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80강, 81강) 사람의 아들, 용서 140703
유튜브(80강, 81강) 사람의 아들, 용서 140703
이름 : 이근호(IP:119.18.89.5)
80강
81강
공은주(IP:211.♡.100.233)
14-07-18 18:07
80강-YouTube강의(사람의 아들)140703-이 근호 목사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지고 인자라고 하지요. 사람의 아들.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지고 사람의 아들이라고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흔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람이다, 라는 고 인식 “하나님이여, 우리는 사람입니다.”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제대로 된 자기 인식인지 예수님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살펴보라는 차원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를 사람의 아들로 표현하면서 이 땅에 나타나신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사람이면서도 자기가 누군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인간이 뭐냐, 진짜 이 땅에 사는 사람이 뭐냐, 그것은 예수님 본인이 제대로 보여주게 된다는 겁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이 땅에 그냥 사람이 단독적으로 이렇게 놓여있다고 해서 카메라 찍는다고 해서 사람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사람을 주변에 둘러 싼 이 세상에 대한 환경 속에서 사람은 어떻게 거기에 대해서 맡기고 반응하고 또는 이 환경에 대해서 수용하고 또는 거부하고 그러한 몸짓과 그러한 것에서 나오는 어떤 정신적인 면, 이런 것을 통해서 사람의 진실 된 본질을 알 수가 있다는 겁니다.
창세기3장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살게 해주신 때가 있었고 그 다음에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킨 계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 인간들은 땅위에서 살게 됐는데 그냥 땅이 아니고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저주를 유발시킨 그 환경 속의 땅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사람이 뭐냐, 사람은 저주와의 만남에서 드디어 사람의 본질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의 안목이죠.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의 안목은 모르고 사람 사는 게 힘들고 어렵고 결국은 그렇게 힘들게 살다가 결국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 주변에 100세까지 산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 100살 이내로 다 죽게 되는 겁니다. 90살다 죽으면 우리는 흔히 말하기를 90년 동안 이런 저런 일을 많이 했다고 이야기하지만, 막상 죽는 당사자는 100살 돼서 죽으나 10살 돼서 죽으나 50돼서 죽으나 물에 빠져 죽으나 공중에서 뛰어내려서 죽으나 자살해서 죽으나 결국은 죽는다는 점에서는 모든 것이 무효가 된다는 사실에 깊은 허무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과거에 떵떵거리며 잘살았다고 우겨도 죽는 순간, 이미 그것은 없어져버린 과거의 일이 되고 마는 겁니다. 없다는 점에서는 어린애에서 죽으나 노인네가 죽으나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현재 지금 나라는 것이 사라진다는 그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차별되는 것이 없는 똑같은 형편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죽으면서도 왜 죽는가에 대해서 평생을 살아가면서 그 이유를 본인들 속에서는 그것을 밝혀낼 수가 없어요. 그리고 똑같은 인간들끼리 모여서 의논해봤자 역시 똑같은 형편이기 때문에 모르기는 마찬가지거든요. 혼자생각해서 모르나 백년해서 모르나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 초반에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다. 다른 말로 사람이다, 라는 사람의 모습으로 또는 사람의 인생을 살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예수님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인간이 평생을 살아도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고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지를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태어나면 살다가 죽기 마련인데 더 이상 골치 아픈 논리를 펼칠 필요가 뭐가 있느냐, 라고 우리는 편하게, 편하게만 살고자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태어났다. 그리고 죽게 된다. 고 사이에서 경험한 것만 가지고 진리를 도출하려고 하다 보면 그러면 태어나기 전과 태어나기 후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냥 잘라버리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미뤄놓는 셈이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하면, 친히 사람이 되셔서 태어나기 전과 태어나기 후에 그러한 인간이 가야될 것까지 가야될 무덤까지 포함시켜서 인간은 이렇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 내린 결론이 바로 구약과 신약의 좀 차이가 나는데요, 구약부터 말씀드리면 시편90편9절에 보면,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 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우리가 연수가 70이어도 일순간이고 건강해서 80이 돼도 한순간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70년 동안 고생했고 당신은 80년 동안 고생한 것뿐이고 만약에 100살 살았다면 100년 동안 더 수고와 슬픔만 한 거예요. 그러다가 순식간에 날아간다는 겁니다.
그다음 11절에 보면,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시편90편에 나와 있는 이 내용을 단출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분노와 주님의 진노아래에서 하나님의 분노와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의 신체를 가지고 하나님이 자기표현을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토록 분노하고 진노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한평생 우리의 육체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표현을 해낸 그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방금 이야기한 것은 바로 구약이고, 신약에서는 뭐로 표현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시면서 아버지께 버림받는 형태로 십자가에서 죽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내린 결론이 뭐냐, 인생이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어떠한 수모와 어떠한 심판을 받느냐를 보여주는 증거물로서 도용된 것이 인간이다. 이렇게 결론내릴 수 있습니다.
사람이 왜 고생하는가,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했기 때문에 고생했다. 분노를 유발한 이유가 뭐냐,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의 근원은 뭐냐, 창세기 2장, 3장에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법칙대로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는 결국은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이 전체를 간추려서 이야기하면 인생은 뭐냐, 하나님만 알고 있는 그 죽음, 결국은 심판이고 저주지요. 그 영원한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인간이 이 땅에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에 갈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겠느냐 들겠지요. 여기 시편118편26절에 보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게 아닙니다. 그냥 자기 이름으로 부모로부터 태어나서 그러다가 살다가 죽는 거죠.
그런데 이스라엘에게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인자가 계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과 여호와의 이름이 없는 것과의 차이점이 뭐냐, 여호와의 이름이 함께 오게 되면 여호와께서 창조했던 원래 인간의 모습을 만들어내기 위한 바탕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 그 모든 바탕과 그 모든 근거를 친히 이 땅에서 마련하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서 하나님의 죄에 대해서 심판을 받는다 할지라도 다시 하나님의 의가 있는 자는 영생을 얻는 그러한 혜택과 기회를 부여받는 새로운 피조물이 탄생되는 겁니다. 주의 이름에 의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성도란 바로 주의 이름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는 겁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가 예수님인데, 예수님께서 아버지 뜻을 이룸으로서 예수님이 획득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죄 때문에 죽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우리는 우리의 주기는 영생입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복 받은 자만이 천국에 가는 참된 인간입니다.
공은주(IP:211.♡.100.233)
14-07-18 18:12
81강-YouTube강의(용서)140703-이 근호 목사
제목은 ‘용서’로 정해봤습니다. 우리가 교회 나가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교회는 복음이 전파되는데 그 복음의 내용이 뭐냐 하면, 죄지은 인간을 하나님이 용서했다는 겁니다. 그것을 기쁜 소식, 복음이라고 규정하지요. 그러면 복음이 성립되려면 죄지은 자가 있어야 되고 두 번째는 그 죄지은 자에 대한 용서가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용서 이후는 뭘까요? 용서를 받았으니까 용서받은 값을 하면서 은혜에 보답하면서 살아가는 것일까요? 자, 이러한 궁금증에 대해서 누가복음17장에 나오는 내용을 가지고 복음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용서를 중심으로 어떻게 되는지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시다가 누가복음17장11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합니다. 긍휼이라고 하는 것은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하지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열 명 모두가 깨끗하게 씻어주었습니다. 옛날부터 문둥병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표상이라 이렇게 봤습니다. 저주를 받는 이유는 죄가 있는 곳에 저주가 주어지니까 결국은 그들은 문둥병 걸릴 만큼 많은 죄를 자기 때나 자기 조상 때 이미 지은 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로 때리고 쳐서 문둥병이 되었다. 따라서 문둥병자가 낫는다는 것은 무엇에 대한 신호냐 하면 문둥병 들릴 정도로 저주 받은 죄를 하나님의 용서하심으로 깨끗케 되었다는, 하나님의 용서의 사인으로서 문둥병자들이 때로는 가끔은 깨끗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러한 유대 적 상황을 익히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문둥병자 열 명을 다 깨끗하게 낫게 했습니다. 자, 그런데 열 명이 나았으니까 그들은 더 이상 예수님을 볼 일이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문둥병을 낫고 싶었는데 예수님이 낫게 했다. 그러면 자기가 챙길 것은 다 챙긴 거예요.
그러면 우리 같더라도 “아이고, 고맙습니다.” 하고 자기 볼일을 보고 건강하게 살아서 그 사회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차별대우 받지 않고 인간답게 살면 이제 자기 인생이 남아있다. 그걸로 정리 되어야 되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자기를 낫게 한 예수님께 돌아왔어요. 9명은 병이 나았으니까 자기 얻을 것 얻었으니까 가버렸는데 한 사람은 유턴해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홉 명에 대한 태도는 제대로 이해가 되는데 그 예수님께 돌아왔던 그 한 명이 제대로 이해가 안 됩니다. 병이 낫고 싶어서 불쌍히 여겨 달라, 해서 주께서 그들의 요구대로 병을 낫게 해줬기 때문에 요구가 만족스러우면 자기 갈 길을 가야 되는데 돌아온 한 명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기에 주님께 돌아왔을까요?
제가 설명 드리면 이렇습니다. 인간이 병이 아파서 낫게 해달고 요청을 할 때, 그건 어디까지나 그 아픈 본인의 생각이고 본인의 계획이고 본인의 미래상이죠.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들어줬다고 해서 문둥병자가 낫게 해달라는 그 뜻과 주님의 뜻이 일치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은.
지금 병이 낫고 돌아선 9명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돌아온 한 명보고. “그런데 9명은 어디 갔지?” 묻는 거예요. 9명은 어디 갔습니까. 자기 챙길 것 다 챙기고 볼일대로 가는 거죠. 자기 볼일 보러 갔지요. 원래 인간은 그런 게 아닙니까? 아쉬울 때 하나님 찾고 얻으면 자기 독자적으로 사는 게 그게 인간의 태생이고 당연한 건데, 그게 뭐가 이상하지요? 오히려 돌아온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죠. 돌아온 한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을 안 거예요.
그 계획은 뭐냐, 누가복은 17장에 나온 말씀처럼 그는 돌아와서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서 사례했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병을 낫게 한 것은 내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 아니고 이미 주님께서 찾아올 때 주님의 나름대로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는 겁니다.
주님의 계획 때문에 계획을 이루어가는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문둥병 되어야 했고 그래서 문둥병이 너무나 괴롭고 저주스러워서 우연히 주님 만났을 때 우리는 요청을 했어야 했고 그 요청했더니만, 주님께서 마치 우리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병을 깨끗하게 했을 때 그 때, 아홉 명과 하나가 드디어 갈림길이 생기는 겁니다.
아홉 명은 병 낫고 지옥 가는 사람이에요. 문둥병은 나았는데 하나님의 기적은 받았는데 죽어서 지옥에 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돌아온 한 사람은 우리가 요청하는 그 계획 말고 다른 계획을 주님께서 가지고 우리에게 나타나서 그래서 우리의 병을 낫게 하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문둥병을 낫게 하는 것은 주님의 원대한 계획의 극히 일부로서 종속된 계획에 불과한 거죠. 이것은 뭐냐 하면, 바로 우리가 독자적으로 살 수 없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둥병 열 명은 자기 독자적인 계획가지고 주님 앞에 먼저 제시했지요. 우리의 병을 낫게 해 달라. 불쌍히 여겨 달라. 그 계획이 마치 우리가 요청한 계획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지 안 되는지를 병 나으면 일치되고, 병이 안 나으면 일치 안 되는 것처럼 애초부터 우리는 그런 식으로 전제를 깔고 주님 앞에 다가섰지요. 이 문둥병도 마찬가지고요.
우리가 평소에 사람들이 예수, 예수 부르짖을 때도 똑같은 입장인 겁니다. 내가 아쉬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이라고 지레짐작 그렇게 곡해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병을 낫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요청할 수 있는 우리 계획을 주님 앞에 요청할 수 없는 그런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돌아온 한 명은 깨닫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뭘 달라고 요구할 권리조차 우리에게 발휘될 수 없는 그런 처지에 놓인 그런 죄인인 것을 깨닫습니다. 똑같은 이야기가 여기 마태복음18장21절에 보면,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라고 했어요. 사람이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은 큰 대자 대비한 마음을 갖지 아니하면 용서하겠다는 마음도 생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용서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는 그 마음까지라도 정말 남들 보기에 넓은 사랑의 마음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베드로가 여기서 용서를 하는 그 주체를 본인이라고 잡고 그리고 용서가 되려면 누가 자기에게 피해를 입혀야 되거든요. 피해를 입혔는데 피해를 입힌 그 사람을 내가 용서할 수 있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피해 입힌 사람이 베드로에게 큰 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이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용서를 한 번 합니다. 용서할 때 베드로가 그냥 용서한 게 아니에요. 용서할 때는 두 번 다시 이런 죄를 나한테 가하지 마세요. 라는 조건부로 용서를 한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조건을 받아놓고 또 동일한 인간이 또 죄를 베드로에게 지었습니다. 베드로가 또 참습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 용서할 테니까 앞으로 똑같은 짓을 하지 마세요. 그렇게 해서 일곱 번이나 그렇게 왔을 때, 그 인간 얼마만큼 봐줘야 됩니까, 라는 질문을 심각하게 하는 겁니다.
일곱 번 다음에 여덟 번이거든요. 그럼 여덟 번까지 하게 되면, 그러니까 베드로가 뭐냐 하면, 내가 저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그 지점이 뭐냐, 회수로 답변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490번, 아니 오천 번이라도 너는 용서를 해야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바로 베드로가 내가 저 사람을 몇 번 용서해야 됩니까? 라고 묻는 질문 자체가 주님한테 용서하지 않고서는 벌 받을 수밖에 없는 죄가 되는 겁니다. 내가 남을 용서해요? 그건 성립될 수 없습니다. 같은 죄인이 같은 죄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용서하실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알려 주는 게 바로 주께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용서와 더불어 알려주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 땅에 용서하신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의 이름으로만 용서해야만 진짜 주께서 인정하는 용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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