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17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4-존 웨슬리
20140617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4-존 웨슬리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40617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4-존 웨슬리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 끝에 제가 인간에게는 실패가 없다고 했지요. “하나님, 저 실패했습니다.”라는 말을 할 입장이 안 된다는 겁니다. 실패, 성공을 우리가 왜 언급합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너는 왜 딸이야, 아들이야?” 그걸 왜 자식에게 물어요. 딸로 만들었으면 딸이고, 아들이면 아들이지.
죄 문제를 개인이 다루겠다는 의도 자체가 의를 내가 만들겠다는 취지에서 나왔기 때문에 죄를 자신이 관리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내 관리를 제대로 하게 되면 자기 위주의 의를 따로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지하갱도 2.5km 밑에 금고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선악과를 아담의 눈앞에 등장시킨 겁니다.
선악과가 무엇이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이 필요했지 인간을 죽지 말라고 또는 죽으라고 있는 게 아니에요. 선악과 자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은 선악과와 마주하면서 선악과와 함께 있는 또는 선악과 위주로 만들어진 두 개의 나무를 위하여 만들어진 에덴동산에 인간이 거기서 일종에 보조로 살게 된 겁니다. 잠시 살다가 나옴으로 말미암아 선악과, 생명나무의 체계가 에덴동산의 범위를 넓혀서 전 영적세계까지 확대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어요.
제가 주일 오후설교 때 그런 것 했잖아요. 치료제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병든다고. 병 낫기 위해서 치료제 있는 게 아니고 치료제가 얼마나 대단하지 보여주기 위해서 병이 나와야 돼요. 하지만 막상 병든 환자의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 굉장히 원통하고 절통하겠지요. 본인은 건강하고 싶은데 하나님의 자기 계획 위주로 밀어붙이다 보니까 아파야 되는 운명이 됐다는 자체가 서글픈 거예요.
여러분,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얼마나 주위에서 동정을 많이 받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뜻은 뭐냐 하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동정하는 제자들을 문제 삼고 제자들에게서 문제를 끄집어내지요. 뭔 뜻이냐 하면, 제자들은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측은해 여기면서 예수님에 대해서는 절대로 측은해 여기는 것이 아니고 자기와 한 편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실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보다 더 불쌍한 분이지요. 그런데 그게 제자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거예요. 나중에 성령이 와서 눈이 뜨게 되면 그제야 보게 될 겁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보다 더 측은하고 불쌍한 존재가 없었다는. 그리고 선뜻 그분의 뒤를 따라기에는 자신에 대한 미련, 자신은 행복해야 된다는 미련이 너무 강렬하게 붙잡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네가 내가 마시는 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쓴 잔을 제가 칠판에 쓰는 이유는, 모든 율법, 땅, 천국 개념이 쓴 잔을 마셔서 쓴 잔에 합류된 사람들에게만 제공되게 돼있습니다. 모든 인간들, 제자들이 있잖아요. 이들이 쓴 잔을 경유하지 않고 바로 하나님 주시는 축복과 천국과 번영과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영생 등 모든 것을 부여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아이디어가 뭘까요? 단순히 쓴 잔을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게 아니라 도대체 이들이 성경에 나오는 각양 좋은 것, 천국, 영생을 그들은 어떤 식으로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내세우는 겁니까? 그게 바로 존 웨슬리와 알미니안주의고 칼빈주의도 마찬가지고. 루터는 그게 아니지만. 어떻게 하면 된다는 겁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고 구원에 합당한 바르게 살면 얻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만약에 예수 안 믿고 바르게 살지 않으면 영생을 못 얻게 되지요.
그러면 묻습니다. 영생 못 얻는 것이 너한테 실망이 되는 이유를 대라. “당신이 지옥 가는 것이 당신한테 실망이 되는 이유가 뭐지요?”라고 물을 때 여러분은 뭐라고 답변하겠습니까? 너는 실패자라고 할 때 그 실패자라는 말이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이유가 뭐냔 말입니다. 예수님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개 같은 여자라고 했지요. 사람을 개라고 하면 기분 나쁘겠지요. 그런데 그 여인은 주님이 개라고 하시면 그것조차 축복이라고 수용했잖아요. 주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세상에 이만한 믿음 있는 자가 다 있느냐고 놀랐지요.
지금 우리가 근본을 찾아가는 겁니다. 근본문제가 뭐냐 하면 나로부터 출발하면 근본이 아니라는 걸 제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출발을 주님이 제시하는 쓴 잔으로 하자. 왜?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개념과 주님이 만든 현실은 쓴 잔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렇단 말이죠. 그런데 제자들이 누가 높으냐고 할 때는 쓴 잔을 못 마셨잖아요. 쓴 잔을 못 마신 것도 의미가 있는 게 인간이 쓴 잔을 못 마실 때 아이디어가 뭐냐를 제자들이 대표해서 충실하게 해주는 겁니다.
제자들의 철없는 생각이 오늘날 우리와 왜 그렇게 똑같은지요. 알미니우스 신학이 한국교회신학과 똑같단 말이죠. 영생을 따내자, 별을 따내자, 달을 따자. 달을 따내는 방법이 착하면 된다는 겁니다. 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못 따니까 죄의 반대말이 의가 되는 거예요. 죄의 반대가 의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진짜 숨어있는 의에 반대라는 걸 인간들은 모르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선악이 뭡니까? 선과 악은 서로 반대지요. 반대를 하나로 묶어서 인간이 따먹은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선에서 악으로, 악에서 선으로 맨날 둘 사이를 왕복할 뿐이란 말이죠. 선과 악, 악과 선 그 자체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이 땅에 없어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인간이 해내지 못하고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데서 선악을 넘어선 주님만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통영 꿀떡을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우리가 통영에 가지 않더라도 오늘 맛봤잖아요. 그럴 때 우리는 뭐라고 해야 됩니까? 내가 마중 나갔더니만 얻었다는 소리하면 안 되지요. 해운대까지 마중나간 거예요? 어디까지 마중나간 거예요? 우린 마중 나간 게 아니고 이 자리에 있었어요. 그냥 값없이 주신 겁니다.
값없이 준 것을 믿잖아요. 그걸 믿어요? 믿으면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고민을 해야지. 그냥 값없이 준 것에 대해서 고맙다고 인사만 할 게 아니고 평소에 우리가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 것들을 노출시켜줘야 돼요. 평소에 하는 짓이 뭡니까?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 있어서 내가 착한 만큼 복을 얻어서 내가 누릴 자격이 있다고 자랑하고 싶은 욕구, 욕망, 그 재미로 살아가는 겁니다.
사람이 행동에 조심하는 이유가, 그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지울 길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내가 이만큼 세상을 잘 사는 것은 누릴 만한 자격이 되고, 네가 못 누리는 것은 너는 나보다 죄 지은 더러운 인간이기 때문에 누릴 자격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주신 것이고. 그런 인간들 천국에 못 갑니다. 천국에는 면류관도 반납하는데 그런 생각으로 어떻게 합류하려고요? 이 땅에서 백날 목사하면 뭐 합니까? 천국도 못 가는데. 목사 됐다는 자체가 헛짓한 거지요. 목사로서 목회해보세요. 한 주간 실패란 느낌을 안 받을 때가 없어요. 오늘도 설교해놓고 이것도 설교라고 했나하는 생각이 늘 들어요.
여기서 칼빈의 문제점을 봅시다. 칼빈은 알미니안을 반대했어요. 그런데 지식으로만 반대했습니다. 칼빈의 실수가 뭐냐? 알미니안과 연관해서 이 점을 생각해봅시다. 이 점을 이야기하면 칼빈 참 나빠요. 어째서 나쁘냐 하면, 알미니안과 존 웨슬리는 개인적 성화를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칼빈주의한테 욕을 얻어먹은 거예요. 개인구원론자들이라고. 지만 살면 그만인가?
그러면 칼빈의 문제점은 뭡니까? 제가 방금 암시 줬지요. 존 웨슬리와 알미니안은 지만 살겠다는 겁니다. 칼빈의 얍삽한 점이 집단적으로 살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알미니안주의는 개인의 성화를 주장하지만 칼빈은 집단성화를 주장하는 겁니다. 집단성화가 되려면 교회라는 집단에 법이 반복돼야 돼요. 규칙과 법이 제안되지요. 그러면 칼빈은 뭘 노립니까? 주어진 법을 반복시키면 자동적으로 뭐가 나온다? 계속해서 우리가 실패자가 아니라 성공자로 이 땅에서 살만한 가치를 계속해서 근거가 되고 이유가 되는 집단적인 의가 나온다는 거예요. 웨슬리도 마찬가지지만 하나님이 정해놓은 반복된 규칙을 포기를 못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천주교에서 반복시키는 예식이 일곱 가지입니다(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혼배성사, 신품성사, 병자성사). 예를 들면 혼배성사, 성사, 거룩한 일. 임직하는 게 있고, 장례하는 일, 고백하는 게 있고. 견진성사가 있어요. 견진성사는 인간이 결심해서 예수 믿었잖아요. 그 다음에 성화단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걸 견진성사라 합니다. 거기다 두 가지를 추가하면 되지요. 유명한 세례와 주님과 떡을 나누는 성만찬을 더하면 되지요.
칼빈, 루터 등 개혁주의자들은 다섯 가지는 없애고 성만찬과 세례식은 계속 반복을 시켰습니다. 집단성화를 위해서 그랬습니다. 왜 그들이 집단성화를 주장하느냐 하면, 성경에 교회가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웨슬리, 알미니안주의 이론하기 전에 이것부터 이야기해드릴게요.
교회가 인간의 손으로 유지됩니까, 아니면 인간의 손으로 매일같이 허물어집니까, 아니면 교회에서 인간이 손뗌으로 교회가 되는 겁니까? 어떤 겁니까? 교회는 기초가 있어요. 그 기초가 뭐냐 하면, 주일 낮 설교한 것을 이야기할게요.
하나님의 영생과 구원을 이스라엘은 감당을 못했습니다. 감당 못한 이유가 이스라엘 조직 자체가 혈통중심, 육신중심으로 돼있단 말이지요. 육신 중심으로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사람의 본성이 동물의 본성과 똑같아서 어떤 경우에도 자기 자식을 내칠 수가 없어요. 천하에 아무리 예쁜 아이라도 내 자식보다 예쁘지 않습니다. 이것은 강아지도 고양이도 그렇고 타고난 본성이 그래요. 가족중심, 혈통중심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걸 탓한다고 해서 벗어날 입장이 못 되거든요. 하나님께서 혈통중심, 육신의 할례중심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이야기하고, 계시를 줘버리니까 그들의 한계가 드러났어요. 우리 민족은 택한 민족으로 혈통중심으로 해버렸단 말이죠.
그런데 신약에 나오는 교인들은 서로 아는 사람들이에요, 모르는 사람들입니까? 전부 모르는 사이지요. 비록 그들 속에 가족이 있다할지라도 내 가족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못 하지요. 마태복음 12장 끝에 보면 유대인은 혈통중심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설교할 때 잘 보이기 위해서 여기 예수님의 동생들과 어머니가 와있다고 이야기했지요. 그럴 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 가족도 왔다고 했습니까? 듣는 가족 기분 나쁘게 이야기했어요. “누가 내 동생들이냐, 누가 내 모친이냐?” 여기 하나님 말씀 듣는 자들이 모친이고 동생들이라는 거예요. 새로운 가족이라는 거예요.
예수님 제자 가운데 동생들 있었잖아요. 하지만 성령 안에서 그게 통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고 부정해야 돼요. 누구든지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못 들어가요. 하늘나라는 가족이 해체되고 혈통이 해체되고 새롭게 연결이 돼야 돼요. 새로운 본드로 연결이 될 때만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로 하기 위해서는 사전작업이 있어야 되는데 혈육, 육신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선행돼야 된단 말이죠.
그런데 혈육의 특징은, 한 번 아들은 영원한 아들이에요. 한 번 조카는 영원한 조카고. 그러나 부부는 한 번 부부는 영원한 부부입니까? 이혼하면 남이지요. 로마서 7장에 보면, 아내가 남편과 비록 혼인했을지라도 남편이 죽어버리면, 다른 남편을 얻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식을 어떻습니까? 자식 죽으면 다른 자식을 내 자식이라고 자리를 메워야 됩니까? 죽은 자식이라도 자식 맞잖아요. 그런데 남편 죽으면 지 남편입니까? 죽은 남편을 자기 남편이라고 하다가는 또 이혼당합니다. 잊어야지요. 이제는 잊고 새 남편을 사랑해야지요. 인간은 육을 잊지 못해요. 따라서 인간이 생각하는 교회를 본인이 잊지를 못합니다. 거기에 자기가 관여했기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의 교회를 성령께서 어떻게 세웁니까? 내 자리를 구멍을 내버려요. 그걸 공백이라고 합니다. 진짜 어려운 것 시작된다. 이건 가야산 수련회에서 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공(空)이니까 구멍이라고 보면 돼요. 그냥 비어있다. 교회가 내 교회라면 이미 교회 아니에요. ‘나’라는 이름이 빵구나야 돼요. 타이어에 빵구나면 그 부분에 타이어가 없지요. 없음을 한자로 ‘無’가 되고 영어로 ‘nothing’이 돼요. 있어도 없는 게 돼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는 거예요. 죽음이란 있다가도 없어지는 걸 죽음이라 하잖아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하는 겁니다.
베드로의 본 이름이 시몬이지요. 시몬이 베드로로 바뀌지요. 베드로,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베드로가 들어갑니까? 베드로가 안 들어간다니까요. 날마다 반석이 반석 되게 하는 주님의 작용이 베드로 자리를 차지해야 돼요. 그래야 베드로가 교회의 기초는 아니지만 사도의 기둥이 될 수 있어요.
말을 어렵게 했는데 쉬운 말로 합시다. 신성일이 [맨발의 청춘]이란 영화에서 반항하는 젊은 청춘의 모습으로 왔거든요. 그런데 영화 촬영 끝났습니다. 그리고 본래의 신성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돌아온 신성일이 반항하는 청년입니까? 맨날 오토바이 타고 다니고 춤추러 다닙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영화에서만 그렇지요.
하나님은 그 영화에서 빠져나오지 말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만드시는 영화에서는 내가 중요한 게 아니고 내 역할이 중요하거든요. 그 역할을 계속하고 싶은데 우리는 영화 찍을 때만 그런 척을 한 거예요. 교회 나올 때는 신자인 척하고 밖에서는 교인인 척하면 손해나기 때문에 아무소리 안 하잖아요. 우리는 본래의 자기 자리를 확보하려고 하는 거예요. 육적인 걸 확보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교회 됐다가, 교회 안 됐다가. 이건 교회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고. 그래서 성령께서 다시 반항하는 청년이 되게 하는 거예요. 영화는 안 끝났어요. 왜냐하면 그 영화가 현실이고 우리는 영화가 끝났다고 여기면서 본래 현실이라고 하는 그 현실이 내가 만든, 욥이 만든, 인간들이 만든 영화 같은 망상의 세계, 허무한 세계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영화 같은 망상과 주님이 만든 현실 사이에서 우리는 반대로 생각하고 살아간다고 보면 돼요. 그걸 라캉이란 정신분석학자가 아주 잘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태어나면서 상상하는데 그 상상은 어디서 왔는가? 그것은 내가 있기 전에 있었던 인간의 현실세계가 나한테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되고 싶은 나는 없고,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요.” 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게 되는 거예요. 저 사람처럼 좋은 차를 타고 싶어요. 저 사람이 있는 넓은 아파트를 가리키잖아요. 가리키는 그 사람은 어디서 나온 사람들입니까? 나보다 먼저 이 땅에 살던 사람이지요. 그러면 그 사람이 가졌던 아파트, 차는 어디서 나온 겁니까? 그 사람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에게 있던 거잖아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상황의 일부가 되지요. 그러면 우리는 누구의 산물이냐 하면, 단순히 우리 집안의 산물이 아니고 나보다 먼저 있었던 상황이 나를 하나의 부분으로 또다시 스스로 창조한 겁니다. 그 창조에 내가 관여하지 못했지요. 관여 못한 그것을 바로 공백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는 이유도 모르고 목적도 모르는 이유가, 공백이 나의 존재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공백이 기초기 때문에 공백에서 나온 것들만 무작정 추구하게 돼있어요.
일본 축구가 코트디부아르에 졌지요. 해설자가 기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너무 통쾌해서. 일본이 진 걸 왜 그렇게 좋아하지요? 어차피 러시아한 질 게 뻔하니까 같이 죽자는 이야기에요. 왜 그렇게 좋아하지요? 이게 공백이라니까요. 공백이란 nothing, 아무 이유 없어요. 이유 없기 때문에 누가 채워주면 그것 때문에 울라하면 울고, 웃으라하면 웃고, 그게 우리 인생입니다. 이 이야기하니까 속이 시원하다.
도대체 나라는 게 없어요. 우리는 남들이 내 앞에 펼쳐지는 그 존재의 바다의 물결이 내 발을 적시니까 내 것이 되고 말았어요. 휩싸인 겁니다. 드라마에 울고불고. 내 게 어디 있어요. 교회라 하는 것은 구원이거든요. 교회는 옛날 출애굽이라니까요. 출애굽이 계속 일어나야 돼요. 우리는 세상에 미련을 두고 세상이 전부기 때문에 계속해서 거기서 뭔가 뽑아낼 때 뭘 통과해야 되는가? 쓴 잔을 통과해야 되지요. 쓴 잔을 통과하게 되면 우리는 애초부터 실패자라는 사실.
그 쓴 잔을 제자들부터 마시게 하고 주님이 마십니까? 주님 마시고 난 뒤에 주님 마신 그 잔을 제자들이 마십니까? 주님 마신 그 잔을 제자들이 마시지요. 왜 그렇습니까? 사람 힘으로 이 잔을 마실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성령이 와서 마실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성경에서 교회를 뭐라고 합니까? 성령의 공동체. 딱 나왔잖아요. 쓴 잔 마신 사람들의 단체. 그렇다면 그들에게 실패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실패는 없어요.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선교하면서 모든 상황이 나에게는 ‘아니요’가 아니고 전부 ‘예’가 되었다. 요새 말로 패스. 잘 된 거예요. 잘 뽑힌 거예요. 영화 잘 찍힌 거예요. 반항하는 청춘, 연기 좋아. 사실은 연기 아니지만. 잘 한 거예요. 모든 게 누구 작품입니까? 주께서 연기도 못하는 우리를 그렇게 합치되도록 데려가신 거예요.
지금 웨슬리나 칼빈도 마찬가지고 알미니안주의도 그렇지만 그들의 목표가 뭐냐 하면,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생활하느냐? 성경에서 거룩하지 못하면 거룩한 나라에 못 간다. 베드로전서에 보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그것이 뇌리에 박혀있는데 그게 하나의 숙제가 됐는데
다시 이야기할게요. 웨슬리에게 첫 번째 출발점이 남과 어떻게 다른가? 거룩이란 것을 어떻게 포집하느냐 하면, 우리가 평소에 세상 보고 사는 것과 똑같아요. 저 사람은 저렇게 사는데 우리는 따로 열두 명, 어떻게 하자? 성경만 보고 토론하고 성경대로 이웃 돌보고 그렇게 살면 우리만이 완벽하고 완전한 성경으로 사는 젊은 사람들의 그룹, holy club이 되는 거지요. 거기다가 인디언에게 전도하러 갔으니 보통 거룩한 게 아니잖아요. 젊은 사람들이 얼마나 용기 있습니까.
그러한 모든 시도가 결국은 자기 마일리지 쌓은 것밖에 안 되고 그러면서 성경에 비추면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가 거룩하라. 거룩을 쟁취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쓴 잔을 집어넣자 말이죠. 쓴 잔은 예수님께서 자진해서 세상이 설치한 재판정에 본인이 섰잖아요. 재판정에 서서 사형을 받아야 쓴 잔이 나오지 쓴 잔이 집에서 홍삼 다려먹는다고 그게 쓴 잔이 아니란 말이죠. 쓴 잔은 세상이 미워해줘야 쓴 잔이 되는 거예요. 본인이 도 닦으면 쓴 잔이 아니에요. 자기 한계를 테스트한 거예요. 내가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극기 훈련이지 쓴 잔이 아니란 말이죠. 수녀들 보세요. 극기 훈련하잖아요. ccc 아이들 여름 되면 교회 돌아다니면서 걸식하잖아요. 극기 훈련 아닙니까. 국토종단하면서.
그래서 악마가 우리를 교육시켜줘야 돼요. 우리가 악마한테 훈련받아야 돼요. 조교도 아주 못된 조교한테 걸려야 돼. 말씀도 모르고 있는데 걸려보세요. 그때부터 왠지 그 조교를 사랑하게 될 거예요. 가면 갈수록 존 웨슬리를 사랑하게 되고 좋아집니다. 왠지 우리 본성에 맞아요. 바르게 살면 복 받는다는 게 좋다니까. 처음에 신학교 나와서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한국교회 썩었다고 복음대로 해야 된다고 개혁주의를 부르짖고 십자가를 부르짖다가 나중에 교회 장사 안 되잖아요. 하나둘 보따리 풀어 세상 따라가다 보면 그렇게 목회 40년 하다보면 왠지 착하면 복 받는 게 하나님의 뜻 같기도 하고 그래요. 웨슬리가 점점 정이 가요.
칼빈의 문제점은 그것을 교회 집단화하니까 그러니까 감리교보다 칼빈주의가 더 좋아. 교회 자체가 집단이니까. 그 안에 성찬식 살아있지요, 세례식 살아있지요. 거기다가 등록이 살아있어요. 성찬식 할 때 목사가 아니면 아무나 못하거든요. 목사가 있다는 것 얼마나 든든합니까. 목사는 우리한테 마치 의리, 그야말로 한 의리하는 것 같아. 의리 있는 교회 목사가 든든해 보이고 그래요.
여러분, 목사의 의리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주님의 쓴 잔입니다. 쓴 잔은 어디서 생긴다고요? 세상에 나가서 당해야 돼요. 사기도 당하고 같이 놀다가 너나나나 똑같은 존재라는 것을 혹독하게 체험해야 됩니다. 쓴 잔이 지리산 도 닦고, 기도원에서 도 닦는다고 느껴지는 게 아니에요. 그야말로 내 뜻대로 안 돼야 돼요. 나의 조그만 희망조차도 박살나야 돼요. 세상에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어야 돼요. 그 모두가 나한테 쓴 잔의 재료가 됩니다. 인삼 다릴 때 여러 가지 재료가 들어가서 보약 되는 쓴 잔이 되는 겁니다.
거룩은 바로 내가 망가진 게 거룩이에요. 그리고 잘못해서 망가진 게 아니고 처음부터 아무 짓도 안 해도 망가져야 되고 착한 일해도 망가지고 일부러 나쁜 일해도 망가지고. 어쨌거나 처음부터 우리는 망가진 존재로 이 땅에 왔음을 비로소 알 때 그 사람은 쓴 잔 안에서 거룩을 최초로 발견한 순간이 될 겁니다. 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내가 거룩해지고 주 안에서 의롭다하는 것처럼 처음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야기가 하나에 이론이 아니고 실제로 부부생활을 통해서 언제 아내가 사랑스러운가? 간단해요. 아내가 화장발 잘 받을 때? 아니에요. 아내가 성형수술해서 주름살 없을 때? 아니고. 아내한테 아무 문제없어요. 아내는 그대로 아내일 뿐이에요. 내가 죄인인 걸 알 때 무조건, 무조건 아내가 사랑스러워요. 나 같은 자에게 너무 과분해. 밥 안 해주고 밤에 춤추고 온 아내가 너무 고마워.
개콘에 [존경합니다] 코너에 보면, “여보 나 남자 생겼어. 당신 화나지 않아?” “거짓말하지 마. 너 같은 얼굴에 무슨 남자가 생겨.” 그러니까 그건 아내를 계속 이용하겠다는 거예요. 밥 해주는 아내로 이용하고 빨래해주는 아내로 이용하겠다는 거예요. 여러분, 혹시 그런 마음 듭니까? 이렇게 복음 아는 나를 만나서 구원받은 걸 천하에 감사히 여기라고 요구하는 거예요?
여기 137페이지 청교도 보세요. 수도승, 수녀, 구걸하는 탁발승, 전부 다 이런 식으로 경건한 것처럼 존 웨슬리도 마찬가지고. 139페이지로 넘어가봅시다. 진젠도르프가 나오는데 진젠도르프와 경건이 다르다는 거예요. 경건주의가 뭐냐? 이건 다음 시간에 할 거예요. 다음 시간에는 독일의 경건주의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진젠도르프의 견해가 뭐냐? [진젠도르프의 주장은 의롭게 되는 순간 인간은 철저히 성화된다는 것이다.] 맞네. 맞는 이야기네. 의롭게 되는 순간 철저히 성화됐다는 것이고, 존 웨슬리는 뭡니까? 기초를 닦는 거예요. 제2의 축복이 따로 제공돼야 되고 만약에 제2의 축복이 오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구원 못 받아요.
지금 웨슬리의 난점이 뭐냐 하면, 구원을 개인의 관리차원에서 생각하는 게 문제가 되거든요. 그래서 웨슬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협력이라고 하는 거예요. 나와 성령님의 협력으로 성화가 되는 거예요. 협력이니까 쉽게 말해서 동업이잖아요. 동업을 할 때 주도권이 누구입니까? 반드시 한 명이 대표자 되게 마련이에요. 동업을 하는데 한쪽이 속이면 신뢰를 잃어버리고 동업이 깨지죠. 이 말은 동업은 늘 깨지게 돼있어요. 그래서 성경에서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거예요. 한쪽을 사랑하면 반드시 한쪽을 미워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잖아요. 그러면 성령과 내가 동업해서 거룩을 이룬다면 나는 나를 사랑하니까 결국 동업이 아니고 이미 깨어졌지요. 성화가 안 되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거룩이란 거룩한 분에게 데려가서 그 앞에서 우리를 죽이고 그 죽은 자리에서 주님이 등장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그 일을 해요. 날마다 우리를 죽이고 다시 살리는 그 일을 하시는 거예요. 네가 하고 있는 일이 네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고, 네가 갖고 있는 아파트나 모든 재산이 네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지금 저희 빌라가 물이 새서 보드가 젖어서 떨어지고 벽지가 축 늘어졌어요. 우리 집 온수파이프가 터져서 그렇습니다. 그럴 때 우리 집이 누구 집입니까? 방금 이론상 주님의 집이잖아요. 주님의 집이니까 그걸 보고 내가 화를 낼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우리도 얹혀사는 입장에서는 화 낼 필요가 없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사태를 일으키게 되면 이론이 뭔지 따질 필요도 없이 단밖에 나오는 게 “아이, 짜증 나.” 이것 아닙니까. 벌써 공사 세 번 했거든요. 네 번째 해야 돼요.
그러니까 성령께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름 기둥으로 인도했는데 물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요. 양식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요. 하나님 믿는데 심지어 하나님이 동행하시는데 돈 떨어질 줄 상상도 못했단 말이죠. 인솔자에게 분명히 비상금이 있게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돈 없다고 나온다면 어떻게 됩니까? 분명히 물이 있고 양식 있는 줄 알았는데 없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는 거예요. 원망해야 돼요. 원망을 반드시 해야만 되는 거예요. 원망을 해야 우리 의가 정립이 안 돼요. 우리는 항상 불평할 수 있도록 용수철이 눌려져 있는 상태에요. 뭔가 계기만 되면 불평이 마구잡이로 터져 나옵니다.
바로 그 인간이 거룩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거룩한 것이 아니고 그 인간마저 거룩하게 하시는 그 하나님이 주 안에서 거룩하게 하거든요. 이런 성화를 존 웨슬리나 칼빈이나 알미니안주의는 상상도 못하는 거예요. 왜 상상을 못하느냐 하면, 세상에 돌아가는 일이 주의 일인 것을 안 믿고 내가 꾸려나가는 일은 따로 있다고 경계선을 쳐서 그런 거예요.
진짜 성도의 생활은 그 경계선을 늘 허물어버리세요. 저한테 수천 번 묻는 질문이 그거에요.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면 됩니까? 새로운 버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경계선을 허물어버리고 주님의 은혜의 파도가 찰싹찰싹 내 발 밑을 적신다고 모든 게 은혜로 받아들이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되는 겁니다.
거룩하지 마시고 거룩함을 입으세요. 히브리서 10장 10절에 나오는 말씀 아닙니까. 그냥 거룩함을 입어야 되는데 지가 거기서 거룩의 뜨개질을 하고 있다니까. 거룩의 뜨개질을. 예복을 입을 생각은 안 하고 뜨개질하고 있다니까. 한 땀, 한 땀. 뜨개질하는 사람들 보세요. 자기가 뜨개질한 것을 들어본다고요. 잘 나왔는지. 이게 도 닦는 거예요. 뜨개질한 것을 교회에 갖고 가서 숙제 검사한다고 이번 주에 이만큼 했다. 새벽기도 나왔다.
진젠도르프는 인간은 의롭게 되는 순간 거룩하게 되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진젠도르프의 문제점이 뭐냐? 다음에 할 거지만 미리 이야기하면, 진젠도르프의 성화나 칭의가 참 멋있어 보이고 그야말로 개혁적이고 옳아 보이지요. 뭐가 문제냐 하면, 이게 사법적이라는 겁니다. 사법적 칭의거든요. 우리가 흔히 아는 대로 법정적 칭의. 칼빈주의 구원론의 기본이지요. 법정에서 선언 받았기 때문에 의인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복음적입니까, 옳은 거예요?
여기에 법이 들어갔지요. 여러분 법으로 구원받는 겁니까, 사랑으로 구원받는 겁니까? 사랑으로 구원받지요. 사랑에서 법을 뽑아내는 그게 죄에요. 왜 사람들은 사랑에서 법을 뽑아내느냐 하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지요. 선악과 따먹은 인식 자체가 주변에 모든 계시나 진리는 아무리 사랑으로 날아와도 법적으로 옳으냐는 질문으로 받는 거예요. 옳다면 선으로 여기고 받아들이고 악하면 안 받아들이겠다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 사건을 유발시켰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할 때 저게 옳은가 보는 게 아니고 그걸 선택하는 내가 옳은가를 우선적으로 챙기면서 그걸 해요. 어떤 선택을 해도 내가 옳다는 걸 생각한다는 겁니다. 어떤 여자가 나타나니까 너무 아름다웠어요. “아가씨, 정말 아름답습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어도 그 말을 이렇게 바꿉니다. “당신의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제 눈도 괜찮지요?” 상대방의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보는 나는 얼마나 아름다움을 갖고 있느냐는 거예요.
결국 인간이 어떤 행동을 개시할 때는 선악과에서 나왔기 때문에 항상 내가 그런 선택과 결정과 판단을 내린 자기 자신이 더 의로워졌음을 기대하면서 행동에 나섭니다. 자기한테 스탬프를 찍어요. ‘참 잘했어요.’
법정적 의? 이것은 로이드 존스도 이야기하고 다 이야기하잖아요. 로마서 설교 보세요. 주님은 법 없이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주님에게 일어났던 그 율법의 완성은 우리한테는 해당이 안 돼요. 법적으로 의롭다함을 주질 않습니다. 법을 따지려면 주님이 아버지와 따져야 돼요. 우리는 그 사랑으로 구원받은 거예요. 법은 주님이 해결했고 그 해결된 완성으로 나온 것은 이웃사랑이 율법의 완성이지요. 사랑이 덮친 거예요. 사랑이 파도처럼 퍼진 거예요. 그걸 무조건적 사랑이라고 해요. 묻거나 따지지 않는 사랑이 구원한 겁니다.
그게 말라기 1장에 나옵니다.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너무 충격적인 말씀인데 아까 웨슬리가 사죄 받은 게 충격적이고 확신 가진 게 너무 좋았다고요? 이게 더 좋아요.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 에서, 야곱은 나중이고 사랑과 미움이 우선이었고 사랑이 뭔지 보여주기 위해서 야곱은 사랑 받아야 했고, 하나님이 주신 미움이 얼마나 혹독한지 알기 위해서 에서가 이 땅에 태어나야 했습니다.
반항하는 젊은 상, 신성일, 우리는 주님이 벌이는 영화 속에 들어가야 돼요. 그래서 주님이 연출한 영화에 주님이 만들어낸 우리가 돼야 됩니다. 내가 생각한 내가 아니고. “봐라. 이런 인간도 내가 사랑했잖아.” 사랑의 결실로서 살아가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존 웨슬리가 잘못된 것을 지적하면서 우리 자신이 평소에 그들과 똑같은 생각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발각 당했습니다. 사람이 신학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평소에 우리가 뭘 바라보는지 다시 한 번 그 쓴 잔 속에서 쓴 잔을 극복하는 주님의 사랑을 날마다 깊게 넓게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140617b 부산강의.hwp (50.0K), Down: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