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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돌판 140704강의출애굽기

돌판 140704

이름 : 이근호(IP:119.18.89.5)

한윤범(IP:14.♡.134.60)

14-07-09 11:54

20140704a 울산강의-출애굽기 32장 : 돌판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출애굽기 32장 15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증거의 두 판이 그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편저편에 글자가 있으니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나 외에 다른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는데 그러면 형상 없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이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피조물이 하나님을 온전하게 섬길 수는 없는 거예요. 개가 개집보다 크면 개는 개집 바깥에서 살아야 되잖아요. 친히 만드신 이 세상보다 하나님이 더 크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세상 어느 한 장소에 계실 수는 없는 겁니다. 만약에 그 장소에 있다고 치면 다른 장소에는 안 계신 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모순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비를 내리실 때는 그 지점에서 비를 사방으로 내리셔야 돼요. 그러나 우리가 알기는 비는 하늘에서 내리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물을 뿌려서 오늘은 필리핀, 내일은 브라질 이런 식으로 비행기 타고 가서 뿌릴 수는 없는 거란 말이죠.

하나님을 소유할 수 없고 또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 수 없다면, 만약에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었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인지. 형상이 있는 그곳에만 하나님을 만난 게 돼요. 형상이 없는 곳은 하나님이 없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겁니다. 예배당에 주님 계시면 보통 문제가 아니죠.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고, “다음 일주일 후에 봅시다.” 하고 집에 가면 집에는 안 계신 게 되거든요.

그래서 예배당은 성전일 수 없지요.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을 성전이라고 하지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속에는 우상 숭배하는 버릇이 남아서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해서 상대적으로 자기 집은 성전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긴장을 늦추고 싶은 충동이 있습니다. 자기 집 화장실을 성전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물론 화장실에 성경구절 써넣으면 성전 되겠지요. 공중화장실을 성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전이란 거룩하게 꾸며야 돼요. 합기도나 이런 것 적어서는 안 되고 고상하게 꾸며야 되거든요.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의 장막이 거룩하게 묘사가 돼있으니까 천주교에서는 구약의 모양대로 만들어서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를 만족시켜서 사람들로 하여금 천주교에 지배받도록 했습니다.

개신교가 교회를 개혁하려면 온전히 개혁해야 되는데 모든 인간은 성직자다, 믿음으로 의인된다,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라고 이야기해놓고 막상 그들이 교회 짓고 할 때는 다시 천주교로 귀환해버렸지요. 왜 그랬는가? 진리도 먹혀야 진리지 먹히지 않으면 진리라고 사람들이 간주를 안 하는 겁니다.

노아가 진리를 외칠 때 자기 식구 외에 단 한 사람이라도 그 복음을 알아들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아가 지옥 갔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노아를 하늘나라에서 박대했습니까? 어디 실적도 없는 게 여기 있어. 나가! 구원은 실적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 진리로 가고 복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실적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나름대로 내가 여기 있음에 나로 인하여 생길 때 그게 실적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음이 아니라 예수님 계심에 예수님 자신의 일을 펼친 그 결실, 결과물로 성도가 구원받는 겁니다. 그렇게 되거든요.

결실이란 말은 인간이 자기 노동에 대한 어떤 업적, 실적들을 기대하는데 왜 사람들은 교회와도 천국 가면서도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얼마나 큰 업적을 소유하고 있는지 거기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뭐냐 하면,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진리에 관심이 없어요. 내가 사는 데 어떤 게 재미있을까? 이게 인간은 가장 우선입니다.

프로포필 등 마약류를 주사 맞는 연예인들도 주사 맞을 때 아플 텐데 왜 맞지요? 마약이 주는 즐거움을 끊을 수 없거든요. 특히 도박하는 사람들. 10원 빵으로 시작해서 나중에 만 원, 백만 원 씩 하는 도박에 빠지는 이유, 증권에 빠지는 이유, 착실하게 하루 12시간 일해서 150만 원 월급 받으면 되는데 꼭 회사 때려치우고 증권해서 한 몫 보겠다는 이유가 뭐냐?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재미가 없어서 그래요. 무척이나 진리 같은 이야기를 한 것 같지만 사실은 인간이 사는 것은 보다 재미있는 것을 추구하면서 사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이라든지 기도, 어떤 사람은 기도에 매진하는 사람이 있는데 왜 기도에 매진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기도하는 게 재미있거든요. 돈 없는 신사가 왜 기생집을 기웃거립니까? 집에서 빈대떡이나 붙여먹지. 빈대떡 붙이는 것보다 기생집이 훨씬 재미있거든요. 안 가봤으면 재미있는 줄도 몰랐는데 한 번 가보고 나니까 재미있는 거예요. 왜 나이 오십 넘어 늙수그레해서 콜라텍에 갑니까? 콜라에 환장한 게 아니거든요. 춤에 환장했어. 춤추는 이성의 짝에 재미가 난겁니다.

아까 식사하는데 우리 옆에 50대 아줌마들이 볼링에 재미 들린 사람들이에요. 시끄럽게 해서 들리는데 들어보니까 볼링에 빠졌어. 빠질 때 그냥 빠지는 게 아니고 천 원 내기부터 볼링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도대체 복음이고 예수님의 십자가고 다 이차, 삼차 문제고 근본적으로 재미있는 걸 찾습니다. 사업을 왜 하느냐? 돈 버는 재미로 하는 거예요.

오늘 십계명을 생각하는데 십계명이 재미납니까? 재미 전혀 없어요. 여기 본문에 보니까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는데 돌 판이 두 개 있고 글씨가 써있다는 거예요. 여기에 무슨 글씨가 써있을까요? 아무리 봐도 십계명 써있다는 게 없는데 다른 제사법을 썼을 수도 있잖아요. 여기는 글씨만 썼다고 했지 십계명 썼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런데 옛날부터 여기에 십계명을 썼다고 하는가? 그것은 신명기 10장 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총회 날에 산 위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그것을 내게 주시기로”

신명기에 보니까 십계명 쓴 건 맞는데 이제부터 골치 아프고 어려운 게 있어요.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어요. 형상을 만들게 되면 특정 지점을 점유하게 되고 다른 장소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게 되거든요. 그래서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과 교제하고 통하는 방식이 인간 쪽에서 만들어낸 것은 전혀 해당이 안 되는 겁니다.

제가 전에 세례요한의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차이를 설명해드렸습니다. 물세례는 인간이 뿌리든지 그 사람을 요단강에 집어넣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성령세례는 어떻게 줍니까? 제가 야구 투수 같이 던지면 됩니까? 부흥사들처럼. 호떡처럼 붙는 거예요? 물세례는 인간이 행할 수 있지만 성령세례는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어요. 뭐 뜨거운 것? 뜨거운 것이야 난로 끌어안고 자면 뜨거워요. 여성들 같으면 갱년기 되면 뜨겁습니다. 그럼 오십 넘으면 자동적으로 성령세례 받은 겁니까? 뜨끈뜨끈하니까.

이것을 두 지평이라 하는데 서로 다른 세계가 섞이게 된 거예요.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이 물세례 줄 때 모든 사람은 물세례 받고 있어요. 어느 누구나 할 것 없이 거기에 참석한 사람은. 그런데 유독 물세례 받는 동시에 예수님에게만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 같이 위에서 성령이 내려오면서 성령세례 받습니다. 누구는 무뿌리 먹고 누구는 인삼뿌리 먹는다고 하는데 같은 요단강인데 누구는 물만 적시고 나오고 누구는 성령세례 받아버렸어요.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이 인정하는 인간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성령세례 받을 때 하늘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왔어요. 저분만이 성령세례 받았다. 그런데 앞으로 성령세례 받은 저분이 다른 사람에게 성령을 주실 분이라고 세례요한이 그 사태를 설명하고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것은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다수가 있더라도 하나님은 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단 한 명 중심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천국을 이루겠다는 거예요. 단체로 오는데 단체를 받아주는 게 아니고 천 명이 오더라도 구원은 오직 한 명을 통해서만 천국으로 넘겨질 수 있습니다.

늙어서 오는 게 아니고 하나하나 피 검사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영생을 얻을 자가 없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럼 예수님한테 가면 되지.” 하는데 예수님한테 가게 되면 예수님의 형상이 돼버려요. 예수님이 있는 장소에만 천국이 있고 그 외에 장소에는 천국이 없는 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만약에 울산에 계시다면 저기 필리핀이나 이탈리아나 영국 사람들은 차비 깨나 들어요. 비행기 타고 인천공항 내려서 울산까지 와서 이 장소에 와야 돼요.

예수님 존재 자체가 구원의 길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상당히 낯선 생소한 이야기지요. 왜냐 하면 이천 년 교회 역사가 전부 예수를 통해서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다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여기 존재하심이 우리의 구원의 길이 아니라고 했지요.

그러면 뭐냔 말이죠. 이렇게 하면 정리됩니다. 예수님 한 분이 만들어낸 사건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이 만든 사건이 돼버리면 예수님 있는 장소라는 게 필요치 않지요. 주님 쪽에서 일으킨 사건은 동시에 일으킬 수도 있고 그것은 주님께서 위에서 일으킨 사건에 어느 누구도, 사건이란 다른 말로 사태라고 볼 수 있거든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멀리서 먹구름이 온다. 먹구름이 와서 비를 내린다면 만약에 우산을 쓰지 않았다면 길가다가 흠뻑 적을 수밖에 없지요. 엄마가, “너는 왜 비를 맞았어?” “소나기라는 사태를 만났어.” 그러면 엄마가 하는 말이, “너는 왜 ‘소나기야 저리 가.’라는 말을 안 했어.” 소나기가 무슨 강아지입니까? 예수님은 강아지가 아니거든요. 예수님은 존재가 아닙니다. 부활 이후에 사건과 사태를 유발시키기 때문에 사건과 사태의 특징은 뭐냐? 퍼부으면 저항할 길이 없다는 겁니다. 그냥 소나기를 만났지요. 소나기는 둘이 연애할 때 “이쯤해서 와야 할 텐데.” 하고 시계 보고 오는 게 아닙니다. 그냥 덮친 거예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물세례, 성령세례는 신약이지요. 우리가 보고 있는 출애굽기는 구약이고. 그러면 구약에서 신약적인 요소가 있어야 되겠지요. 있어야 된다는 말은, 서로 다른 두 지평이 섞이는 거예요. 인간들은 형상을 만들어서 형상 중심으로 그 장소에서 하나님과 소통하려고 할 것이고, 하나님은 그 차원을 없애려고 했지요. 형상을 만들지 마라. 송아지든, 거룩한 인자하신 할아버지나 그런 식으로 형상을 만들어서 이 정도로 자비롭다고 할 때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는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동참하지는 않지요.

그러면 제가 신약 이야기했습니다. 물세례, 성령세례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구약 때는 순간순간 뭐가 터져야 된다? 사건이 있어야 되겠지요. 사건이 있으려면 사건을 제공하는 조건이 있어야 되지요. 이 용어 자체가 은혜로운 용어가 아니라서 미안합니다. 사건이라든지 조건은 수학의 집합론에 나오는 용어에요. 목사가, “여러분, 조건입니다.” 하면 은혜 됩니까? “믿습니다.” 해야 은혜 되지. 종교적으로 아는 용어를 써야 되는데 일부러 피해갑니다.

사건이란 어떤 특정 조건에 부합되면서 그 조건에서 사건들이 쏟아집니다. 인간은 자기가 실적으로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형상을 만들지요. 이 형상을 하나님은 우상이라고 한 거예요. 이게 구약 때입니다. 신약에서는 인간의 탐심을 우상이라고 했어요. 탐심은 형상, 형체가 없지요. 형체는 없지만 어차피 인간은 우상숭배자일 수밖에 없다.

어렵기 때문에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십계명은 7계명을 어길 때는 5계명은 어긴 게 아닌 게 되지만 신약에 와서는 7계명 어긴 것이 5계명 어긴 것이고, 5계명 어긴 것이 10계명 어긴 것이고, 10계명 어긴 것이 1계명 어긴 것으로 돼있어요. 이게 지뢰밭이 돼서 동시에 다발로 터지게 되지요.

그 근거가 뭐냐 하면, 사랑하지 않고 법 지키면 모든 율법을 어긴 게 돼요. 십일조 드리고 탐심 했다? 그러면 그 십일조는 안 낸 만도 못해요. 그런데 사람들이 십일조 낼 때 뒤에 탐심과 겸하여 내지요. 특별 헌금할 때 이유가 반드시 붙습니다. 탐심이 붙지요. 그러면 그 헌금 자체가 우상숭배에요. “하나님이여, 우상을 받으시옵소서.” 이것이 십일조에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사랑을 건드리면 모든 율법을 다 건드려요. 멧돼지가 어디로 올 줄 몰라서 군데군데 딸랑이를 설치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를 건드리니까 전체를 건드린 거예요.

베드로가 일곱 번을 용서할 때 그 사람은 무슨 죄를 졌습니까? 우리는 보통 용서한다면 죄 안 진 게 되잖아요. 주기도문에 보면, 우리의 죄를 사해달라는 게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남을 용서하는 것이 굉장히 경건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로 생각하는데 베드로가 일곱 번 용서할 때 490번 용서를 안 한 게 돼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약이 올라서 490번 용서하게 되면 베드로는 무슨 죄를 지은 겁니까?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은 죄를 졌어요. 베드로가 일곱 용서하고 490번 용서하면 할수록 점점 더 그 사람에 대한 사랑보다도 남을 용서해 줄 정도로 대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과 애착이 더욱 더 강렬해지거든요. 이게 우상숭배에요.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시작했던 우상숭배가 신약에 와서는 뭘 해도 우상숭배라. 고래축제에 참석해도 우상숭배에요. 왜? 탐심이니까. 유대인들은 인간은 탐심이 있다고 가르쳤어요. 예수님은 그렇게 가르친 게 아니고 탐심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속에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러운 거죠. 그러면 얼추 나오다가 그만 나옵니까? 우리가 오래 살면 살수록 끝도 없이 나와요. 잡아당기면 계속 나와.

중요한 이야기니까 다시 하면, 신약에서는 하나를 건드려도 전 율법을 건드린 것이고 그래서 하나를 어겨도 모든 율법을 다 어긴 것이 되는 겁니다. 그 뜻은 하나를 지키면 전체를 다 지킨 것이 된다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그 하나가 뭐냐? 그게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에서 율법적인 지평과 사랑의 지평이 섞여있지요. 섞여있어서 율법은 우리를 저주 아래 있게 하고, 사랑은 그 저주 속에서 피어나요. 그래서 저주 바깥에 있으면 사랑을 몰라요. 저주 받는 가운데서 사랑은 피어오릅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거든요.

이제 사건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그게 십자가라면 목수한테 부탁하면 만들 수 있습니다. 길거리 가판대에서 액세서리로 십자가를 팔아요. 그것은 형상이고 물체고 사물입니다. 물질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하는 십자가는 물질적인 십자가가 아니고 사건이라니까. 사건은 우리가 짐작할 수 없어요. 하지만 사건이 들이닥칠 때 그러한 기미는 느낄 수가 있어요. 매사가 내 뜻대로 안 돼요. 조짐이 수상해. 으스스해요.

옛날에 무서운 영화 중에 유명한 [오멘]이란 영화가 있어요. 아이 머리가 돌아가고. 마귀가 그런 식으로 놀리는데. 여러분, 죽는 게 무섭습니까, 사는 게 무서운가요? 죽는 게 안 무서워요. 이미 죽은 입장에서는 전혀 무섭지 않아요. 안 죽었기 때문에 죽는 게 무서워요. 제가 말장난 하는 게 아닙니다. 세월호에 빠져 죽은 아이들 전혀 무섭지 않아요. 그런데 빠졌다가 나온 아이들 걱정이 심해요. 죽을 뻔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아예 죽음 세계에 들어와라. 그러면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살아야지 하면 더욱 더 무서우니까 아예 죽었다고 치자 이 말이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내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이미 죽었고 죽은 자를 매일같이 살리는 분은 따로 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공식이잖아요. 그걸 나라고 한다면 우상 숭배되니까 그런 사건이 계속 유발되는 거예요. 배운 것 써먹읍시다. 항상 우상숭배는 형상화되고, 사물화되고, 형체화되지요. 그걸 존재라 합니다. ○○있음이거든요.

노아가 방주를 믿었습니까, 주님의 약속을 믿었습니까? 주님의 약속을 믿었지요. 만약에 노아가 방주를 믿었다고 치면, 노아는 걱정이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왜냐 하면 비새면 어떻게 할 거예요? 자기 딴에 설계대로 했지만 비새면 어떻게 할 건데요? [창세기 속의 그리스도] 책 보셨지요. 서경수 목사님 교정보고, 제가 교정봐서 철저에 철저를 기했는데 여섯 군데 틀렸어요. 그걸 또 찾아내는 분이 있어요. 광주에 계신 분이. 오자 있음을 감사할 수밖에 없어요. 만약에 오자가 하나도 없으면 다음에 책 내기가 얼마나 부담스럽겠습니까? 차라리 오자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하는 거예요.

어차피 인간은 죽는 겁니다. 죽음을 안다는 것은 전체를 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십계명은 하늘에서 내려온 전체에요. 전부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과정 속에 걸어가는 인간이기 때문에 태어난 것 모르고 죽고 난 뒤를 몰라요. 그 사이만 아는 거예요.

시편 90편에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9절에 보면,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아까 인생이란 왜 산다고 했습니까? 재미나는 걸 찾아서 살지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인생이 왜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화내심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인생을 살아가는 거예요. 칠십 산 사람은 칠십 년 동안 하나님께서 화내심을 보여줬고, 팔십 산 사람은 팔십 년 동안 하나님의 화내심을 드러냈고, 백수하신 분은 백 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화내심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살아간 거예요. 하나님이 살살 약을 올리면서 백 년 동안 살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결국 백 년 뒤에 죽으라고 해서 죽은 거예요. 성경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가? 인간 자체가 자기 자신을 우상화되어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칠십, 팔십이 과정이에요. 전부를 모르고 전체를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마귀가 갖고 놀기가 굉장히 쉬운 겁니다. 마귀는 인간을 밥으로 보거든요. 그런데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은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갈렙과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서 보니까 덩치가 크더란 말이죠. 그런데 다른 열 명의 정탐꾼은 우는 거예요. “끝났어, 끝났어. 우린 다 죽었어. 못 들어가.” 그때 저들은 밥이라 했습니다. 밥치고는 덩치가 커요. 하여튼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식탁에서 머슴밥처럼 준다고 그것 때문에 벌벌 떨면서 우는 사람 봤습니까? 짜장면 곱빼기 준다고 벌벌 떠는 사람 봤어요? 말이 안 되잖아요. 이게 전체를 모르고 전부를 몰라서 그런 거예요. 제가 가락교회에서 강의할 때 천박한 예를 들었는데 몸 파는 창기들이 낮에는 심심해서 화투로 점치잖아요. 화투패를 어떻게 들춰도 그 화투 원래 자기 것이에요. 오월 나와도 지 것이고, 팔월 공산 나와도 지 것이고, 단풍 나와도 지 것이고, 누가 봐도 지 것이라니까.

인간은 자기 것이 없고 전부에 예속된 겁니다. 우리는 전부에 포함되면 되지 내 것을 따로 움켜쥐면 그것 지킨다고 그 다음부터 불안, 불안합니다. 그 이야기가 고린도전서 3장 21~23절에 나옵니다. 네가 왜 세상 것으로 자랑질하느냐? 만물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나와요.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할 때 사람들에게 뭘 주려고 합니까? 잔잔한 고래축제 같은 재미있는 것 찾지 말고 아예 전부를 다 알아버리면 그게 정말 재미난 것 아닐까요?

남편이 바람 폈다 하면, 울고불고 내 인생 망쳤다 하지 말고, “너 없어도 남자 많아. 연하도 있어.” 물론 그런 여자 본 적은 없습니다만. 인간이 그렇게 믿음 있다 해놓고 그렇게 되기 힘들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예 결혼하지 말라고 했어요. 주례 앞두고 이런 이야기하기가 곤란합니다만.

정리해봅시다.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마라. 그럼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하는가? 형상은 내 손으로 만드는 거예요. 물세례는 내가 뿌릴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성령세례는 인간이 못하는 겁니다. 물 속에 백날 들어가 봐야 천국 못 갑니다. 물세례 안에 어떤 누가 잠입했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물세례로 구원이 안 된다는 걸 물세례 하면서 알아야 된다 이 말이죠.

십일조 하면서 그게 죄라는 걸 알아야 됩니다. 십일조가 복 주고 돈 잘 벌게 해주고 구원해주고 하나님 영광과 관계없다는 걸 하면서 알게 하는 거예요. 하란 말이 아니에요. 안 해본 사람은 해보세요. 뒤에 아무 소식 없습니다. 십일조 하고 창고 지어보세요. 나중에 창고 경매에 들어갑니다. 소용없어요.

인간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데 왜 인간에게 전적으로 하나님 영광을 맡기지 아니하고 따로 인간이 행한 것으로 섞이게 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뭐냐? 사건이란 죄를 들춰내고 이 땅에는 거룩이 없음을 보여주는 사건과 더불어 이 세상에 전부에서 떨어진, 전부에서 늘어진 일부의 사건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방금 일부라고 했는데 그게 일부가 아니고 전부에서 떨어진, 혹부리 영감의 혹과 동일한 겁니다. 그걸 집합에서 부분집합이라고 해요.

부분집합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까지 부분에 포함되는 걸 부분집합이고, 자기를 뺀 것은 진부분집합이라고 중학교에서 배운 기억이 있을 거예요. 어떤 집합도 부분집합보다 클 수 없다는 공리가 있어요. 쉽게 말해서 이 몸이 난데 내가 나를 모른다는 거예요. 내가 아는 것보다 내가 더 크다는 겁니다. 참 신기하지요.

그래서 술 먹고 하는 소리가 필름 끊겼다, 내가 왜 그랬을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자기가 한 것보다 더 잉여적이고 과잉한 것, 그 행동을 ‘외설’이라고 해요. 외설이란 허가받지 않은, 누구나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용서되지 못한 다른 희한한 루트, 경로, 경과를 외설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가장 외설적인 사람은 누굽니까? 예수님이지요. 가장 외설적인 사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된다는 말은, 우리는 예수님이 오지 않으면 구원될 이유조차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이에요. 이 땅에서 벗어날 정당성도, 이유도 전혀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건을 보내서 너희들 자체가 악이고 죄가 된다는 걸 이야기해줍니다. 죄가 된다고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 나름대로 속내를 마음껏 솜씨를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여건과 환경을 하나님께서 자꾸 유도해내요.

예를 들어서 히브리서 10장 25절,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하거든요. 그런데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우리에게 뭐가 생깁니까? 반감이 생기지요. 바쁜데 어쩌란 말입니까? 직장도 가지 말까요? 안 들었으면 참 주님과 좋은 사이인데 듣는 순간 그때부터 반감이 일어나요.

치매 노인과 같이 살면 그런 현상이 굉장히 많아요. “어머니, 이 물건 중요한 거니까 놔두세요.” 하면 언제든 들고 가거든요. “제가 놔두라고 했잖아요.” 어머니가 하는 말이, “그럼 나 죽어버릴까?” 그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그걸 볼 때마다 보세요. 모이기에 힘쓰라고 하면, “그럼 취직도 하지 말고 굶어죽을까?” 그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인간은 자기의 정당함을 실적으로 나타내는 그 재미로 살아요. 마아슬로우란 심리학자가 발표했는데 인간의 제일 최고 단계의 즐거움이 뭐냐? 나는 나다. 완전히 여호와 같아. 자아실현에 있어요. 나는 나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거예요. 나의 있음 자체를 즐거워하는 거예요. 그 사실은 인간이 타고난 본성입니다. 욥도 마찬가지였어요. 하나님이 뭔데 날 건드립니까? 욥도 그러하거늘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요. 솔로몬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문제는 타고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고 죄라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숱한 경험과 체험을 해줘야 돼요. 그 체험과 경험은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 안에 휘말리면서 비로소 그걸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분명히 잘못한 게 아니고 죄가 아니에요. 그런데 어떤 사태가 일어나니까 그 사태로 인하여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 이만큼 있다면(사실은 더 깊이 들어있지만), 표면의 정도가 말씀의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사태가 일어나고 난 뒤에 이만큼 깊이 내려가니까 그전에 A라는 깊이만큼 몰랐기 때문에 나는 정당하다, 나는 할 도리 다했다, 착하고 경건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태로 말미암아 그 죄의 기준을 더 깊이 아는 순간 나는 내가 잘났다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아는 기회를 맞이하게 된 겁니다.

그러면 이게 B지점이라면 A지점에서 했던 것이 B지점에서 회개하고 반성하고 난리 쳤지요.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아직도 C지점이 남아 있잖아요. 그렇지만 B지점에서 C지점으로 내려갈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없어요. 왜? 인간은 사건이 만들지 본인이 자기를 만들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남자다. 내가 남자된 것에 대해서 우리 부모가 반영한 적이 있습니까? “아들 낳을까, 딸 낳을까?” 하고 있는데 내가 불쑥 태어나서 “아들이면 좋겠습니다.” 하고 사라지고 나중에 내가 태어납니까? 이건 아버지, 어머니 있음 자체가 하나의 존재 자체가 사건이 되어서 그 다음 사건으로 내가 태어났잖아요. 결국 내 존재가 우선이 아니고 내 존재라는 것은 항상 두 겹, 세 겹 뭔가 내가 측정 못할 사건에 휘말린 겁니다. 이것을 성령을 통해서 한 꺼풀씩 알아가면서 그 사건들이 점점 더 나의 인생에 경험이 되는 거예요.

성경에서는 정답만 이야기하거든요. 특히 신약성경은 정답만 이야기합니다. 아담 안에 있는 자는 죄 안에 있다. 얼마나 간단해요. 사람이 죽는 것은 죄 값으로 죽는 것이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사람은 죄 값으로 죽는 건데 유병언은 왜 숨습니까? 숨는 유병언이 수상해. 자기가 안산 아이들 죽은 것과 관련 있습니까? 유병언이 지금이라고 용감하게 나서서 문창극처럼 나서야 돼요. “그 아이들 죽은 것은 신의 뜻이다.” 이렇게 나와야지. 왜 숨어요. 구원파라며, 구원받았다며, 다시는 죄 짓는 게 없다며? 주님은 죄 짓는 게 없어도 사람에게 나타나서 용감하게 돌아가셨는데 왜 유씨는 용감하지 않고 비겁해요?

지금 우리가 전체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시 정리해봅시다. 십계명, 율법 다 같은 것이니까 법은 전체다. 법 안에는 전체의 모든 정답이 압축되어서 들어있어요. 법이 우리에게 적용이 되게 되면 한 꺼풀, 두 꺼풀 펼쳐지면서 낯선 사건에 휘말려 들어갑니다. 들어가면서 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입을 막고 죄 아래 있다는 것을 실감나게 하는 거예요. 우리가 죄 아래 있다면 죽어 마땅하지요.

우리는 전체를 아는 사람으로서 공식을 알았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저주가 있어 죽는다. 그러면 뭐가 과잉입니까, 뭐가 이상한 겁니까, 뭐가 외설이에요? 죽어야 되는 왜 살아있지요? 이게 덤이 되는 거예요. 어느 축제에 김국환이 온다는데,

타타타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바람이 주는 날은 바람으로
비 오면 비에 젖어 사는 거지
그런 거지 음 어허허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
한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
무슨 재미 그런 게 덤이잖소

인간은 덤으로 살잖아요. 덤으로 사는 것이 전부가 덤입니까, 일부만 덤입니까? 전부가 덤이지요. 전부가 덤이 되려면 어떤 상태에 있어야 돼요? 십계명 앞에서, 말씀 앞에서 우리는 진즉에 안 살아도 되는데 주여, 왜 살려주십니까?

여러분 사고실험, 상상해서 실험해보세요. 흉가가 있다. 처녀가 소복 입고 나타나고 어릴 때 동자가 나타났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그런 곳에 산다든지 지나갈 때 어떤 사람이 거기서 겁나지 않을까요? 이미 죽어서 귀신이 된 사람은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여기가 내 자리구나.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우리가 자꾸 나는 살았고 귀신은 죽었다고 생각하니까 무서운데 나도 이미 죽었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친구 삼으면 되는 거예요. 친구야 놀자. 그 흉가 들어가서 친구 찾는 거예요. 전부를 안다는 것이 뭔가 우리의 변화로 이어져야 되겠지요.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60)

14-07-09 11:55

20140704b 울산강의-출애굽기 32장 : 돌판
(강의:이근호 목사)

십계명에서 두 가지를 알아야 돼요. 하나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해놓고 십계명은 물체잖아요. 돌이잖아요. 인간에게는 형상 만들지 말라고 해놓고 하나님 자신은 형상 만들고. 그럼 그것 섬기면 어떻게 하려고. 십계명 있는 장소에만 오는 겁니까?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해놓고 돌 판이 왔다는 겁니다. 물론 돌 판이 송아지는 아닙니다. 어쨌든 형상이잖아요. 눈에 보이는 가시적이잖아요.

두 번째는 말씀을 어길 때 돌 판이 스스로 깬다는 거예요. 저쪽 백성의 머리를 깨야 될 텐데 왜 모세에 의해서 돌 판이 깨지느냐 말입니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둘 다 물체로, 존재로 설명하면 안 되고 어떤 사건을 보여줘서 백성들로 하여금 낯선 사건에 휘말리게 하는 하나님의 작전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는가? 사건을 통해서 만납니다. 어떤 사건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깨어져야 마땅하는 것을 들춰내는 사건. 지키라고 준 말씀조차 우리 면전에서 우리한테 줄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렇게 원초적으로 말씀을 지킬 수 없음이 폭로되는 사건, 말씀이 모자라서 우리가 천국 못 가는 게 아니고 줘봐야 소용없는 존재인 우리, 이것을 발각시키는 사건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건을 할 때 거기에 동원되는 이런 물체들이 있단 말이죠. 돌판, 모세. 모세는 인물이지요. 인물이 물체를 들었어요. 모세도 존재고 물체도 존재지요. 그걸 바라보는 인간들은 자기를 스스로 존재로 보는 거예요.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결합되지 않는 간격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소나기 올 때 소나기와 나와 간격이 있는가요? 그냥 덮치지요. 그런데 먹구름이 저만치 있을 때는 나와 몇 킬로미터의 간격이 생기지요. 그때는 옷도 말짱하고 물 한 방울 안 젖은 거예요. 아직 사건이 덮치지 않았기 때문에. 뭔가 징조는 오지만 피하면 되니까. 이건 존재와 존재에요.

예수님이 계시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 자들이 열두 제자들이었지요. 열두 제자가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옆에 몇 명 있었습니까? 다 가버리고 단 한 명도 붙어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베드로가 예수님 잡히고 뒤에 왔을 때 성경에 이렇게 돼있어요. 시선이 마주쳤어요.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베드로가 울어버렸지요. 베드로가 닭이 울 때 뭘 느꼈느냐 하면, 세상 모든 것이 주님과의 사이에 간격이 있는 게 아님을 안 거예요. 심지어 발걸음도 세시고 머리카락도 세신다는 것이 그냥 과장된 말이 아니고 빈 말이 아니에요.

베드로 장모가 열병으로 죽을 뻔했을 때 예수님이 찾아가서 낫게 하지요. 우리는 존재로 생각하면 예수님이 베드로 장모를 낫게 했다고 보지만 법은 뭡니까? 전부지요, 전체지요. 전체로 확장해서 보면 병들게 해서 병 낫게 한 거예요. 병 주고 약 준 거죠.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듯이 치료제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병을 들게 한다는 말을 한 거예요. 치료제의 효과를 보여주기 위해서. 에어컨 켜서 감기든 게 아니고 원래 감기들만 한 잠재적 요소가 있기 때문에 주께서 에어컨 키게 하고 감기들 게 하신 거예요. 기침 나게 하시고. 심지어 알레르기 비염 들게 하시고.

하여튼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고장 난 시계처럼 이미 고장 났어요. 고장 난 걸 고치고 가봐야 또 고장 나고 고치고. 현미 먹고 고장 나고, 닭 가슴살 먹고 살 뺐는데 요요현상으로 또 찌고. 어디 손댈 때가 없어요. 그러다 죽잖아요. 힘 빠지면 죽는다니까요. 처음부터 죽으라고 태어난 걸 모르고 죽으란 걸 자꾸 고친다고 한 평생 볼 일 다 보는 거예요.

“이만큼 고쳤습니다.” “어쩌라고?” “이만큼 살았습니다.” “어쩌라고?” 어차피 죽으면 그만인데. “그럼 허무주의로 살까요?” 허무 같은 소리하고 있네. 허무주의로 살 가치도 없어요. 우리는 말려들었어요. 주님이 하신 계획에 말려든 겁니다. 재주 있게 말려들었지요. 안 말려들면 큰일 나요. 안 말려들면 지옥 가요. 말려들었기 때문에 천국 가게 된 거예요.

그래서 남들이 하지 못한 모양새를 우리를 통해서 발현되도록 하시는 겁니다. 남들은 십자가 같은 게 아무짝도 소용없는 그것이 우리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이게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거고 교회 와서는 기적만 소유하려는 그런 이단들에게 정말 듣고 싶지도 않는 이야기지만 우리한테는 얼마나 귀한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에 그들이 추구하는 두 가지를 우리는 아낌없이 포기해버립니다. 하나는 나는 똑똑하다는 것과 하는 하나님 믿고 이런 덕을 봤다는 것을 애초부터 말끔하게 포기했습니다.

무엇이 기적이냐? 진즉에 죽어야 될 우리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자체가 덤이잖소. 그냥 빈손으로 온 인생에 덤이잖아요. 이게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이 되는 겁니다.

이러한 일련의 이야기를 정리정돈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건을 일으킬 때 겨냥한 건 있어요. 우리로 하여금 개선해봐야 소용없는 죄인이다. 그런데 죄를 죄 되게 드러냈다는 그것에 네 힘으로 해결되지 죄가 어떻게 나의 개입으로 말끔하게 이미 해결된 조건이 드디어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돌 판이 깨어짐이 조건이 되는 겁니다. 돌 판이 안 깨어졌으면 그들은 다 죽습니다. 그들을 죽이는 돌 판을 깸으로써 그들의 목숨이 부지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죽이시는 회초리를 스스로 자기에서 때리시는 거예요. 그게 대신 죽으심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의 이순신 장군의 죽음으로 보지 마시고 대신 죽으심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는 대신 죽으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사는 주님의 인생이 되는 거거든요. 그리고 천국이라는 것도 대신 죽으심만 온통 가득 차 있는 그게 천국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기 좋은 것, 그런 것은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가 아니고 주님의 대신 죽으심의 성과와 영광성과 효과로만 가득 차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나는 죄인이며 주님께서 대신 내 죄를 사했다는 것을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오늘 죽어도 낙원에 못 갑니다. 강도가 십자가에 죽을 때 직업이 뭐였습니까? 강도로 죽었지요. 강도는 알아야 돼요. 내가 강도이어야만 하는 것. 내가 다시 태어나도 또 강도이어야 하는 겁니다. 내가 강도이어야 내가 구원될 수 있어요.

어떤 강의에서 제가 장난삼아 물었거든요. 다시 태어나도 지금 아내와 살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버럭 화를 내면서, “미쳤나. 차라리 죽겠나이다.” 차라리 안 태어나겠다고 나왔어요. 그런 이야기하면 여러분은 뭐라고 합니까? “Me to. 나도 마찬가지야. 누가 좋아서 사나.” 하지만 그렇게 서로를 배격해도 다시 태어나면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돼요. 이혼해도 이혼할 사람 또 만나게 돼있어요.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내용이 그거에요. 전장에서 죽었는데 살아나서 또 투입되어서 전에는 실수해서 못 했는데 한 번 경험했기 때문에 총 잘 쏴서 전쟁 영웅이 되는 이야기. 열댓 번 죽었다가 살아나니까 경험으로 탱크가 올 걸 알고. 그걸 반복성이라고 하는데 사건의 속성 중 하나가 반복성입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나 역사적으로 십자가 사건은 이미 십오 년 전에 끝난 사건이에요. 그러나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이야기해요. 이미 지난 사건인데 성령 안에서 계속 반복되는데 십자가 지신 그 취지만 계속해서 이 세상에 적용시키기 때문에 모든 게 십자가지요. 예를 들어서 선풍기 돌아가는 것도 예수님 희생 때문에 돌아가는 거예요. 고래 축제하는 것도 주님의 희생 때문에 축제하는 거지요. 내가 지금 살아가는 것도 심지어 죽는 것도 다 주님의 사랑 때문에 그것도 대신 죽음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나온 힘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결국 이건 뭐냐? 존재에서 사건으로. 존재는 왜 안 되느냐? 존재가 되면 존재 자체가 우상이 되니까. 주님은 사건인데 인간은 자기를 존재로 인식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그래서는 안 되는 존재가 인간이에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했잖아요. 창세기 2장에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지요.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존재로 본 거예요. 존재는 스스로 간격이 있다고 했지요. 내가 안 따먹으면 안 죽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한두 번이지 그 앞으로 지나갈 때마다 보암직도 먹음직도 한데 십 년 참고 그 다음에 따먹으면 봐주기 있기, 없기? 없기. 십 년 참아도 안 봐줘요. 이십 년 참아도 안 돼요.

하나님의 명령은 사건화 되었기 때문에 오 년 동안 술 안 먹었다고 해서 술맛 떨어집니까? 오히려 폭풍흡입, 그동안 못 먹은 걸 한꺼번에 다하지요. 사람이 힘든 일, 어려운 일 겪고 난 뒤에는 반드시 마음 풀자고 할 때 주로 어디 갑니까? 질 좋지 않은 곳에서 풀지요. 우리가 힘든 일했으니까 봉사 활동합시다. 이런 것 없어요. 봉사 활동 실컷 했잖아요. 그러면 진탕 술 먹기, 폭탄주 먹기. 정반대되는 것으로 풀어줘야 돼요. 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우리는 균형이 중요하기 때문에.

여성들의 명품 소비가 언제냐 하면, 추석 전이 아니고 추석 후에요. 설 후. 간만에 시집살이해서 성질나는데 쇼핑으로 푸는 거예요. 쇼핑하면 관절도 다 나아요. 세 시간씩 돌아다녀도 다리가 안 아파. 아픈 곳이 안 생겨요. 이상해. 죽은 자도 쇼핑하라고 하면 일어난다니까. 깁스했어도 기어이 옷 차려 입고 찍어 바르고 나선다니까. 얼마나 인내한다고 감내한다고 힘들었습니까.

인간이 존재로 보입니까? 인간은 선과 악이 밀고 당기는 장이에요. 그걸 사건의 장이라고 했지만 사건의 조건이고 요건입니다. 우리는 성질나면 성질 값을 하게 돼있어요. 선하다고 하지만 그 선이 악을 버티는 방파제가 될 수 없습니다. 어릴 때 착하지요. 나이 들면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처가 친척 가운데 정말 착한 조카가 있어요. 나이가 사십 좀 넘었는데 어떤 류냐 하면 육영수내지는 신사임당 류에요. 그런데 얼마 전에 만났는데 하는 말이, “내가 이것 때문에 얼마나 스트레스 받는지. 성질낼 줄도 모르고 늘 착하다는 것 때문에 본의 아니게 착한 짓을 해야 되고 착한 티를 내야 된다는 게.” 여러분 보니까 전혀 해당이 안 되는 것 같으니까 안심 푹 놓고 이야기합니다. 전혀 그런 류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 자체가 움직이는 사건입니다. 폭탄이 언제 터질지 몰라요. 그 사건을 이 세상의 윤리, 도덕으로 대충 두부 만들 때 간수로 맞추듯이 비율을 맞춰놓은 거예요. 이 정도를 나라고 보자. 그러다보니까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경계 또는 경계선을 의식하게 돼있습니다. 아론이 우상 만들 때 다른 사람들을 동원했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한 공동체기 때문에 일단 경계선을 유보한 겁니다. 나는 반대라고 나설 수가 없어요. 아론이 모세 형이니까 권위를 갖고 있으니까. 아론이 진리에 가까우니까 그 경계선을 허물고 우상을 도입했습니다. 동생 모세가 시내산, 하늘에서 내려오면서 이 경계선 자체를 무산시켜버렸지요.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그게 돌 판이 깨졌다. 분명히 돌 판이 깨어졌는데 이걸 뭐라고 해석하느냐 하면, 언약이 깨어졌다고 본 겁니다. 언약이란 약속이거든요. 약속이 깨어졌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의 느낌이 어떻습니까? 이 느낌은 우리한테는 굉장히 낯설고 우리로서는 당황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약속한 적이 없어요. 일방적으로 하나님 마음대로 약속해놓고 우리가 우상 섬겼다는 죄목을 뒤집어씌워서 누가 깨라고 했습니까? 모세 지 혼자 성질나서 돌 판을 깼단 말이죠. 깨진 돌 판을 가루로 만들어서 깨어짐의 사건을 모든 사람에게 혀로 식도를 통해서 위장으로 내려가도록 온 공동체에 다 퍼지도록 조치를 했습니다.

그 돌가루가 건강에 좋다면 지금도 우리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팔 거예요. 모세가 지금 건강식품 판 게 아니에요. 지금 약속이 깨어졌다는 거예요. 보세요. 돌 판 깨어졌는데 약속이 깨어졌다. 여기에 우리가 납득을 할 수 없어요. 납득 안 되면 그냥 넘어가는 수가 있거든요. 돌 판을 깰 때 모세가 누구와 의논했지요? 지금 사십 일 동안 모세는 사람 만난 적이 없지요. 하나님만 만났지요. 하나님과 한 편이 됐지요. 그러면 모세 외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 본 적이 없으니까 자동적으로 저쪽이 한 패가 됐지요.

약속이라는 것이 일 대 일 대응에 의해서 추경이 돼야 되는데 약속을 깨었다 할 때 중간에 모세가 하나님과 분명히 한 편이지만 그들이 죄를 지었을 때 모세가 어느 편에 서느냐 하면, 집합에서 이게 교집합이거든요. 모세가 하나님 편에 섰다가 갑자기 사람 편에 서버린 거예요. 약속이 되려면 일 대 일이 돼야 되는데 그러면 모세가 나서서 해결해야 되지 아론이 나서서 해결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모세가 백성들을 뒤로 물려야지요. 백성들은 우상 숭배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이 없는 양 행동했잖아요. 그래서 모세가 돌 판을 없애버린 겁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간 거예요. 돌 판이 준 적이 없음으로 돌아간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앞에 누가 나섭니까? 하나님 하나와 백성의 대표자 모세가 나섭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백성을 죽일 것이냐, 아니면 애굽에서 나올 때 약속처럼 그들이 이스라엘로 살 것이냐는 새로운 약속이 도입돼야 되겠지요. 결국 방금 이야기는 약속의 갱신이라고 합니다. 갱신이란 기존의 것을 없앰으로써 보다 완벽한, 완전에 가까운 새로운 계획체가 되는 겁니다.

말로 하는 것보다 성경 히브리서 10장을 봅시다. 제가 어려운 걸 할 때 말하기가 힘드네요. 10장 9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대목을 보면서 왜 하나님이 일을 구질구질하게 하십니까? 둘째 것, 첫 것 하지 말고 간단하게 단 번에 “계약 끝.” 이러면 될 텐데 왜 폐할 수밖에 없는 걸 미리 줬느냐 말이에요. 그건 낭비 아니에요, 헛수고 아닙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그동안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책임지시려고 하는 거예요, 뭐예요? 참 어렵지요. 왜 일을 간단하게 능률적으로 하지 않고 첫 번 것을 주고 안 되니까 당황 가운데 두 번째 것을 주니까 끝. 왜 일을 이렇게 하세요. 하나님도 일을 일단 저질러보고 안 되면 다음에 하는 이런 하나님이었습니까?

여기서 인간은 선악과를 안 따먹어야 될 인간이 아니고 필히 따먹으라고 선악과를 주께서 보게 하시고 먹게 하신 거예요. 선악과란 존재가 존재로 끝나는 게 아니고 선악과를 인간이 기어이 따먹을 수밖에 없는 나무로 만들어서 모든 존재를 십자가 사건에 전부 집어넣는 과정으로써 이 땅에 존재들이 생겨나게 하신 겁니다. 이스라엘도 그렇고 여러분이나 저도 마찬가지고. 저 아기도 마찬가지고. 너도 존재야. 모든 사람은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거든요.

그러나 그걸 사건을 알고 자기를 알게 되면 더 이상 나는 존재로 끝나는 게 아니고 사건의 일부로써 나는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에 사건이 되는 거예요. 나는 지금 울산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한 오십 살았습니다. 이것도 하나에 사건이 되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내일 염려는 언제 하라? 내일 염려는 내일 하라. 왜 그렇습니까? 지금 사건 중이에요. 존재가 되게 되면 우리는 존재를 미래까지 확장시키려는 버릇이 있어요. 그러면 당겨서 걱정하게 돼요. 그것은 내일에 대해서 네 존재가 가담될 수 있다, 없다? 네 존재는 내일까지 확장 허가를 못 받은 거예요. ‘내일’이란 소리하지 마라. 오늘 밤 네 영혼 데려가면 내일은 없어요. 내일이 오면? 그런 것 필요 없어. 오늘로 끝이에요.

그래서 주기도문의 양식이 며칠 치 양식입니까? 하루치 일용할 양식이에요. 만나 내릴 때 몇 달치 줬습니까? 만나 구성성분이 일회용이에요. 하루 더 놔두면 썩게 돼있어요. 하늘나라 주방장이 잘 만들었어요. 단 안식일에는 하루 지나도 안 썩게 돼있습니다. 희한해요. 희한하다는 말은 인간의 지평에 낯선 영적 지평이 섞여있는 상태가 현실입니다. 고래 축제만 있는 게 아니라 탕자 축제도 같이 벌어지고 있어요.

그걸 바람 같이 부는 거예요. 이 세상에 성령의 바람이 붑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못 느끼느냐? 자기 존재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의 경계선,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내 것이니까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사수하다보니까 점점 더 존재와 존재로 굳히게 되는 겁니다.

젊은 사람들 결혼할 때 ‘1+1’은 ‘2’라는 겁니다. 1+1이 2가 돼버리면 2는 항상 어디로 환원됩니까? 1+1로 환원될 수밖에 없지요. 이건 마치 나무젓가락 같아. 젓가락인데 벌써 갈라져있어. 이미 갈라진 채 결혼해요. 뭔가 약간의 시비 거리만 있으면 갈라져. 축제할 때 아이와 손잡고 사진 찍고 해도 소용없어요.

나이 많아봐야 사건이란 걸 알아요. 존재를 확인할 때 사진을 찍잖아요. 팔십 넘은 할머니가 셀카 찍는 것 봤어요? 어느 할머니가 예쁘다고 셀카 찍는 사람 없어요. 찍지 말라고 손을 젓지요. 본인이 인정해요. 귀신이란 걸. 좀비입니다.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노인네들 겨울에 모여 있으면 시커먼 까마귀 모여 있는 것과 똑같다고. 근처에 가면 죽음의 냄새가 나요. 그게 죽음의 사건입니다. 사건의 요건은 뭐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오늘 이야기는 뭐냐 하면, 율법은 순수합니다. 거룩하잖아요. 순수한 게 깨어질 때 진정으로 이 땅에서의 순수한 게 나와요.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서마저도 순수함이 될 때 다 이루었다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어야 했고, 죄를 지어야 했고, 죄 가운데서 우상 숭배자가 되어야 하고, 그리고 그 중에 한 사람을 불러내어서 합류시킬 때 하나님의 돌 판마저 그들 속에서 깨어지는 겁니다. 모세는 약속을 깬 겁니다. 의도적으로 약속이 성립되지 않도록 약속될 수 있는 돌 판을 자기 선에서 없애버린 거죠. 예수님입니다.

모세가 예수님 역할을 해놓고 자기는 변화산에서 자신이 흉내 냈던, 그림자로 했던 그것을 실제로 역할하기를 예수님과 의논했습니다. “예수님 언제 별세하십니까?” 구약에서 했던 모든 말씀이 예수님이 죽어야 다 이뤄지거든요. 우리는 폼만 잡았는데 시늉만 했는데 그 시늉으로 본인이 구원 못 받는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진짜 하실 분이 따로 있음을 자기는 앞당겨서 폼 잡은 겁니다.

그래서 모세가 어떤 일을 했느냐고 물을 때 답변은 이겁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무슨 일을 했느냐고 이야기한 것과 같은 뜻이에요. 왜냐하면 세례요한은 모든 선지자의 부분집합을 총집결한 것입니다. 율법은 세례요한까지고 그 뒤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겁니다. 우리가 전부를 알고 전체를 압시다. 그러면 우리가 하는 모든 움직임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온 능력 하에서 하루의 눈을 뜨고 밥을 먹고, 발걸음을 걷고, 머리카락도 희어지고 이 모든 것도 주님이 주신 은혜 안에서 움직이는 겁니다.

그럼 은혜 안에서 움직이니까 우리는 순수하지 않습니까? 순수하지 않습니다. 더럽습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사건이고 그 사건은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고,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와 상대해서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는 계약 상대자가 아닙니다. 이것 하나 아시면 오늘 제대로 아신 게 되는 겁니다.

옛날 월남전에서 수류탄 투척 훈련하는데 훈련병이 안전핀을 뺀 상태에서 수류탄을 놓치자 대위 한 분이 그 수류탄을 덮쳤습니다. 사람은 죽고 덕분에 소령으로 진급되고. 그 사람 이름이 강재구 소령이죠.

우리는 뭣도 몰라요. 철딱서니 없어요.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몰라요. 눈에 보이는 것밖에 몰라요. 시진핑 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요. 엠비씨, 케이비에스 뉴스 외에는 모릅니다. 나도 누군지 모르고, 내가 어떤 과정에 있는 것도 모르고, 내가 얼마나 큰 넘어남이 있는 것도 모르고, 그저 자기 과체중, 체중 오버된 거나 알지 본질적으로 오버된 면은 모르죠. 사건은 모르고 맨난 니 존재는 어떻고, 내 존재는 어떻고, 당신은 누구고, 나는 누구냐? 모르는 거예요.

우리는 알 필요 없어요. 우리는 도매금으로 밀쳐 당했어요. 알아도 안 돼요. 내가 누군지 몰라도 돼요.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구원은 예수님이 알아서 할 문제지 예수님 믿는 내가 나설 문제는 아니란 말이죠. 내가 하루하루 인생을 살고 싶다고 5년 더 연장되고 그런 것 없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연장된 그것은 신약 때 온 약속이 얼마나 영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걸 보여주기 한 것이지. 신약에는 이미 살아도 죽었고, 죽어도 죽은 거예요. 이미 우리는 죽은 존재에요. 마지막 때에는. 산다는 게 아무런 의미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돌 판을 깸으로써 돌 판 계약을 취소, 없애버렸습니다. 이제는 모세가 자기가 하늘에서 본 이상을 이야기하지요. 너희들은 하나님을 진노케 했다고 하면서 조치가 내려옵니다. 조치 내려오기 전에 22절 봅시다. “아론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보세요. 노하지 말라고 해놓고 호칭을 “내 주여”라고 하지요. 요새 말로 “목사님은 주의 사자입니다.” 이 정도지요. 그러면 그 소리 듣고 모세가 기특하다고 합니까? 모세는 이미 하나님을 안 사람이니까 하나님을 안 이상은 철딱서니 없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조치만 내려질 뿐이지 그들과 의논할 하등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 인간은 하나님과 약속의 체결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을 따라오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너희가 나를 따라오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할 때 그러면 어찌하여야 하나님 일을 하오리까? 하잖아요. 그 질문을 들어보세요. 우리가 어찌하면 하나님 일을 합니까? 어제 누굴 만났는데 그분도 같은 질문했어요. “목사님.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면 됩니까?” 같은 질문이에요.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보세요. 자기를 뭐로 봅니까? 자기를 하나님의 언약의 존재자, 체결자로써 자기가 나서겠다는 이야기잖아요. 나서겠다는 이유가 뭡니까? 나서는 나는 구원해주시고 안 나서는 저쪽은 지옥 보내소서. 그런 뜻이거든요. 구원의 주도권은 나서는 내게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한테 있습니까? 주님은 누굴 사할 수도 있고 저주할 수 있는 권한이 주님한테 있습니다. 우리가 용서해달라고 해서 용서해주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용서해주는 자만 용서받습니다. 그러면 사건에서 우리의 요건은 뭐가 된다?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이 사건에 휘말린 우리의 요건이에요. 이 몸으로 주님께 바칩시다. 죄인으로 바치는 거예요.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어이, 죄인! 날 부르는구나. 죄인 여기 있나이다. 너 말고 죄인 중에 괴수 말이야. 전데요? 왜 죄인이냐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은 은혜를 받고 있으면서도 매순간 감사할 줄 모를 정도로 우리는 죄인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데 우리는 그것을 본인에게 스스로 비난했고, 얼마나 본인을 저주했습니까? 자기 탓을 했고 실망했습니까? 우리가 실망할 자격이 됩니까? 왜 저를 아들로 태어나게 하지 않고 딸로, 왜 저를 재벌3세로 하지 않고 빚 있는 집안에 첫째 아들로 태어나게 하십니까? 얼마든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남들은 눈이 멀쩡한데 왜 날 때부터 소경입니까? 그 이야기가 요한복음 9장에 나오잖아요.

따지고 보면 우리가 원망할 요건들이 굉장히 많아요. 왜 나는 코가 낮습니까, 나는 왜 쌍꺼풀이 없습니까? 그걸 누구한테 따져요. 자기가 언약 체결자가 아닌데. 그래서 한꺼번에 다룹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언약 사건에 말려들었다 치고 너희들의 하나님에 대한 인상이 어떤 것인지 알려줄게.

출애굽기 32장 26, 27절.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이게 바로 하나님 약속의 후유증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편이라는 이유로 칼로 형제를 자기 식구를 자기 친구를 죽이는 것이 잔인합니까? 아니면 방주 만들어서 자기들만 타고 가는 것이 잔인합니까? 둘 다 잔인하지요. 방주 만들어놓고 자기 여덟 식구만 달랑 타고 남들은 안 태워주고. 안 태워준 게 아니고 탈 사람이 없었지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는데 정신 팔렸기 때문에. 관심사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미쳤어. 방주 왜 만들었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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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9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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