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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가락-요한복음 2장23(바람)140605a-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복음

가락-요한복음 2장23(바람)140605a-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요한복음 2장23(바람)140605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2장 23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님이 유월절에 두 번 올라갔는가, 세 번 올라갔는가, 따라서 예수님이 세 번 올라갔다면 3년이고 두 번 올라갔다면 2년이다. 이게 성경 자체에서는 분명치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2년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3년이라 하는데 2년 될 경우에는 예수님 나이가 32살이고 3년이면 33세가 되는 겁니다.

여기 유월절이 앞에 있는 유월절과 같은 유월절인가? 내가 보기는 같은 유월절 같아요. 여기 유월절에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라고 돼 있죠. 여기 유월절에 표적을 행했다 하는 게 나오는데 표적이란 말을 사용할 때 지난번에 이야기했습니다마는 기적하고 표적하고 차이 난다 했죠? 기적은 누가 요구하는 것이다? 사람이 요구하는 것이고 표적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요구하지도 않는데 주님 쪽에서 제시하고 벌이신 일이 표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기적의 내용은 이미 인간들이 알고 있고 기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표적의 내용은 예상 밖의 내용 이예요. 그래서 이렇게 보면 돼요. 표적은 사람 고발용이라고 보면 되죠. ‘너희들 이런 거 원하지 않았지? 그렇지?’ 라고 추궁하듯이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두 개가 겹칠 때가 있어요. 겹칠 때가 있으면 주님의 고발 정도가 심해집니다. 오병이어, ‘배고프다, 해결해 주세요.’ 떡 줄게. 고기 줄게. 배불리 먹었습니다. 사람들은 이걸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 표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기적으로 이해한 거예요. 역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맞구나. 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알아서 챙겨주시니까 이런 하나님 같으면 이런 주님 같으면 왕으로 삼으면 되겠다. 하고 임금 삼으려고 쫓아갔죠. 그런데 그게 표적인 줄 몰랐고 기적 받은 걸로 생각한 거죠.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뭘 원하느냐 하면 기적을 원합니다. 헬라인은 지식을 원하는데, 유대인들이 왜 기적을 원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어디서 발견하느냐 하는 그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전체 자체가 중요한 기적이 전환점이 되어서 역사가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단순한 역사가 아닙니다. 어떠한 역사냐 하면 차별적 역사에요. 누구와 차별하느냐 하면 이방나라, 이방민족이 나름대로 역사가 있잖습니까? 이방나라의 역사와 이스라엘 역사는 차별됐는데 보통 역사라는 게 성립되려면 그 역사에 소속된 사람들이 계속 존재하고 있을 때는 역사도 함께 있는 겁니다.

지금 전두환 대통령 역사 어디 있죠? 그런 전두환 대통령 몇 년 했습니까? 7년 하고 끝났죠. 계속 그 위치에 없으면 역사가 끊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니 역사라 하는 것은 그 위치에 계속 존속 돼야 돼요. 이방민족들이 그 민족들이 그 민족이잖아요. 존속하잖아요. 이방민족이 존속하는 이유는 이 이야기를 이방민족은 뭐라 하느냐 하면 신이 보호하사 존속한다고 보는 겁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뭡니까? 누가 보호한다고 해요? 하나님이 보호하죠. 그럼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가 어떤 역경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만큼 버티고 있었던 것은 특별히 외부에서 신적인 존재가 보호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유지될 수 있다는 그런 것이 하나의 공동체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바가 추월 적 종교라는 겁니다. 이방민족에게는 다 그런 신이 있거든요. 그들이 전쟁할 때 신의 이름으로 나가서 전쟁합니다. ‘마르둑신이여, 우리 바벨론을 지켜주옵소서.’ 그리고 모든 아람, 모압 전부 다 신들이 나오는데 나온다는 것은 그 사람들도 역사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도 역사가 있는데 이스라엘 역사는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 지켜주는 거예요. 그럼 이 두 민족이 전쟁을 할 때는 결국 무슨 전쟁 이예요? 신의 이름과의 전쟁이죠. 여호와는 뭐라 합니까? "내 이름을 불러라. 그럼 전쟁하겠다.“ 이방민족은 뭐합니까? 깃발 들고 자기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전쟁에 나서는 겁니다.

그러면 둘 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니까 결국은 목청의 싸움이네. 소리의 싸움 이예요? 누가 자기 신을 더 열심히 부르느냐 그 싸움이 되겠습니까? 이스라엘 역사의 차이성은 주의 이름이 소리 높여 부른다고 주의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을 불러야 될 특별한 시스템, 틀, 장치가 있어요. 그게 바로 언약궤라는 겁니다.

언약궤가 있어서 언약궤를 밀고 들어가면 승리하고 언약궤를 만약에 버리고 그냥 전쟁하면 패배하게 돼 있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언약궤에 누구 이름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 있거든요. 그러면 다른 민족은 어떠냐 하면 신이라 하는 것은 우리 민족을 살려내기 위해서 신이 필요한 민족인 반면에, 이거 잘 아셔야 돼요. 현재 살아있는 인간들 육체, 이 몸, 단체, 이걸 지켜주기 위해서 신과 협상해 나가죠. 이방인들도 항상 정기적으로 뇌물 바칩니다. 처녀를 바치든지 아기를 바치든지 마야 문명에 보면 나오거든요. BC 6세기경에 현재 멕시코. 잉카 문명은 페루라든지. 거기 보면 제단을 만들어 바쳤는데.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고 누굴 위한 하나님이다? 지금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분이 있어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백성이 있어야 돼요. 다른 민족은 어떻다? 다른 민족은 자신들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 그때마다 신이 도와줘야 돼요.

특이성이 있어야 되는데 나중에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나라 민족을 본받아서 하나님을 위한 우리가 아니고 우리 자신들 살리기 위한 하나님으로 바뀌게 됩니다. 망합니다. 그래서 망한 거예요. 이스라엘 망한 이유가 주객이 바뀌어서 그래요. 나를 위한 하나님 때문에 망한 거예요.

오늘날 교회에 왜 갈까요? 하나님 앞에 목숨 바치기 위해서 교회 나가십니까? 자기를 위해서.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에 보면 항상 우상 앞에 뭘 붙이느냐 하면 자기를 위해서 항상 붙여요. 자기를 위한 것은 뒤에 여호와가 됐든 삼위일체가 됐든 예수가 됐든 그게 바로 우상 이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의 신학에서는 뭘 죽이느냐 하면 앞에 자기를 죽여 버리고,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하나님의 이름, 그리스도가 산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항상 우리는 육신이 있는 한 누가 우선이냐 하면 내가 갑이고 내가 살아나요. 내가 살아나는 것을 주님께서 만만한 분이 아니거든요. 주님도 같이 살아 있잖아요. 부활하셨으니까. 동행하시면서 항상 이것을 부정해버려요. 이번 일은 너 좋으라고 한 게 아니고 나 좋으라고 한 일이다. 이래서 자꾸 이게 대결과 경쟁에 나섭니다. 그게 기적을 달라 할 때 주께서 주시는 것은 ‘네가 원하는 기적은 이미 네가 예상하고 있기 때문에 못 주겠다. 단지 너 자신을 표적을 보여주는데 너를 참여시켜 줄게.’ 이렇게 되는 거예요. 표함 시켜 주는 거예요.

주도권을 주님이 쥐고 모든 스케줄과 계획, 프로젝트를 주님이 쥐고 너는 거기에 종으로서 그냥 참여하는 영광이나 누려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성경인데 비록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육신적인 본성은 항상 뭔가 유별나게 기도하고 싶고 뭔가 헌금하고 싶고 열심내고 싶을 때는 반드시 노림수가 있어요.

집안에 일이 있다든지 애가 고 3이라든지 벌써 일이 있어요. 갑자기 몸이 시름시름 아프다든지 고부간의 갈등이 있다든지 주식 값이 떨어졌다든지, 땅을 사놨다든지, 뭔가 있어요. 교육관을 지어야 되느냐, 마느냐, 그런 문제가 있을 때는 꼭 갑자기 독하게 금식까지 해가면서 기도를 해요. ‘주여, 말로만 전능하지 마시고 전능하신 티 좀 내주세요.’ 그래야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하나님 살아계심을 목격하게 되면 나로 인하여 증거 하게 되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실제는 자기 노리는 게 따로 있으면서. 글쎄요. 하나님은 그걸 겹치게 줄 수도 있어요. 하나님이 응답을 해줄 수도 있어요. 몸이 아픈데 기도하니까 갑자기 몸이 깨끗이 나을 수가 있어요. 병원에 가서 찍어보니까 암 세포가 나았다 그럴 수 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신났죠. 왜, 병원비용 계산하게 되죠. 병 낫고 헌금한 비용보다 그동안 병원에 다닌 비용이 훨씬 많으니까, 항상 문제는 돈이 문제니까. 돈이 헐하게 치면서 원래 노리던 효과 얻으면 이 세상에 그처럼 좋은 게 어디 있습니까? 아프면 또 해야지.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게 표적이 되려면, 방금 예로 암 걸린 이야기를 했잖아요. 요한복음 2장 초반에 보면 거기 무슨 표적이 나옵니까? 가나안 혼인잔치 나오죠. 분명히 마리아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포도주 떨어졌으니까 포도주 채워달라고 주님한테 요구했죠. 자기 아들이 보통 사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아이쿠, 어머니께서 저를 알아주시니 얼른 대령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왔습니까? 뭐라 했어요? “여자여, 그 일고 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지금 “여자여, 어머니여 당신은 나와 상관없는 것을 나한테 제안했습니다.” 상관없는 걸 제안했어요.

그럼 상관없는 걸 제안했으면 안 들어줘야 되잖아요. 그렇죠? 그래야 앞 뒤 일관성이 있잖아요. 안 들어준다 해놓고 도대체 마리아가 무슨 눈치를 봤는지 하인들에게 “이분이 시키는 대로 해라” 해서 물을 떠다 주니까 포도주가 됐다. 나중에 보니까 그것이 뭐냐 하면 이것이 표적이었다. 라는 겁니다. 내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곡해해서 요구한 그 기적, 하지만 그 기적을 결과적으로는 동일한 기적을 주면서도 그것이 마리아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결국은 자신이 누군가를 드러낼 그때, 예수님의 자신의 때를 미리 앞당겨서 예고편 조로 미리 가나안 혼인잔치에 주님이 어떤 분이란 걸 드러내셨다. 그게 표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표적은 미래에서 온 그림자라고 보면 됩니다. 사람들은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항상 기억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예상은 과거로부터 출발하거든요. 과거에 누진된 것이 미래를 낳게 만듭니다. 누진된 가운데 미흡한 것이 있으면 남겨놨다가 기도를 통해서 미래에 달성해 달라고 요청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성도되게 하는 것은 미래에서 오는 거예요. 집사님이 지금 머리가 허옇고 안경 끼고 있지만 미래에서 온 코난입니다. 남이 보기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렇게 돼야 미래의 확정된 집사님의 구원이 앞당겨서 이 모습으로 드러나야 된다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미련을 두지 않게 되죠. 히브리서 11장에 우리가 진짜 말로만 나그네가 아니고 진짜 나그네 꼴로 살도록 그렇게 강제로 조치를 그렇게 굽이굽이마다 이끌어내신다는 것을 우리가 온 몸으로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하는데 실수 하세요! 항상 실수해야 됩니다. 그러면 실수를 어떻게 하느냐? 그냥 막 사시면 실수하는 거예요. 이 막 사는 것 때문에 삐진 사람이 아마 수천 명 될 거예요. 제 말을 못 알아듣고, 막 사시라는 말을 못 알아들어요. 막 사시라는 말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낀다는 말은 뭐냐 하면 그동안 자기 의를 못 놓겠다는 표현으로 난 받아들여요. 자기 의를 때려 죽여도 내 마지막 남은 내 자존심과 의는 못 놓겠다. 그래서 막 사세요, 에 대해서 발칵 발작합니다. 내가 성령 받아서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 됐는데 ‘막 사세요.’ 하면 어떡하라고. 성경 보세요. 사도바울이 막 살라고 했습니까? 안 했잖아. 그런데 이 근호 당신은 막 살라 하느냐? 성경대로 해야지. 그러면 내가 이야기하죠. 성경대로 하는 게 막 사는 거예요.

왜냐 하면 이게 수요설교 한 내용인데요, 성경대로 지켰다고 해버리면 분명히 주님 보시기에 막 살아놓고 자기는 ‘성경대로 지켰습니다.’라고 우기는 바가 되는데 그 우기는 심보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일말의 자기 의를 이렇게 불꽃을 피우듯이 키우고 싶은 본성대로 해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내 이 행동은 주의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된다고 할 경우에는 어떤 경우냐 하면 자기 의와 만족이 될 경우뿐입니다. 하고 사진 찍을 때 그럴 때 ‘맞아. 내가 요 말씀대로 지켰으니까 나는 신도 맞아.’ 하고 스스로 자기 행위를 통해서 확인받고 싶을 때 이런 말(막 살라)에 대해서 아주 반발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신자라고요?’ 귀신이나 나라도 알겠다. 신자 아닌지.

왜 저는 ‘그냥 막 사세요.’ 하느냐 하면 우리는 이미 실수하고 있기 때문에, 매일같이 실수하거든요. 매일같이 실수하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우리는 매일같이 분노하거든요. 우리는 하루도 분노 안 하는 날이 없어요. 아까 김 중우 집사님이 쉬는 시간이 이야기했는데 ‘내가 투표한 사람 다 떨어졌다.’는 거예요. 교육감도 떨어지고 시장도 떨어지고 다 떨어졌다는 거예요. 그 말을 한 내용에는 뭐가 들어있습니까? 화난다. 그런 뜻 이예요.

매일같이 분노하는 이유가 왜 세상은 나를 힘들게 하느냐 하는 겁니다. 뭐든지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인간은 아이큐가 낮은 바보가 아닌 이상은 힘들면 복수가 나오게 돼 있어요. 반드시 반발이 나오게 돼 있고 이건 자연적인 본성입니다. 문제는 그것은 우리가 천사도 아니고 우리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잖아요. 그러면 이 말이 맞다면 결국 우리는 매일 실수 하시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뭐라 그러느냐 하면 실수를 줄이겠다는 거예요. 줄이겠다는 그 의도가 뭐냐, 줄어든다. 줄어든다. 줄이면 그 줄인 폭만큼 뭐가 남겠어요? 뭐가 생산되겠습니까? 자기 의가 생산될 게 아닙니까? 결국은 자기 의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눈 돌렸어요. 십자가에서 눈 돌리니까 타인이 보이고 네가 잘했나, 내가 잘했나, 결국 타인과의 경쟁의식, 비교의식, 그 이외는 남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 바라보게 되면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너는 나를 핍박하는 예수니라.’ 사도바울이 봤던 그 음성이 들려올 경우에는 뭐가 됩니까? 실수해도 구원받으니 나오는 건 뭐밖에 없어요? Thank You! 감사밖에 안 나오죠. 모든 게 범사에 감사만 나오는 거예요. 실수하시고 감사하라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제 말을 오해해서 내 완벽한 그것으로 감사하겠다는 거예요. 자기 잘남으로 감사하겠다는 겁니다. 그럼 내가 그러죠. 그건 타고난 본성은 이해하겠는데 그건 주의 뜻이 아닌 겁니다. 그건 믿음의 태도가 아닌 겁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게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면 표적과 기적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헬라인들은 지식을 원하나 유대인들은 기적, 표적을 원한다. 그 기적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어디서 발견되느냐 하는 겁니다. 유대인은 망했잖아요. 망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이 세운 우리나라, 요새 말로 우리교회, 내 교회 잘 되게 해주면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겁니다. 모든 교회가 다 그래요. 내가 보기에는 미쳤어요. 그러다 그 교회서 미움 받아 쫓겨나 보세요. 대번 그 교회 복수하죠. 자기가 몸 담고 있는 교회 복주면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럼 그 교회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그 안에 누가 들어있다는 말입니까? 내가 들어있는 거예요. 결국은 신은 누굴 위해 존재한다? 달랑 나만, 달랑 나만 위해 존재하니까 그래야 나는 하나님 믿는 보람과 희망을 갖겠다는 거예요.

이 구약 성경을 보면 그게 바로 우상이거든요. 자기를 위하여, 자기 이름을 위하여, 문제는 내 이름이라. 항상 내 이름으로 구원 못 받는데 자꾸 우리는 내 이름을 포기를 못하고 있어요.

그러면 대책 없네요. 이럴 때 표적이 주어져요. 대책이 없는데 표적이 주어지는데 그 표적은 우리가 그렇게 까불고 나밖에 모르는 그 인간, 그걸 표적의 재료로 집어넣어주는 고마움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잘나서 주의 일에 참여되는 게 아니고 못나도 너~무 못났어요.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나밖에 모르는 이 못난이, 나는 못난이~♬ 항상 죽을 때까지 나밖에 모르는 못난이를 가지고 주님의 사랑을 더욱 더 돋보이는데 활용한다는 점에서 이거는 참 큰 축복을 받은 겁니다.

이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주여, 제 기적 듣지 마시고 꺾어주시고(우리는 계속 기적을 원하니까) 주의 표적에 소속되게 하옵소서. 벌써 기적과 표적을 나누는 사람 맞죠. 기적은 그 내용물이 나의 욕망에서 나온 것이고, 표적은 내가 알 수 없는 주님의 합력하여 선을 이룬 그쪽에서, 미래에서 현재로 미리 덮쳐진 것이고 그게 표적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표적을 지금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백날 언급해봐야 사람들은 그걸 뭐로 이해합니까? 기적으로 이해하죠. 환장할 일이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오병이어를 분명히 주님은 표적인데 그들은 기적으로 이해해서 결국 주님을 따라가니까 한편이라고 따라가니까 주님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왜 따라왔느냐? 떡 먹고 배부른 까닭이지?’ ‘예, 예, 맞네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하늘나라 관계없는 사람이야. 진짜 하나님의 일은 내 말을 들으라.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 다 가버렸어요.

서울시민이 표 찍어서 박 원순 시장이 재선 됐잖아요. 그래서 시민 대표가 와서 ‘아이구, 시장님 축하합니다.’ 하면 박 원순 시장이 ‘왜 저를 축하하죠? 뭐 때문에 축하하죠? 아파트 값 오를까 봐요? 뭐 때문에 축하하죠? 내 살과 내 피를 뜯어먹으세요. 그래야 잘 삽니다.’ 이러면 ‘아이쿠, 우리가 사람 잘못 골랐구나.’ 하잖아요. ‘우리한테 무용지물인 사람을 우리가 뽑았구나.’ 하고 하나, 둘 다 가버리죠. 다 가고 난 뒤에 박 원순 시장께서 자기 수행원보고 하는 말이 ‘너희들도 가지, 왜 끝났는데 가지?’ 하면 그중에 하나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어디로 가오리까. 저 잘했죠? 잘했죠?’ 하는 식으로. 그러니까 주님 하시는 말씀이 ‘아버지께서 보내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문제는 박 원순 아버지가 중요한 분이예요.

예수님은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예수님의 모든 일은 아버지와 둘만의 창세전에 하신 프로젝트를 그냥 실천을 구체화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 말이 24절부터 말이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그 다음에 보세요.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이게 상당히 난해한 말 이예요.

이 말을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왜 집어넣었어요? 차라리 이 말, 2절 말이 없었으면 ‘예수님 우리 협상합시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타협합시다.’ 분명히 이렇게 나올 사람들이 많다 이 말이죠. ‘주께서 하늘나라 확장하려고 오셨죠? 제가 보탬 되겠습니다. 제가 하청업자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주님 취지와 동일하니까 주님께서 나를 도와줘야 됩니다. 도와주시면 제가 하는 일도 좋고 주님도 잘 되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다 괜찮죠?‘ 이렇게 될 터인데 25절은 그걸 거부해요. 뭡니까? ’내가 너희들이 눈치 채는 그런 증거는 나한테 해당되지 않는다고 알아라.’ 그 말 이예요.

더 쉽게 말해서 너희 능력으로 나를 믿을 수 있다? 없다? 없다는 거예요. 그럼 열 두 제자는 믿었잖아? 열 두 제자 믿은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들이 구원받은 것은 주님이 사랑해서 그렇지 그들이 주님을 사랑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제자들이 주님을 버리고 배반하고 배신하고 모른다고 부정하고 이렇게 하면 할수록 그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은 더 돋보이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게 되면 실수하세요. 매일같이 실수하세요. 어떤 실수 말입니까? 주님이든 하나님이든 날 위해서 존재한다는 그 생각하는 그 실수, ‘내가 이렇게 힘든데 주님이 안 도와줄 거예요?‘라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그 실수. ’내가 저렇게 싫어하는 인간이 잘 되고 나는 못 되는데 주님 저 인간 당장 죽이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하고 짜증내는 그 실수를 하란 말이죠. 내가 표 찍었는데 왜 엉뚱한 사람이 당선될 때 한 사흘 동안 하다 엎어져라.‘ 이렇게 약간의 복수심이 발동하게 되는 그 실수.

그럼 이 실수는 우리가 교정이 가능합니까? 불가합니까? 우리가 교정 불가한, 우리가 다스릴 수 없는 실수. 인간이기에 육신을 가졌기에 계속 폭발하는 실수, 바로 주께서 원하시는 상한 심령입니다. 내가 꼭 죄져야 상한 심령이 아니고 매일같이 돌이켜 보면 우리가 참 썩어빠진, 상한 심령이라는 게 냉장고 안에 들어있는 음식 오래된 것을 말하죠. 음식이 시어버린. 바로 내가 시어버린, 정말 내가 봐도 가치 없는 존재가 난데, 그런 인간을 주님이 주님 자체를 증거 하기 위해서 찾아오셔서 이 사실을 내가 이 정도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자체가 이미 거기에 합류된 겁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어떤 증거도 받지 않습니다.

제가 아까 유튜브 강의하면서 그 이야기를 했거든요. 난해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주께서는 믿음을 발생시키는데 우리는 내가 믿는 자 되기를 원해요. 그러니까 내가 믿는 자 되려면 내가 예수를 믿어야 되겠죠? 그럼 이 믿음은 뭐가 돼요? 행함이 되는 거예요. 사람은 이걸 자꾸 믿음이라 하는데 성경에 보면 믿음에서 믿음이 나오지, 내가 여기에 들어가지 않아요.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되고, 하나님의 의의 출발점은 내 쪽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쪽에서 시작되고 예수님 쪽에서 회수해 나가거든요. 우리는 그냥 경유 당하는 거예요. 주님의 의가 왔을 때 우리는 거기에 믿음이 발생되고 그 믿음이 발생된 결과물이 믿는 자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으라 하면 내가 먼저 있고 내가 예수를 새롭게 믿으려 하니까 그 믿음은 예수 믿는다는 그 자체가 예수 믿는 행함이 돼 버려요. 행함이 되니까 침해 거리면 조져놔 버리는 거예요. 침해 걸리니까 ‘예수가 누구지?’ 이러면 이건 큰일 날 문제라 말이죠. 오후 2시에 믿었는데 오후 4시에 삐져서 안 믿게 되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닌 거예요. 운전 잘하다가 졸음운전 2초 만에 사람이 죽을 수가 있는데 믿는 운전자가 졸음 운전해서 그 순간 주님 재림하면 어떻게 해요? 보통 문제가 아니죠.

사람들이 결국은 자기가 성경을 참고로 해서 조작해서 만들어 낸 그걸 가지고 자기가 주물럭거리는 거예요. 자기가 자아도취에 빠지는 거예요. 그건 믿음도 아닙니다. 정말 믿음 같으면 자기 존재를 부인할 수 있어야 돼요. “자기를 부인하고“ 하는 것처럼. 그 자기 부인은 성령이 와야 가능하지, 성령 오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3장에 보면 예수님의 유명한 말씀 나오죠. 바리새인 니고데모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성령 이야기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거예요. 이것도 참 의미 있어요. 우리가 보통 믿음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 계시고 그 다음에 내가 있잖아요. 그러면 신에게 잘 보이면 죽고 난 뒤에 신이 계신 곳에 합류가 돼요. 그것을 구원, 또는 천국 가기, 영생, 여러 가지 말을 하지만 어떻든 합류되는 거니까 내가 지금 신에게 얼마나 잘해주느냐에 따라서 예쁨 받으면 구원받고 내가 주님에 대해서 아주 딱딱하게 나오고 사납게 나오면 밉상 받아서 지옥 간다. 이게 선악과 따먹은 인간의 본성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교회 다니면서 늘 그 본성을 유지하면서 교회 출석을 해요. 오늘도 왔죠? 이쁘죠? 이쁘죠? 예쁜이, 1+1= 귀요미, 이건 완전히 교회 와서 재롱을 부리고 있다 말이죠. 애교를 부리고 있어요.

그런데 성령께서는 제 3자를 투입해요. 왜 투입이 됩니까? 하나님 존재하고 내 존재하고 둘이 구원의 문제를 알아서 할 문제지, 왜 3자가 중간에 개입합니까? 개입하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 개입했잖아요. 예수님 돌아가실 때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환영받고 돌아가셨어요? 어떻게 돌아가셨어요? 십자가에 밉상 받아 돌아가셨다고요. 예수님이 죽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사람들에게는 예수는 더 이상 필요한 존재가 아니고 쫓아낼 존재에요.

부자 청년이 자기 나름대로의 영역이 있잖아요. 영생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 왔잖아요. 왔는데 예수님께서 “착하게 사세요.” 이러면 될 문제를 예수님께서 뭐라고 시비를 거느냐 하면 “모든 걸 팔고 나를 따르라.” 하니까 갑자기 부자 청년이 근심하다가 결국은 뒤로 돌아갔죠. 예수님께서 그냥 “착하구나.“ 하면 될 문제를 왜 그런 말 하셨을까요? 지금 주자 청년이 자기 나름대로의 영역이 따로 있는 거예요. 그 영역 속에 누가 있습니까? 자기가 있던 겁니다.

이렇게 보면 돼요. 어려운 말이지만 사람의 존재라 하는 것은 다른 말로 소유를 말하거든요. 사람이 소유가 있는 그것을 되새겨서 존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 이정도 있어.’ 이러거든요. 소유가 없으면 ‘차라리 죽어버려.‘ 이러잖아요. 남편 떠나고 자식 떠나면 ’에이, 사니 뭐해, 죽는다.‘ 그러면 그 전에는 뭔 뜻입니까? 난 남편 소유하고 자식 소유, 그 소유한 자로서의 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존재란 자체는 껍데기에 불과해요. 이름에 불과하고 눈깔사탕의 포장지에 불과하고, 진짜 안쪽에는 눈깔사탕이 들어있어야 되지, 껍데기만 있으면 안 되잖아요. 껍데기 까고 눈깔 집어넣고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니 정작 나라는 것은 나는 껍데기에 부합될 정도로 뭐가 있어야 돼요? 나라면 이정도 받쳐 줘야, 이정도 수입이 돼야, 이정도 자식이고 가족이고 이정도로 내 소유가 돼야 이래야 소유를 포장하는 그 포장지가 나라는 이름의 나의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큰 교회 가고 싶은 거예요. 왜, 큰 교회는 등록만 해도 그 수천 교회가 다 누구 것이다? 내 소유가 되는 겁니다. 한 서른 명 모이면 ‘에이구’ 서른 명 돼 봐야 소유가 너무 적어요. 큰 교회 가면 파이프 오르간까지 모든 성가대까지 등록한 순간 다 내 것이 되니까. 거기서 잘 보여서 장로까지 되면 큰 교회 장로 되면 은행 신용도가 달라지는데. 특히 결혼 안 한 총각 처녀들은 그만큼 만날 확률이 높아져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만날 교인들끼리 맘에 드는 사람 없다 해요. 보니까 맘에 드는 사람들 저희끼리 다 빠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남아있는 사람은 별 볼일 없는 사람들뿐이라고. 아무리 큰 교회 가도.

이런 소유, 이런 존재에 대해서 나 같은 존재가 결국 이 땅에서 희망이 좌절되었을 때 남아있는 희망은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란 그 엄청난 하늘나라를 전부 다 누구 소유로? 내 소유로 만드는, 등기 이전하는 이것만이 신앙으로 삼고 교회 다니러 오는 겁니다. 천국이 내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 세상에서는 버림 받았지만 천국은 내 것이다.’ 라는 희망을 걸고 살겠다는 겁니다. 주님이 어디 바보입니까? 이런 인간 넣어주게?

제 3자를 집어넣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왜 찾아왔겠습니까? 니고데모든 누구든 간에 어떤 기적을 이야기하게 되면 유대인은 하나님을 어디서 발견합니까? 기적을 통해서 발견해요. 엘리야의 불이 내리는 제단, 모세가 홍해, 요단강, 유대인들은 기적을 가지고 후손들에게 계속 이야기하면서 특별히 우리 민족은 택한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놀라운 기적을 주고 독대했다. 율법이 있다. 앞으로 이 율법대로 올 것이라고 늘 이야기 했다 이 말이죠. 그리고 그 기적을 중심으로 절기를 즐기고 그 절기 동안에는 다른 민족이 없는 특별함을 자손들에게 교육을 그렇게 시킨 겁니다.

그런데 그중에 있던 니고데모란 사람이 왜 왔는지 몰랐는데 성경에 보니까 니고데모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고 싶어서 왔다는 것이 그 뒤에 힌트로 나와 있어요. 예수님 입에서 발설됐으니까. 네가 찾아온 이유는 나하고 좋은 관계 유지해서 어디 가겠다? 하나님 나라 가겠다. 그러니까 니고데모가 ‘저분이 메시아 일수도 있다.’라는 거거든요.

그러면 니고데모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니고데모 입장의 생각이 오늘날 많은 대학교 강사들이나 젊은 사람이나 나이 많은 사람이나 교인들을 생각할 수 있는데요. 하나님이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이시는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낼 때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온다고 이미 아모스, 학개, 스가랴, 이런 예언 가운데 나와 있거든요. 감람산에 오게 돼 있다 말이죠.

그러니까 그전에도 메시아란 인간이 많았는데 다 부도수표 났고, 이분이 혹시나 메시아가 아닐까? 왜냐, 병을 고치고 물 위를 걷고 기적을 행하니까. 어디서? 갈릴리에서. 지금 이 이야기는 갈릴리 이전이거든요. 갈릴리에서 이미 한바탕 소문내고 들어왔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메시아 일수도 있다 말이죠.

그러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제는 중보자로서 메시아를 보냈기 때문에 니고데모는 누구만 상대하면 돼요? 예수님만 상대해서 좋은 관계하게 되면 하나님 나라 갈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러면 우리 같으면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오늘날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거와 유사한 이야기라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기다 제 3자를 보낸다는 거죠. 제 3자가 누굽니까? 성령을 언급해버려요. 성령을 언급했다는 말은 결국은 니고데모와 사적인 관계는 이어진다? 안 이어진다? 이어지지 않아요. 심지어 이거는 니고데모만 이렇게 편파적으로 한 게 아니고 12제자 모두에 대해서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은 전부에 대해서.

베드로가 주님 따라서 어디에 가려했습니까?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베드로가 이야기하면서 ‘주님이 죽는 자리가 천국이라면 저도 같이 따라 죽겠습니다.’ 야! 장렬하잖아요. 진짜 한 의리 하죠. 그런데 주님 하시는 말씀은 뭡니까? “와도 네 자리 없다. 네 처소 없다.” 아니 진작 이야기하지, 결국은 자리가 없다는 말은 뭔 뜻이겠어요? 너희들은 무슨 생각으로 날 따라오는지 모르지만 이미 주님은 뭘 알았습니까? 너희들 자리는 지금 없는 거예요. 천국에 갈 제자들 자리가 없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 관리할 입장이 못 돼요.

주님이 오신 목적은 아버지 뜻을 따라서 어떻게 하면 십자가에서 아버지 뜻에 순종해서 십자가에 모든 율법을 이루고 죽는 자기 일이 지금 급선무에요. 자기가 제대로 말씀대로 죽어야 비로소 뭐가 발생됩니까? 하늘나라에 처소가! 베드로를 위한 처소, 요한을 위한 처소가 마련됩니다. 물론 개인처소가 아니고 집단처소지만, 그 처소가 마련돼요. 이 사실을 제자들이나 어떤 누구도, 니고데모 이 사람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죠.

그럼 여기서 물어봅시다. 성령이 오신다고 하지 마시고 성령이 와야 된다고 하지 마시고 그 이야기하기 전에 미리 성령을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엄마가 애한테 ‘엄마 어디 가는데?’ ‘엄마 영화관에 간다.’ ‘나도 같이 가.’ ‘머리 안 감았으니까 영화관에 못 데리고 가.’ 그러면 애가 하는 말이 ‘그럼 진작 이야기하지.’ 결국은 머리 안 감아서 영화관에 안 데려간다는 말은 엄마가 진짜 혼자 가고 싶어서 핑계를 댄 거예요. ‘쟤가 지금 뭘 안 하고 있는가? 머리를 안 감았구만.’ 이렇게 하는 거예요.

결국은 성령이 오고 예수님 십자가 지고 하는 이 모든 문제는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과 협의할 사항이냐, 아니냐를 묻는 겁니다. 협의할 사항입니까? 아닙니까? 협의할 사항이 아니라는 거예요. 기다리라는 겁니다. 내가 올 테니까. 보혜사 보낼 테니까. 그러나 협의할 사항은 아니에요. 협의할 사항은 아니라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우리가 ‘구원받고 싶습니다.’ 한다고 해서 구원해 준다는 보장은 없다는 이야깁니다.

그러면 구원은 누구한테 주어지는가?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나와요. 그거는 아버지와 아들이 택한 자에게만, 원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거예요.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하나님이여, 내가 하는 이 모든 기도는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이 세상에서 아버지가 남겨준 원한 자를 위함입니다.” 거기서 세상을 위함이 아니라 했잖아요. 그렇죠?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하나님이 누구를 사랑하사? “세상을 사랑하사” 그 세상이 그 세상 아니죠?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 세상은 마치 우리 보기에는 세상 전부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그게 구체화 된 것은 요한복음 17장 9절 기도에서 세상을 위함이 아니고 세상 중에 아버지가 원하는 자가 따로 있던 거예요. 진작 하지, 진작. 그걸 꼭 요한복음 17장에서 한다고요. 요한복음 3장에서는 사람 기분 업 되게 만들어놓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진짜 대중 사람도 전체 다 구원되는 줄, 세상을 사랑한다 하면서. 절에 가도 사랑하고 유 병언도 사랑하고 구원파도 사랑하고 이단이고 삼단이고 다 사랑하는 줄 알았죠.

조금씩 어프로치 하면서 조금 더 실체에 가까이 가면서 세상이 사람들이 오해하는 그 세상, 그 세상이 아닌 겁니다. 이걸 시간만 있으면 내가 집합론으로 이야기하겠는데 그건 수학의 골치 아픈 이야기고, 하여튼 전체 집합이 아니고 일부, 부분집합, 따로 세운 겁니다.

그러면 물어봅니다. 따로 세운 그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을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습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우리가 곡해하게 되고 오해한 우리를 주님이 알아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구원하는 셈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뭐가 떨어져나가느냐 하면 ‘내 이름으로 내가 잘나서 내 행함으로 구원받았습니다.‘라는 것이 같이 떨어져 나가죠.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물으면 ‘주님이 시작한 일을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천국에서 버틸 수 있는 사람 이예요. 자기 면류관도 반납하고 버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진작 그런 이야기하지, 왜 요한복음 3장 이야기하는가? 하나하나 주님께서 이 세상의 어떤 종류의 인간들이 있으면 그들이 기대하고 요구하는 바가 어떤 게 있습니까? 심지어 그들이 요구하는 중에서
제자들도 어떤 식으로 나에 대해서 곡해했는지를 하나하나 다 보여줘서 이 땅에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구원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복음서란 이름으로 예수님의 행적을 그런 관점에서 적어놓은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자, 그럼 3장을 본격적으로 해봅시다. 여기 3장 2절에 보면 니고데모 하는 이야기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니고데모가 ‘메시아가 당신입니다.’ 고 인정했죠. 우리 같으면 이것만 해도 대단한 것 같은데 주님께서는 좋게 보시지 않고 제 3자를 개입시키는데 제 3자가 누굽니까? 성령을 집어넣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거듭나지 아니한다. 요거 설명하고 첫째 시간 쉬겠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주님께서는 장소를 의미하거든요. 같은 장소에서 백날 거듭나봐야 소용없는 거예요. 장소가 다른 장소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어떻게 이야기했습니까? 다른 장소가 아니고 같은 장소에서 또 태어나야 한다고 이렇게 한 거예요. 니고데모가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니고데모에 있어서 태어남이라 하는 것은 현재 태어나 있는 자기의 육신을 도로 원상태로 쑤셔 넣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이것은 내가 말은 어렵게 했지만 이건 너무 당연한 거잖아요. ‘태어날까요? 말까요?’ 지금 이 이야기를 누가 합니까? 이미 태어난 자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미 태어난 나보고 어떤 아저씨가 뭐라 했습니까? 아저씨가 와서 ‘다시 태어나야겠네요.’ 이미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시 태어나려면 우리보고 결국 그 말은 뭐냐, 아무리 깊이 연구해도 다시 원상태로 갔다가 twice, 두 번 다시 태어나란 그 말 말고는 다른 의미가 없거든요. 그걸 그대로 니고데모가 이야기한 거예요. 왜냐 니고데모가 무식해서가 아니라 이건 니고데모가 들었던 그대로 한 거예요. 아주 순결하고 순진하게 이야기한 겁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이야기한 이게 아니라면 나는 어떡하라고? 아는 게 이거밖에 없는데. 결국은 성령이란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결국 네가 모른다는 이야기에요. 성령으로 태어나란 말은 네가 죽었다 깨나도 네가 모르는데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런 뜻이다 이 말이죠. ‘아휴, 그럼 성령으로 태어나지.’ 네가 성령에 대해서 알아? ‘몰라’ 모르면서 왜 자꾸 들은 풍월로 내가 쓴 용어를 네가 쓰느냐 말이죠. 주님이 쓰시는 용어하고 우리가 쓰는 용어와 달라요. 우리는 무식해서 제 맘대로 갖다 붙이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할례를 행하면 거룩한 백성이 된다 하니까 유대인들이 자기의 문신 새기듯이 할례를 행한 거예요. 그러니까 예레미야부터 나온 게 뭐냐 하면 너희들은 육신에는 할례를 행했지만 마음의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진작 이야기하지, 진작. 그 이야기가 창세기 17장에는 그 이야기 없어요.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약속하기를 네가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하게 되면 거룩한 백성이 되고 누구든지 할례를 행하지 아니하면 거룩한 백성에서 끊어진다고 돼 있잖아요.

누가 이야기했어요? 하나님 쪽에서 이야기했어요. 이야기해놓고 왜 이제 와서 딴 소리합니까? 그리고 생각해 보세요. 마음의 할례를 어떻게 해요? 무슨 수로 마음을?? 끄집어내시고 당황하지 말고 마음을 끄집어내서 마음을 당황하지 않고 이렇게 보다가 탁 끝, 이게 돼요? 마음이 어떻게 라면 끓일 때 수증기에요? 뭐에요? 기체입니까? 고체입니까? 액체에요?

마음을 끄집어내면 그러면 지금 텅 빈 마음인데 텅 빈 마음이 마음을 어떻게 바라봐요? 어떻게 수정체 바라보듯이 바라볼 수 있는 주체가 없는데. 마음 안에 봄이 있는데. 자기는 눈이 달렸지만. 마음은 여기 끄집어내져 있는데. 이게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마음의 할례를 행한다? 마음의 할례를 어디 정지 칼로 할까요? 부엌칼로 할까요? 식칼로 할까요? 어떻게 할례를 해요? 어떻게? 말 되는 이야기를...

그러니까 사람들이 성경보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거니까 이웃을 사랑하라. 그거만 사랑하지 실제 중요한 것은 다 빼놓고 그냥 ‘지켰습니다.’ 이러고 있다 말이죠. 참 이 성령이 무슨 뜻인지 10분 쉬고 해봅시다.

첨부파일 : 가락-요한복음 2장23(바람)140605a-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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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0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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