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62강(두 고난), 마태복음 53강 (개인의 등장)
사도행전 62강(두 고난), 마태복음 53강 (개인의 등장)
이름 : 이근호(IP:119.18.90.53)
사도행전 62강
마태복음 53강
공은주(IP:211.♡.100.233)
14-07-22 16:56
대전140626-행22장24절(두 고난)62강 - 이 근호 목사
오늘은 사도행전22장22절 할 차례입니다. 아까 누가 말한 것처럼 예수님과 함께 있는데 왜 힘이 드느냐, 오늘 대목이 그거입니다. 사도바울은 성령이 함께 있다. 성령이 함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이 계신 곳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 말은 우리가 같은 말을 해도 됩니다. 예수님이 함께 있다. 예수님이, 성령이 함께 있다. 다 같이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곳에 예수님이 함께 있다, 하면 이렇게 따질 사람 있어요. 예수님은 하늘에 승천했다면서 왜 같이 있습니까? 이리 되거든요.
실제로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하신 분이 있어요. 뭐냐 하면, 오순절 날 예수님이 보라 하실 때, 하늘로 구름타고 올라가시고 천사들은 왜 그렇게 쳐다보느냐, 오신대로 온다 할 때, 그 분은 뭐냐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시. 공간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죠. 사도바울의 삼층 천을 생각 못하고 이층 천으로 되어 있잖아요. 이게 땅이 있고 하늘이 있고 이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전부라고 생각하니까 주님 올라가시니까 그대로 내려온다. 그러면 주님은 여기에 안 계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분은 요한복음 14장을 몰라서 그래요. 요한복음14장에 보면, 성령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됩니다. 같이 있고 하나가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28장20절에 보면,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했거든요. 참, 그 대목이 굉장히 신기한 대목인데 왜냐 하면, 주님의 재림이란 게 있다 말이죠. 재림이라는 것은 다시 오신다고 했잖아요. 다시 함께 있으면 다시 오실 필요가 없다는 것이 우리의 시. 공간에서는 그것이 말이 돼요. 함께 있다면 또 다시 올 필요가 없지요. 함께 있는데 뭘 와요. 함께 살면 그만인데. 함께 있으면, 함께 있기 때문에 다시 나타난다는 것이 예수님의 세계입니다. 성령 안의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 세계를 쥐었다 놨다 마음대로 다룬다는 뜻이에요. 자연세계 속에 우리가 갇혀있다, 이리 생각하면 깔끔하게 다 이해가 되는 겁니다. 자연세계 속에 갇혀있는 거예요. 우리는 자연세계를 이렇게 펼쳤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무한한 자연세계를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연세계를 하나의 구슬로 보게 되면, 우리는 빠져나와도 못 빠져나오지요. 여러분, 구슬 속에 무늬가 있으면 그 무늬는 구슬이 깨지면 같이 깨지게 되어있어요. 그 구슬 속에 어떤 학 그림이 있으면 학이 거기서 날아가서 튀어나오는 거 없지요. 학 조차도 구슬의 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어릴 때 구슬치기 있잖아요. 안에 무늬가 바깥으로 나올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무늬 자체가 구슬의 성분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못 빠져나오지요. 우리가 육으로 되어 있잖아요. 육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기껏 해봐야 시간과 공간으로 따지는 거예요. 시간과 공간으로.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우리는 못 빠져나오는데 주님은 빠져나오셨구나! 주께서 다시 오신다고 했으니까 우리는 여기서 기다리면 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뭐냐 하면, 이걸 한 커플 더 덮어버리면 어떻게 돼요? 그리스도의 세계로.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물질로 다루어진다. 간단한 문제 아닙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물질로 다루어진다. 생사화복 모든 생명까지도 우리의 숨 끊어지는 것까지도 참새 키우는 것도 주께서 이미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기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있다.
“우리 있는 동네에 주님 어디계십니까?” 라고 따지는 것은 “나는 지금 대한민국에 사는데 주님은 나하고 몇 킬로미터 떨어져있습니까?” 이리 묻는 것은 뭐를 고수하느냐 하면, 현재 자연세계, 물질세계를 이걸 그냥 이 원칙을 고수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그런 의문점이 생기는 겁니다. 문을 닫았을 때에 주께서 들어올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문 닫혔는데 어떻게 들어오지? 우리는 안 되지요. 우리는 안 되는데 주께서 다를 수 있다니까요. 우리를.
우리는 문 안에 갇혀있다, 이리 생각 안하고 우리는 문을 열면 나갈 수 있고 문 닫으면 우리는 여기 있다. 이리 생각하는 겁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하나의 구슬로 봐가지고 구슬 속에 들어오거든 출입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면 될 텐데, 우리는 못 나가니까 주님도 못 나가고 또 들어온다면 어느 지점에 들어오지? 들어오면 어디 계시지? 주님 오시면 어느 방에 계시지? 이런 우리의 생각을 자꾸 우리가 살고 있는 차원을 넓혀서 주님 자리하나 마련해 드려야지, 하면 곤란합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세십니다. 그걸 생각해볼 때,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신약의 사도바울은 성령이 오게 되면 이미 너희는 예수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됩니다.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하는가 하면,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과 함께 고난 받게 되어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지금 사도바울이 분명히 성령 받은 사람인데 엄청 고생을 많이 하네요.
22절 보면, “이 말 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 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죽이려고 시도를 하는 겁니다. 로마서8장이 생각이 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서 우리가 갇혀있어 못 빠져나오는 자연세계, 우리가 육신이 있는 한 빠져나올 수 없는 자연세계에서는 우리에게는 고생 있어야 됩니다.
고생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창세기3장에 의해서 고생이 있어야 돼요. 창세기3장에 보면, 아담이 죄를 짓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남자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되고 여자는 해산하는 고통이 있어야 되고 그럼 시집 안간 딸은 해산의 고통대신 뭐냐, 부모로부터 지시받는 지배받는 고통이 있어야 되고 이런 게 있지요.
이 땅은 저주스러운 곳에서 저주스러움을 만끽하면서 살아가줘야 됩니다. 힘들게 살아야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잖아요. 사람이 돈을 가져도 힘들고 없어도 힘들고 어떤 식으로도 힘들음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범위는 주께서 허락한 적 없습니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 특수한 고난이 있어요. 이런 고난은 인간이면 다 받는 고난인데, 특수한 고난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아들의 영을 받은 사람은 같은 고난에 동기생이 되는 겁니다. 동창생이 되는 거예요. 그게 로마서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들의 영을 받았으면 아들이 영이기 때문에 아들 자체가 이 땅에서 고생했잖아요. 예수님 자신이. 그러니까 자체가 고생했기 때문에 그 고생을 우리가 만끽해야 됩니다.
그러면 두 번째 고난이 특성이 뭐냐 하면, 복음 때문에 고난 받습니다. 첫 번째는 생존 때문에 고난 받아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생존에 고난만 있지만, 우리한테는 무엇까지 고난이 있는가 하면, 복음 때문에 아울러 밉상 받는 고난도 아울러 우리가 당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아까 누가 이야기한 것처럼 어머니께서 이야기한 것처럼, 예수 믿고 난 뒤에 나아진 게 뭐가 있느냐, 예수 믿고 난 뒤에 나아진 게 있는가, 답변하세요. “전에는 이 세상 떠나는 것이 아까웠는데 이제는 가벼운 마음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다 털어버리고 어머니보다 선배 격으로 가도 괜찮습니다.” 이제는 나아진 게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 털고 가야 돼요. “잠시만요, 다 털고 가실게요.” 모든 걸 다 놔버리고 털고 가야 돼요. 이 1번 고난 털어야 되고 2번 고난도 털고 가야 돼요. 요한계시록에서는 고난에 참여하는 사람은 안식으로 갚으신다. 고린도후서1장에도 나와 있고 데살로니가전서에도 나와 있지요.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사람 안식으로 갚으시고 고난으로 떠난 자들에게는 무서운 불의 심판으로 하겠다. 데살로니가전서에도 나오지요. 이쪽은 편히 쉬는 거죠. 수고하고 무거운 짐 다 벗어버리고. 왜 이게 고생되느냐 하면, 이것은 환경문제 때문에 그래요. 환경문제. 뜨거운 사우나 실에 들어가기 때문에 나는 IQ가 150이고 서울대학 나와도 사우나 들어가면 다 뜨거워요. 남자든 여자든 사우나에 들어가면 다 뜨겁잖아요. 그러니 이 세상 자체가 우리의 자질, 능력, 인격, 믿음, 소망, 그런 것은 상관없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환경 자체가 가시로 찌르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어려움을 당해야 됩니다.
특히 남자는 남자로서의 어려움, 여자는 여자로서의 어려움인데 이슬람 계통에 있는 남자들에 대해서 이슬람 계통 말고 다른 남자들이 부러워가지고 “아이고, 이슬람 나라에서는 여자를 네 명까지 정식으로 아내로 둘 수 있다면 아이고 참 부럽습니다. 참 좋겠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이슬람 남자가 하는 말이 “한 사람도 감당하기 힘들어가지고 버리고 싶은데 네 명해서 눌러 붙어 있으니까 그것은 아주 잘 사는 사람얘기지, 한 사람을 봉양해도 힘들어죽겠는데, 강아지 한 마리도 키우기 힘든데 4마리 키워보세요. 더 힘들지요.
그러니 이것은 뭐냐 하면, 시집가서 당하는 어려움도 다 여기에 해당되는 거예요. 여자이기에 아프고 남자이기에 아파하는 그런 것. 이것은 육체가 떠나면 편히 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자살이 많이 나와요. 너무나 힘들어서. 여기서 힘든데 이것은 뭐냐 하면, 환경과 육체가 안 맞아서 그래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아시잖아요. 친히 만드셨으니까. 거기다가 육체의 가시가 되는 쪽으로 환경을 유도해버리니까 안 아픈 육체가 없는 거예요. 특히 나이 들수록. 관절, 오십견, 늙으면 온 몸이 쑤시고 아프지요.
이것은 우리 조상 아담 때문에 받는 고난이기 때문에 우리 육체 없어지면 없어지는 겁니다. 거기에는 정신병도 포함돼있어요. 정신병도 DNA와 관련되어 있어요. 전달 호르몬의 과다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육체가 죽으면 편한데, 문제는 예수님의 두 번째 고난은 뭐가 나오느냐 하면, 지난 수요일 날 이야기했는가, 주일날 이야기했는가, 무기질에서 무기질로 바뀐다 했지요. 인간이. 흙에서 와서 흙으로. 거기에 하나님의 형상이 가미돼 버린 거예요. 그게 정신적인 문제거든요. 형상이 가미되면 이 형상을 이리 보면 돼요.
형상을 위하여 인간이 있다, 이리 되는 겁니다. 주도권을 하나님의 형상이 쥐고 있고 형상이 누군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이 이용당했다. 이리 생각하면 제일 깔끔하게 정리돼요. 내가 왜 고생합니까? 정답은 주님이 어떤 분을 보이기 위해서 고생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 때문에 내가 주님 앞에서 이용당하는 게 기분 나쁩니다. 피조물은 원래 그래야 돼요. 인간은.
따라서 형상이 뭐냐 하면, 두 가지가 있어요. 형상은 하나님의 저주와 그리고 축복이 있거든요. 어떤 형상은 저주를 보여주고 어떤 형상은 축복을 보여줍니다. 창세전부터 에서는 미움 받기로 되어있고 창세전부터 야곱은 하나님께 사랑받기로 되어있어요. 어제 제가 수요설교 때 그 얘기 했지요. 참외는 어디를 끊어도 참외고 수박은 어디를 끊어도 수박이다. 야곱은 20살 때 끊어도 야곱이고 30살 때 무슨 짓을 해도 야곱이고 다른 말로 하면, 30살 때 무슨 짓을 해도 사랑을 보여주게 되어있고 40에 야곱을 둘 로 쪼개면 사랑이 푹 나오게 돼있고 에서는 25살에 잘라보면 미움이 푹 나오게 돼 있다 말이죠. 인간은 그런 거예요. 인간을 과일로 채소류로 보시면 제일 좋습니다.
엿가락 어디를 잘라도 엿인 것처럼 인간은 30을 살던, 40을 살던 어디를 해도 그 인간의 본성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창세전부터 정해놓은 그 원칙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착하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성실하다고 지옥 갔다가 천국 가는 것도 아닙니다. 강도라 할지라도 천국 갈사람 따로 있고 똑같은 강도인데 한 쪽은 낙원에 갔고 다른 강도는 지옥에 가잖아요. 강도라는 직업이 운명을 결정하는 게 아니지요. 아니란 말입니다. 다만, 사람이 힘들겠지만.
주님의 권한에 참예함으로 말미암아 성도로 하여금 있을 곳이 못 되는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도 오늘 본문에서 보면, “저놈, 죽여라!” 사도바울은 “안뇽~~” “바이~ 바이” 마치 전방으로 가는 입영열차에서 안녕, 손 흔드는 것처럼. 사도바울은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차 창가에서 많이 미워해! 자기는 손들고 그러니까 안녕, 이거 드라마 제목하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안녕.”
사람이 스트레스 받는 것은 미련 때문에 그래요. 미련 때문에 그런 거예요. “참 내 천국 가려하는데 저놈의 자식 때문에 천국에 못 가겠다. 내가 더 있어야겠다.” 미련 때문에. 툴툴 털어버려야 돼요. 기왕후보면서 참 은혜 받은 게 있는데 그 중에 남자의 이름이 탈탈이에요. 탈탈이 이름이 너무 좋아. 탈탈 털리잖아요. 칼싸움 잘하는 탈탈이.
지금 사도바울은요, 진짜 똥배장이라. 미워하든 죽이든 자기는 소원이 뭐냐, 빨리 털고 가는 거예요. 그런데 못 가는 이유가 주께서 아직까지 복음 전하라고 있어라, 빌립보서1장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나는 소원이 털고 떠나는 건데, 일 더하라고 시키는 거예요. 제대 말년이에요. 제대 말년. 국무총리가 누가되든 신경 쓸 게 아니고 세월 호에 몇 명 빠졌다. 그것도 큰 문제가 아니고 알제리와 4:1로 깨져도 큰 문제 아니에요. 어차피 떠날 것은 구경 한번 잘했네. 구경한 번 잘하고 가는 거예요. 실컷 미워하라. 실컷 미워해도 괜찮아. 자아가 구멍 난 사람이죠. 누굴 욕을 하려면 그 사람이 자아가 있다는 걸 전제로 해야 욕이 욕되는데 본인이 본인보고 욕을 하고 있는데 남의 욕은 욕도 아니지요. 자기를 미워하라 했잖아요. 본인이 본인을 미워 죽겠는데 본인이 본인을 죽어라, 하는데 남들이 죽어라 하는 것을 보탠다 하더라도 마음의 상처 될 리가 없지요.
그래서 제가 하는 이야기가 사람이 자기가 죄인이라고 느낄 때, 가장 행복하다 했어요. 자기가 죄인이라고 느낄 때. 거지 나사로처럼 개가 짖거나 할 때도 이쁘기만 해요. 개가 와서 핥아도 이쁘기만 한 거예요. 그래야 니가 내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는구나!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남이 욕하는 것에 대해서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고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고 이리 되면 정신병 걸려요. 너무 타인의 시선에 의식하게 되면 본인이 피곤해요.
그래서 사도가 가는데 26절에 보면 일종의 코미디가 하나 있어요. 26절에 보면 백부장이 보고 와서 보호해줬잖아요. 말씀의 소동이 일어났으니까 질서를 유지하는 게 경찰의 임무니까 경찰이 와서 보호해줬는데. 보호해주면서 하는 말이 25절에 천부장이 바울을 붙잡아서 채찍질하고 때리지는 않았어요. 심문하라 하고 가죽 줄로 바울을 맸다 말이지요. 그렇게 하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로마사람 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나라 경찰이 그냥 어떤 시민을 잡았는데 체포를 하니까 나는 미국시민권자입니다. 함부로 체포하지 마세요. 라고 나올 때, 얼굴 가지고는 모른 거예요. 그래, 시민권이 있어? 언제 땄지? 시민권 따는 방법은 뭐냐 하면, 귀화하는 방법과 핏줄이 그 나라 핏줄이면 되겠지요. 제일 좋은 것은 그 나라 핏줄이 제일 좋고 세상이 혈연단체이기 때문에. 그 다음에 귀화하는 것. 이민 가서 나중에 이 방법밖에 없지요.
그런데 로마에서는 뭐냐 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로마제국에게 귀화한 사람에게는 시민권을 준 적이 있습니다. 한 번 주고 난 뒤에는 이 경우에는 자유인에게만 그래요. 자유인이라는 말은 무엇의 반대말이냐 하면, 노예의 반대거든요. 노예는 어떻게 생겼느냐 하면 전쟁 중에서 생겨나요. 전쟁을 하면 왜 노예가 생기는가 하면, 전쟁은 사람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고 자기 국가 관리를 허름한 일을 맡기기 위해서 전쟁을 해요. 일군 모집하기 위해서. 노동자 모집하기 위해서 전쟁하거든요. 그 노동자를 모집하기 때문에 노동자로 새로 편입된 자가 바로 노예라고 하는 겁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히브리인들이 무슨 생활합니까? 노예생활하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국가가 운영되는데 필요한 노동력은 노예가 하고 노예의 노동의 덕분에서 생산물이 나오면 그건 누가 차지하고? 노예를 부리는 지배자가 차지하고. 그래서 자연적으로 계급이 어떻게 됩니까? 자유인과 노예 이 두 계급이 있는 겁니다. 출애굽 보세요. 출애굽이 어디서 나왔다고 했습니까? 노예 된 자가 자유를 찾아서 나온 거죠.
신약에 와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해요? 구원의 개념을 어떻게 봅니까? 니가 종 되었던 자를 건진다고 했지요. 요한복음8장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너는 죄의 종이라 했지요. 그러면 죄의 나라에서 누가 지배자인가 하면, 죄가 지배자고 죄가 지배자라고 하는 것은 악마가 지배자고 나머지 모든 인간은 죄의 종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죄의 종에서 벗어나면 일단 자유인이지만, 벗어나서 갈 곳이 있어야 되잖아요. 어디로 갑니까? 주의 나라로 가잖아요. 주의 나라로 가면 우리가 주인입니까? 종입니까? 종이지요. 그걸 의의 종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래나 저래나 인간이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이지 인간이 주인 되는 그러한 휴머니즘은 없습니다.
마귀가 선악과 따먹으라고 할 때에 의도적으로 하나님이 허락한 증거가 나옵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건질 때, 계속해서 선악과적인 요소가 있어줘야 돼요. 왜? 그래야 구원자가 구원자로 티가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죄인이 되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었는데 죄가 아니라고 우기는 것이 뭐냐 하면, 따먹으라고 지시한 쪽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 겁니다.
누가 그런 주장을 하지요? 사탄이죠. 사탄을 보세요. 얼마나 윤리적입니까? 선과 악을 알라는 거예요. 사람이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려면 무엇을 알아야 돼요? 선과 악을 다 같이 알고 있어야 돼요. 선과 악 양쪽을 알아야 이것이 진정한 인간이 인간답다는 겁니다. 그럼 세상의 모든 교주들이나 모든 위인들이 모든 철학자들이 악을 버리고 어디를 가자? 선으로 가자, 이거잖아요. 부자청년도 율법사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 그거거든요.
주께서 말씀 주셨다. 못 지키면 악이고 지키면 선이다. 우리는 악에서 선으로 가자. 신명기28장, 니가 이 말씀을 지키면 복을 받고, 못 지키면 저주받는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율법을 준 것은 악에서 선으로 가는 게 아니고 오히려 숨겨져 있는 악을 더욱 더 티내기 위해서 너희들이 아는 주특기, 너희들이 안다는 선과 악에 대해서 보다 선한 율법을 가지고 지켜봐라, 한 번 지켜봐라 쑤시는 거예요. 소위 친구라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너희 아버지 뭐하시노? 너희 아버지 뭐하시노?” 하는 것처럼. “인간아 너그 주인 누구야? 너그 주인 누구야? 선악과 따먹은 것을 잘했다고 하는 그 주인 나오라고 그래!” 하는 거예요.
선과 악을 아는 이상은 착하게 살면 천국 간다. 라고 억지로 가르친 그 나오라고 해! 누구야! 하고 쑤셔대는 게 말씀이에요. 우리는 이런 마귀의 말이 오히려 더 확 납득이 되고 우리는 동의하고 싶어 해요. 아주 편하고 살아온 게 그거기 때문에. 욥기에 보세요. 욥이나 욥의 친구나 다 그 통속 아닙니까? “왜 나쁜 짓도 하지 않았는데 왜 고난 옵니까?” 친구들은 “니가 뭔가 벌 받을 짓을 해서 고난이 왔지.” 아니 벌 받을 짓을 해서 악하다면 그럼 예수님은 무슨 짓을 해서 벌을 받았습니까? 도대체. 의가 이 땅에서는 벌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 오셨잖아요. 그만큼 이 세상이 엉터리 세상이라는 겁니다. 뭔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세상은 누가 장악하고 있다? 악마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가치를 완전히 뒤바꿔 놓은 거예요.
그래서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우리가 사탄이 되지 않으면 구원 못 받는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사탄이란 말이 사탄이 사탄 말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 사탄이 사탄이 아니고 그 사탕이 박하사탕이 아니라 그래요. 사람들이 사탄, 악마하면 그 개념을 따질 생각을 안 하고 벌 안 받기를 원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악마는 더욱 더 휘파람을 부는 거예요. “내가 악마다.” 하면 “악마가 나한테 줄 게 뭐가 있습니까?” “너를 죽이겠다.” “그럼 죽이세요.” 이러면 될 문제를 가지고 “악마가 오면 나는 악마와 한편이라고 나는 이 땅에서 하는 사업도 망하고 내 아들 내어주고. 교통사고 나서 죽고. ” “아이고, 그러면 안 돼! 안 돼!” 이러고 있다고요. 그래서 귀신 쫓아내려고 굿하고.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 귀신을 부르잖아요.
그게 바로 배후에서 악마가 미소를 짓는 거예요. 결국 그것들은 기껏 그것밖에 없는 거예요. 은혜를 못 받으니까 기도 열심히 하고 금식하라, 이게 마귀 방법으로 마귀를 쫓아내달라고 마귀한테 부탁하는 겁니다. 아이고, 사기꾼한테 부탁하지. 사기꾼한테 부탁이 됩니까? 안 되지.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고난을 참여하기 때문에 상당히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까짓 것 떠날 세상 골탕 먹이는 이야기를 했어요. “나, 시민권 있습니다.” 해서 이 세상에 자기 딜레마에 빠집니다. 사도바울이 시민권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천부장, 백부장이 갑자기 두려워하지요. 보세요. 사도바울은 두려움이 없는데 이미 두려움에서 벗어났는데 사도바울을 잡는 그 군사들은 뭔가 두려움 속에 있다면 도대체 누가 누구를 잡을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말입니까? 누가? 누구를.
지금 교회보세요. 목사들이 뭐라고 하면 꼼짝 못하잖아요. 그러니 마귀를 세워서 마귀에 속한 사람을 다루고 있는 거예요. 전에 제가 수백 번 얘기했어요. “여러분, 목사가 십자가 지지 않았습니다.”라고 한 이유가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이 “내가 십자가 졌습니까?” 아니지요. 그럼 게바가 십자가 졌습니까? 아니지요. 그럼 아볼로가 십자가 졌습니까? 아니지요. 그럼 왜 그쪽에 가서 줄을 섰느냐 말이죠. 그 쪽에 가서 나는 누구 편. 누구 편. 나는 안철수 편. 왜 거기에 가서 줄을 서느냐 말이에요. 줄을 왜 서느냐 말이죠. 결국 줄 서다가 구원이 안 돼버린다니까요. 서지 말아야 될 줄을 서고 있는 거예요. 심지어 그 줄에 예수 줄도 있어요. 이것도 하지 말라는 겁니다.
보세요. 예수 줄, 바울 줄, 게바 줄, 같은 존재, 존재, 존재로서 따지잖아요. 그러나 구원은 예수의 존재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하는 겁니다. 이걸 통합 측 자유주의 신학은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존재로 구원하는 겁니다. 지금도 신학을 그런 식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로 우리 존재가 구원받는다. 2000년 신학의 역사가 이거에요. 인간은 존재 밖으로 못 벗어나요. 인간은 구슬의 무늬이기 때문에. 무늬가 구슬 밖으로 스스로 못 나갑니다. 그 무늬가 파내어줘야 되지요.
이 땅에서 그림 지어진 이것은 외부에서 칼로 도려내서 이걸 데려가야 되겠지요. 그럼 데려가려면 다른 이질적인 분이 오셔서 나로 하여금 이것을 떠내가지고 구멍을 내서 죽은 채로 데려갈 때, 우리는 하나의 선악과 따먹은 죄인의 모습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선악과에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나무가 이것을 용서하게 되면 천국에서는 선악과나무는 없고 뭐만 남습니까? 생명나무만 남으면서 예수님이 바로 생명나무라는 것이 증명이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사도가 말할 때, 자기가 시민권이 있다고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갇혀있다 라는 것을 통고해 줍니다. 빌립보서3장20절 봅시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왜 그러면 사도행전22장에서는 왜 자기가 로마시민권이 있다고 이야기합니까? 완전히 약 올리는 거죠. 너희들 식으로 할 때, 너희 스스로 갇혀있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나를 내가 누군지, 내가 주의 사도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너희들 식대로 나를 한다면 너희들은 나로 인하여 골탕을 먹을 것이다. 그들이 제일 겁내는 것은 로마황제입니다.
로마황제를 겁낸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죽는 게 무섭다는 거죠. 지금 죽음 직전에 있는 노인네가 로마황제에 대해서 겁낼까요? 지금 5초 뒤에 죽는데. 겁 안내지요. 그런데 이제 20대, 30대, 출세하려고 생존에 대해서 바짝 기대하고 희망을 시나리오를 짜고 있는 사람한테는 윗사람 같으면 껌뻑 고개 숙이고 난리나지요.
사도바울은 이제는 제대 말년이기 때문에 자기가 갖고 있는 카드를 다 쓰는 겁니다. “나, 로마시민이다. 함부로 하지 마라.” 이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은 이 세상에 있는 시민권에나 거기에 목 달고 시민권과 함께 죽어버려라.” 이런 뜻과 같은 거예요. 결국은 너희들은 시민권이라는 그 차원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나는 벗어났기 때문에 마음껏 시민권을 활용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다는 겁니다. 그 위치가 뭐냐, 바로 우리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에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자,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면 죽고 난 뒤에 시민권이 확보된다는 말입니까? 이미 이 지상에서도 지금 시민권이 작용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의 시민권이. 그러니까 주민등록이 있으면 이게 찢어져도 괜찮아요. 주민등록이 언제 없어지느냐 하면, 내가 죽을 때 사라지거든요. 이미 사라진 주민등록을 내가 갖고 있다고 보시면 돼요. 아직까지는 몸이 안 죽었으니까. 그러면 왜 안 죽이시는가, 주님께서 하늘에 시민권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의 시민권을 갖고 있고 운전면허증을 갖고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어차피 자식하고 내가 죽으면 자식하고 헤어집니다. 헤어지는데 자식하고 왜 함께 사느냐 왜 붙어있고 한 집에 사느냐, 하늘의 시민권 입장에서 자식을 다시 보게 하기 위해서. 사실은 부부도 그래야 되지요. 주일 오전에 이야기했지요. 남편도 주님 안에 남편 있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주님 안의 남편과 이상적인 남편과 실제남편과 한 번 비교해보라, 죽이려고 하지 말고 비교만 해야 돼요. 비교만. 잔소리하지 말고. 비교만 하세요. 비교하면 차이가 나지요. 그럼 너무 미련두지 마세요.
그래서 주도권이 바뀐 거예요. 22장에서 주도권이 바뀐 게 되는 겁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한 번 설명해 보겠습니다. 빌립보서3장18절에 보면,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이렇게 했지요. 그러면 땅 자체가 사실은 미련 두거나 기대할 필요가 있다? 없다? 땅에 대해서는 아예 애초부터 기대를 하지 말라는 거예요. 활용을 해야 돼요. 복음 전하기 위해서 활용은 하게 되지만, 기대는 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까짓 거 그걸 없어도 우리의 신분에는 변함이 없다. 그게 신분에 변함이 없음을 시민권이라 하는 겁니다. 이제 아시겠지요?
하늘의 시민권이라 하는 것은 이 땅에서 물에 빠져 죽던지, 불에 죽던지 시민권이 바뀌고 그런 거 없다 말이죠. 이미 확보된 겁니다. 하늘의 시민권은. 자 여기서 나오는 질문은 어떤 질문이 나오겠습니까? 그 시민권은 어떻게 땁니까? 하는 문제지요. 아까 제가 로마시민권 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피 또는 귀화하면 되고 또는 공로하면 되지요. 그러면 하늘의 시민권은 어떻게 할까요? 피도 안 되고 귀화해도 안 되고 하늘나라 공로로 될 문제도 아니고.
하늘의 시민권은 바로 성령님이 오시면 그걸로 되는 겁니다. 성령님이 오셨다 하는 것은 성령님은 누구 이야기인가 하면, 그리스도의 영이거든요. 그럼 그리스도의 영이 오셨다는 말은 오라고 할 입장이 못 되는데 일방적으로 찾아왔지요.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면, 바로 탕자비유와 마찬가지입니다. 잃어버린 내 양을 내가 찾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잃어버린 자기 양을 세상에 두고 온 지 자식을 찾아서 왕자를 만들어 하늘나라로 데려가는 겁니다. 찾아오신 거예요. 아버지께서 보내지 않은 자는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했지요. 회개로 방향전환으로 보시면 됩니다.
세상만 쳐다보다가 이제는 하늘도 쳐다보면서 떠나야 될 세상도 봐야 돼요. 내가 도대체 내가 있었던 내 자리가 얼마나 추한자리인가를 얼마나 죄 지었던 자리인가를 봐야 돼요. 노숙자가 노숙하다가 취직 되었으면 잊어버리지 말고 가끔은 그 자리에 찾아가가지고 자기가 누웠던 종이상자도 한 번 보고 자기와 같이 옆에 잤던 그 사람이 아직도 옆에 자고 있고, 그걸 볼 때에 찾아와주심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요. 이렇게 찾아왔다는 게. 찾아간 게 아니라니까요. 지금은 도 닦아서 찾아가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찾아가는 게 아니고 성화하는 게 아니고 그냥 매일같이 가만히 있어도 찾아와요. 가만히 있어도. 꼭 야쿠르트 아줌마 같아. 아침에 부스럭 소리 나면 있어요. 그리고 새벽마다 오는 쓰레기차, 두부장사. 아침에 보면 쓰레기 다 비워져있고. 우리는 빈 통만 들고 오면 되고. 우유 마시면 되고. 주신 성령 마시면 되거든요. 그리고 우리 아파트 앞에 붙어있는 게 뭐냐 하면, 하늘의 시민권자 이런 게 붙어있다 말이죠. 하늘의 시민권자.
하늘의 시민권자의 표시가 뭐냐 하면, 아까 18절에 뭡니까?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죠. 결국 나는 뭐만 인정한다? 십자가만 인정한다. 예수님의 존재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말씀의 능력과 동반해서 지금도 우리에게 계속해서 적용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선악과 따먹은 티를 평생토록 티 나게 만듭니다. 착한일 했으니까 좋은 일이 있을 거다. 이리 되지요.
자, 23장 봅시다. 사도바울이 슬슬 약 올리기 시작된 거예요. 사도바울은 즐거워! 재미있어요. 하늘의 시민권도 없는 인간들이 기껏 제시하는 것이 자기들이 만든 시민권에 지가 벌벌 떨면서 살아가는 그 모습이 얼마나 구슬 안에 갇혀있는 작은 무늬로 하나의 구슬 덩어리 딱딱한 구슬 덩어리 같은 무섭지요. 문 창근씨도 마찬가지에요. 여러분, 나 안 좋아요? 안 좋으면 안하지. 이리하면 될 걸 가지고 왜 그리 하고자 하는 겁니까? 내가 문 창근씨면 나는 이렇게 이야기할 겁니다. “여러분들이 나를 떨치는 것도 이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도바울이 국무총리 했습니까? 아니지요.
예수님은 죄인이었지 국무총리가 아니에요. 국무총리하고 정반대자리에 있거든요. 아무도 안 가려는 그 죄인의 자리에서 우리보고 오라는 거예요. 오라! 오라! 국무총리하지 말고 이리 오라는 말이에요. 죄인의 자리에. 모함 받는 자리에 오라는 말이죠. 강도는 살려주고 나를 잡아 죽이려는 그렇게 미움 받는 세상에서 너는 나한테 오라! 하는 겁니다. 지금 그 가는 길이 바로 지금 놀리고 있으면서 사도바울이 그 길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이야기했지만,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사도행전은 주님 가신 그 길을 사도방식으로 가고 있어서 모든 성도는 사도바울처럼 십자가 고난 없이 천국 가는 법은 없다는 것을 사도행전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바울처럼 하라는 말이 아니고 나름대로의 다 고난이 있어요.
그래서 빌립보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를 본받는 자 되라, 하는 말이 나오거든요. 빌립보서3장17절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형제들아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할 때, 나를 본받으라하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사도바울처럼 착하라, 그런 뜻이 아니고 너희들 나름대로의 그런 십자가, 이 세상의 미련 끊어지는 일들을 당하면서 나처럼 자유롭게 될 것이다, 이게 출애굽입니다.
악마와 죄의 종 되었던 우리가 이제는 죄가 뭔지를 알고서 가는 거예요. 죄가 없는 상태가 아니고 모든 게 죄라는 것을 알면서 우리는 자유롭게 사는 것, 이것을 막국수 또는 막 칼국수 또는 막 산다는 막! 보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만약에 막살지 않으면 그것은 마귀에 속했다는 사실이 왜냐 하면, 막 안 살아야 나한테 이득이 오고 예수님 믿고 난 뒤에 어떤 보탬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 조심하는 것은 이것은 세상에서 미련에 아직 억매여 있다는 겁니다. 아직까지 세상에 갇혀있다 이리 보시면 됩니다. 그걸 이제 떨쳐버려야 되지요.
23장 봅시다. 23장에 가가지고 이제는 사도바울이 복음을 외칩니다. 이 복음을 외칠 때, 여기에 누가 나옵니까? 대제사장 나오지요. 사도바울에게. 이게 바로 예수님이 가야바하고 심문받는 그걸로 또 다시 재현됩니다. 그 제사장 권력자입니다. 니가 권력 앞에 고개를 숙일래? 아니면 저 권력은 마귀한테 매인 권력인 것을 니가 눈치 챘느냐, 그걸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 대목이에요.
사람이 뭔가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 보면 일단은 고개 숙입니다. 왜냐 하면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도 좋은 말로 하고 그래요. 사도바울은 처음부터 그런 관점이 없어요. 없고 자기는 여기 6절에 나온 데는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죽은 자의 부활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요 대목하고 요 시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할 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언급할 경우는 이것은 제자들이 성령받기 전에 십자가 지기 전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동의했습니까? 동의 안했습니까? 동의 안했지요. 죽음 다음에 부활이잖아요. 부활이야기는 먼저 예수님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제자들은 그걸 끝으로 본 거예요. 죽음까지만 무대고 죽으면 무대 밖으로 나가가지고 이것은 의미 없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뭡니까? 무대 떨어진 가운데서 다시 기어 올라가 무대에 위에 누가 떨어졌는데 지금은 엄연히 주로서 살아 계시다고 증거 하지요.
그렇게 되려면 본인도 떨어졌다가 기어 나왔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소개할 수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증거가 바로 내가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증거를 내가 함유하고 있고 내가 곧 주님의 결과물, 내가 주님의 결과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연결되어있다고 보는 거예요. 문어 몸통 따고 있고 문어 다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그 다리가 아무리 길어서 몸통이 안 보인다고 할지라도 다리 더듬어가게 되면 몸통 나오잖아요.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너는 나한테 먹을 걸 주었고 목마를 때 물을 주었고 그건 우리는 하나의 문어발이거든요. 문어 다리고. 그걸 다듬어 가게 되면 몸통 나오잖아요.
지금 몸통으로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언급하는 겁니다. 신학자가 아니에요. 지금 누굴 가르치는 게 아니고 자기가 부활의 증거물이라니까요. 그래서 진짜 복음 아는 목사가 설교에서 부활 증거 한다면 증거 하다가 누가 총을 쏴 죽여도 아멘하고 좋아해야 돼요. 살해한 사건은 너무 심하고 “당신 그 설교하고 난 뒤에 사표내세요.” 한다고 해도 “아이고, 고맙습니다.” 이렇게 해야 돼요. 부활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자신을 예수님의 부활의 결과물로 보지 않고 내가 예수 잘 믿고 예수님의 부활까지 예수님의 재림까지 잘 믿음으로서 이제는 괜찮아진 자아에 결과물로 우리는 우리 인생을 살려고 하다보니까 우리가 힘들어요.
세상 것도 알아야 되고 성경도 알아야 되고 본인 자체가 부활의 결과물이 아니고 본인 관리의 결과물로 자꾸 간주하기 때문에 자기 몸 간수하기가 그렇게 힘들어요. ‘나의 행동이 부활의 증거, 십자가 증거 하는데 벌 받을까 싶다.’ 이건 지금 주님께 관심 있는 게 아니고 자기가 힘든 인생 살까봐 그것이 걱정이 늘어진 거예요. “아이고, 결혼식이 있는데 비가 쏟아지면 안 되는데.” 비오고 안 오고는 우리를 부활해주신 주님의 물 뿌리기에 달려있거든요. 대전에 확 뿌려봐! 이건 주님이 뿌리겠다는데 우리가 뭐 안 되고 아니 되옵니다. 마마. 이런 입장이 못 돼요. 뿌리면 흠뻑 맞으면 돼요. 웨딩드레스 다 젖고 하면 돼요. 그게 나의 결과물이 내가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솜씨 부려서 내가 이만큼 된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냥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신 거예요. 무대에 세워서 십자가 증거 하라고 그렇게 만들어주신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가 지금 누구한테 잡혔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이 세상은 예수님을 버린 세상에 잡혀도 그걸 떨쳐버리고 주님하고 합류할 입장이기 때문에 뭐 어디 호사한데 간다고 기분 좋고 어려운데 간다고 해서 자기는 못하는 게 아니고 내가 어려움에 처하든지 부하게 처하든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주님 안에서 나는 지금 합당하게 주님에 의해서 결과물로 차질 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고백이 되었으면 참 좋겠어요. 10분 쉽시다.
공은주(IP:211.♡.100.233)
14-07-22 16:59
대전140626-마16장23절(개인의 등장)53강 - 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16장 21절,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되어있지요. 예수님이 어디로 올라갔습니까? 예루살렘에 올라갔죠. 예루살렘에 이미 성전이 있습니다. 성전이 있다는 말은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과 교류하는 센터가 있어요. 아무 장소에서 하지 않고 성전이 있는 곳에만 하나님이 교류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신명기 12장에 보면 나옵니다. 원래 양식이 출애굽기20장 24장에 나와요. 주의 이름 있는 곳에만 하나님이 만났는데 주의 이름은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고 초기 성전의 형태를 갖춰야 돼요. 돌은 다듬으면 안 되고 징으로 주서다가 돌단 쌓고 거기다가 지정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출애굽에 있어서 애굽에서 그들이 탈출하면서 그냥 탈출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무엇을 통해서 이루어지는가 하면, 전쟁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그 전쟁은 어떤 전쟁인가 하면, 신약적으로 이야기하면 영적 전쟁을 한 겁니다. 영적전쟁이니까 무슨 전쟁은 아닙니까? 육적 전쟁은 아니지요. 육적 전쟁 아니니까 여기에 육이 개입이 됩니까? 안 됩니까? 육이 개입될 수 없지요. 그런데 바로의 군대는 이 전쟁을 영적 전쟁으로 보지 않고 육적 전쟁의 연장으로 본 겁니다.
그래서 바로군대가 누굴 추적했느냐 하면, 히브리인들을 뒤따라가서 다시 잡아와서 노예로 시키기 위해서 다시 축격하지요. 말 타고 홍해바다까지 뛰어들잖아요. 그들 입장을 보세요. 그들 입장은 육 말고 따로 어떤 다른 능력 있다? 없다? 그걸 일체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탈출하는 히브리인들의 모양새가 아무리 봐도 전에 애굽에 살던 그 모양새하고 전혀 달라진 게 없어요. 천사처럼 빛나는 것도 없고 조거 잡으면 잡을 것 같아. 그러니까 만만하지요. 오히려 자기한테는 무기가 있고 말이 있지만, 그 쪽은 거지 떼로 가기 때문에 충분하다고 봤는데 그들은 뭘 못 보느냐 하면, 영적 전쟁의 요소가 그들과 함께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겁니다. 심지어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도 몰라요. 눈에 안 보이니까. 눈이라 하는 것은 물질로 되어 있잖아요. 물질로 되어있는 것이 영적 동행을 감 잡을 수가 없지요.
그러면 어떻게 감 잡느냐, 그래서 요번에 수련회 때 할 주제 사건이 일어나요. 그럼 사건은 그냥 한 번 일어나면 안 되지요. 사건은 똑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만, 사건이 일어나는 취지는 이게 반복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양 잡았다고 양 들고 또 잡고 또 잡고 어린양 잡으면 또 애굽이 죽고 하는 게 아니고 어린양 잡아서 애굽에서 나왔던 그 취지가 있잖아요. 언약적인 취지, 언약적인 의미가 이스라엘 상대로 계속해서 그 취지가 계속 반복적으로 살아나야 됩니다.
그러면 애굽나라의 행동을 대행해야 할 자들이 필요해요. 그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는 말을 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 이스라엘이 애굽의 대역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리고 정작 나왔던 주인공은 히브리인들이 나와야 되는데 히브리인으로 나왔던 대역이 누구냐, 모세입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보면 모세가족도 깨져요. 누나가 반발하지요. 그리고 모세와 같은 집안인 고라집안이 모세한테 달려들지요. 민수기17장에. “니가 뭔데 대장질하느냐? 우리는 같은 지파로 왔는데 니가 언제까지 국무총리 계속해먹느냐?” 이런 식으로. 대통령을 자꾸 왜 니 혼자 해먹느냐, 같이 하자. 이러다가 땅이 죽 갈라져서 완전히 그 자손은 산채로 매장돼버려요. 주님도 조폭이라. 땅에 파묻어버려요. 모세가 오히려 달려들어요. “하나님, 다 죽이면 남는 사람 없잖습니까?” 이리 나오죠. 그러면서 고 일으킨 사건이 또 하나의 성전모양으로 계속 내용이 추가가 되는 겁니다.
사건이 그냥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렇게 개판같이 살았다, 라는 것이 계속해서 추가가 돼요. 예를 들면, 돌판 깼잖아요. 돌판 깼으면 우리 같으면 새로 바꾸면 되겠네, 이리 되는데 깨진 돌판이 그대로 유효해요. 돌판이 깨짐으로 말미암아 피가 더욱 더 확실하게 가까이 다가옵니다. 돌판 준 것은 우리보고 깨라고 준 거예요. 너 같은 성질은 반드시 깨게 돼 있다 말이죠. 인간 쪽에서 깬 게 아니고 주님 쪽에서 깨놓고 니들이 깼어. 너희들 때문에 깨진 거야, 하고 우리한테 책임추궁하고 그 죄를 우리한테 뒤집어씌우고 그 죄에다가 피를 만나는 거예요. 죄와 피의 만남. 그것이 사건 화되면서 계속해서 반복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은 계속해서 죄를 지어야 됩니다.
일부러 지을 수는 없어요. 그냥 본성만 발휘하면 됩니다. 어떤 본성? 물 없을 때는 물 없다고 원망하고 양식 없을 때는 양식 없다고 원망만 하게 되면 그 자체가 죄니까. 대학 떨어졌다고 때려치웠다고 원망하고. 교인수 적다고 불평하는 목사 그게 죄고, 사업 안 된다고 고사지내면서 절하는 것도 그것도 죄고, 선풍기 들여 놓는다고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죄고, 우리는 매사에 우리 할 도리만 다 합시다. 죄 짓는 도리. 믿씁니까? 헌금을 하라, 봉사를 하라, 그러면 죄가 안되는 게 아닌 거예요? 그 가운데 죄가 또 나와요.
예루살렘에 올라간다는 것은 바로 예수살렘이 교체가 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어요. 예루살렘 동네에 있는 산이 감람산입니다. 그 감람산에 메시아가 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죽든지 살든지 그 지역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감람산에 오게 되면 산이 두 조각나고 두 조각 나면 그리 물이 나오고 세상은 완전히 바뀌어 지거든요.
유대인들은 이걸 가지고 백성들에게 닦달합니다. 믿을래? 안 믿을래? 말씀대로 믿어라. 문자대로 믿어라. 요새말로 원어대로 믿어라. 원어대로 믿어라. 믿씁니다. 그러면 구원받고 안 믿는다 하면 지옥 간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나름대로 심판 기준이 있어요. 그 기준 찢어버립니다. 어제 수요일 날 했잖아요. 나름대로의 양과 염소를 나눴더니만, 그 기준을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들 배불려 놓고 자기처럼 되면 복 받고 안 그러면 저주받는다는 그 기준을 찢어버려요.
“강도와 세리는 누가 뭐래도 지옥 간다.” 그럼 주님이 나서지요. “누가? 누가 지옥 간데? 누가?” 하고 예수님이 이야기하기를 포도원에 아들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포도원에 일할래?” “예, 가겠습니다.” 해놓고는 안 갔고 두 번째는 “안하겠습니다.” 해놓고 뉘우치고 갔을 때 누가 구원 받는가, 그 뒤에 나옵니다.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천국 간다. 너희들은 간다 해놓고 하나님 말씀대로 안 살았지만, 세리와 창기는 우리는 못합니다, 했는데 말씀의 완성이 찾아오게 되면 그들이 보란 듯이 얼레리 꼴레리 내려다보면서 보란 듯이 풍선타고 올라가는 거예요. 보란 듯이. 멀찍이 보면서. “어이! 잘난 자들! 우리는 못났으니까 먼저 가는 거야. 잘 나버려.” 예수님이 못났다고 죽여 버렸으니까 그들이 죽여 버린 그 풍선타고 예수님처럼 못난 자들은 몽땅 같이 가는 거예요.
예수님의 모든 이야기가 그런 식이에요. 아들의 혼인잔치 만들어 놓고 밭을 샀느니, 장가를 가니, 소를 샀다느니 핑계 대는 인간들은 갇혔다 이 말이거든요. “오지 마! 오지 마!” 누가 채웁니까? 비리, 비리 노는 아이들 아무나 와서 데려오되 예복은 입어야 돼요. 예복 입고 천국 잔치 갈 때, 결국 천국은 기존 천국을 침노하는 거예요. 뒤엎어버리는 겁니다. 엎어버리고 엎어버린 자들에 의해서 차지가 되는 그런 방식은 주님께서 상상도 못한 예상도 못한 방식으로 하는 겁니다.
천국 문을 메시아 오라고 문을 크게 했는데 주님께서는 개구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제자들은 여기서 자랑하려고 하는데 주님께서 개구멍으로 들어가니까 제자들이 싫어하는 겁니다. “왜 우리로 하여금 큰 문이 있는데 왜 이 길로 가게 하십니까?” 그러니까 본인이 가기 싫다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22절에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간다. 그 다음에 죽는다. 한 번 적어볼게요.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그 다음에 죽어버리면 일단 죽게 되면 지상의 예루살렘 의미는 이제는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아직도 기독교 보수나 유대교에서는 예루살렘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보는 거예요. 심지어 요한계시록 해석하는 인간들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예루살렘 편 따로 있고 알라 편 따로 있어가지고 마지막에 아마겟돈 전쟁이 벌어지면 그게 3 차대전 핵폭탄 일어나면 세상 끝난다는 거예요. 아이고! 참.
지금 세상 끝이 어디냐, 니가 살고 있는 곳이 세상 끝이에요. 그리고 불신자는 니가 불신자에요. 니가. 어떤 시나리오를 영화를 소설을 쓰면 안돼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로 내가 있는 곳이 예수 안에 있는 곳이에요. 영적 전쟁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전쟁을 시작하는 거예요. 아직도 눈에 보이는 전쟁을 하고 있어요. 유대교하고 똑같아요. 보이는 전쟁. 핵폭탄, 핵폭탄은 눈에 보이잖아요. 킬로수 나오잖아요. 그런데 출애굽전쟁은 무슨 전쟁이었습니까? 영적 전쟁이었어요. 기껏 보이는 것은 모세의 지팡이만 보였지요. 지팡이가 물에 담기니까 갈라졌잖아요. 지팡이가 했습니까? 주님이 했습니까? 주님이 했지요.
모세가 지팡이를 쥐는 것은 주도권이 지팡이에 있다는 것을 어느 강의에서 그런 설교를 했지요. 모세가 쥐고 있지만, 사실은 지팡이가 모세를 쥐고 있는 거예요. 그걸 본문에서 적용하면, 죽음이 살아있다는 자를 쥐고 있는 겁니다. 물론 이 죽음은 우리의 일상의 죽음이 아니고 장소가 중요해요. 예루살렘에서 메시아의 죽음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일단 죽게 되면 예루살렘은 더 이상 의미 없습니다. 이제는 예수님 죽었음을 믿는 그곳이 예루살렘이 돼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센터가 되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어디서 기도하던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하늘나라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내 안에 있는 거예요. 우리 안에 있는 거예요. 참, 말씀이 어렵지요. 그런 말을 의미 있게 하기 위해서는 일단 어떤 지리적인 특정지점이 의미 있게 뭔가 이 사건이 벌어져야 돼요.
이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그냥 죽음이 아니고 예루살렘에서 누가 죽는다? 예수님이 죽는 사건, 예루살렘이라는 장소, 예수라는 인물 그리고 죽음 사건, 요것이 3종 세트가 되어서 드디어 하나님과 인간과의 유일한 만남의 장소가 영적으로 마련되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 안이고 나중에는 성령 안이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인물, 장소하고 사건화된 인물, 히브리서에서는 이걸 예수님 자신이 제물이고 제사장이고 또는 제단이 되는 거예요.
이렇게 될 때, 베드로가 끼어들지요. 베드로가 예수께 붙들어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베드로가 이렇게 간여하게 된 것은 우리가 제자잖아요. 이 일이 예수님의 단독 일인 것을 베드로가 눈치 챘지요. 어느 누구도 이 일에 협조하거나 개입할 수 있다? 없다? 없다는 거예요. 이 일이 우리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그 점이 우리한테 복음입니다. 이게 항상 기뻐하고 감사해야 될 일이 내가 손 타지 않고 나의 보탬이나 또는 방해하지도 않는 일, 방해할 상황도 없는 일, 난데없는 일이 나한테 터져서 우리가 구원받는 거예요.
그런 일은 종종 있지요. 갑자기 한데 어그러졌다. 누가 첨벙 한 게 아니고 해가 달에 의해서 먹힌 거예요. 그게 일식이죠. 내가 관여하지 않은 다른 일에 의해서 내 있는 자리가 캄캄하게 돼버렸다 말이죠. 이런 것처럼 주님에 의해서 일어난 일로 인하여 우리의 팔자가 이미 결정 났다고 했을 때, 이게 얼마나 우리한테 우리 인생을 가볍게 만듭니까? 얼마나 가벼워요.
내가 내 인생을 조정할 수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자살했다고 지옥 갑니까?” 라는 질문이 왜 성립이 안 되는 질문인가 궁금하긴 한데, 성립이 안 되는 질문이죠. “나는 자살 안했습니다.” 라는 것을 깔고 하는 질문이거든요. ‘나는 자살 안했는데 어떤 사람은 자살했습니다. 자살 안한 나는 괜찮은데 저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구원 문제에 대해서 갑자기 각각 개인이 관여한 셈이 되어버린 거예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우리가 있잖아요. 우리가 주님을 지켜드리잖아요. 우리가 관여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 이것은 뭐냐 하면, 주님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사탄의 생각입니다. 드디어 그 뒤에 나오지요. 22절 다시 보게 되면,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보디가드 하겠습니다. 우리가 보디가드해서 우리가 지킬 테니까 주님께서는 그런 염려하지 마세요. 우리는 동업자 아닙니까? 같이 협력하잖아요. 우리는 제자입니다. 주님의. 나요? 제자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이런 식으로 자기의 관여를 의식했기 때문에 베드로보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이미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의식하면서 주님의 일에 우리들이 같이 협조됩니다. 라는 것을 이미 감안해서 했기 때문에 감안한 것을 잘라버리기 위해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어떻게 한다? 넘어지게 한다. 결국 예수님은 넘어졌지요.
예수님을 넘어뜨린 자가 분명히 사탄인데 여기에 보세요. 악마가 예수님을 넘어뜨린다. 어느 누구도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볼 때는 예수님을 넘어뜨리는데 빌라도도 관여했고 가야바도 관여했고 고소하는 가룟유다도 관여했고 도망치는 베드로도 관여했고 전부 다 관여되어 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관여했다고 합니까? 사탄이 관여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무슨 일을 생각한다? 사람의 일을 한다. 사람의 일의 전체가 어디에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까? 사탄의 일이라고 바꾸어서 이야기해도 틀린 말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이냐? 그런 사탄에게 속했네. 그런 뜻입니다. “니, 사람이야?” “사람입니다.” 그러면 마귀에 속했습니다. 하고 같은 말로 받아들이면 니 현실이고 니 처지다.
그 사탄을 주님께서 또 주관하기 때문에 결국 주님 안에 속했다고 보는 겁니다. 그 하나 증거가 나와요. 마태복음5장에 보면, 내가 악인이든지 선인이든지 가리지 않고 햇빛과 단비를 주신다. 분명히 악인이에요. 분명히 사탄에 속한 줄 압니다. 그런데 속했다고 해서 단비를 안 주시는 게 아니고 단비를 주시고 햇빛을 주시는 거예요.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중에 지옥 갔을 때, 핑계치 못했지요. “뭐 준 게 있어야 섬기지요.” 할 수가 없어요. 사실은 사탄에 속한 자들이 신에 대해서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양심이 있기 때문에.
가인이 하나님에게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불신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모르는 게 아니에요. 알고 있거든요. 자기의 일이 잘될 때는 감사의 표시를 신에게 합니다. 한 골 넣고 두 손 올리잖아요. 신에게 감사합니다! 그런다고 구원받습니까? 진짜 믿는 사람 같으면 자체 골 넣고 감사합니다! 이리 나오죠. 그 사람은 권총 맞을 수가 있어요. 고국에 돌아가서 권총 맞을 수 있어요.
사람은 자기가 잘될 때 감사하고 못되면 짜증내고 그게 바로 사탄에게 속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말을 참 잘한 거예요. “사탄에게 속한 게 맞네요.” 확인 작업이 필요합니다. 확인조로 한 거예요. 방금 했던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반복된다. 왜? 사탄에 속한 자가 자기 본색을 감추지 못하고 노출시키는데서 주님의 십자가이야기만큼 확실한 건 없습니다.
지금까지 정리해 보면,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된다. 예루살렘은 구약이 응축된 것이다. 구약 전체의 언약이 예루살렘에 다 집약되어 있어요. 진짜 예루살렘에 임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오시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초라한 모습으로 왔는데, 이건 완전 변 사또가 알아 볼 수가 없어요. 이 도령을.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