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40617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4-존 웨슬리자유게시판[신학]

20140617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4-존 웨슬리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40617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4-존 웨슬리
(강의:이근호 목사)

존 웨슬리, 이 사람 영국 사람이거든요. 웨슬리를 하기 전에 먼저 시대전으로 앞선 사람이 있어요. 야곱 알미니우스란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은 독일 사람이거든요. 알미니우스 사상부터 하고 하겠습니다. 웨슬리와 알미니우스는 유사한 점이 많이 있어요. 보통 알미니안이라고 특히 한국교회 목사들이 알고 있는 이유가, 대부분 한국의 목사들이 칼빈주의 신학교를 나왔잖아요. 칼빈주의 신학을 하면서 반대되는 신학으로 알미니안 신학을 꼽은 겁니다.

그리고 알미니안 신학은 주류가 되지 못하고 배척을 받았는데 그 증거가 뭐냐 하면, 그 뒤에 나오는 수많은 신앙고백서에서 알미니안주의 사상들이 빠져버리고 칼빈주의신학으로 대체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청교도신학 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했지요. 사실은 칼빈주의라고 하지만 칼빈주의자 입장에서는 듣기 좋지 않지요. 그냥 진리 자체, 순수한 진리, 복음 그 자체, 성경의 엑기스, 성경이 응축된 것으로 자부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우선 알미니안주의 다섯 가지 요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교재 140페이지 보게 되면, [첫째, 비록 인간의 본성이 아담의 범법으로 인하여 타락해서 깊은 영향을 받았을지라도 인간이 영적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 남아 있게 되지는 않았다.]

부정이 두 개나 들어가지요. 인간이 범죄에서 타락한다 할지라도 영적 도움을 받지 못하는 지경까지는 내려가지는 않았다. 알미니안 시작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긍정하면 인간이 영적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인데 이 말은 결국 뭐냐 하면, 인간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범죄한 인간이 원래 창조한 목적이란 말입니까? 아니면 범죄하지 않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에 부합된다는 겁니까? 이건 누구한테 물어도 당연한 거잖아요. 죄 없는 상태로 인간을 만들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보기에 좋았더라. 죄 없는 상태가 원래 취지에 맞는다는 거지요. 그런데 인간이 범죄해서 죄를 지었으니까 하나님께서 타락했다고 해서 에덴동산에서 추방해서 흙으로 돌아가게 했잖아요.

그런데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가 분란을 일으키고 여기서부터 문제가 야기돼요.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 맞는 것 같아요. 천 명이 성경을 봐도 맞는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불행한 것이 하나님 뜻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하는 자체가 옳은 이야기한 것처럼 느껴지지요.

생각해보세요. 인간이 불행한 것이 인간의 뜻이 아닌데 지금 불행하잖아요. 죄를 지었잖아요. 그럼 그 책임을 누가 져야 됩니까? 하나님이 책임을 져야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만들어졌기 때문에 만들어진 인간이 책임진다는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너는 왜 아들이 아니고 딸이야? 왜 남자가 아니고 여자야?” 이걸 딸에게 추궁할 수 없는 입장이에요. 딸이 책임질 게 아니죠. 어떤 왕국에 왕자가 있어야 되는데 계속 공주만 나오니까 “난 왜 공주야. 왜 왕자 아니야.” 당사자에게 따지면 안 되잖아요.

그렇게 따질 때 더 큰 문제가 뭐냐 하면, 그 공주가 하는 말이, “미안해요. 공주라서.” 이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보통 문제가 아니란 말이죠. “아버지, 저를 용서하소서. 딸이라서 죄송합니다.” 지금 말이 안 되는 것을 보편적으로 모든 보편적인 인간들은 말이 안 되는 짓들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죄 지어서 죄송합니다.” 그게 죄송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죄 지은 원인을 따져봅시다. 인간을 흙으로 만들자마자 칼 들고 덤비라고 했습니까? 인간이 만들어졌는데 눈앞에 선악과가 있었단 말이죠. 그럼 선악과 없었으면 죄 지을 기회가 없지요. 그리고 선악과가 지하갱도 2.5km 밑에 있으면 따먹을 수 없지요. 선악과를 하나님이 비밀금고에 넣었다면 따먹을 수 없겠습니까? 아니지요.

존 웨슬리와 알미니우스를 하면서 이 사람들의 생각이 소위 칼빈주의라고 우기지만 사실은 칼빈주의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한 꺼풀 벗기면 전부 다 알미니안주의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교회뿐만 아니고 인간 자체가 존 웨슬리처럼 살아가게 돼있어요. 그런데 그동안 교회가 아무 근거도 없이 우리는 알미니안주의 아니다. 우리는 칼빈주의다. 이렇게 겉으로만 버티면서 사실은 내막에 보면 웨슬리 따라 가는 거예요. 차라리 존 웨슬리처럼 솔직하게 놀면 되는데 솔직하지 않은 게 더 나쁜 짓을 벌이고 있는 거예요. 왜 웨슬리 신학이면서 칼빈주의 신학교 나왔다고 칼빈주의신학이라고 우기는 그게 더 못됐다 이 말이죠.

알미니안주의와 웨슬리신학이 너무 닮았기 때문에 따져봅시다. 첫째, 인간은 범법으로 인하여 타락하여 깊은 영향을 받을지라도 인간이 영적 도움을 받지 못한 상태에 남아 있는 건 아니다. 따라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죄를 제대로 지은 거예요? 아니면 어설프게 죄지은 겁니까? 어설프게 죄지었지요. 제대로 죄지었으면 영적 도움을 받을 수가 없어요. 영적 도움 받을 기회가 요만큼이라도 있다는 말은 그것만큼은 죄에 물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죄란 바이러스 퍼졌는데 다행스럽게도 그것 하나는 아직까지 안 다치고 깔끔하게 남겨진 거예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리까지.

제가 문제를 하나 낼 테니까 알아 맞춰보세요. 산상설교에 보면 간음하지 말라는 대목이 나오지요. 거기서 보충하는 어떤 교재가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결혼하지 말라. 왜? 사랑하지 않고 결혼하는 것은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에 위배되는 거지요.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의 적극적인 버전은 결혼하려면 사랑해서 하라. 만약에 사랑하지 않고 결혼하면 자꾸 다른 여자를 보기 때문에 이것은 처음부터 간음하지 말라는 것을 어긴 것이다.

그럼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말씀에 간음하지 말라는 게 있고, 거기에 대한 같은 뜻이라고 우기면서 내놓은 사랑하지 않으면 결혼하지 말라. 둘이 같은 뜻일까요? 다른 뜻일까요? 이게 제 질문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사랑하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하지 말라는 말씀을 간음하지 말라는 취지로 주셨다면, 사랑해서 결혼한 것은 간음 안함이 되지요. 또 사랑하지 않는데 결혼할까, 말까? 돈 보고 할까? “나는 비록 돈을 원하지만 사랑하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을 거야.” 하면 그 사람은 간음하지 말라는 죄를 안 진 게 되지요.

제가 하는 말은 이거에요. 사랑하지 않거든 결혼하지 말라는 말은, 인간이 실천에 옮길 수 있고 지킬 수가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뭡니까? 인간이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지킬 수 없다는 이야기에요. 산상설교는 못 지킨다는 취지로 준 그것을 인간들은 예수님의 거룩한 말씀이니까 앞으로 예수님과 영원히 살 사람이니까 이것을 지킴으로써 주님 앞에 재롱이나 부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바르게 살았다는 티 낼 수 있는 근거, 자기 의의 근거를 자기가 마련하는 쪽으로 왜곡해서 해석해버리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인간의 숨겨져 있는 죄가 유일하게 나오는 방법이 그 방법밖에 없어요.

인간에 담긴 죄가 나오는 방법은 주의 말씀을 들이대면 못 지킨다고 들이댄 그 말씀을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을까 하고 시도하는 가운데 숨겨진 죄가 마구마구 쏟아지게 돼있어요. 하나님의 작전이었습니다. 걸러든 거예요. 그러니까 이천 년 기독교신학부터 해서 모든 목사들 설교가 그런 설교를 함으로써 온 교회가 그나마도 죄 짓고 있는 의라는 이름으로 죄를 더 활성화시키는 거예요. 우리는 의인이다. 우리는 세상과 달라.

알미니우스는 신학자고, 존 웨슬리는 부흥사인데 존 웨슬리의 근본적인 잘못된 출발점은, 우리 성도(성도집단)는 세상과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다른 점이 계속 나오면 신자고 안 나오면 신자가 아니라고 한 것부터 출발한 겁니다. 존 웨슬리에서 1단계, 2단계, 3단계가 있어요. 1단계는 열두 명의 청년이 모여서 성경대로 살기 클럽을 만든 겁니다. 홀리클럽을 만들어서 가입했어요. 열두 명의 청년들이 성경 읽고 그대로 지키기로 한 거예요. 이십 대에는 그런 객기를 부릴 만 하지요. 다를 그런 객기 안 부렸습니까?

더러운 세상과 극한 대조를 보이는 거예요. 고상하기 짝이 없는 우리들만의 그룹, 이게 존 웨슬리의 시작입니다. 그럼 어떻게 했는가? 하루 스케줄을 짜요. 성경뿐만 아니고 경건한 책을 읽고 토론을 합니다. 이야기하다보니까 벌써 대학생선교단체 생각나지요. 전공은 마음에 안 들고 대학생활은 짜증나고 그런데 자기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선교단체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미래가 암담한데 선교단체를 통해서 빛을 받고 앞으로 취직과 결혼을 보장해줄 것 같은, 여학생 같으면 좋은 남편감을 보장해줄 것 같은 그러한 희망을 기대하면서 선교단체에 매진하지요.

성경과 기도와 독서토론을 하면서 실천을 해야 되기 때문에 실천운동을 벌였어요. 예를 들면 교도소에 가서 죄수 위로하기, 노인들 위해 봉사하기, 부모 없는 아이들 공부 가르치기, 하여튼 봉사해서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솔선수범해서 힘을 합쳐서 해보자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의 문제는 혼자서는 안 되니까 힘을 합쳐서 해보는 거예요.

실제로 열두 명이 해본다 합시다. 막상 하기 전에 못 느꼈던 새로운 이슈나 요구사항들이 등장해요. 열두 명이 세상 변화시키기에는 너무 적잖아요. 취지는 좋지만 열두 명으로는 모자라지요. 그래서 회원모집 작업에 나서야 되고 그 다음에 세상일을 하는데 비능률적이에요. 예를 들면 의료봉사하려면 의사들이나 간호사들이나 의료계에 종사는 사람들이 필요하겠지요. 그리고 포스터 붙이고 행사할 때 정식으로 행정당국에 신고하고 하려면 너무 번거러우니까 경찰서나 법원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도움이 되겠지요.

그런 것을 하면서 그 집단은 뭘 느끼느냐 하면, 세상 권력이 나쁜 것만 아니고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내 세상 되게 유리한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다는 감이 오지 않겠어요? 유병언 장학생들, 왜 장학금을 줍니까? 구원파 활동에 필요할 것을 내다보고 한 거잖아요.

열두 명이 시작해서 그것까지 기대하다가 뭔가 한계에 부닥친 거예요. 열두 명 집단을 사실상 안 알아주지요. 만이 천 명이 아니고 열두 명이라니까요. 네비 찍으면 진자교회 안 나와요. 슈퍼 나와요. 제 아내가 찍어봤어요. 만약에 천이 명 교회 같으면 네비 찍으면 나온다고요. 수영로교회처럼.

지금 세상을 바꿔야 되는데 지옥 같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되는데 열두 명이 너무 작으니까 힘을 키워야 되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을 마귀가 시험할 때 예수님이 메시아란 걸 눈치 채고, 기적을 일으키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너를 추종할 것이다. 그리고 나와 함께 하면 세상 모든 걸 정복할 수 있다. 딱 나온다 말입니다.

그게 1단계고. 2단계가 뭐냐 하면, 영국에서 열두 명의 고상한 프로그램이 먹혀주질 않은 겁니다. 그 말은 젊은 청년 열두 명이 일을 하면서 은근히 노린 게 있다는 티나 난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완벽하게, 뒤에 나옵니다. 완전 성화, 이게 존 웨슬리의 기본 모토에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죄 짓지 않는다. 벌써 이십 대부터 그런 것을 노렸지요.

그런데 완전 성화하겠다고 실천에 옮겼잖아요. 그런데 열두 명으로 뭘 합니까? 그래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그때 이런 성경구절도 동원될 수 있어요.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 마태복음 13장 구절이 동원될 수 있단 말이죠. 우리끼리 이상적인 교회했는데 안 먹히는 거예요.

그렇게 안 먹히면 자기 존재감이 없잖아요. 있으나마나 한 존재가 되잖아요. 그러면 자기 존재감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판을 벌여야하지요. 경로당에서 10원 띠기 하지 말고 진짜 카지노 가는 거예요. 그게 어디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큰 도박판을 벌이는 게 두 번째입니다. 그게 인디언에게 전도하겠다는 것이 존 웨슬리의 두 번째 단계입니다. 판이 크지요.

인디언들은 짐승보다 못한 존재라고 소문났지요. 무식하고 세상 모든 것을 신으로 보는 범신론에 해당되는 아직도 문명의 이기를 모르고 계몽된 이성, 하나님의 지혜를 모르는 자들에게 교육시키고 치료하면서 봉사하면서 복음을 전하면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갔는데 또 실패했어요.

미국 가는 배 안에서 모라비안 사람들을 만났어요. 존 웨슬리가 18세기 사람이에요. 알미니우스보다 훨씬 뒤에 사람이에요. 그전에 모라비안이라고 해서 재세례파 쪽으로 동유럽에서 자체적으로 천주교를 반대하면서 소위 종교개혁적인 사고를 유지하는 집단이에요. 그들과 이야기하고 모습을 보면서 언어를 초월한 뜨거운 확신.

첫 번째 웨슬리의 단계는 완전한 성도의 삶. 개혁주의가 뭐냐 하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잖아요. 오직 성경을 통해서. 말만 성경이 아니라 성경대로 살기. 첫 번째가 성경대로 살기. 두 번째가 모라비안 사람들이 했던 뜨거운 확신. ‘뜨거운’이라는 형용사와 확신이 어울립니까? 미지근한 확신이 아니니까 뜨겁단 말이죠. 그런데 몇 도짜리 뜨거움일까요? 1500도? 그러면 2000도에 있는 사람이 보면 그것도 확신이냐? 미지근한 것들이라고 하지 않겠어요? 뜨거운 정도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어쨌든 간에 모라비안의 뜨거운 확신에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지금까지 알았던 것은 성경 보고 독서하고 토론하고 그걸 그대로 실천에 옮기려고 했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지식적인 신앙에 불과했구나.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뜨거움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서 어떤 예배에 참석하면서 루터의 로마서주석 서문을 읽는 가운데서 존 웨슬리는 또 감동을 받아요. 감동을 왜 그렇게 자주 받는지 몰라. 하나님이 죄를 용서했다는 겁니다.

첫 번째는 성경대로 살기, 두 번째는 확신, 세 번째는 사죄의 은총에 대한 확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죄를 용서했다는 그 사실에 대해서 감동받아요. 그래서 이 세 가지를 플러스하면 돼요. 삼종 세트에요. 완전하게 살기. 확신 있기. 죄 용서받기. 이걸 순서를 반대로 해봅시다. 3단계부터 나가봅시다. 죄 용서받고 그 다음 그걸 확신하고, 확신에 멈추지 않고 완전한 거룩에 나서야 되지요. 그래서 존 웨슬리 신학은 두 단계의 의가 있어요. 기본적인 의가 있고 완전을 추구하는 의. 칭의가 두 가지 칭의가 있는 겁니다.

교재 139페이지에 보면, 기초단계가 있고 완전에 이르는 제2의 단계가 있다. 이것은 웨슬리가 자기 체험에 근거해서 타인의 체험까지 확대시키면서 부흥운동이 일어난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나처럼 하면 구원받는다는 뜻이지요.

우리가 존 웨슬리를 생각하면서 천주교부터 봅시다. 산상설교에 대한 천주교의 교리가 두 가지에요. 웨슬리와 똑같아요. 산상설교에 대한 천주교의 해석에 기본적인 아마추어용 해석이 있고 두 번째가 완전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산상설교 본문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이건 심화단계에요. 초급반, 고급반 따로 있는 거예요.

왜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 그 이유에 대해서 말해보세요. 왜 이런 아이디어가 먹히는 거지요? 인간 속에 은근히 이런 단계를 노렸다는 뜻이에요. 천주교, 감리교도 그렇고. 감리교가 웨슬리에서 나왔으니까. 칼빈주의는 아닌 것 같이 하면서 똑같이 하고. 칼빈주의 성화론도 마찬가지고.

왜 이런 것을 기대하지요? 그건 제가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의 죄가 접혀져 있거든요. 접혀진 죄가 외부에서 거룩하고 고상한 하나님의 계시, 법이 오게 되면 접혀진 게 펼쳐집니다. 그 안에 응축, 압축 돼있던 죄가 기지개를 펴듯이 바깥으로 분출하고 방출하게 돼있어요. 이것을 웨슬리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그래서 웨슬리 신학이나 칼빈주의 신학도 마찬가지지만 이런 신학이 나온 것에 대해서 우리가 공부하게 된 것을 감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심을 이들이 대신해서 다 이야기했기 때문에. 예를 들면 세상 살면서 일이 잘 안 되잖아요. 그러면 제일 먼저 다가오는 게 뭐냐 하면, “내가 혹시 죄 지은 게 있는가?” 이건 기본적인 거예요. 처음부터 죄인인데 그런 죄인을 주께서 용서하는 식으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번 용서하고 난 뒤에는 그 다음에는 용서받지 않아도 될 만큼 알아서 하겠다는 독자적인 선언을 하는 겁니다.

제가 주일 오후에 그런 설교했잖아요.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못 간다.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어른이 된 사람은 도로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없거든요. 그래서 바나나킥으로 봤지요. 돌아가는 거예요. 어린아이로 출발해서 점점 어른으로 변하지요. 한 번 변한 어른이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없지요. 안 되면 하늘나라에 못 가는 거지요.

그러면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이가 뭐냐? 어린아이는 비자립적입니다. 뭔가 보호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 어른은 될 수 있는 대로 그 보호막을 탈출하고 벗어나려고 해요. 어린아이 같이 되라는 말은 이미 어른 본성이 발휘되고 있는 입장에서 도로 기 죽이고 고개 숙이고 보호해달라는 위인이 없어요.

다시 보충해서 말씀드리면, 어른이란 말은 이런 뜻입니다. 크게 쓸게요. 자립할 만큼의 의 확보가 급선무가 되는 겁니다. “저한테 어려움을 주셨는데 잘못된 조치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어려움이 닥치지 않을 정도로 나는 선하고 그동안 착하게 살아왔습니다. 하나님, 착한 자에게도 고난주십니까?” 이게 욥의 주제잖아요. “하나님이여, 착한데도 이렇게 어려움 있기에요?” 이런단 말이죠.

그런데 강도와 세리 또는 문둥병자, 소경 보세요. 십이 년 동안 혈루병 앓던 여인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라고 하지요. 타인들도 저주받았다고 했고 본인도 동의한 거지요.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세리가 누가복음 18장에서 동의했단 말이죠. 그럼 멀쩡한 사람, 지금 아무 일 없는 사람들은 결국 뭔 뜻입니까? 내가 이렇게 멀쩡한 것은 멀쩡할 만큼 이유가 나한테 포함돼있다는 거예요. 포함된 내용이, 내가 훌륭하기 때문에. 내가 저 세리나 창기와 같지 않은 것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기도한 것은 하나님의 의(마일리지)가 누적돼있고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이 벌을 내리고 싶어도 확보된 마일리지의 의 때문에 정의로운 하나님의 정의로운 조치라 본 거예요.

그게 바로 죄가 만들어낸 신이에요. 참 된 하나님이 아니고 자칭 잘났다고 여기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하나님이라니까. 그 하나님이 정의로운 하나님이에요. 서로서로 동의하고 통약, 통하는 약속처럼, 묵계처럼 느껴지는 것이 뭐냐 하면, 정의로운 하나님은 정의의 편에서 일한다는 겁니다.

웨슬리가 항상 염두에 둔 것은 찌질이 되지 말라는 거예요. 예수 믿고 난 뒤에는 날이 가면 갈수록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그냥 성경, 독서토론만 한 게 아니고 사회에 대한 봉사했지요. 사회봉사란 말은 우리도 교회를 지켜줄 만한 힘 있는 사회단체를 스스로 구성해나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요소요소에 정부 요직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전파에 지장이 없다는 겁니다.

감리교가 노리는 게 그거에요. 그들은 개인구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사회구원까지 이어져야 돼요. 선교단체에서 외치는 구호가 창세기 1장 28절이잖아요. 여러분 알지요. 다스리고 정복하라. 그러나 조건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면 개인구원에 머무르지 말고 사회구원으로 나가야 된다. 자본주의의 부조리에 대항해야 되고 독재에 대항해야 되고 새누리당 혼자 다해먹는 이제는 정권교체에 나서야 된다는 거예요. 잘못되고 편협한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 문창극이는 사퇴해야 되고.

참 그 욕심, 내가 소속된 단체가 사회에서 영향력이 있어야 된다는 탐욕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겠어요? 타고난 악마적 본성, 세계정복욕이 어떻게 삭제 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도 그랬지만 “내가 이 땅에서 어른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그만한 의가 확보돼있는 의가 있기 때문에 정의로운 하나님은 그 의를 보고 하나님은 나를 손댈 수 없을 것이다.” 손대려면 나보다 못한 찌질이 같은 인간에게 하라는 거죠.

그래서 존 웨슬리는 말하기를 예수 믿었으면 찌질이 되지 말고 이제는 성자로 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웨슬리가 모르는 게 있어요. 예수님 본인이 찌질이에요. 지금 방향을 잘못 잡았어요. 반대 방향으로 가야 되는데 마귀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예수님을 잡아 죽인 바리새인 쪽으로 가버렸어요.

재판석에 누가 서야 됩니까? 인간세계에 재판정이 있습니다. 거기는 누가 가는 거예요? 강도나 살인자 등 범죄한 자만 서잖아요. 그리고 누가 재판의 주관자입니까? 피고만큼 죄를 안 지은 의로운 쪽에서 재판하게 돼 있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이 만든 재판에 예수님이 섰잖아요. 그러면 도대체 이 사태가 어떻게 된 겁니까?

인간들이 뭘 추구한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 받고 추구한 게 뭡니까? 도대체가 그들이 말하는 예수는 어떤 예수에요? 주님은 요구해요. “왜 나처럼 죄인 되지 못하느냐? 나는 이렇게 혹독하게 죄인 취급당했는데 나를 따른다는 작자들아 무슨 꿍꿍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이 말이죠. 지옥 같은 세상에서. 뭐 세상을 변하시켜? 주님이 능력 없어서 변화 못 시켰습니까? 천사 동원 못해서 못한 겁니까?

제가 설교에서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세월호 침몰할 때 아이들의 조치는 뭐냐 하면, 배를 포기하는 거예요. 포기하면 살고 포기하지 않으면 죽는 겁니다. 과연 눈에 보이는 멋진 빌딩이 있는 부산 해운대가 침몰하느냐, 침몰하지 않느냐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바로 이 세상에서 다녀간 이유가 침몰 중인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미련 둬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문제, 스트레스와 고민이 그놈의 미련 때문이에요.

저게 아까운 거예요. 저 보석이 아까운 거예요. 저 명품이 아까운 거예요. 죽더라도 핸드백 들고 죽고 싶은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천국 가도 섭섭할 것 같아. 맛보고 천국 가고 싶어. 그러면 그걸 차려면 복을 받아야 되거든요. 복 받는 방법은 뭡니까? 나만의 의, 마일리지가 계속해서 충전돼야 돼요. 만약에 내 뜻대로 안 되게 되면 자기 카드를 꺼내게 된다니까요. “내가 혹시 죄 지은 적 있는가?”

욥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세상을 따로 만들고 있다는 거예요. 자기 의로움을 인정해줄 세상, 현실을 자기 위주로 항상 따로 만들고 사는 거예요. 그런데 욥을 찾아온 세 친구 전부 자기 나름대로의 현실을 또 따로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질이 다른 두 종류의 현실이 충돌했습니다. 자, 욥의 현실이 옳습니까, 욥의 친구의 현실이 옳습니까? 그 재판을 할 수 있는 분이 누굽니까? 나름대로 현실을 갖고 있고 분이 개입해야 돼요. 하나님의 현실이 등장하니까 서로 옳다고 우기던 현실이 둘 다 침몰해야 돼요. 그것은 인간이 지어낸 거예요. 내가 열심히 가고자 하는 그 세계에 내가 가고자 나서는 순간 그 세계는 가봤자 없는 세계에요.

그래서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어느 쪽으로든 가지 마세요. 스카이콩콩처럼 제자리 뛰기 하세요. 제자리 뛴 그 자리에 구멍이 파이잖아요. 그 구멍 속에서 비로소 진리가 나옵니다. 나 때문에 상처받고 파인 그 자리, 주님이 주신 은혜가 나의 욕심 때문에 아픔을 느끼면서 파일 때 거기서 피가 나오면서 우리는 주님의 고통의 유발자가 바로 나의 욕심인 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똑같은 반복적인 생활을 매일같이 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 보는 범위가 넓어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자리에 가지 않았으면 미처 알지 못했던 그 너머의 세계가 또 다시 우리에게 숙제처럼 다가옵니다. 여기가 지평선의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지평선 끝이라고 생각한 지점에 가보면 진짜 지평선은 내가 다가가는 그 행위로 말미암아 약을 올리듯이 저 멀리 가 있단 말이죠.

부자들이 그거거든요. 부자들이 왜 자꾸 돈 벌려고 하는지 알아요? 내가 이만 한 돈을 가질만한 자격이 있다고 걸 증명하기 위해서 계속 돈을 벌어야 되는 거예요. 200억 가진 사람은 내가 200억 자질 만 해서 200억 가졌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런데 200억 가진 그 순간부터 300억 사람들과 놀거든요. 그러면 300억 가진 사람이 볼 때 자기는 못난 존재가 되는 거예요. 왜? 내가 부실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니까 약이 오르잖아요. 그래서 사업이라는 도박에 나서는 거예요. 이것은 200억, 300억 노는 단위가 크다뿐이지 하루에 2만 원 버느냐, 3만 원 버느냐 하고 해운대 전통시장의 아주머니들도 똑같이 경쟁하고 있어요. 자기 위치에 따라서.

그래서 우리가 웨슬리신학을 제대로 공부 잘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뭐 신학도 아닌 것, 이러지 말고 웨슬리가 어떤 심정에서 이렇게 완전한 성화를 왜 추구해야 되는가? 우리가 거룩하면 거룩할수록 완전하면 완전할수록 거기에 비례해서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와 있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진짜배기 하나님의 뜻이라고 외친 웨슬리, 왜 그것이 진짜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게 된 취지와 이유가 어디서 나왔느냐는 것이죠. 그것은 본인이 실패했다고 느낀 데서 나오는 거예요.

이 이야기하고 첫째 시간 마칩시다. 여러분, 실패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건방진 이야기인지 웨슬리를 통해서 확인해야 돼요. 인간에게 실패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는 실패했다는 말이 성립이 돼요? 물 속에 잠수하는 사람이, “바지가랑이 다 젖었네.” 이런 말이 돼요, 안 돼요? 어항 속의 물고기가, “내 피부가 왜 축축하지?” 이게 말이 돼요? 말이 안 되지요. 나는 물에 안 젖어야 되는데 젖을 경우에만 물에 젖었으니까 실패했다는 말입니다. 나는 실패했다는 말을 듣는 하나님이 얼마나 어이가 없겠습니까? 네가 왜 실패를 논하느냐 말이죠. 우리는 실패를 논할 입장이 못 되잖아요. 우리가 뭔데.

다시 이야기합시다. “네 왜 딸이야? 아이고 실패했다.”고 하면 딸이 뭐라고 해야 됩니까? “‘제가 아버지 딸이어서 미안합니다.’ 이 소리해야 됩니까?”라고 오히려 아버지를 나무라야 되겠지요. 그렇잖아요. 여러분, 우리는 실패할 권한 없습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20140617a 부산강의.hwp (45.0K), Down:11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00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