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출 15: 1- 6 (이스라엘 찬양)
이스라엘의 찬양2004년 7월 25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15:1-6
15:1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15:2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15:3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15:4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15:5 큰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15:6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인간 자기에 대한 입장이나 자기 것 챙기기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곧 자신의 사라짐이죠. 그리고 그 자리에 여호와만 높아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인간으로서 이것이 가능할까요?
참으로 자신을 잊을 지경으로 자기 외부의 대상에게 모든 고마움을 바치는 것은 스스로는 불가능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선물로만 가능합니다. 그 선물이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본문을 설명하기 앞서 신약 시대에 나오는 용어 '복음의 광채'를 가지고 설명하고자 합니다.
고린도후서 4:3-6에 보면,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후 4: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복음의 광채에 대해서 사실 인간들보다 더 관심 두고 있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악마입니다. 즉 인간의 힘으로 복음의 광채를 우리 마음 깊은 속까지 비치게 끌어당길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악마의 훼방을 제 때 처리할 능력이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이 본문에서 '망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이 나와있습니다. 그 '망하는 자들'이 우리들보다 양심이 나쁘다든지, 성격이 더러워서 복음을 이해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그들은 복음의 빛이 마음 속까지 내려가지 못하는 겁니까?
그것은 그들이 '망하도록 지정된 자들'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망하는 자들처럼 되지를 않았던 것입니까? 그것은 악마의 훼방을 우리 자신들이 이겨내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이 망하지 않을 자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복음의 광채가 우리 마음 깊은 어두운 때까지 파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 이 때 느낌이나 정황이 어떠할까요? 완전히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에 대한 솔직한 찬양만이 높아집니다. 마치 오늘 본문의 찬양처럼 말입니다. 여기에 적절한 표현은 바로 '꿈'입니다.
사람이 꿈을 꿀 때, 순전히 관람하는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그 꿈을 자신이 임의로 제작해 내거나 조작할 수 없는 겁니다. 자기는 그냥 잠자고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도 꿈속의 광경은 대단히 화려하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이 거들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닌 곳으로 그들은 인도 받고 있었습니다. 자기 속에서 나온 것으로 만들어지는 미래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그저 관람객이며 구경꾼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참으로 놀라워합니다. 하나님이 벌리시는 대규모 일에 입이 쩍 벌어집니다. 이처럼 오늘날 복음의 광채로 이런 원리에 따라 주어집니다. 그런데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실은 자기가 하는 일에 매진하는 사람을 보면, 복음의 광채가 그 사람의 마음까지 비치지 않은 경우입니다.
다음과 같은 핑계는 복음의 광채와 상관없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에게 저는 대단히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더라도 구원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자, 저는 내 볼 일을 봐야 하겠습니다. 구원은 이미 얻은 놓은 것이기에 이 땅에서 살면서 나름대로 보람 있는 일에 매진만 하렵니다"라고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구원은 이미 받아놓았기에 이제부터 이 세상의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계로 바꾸는 일에 전념하고 싶습니다. 이 땅에 이웃사랑을 구현하고 정의가 넘치는 이상적인 사회로 바꾸는데 있어 하나님의 종으로 나서고 싶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둘 다 복음의 광채에 충만한데서 나오는 고백이 아닙니다. 마치 꿈을 꾸듯이 말입니다. 진정한 복음의 광채는 구약 시편 126:1에도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줄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너무 좋아서 웬 횡재나 하는 식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꿈'입니다. 즉 복음의 광채란 복음 그 자체에만 매료된 상태를 말합니다. 즉 사람이 전혀 못하는 일만을 하시는 하나님에게 감탄하는 겁니다.
즉 어떤 사람이 자신이 종사하는 일에 대해서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않을 때는 순전히 자신의 노고로만 그만한 결과가 주어진다고 여기고 자기 자신에게 때로는 찬양하고 때로는 실망을 하면서 지내다가 복음의 광채가 비치고 난 뒤에는 자신의 일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고 전부 하나님께서 복음이라는 관점에서 일을 벌리시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빛난 복음의 광채가 임한 사람들은 예수님만으로 감사합니다. 자 이 복음의 광채는 오늘 본문에서 어떤 하나님의 일로 해서 주어지는 겁니까?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는 용사이시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표현은 앞으로 계속 되풀이됩니다.
이스라엘 백성 입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전쟁을 벌리시는 하나님'으로 인식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전쟁이라는 것이 일어났다면 필히 거기에 부수적으로 따져야 할 것이 많이 따라 붙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에는 적이 있어야 되지요, 전쟁에는 무기가 있어야 되지요, 전쟁에는 이유가 있어야 되지요, 전쟁에서의 최종 승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마무리되는가 하는 점도 같이 알고 있어야 전쟁에 관심 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인간들이 평소에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고분 분투하는 의식에서 탈피한 경우에는 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즉 인간이 자기 일에 집착하게 되면 밖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난리를 쳐도 별로 관심 두지 않게 됩니다. 오로지 자신의 생존을 위한 전쟁에만 관심 두게 됩니다.
실제로 교회에서 벌리는 여러 가지 기도회나 집회나 예배 같은 것이 여호와께서 벌리시는 전쟁이 아니라 이 복잡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한 타인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성경 구절을 이해하고 종교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벌리시는 전쟁이 아니라 자신이 친히 벌리는 전쟁에 여호와 하나님을 끌어당기려는 심보로서 교회 다니는 겁니다. 이렇게되면 복음의 광채가 마음에 비치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의 야망의 미래상을 자기 마음에 비추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보통 인간들이 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의 입에서 '하나님의 전쟁'에 대해 찬양이 나왔다는 것은 그들의 자질의 훌륭함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친히 인도하시고 참여시킨 그 전쟁의 승리의 여파라고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전쟁에서는 필히 다음의 세 가지 요소가 수반됩니다. 첫째는 전쟁하는 이유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둘째는 전쟁의 적이 누구냐 하는 것이고 셋째는 전쟁의 무기가 뭔가를 알아야 합니다.
전쟁의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자기 힘으로 악마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요, 전쟁의 무기란, 선악과를 따먹은 여파로 인간에게 나오는 그 어떤 것도 실패될 수밖에 없기에 예수님께서는 힘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희생으로서 자기 백성을 용서하는 것으로 선악 틀에 매여 있는 사람을 구출해 주셨습니다. 셋째는 적은 누구일까요? 바로 날마다 자신을 돋보이고 싶도록 부추기는 악마요 그것에 사주를 받고 사는 우리 자신들의 품성입니다.
따라서 진정 여호와 전쟁에서의 나오는 전리품의 혜택을 입은 자라면 결코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부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상숭배란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않을 때는 항상 고개를 들게 되어 있습니다. 탐심이 곧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끝으로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어떤 여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행실이 나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 여인을 향하여 선악 적인 관점에서 악하고 더러운 여인으로 규정했습니다.
과연 예수님도 그렇게 볼까요? 예수님은 이러한 악마적인 선악관점을 물리치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말입니다. 그 여인의 마음 속에는 마냥 복음의 광채로 가득한 것입니다.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얼굴만으로 충분합니다. 주위의 혹독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런 여인처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심정은 전쟁에서 승리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찬양만이 가득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해낼 수 없는 일을 행 하사 그것이 우리에게 용서하시는 사랑으로 주신 주님께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