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강-YouTube강의(죽음의 세계)140619-이 근호 목사
79강-YouTube강의(죽음의 세계)140619-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1.211.100.128)
79강-YouTube강의(죽음의 세계)140619-이 근호 목사
제목은 죽음의 세계입니다. 욥기3장11절에 보면 욥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요 대목을 보게 되면, 욥의 고백인데요. 욥의 고백을 보게 되면, 욥은 지금 살아있으면서 본인이 하나님을 느꼈습니다.
욥이 살아있을 때, 부자였고 자식들이 다 잘됐고, 주변사람들이 욥을 부러워했습니다. ‘착하게 살더니만 복 받았구나! 저렇게 착하게 사니까 복을 안 받을 수가 없지. 그러니까 의로운 곳에 복을 주는 그 하나님은 정의로운 하나님이다. 욥을 봐라. 욥이 저렇게 바르게 사니까 바르게 사는 대가를 그 때 그 때 제공하는 하나님이야말로 참으로 정의와 의로운 분으로 하나님이 욥을 통해서 마음껏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다들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욥은 3장 11절에서 그렇게 잘 나가던 욥이 3장 11절에서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나를 낳을 때, 숨지지 않았던가, 요 대목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현재 내가 살아있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 편하다는 이야기에요. 지금 죽기만 하면 내 고통도 사라지니까 깨끗하게 모든 게 해결된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산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는 거죠. 욥이 여기서 우리한테 알려주는 게 뭐냐 하면, 살아있다는 것이 마냥 행복이 아니라는 겁니다.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다행스러운 사태가 살아있을 때, 주어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아무리 힘들더라도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낫다고 여깁니다. 전도서에도 그런 비슷한 말이 있어요.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고요. 그런데 욥은 여기서 말하기를 이럴 것 같으면 죽음이 해결책이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 욥에게 이런 엉뚱한 일이 벌어졌을까요? 여기서 제일 먼저 말씀드릴 것은 욥과 예수님의 공통점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욥과 예수님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세상 사람들은 살아있으면서 진리를 끄집어내는 특성이 있어요. 자기가 살아있으면서 자기가 경험한 것, 내가 이렇게 기도해서 살았다. 이렇게 기도해서 복 받았다. 이렇게 했더니만 내가 하나님께 보상받았다. 이렇게 나쁜 짓했더니만 벌을 받았다. 이런 식으로 살아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증거 하는, 일단 살아있는 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반면에, 그게 진리라고 생각하는 반면에,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의 진리라 하는 것은 살아있으면서 주워 모으는 거예요.
쇼핑백에 물건 모으듯이 이것도 좋은 거다. 이것도 진리다. 이것도 진리 같아. 이것도 하나님이 살아있는 증거 같아. 하는 기적들과 경험들, 체험들을 끌어 모아서 그걸 한데 모아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라고 살아가는 반면에 욥과 예수님은 살아있으면서 끌어 모은 게 아니고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증거 하는 면에서 욥과 예수님은 한 통속이 되고 세상 사람과 차이가 나는 겁니다.
죽어봐야 진리를 안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죽어봐야 진리를 안다는 거예요. 살아있는 때는 왜 진리를 모르느냐 하면, 살아있게 되면 내 사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보다 항상 우선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했더니만 하나님이 나를 살려줬다. 이렇게 했더니만 하나님이 나를 더 오래 살게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걸 진리라고 우길 때, 항상 진리 끝에 뭐가 있느냐 하면, 이렇게, 이렇게 했더니만 내가 살았다. 내가 산 것을 항상 진리 중심에 둘 수밖에 없는 한계가 우리한테 있습니다.
그런데 욥기 3장 11절에서는 뭐냐, “하나님이여, 차라리 저를 죽음으로 되돌려 놓으세요.”라고 해서 “진리는 살아있는 내가 아니라 내가 죽음으로 되돌아 갔을 때, 그게 죽음 안에서 비로소 진리가 밝혀질 것입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점에서 욥도 마찬가지고, 예수님도 마찬가지고, 둘 다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첫 번째 본문을 통해서 아는 것은 욥과 예수님은 그런 점에서 통한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욥을 그렇게 만드신 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기 위해서 욥에게 그러한 사태를 일어나게 했다. 그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두 번째 이야기하는 것은 욥과 예수님의 차이점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차이점이 뭐냐 하면, 욥은 자기가 의로운 대도 불구하고 난데없이 이런 저주와 고난을 받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모르겠다는 겁니다. 따라서 자기가 고난 받는 것도 고난 받지만, 그 어줍짢은 욥의 친구들이 와서 자기를 모독하는 것이 더욱 더 괴롭고 자기 부인까지 자기를 저주하고 죽으라고 자기를 부정해 버리고 자기에게서 고개를 돌릴 때, 그것도 괴롭고 자식 죽은 것도 괴로울 거고 많은 재산 다 날아간 것도 괴로울 것이고 어쨌든 간에 그 모든 세상 괴로움이란 괴로움은 흠뻑 씌워질 때에 욥이 그걸 강력하게,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심판과 저주는 저주에 부합되지 않다고 강력하게 그걸 거부하고 저지하고 있다는 겁니다. 욥이.
거기에 비해서 예수님은 뭐냐 하면, 예수님은 자진해서 주님의 저주가 주는 그 심판대 앞에 자진해서 서신 거예요. 욥은 그걸 거부하고 있고 이런 저주와 심판은 저에게 합당하지 않습니다. 라고 현재 주어진 현실을 강력하게 거부한 입장에 있다면 예수님은 아버지 뜻이면 나한테 임하게 하옵소서. 해서 자진해서 그 저주받는 자리에 본인이 성큼 성큼 거기에 섰다는 점에서 욥과 예수님이 차이가 납니다.
욥과 예수님의 차이는 곧 무슨 차이냐 하면, 예수님 빼고 모든 인간들과 예수님의 차이를 같이 보여주는 겁니다. 어느 인간치고 자진해서 이유도 없이 저주가 오고 사업이 안 되고 자기 몸이 아프고 가정이 다 깨질 때에 원망 안 할 위인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하나님이여, 이럴 수는 없습니다. 왜 하필이면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이게 바로 욥이 우리하고 똑같은 성정과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우리를 대표해서 지금 3장 11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욥이 전체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정말 터무니없습니다. 이런 일이 저한테 일어날 하등의 이유를 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이건 뭔가 하나님이 조치를 잘못 취하신 것 아닙니까?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 아닙니까? 저 같이 착한 사람에게 이런 과도한 벌을 내리신다는 것은 이건 하나님답지 않습니다. 정의로운 하나님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불평하는 반면에 예수님은 죄가 없었어요.
아예 죄를 지은 적도 없습니다. 죄를 모르시는 분입니다. 심지어 그 분은 하늘에서 평안히 사실 분이에요. 하지만 하늘의 모든 영광을 다 버리고 성큼 성큼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갔는데, 간 장소가 뭐냐 하면, 죄 없으신 분이 죄 지은 자의 죄를 대신 감당해야 된다는 아버지의 뜻을 수행해야 된다는 그 자리를 예수님은 자신의 자리로 받아들인 거예요. 그 자신의 자리로 받아들인 거예요.
욥이 죽었다가 깨어나도 주님의 자리에 갈 수가 없고, 설 수가 없습니다. 욥 뿐만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겠고 예수님을 믿겠다는 우리들도 그 예수님만이 그 가셨던 그 자리에 우리가 자진해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진해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제가 하는 것은 우리는 항상 믿음 좋다고 우겨도 막상 그런 일이 있으면 다시 원상으로 돌아가고 싶고 옛날 어려움이 없던 그 시절이 그리워지고 어떻게 하면 그 시절로 회복이 될 수 있을까, 해보면 될 수 있다면, 철야하고 금식하고 헌금 드리고 충성하고 다 할 테니까 제발 옛날처럼만 그 때 그 모습이 내 맞는 모습이니까 그 때로 되돌아가려고 그렇게 간절하게 철야하고 기도할 겁니다.
그 자체가 틀려먹은 자체라는 것을 우리가 언제쯤 수용하겠습니까? 우리가 어려움이 온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어려움은 저한테 부합되지 않습니다. 이걸 철회해 주시옵소서.” 라는 그러한 내 욕심을 채우는 그 마음이 우리가 어떻게 해서 언제쯤 그것이 사라지겠습니까?
우리가 거룩의 목표를 잡는다고요? 우리가 주의 말씀대로 산다고요? 주의 말씀을 실체로 옮긴다고요? 그건 터무니없는 그건 우리가 망상입니다. 전혀 우리한테 합당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배부를 때 편안하니까 주를 믿는 것처럼 느껴지고 섬기는 것처럼 느껴지고 주님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주님께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니가 얼마나 독한 인간인가를 니밖에 모르는 인간인 것을 욥처럼 같은 사태를 우리에게 유발시켜서 우리에게 그걸 확신시켜 줍니다.
이제 남은 문제입니다. 특히 욥이라서 구원받았다는 말을 하지 마세요. 어떻게 욥 같은 자가 천국에 가는가, 이렇게 의아해 하면서 질문해야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매일같이 의아해 하면서 하는 질문과 동일한 질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받았던 그 십자가 피가 확산되어서 우리한테 성령을 통해서 선물로 주시고, 선물로 안 줘도 되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 선물 때문에 욥 같은 우리도 이렇게 천국에 가게 된 겁니다.
따라서 우리의 자랑은 오직 주님의 고난만 자랑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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