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주의 140715
경건주의 140715
이름 : 이근호(IP:119.18.89.5)
한윤범(IP:14.♡.134.60)
14-07-18 08:50
20140715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5-경건주의
(강의:이근호 목사)
교재에 보면 경건주의는 1690~1740년에 독일 개신교 안에서 일어난 신앙개혁운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운동이 실시됐다는 말은 적이 있다는 거예요. 이래서는 안 된다고 추궁하고 싶은 대상이 있는 겁니다. 기독교 정통주의에 대해서 반대하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개신교 루터, 칼빈에서 이야기했잖아요. 나름대로 완벽하지요. 완벽에 대해서 도전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개신교가 천주교의 잘못된 것을 지적하면서 나름대로 완벽을 기한 것이 개신교, 기독교란 말이죠. 그런데 기독교 내부에서 기독교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있는 바탕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했는데 약 150년 후에 개신교에 문제 있다고 시비 걸고 경건주의란 이름으로 운동이 시작되는 겁니다.
기독교는 100% 완벽하다. 완벽하다는 것은 그 내부에 어떤 오류가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오류가 있다면 성당 나가지 교회 나올 이유가 없단 말이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완벽한 진리체제로 구축돼있다. 이미 사전에 흠은 다 제거돼있는 겁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나는 진리라고 했지요. 이것이 역사 속에서 기독교가 진리라고 돼있습니다. 물어보겠습니다. 기독교(회)가 진리입니까, 예수님이 진리일까요? 기독교가 진리라면 성경에 나와야 되는데 성경에는 안 나오지요. 성경에서 진리라고 하지 않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진리를 따로 이야기하지요. 내가 곧 진리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진리라면 문제는 간단하지요. 예수님이 진리고, 곧 길이고, 곧 생명이잖아요.
길과 진리, 생명 되신 예수님의 발언에 대해서 책임과 관리와 적용은 누구 담당이지요? 교회, 기독교 담당이다? 아니면 성당 담당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진리 됨을 그 자체가 진리고 영생의 길이 됨을 책임 있게 적용시키는 그 책임자가 누구십니까? 개신교 목사들이에요? 아니면 평신도들입니까? 누가 됩니까?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이 책임자지요.
그 말은 사람은 그 자리에서 빠져 나와야 되지요.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집안에 아빠가 바깥에서 돈 벌어오고 식구들은 그 돈으로 생활한다고 할 때 돈 버는 책임자는 아빠지요. 그런데 아빠가 일곱 살 딸에게 돈 벌어오라고 한다면, 책임자가 무책임하게 딸에게 앵벌이 시키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이런 건 어떻습니까? “아빠, 유치원 그만 다니고 이제부터 사업해서 돈 벌게.” 이렇게 나온다면, “아니고 내 새끼. 기특하기는 딸 하나 잘 키웠네.” 이렇게 되는 겁니까?
나는 우리나라에서 네 살 먹은 딸 중에서 돈을 제일 많이 버는 딸은 추성훈의 딸, 추사랑이라고 봐요. 그렇게 그 아이가 대체 불가한 모델로 등장했단 말이죠. 추성춘의 딸이 돈을 수억 벌었을 때 가정에서 가장인 아빠가 돈 버는 책임자인데 가장을 바꿀까요? 그럴 순 없단 말이지요.
다시 할게요. 경건주의가 무슨 운동이냐 하면, 개신교에 문제 있다는 거예요. 정작 기독교는 완벽한 진리체제가 갖추어진 겁니다. 왜냐하면 천주교에서 개신교 될 때 미흡한 것은 다 제거한 상태에서 앞으로도 미흡할 요소는 없을 거라는 상태에서 기독교를 만들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진리라는 말이죠. 그러면 제가 시비 거는 거예요. 기독교가 진리라면 과연 성경책에 들어있느냐는 문제입니다. 성경에서 진리 책임자는 예수님이지요. 예수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을 때 그것을 전달받은 자가 영생 얻는 책임자가 사람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예수님이 책임자지요.
그런데 기독교 목사나 천주교 신부가 자신이 책임감을 느낀다는 것은 문제 있는 겁니까, 문제없는 겁니까? 문제가 있지요. 추성훈의 딸이, “아빠, 이번 달에는 몇 억 못 벌었어.” 이러면 문제가 있는 거예요. 교인들이 모여서 교회 걱정한다는 것은 문제 있어요. 그러니까 교회는 모여서 걱정 안 하면 돼요. 우리는 이래서 걱정 안 하는 종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예배 시간이란 말이죠.
어떤 집사님이 방금 이혼하고 왔다. 또 어떤 집사님은 아이가 일곱 살인데 암에 걸렸다. 그래서 모였어요. 모여서 예배드리고 난 뒤에 결론은 뭐냐? 그것이 전혀 걱정거리일 수가 없음을 항상 재차 확인하는 모임이 예배고. 그 모임이 걱정거리가 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혼자 있을 때는 자기 인생 걱정되다가 교회 이름으로 막상 모여서 말씀을 듣다보니까 뭘 새삼 파악한 거예요? 진리나 영생에 대해서 최종 책임자에서 자기가 빠져야 된다는 것
이걸 간추려서 이야기하면,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빠져야 돼요. 머리 빠지는 것에 대해서 걱정을 하지 말아야 된다 이 말이죠. 만약에 빠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고 예수 믿는 자신을 철석같이 믿는 우상 숭배자가 되는 겁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교회사나 경건주의나 기독교나 천주교나 공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재에 보면, [19세기는 ‘각성운동’과 ‘공동체운동’을 통해서 경건주의가 다시 부활한다.] 왜 경건주의가 자꾸 부활하느냐? 이것은 지금 조직 돼있는 기독교가 마음에 들지 않다는 겁니다. 여기서 또 물어봅시다. 제가 하는 논리하가 난해하기 때문에 자꾸 물어야 돼요. 어떤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그 자리에 머물든지 탈퇴하든지 둘 중에 하나지요. 그런데 그 조직 자체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꿈이고 애초부터 없었다면 머무른다는 생각과 탈퇴한다는 생각도 헛방이지요. 괜히 한 거예요.
남자들은 알아요. 군 제대하고 난 뒤에 약 20년 동안 군에 복무하는 꿈을 꾸게 됩니다. 방위출신들 빼놓고. 정식 병장으로 만기제대한 사람들. 그럴 때 꿈속에서 삽질하고 유격한다고 걱정하다가 막상 아침에 잠을 깨보니까 벌써 제대가 된 신분이지요. 제대를 했잖아요.
성경에서 ‘예수 안’의 의미가 뭘까요? 예수 안에 사로잡혀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디모데전서에서는 하나님께 사로잡혔다고 하는데 사로잡힐 때 사로잡은 자가 힘이 셀까요, 사로잡힌 자가 힘이 셀까요? 사로잡은 자가 힘이 세지요.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나의 힘보다 나를 사랑하는 주님의 힘이 더 세고, 더 센 정도가가 아니고 그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입장인 것을 매일의 삶 속에서 확인하라고 오늘도 하루, 이틀 삶을 연장하고 이어져간다는 것을 믿는 걸 의미합니다.
우리가 할 일 없는 게 아니에요. 내 인생의 책임자는 따로 있음을 증명하는 그 인생을 위해서 악착같이 살아야 되는 거예요. 특히 예수님을 하나님의 의라 하잖아요. 그러면 우리의 할 일은 뭡니까? 인간의 죄는 우리죠. 그러니까 우리의 할 일은 죄 짓는 일만 하면 돼요. 아주 쉬워요. 평소 하던 대로 살면 그게 죄 짓는 일이에요.
한국이 러시아와 월드컵 시합에서 1:1로 비겼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콜롬비아에 4:1로 졌지요. 우리는 둘 사이를 비교하면서 왠지 기분이 좋아져요. 이게 죄에요. 장마철인데 마른장마라고 비가 안 오지요. 그런데 내일 계모임이라 놀러 가는데 내일 만큼은 비가 안 왔으면 하고 은근히 기대하는 것, 죄입니다. 왜 죄냐 하면 자기 몸만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은 몸이 있는 이상은 평생 가는 겁니다. 그렇게 해도 우리가 즐거운 이유는 우리의 죄를 들춰내는 그분이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죄를 상쇄하고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날마다 우리의 죄를 들춰내가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고생 딸이 있는 엄마가 간만에 딸 방에 들어가 보니까 “이노무 가시나 하여튼 방 꼬라지하고는.” 하면서 그냥 나옵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런 쓴 소리, 잔소리하면서 주저앉아서 하나하나 빨랫감을 들춰내지요. 들춰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걸 차곡차곡 정리하지요. 나중에 딸이 와서 하는 말이, “엄마, 내 방 청소했네.” 하고 고맙다고 하지요.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은 내가 들어왔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지 못하는 모든 문제를 대신 누가 정리를 다해서 영생 얻을 만한 존재로 변화시켜주신 분이 우리의 구세주임을 영원토록 찬양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천국 가려면 우리의 죄가 낱낱이 들춰지는 기간이 남아있음을, 끝이 중요해요. 그것을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그 넉넉함, 여유 있음으로 인하여 교회는 걱정 없음이 되는 겁니다.
경건주의의 문제는, 경건주의 자체가 신앙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신앙이 없는 운동이라고 보면 돼요. 신앙 없는 세상에서 새롭게 신앙 없다고 들쑤시는 운동이 경건주의운동이에요.
경건주의 운동에서 중간과정은 일단 보류하고 끝에 3페이지 밑에 봅시다. 스페너란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하자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교회갱신의 핵심이다. 스페너는 성경의 일부분만을 포함하는 당시의 ‘교회력 성구’를 비판하며 성경의 모든 내용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야 한다고 말한다.]
독일의 명절은 성자들의 출생이라든지 업적이거든요. 그래서 성자에 해당되는 달력을 줘요. 그러면 교인들은 달력에 나온 성경구절들만 외우면 괜찮은 신자가 돼버려요. 성경을 볼 생각을 안 하고 힘들 때 어려울 때 필요한 성경구절, 즐거울 때 성경구절, 사업을 시작할 때 성경구절, 결혼을 앞두고, 임종을 앞두고, 이런 몇 가지 성경구절을 뽑아서 그것만 반복적으로 외우면 훌륭한 신자로서 주변에서 욕 얻어먹지 않는다는 생각합니다.
옛날 사람들이 신자라고 행세하고 싶은 이유는, 워낙 자기가 하고 싶은 게 많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죄를 짓기 위해서 일단은 자신이 신자인 티를 내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뒤돌아서서 마음껏 죄를 짓고 가끔 교회에 와서 회개하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한 겁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소그룹 모임을 제안하였다. 이 소모임은 1674년에 쓴 한 편지에서 ‘교회 속의 작은 교회’라고 표현한다.]
이 소리 들으니까 오늘날 선교단체이야기와 그렇게 꼭 닮았습니까. 지금 대구 경일대학에서 성서대구대회를 벌이고 있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여러분, 작은 교회가 착한 일입니까? 얼마나 교인들의 태만했으면 작은 교회될까? 이런 생각해본 적 없습니까. 작은 교회 자체가 선한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만인제사장(영적 제사장)을 부지런히 실천하라는 것이다. 평신도와 목회자는 경쟁이나 대립이 아니라 서로 돕는 관계다.]
또 이것 들으니까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가 생각나는 거예요. 제자훈련. 제자훈련은 평신도도 목회자란 기치를 들고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사랑의 교회에서 목회방법을 배워서 많은 목사들이 프랜차이즈 점포를 많이 낸 겁니다.
[목회자들에게 맡겨진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까닭은 평신도의 도움이 없기 때문이다.]
맞아요? 성령은 뭐하시는 분인지 모르겠어요.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풍성하게 하는 방법은 달력에 있는 제한된 성경구절만 달달 외울 게 아니라 성경 통째로 보게 해서 교인들로 하여금 성경 전체에 들어가게 하자. 이건 성서유니온 등에서 하는 큐티 운동과 유사하지 않습니까?
특히 교회 속의 작은 교회는 당연한거지만 이건 일종에 새누리당의 비주류와 주류, 친박과 비박. 전체적 모임에 작은 모임을 따로 할 수 있단 말이죠. 안 그러면 셀 모임이라는 것, 두 날개를 펴라는 부산의 어떤 교회에서 실시해서 히트한 셀 목회. 그것도 닮아있어요. 해 아래 새로운 게 없다고 했듯이 이런 게 계속 나오는 거예요.
도대체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지금 기독교가 썩었기 때문에 참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진짜 진리의 정신으로 돌아가서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거든요. 이 사람들의 가장 큰 잘못은 이겁니다. 제가 크게 쓰겠습니다. 기대감. 뭔가 기대한다는 자체가 현상에 대해서 불만족스럽다는 거거든요.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이 모든 글에 불만족이 있습니까? 빌립보서 4장에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할 때 그게 불만의 표시입니까? 아니면 고마움과 감사의 표현이에요? 그게 찬양이고 감사지요. 노래한다고 찬양이 아니고 삶 자체가 저한테 이런 일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한 게 되지요. 그걸 달리 표현하면 이런 일을 맡기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라고 표현하란 말이죠.
그러니까 진자(진리와 자유)교회 밑에 있는 스마트폰 가게나 옆에 중국집이나 진자교회가 10년 가까이 되도 코빼기도 안 보이지요. 그래도 가게주인이 한 번도 안 온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돼요. 그게 내게 능력주신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해준 것을 감사하지요. 이 말은 내가 감당하지 말아야 될 일을 감당하지 않게 한 것에 대해서 감사한 거지요. 물론 이 말을 곡해하게 되면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자기변명으로 일관하는 하나의 괴변에 지나지 않을 수 있어요. 그건 본인의 믿음 따라 그런 것이지 제 탓으로 돌리지 마세요.
교회 가기 싫어서 집에서 자면서 교회 가는 아픔을 오늘도 감당하지 않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믿음이라도 있으면 훌륭한 믿음이에요. 오늘 류현진 야구하는데 빠지겠다고 한다든지.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는 자체가 대단한 믿음이지요. 믿음이 아니면 그런 해석이 안 되지요.
어쨌든 간에 스페너가 이런 주장을 할 때 뉘앙스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 특히 뭔가 기대하고 있다는 것. 여기서 기대한다는 자체가 인간에게는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죄의 속성입니다. 기대한다는 것은 탐욕이지요. 기대한다는 것은 필연적 결과를 고대한다는 말이잖아요.
그럼 물어봅시다. 성도는 필연으로 삽니까, 우연으로 삽니까? 우연으로 살아요. 〇〇〇이 참석하는 것이 늘 참석했다면 필연으로 보겠는데 몇 년 만이에요? 이건 우연이에요. 공 목사님 꿀빵 늘 사온다면 필연으로 보겠지만 다음에 안 사올 수가 있거든요. 이건 사오라는 말보다 더 무서운 이야기지만 하여튼 우리는 모든 것이 우연입니다.
그 우연을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머리카락도 하나님이 세시고, 발걸음도 하나님이 세신다. 하나님이 머리카락을 세기만 하시는 거예요, 머리카락을 뽑고 조치를 하시는 거예요? 조치를 하시기 때문에 헤아린다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발걸음은 우리가 행하고 헤아리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걸로 구분이 돼있습니까? 주님이 허락 안 하면 우리는 걷다가 자빠지게 돼있어요.
세상의 어떤 일도 세상의 모든 일이 주님의 허락 없이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주님의 허락 없이 안 된다는 이 말은, 우리는 항상 필연만 생각하는데 주님은 그걸 꺾고 필연을 우연으로 바꾸어서 주님에 의해서 주어진 결과인 것을 우리에게 통보하시고 늘 가르치시는 거예요. 성령 안에서.
참 바른 소리해도 워낙 우리의 삶이 개인만 생각하니까 이런 성경이야기해도 감이 안 오지요. 요즘 그런 걸 많이 느껴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란 노래에 보면, 점점 더 멀어져간다. 점점 더 성경과는 멀어져가요. 그건 인간들이 나쁘다는 게 아니고 세상이 나를 옛날처럼 가만히 고요히 살지 않게 만들어요. 항상 머리에 온갖 것들이 침투해서 완전히 뇌를 쪼개는 같아. 오징어 찢듯이 완전히 다 찢어놔요. 현대인들의 삶이 다 찢어진 삶이에요. 여기에 있으면서도 다른 것 생각하고, 두 시간 뒤를 생각하고, 오늘 점심에 뭘 먹을까 하고.
마귀가 인간을 가만두지 않아요. 물론 그것조차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다. 믿음 없는 자를 반드시 천국에 보내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전략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시달릴 대로 시달리고 마귀한테 교육받고 양육 받아야 돼요. 혼나야 돼요. 창세기 3장처럼 이마에 땀을 흘리고 고생은 고생대로 해야 돼요.
저는 창세기 4장을 보면서 제사 잘 드린 아벨이 형한테 맞아 죽는 모습을 놓칠 수 없어요. 하나님은 뭐 하시는 하나님이에요? 자기 백성도 보호 못하는 하나님, 무능한 하나님. 하나님은 왜 일을 그런 식으로 하십니까? 아벨이 죽을 뻔했으면 가슴을 쓸어내리면 그만인데 아벨이 죽었다니까요. 이 땅에 정의가 물 같이 흐른다는데 내가 보기엔 바짝 말랐는데 뭐가 물 같이 흘러요. 나쁜 놈들은 활개 치는데 바른 소리하다가 얻어맞아서 나중에 골병들어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바르게 살려는 의욕이라든지 정의감을 아예 좌절시키는 곳이에요. 아주 분질러버리는 곳이에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진리를 복음을 이야기하니까 어떤 분이 하는 말이, “목사님, 그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입니다.” 얼마나 적절한 비유를 했는지 제가 말하고 싶은 비유를 그쪽에서 했어요.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누가 깨집니까? 계란이 깨지지요. 깨지라는 거예요. 깨진 계란이 될 때 필연 속에서 살던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필연이 아니고 살고 싶어서 산 게 아니고 사실은 주님의 허락 하에 하나님의 우연적인 조치 속에서 지금까지 끌어왔다는 사실을 내가 연약한 계란으로 깨지면서 비로소 알고, 나를 깨기 위해서 강한 악이라는 바위가 군데군데 있어야 돼요.
사람이 자의식이 강렬하고 어떤 결과에 대해서 기대감에 강렬할 때는 주의 말씀이 느껴지지 않아요. 여러분들이 소나기 오게 되면 비 온다는 걸 대번에 알지요. 그런데 비가 오는지 안 오는지 못 느낄 때는 뭘 보고 확인할 수 있습니까? 고여 있는 물웅덩이 보면 알지요. 왜 나는 못 느끼는데 물웅덩이는 느낍니까? 물웅덩이는 나보다 연약하기 때문에. 한 방울만 떨어지면 동그라미가 생겨요. 물 분자가 내 세포분자보다 결합력이 약해요. 에너지가 약해서 다른 에너지가 오게 되면 표시가 금방 나요.
특히 그런 마음이 어린아이 같은 마음, 네가 어린아이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하지요. 하나님이 우리가 예상 못한 우연으로 일하는데 나는 육체라는 덩어리기 때문에 항상 긴장해있고 단단해져 있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길가에 있는 코스모스나 참새나 들풀을 보면서 그들에게 가해진 해와 달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길으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간접적으로 봐야 돼요.
어쨌든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요약한다면, 결국 죄는 우리가 갖고 있는 기대감, 경건주의의 기대감은 뭡니까? 기독교가 썩었다. 우리가 나서서 기독교를 부흥시키고 개혁하자. 이런 기대감을 갖는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신들의 사적인 욕구인데 그 욕구가 뭐냐? 내가 기대하는 기독교다운 교회를 내 눈으로 확인하는 즐거움을 갖겠다는 겁니다.
방금 제가 즐거움을 갖겠다고 했지요. 즐거움은 필연 속에서 나오는가요, 우연 속에서 더 큰가요? 어느 쪽입니까? 우연 속에서 즐거움이 나오는 거예요. 목사님들이 예배 시간에 가장 즐거울 때가 언제냐 하면, 예배 시간 15분 뒤에 3개월 만에 나온 교인이 앉아있을 때 갑자기 톤이 높아집니다. 기분이 너무 좋아요. 예상 못했는데 등장한 거예요. 아이가 맨날 수학 40점이었는데 어느 날 100점, 이건 컨닝했거나 진짜 공부 잘 했거나 둘 중에 하나에요.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낮추어요. 십자가를 지고 네가 나대지 마라. 네가 살아서 펄펄 날뛰지 말라는 거예요. 망치로 물고기 머리를 때릴 때 다루기 쉽잖아요. 주님께서 매일같이 우리를 망치로 뒤통수를 쳐서 우리로 하여금 아침에 눈뜨면서부터 엄청난 감사 대상이 된다는 그걸 계속해서 보여주길 원하고 있습니다. 백날 보여줘도 돌아서면 내 기대감, 내 목표, 오늘도 성과, 회원모집 몇 구찌 해야 되고 하는 그런 것들로 완전히 짓눌려 있기 때문에 그렇지요.
그 다음 계속 해봅시다. 하나하나 문제점을 지적해볼게요. [목회자들이 맡겨진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까닭은 평신도의 도움이 없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이 맡겨진 걸 제대로 못하는 것은 평신도의 도움 때문이라면, 스패너는 이걸 교회라고 이야기하지요. 스패너의 주장이 뭐냐 하면, 교회는 목사 혼자 일하면 교회가 안 된다. 평신도가 도와줘야 교회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평신도’로 일이 된 교회가 성경에 나오는 교회에요? 그건 교회를 빙자한 사업이지요. 교회는 누가 책임자고 누가 만드는 겁니까? 교회는 우연에 의해서, 항상 우연이에요.
“우리 교회 장로는 늘 오신다.” 그런 건 필연이에요. “우리 교회 장로님은 주님의 능력에 의해서 오늘도 오셨네.” 그런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모였다면 그게 교회란 말이죠. “내가 여기 앉아있는 것은 주께서 몰아넣어서 오게 되었다.”라는 생각을 갖고 참석할 때 그게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게 왜 교회가 되느냐 하면, 책임자를 주님에게 돌리면 우리는 주님이 활동한 결과물로 앉아 있잖아요. 바로 그런 관계가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됨의 요건이 되고 조건이 되는 겁니다. 다 아는 이야기를 제가 강조한다는 게 좀 이상한데.
성경에서 교회 머리가 예수님이지요. 안 보이지요. 그러나 목사, 집사, 장로는 보이잖아요. 보이는 것끼리 의지하면 안 돼요. 복음은 사람을 믿지 말라는 겁니다. 믿을 놈을 믿어야지. 그럼 사람 안 믿으면 누굴 믿는데?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 없음이 들통 난 거예요. 사람을 믿지 말라고 하면, 사람 믿나 주님 믿지. 그게 믿음 있는 거예요. 믿음이 있느냐는 것은 부정적 발언을 해서 확인되는 겁니다.
사람을 믿지 말라는 것에 반드시 자기 자신을 포함시킵니다. 이 말은 믿음이란 사람을 믿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나를 믿지 않는다. 5년 전에 은혜 받은 걸 믿지 않는다. 3년 전에 기도해서 암에서 나은 걸 믿지 않는다. 왜? 암에서 나았다는 것이 마음속에 기억으로 자리 잡기 때문에 은혜 받았다는 것이 내 소유가 되기 때문에 내 소유가 된 것을 우리가 믿을 수가 없어요. 특히 운전하는 사람들. 10년 간 무사고입니다. 그것 믿지 마세요. 10년 간 사고 나지 않도록 조치를 하셨지요.
왜 우리가 오늘 경건주의를 공부를 해야 되는가? 소위 믿음 있는 자들이 빠질 수 있는데 적폐를 청산, 그런 잘못된 것을 우리가 미리 보는 거예요. 우리가 이 사람들을 문제 있다고 하면서 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속성이나 우리 속성이나 대동소이해요. 똑같아요. 뭔가 보고 싶어. 완벽한 교회, 이상적인 교회가 보고 싶어요. 보고 싶다는 말은 은근히 주님은 안 보고 싶다는 뜻이고 주님은 안 믿고 싶고 나한테 도움이 되는 나를 즐겁게 하는 어떤 사람이 나타나면 좋겠다는, 여전히 믿을 만한 사람이 오면 좋겠다는 사람에 대한 기대감에 내 속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믿을 놈 없잖아요. 그러면 사람이 사는 게 삭막해서 못 산다고 하거든요. 제 답변은 네가 뭔데 누굴 믿으려하느냐? 그 말 속에는 나한테 즐거움을 주는 사람이 등장해야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인정하겠다는 게 있다고. 결국 자기 자신을 포함 안 시킨 거예요. 믿을 사람 없다는 것에 자기도 믿지 말라고 했는데 자기를 빼버린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교회가 있음 자체가 기대감이 나오게 마련이고 그 기대감이 성에 안 찰 때는 운동이란 형식으로 나타나서 세상을 공격하고 세상이 문제 있다고 하면서 동시에 뭘 노리느냐? 우리 교회만큼은 우리 운동만큼은 멋있다, 복음적이라는 것, 자기 자신의 정당성, 자기 자신을 믿는 가운데서 어떤 삶의 즐거움, 쾌락을 얻으려는 노림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결국 경건주의운동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 우리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평신도운동을 역사적으로 가장 활발하게 주장하고 이론적으로 합리화시킨 단체로 경건주의를 들 수 있다.]
평신도운동, 이름 자체를 보세요. 평신도운동이란 말은 무슨 운동은 아니라는 뜻일까요? 목회자들의 운동은 아니고 평신도운동. 평신도란 대립된 존재를 의식하고 의미를 갖게 되는 거예요. 그 대립된 게 목회자고. 그 당시에 교인들이 목사님들이 알아서 천당 보내 주세요. 그런 분위기가 소위 기독교 정통주의의 대세였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진리가 아니야. 이것은 평신도들이 교회를 살려야 된다고 한 거예요. 결국 평신도운동이 교회에 신경 쓰는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 활동은 관심 없고 오직 교회에요. 왜? 눈에 보이니까.
[셋째, 기독교는 지식의 체계가 아니라 실천적인 삶에 관계된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이 아니고 실천적이다. 이것은 칼빈, 루터를 공격 안 하는 것 같으면서 공격하는 건데 그게 뭔 뜻이냐 하면, 기독교가 처음에 천주는 의식 중심이고 기독교는 말씀을 말씀대로 실천에 옮기는 실천중심이라고 나온 게 기독교란 말이죠. 그런데 기독교 자체 내에서 경건주의가 말씀을 실천했다면, 이건 무슨 말이냐 하면, 말씀을 지식으로 받지 마시고 실천으로 옮기자는 표어자체가 우리에게 실천을 자동적으로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경건주의 이전에 기독교가 그걸 주장했기 때문에 그렇고.
그러면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서 천주교 내에서 예수회란 게 있어서 우리도 말씀대로 살자는 운동이 있었단 말이죠. 천주교 예수회도 말씀대로 살자, 경건주의도 말씀대로 살자. 그러면 둘이 합치면 되겠네. 때려죽여도 안 합칩니다. 어떤 바람둥이 남자가 있는데 정실부인과 첩을 사랑한다면 그 둘이 사이좋게 살면 되겠네. 그런데 정실부인이 첩을 시집보내려고 하느냐 말이죠. [참 좋은 시절]이란 드라마이야기에요.
사람은 뜻이 같고 이상이 같다고 안 합칩니다. 왜냐하면 타인은 이용대상이지 내가 타인에게 굴복할 의사는 애초부터 없어요. 모든 것이 자기한테 환원되게 돼있어요. 잘 해주는 것, 고개 숙이는 것, 상대방 좋아서가 아니에요. 결국 내가 얻을 게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즐거워한다는 거예요. 처음에. 다 잊어버렸죠.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죠. 우리는 죄죠. 이 죄가 나는 나밖에 모르는 것, 어떤 일도 남을 이용해서 나 좋은 쪽으로 한다. 이걸 어떻게 하자? 감사하고 즐거워하자. 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간단한 공식이에요. 이걸 고쳐요? 고치는 게 더 수상해. 고쳐서 뭐 하려고? 더 월등한 내가 되면 복이라도 더 줄줄 알고? 하나님이 행운이라도 더 줄줄 알고? 그 행운이라는 개념은, 바로 내가 설치해놓은 필연 속에서 은근히, 탐욕으로 기대하는 그 내용 중에 하나가 행운이란 이름으로 오는데요? 하나님은 우연으로 행하지 내가 기대했던 그대로 오지 않아요. 오지도 않았으니까 감사할 일이죠. 오게 되면 그건 마귀한테 속한 사람이에요.
만약에 경건주의가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렇다면 앞에 개신교회에서 말씀의 실천을 이야기하다가 실패했다면 우리는 실패하지 않겠다고 나온 게 경건주의라면, 경건주의는 보나마나 그 안에서 실패했다는 주제가 또 튀어나올 거란 말이에요. 이건 보나마나 뻔한 이야기에요. 실천은 주님이 하십니다. 그리고 실천의 열매가 우리들이에요.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뭐냐? 나의 실천을 찾을 것이 아니고 주님의 실천성을 내 삶 속에서 찾으시면 되는 겁니다. 그걸 성경에서는 회개라고 해요. 제가 나의 인생을 꾸려가는 게 아니라고 방향을 바꾸라는 게 회개라는 겁니다.
[네 번째, 당시 정통주의 시대에 유행했던 종파간 논쟁을 비판하고 교리적 논쟁보다 기독교의 덕목인 사랑을 우선하자.]
이건 안철수 아닙니까? 정쟁을 멈추고 오직 국민을 위해서 정치를 해야 된다. 안철수가 그런 이야기하고 난 뒤에는 새누리당도 그런 이야기하고 김문수도, 김한길도 그런 이야기하고. 하나 좋은 소리하니까 다 따라했어요. 진짜 먼저 좋은 소리한 사람은 티도 안 나.
종파들의 논쟁이라 하는데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아볼로파, 게바파, 바울파, 심지어 예수파도 있지요. 그 파들의 주장한 게 뭡니까? 우리는 파들이 있으면 안 된다는 걸 주장한 거예요. 그럴 때 사도 바울은, 나는 예수파라고 한 게 아니고 나는 십자가 진 적이 없다고 하지요. 왜 그런 이야기하지요? 십자가는 구원의 몫은 예수님에게 있다. 우리 파벌을 하지 맙시다가 아니라 진짜 파쟁을 종식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음에 자연적으로 자기 소속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십자가 앞에서 죄가 된다는 것을 인정할 때 내가 새누리당에 있는 것이 죄고, 내가 외국에서 의학박사 받은 것이 죄고, 내가 목사 된 것도 죄고 설교한 것도 죄가 된다고 인정한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만 진리를 드러내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60)
14-07-18 08:52
20140715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5-경건주의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은 좀 더 어려운 걸 해보겠습니다. 뭐가 어렵냐 하면, 창세기 3장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이야기한 대목에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면, ‘모든’이죠. all, 전부. 핀셔라는 사람은 이 대목을 굉장히 주목을 합니다. 선악과에 대해서 아담은 그 내막을 모르는데 뱀, 사탄은 이미 알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 역사에서 남자가 빠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뱀과 남자가 아니고 여자의 전쟁이죠. 뱀의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이 되거든요. 후손을 따라가 보면 여자가 우두머리와 뱀이 우두머리가 되는 겁니다. 아담이 빠지지요. 사람이 빠져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실제로 하나님이 일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잖아요. 그럼 생각해봅시다. 선악과의 어떤 내용으로 인하여 죽음이 초래되었지요? 그걸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두 번째 시간에 어려운 것 한다고 했지요. 정말 어려운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고 할 때 선악과를 아싹아싹 씹으니까 죽었습니까, 핥아먹으니까 죽었습니까? 이것은 먹는 방법과는 관계없지요. 선악과를 반만 먹어서 죽었습니까? 양과도 관계없고. 그렇다면 죽음이 초래되는 원인이 선악과 속에 있다는 말이거든요.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죽게 만든 원인이냐에 대해서 사람은 사전에 몰랐습니다. 알았으면 안 따먹지요.
그런데 따먹으라고 유혹한 것은 뱀이죠. 그럼 뱀은 알았다는 거예요. 선악과가 갖고 있던 내용이 뭐기에 알게 된 것이냐? 핀셔라는 사람은 선악이란 모든 것의 모든 것. 세상의 모든 것, 세상의 모든 지식에 대해서 뱀은 알았다는 거예요. 그 ‘모든’을 과일에다 뱀은 적용시킨 것이죠. 동산 과실 중에 모든 과실을 다 먹으라고 했느냐고 묻지요.
지금 우리 이야기가 뭐냐 하면, 어떤 요소가 인간을 죽게 하느냐? 그걸 합니다. 뱀의 의도가 뭐냐 하면, 다 먹어도 되잖아. 모든 과실을 다 먹어도 되는 입장에 있는데 좀 아쉽지. 그런데 하나님이 모든 과일을 다 먹으라고 하더냐? 아니면 빼놓고 이야기하느냐고 묻는 거예요. 사람이 모든 걸 알게 되면 자신감이 생기겠지요. 과거뿐만 아니고 미래까지 다 알면. 여기서 50킬로미터 떨어진 수풀 사이에서 개미들의 싸움도 안다면, 인간이 모르는 게 없다면 결국 뭐가 되겠습니까? 신이 누군지 알고 다 알겠지요.
핀셔라는 사람은 이것까지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뭐냐 하면, 모든 것을 알아도 된다고 요청하는 그 뱀이 어디서 빠지느냐 하면, 그 ‘모든’에서 빠지는 책략이라는 사실을 아담은 몰랐던 겁니다. 이것은 마치 유대인과 똑같은 거예요. 유대인이,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줄까? 돈 천 원만 주면 가르쳐줄게.” “가르쳐 줘.” “이거야, 바로.” 미끼를 던져서 미끼과정에서 돈이 들어오게 되면, 물음 자체에 걸려들면 물음에 걸려든 자체가 자기 지배 하에 있는 거예요. 지배 하에 있으면 ‘모든’은 통하지 않습니다. ‘모든’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 영역까지 침투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하되 선악과는 따먹지 말라는 게 있는 거예요.
제가 말을 너무 어렵게 해서 죄송한 마음이 있는데 쉽게 하겠습니다. 우리가 인간중심이라면, 하나님께서 네가 정녕 죽으리라. 보통 부모가 아이한테 고추장 먹으면 맵다고 하기보다는 “너, 그거 먹으면 죽어.”라고 강조해서 말하잖아요. 그것은 아이를 생각해서 하잖아요.
인간들은 정녕 죽으리라는 말을 인간을 생각해서 하나님이 하신 것으로 생각한단 말이죠. 그 자체가 이미 모든 것을 인간중심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것이란 말이죠. 하나님이 모든 것을 허락하되 선악과를 허락하지 않은 것은 영원토록 인간을 하나님의 지배 하에 두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의 아는 지식의 범위에 인간이 침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것을 알아야 돼요, 몰라야 돼요? 몰라야 돼요. 모든 것을 알아버리면 그 모든 것 속에 신도 포함되니까 인간이 신을 알아버리면 더 이상 인간을 제한할 게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경건주의 하면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경건주의는 모든 것을 알아서 그걸 실천에 옮겨서 진리체제로 만들겠다는 개신교의 취지와 계속 맥락을 같이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완벽을 기하겠다는 겁니다. 완벽은 기하겠다는 것은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것에 필연적으로 짜여진 것을 얻겠다는 거거든요. 그래서 필연적으로 모든 걸 알게 되면 우연적인 요소가 점점 더 거부당하지요. 나한테 꼭 필요한 것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버리고서 나는 진리를 알았다는 게 말이 돼요? 말이 안 되지요.
이것이 욥기에 보면 나옵니다. 욥은 자기가 고난 받을 때 집중된 관심사가, 내가 착한데 고난 받습니까? 착한데 자식들이 왜 죽고, 착한데 재산이 날아가고, 아내는 저주하고 날 버립니까? 그런데만 관심 있었지 염소가 새끼 낳는데 관심 없었지요. 악어가 강물에서 뛰노는 방법을 몰랐지요. 결국 욥이 아는 모든 것은 자신은 본인을 간주했을 때 나오는 사고방식이 그거에요. 신이시여, 왜 나의 일을 틀어지게 만듭니까? 하나님은, 네가 전부가 아니라는 거예요. 네가 이 땅에 있음이 너 때문에 세상이 있는 게 아니고 너 잘되라고 세상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걸 신약적으로 답변하게 되면, 나 잘되라고 있는 게 아니고 날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게 아니고 바로 세상의 모든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있는 겁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있는 거예요. 이게 모든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도와 제자들과 하나가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을 숫자로 표시하면 ‘1’ ‘one’ 하나가 되는 겁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씀처럼 내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고 나를 위해서 숨쉬고 있는 아니란 말이에요. 그렇다면 누굴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문제가 뭐냐 하면, 나를 위해서 있는 나에서 나밖에 모르는 나가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에 있다는 것을 찾아가는 방법이 뭐냐? 방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방법을 사용하게 되면 점점 더 커져서 나중에는 예수님보다 커져요. 나는 예수마저 삼키는 블랙홀이 돼버립니다. 기독교에 이런 도사들 많아요. 경건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줄 아시겠지요.
창세기 31장 29절에 보면,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여기서 선악 간이죠. 이게 모든 것의 모든 것, 모든 지식을 말합니다. 선과 악으로 이야기한 것은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는 겁니다. 지금 이 이야기가 삼촌이 야곱에게 이야기하는 거지요.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밤에 꿈에 나타나서 야곱에 대해서 네가 입 떼지 말라. 왜 입 떼지 말라고 할까요? 야곱에게 일어난 모든 조치, 야곱이 삼촌을 속이는 모든 것이 모든 것에 모든 것 되시는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이뤄진 거예요.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유가, 선악을 아는 것에 그들과 우리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쫓겨난 거예요. 그럼 쫓겨남 자체가 어디에 포함되는 사업이고 업무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 모든 것의 모든 게 되기 위한 일환 중에 하나가 인간이 추방돼야 될 일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의 일이 하나님의 일이란 건 결국 인간이 추방되는 것도 예수님 중심이란 하나님의 업무에서 필수적으로 포함돼있단 말입니다. 이걸 그 동안 신학자들이 밝혀내지 못한 거예요. 인간이 타락하고 범죄한 것도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필연적인 코스로서 하나님의 조치인 거예요.
따로 살림을 차리도록 허락하되 그걸 저주 안에서 차리도록 땅에 보낸 겁니다. 네가 그렇게 잘났거든 너희끼리 따로 살림을 차려봐라. 차리고 난 뒤에 그들은 쫓겨나서 저주받은 땅에서 이마에 땀을 흘리고 여자는 해산하는 고통과 남자한테 지배당하는 아픔을 겪으면서 거기서 저주에서는 죽음이 보편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질문을 해봅시다. 선악과의 어떤 요소가 사람을 죽이게 합니까? 그것은 쫓겨나서 진행된 인류의 역사에서 뱀이 등장하지요. 여자가 등장하지요. 결국은 인간이 죽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 인간에게 찾아드는데 그 죽음은 바로 뱀에 대한 저주와 심판과 결부돼있는 죽음이라고 죽음의 개념이 확대가 되고 확산이 되는 겁니다. 선악과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인간을 죽게 만드느냐? 인류역사의 마지막 종결 될 때 보면 알 수 있어요. 그것은 뱀에 대한 마귀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의 지속적인 작업의 일환으로써 죽음이 저장돼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지옥은 안 믿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니고 지옥은 마귀가 가는 곳이고 안 믿는 사람들은 마귀의 종이 되어서 합세가 되는 식입니다. 지옥은 안 믿는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고 마귀, 사탄이 주인공이에요. 그 반대편에 있는 천국의 주인공은 믿는 사람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일찍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의 여자가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여자란 이 땅의 남자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고 성령에 의해서 태어났다는 뜻이거든요. 성령에 의해서 태어난 그분이 주인공이고 저쪽은 뱀이 주인공이고. 그래서 역사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대결장이고 전쟁터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단순히 하나에 기독교적인 교리나 신화처럼 느껴지겠지만 그것을 실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경건주의의 출현 같은 거예요. 경건주의, 개신교, 천주교, 교회가 하는 그런 모습들이 성경의 모든 말씀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동원될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80여명의 신학자들]을 공부하면서 다 쓸데없는 이야기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것이 바로 이 땅에서 신앙을 빙자한 불신앙들이 어떤 양상으로 계속해서 역사 속에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부흥시키면서 그들이 하는 발언들을 우리가 주시하고 주목해야 된다 이 말이죠. 그것들이 나올 때마다 모든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나왔거든요. 선과 악 전부를 아는 것은 모든 것을 아는 게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모든 것에서 인간이 알고 싶을 때 마귀는 말합니다. “아담아, 너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어.” 그런데 그 모든 것에서 뭐가 빠졌습니까? 마귀는 인간이 안다고 하는 그 ‘모든’에 포함이 안 돼요. 그래서 인간은 마귀가 자기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심지어 마귀의 존재까지도 의식하지 못합니다. 의식하지 못한 것이 인간을 지배합니다. 그럼 언제 의식되는가? 마귀와 대적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특이한 흔적을 남길 때 그게 바로 마귀가 현재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마귀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마귀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사탄과 만났지요. 만약에 예수님이 사탄을 만나고 난 뒤에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으면 제일 먼저 묻고 싶은 질문은, 마귀가 어떻게 생겼습니까? 왜 그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우리는 우리 존재를 확인할 때 어떻게 생겼는지 거울로 확인하기 때문에 그 방법대로 마귀한테 적용시키는 겁니다. 마귀가 그때그때 달라진다는 사실을 생각도 못하는 겁니다. 마귀가 피부가 녹색이고 뿔나고 그런 겁니까? 잘 생기면 마귀 아니고, 못 생기면 마귀고 그런 겁니까?
내 마음에 들면 마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세요. 사기를 일곱 번 쳐도 내 마음에 든다면 사랑한다면 기어이 그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몸부림치는 것 보세요. 드라마에서. 우리는 마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느낌이 중요하잖아요. 그 느낌을 모든, 진리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귀를 빼놓고 하는, 마귀가 가르쳐준 우리의 삶의 방식입니다.
다섯 번째 봅시다. [신학교육의 개혁을 강조했다. 신학교육은 단순한 학문이나 지식이 아니라 실천과 그 본질에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목회자를 길러내기 위해서 신학자가 먼저 본을 보여야 하고 신학교육에서 지식의 습득이나 학업의 성적보다 경건한 삶과 신앙 성품에 더 큰 비중을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말이 맞아요? 지식으로 하지 말고 얼마나 체계 있는 학문을 했는가를 시험이 논술시험이지요. 논술 잘 치기 위해서 강남에 논술학원이 있다는 걸 아시잖아요. 만약에 하나님께서 지식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실천과 경건의 삶을 원한다면 경건의 삶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원이 번성할 게 뻔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궁금한 게 어떤 걸 경건이라고 하지요? 여기 5페이지 제일 위에 프랑케가 하는 이야기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선을 행하는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프랑케는 스페너의 도움으로 할레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된다. 그곳은 독일뿐 아니라 전 경건주의의 본산이다. 〰 그곳의 선교기관(고아원, 학교, 과부의 집, 여자가 사는 방, 교사 양성학원, 화학실험실, 약국, 책방, 인쇄소, 무료숙박소, 빈민수용소 등을 중심으로)을 통해서 가난하고 부도덕한 생활에 빠진 소외된 대중들에게 교육과 자선의 손길을 뻗쳐나갔다.]
요즘 같으면 탈북자 돌보기, 노숙자 또는 미혼모 돌보기, 나아가서 가짜 참기름 배척하기, 길거리 꽁초 줍기. 지금은 모든 게 다양해지니까 확장될 수 있지요. 이렇게 하는 것을 경건의 삶과 신앙 성숙에 비중을 둬야 된다는 거예요. 이 주장에 대해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사람은 태어나서 가만있지를 못해요. 가만있어도 가만있는 일이 돼요. 어떤 일을 하고 있다니까. 첫 번째, 인간은 가만있지를 못한다. 두 번째, 인간은 설치면 반드시 설친 값을 하게 돼있다. 인간은 반드시 뭔가 하게 돼있어요. 세 살 먹은 딸은 집에 가만있지 않아요. 엄마가 출근하고 난 뒤에는 엄마 화장대에 앉아서 혼자 숨어서 뭘 해요. 루즈를 얼굴에 온통 다 바르고. 그 어린애가 커서 어른 되거든요. 아이들은 소꿉놀이하지만 어른은 딴 짓한다니까요. 도박을 하든지 마작을 하든지, 낚시를 하든지.
촌에 있는 사람들이 농사짓는 이유는 할 짓이 없어서 농사져요. 인간의 할 일은 할 짓이 따로 없어서 하는 거예요. 그 형편상 자기가 속한 상황과 형편에서 그 짓 말고는 적당한 할 짓이 없어요. 따라서 만약에 환경이 바뀐다면 다른 짓을 해요. 만약에 화장품 외판을 하다가 로또에 당첨되면 대번에 그만두고 사우나 가는 짓을 할 거예요. 경건주의는 사람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인간은 반드시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을 해놓고 되돌아서서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면서 성경말씀과 결부시킨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노숙자 돌보기. 노숙자가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죄인이지요. 다음에 노숙자를 돌보기에 합당한 것은? ①용돈 주기. ②종이박스 치우고 베이어 판으로 갈아주기. ③병원에 가서 치료시키기. ④취직시켜주기. 어느 게 가장 합리적입니까? 4번이지요. 그런데 멀쩡한 사람도 취직 안 되는데 취직자기가 어디 있습니까? 취직자리가 남아돕니까? 취직하려면 그냥 넣어줍니까? 시험 쳐야 되지요. 옛날에 뭐했는지 묻지요. 그 사람의 주특기가 뭐냐? 어떻게 하면 하루 24시간을 종이박스 위에서 지내려면 훈련이 돼야 돼요. 부산 시내 어느 쪽에서 뜨거운 물이 나오며 어느 화장실 깨끗하며 어느 벤치가 좋은지는 나름대로 숙련된 노숙자가 아니면 그 장소를 찾을 수가 없어요.
사람은 자기 하는 일이 어떤 일이든 간에 그것이 죄를 까발려주는 하나님의 작업으로 봐야 됩니다. 인간의 일은 없습니다. 요한복음 6장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여러분이 답변해보세요. 네가 있는 현장에서 주님께서 왜 십자가 졌는가를 그 현장을 통해서 확인해주면 그게 바로 하나님 일이다. 왜?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정당함을 믿지 않기 때문에. 나를 더 이상 믿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일입니다.
저는 페이스북에 보석 사진 올라온 걸 보고 많은 걸 느꼈습니다. 얼마나 아내를 사랑했으면. 저것이 믿음이 아닌가? 남들은 욕할까 숨길 수 있는데 자기는 그렇게 산다는 걸 보여주는 것. 그리고 보석, 아무것도 아닙니다. 보석 올리는 걸 숨기면 보석이 뭐 인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마치 붕어빵 사진 찍어 올리듯이 보석을 찍어 올리는 덩치만큼이나 큰 그 여유.
경건주의의 문제가 뭡니까? 이것은 선한 일이고, 이것은 악한 일이라고 분류한 자체가 바로 마귀 일이에요. 정말로 성령에 의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몰라요. 다만 주께서는 이 짓밖에 못하도록 몰아넣었다는 겁니다. 목사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는데. 목사 짓 안 하려고 강단에 서는 걸 목회라고 합니다. 목사 그만하겠다고 하면서 서있어야 돼요.
방금 이야기가 사도 바울이 한 이야기에요. 목회 그만하고 죽으렵니다. 하지만 주께서 여러분 섬기라고 안 죽게 만드네요. 내가 여러분에게 다가온 것이 아니고 주님이 여러분에게 저를 통해서 다가오십니다. 저를 붙들지 마세요. 여러분과 빨리 죽는 게 소원이라고 이야기한다니까요.
경건주의가 제대로 된 경건주의가 되려면, 여기에 보면 성경을 달력으로 하지 말고 성경전체를 읽으라고 했잖아요. 백날 큐티 시키면 뭐합니까? 모든 해석과 이해가 경건주의 자체를 정당화하는데서 나온 마귀적인 이론인데 어떤 성경해석을 해도 엉터리 해석을 해버린단 말이죠. 성경해석을 하고 있는 자신이 주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걸 느끼도록 십자가만 바라보도록 해야 성경해석이지 성경해석 알았으니까 써먹자고 하면 곤란한 겁니다.
그 다음에 여섯 번째 봅시다. [신학생의 경건생활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장차 목회를 하면서 다루게 될 일들을 실습할 수 있도록 예비해두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어떻습니까? 굉장히 상식에 부합되고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지요. 지금 실습생과 정식 목회자로 분류시켰지요. 마태복음에 보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지요. 먼저 된 자는 목회자고 나중 된 사람은 갓 쪄낸 찐빵처럼 실습생이지요. 권사 방금 된 사람은 햇권사에요. 교회에 모든 일을 다 시키고. 햇권사는 노권사의 지시와 명령에 따르게 돼있어요.
어린아이들 마음속에 할머니는 처음부터 할머니라고 생각해요. “할머니는 언제부터 늙었어?” 아예 날 때부터 할머니로 태어날 줄 알고 있어요. 그럼 할머니가, “나도 너처럼 어렸을 때가 있었다.” 그러면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지요. 그래서 사진을 보여주지만 안 닮았다고 합니다.
인간의 젊음과 늙음에서 전부 통으로 통한다는 사실입니다. 젊은이가 늙은이고 늙은이가 젊은이고 그 인간이 그 인간으로 똑같은 인간입니다. 같은 인간을 초신자와 노털로 나눈다면 나누는 작업 속에서 인간은 자기를 어느 한 쪽에 포함이 되게 됩니다. 천국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할 때 천국으로 시작했다고 결국 지옥 갈 사람으로 만드는 셈이 돼버리거든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그 말씀을 어떻게 해야 돼요? 방향을 실습생에 목회자로 하지 말고 나중 된 이것을 나중 되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아직 발현되지 않은 인간의 근본적인 속성이라고 봐야 되지요. 그러니까 사람은 살수록 자기 본색이 점점 더 노출된다고 봐야 된다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서 장로 된 자를 존경하라는 말은 뭡니까? 장로는 십자가 복음을 바라보면서 젊은 사람과 같이 촐랑대지 않고 까불지 않고 항상 평생 살아온 것이 죄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디모데전서 3장에서 처음 입교한 사람을 집사나 감독 시키지 말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사람과 사람끼리 비교해서는 안 되고 제가 복음을 집어넣었지요. 그러면 발전하는 의미가 아니고 본색을 드러낸다는 의미로서 인생을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인간은 변한다, 안 변한다? 인간의 속성은 변하지 않고 그냥 껍데기만 날마다 날아가지요. 양파처럼 껍질만 벗겨지고 난 뒤에는 결국 말씀 앞에서 벌거벗은 채로 다 드러나게 되면 그럴 때 어린아이 같은 마음.
제가 주일날 설교에서 강도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도이어야 했다는 겁니다. 강력계 형사 되어서는 도저히 구원 못 받아요. 그리고 이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이것 말고 다른 게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돼요. “이 길이냐, 저 길이냐? 그래 결심했어.” 이 길이고 저 길이고 없어요.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이것이 하나님의 당연한 조치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실습생에게 기존 목회자가 배울 게 있을까요, 없을까요? 오히려 많이 배워야 되겠지요. 어떤 의미에서 순수함을 배우지요. 어떤 순수함? 죄 진 줄도 모르고 착하다고 촐랑대고 깐족거리는 그 순수함을 목회자는 봐야 되겠지요. 그런데 여섯 번째 신학생의 경건생활을 위해서 이렇게 한다는 말은 교회의 기능인을 만드는 거예요. 교회를 키울 수 있는 요령들을 가르치는 겁니다.
그렇다면 젊은이들은 그 요령들을 습득하겠지요. 그래야 선배들처럼 된다고 할 거니까. 그렇게 되면 주님의 계획은 껍질 벗겨서 죄를 드러내는 반면은 이런 교육은 모방과 흉내를 반복시킴으로써 겉만 번지르르한 신자인 체하는 위선 덩어리를 한꺼번에 양육 받고 교육받는 셈이 되고 마는 겁니다.
[특히 설교를 준비할 때는 설교의 목적(신앙과 열매)이 청취자들의 내면에서 최대한 이뤄지도록 준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설교는 말씀의 선포가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설교의 목적이 덕성의 함양에 있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지적해줘야 한다.]
설교의 목적이 교인들의 덕성에 있다고 가르치는 선배 목회자들의 사고방식의 기대치가 뭡니까?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데 기대치를 갖고 있지요. 그렇다면 그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결국 예수님의 사람이 되는 게 아니고 교회의 사람, 교회의 기능인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겁니다.
제가 여섯 번째에 대해서 공격을 해댔습니다. 그럼 이 이야기를 스페너가 듣고 있다면 나한테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라면 썩어빠진 교회에 대해서 대안이 뭐냐, 주장이 뭐냐고 하겠지요. 하여튼 오늘 북 치고 장구 치고 혼자 다한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일함으로써 우리도 일해요. 어느 쪽이 더 일 많이 하는지 경쟁관계에 놓여있습니다. 내가 아이를 돌보는 것이 내 일이냐, 주님의 일이냐? 하는 경쟁관계에 돌입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뭡니까? 내 일이 어떻게 주의 일이 될 수밖에 없느냐를 늘 찾아내고 발견하고 주님이 우리를 관장하고 있다는 것을 감사하면 되겠지요. 그게 성경에 나와 있는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겁니다.
왜 성경대로 한다면서 성경으로 안 돌아가지요? 성령의 열매가 업적이 있어야 열매되던가요? 교인수가 최소한 일곱, 여덟 명 이상 돼야 성령의 열매입니까? 성령의 열매에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 속에 성도 15명 돼야 된다는 게 있습니까? 왜 없는 것에 그렇게 관심들이 많고 성경에서 강조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사람들이 기존교회라고 우기는 것에는 동조해서 강조하는 거예요? 그 자체를 우리가 날마다 회개해야 돼요.
“하나님 기도했습니다.” 또 적어볼게요. 같은 말로. “하나님 기도했습니다.” 앞의 것을 일방적으로 지어내 볼게요. “하나님, 기도하라 해서 기도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걸 주셔야지요.” 이건 뭐예요? 어떤 실적을 노리고 기도가 중간에 수단으로 전락했지요. 노리는 걸 지워버리면 이것만 남아요. “하나님 기도했습니다.”
엄마가, “너, 숙제 하면 스마트폰 바꿔줄게.” “엄마 숙제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요. 스마트폰이란 상품이 걸렸는지 몰랐지요. 그냥 숙제하는 것이 낙이고 평소에 소원이고 즐거움이고 행복인 줄 알았지. 나중에 스마트폰 노리고 한 거예요. 우리 집안에 그런 일이 있다고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수능 쳐서 전교 10등 안에 들면 자동차 사줄게.” 아버지가 하도 공부를 안 하니까 농담처럼 이야기했는데 걔는 진담으로 듣고 진짜 공부 열심히 해서 10퍼센트에 들었어요. 운전면허증도 없는데 사줄 리가 있습니까. 안 사주니까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리려고 시도한 거예요. 꼭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목적하는 걸 줄줄 알고 교회 나왔는데 안 주니까 삐져서 6개월 안 나옵니다. 나와도 소용없는 걸.
두 번째 해볼게요. “하나님, 하기 싫은데 주께서 시켜서 기도했습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왜냐하면 기도하고 싶은 사람 아무도 없어요. 우리는 기도해서 얻는 것보다 기도할 이유도 없이 알아서 다 채워줬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