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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유튜브(82강, 83강) 아들의 출현, 지옥에서 산다 140717강의누가복음

유튜브(82강, 83강) 아들의 출현, 지옥에서 산다 140717

이름 : 이근호(IP:119.18.89.5)

82강

83강

공은주(IP:211.♡.100.233)

14-07-19 14:28

82강-YouTube강의(아들의 출현)140717-이 근호 목사

제목은 ‘아들의 출현’입니다. 교회 가는 사람들의 궁금증의 하나가 지금 내 모습 또는 내 현재 자아라고 여기는 자신이 그대로 천국에도 계속 나로서 있을 수 있느냐, 그 문제에 대해서 사람들은 속으로 의문점을 갖게 마련입니다.

내가 지금 여기 있는데, 여기 있는 내가 그대로 천국에도 그대로 나로서 존립하느냐, 그 문제입니다. 그걸 영속성이라 하는데 지상에 있는 나와 천국에 있는 나와 동일한 나라면 우리는 천국에 대해서 천국에 가는데 어떤 변화라는 것이 우리한테는 필요치 않는 게 돼요. 있는 그대로 살다가 있는 그대로 천국가면 되니까.

예를 들면 누가복음 16장에 거지는 거지가 그대로 아브라함 품에 안겼고, 부자는 부자가 그대로 지옥 가는 걸로 봐서 현재 내 모습 그대로 천국에도 나라는 이 자아상이 그대로 간다고 생각하지요. 물론 천국가게 되면 지금은 땅에 속한 형상이 있지만, 그 때는 천사와 같이 하늘에 속한 형상이 있기 때문에 모양새 자체는 달라진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데, 제가 지금 문제를 던지는 것은 지금 있는 내가 그대로 가겠느냐 예요. 모양이야 물론 바뀌지요.

쇠하지도 않는 하늘의 형상 입은 데로 가는데 현재의 이 나가 그대로 천국 갈 때 나가 되느냐 하는 겁니다. 미리 결론을 내리면, 현재의 우리의 나는 갈 수가 없습니다. 바뀌어져야 됩니다. 나라는 것이 어떻게 바뀌어졌느냐 하면, 이 세상의 우리는 누구의 아들로서, 누구의 자녀로서, 딸로서, 누구의 자식으로서 관계가 엮여져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낼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염두에 둬보세요. 아버지가 따로 있어요. 하나님의 아버지는 하늘에 있고 이 지상에 오신 분은 그분의 독생자, 그 분의 아들이 여기에 온 거예요. 그리고 그 아들이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한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 천국을 ‘아들의 나라’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결론 쉽게 나왔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가 현재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가 있는 관계 속에서 우리는 자식이 되었어요. 따라서 이 관계가 끊어져야 됩니다. 누구의 자식이어서는 안 되고, 새롭게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새롭게 정립되어야 되는데, 현재 우리 이 몸은 우리 아버지의 자식으로서 있습니다.

그런데 천국가려면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어야 될 관계에 놓여있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육신의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끊어지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아들관계가 먼저 가입되어야 개입되어야 우리는 천국 가는 자아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냥 이 몸 가지고는 천국을 갈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 말씀 드리는 이유는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예수 믿습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지요?” 라고 하는 결국 천국 가고자 하는 그 주인공이 바로 현재 변화지 않는 나 자신을 두고 나 자신을 천국에다가 내가 스스로 모셔가려는 그러한 의도는 천국에서는 통하지 않고, 성경적으로 부합되지 못합니다. 잘못 된 겁니다.

예수님께서 아들로 이 땅에 왔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현재 우리를 그냥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너, 너, 너 천국 올라와!” 이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천국에 갈 수 있는 진정한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먼저 보여주고자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자부했습니다. 그래서 틀린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지옥의 백성입니다. 본인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본인이 자녀라고 부르게 돼버리면 그 관계가 너무나 강렬해서 그 자리에 예수님만 아들이라는 그런 관계가 여기에 침투해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따라서 자연적으로 예수님을 배척하게 되어있고 그렇게 되게 되면 가짜 아버지와 아들관계를 가지고 그대로 천국에 들어가려고 시도하는 것밖에 되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관계의 정립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아들로 왔다는 말은 예수님이 알고 있는 그 아버지와 아들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누구도 천국가지 못하고 지옥 간다는 것을 미리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누가복음 9장 57,58절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이 지상에서는 인자는,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로 생각되겠지만, 그 다음 이야기를 59절에 보면,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서 “어디로 가십니까?”할 때, 예수님은 어디로 가신다고 하면 되는데 뭐라고 이야기하시는가 하면, 부정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이 땅에서는 내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뭐냐 하면, 머리 둘 곳도 없는 예수님을 모실만한 자리가 형성되어질 수 없는 이 땅에 있는 사람이 “어디로 가십니까?” 라는 물음 자체가 이것은 옳은 물음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계실 곳이 못된 곳에서 “어디로 가십니까?” 하는 것은 사람들은 어떤 의도가 있는가 하면, ‘아이고 뭐, 이 땅에서 떠나서 천국가지.’ 라는 사고방식으로 천국을 가려고 한다면 그것은 천국에 합당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먼저 하시는 겁니다. 죽어서 천국 갈 것 같으면 예수님이 오실 이유가 없잖아요.

그리고 난 뒤에 고 내용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을 일부러 이야기했습니다. “너는 나를 쫓아 나를 따라 가거라.” 다시 말해서 내가 이곳에 머리 둘 곳이 없는 그곳으로 너는 나와 함께 동행 하자, 라고 초청했을 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가기는 가겠는데 먼저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소서.”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주님 따라 갈 테니까 마지막 짧은 작별인사라도 허락해주소서. 라고 언급을 하니까 가족과 작별인사 하겠다는 고 결합력, 가족한테 마지막 예의라도 베풀어야 된다는 그 결합력 자체가 쟁기를 잡고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는 사고방식이다, 이렇게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참으로 냉혹하지요. 참으로 예수님께서 말씀이 참 무섭지요. 예수 믿는다, 믿는다, 흔히들 말하는데 예수님의 이런 말씀까지 수용하는지 참으로 제가 의심스럽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가족과 작별하고 주님 따르겠습니다. 라는 그것조차도 예수님을 따르는 그 자세가 아니라는 겁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이왕 주님 따를 거 이제는 마지막 작별인사 정도는 충분히 용납될 수 있잖아요. 이제는 영영히 헤어지는데. 인륜적인 마지막 예의가 그런데. 가족에 대한 예의. 자기를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자기를 찾고 있는 그 분에게 마지막 베풀 수 있는 최소한의 사람이 짐승이 아니고 동물이 아니라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그런 예의마저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것, 그런 행동 속에 하나로 포함이 된다고 했을 때, 도대체 주님의 말씀하시는 그곳은 주님이 가고자 하시는 그곳은 어떤 곳입니까?

바로 아들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기존에 알았던 아버지와 아들관계가 이것은 철폐되고 전부 다 해체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쉽게 말씀드려서 우리는 애초부터 기존의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것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최초부터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기 위해서는 잠시 육신의 아버지 몸으로부터 태어났다고 인정을 하고 수용해야 된다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세상과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새로운 하늘나라에 살겠다가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잠시잠간 육신의 부모 밑에서 양육 받았다, 라는 식의 관계가 바로 예수님께서 아버지와의 보여줬던 아버지와 진짜 아들과의 관계가 부합되는 관계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제자들에게 소급해서 그 관계를 이제는 다시 이해하고 다시 보게 하시는 겁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어디 출가한다고 머리 깎고 절에 중 되는 것처럼 이제는 부모님과 헤어져 아픕니다, 라든지 수녀 된다고 엉엉 울면서 부모와 억지로 떨어져서 수녀원에 가는 그런 식이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가 있을 자리에 있지 않고, 잠시 잠간 세상의 부모한테 양육 받았다는 관계가 있을 때, 바로 그 자아만이 천국에 입성할 수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공은주(IP:211.♡.100.233)

14-07-19 14:29

83강-YouTube강의(지옥에서 산다)140717-이 근호 목사

제목은 ‘지옥에서 산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시는 모든 취지들이 상당히 날카롭게 이 세상과 그리고 예수님만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분류를 하고 나누는 쪽으로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마태복음16장3절에도 그런 말씀 나오는데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대해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아주 먼저 전제를 하고 그 위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멘트, 모든 복음의 씨앗을 거기다가 뿌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천국의 말씀이니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주님은 당연히 배척하고 반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호응한다, 예수님을 반긴다, 하고 나왔던 그 군중들도 사실은 상당히 수상한 구석들이 많지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라든지 안 그러면 하늘나라 높은 자리에 앉겠다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다닐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합니다. 예수님의 12제자도 그리했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의 교인들도 마찬가지고요.

따라서 예수님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보는 세상관점에 같이 동류해서 우리가 그야말로 지금 지옥 한가운데서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먼저 염두에 두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나오는 논리들이 이런 거죠. 첫 번째, 어째서 이 세상은 지옥이냐, 두 번째, 그러면 나는 과연 이 지옥에서 지옥답지 않은 사람이냐, 아니면 지옥을 만드는데 일조를 하고 있는 같은 망하리라는 지옥백성이냐, 그런 것이 그 다음부터는 죽죽 이야기가 이어져야 되겠지요.

세상 자체가 지옥이라면, 우리는 지옥의 자식이고, 지옥의 생산물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생각을 고상하고 경건하게 거룩하게 가져가도 그것조차도 지옥에서 만들어낸 사고방식의 일부일 따름입니다.

자력으로 뭔가 깨쳐서 주님을 영접해서 구원받는다. 이런 경우는 이런 일은 없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전체적으로 이야기하기를 그것은 우리가 교육을 잘 못 받았다든지 나쁜 환경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부모로 전수받은 이 육신, 이 육신 자체가 바로 죄가 지배하고 왕 노릇하고 있는 육신이기 때문에 이 육신을 가지고 아무리 경건과 거룩을 표방해도 결국은 이 육신이 요구하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로마서7장에서 사도바울이 언급한 것처럼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원한다할지라도 이 육신에 또 다른 법이 있어서 우리를 죄의 아래로 끌어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의 죄라 하는 것이 그냥 나에게만 영향을 주는 죄가 아니고 옆 사람에게, 이웃에게, 이 세상에게, 모두 파급이 가능한 그러한 힘을 발휘하는 죄가 되는 겁니다.

너, 나가 어울려서 지옥을 만드는 겁니다. 이런 입장에서 예수님의 12제자를 파송하시면서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비로소 이해가 되지요. 마태복음11장 20절에 보면,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그리고 24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취지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곳곳에 전도를 하고 권능을 베풀었지만, 이 세대가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지만,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요.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예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오늘날 성도가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마치 농부가 쟁기를 들고 밭을 뒤집는 거죠.

밭은 굉장히 좋아 보이지만, 다시 밭을 뒤집어서 속에 있는 것이 겉으로 나오고 겉이 속으로 반대로 뒤집어버리면 속에서 온갖 구더기와 시커먼 것, 그리고 더러운 것들이 그대로 바깥에 그냥 노출되지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면서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만약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했습니다.

소돔 땅이라 하는 것은 창세기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맨 그 땅이죠. 소돔과 고모라라는 도시가 말해주는 것은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인상이 어떤 인상이냐 하면,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퍼부을 수 있는 최고의 악의 참혹한 징벌을 받은 도시, 그것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너무나 참혹하고 그리고 자기가 사는 마을은 너무나 멀쩡하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소돔과 고모라는 우리보다 훨씬 죄를 많이 지었을 것이다. 동성애라든지, 음란한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라고 이렇게 단정 짓지요.

따라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만큼 죄를 짓지 않는다면 설마 유황불같이 그렇게 혹독한 참혹한 징벌은 없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지금 내가 전하는 이 복음을 받지 아니하면 이 말이 망하던 안 망하던 상관없이 그 자체가 소돔 땅보다 훨씬 더 심한 심판을 받아야 될 대상 속에 포함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는 관점이에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지금 장사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장사하는 사람들은 “이 물건 한 번 집에다 사보세요. 이 물건 사보세요. 이 기계 아토피 고치는 기계인데 집에 한 번 들여놓으세요. 이것은 정수기인데 집에 한 번 사용해 보세요.” 라고 합니다.

자,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옛날 조선시대 때, 고려시대 때나 옛날 삼국시대 때에 정수기가 꼭 필요합니까? 아토피 고치는 기계가 필요해요? 냉장고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들은 이렇게 살았어요.

옛날에는 내가 농사짓고 살다가 아쉬운 것이 있으면 내가 고등어가 먹고 싶다, 하면 내가 곡물하고 고등어하고 바꿔치기 해서 아쉬운 그 미진한 부분만 채워서 고기가 먹고 싶다하면 고기만 사 먹으면 되지요.

그런데 지금 시대는 자본주의 시대입니다. 자본주의 시대가 뭐냐 하면, 생산한 것을 파는 시대가 아니고 소비를 부추겨서 없는 소비까지 만들어서 그 소비를 겨냥해서 새롭게 더 과잉 생산할 때, 잉여, 남아도는 자금과 이익이 창출되는 그런 구조로 돌아가는 경제구조가 자본주의 경제구조입니다.

그렇다면 모르는 사람보고 “건강기계, 헬스기계 들여놓으세요?” 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그 사람은 헬스기계 그런 말하기 전에는 헬스기계가 필요한지를 몰라요. 그런데 말로서 그럴듯하게 “헬스기계 들여놓으세요.” 또는 “보험 하나 들여놓으세요. 보험은 이런 점이 이득 있습니다.” 라고 하니까 그 소리 듣는 순간 갑자기 그 사람한테 욕심이 생겨가지고 “그래, 보험 하나 들어. 그래, 헬스기계 들어.” 이렇게 돼버리면 필요치 않는 물건과 사물을 자꾸 사고 그것도 빚내서 사게 돼요.

그게 자본주의 시장이고 우리는 그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데 누가 착한 사람입니까?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사람이 모든 것이 상업인데 상업한다는 것은 없는 소비까지 유발해야 되는데 상품을 팔아먹어야 더 많은 이익인데, 지금이 어디 조선시대도 아니고 원시시대도 아니고 자꾸 우리의 탐욕은 부여받은 탐욕이고 듣고 싶지 않도록 계속 들려오는 그 탐욕을 가득 쌓여있는 입장에서 경건이라고요? 거룩한 삶을 산다고요?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상대방을 꾀어서 물건 하나 필요 없는 물건 하나 더 팔아서 그 판돈으로 생계유지하는 그 구조에서 누가 착합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 시대에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10장 28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요 예수님의 인식을 지금 우리의 인생관으로 여기다가 장착을 하는 거예요.

몸이 살려고 하니까 매사가 두려운 겁니다. 그러나 몸은 당연히 죽어야 된다고 한다면 모든 게 즐겁고 감사할 뿐입니다. 왜냐 하면, 죽어야 될 몸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는 자를 그것을 내 몸보다도 몸과 영혼을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는 입장에서 살아라, 고 주께서 이 몸을 살려준다는 그런 관계 속에서 살아가니까 안 살고 싶어도 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주님을 항상 생각하라는 그런 말씀에 입각한 그 말씀에 의해서 살게 되니까 그 점을 생각할 때, 하루, 하루 사는 것이 감사할 뿐이죠. 이것이 지옥에서 사는 성도의 바른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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