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공식 140725
구원의 공식 140725
이름 : 이근호(IP:119.18.89.5)
서경수(IP:118.♡.139.110)
14-08-01 12:12
광주 강의(2014. 7. 25) 5-1
마가복음 1장 30절입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열병에 걸린 자에게 예수님이 찾아가셔서 손을 잡고 일으키시니 병이 나았다고 했는데, 이것을 일반화 시킬 수는 없을까요? 병든 자에게 예수님이 찾아가서 다 고쳐주신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할 일이 정해져 있지요. 예수님의 능력을 제자들도 받게 되면 그들도 아픈 사람을 고쳐주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것은 병을 고치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복음 때문에 왔어요. 일반화 시키려면 병 고치는 방식이 일반화 되어야겠어요, 복음의 내용이 일반화 되어야겠어요? 어느 쪽입니까? 병 고쳐서 천국 갑니까, 복음 때문에 천국 갑니까? 복음 때문이죠.
광주로 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종편 TV를 보는데 방송에서 걱정을 많이 해요. “유벙언이 없는데 구원파는 누구 구원하나?” 이런 이야기. 여기에 일반화가 안 되어 있잖아요. ‘유병언이 없는데 구원파의 누구원은 누가 하나?’ 라고 할 때는 일반화가 아니고 누가 있으므로 구원한다는 것이 되지요.
예수님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으면 복음은 그것으로 끝나는 겁니까? 아니란 말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베드로 장모가 병이 나았구나. 나도 아픈데 예수님이 낫게 해주시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장모의 병을 낫게 하심으로 예수님과 베드로 장모 사이에 무언가 일반화시키려면 병 고쳤다는 것이 들어가면 안 되고 복음이 들어가야겠지요. 베드로 장모가 열병이 있을 때 예수님을 초청해서 병이 나았습니다. 이것을 인간들의 눈으로 보면 복음은 없고 병 고침이 일반화되면서, ‘예수님 있으면 병 낫고, 예수님 없으면 병 못 고친다.’고 해서, 아픈 것, 아쉬운 것, 가난한 것부터 출발점을 삼을 때는 복음은 여기에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인간들이 원하는 패턴을 생각해 놓고 거기에 예수님이 도와주시면 좋겠다는 식으로 나온다면 거기에는 복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가 병 고치려고 왔느냐? 저리가라!” 이렇게 하시지는 않았지요.
복음의 일반화를 끄집어내야 예수님 안 계시고, 제자들 다 죽어도 계속 복음이 전해집니다. ‘구원파는 누가 구원하지?’ 혹시 구원 받는다면 복음으로 구원되지요. 복음으로 구원 받으면 유병언도 의미 없고, 구원파도 의미 없어요. [게그콘서트]보니까 신입생이 선배가 말을 안 들을 때는 ‘-100점. 탈락.’ 이렇게 하고, 좋으면 ‘100점.’ 이렇게 나오니까, 선배가 하는 말이 ‘의미 없다.’ 라고 나오지요.
이 땅에서 복음의 일반화가 되지 않으면 나머지 모든 것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우리 생각에는 의미 없으면 안 해야 된다고 여기는데, 그것이 아니고 우리가 뭔가 기대하는 것은 있지만 결국 복음 앞에서는 그것이 의미가 없음이 나중에 판정 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병을 고치고 그 자리에 머물면 안 되고 계속 십자가를 향하여 떠나야 되지요. 그래서 복음의 마무리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는 겁니다. 이것을 거북이와 토끼가 경주했던 산으로 생각해 봅시다. 저는 어릴 때 이 동화를 읽고 굉장히 생각을 많이 했어요. 너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이솝이 했거든요.
이 경주에서 토끼가 앞서가다가 나무 밑에서 잠을 잤어요. 그런데 거북이는 쉬지 않고 계속 달려 정상에 도착했고, 그 최종 승리 장면의 그림을 보면 거북이가 일어서서 만세를 불러요. 그 때 뒤늦게 토끼가 잠에서 깨어 땀을 흘리며 달려오지요.
여기에서 ‘졸음운전은 비극을 일으킨다.’는 교훈을 얻을 수도 있는데, 도대체 이 이야기가 말이 안 되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도 하지 않았는데 토끼는 왜 잠을 자느냐 하는 것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자면 되는데. 저는 어린 시절 이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왜 토끼가 중간에 잠을 잤는가? 제 나름대로 생각한 것은 ‘토끼와 거북이는 상대가 안 되는데 거북이가 그 사실을 모르니까 거북이에게 심하게 모욕을 주기 위해서 열심히 땀을 흘리며 달리고 있을 때 토끼는 잠을 잤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작가의 의도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게으름을 피우면 실패하고, 능력이 부족해도 부지런히 달리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을 좀 더 개념화 시키면 토끼가 경주 도중 잠을 잤다는 것은 상대방을 무시한 것이거든요.
대상에 따라서 인간은 행동합니다. 지금 그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병을 고쳐주세요.” 라고 하니까 “내가 이런 짓하려고 온 줄 아나? 저리 가! 나는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왔어.” 이렇게 할 수도 있는데, 주님은 상대에 맞춰 행동을 하십니다. 그러면 상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야, 주님 덕분에 우리 장모는 병이 나았다.”라고 하지요.
이렇게 될 경우에 이것이 바로 ‘나의 일반화에 예수님을 끌어당긴 오류’를 범한 것이 됩니다. 이걸 일반화 시키겠습니다. 진리를 안 순간 대립이 생기고, 그 대립과 진리의 차이에서 새로움이 발생합니다. 헤겔의 정반합 원리와 비슷하지요?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나는 이만하면 됐다고 하는 순간)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대립이 나온다는 겁니다.
지금 베드로 집안과 주위 사람들은 “이 노인의 병을 치료해 주세요.”라고 했을 때 그들이 지금 생각하는 진리가 뭡니까? ‘이것만 해 주신다면 당신께 감사하고 당신을 메시아로 인정하겠습니다.’라는 것이지요.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나오셨습니까?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최고 진리에 도달했다고 하는 자부심을 충족시켜 주셨지요. 그리고는 예수님이 그 현장을 떠납니다.
예수님이 떠나게 되면, 진리라고 여겼던 인간들의 속마음이 노출됩니다. 예수님이 그 자리를 떠남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알고 있는 진리가 진리 아니었음을 보여주면서 주님은 십자가의 최종 진리로 가는 겁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차이’입니다.
제 질문이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인데 왜 예수님은 피를 흘려야 하는가? 왜 피를 흘려야 되지요? ‘십자가 지고, 이 십자가 피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 얼마나 일반화시키기 좋아요? “애들아, 너희들 죄인이다. 그런데 너희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예수님이 피를 흘리셨다. 그 피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
이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진리죠. 그런데 그 진리에서 우리가 뽑아 낼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나는 이 땅에서 고생해도 죽어서는 천당 간다.’ 그리고 ‘나는 죄인이지만 의인 된다.’ 이런 것들을 원해서 그들은 예수님을 동원해서, ‘우리는 못하지만 예수님이 대신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그리고 이것을 진리라고 여겼어요.
이것이 신학적으로 분명히 맞다고 여겼는데, 주님은 이것이 진리가 아님을 말씀하심으로 대립이 발생합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것이 왜 진리가 아니지요?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그렇습니까? 아무 문제없어요. ‘예수님의 피로 죄인이 용서 받는다.’ 이게 뭐가 문제입니까? 맞는 말이잖아요.
맞는 말인데 왜 이것이 진리가 아닐까요? 그들은 지적으로만 진리를 생각했지 온 몸으로 그 진리에 빠져들지 않았어요. 간호학을 배우면 책에 어떤 식으로 환자를 간호할 것인지 분명히 나옵니다. 그러나 지식으로 배우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반드시 실습을 해야 간호사 자격증이 나옵니다.
서목사님은 사모님이 운전을 하고 목사님은 옆에서 길을 안내해서 다닙니다. 사모님은 길을 잘 모르는데 목사님은 길에 대해서는 훤합니다. 그런데 본인이 직접 운전을 하라고 하면 못합니다. 십자가 길은 비타민이 아니에요. 스쿠알랜도 아닙니다. 주님이 직접 마련하신 실습장에서 왜 우리가 죄인이며, 왜 우리 힘으로 구원이 안 되는지를 죽을 때까지 실습을 해야 됩니다.
8월 15일 장안중앙교회에서 [복음 컨퍼런스]를 한다고 강의를 해달라고 해서 강의 준비를 다 했는데, 그 교회 교사들이 우리교회 홈페이지(십자가마을 홈페이지)를 찾아와서 저의 여러 글들을 살펴본 모양이에요. 그 중에 자기들이 존경하는 박용기 목사님에 대해 제가 좋지 않게 비판을 해놓은 글을 보고는 갑자기 제 강의를 취소시켰어요.
저를 강사로 소개한 목사님이 사전에 저에게 언질을 줬어요. 이 모임을 스타 강사를 초청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이 무엇인가?’에만 집중하는 집회가 되도록 하는 것이랍니다. 그래서 그 취지에 저도 동의해서 강사로 정해졌는데, ‘진리, 복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이고, 막상 강의를 하려고 하니까 그 모임을 취소시켰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공격해도 우리 박용기 목사님은 공격하면 안 된다.’ 이게 말이 됩니까? 박용기 목사는 죄인이잖아요. 죄인이니까 당연히 십자가 앞에서 그 죄를 언급해야지요. 그런데 ‘박용기 목사를 공격하는 분은 강사로 못 부르겠다.’ 이것이 그 교회에 일반화 된 거예요. 이건 유병언의 구원파와 다르지 않지요?
만약에 우리교회 성도님이 이근호 목사를 비판하고 욕하는 분이지만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분이 있어 모시자고 하면 당연히 저는 모시자고 합니다. 단 조건이 있어요. 그 강사가 자기주장만 하고 떠나는 것은 안 됩니다. 반드시 강의에 대한 질문도 받고 서로 토론하는 조건으로 초청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자기 목사를 비판한다는 이유 때문에 일방적으로 강의를 취소시켰어요. 결국 그들은 복음, 복음을 외쳤지만 복음이 아니라 자기 교회(그리고 목사) 사수를 복음으로 생각한 거예요. 기차표까지 예매해 놓았는데 다 취소해야 할 판입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항상 내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을 진리라고 규정해 놓고, 그 범위 내에서 복음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 소원 들어줘요.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죄인을 위해 피를 흘리시고 용서한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주여, 내가 죄입니다.”라고 하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알았던 죄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생길 죄는 어떻게 할 겁니까? 그 죄는 계속 들춰져야 되는 거예요. 예를 들겠습니다. 옛날 제사장의 역할이 뭡니까? 제사를 통해 죄를 씻어주는 역할을 하지요. 그런데 히브리서에 보면 제사장이 죄인이라고 합니다. 이상하지요. 죄를 씻는 일에 죄인이 개입되면 죄가 증가할까요, 줄어들까요? 증가하지요. 이게 바로 율법의 취지입니다.
정수기는 물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죠? 더러운 물이 정수기를 통과하면 물이 깨끗해지잖아요. 그러면 그 더러운 물은 누가 감당합니까? 정수기가 감당하지요. 그러면 정수기를 깨끗하게 할 기계가 필요합니까, 필요 없습니까? 필요하지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목사를 죄인으로 세웁니다. 그러면 목사는 설교하고 목회를 하면서 뭘 느끼느냐? 내가 설교하는 그 순간부터 이미 죄는 시작된 것이다.
성경에 ‘성령으로 헌금하라.’고 나오지요. 그러면 그 말씀을 보는 순간 우리에게는 하나의 기준이 생깁니다. ‘내가 억지로 헌금하면 안 되고 성령의 인도로 자발적으로 하면 제대로 된 헌금이다.’라고 생각하면서 헌금을 할 때 이미 율법에 걸려든 거예요. 헌금하는 그 순간 본인의 죄가 드러나요. 헌금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는 헌금하는 죄를 몰라요.
헌금을 할 줄 아는 어른들은 헌금하면서 돈에 대한 집착이 드러납니다. 헌금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막상 봉투에 돈을 넣고 헌금을 하려고 하니까 “이 돈으로 과일을 사면 온 가족이 실컷 맛있게 먹을 텐데. 이번에는 과일 사먹고 다음에 헌금할까? 아니야, 헌금하면 하나님이 과일도 먹을 기회를 주시겠지.” 등등 온갖 생각들이 나요.
성경 말씀에 따라 헌금을 하는 그 순간 하나님은 우리가 돈에 대해 애착을 갖고 있었다는 죄를 밝혀내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말씀이 진리인데 우리는 그 말씀이 진리라고 납득한 순간 내 속에서 말씀과 대립되는 요소가 발생해서, “내가 죄인이구나. 주님만 의인이네.”하는 그 차이에서 내가 새로운 피조물로 확인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도 보지 말고, 말씀대로 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하시되 자신이 주님 구원의 걸림돌인 것을 인정하면 됩니다. ‘설마 이것도 죄일까?’ 하는 것이 들통 납니다. “이근호 목사는 헌금하는 것도 죄라고 한다.” 이건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헌금을 해보세요. 헌금하는 순간 돈에 대한 애착이 갑자기 확 밀려오죠. 술 끊었다고 오랫동안 안 먹고 참았는데 한두 잔 먹으면 갑자기 그 맛에 확 빨려들지요.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엄마와 아들이 늪을 지나다가 악어가 아들을 덥석 물어 납치를 했습니다. 엄마가 놀라서 “어머, 내 아들!” 하니까, 악어가 하는 말이 “아줌마, 내가 당신 아들을 죽일지 살려줄지 알아맞히면 아들을 살려주고 못 맞히면 잡아먹을게.”라고 했습니다. 그 때 엄마가 고민하다가 뭐라고 했는가 하면, “악어 너는 내 아들을 죽일 거야!”라고 했어요. 그 순간 악어는 난처한 상황이 되어버렸어요. 엄마의 말이 맞으면 무조건 아들을 살려줘야 되거든요. 그런데 아들이 먹고 싶단 말이지요.
그러나 악어가 먹고 싶다고 아들을 잡아먹으면 엄마 말이 맞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절대로 아들을 먹으면 안 되고 살려줘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살려주면 누구 말이 틀리게 되는가 하면 엄마의 말이 틀린 것이 되지요. 그러면 아들을 잡아먹어야 되지요. 이 이야기가 상당이 중요한 이야기인데 무엇과 연관이 되어 있는가 하면 선악과와 관련이 있어요.
질문하겠습니다. 아담이 선악과 열매를 먹은 것입니까, 아니면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말씀 자체를 먹은 것입니까? 사실은 선악과 열매를 따먹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이미 하나님이 하셨기에 말씀을 먹은 것이 돼요. 악마는 아담에게 선악과 열매를 따먹으라고 한 것이 아니고, ‘네가 따먹으면 죽지 않고 하나님처럼 된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마귀는 인간으로 하여금 과실을 따먹는 존재가 아니고 아예 주의 말씀을 삼켜서 말씀을 이 땅에서 없애버리려는 악마의 요구에 인간이 말려들도록 유도한 거예요. 아빠가 아들에게 “담배 피우지 마라.”고 말하는 순간 아들이 아빠 보란 듯이 담배를 꺼내 피운다면, 이것은 담배에 대한 호기심입니까, 아니면 아빠 말 자체를 씹는 것입니까? 아빠 말을 씹은 거예요.
이런 것이 동물에게는 없고 오직 인간에게만 있어요. 동물은 주는 대로 먹어요. 쓰면 뺏고 달면 삼키지요. 그런데 인간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하라고 하면 안 해요. 이게 뭔가 하면, 하나님 말씀 자체를 깡그리 모독하고 무시해 버리는 겁니다. 왜 그런가? 상대적으로 과실을 먹고 싶은 게 아니고 마귀로부터 아담이 접수한 것이 있어요.
하나님 말씀의 범주 외에 다른 범주가 악마로부터 제시되었고 아담은 그것을 접수했습니다. 악마의 범주는 ‘네가 먹는 날에는 신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가 준 약속이죠. 그러면 사람들은 “당신은 하나님 같습니다.”라는 말과 “당신은 어떻게 살아도 죽습니다.”라는 말 중 어느 말을 더 좋아할까요?
광주 충정로에를 지나는 사람에게 스티커 붙이기를 해 볼까요?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인자하십니까? 하나님 같습니다.’ 이 말이 좋으면 왼쪽에 스티커를 붙이고, ‘당신은 뭘 해도 죽습니다.’ 이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오른쪽에 스티커 붙이고.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왼쪽에 스티커가 많이 붙겠지요.
인간은 마귀가 많든 언어의 세계, 권력의 세계에 이미 종속된 거예요. 우리는 어릴 때부터 여기에 물들었기 때문에 늘 내 잘난 맛에 살고 싶은 충동이 우리 속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어요.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꼴 보기 싫다고 외면합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줌과 동시에 완성된 십자가 앞에 우리를 세워서, 우리가 무엇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지 주님 십자가 죽으심과 비교해서 차이를 느끼게 하는데 그 차이에 관심을 두게 된다면 그 사람은 성도입니다.
이 비교에서 새로움이 발생합니다.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새로움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꿨지만 만족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 진정한 기쁨을 만나게 되지요. 여기에서 차이를 느끼게 된다면, 이것은 나의 언어 범주에서 노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진리의 범주 안에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늘 확인할 때 그 사람은 주님의 증인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성령께서 탄식한다는 말이 있어요. 만약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계셔서 아들, 며느리고 모시고 사는데, 아들이 무엇을 해도 어머니가 탄식하듯 한숨만 쉰다면 살 맛 나겠어요? 며느리가 식사를 준비해서 “어머니 식사하세요.”라고 해도 깊이 한숨만 쉰다면 그런 시어머니와 같이 살고 싶겠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절대로 성령과 함께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성령은 나를 보면서 늘 탄식하시니까. 사사기 같아요. 이스라엘에게 적들이 쳐들어 올 때 처음부터 “하나님 살려주세요.”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총동원합니다. 그래서 외교정책을 펴기도 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안 돼요.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지요.
옛날에 시시하게 봤던 옆집 아저씨가 구원해 줍니다. 그동안 하나님은 힘이 없어서 구원 안 하신 것이 아니고 차이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차이 속에서 언약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차이 속에서 언약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언약을 알고 있으니까 그것이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오해를 하지요.
우리는 복음을 소유용으로 생각한 거예요. 이것이 잘못입니다.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 앞에서 우리는 날마다 해체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해체된 나를 다시 끌어 모아서 나의 힘을 자랑하려고 했단 말이지요. 이걸 주님은 해체시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계속 싸우는 이유가 뭡니까? 성경에 보면 ‘이방인들아 우리가 칠 때 여호와께서 친다고 생각하고 너는 여호와만 돌아보라.’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사명이니까 병원이고 학교가 가리지 않고 다 폭격을 합니다. 보세요. 여호와 종교는 어중간한 것이 없어요. 도 아니면 모에요. 이렇게 될 때 자신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음이 증명이 된다고 여깁니다.
우리도 극단적으로 가야 됩니다. 막 살기. 왜? 막 살아야 죄인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십자가의 극단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도 죄인인 수밖에 없습니다. 극단으로 가지 않고 ‘성령으로 헌금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이렇게 나오면 차이가 발생하지 않아요. 차이가 매워져서 등장한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그 교회는 진리를 신봉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신봉합니다.
교회를 신봉하면 교회의 역사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 역사가 문제이고 그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제가 ‘복음과 역사’라는 글을 썼어요. 십자가마을에 올릴 테니까 읽어보세요. 인간은 왜 자신을 그렇게 모를까요? 언약은 비춰보라는 거예요. 언약을 소지하라는 말이 아니고.
여자들 방에 보면 전신 거울이 있어요. 아무리 꾸미기 좋아하는 여자라도 전신 거울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없어요. 마찬가지로 언약이라는 것에 우리 자신을 늘 비춰봐야 됩니다. 아침마다 언약 앞에 서서 ‘아, 오늘도 막 살아야겠구나.’ 이렇게 비춰보고 출근을 해야 돼요. ‘오늘도 무사히!’ 이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덕분에 살았다. 끝.’ 이것은 십자가가 아니지요. 주님이 우리 병 고쳐주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아니지요. 병을 고쳐주셨지만 그 현장을 떠나셨잖아요. 그럼 왜 병을 고치는가? 병을 고쳐줘야 인간들의 본심이 폭로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요구를 들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은 자신의 욕망밖에 모른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겁니다.
자기 욕심밖에 없다는 그런 상황이 있어줘야 예수님이 모독당하는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야 할 이유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생을 살아가면서 돈 없고, 병들고, 심심하다는 등등의 이유로 못 살겠다고 합니다. 이것의 문제점이 뭔가 하면 사명감이 없어서 그래요. 오랜만에 야외 나간다든지, 과거 다녔던 초등학교 길을 걷는다든지, 어릴 때 친구를 만나든지 하면 잠시 옛날 생각에 잠기고 그 시절이 아름답게 느껴지지요.
만약 경찰관이 사건을 수사하러 갔다가 마치 과거 자신이 뛰놀던 놀이터, 느티나무에 왔다면 순간적으로 수사하는 것은 잠시 잊고 추억으로 돌아갈 수 있지요. 그런데 갑자기 무전기에서 지시가 떨어지면 다시 현실로 돌아오지요. 현실로 돌아오면 느티나무도 의미 없고 낡은 놀이터도 의미 없지요. 이게 바로 사명감입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은 나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잊게 만들어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이 세상을 경과하면서 모든 인간은 자기가 태어나면서 봤던 그 시대와 현실과 그 공간에 푹 젖어 있기에 주님은 그것을 관통하면서 쟁기로 흙을 파듯이 인간이 모든 것을 파헤칩니다. 인간은 과거의 누적된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삽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유일하게 탈출하신 분이지요.
어떤 성도님의 글에서 이것을 ‘혹성 탈출’이라고 표현했는데, 그 영화를 봐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입니다. 옛날에도 이런 제목의 영화가 있었어요. 탈출은 출애굽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구원입니다. 주님은 구원자입니다. 탈출을 시키시는데, 우리는 탈출 방법만 알아서 스스로 탈출하려고 하는데 주님은 우리가 어디에 빠져 있는가를 들춰내면서 탈출시킵니다. 즉 우리가 애굽에 속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탈출시킵니다. 본문은 베드로 장모의 병을 고치시면서 구원해 주십니다.
그러면 베드로 장모의 병이 나았는데 거기에 대해서 베드로는 예수님 십자가 질 때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어요. 이것이 바로 일반화입니다. 혜택은 혜택대로 입고, 물 위를 걷기도 했고, 오병이어도 체험을 했는데 이것이 인간의 죄를 들춰내기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었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오해했지요. 내가 상대방을 구원한다고 생각했지요. 상대를 구원한다고 자부하는 본인도 죄인이고 구원의 대상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왜 진작 몰랐을까요?
서경수(IP:14.♡.98.13)
14-08-20 09:32
광주 강의(2014. 7. 25) 5-2
마가복음 1장 32-33절입니다.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리가 문 앞에 모였더라.”
성경에서 ‘모든’이라는 말은 할 때는 제한적 범위 안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이 말은 기존의 인간들은 차별을 두고 있다는 것을 염두고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한다.”는 말씀이 디모데전서 2장에 나옵니다. 이 시대에는 인위적인 차이가 많았어요. 너는 구원 되고, 너는 구원 안 된다. 이런 구분이 많았어요. 이러한 구원에 대해서 예수님은 차이를 없애버립니다. 계급이나 외형적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속에서 나오는 것은 다 더럽습니다. 신부나 수녀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나 창녀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나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34절에는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왜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했습니까? 소위 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들에게 이 질문은 하면 그들은 대답을 못합니다. 대답 못하는 이유가 있어요. 예수님이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귀신들린 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귀신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한 이 영역에 다른 사람은 개입하지 못하고 관찰자가 될 뿐이지요. 그러면 이 관찰자는 자기 삶의 영역이 따로 있겠지요. 예수님이 귀신 쫓아내는 이 영역의 이야기를 그들에게 이야기해버리면 그들은 예수님을 오해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는 분이다.’라는 고정된 인식을 가지고 계속 예수님을 따라 다니겠지요.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구원의 길은 주님이 알아서 하시는 것이란 말이지요. 주께서 사람들을 찾아가서 구원할 자를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지, 인간이 주님을 추종하는 것은 주님이 구원하시는 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실 때 주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12제자 외에 모든 사람을 떠나가게 했지요.
무리들은 떡을 원해 주님을 따랐는데 예수님은 ‘내가 생명의 떡이다’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시니까 사람들은 다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심’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 오해되거나 훼방되지 않게 하기 위해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귀신들린 자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된 반면 그 외 사람들은 전부 관람객이고 구경꾼일 뿐입니다. 세월호가 침몰해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은 당사자이지만 그 외 사람들은 다 관람자가 되는 것처럼.
그래서 이 본문은, 십자가로 가는 길은 주님에 의해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님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을 병 고치는 분으로 알고 찾아왔는데 예수님이 병은 안 고치고 딴 소리를 하게 되면 사람들은 다 떠나갑니다. 예를 들면, ‘마트 오픈했는데 첫날 오시는 손님은 설탕 한 포대 드립니다.’ 라고 선전을 해서 갔는데 설탕은 안 주고 신제품 설명한다고 30분 넘게 이야기를 하면 설탕 받으려고 온 사람들은 다 떠나가겠지요.
주님은 사람들의 기대를 피하면서 일하십니다. 사람들의 기대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왜냐? 구원은 주님이 일방적으로 건져내는 것이지 사람들이 주님 일에 협조해서 성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구원에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되었다는 그런 오해의 소지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주님을 붙잡으려고 하면 주님은 도망가고, 우리가 자포자기하면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붙잡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만약 내가 주님을 붙잡을 수 있다면 주님은 나의 소유 대상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은 우리의 하인이 되어 우리가 마음대로 부리는 관계가 됩니다. 십일조라는 먹이를 주면서. 이것은 종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피하면서 일하십니다. 왜냐? 인간이 구축한 현실상에 주님은 절대 말려들지 않습니다.
첫째 시간에 말씀드린 것을 되새겨 봅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소통하고 관계를 맺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언어에 말려들지 않습니다. 주님은 다른 언어를 가지고 오십니다. 언약으로 찾아오시는데 같은 언약이라는 말을 사용해도 그 내용이 달라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여름 수련회 출애굽기 강의에서 할 내용인데 미리 조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원통 2개가 있습니다. 큰 원통 안에 작은 원통이 들어가 있습니다. 작은 원통을 이스라엘로 보고 큰 원통은 모세와 동행하시는 여호와 이름입니다. 출애굽 사건을 이스라엘이 일으켰습니까, 여호와 이름이 일으켰습니까?
모세가 이스라엘을 건져내는데 출구는 탈출되는 순간입니다. 제가 왜 출구가 있다는 말은 하는가 하면, 그냥 원통이고 출구가 없으면 역사가 끝나요. 그런데 출애굽 사건은 역사가 깨어지면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애굽이란 나라에서 이스라엘이 분리되면서 역사적으로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사건이 벌어지지요.
그게 뭔가? 한 나라의 맏아들이 한꺼번에 죽는 일이 예전에 있었습니까? 없었어요. 10재앙도, 홍해가 갈라지는 것도 예전에는 없었던 일입니다. 역사는 반복되는 가운데 역사가 구축됩니다. 그런데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사건이 벌어지면 역사는 찢어져 버립니다. 찢어지면 역사는 단절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이 모든 것이 애굽의 모든 역사와 지혜를 짜내도 바다가 갈라져서 절벽을 이루는 그런 결론을 인간 역사에서 도출해 낼 수 있습니까? 없지요. 어린양을 죽여 그 피를 발랐는데 그 집 맏아들은 살고 옆집 맏아들은 죽는 이 사태가 기존의 인간이 살아왔던 모든 역사를 총 동원해도 이런 일의 대비책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럼 이건 뭐냐? 역사 밖에서 사건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출구’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 있고 모세도 역사적 인물입니다. 그런데 동행하시는 바깥 원통, 여호와의 이름은 역사를 초월하신 분입니다. 역사를 초월하신 분이 동행해서 출구를 만들었다면 안에 있는 이스라엘은 들러리에 불구하고 바깥의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를 앞장세워 역사가 찢어지도록 조치하신 겁니다.
이런 일이 안 벌어지면 천국에 못 가요. 천국은 사람들이 노력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콩나물 키워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꿈에 계시를 받아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병 고침 받았다고 갈 수 있는 곳도 아니고, 귀신이 쫓겨난다고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뭡니까? 천국 가리라고 여겼던 인간들의 모든 행동들을 예수님은 예상하고 미리 차단하신 거예요. 귀신 쫓아내고, 방언하고, 병 고치면 구원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오해를 베드로도 했고, 유대인들이 이런 착각에 빠져 있었어요. 이것을 주님은 지적하시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는데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왔어요. 그래서 그들은 구원받을 것으로 믿었어요. 역사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홍해를 건너왔어도 여호와께서 출구를 열어줘야 구원을 받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등장한 것은 장대같은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역사입니다.
다른 정탐꾼들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그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전혀 다른 주장을 합니다. 반드시 들어갈 수 있다고 했어요. 왜? 하나님이 그 땅을 주시겠다고 언약하셨기에. 원통이 역사적이고 손에 잡히는 원통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원통 바깥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가 언약의 이름으로 감싸고 있어요. 또 다른 원통이죠. 이스라엘은 이 언약을 오해하고 있고, 오해한 언약을 주의 이름으로 성취하면서 차이를 내고, 그 차이를 아는 사람만 언약에 의해 구원 받습니다.
이 원통만 알면 여름수련회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고 원통에 출구가 있습니다. 허리에 이어버립니다. 출구의 모든 저주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에게 쏟아집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은 계속 망가집니다. 사도바울처럼 전신거울 앞에서 ‘나는 100% 백골이고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께서 이 저주를 쏟아버리지요.
그러면 나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고 애굽의 역사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만 이스라엘이 됩니다. 아들도 아닌 내가 아들로 인하여 아들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의 일반화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여러분이 애굽임을 보여주는 삶으로 인도하실 거예요. 8월 30일 조 집사님 딸이 진해에서 결혼식을 하는데 그 날 불신의 요소들이 폭발할 거예요. 복음과 불신의 차이를 만끽하세요.
주님 십자가 지셨는데, ‘주님 십자가 지심을 감사합니다.’라고 하면 그 십자가 지신 쓰레기를 우리의 남은 인생에 쏟아버립니다. ‘내가 왜 죽었는지 알아? 이제부터 맛 봐.’라고 하면서 쏟아 부으실 때 우리는 감사해야 됩니다. 성도가 언제 진정한 감사가 나오는가 하면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그 순간입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알 때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과분한 은혜임을 느끼게 됩니다.
새로운 영역이 생기면 차이가 발생합니다. 그 차이를 여러분이 만들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는 그 차이를 느끼면서 “이래서 내가 죄인이구나. 죄인이면 저주 받아야 하는데 왜 이렇게 편안하게 잘 살지? 아, 이것은 주님의 희생 덕분이구나!” 그래서 감사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귀신들린 자가 있고, 예수님이 있고, 관찰자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부럽다면 우리가 귀신 들린 자 되기를 원합니까? 아니지요. “주님, 잘 하셨습니다.” 박수를 칠 수는 있어도 내가 귀신 들린 자이기를 원치는 않습니다. 우리교회 오후 예배시간에 기도하는 것을 대부분 사람들이 거부해요. 그래서 제가 사전에 물어봐요. 오늘 오후에 기도순서인데 하시겠습니까? 어떤 분은 사전에 기도 순서에서 빼달라고 압력을 넣는 사람도 있어요.
마술사들이 마술을 부리는 것을 보면서 다들 좋아하는데, 막상 마술사가 청중을 무대에 불러올리면 선뜻 올라가는 사람이 드물어요. 예수님께서 귀신에게 떠들지 말라고 하셨어요. 왜? 관람자들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간증을 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남들이 기대한 것을 간증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어요. 모든 간증은 ‘이래서 나는 죄인이었습니다.’만 간증하면 되지 ‘이래서 효과 봤습니다.’ 이렇게 되면 안 됩니다.
요즘 왜 그렇게 간증이 많은지 ‘해독주스를 마시고 건강을 얻었습니다.’ 방송에 이런 내용을 떠드는 사람이 많아요. 우리교회는 요즘 효소가 유행입니다. 요즘 건강 간증들이 왜 그리도 많은지 모르겠어요. 케이블 TV는 건강 간증, 유병언 이야기가 아니면 방송국 문 닫을 것 같아요.
간증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나는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완전히 박살났습니다.’ 구원은 율법으로가 아니고, 예수 믿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으로만 됩니다.
35-39절을 봅시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
이게 갈릴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갈릴리에서 권능을 행하신 이유가 뭔가 하면, 유대인 입장에서는 갈릴리가 사마리아인 땅입니다. 북쪽 이스라엘 땅이란 말이지요. 그래서 이사야에서는 ‘어둠의 땅’이라고 했어요. 왜냐? 예루살렘에서 먼 곳이니까. 어둠의 땅에 빛이 비췬 것이지요.
흑암의 땅에 빛을 주셨다는 것이 이사야 9장에 나오지요. 이 이사야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어둠다고 여기는 곳에서 환호성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들은 빛의 혜택을 입은 거예요. 빛의 혜택을 입은 자들에게 예수님은 환영받는 인사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차이가 발생하지요. 두 개의 원통이 차이가 납니다.
예루살렘의 기존 유대 역사(안쪽 원통)와 주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새로운 역사(바깥 원통) 여기서 차이가 발생합니다. 예수님은 때가 되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갑니다. 그러면 이 차이를 가지고 들어오게 되지요. 그러면 여기서 권능을 행사하는가? 여기는 어둠이 이해하는 권능이 아닌 다른 권능을 행합니다. 왜냐? 여기서는 자칭 빛이라고 생각했고 갈릴리는 어둠이니까.
어두움(갈릴리)에서는 긍정적인 혜택을 주셨다면 빛(예루살렘)에서는 빛이라고 자부하기 때문에 오히려 교만을 들춰내는 말씀으로 다가갑니다. 그러니까 빛이라고 우기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게 되지요. 이게 바로 차이입니다. 언약의 차이가 이런 식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갈릴리와 대비가 되는 겁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이 이야기를 한 두 번 하는 것이 아니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 46절에서 나다나엘이 말했지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이 말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주여,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이렇게 되어야 해요. “명단 잘 확인해 보세요, 혹시 명단이 바뀐 것 아닙니까?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인간인데, 이런 죄인을 왜 거룩한 나라에 보내시지요?”
이 말은 차이를 극대화 하는 거예요. ‘이러니까 구원 받아야지’라는 식으로 납득이 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극복할 수 없는 엄청난 차이를 주께서 유발시키면서 우리를 구원하신단 말이지요. 이걸 아셔야 돼요. 지금 갈릴리에서 그런 혜택을 입으니까 유대인들이 삐쳐 있는 거예요. “저 어둠에 속한 인간들이 무슨 짓을 해도 어둡다. 우리는 빛이기 때문에 그런 혜택이 없어도 율법이 있기에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이 예수님 살해를 주도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대인이 되지 말고 어둠의 자식들인 것을 날마다 점점 더 깊이 느껴야 합니다. 교회도 그렇고 모든 모임에서 ‘좀 더 많이 모였으면 좋겠다. 부자 되면 좋겠다. 건강하면 좋겠다. 화목하면 좋겠다.’ 이 모든 것이 유발되도록 하나님이 자극하십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나오면 이것은 주님과 상관없는 나의 죄성이 드러나는 거지요.
우리가 어떤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따지는 자체가 분수를 잊은 거예요. 우리의 처지를 망각한 거예요. 사실은 원통이 2개 있는데 나의 원통만 있고 나의 바깥에 있는 원통은 무시하고 차버린 거예요. 바깥에 주님을 걸쳐야 되는데(그래야 나의 수치가 가려지는데) 주님은 없고 속옷만 입고 돌아다니는 꼴이에요.
“나는 살아있다. 나의 역사를 이루리라.” 이것이 이스라엘의 오해란 말이지요. 찢어버리라고 주신 역사를 우리는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어요.
40절을 보겠습니다.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문둥병자가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했는데, 누가 원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원하시면 깨끗하게 되지요. 이것은 주체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주체지요. 더 나아가서 “내가 문둥병이 걸려 주님을 만난 것은 내가 낫기 위함이 아니고 주님이 원하시면 나을 수 있는 병임을 보여주기 위해 나는 문둥병에 걸렸다.” 이것까지 생각해야 됩니다.
43-44절을 봅시다.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지금 예수님이 문둥병 걸린 자만 상대하고 외부인은 차단시켰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신 후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하신 것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병 고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그런 오해를 하지 않도록 하신 겁니다. 외부 사람들에게 깨끗한 것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율법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주체자는 예수님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만난 사람은 문둥병자입니다. 이 문둥병자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하면 안의 원통(역사)에 속하지요. 그런데 율법이 인간들이 알고 있는 역사 속에서 다뤄질 율법입니까, 아니면 율법을 만드신 주님에 의해서 다뤄집니까? 주님에 의해 율법이 다뤄져야겠지요.
그래서 주님은 문둥병자를 통해서 율법이 인간들 계통이 아니고 주님이 직접 율법과 관련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문둥병자를 이용하신 겁니다. 이렇게 되면 문둥병이 나은 것은 개인에게 큰 혜택이 될 수도 있지만 주님은 그 문둥병자를 이용해서 ‘율법은 내가 다루지 인간이 다루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알려주신 겁니다.
문둥병은 인간들이 다루는 율법 차원에서 문둥병이 걸린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다루는 율법 차원에서 문둥병에 걸린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 차원에서의 율법이 뭔가?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의해서 문둥병자가 있어야 하고, 율법 완성을 위해서 깨끗하게 되어야 하는데, 그 모든 과정과 근거가 율법에 있고, 그 완성을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쟁기로 이 세상을 파 뒤집습니다. 그러면서 ‘율법, 죄 용서, 구원은 이런 것이다.’라며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을 바깥으로 쏟아내는 겁니다.
인간들이 이해하는 율법으로는 문둥병이 걸린 것은 저주 받은 것입니다. 이 저주받은 사람을 주님이 원하셔서 낫게 했다는 것은, 주님이 낫게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실 모든 일이 문둥병을 낫게 한 겁니다. 간단한 예를 들면, 마늘 4개가 서로 대화를 합니다. “야, 너는 언제 주님의 부름을 받을 거야?”라고 하고 있는데, 주님이 “마늘 3, 이리 와!”하고 그 마늘을 어깨버립니다. 그러면 마늘이 가루가 되겠지요.
가루가 될 때 다른 마늘 3개가 “아유, 좋겠다. 너는 빨리 부름 받아서 좋겠다.”라고 하는데, 그 다져진 마늘이 어디로 가는가 하니, 소금에 절인 배추와 고춧가루가 뒤섞인 곳에 들어간단 말이지요. 그래서 김장이 완성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완성될 때 문둥병에 걸린 마늘이 여기에 관여되면서 예수님은 율법으로 죄인 된 것을 율법 완성에 의해서 용서하시는 분임을 보여주신 거예요.
그러면 남아 있는 마늘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자기들이 율법으로 알고 있는 문둥병이 용서가 되었다면 자신들은 문둥병을 낫게 할 수 있습니까? 못하지요. 문둥병이란 죄를 지어서 신의 저주를 받은 증거로 걸린 병입니다. 이 저주 걸린 병은 그들이 낫게 할 수 없었는데 예수님이 낫게 하시면 그들은 문둥병이 알고 있는 그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시는 노선과 다른 노선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저주 받은 상태입니다. 이 마늘 3개는 평생을 가도 김장에 참여되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주님이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 필요한 사람을 뽑아서 예수님의 자기완성을 증거하는 거예요. 간단하지요? 우리가 공부하기 전에 포도도 먹고 옥수수도 먹었는데 이게 바로 율법의 완성이 주는 사랑입니다. 집사님이 사랑이 아니고 집사님을 통해서 주신 사랑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우리는 저주 받아 죽어야 되는데 문둥병 걸려서라도 살아있는 것은, 주님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는 문둥병 걸린 채로 살아 있어야 하는 거예요. 우리는 살 이유가 없는데 주님의 저주와 용서를 다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죄 지으면서도 이 땅에서 살 때까지는 살아야 되고, 주시면 먹어야 돼요. 무엇을 위해서? 주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요. ‘살면서 주일이 되면 교회 가서 감사하고, 영광 돌리고, 평소에는 내 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내 생활을 한다’는 이 더러운 사고방식은 어디에서 배운 것인가 하면, 애굽에서의 못 된 버릇입니다. 내 역사 내가 만들고, 우리 가문 내가 세우고. 그러다가 자식이 물에 빠져 죽으면 대모하고 분노하고.
이게 뭐냐 하면, ‘내 삶을 네가 왜 건드려!’ 이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러지 말자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우리 역사가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살아계심을 증거하기 위해 세운 역사에 우리가 말려든 거예요.
누가복음 16장에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가 질문 할 테니 여러분에 답변해 보세요. 구원파 총무부장이 40억 횡령을 했다면 이 사람이 천국 갈까요, 지옥 갈까요? 주님이 결정할 문제지요. 그런데 이 사람은 횡령을 한 불의한 청지기입니다. 구원파 입장에서 총무부장은 천하에 죽일 놈이지요. 불의한 청지기는 천하에 죽일 놈인데 주께서 천하에 살릴 놈으로 만들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총무부장을 천하의 죽일 놈이라고 공격했던 그 인간들이 전혀 미래가 없는, 지혜가 전혀 없는, 미래를 전혀 대비 못한 존재가 되어버린 거예요. 불의한 청지기는 결국 누구 이야기입니까? 예수님 본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너희들 보기에는 천하에 죽일 놈인데 그 죽일 놈이 이 어둠의 세계에서 그 누구보다 더 지혜롭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 청지기를 ‘불의한 청지기’라고 했어요. 불의한 청지기가 지혜롭고 의롭다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됩니까? ‘의롭기를 원하느냐? 이 땅에서 불의한 청지기가 되어라.’ 이런 말입니다. ‘구원 받기를 원하느냐? 막 살아라.’ 이런 이야기란 말이지요. 왜냐하면 불의한 청지기가 불의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다 알고 있어요.
불의한 청지기가 이 땅에서 불의합니까, 의롭습니까? 분명히 불의하지요. 청지기를 불의하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 순간 자신은 의로운 자가 됩니다. 따라서 불의한 인간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그를 평가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구원의 길을 막는 꼴이 됩니다. “저 나쁜 놈!” 하는 순간 자신은 의로운 자가 되면서 죄 용서와는 거리가 먼 쪽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창기, 세리, 간음한 여인을 유대인에게 보내면서 “너희들은 이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물어요. 이들을 보냄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평소에 잘난 체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고발하는 거예요.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나는 안 아파야 하고, 나는 안 다쳐야 하고, 우리 집은 늘 행복해야 되고 --
십자가 전신 거울 앞에서 이런 요구를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성령께서 찾아오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원하시면 저를 낫게 할 수 있습니다.” 배부를 때는 우리도 이런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박한 상황이 되면 “주여, 왜 하필이면 저에게 이런 일을 주십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어떤 남자가 있는데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났어요. 나중에 그 남자가 없을 때 그 집을 살펴보니까 자기가 준 시계 때문에 살아난 줄 알고, 남자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복수 때문에 자기가 죽었다 살아난 것을 이야기 안 하고, 여자가 그것을 알게 돼요. ‘아, 저 남자가 나를 사랑하면서도 무슨 이유 때문에 일부러 숨기는구나.’
그러고 있는데 경찰이 와서 자기를 잡아가고 고문을 할 때 그 여자는 이를 악물고 “나는 모른다.”고 하잖아요. 갑자기 사랑하는 순간 자기 주체를 사랑하는 사람이 가져가 버리고 자기는 “그분이 날 사랑하기에 나는 그분을 위해서 내 한 몸 버리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겠습니다.” 이게 사랑이에요.
내가 사는 이유가 나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이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우리가 살면서 항상 느껴야 하는 것은 ‘구원은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는 것을 늘 느껴야 합니다. 왜? 우리는 타협하고, 편한 것을 좋아하고, 돈만 생긴다면 간, 쓸개 다 떼 줄 준비를 하고 있어요. 분명히 구원될 수 없습니다. 안 되는데 이미 됐어요.
이 말은 주체자가 나를 몰아 세워서 남들에게 주님만 자랑하게 하신 겁니다. “나는 이런 더러운 인간인데 주님께서 구원하셨다. 내가 예수 믿은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사용했기 때문에 구원 받게 되었다.”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앞으로 이런 일들이 계속 일어날 거예요.
굴욕적이고 비참함을 경험할 때 아파할 필요도 없습니다. 원래부터 우리는 비참한 존재였습니다. 그런 사태가 안 일어나서 그렇지 원래부터 우리는 그런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면서 늘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 드릴 제물은 이미 주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다 바쳐서, 그 바쳤다는 소식을 뒤늦게 우리에게 알려줘서 ‘이미 네 구원 문제, 용서 문제는 깨끗하게 끝났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문둥병이 100번 걸려도 마땅한 자인데 오늘도 건강하게 하시고 주님을 생각하게 하신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인줄 알고, 내가 주체가 아니고 주님이 이미 가져가셨다는 사실을 늘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 8. 20. 08:52 녹취 마침)
◁ 이전글
다음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