자기를 불태워 버렸습니다. 이제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인간에게는 믿음의 가장 반대 개념으로 오신분의 믿음이 바로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고파도 못믿는 겁니다.이것이 십자가의 지혜입니다(고전1장)인간의 믿음 속에서 펼쳐진 교리, 신학, 신앙, 교회공동체의 믿음 그 어떤 것과도 완전 반대 편에서 펼쳐지는 것이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자 이제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잃어버림이란 찾을 수 있어서 잠깐 잃어버린게 아니라,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없어진 것을 찾아 헤메신 분이 인자입니다. 그 인자가 사람들에 의해 없어짐을 당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펼쳐진 인자의 모습입니다. 그랬던 인자가 예수님에게서 다시 출발하여 똑같은 구약의 인자 모습과 같은 모습으로 없어져 버림을 당했습니다. 이 인자의 낮아짐으로 돌출된 교회는 인자의 모습을 담고 똑같이 없음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것이 십자가요. 그 십자가의 믿음이 다시 살리시는 때만 기다리는 겁니다. 이것이 선한 목자 비유와 99마리 한 마리 양 비유와 천국은 소자만 간다는 비유의 내용입니다.(불의한 청지기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꾸 소모하고 소비하고 없애는 쪽입니다, 돈(믿음)(하나님)이란 쌓고 쌓아서 더해야 하는 것인데 자꾸 무분별하게 무가치하게 소모시키더라는 겁니다. 선한 목자(참하나님)의 자기 목숨처럼 말이죠, 참믿음은 도(道) 딱듯 쌓는 것이 아니라, 자꾸 없애는 쪽입니다, 무가치하고, 지극히 작은 것에다 몸과 마음을 다 빼앗기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일관된 믿음입니다.(롬 4: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게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죽음을 강조)(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내 것은 하나도 없다)예수님!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예수님이 여기 있다고 손짓합니다. 그러나 가보면 없습니다. 우리가 개혁된 교회니 여기에 예수님이 있다고 오라고 하지만 가보면 없습니다. 가보면 이 공동체 구성원으로써 한 사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나누어 줄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냐고만 묻지, 잃어버린 자기 양을 위해 자기 목숨 버리는 선한 목자는 없습니다. 이 "없음"의 심각성을 알고, 없음을 실체를 보여주실려고 있음의 허상을 깨뜨리신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헛된 믿음을 고발하여 주시옵소서. 어떤 교회도 모든 것을 주기 위해 자기 목숨 버린 예수님만은 증거치 않습니다. 이런 우리를 없는 곳으로만 몰고가시는 그 예수님만을 남겨 두시고 다른 모든 것 다 누락 시켜 주소서. 불 태워 주소서. 예수님과 나와의 독대면하는 교회에, 목사가 그 사이에서 깝쭉대지 못하도록 다 불질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