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 140617
존 웨슬리 140617
이름 : 이근호(IP:119.18.90.53)
한윤범(IP:14.♡.134.60)
14-06-20 11:05
20140617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4-존 웨슬리
(강의:이근호 목사)
존 웨슬리, 이 사람 영국 사람이거든요. 웨슬리를 하기 전에 먼저 시대전으로 앞선 사람이 있어요. 야곱 알미니우스란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은 독일 사람이거든요. 알미니우스 사상부터 하고 하겠습니다. 웨슬리와 알미니우스는 유사한 점이 많이 있어요. 보통 알미니안이라고 특히 한국교회 목사들이 알고 있는 이유가, 대부분 한국의 목사들이 칼빈주의 신학교를 나왔잖아요. 칼빈주의 신학을 하면서 반대되는 신학으로 알미니안 신학을 꼽은 겁니다.
그리고 알미니안 신학은 주류가 되지 못하고 배척을 받았는데 그 증거가 뭐냐 하면, 그 뒤에 나오는 수많은 신앙고백서에서 알미니안주의 사상들이 빠져버리고 칼빈주의신학으로 대체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청교도신학 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했지요. 사실은 칼빈주의라고 하지만 칼빈주의자 입장에서는 듣기 좋지 않지요. 그냥 진리 자체, 순수한 진리, 복음 그 자체, 성경의 엑기스, 성경이 응축된 것으로 자부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우선 알미니안주의 다섯 가지 요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교재 140페이지 보게 되면, [첫째, 비록 인간의 본성이 아담의 범법으로 인하여 타락해서 깊은 영향을 받았을지라도 인간이 영적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 남아 있게 되지는 않았다.]
부정이 두 개나 들어가지요. 인간이 범죄에서 타락한다 할지라도 영적 도움을 받지 못하는 지경까지는 내려가지는 않았다. 알미니안 시작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긍정하면 인간이 영적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인데 이 말은 결국 뭐냐 하면, 인간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범죄한 인간이 원래 창조한 목적이란 말입니까? 아니면 범죄하지 않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에 부합된다는 겁니까? 이건 누구한테 물어도 당연한 거잖아요. 죄 없는 상태로 인간을 만들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보기에 좋았더라. 죄 없는 상태가 원래 취지에 맞는다는 거지요. 그런데 인간이 범죄해서 죄를 지었으니까 하나님께서 타락했다고 해서 에덴동산에서 추방해서 흙으로 돌아가게 했잖아요.
그런데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가 분란을 일으키고 여기서부터 문제가 야기돼요.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 맞는 것 같아요. 천 명이 성경을 봐도 맞는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불행한 것이 하나님 뜻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하는 자체가 옳은 이야기한 것처럼 느껴지지요.
생각해보세요. 인간이 불행한 것이 인간의 뜻이 아닌데 지금 불행하잖아요. 죄를 지었잖아요. 그럼 그 책임을 누가 져야 됩니까? 하나님이 책임을 져야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만들어졌기 때문에 만들어진 인간이 책임진다는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너는 왜 아들이 아니고 딸이야? 왜 남자가 아니고 여자야?” 이걸 딸에게 추궁할 수 없는 입장이에요. 딸이 책임질 게 아니죠. 어떤 왕국에 왕자가 있어야 되는데 계속 공주만 나오니까 “난 왜 공주야. 왜 왕자 아니야.” 당사자에게 따지면 안 되잖아요.
그렇게 따질 때 더 큰 문제가 뭐냐 하면, 그 공주가 하는 말이, “미안해요. 공주라서.” 이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보통 문제가 아니란 말이죠. “아버지, 저를 용서하소서. 딸이라서 죄송합니다.” 지금 말이 안 되는 것을 보편적으로 모든 보편적인 인간들은 말이 안 되는 짓들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죄 지어서 죄송합니다.” 그게 죄송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죄 지은 원인을 따져봅시다. 인간을 흙으로 만들자마자 칼 들고 덤비라고 했습니까? 인간이 만들어졌는데 눈앞에 선악과가 있었단 말이죠. 그럼 선악과 없었으면 죄 지을 기회가 없지요. 그리고 선악과가 지하갱도 2.5km 밑에 있으면 따먹을 수 없지요. 선악과를 하나님이 비밀금고에 넣었다면 따먹을 수 없겠습니까? 아니지요.
존 웨슬리와 알미니우스를 하면서 이 사람들의 생각이 소위 칼빈주의라고 우기지만 사실은 칼빈주의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한 꺼풀 벗기면 전부 다 알미니안주의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교회뿐만 아니고 인간 자체가 존 웨슬리처럼 살아가게 돼있어요. 그런데 그동안 교회가 아무 근거도 없이 우리는 알미니안주의 아니다. 우리는 칼빈주의다. 이렇게 겉으로만 버티면서 사실은 내막에 보면 웨슬리 따라 가는 거예요. 차라리 존 웨슬리처럼 솔직하게 놀면 되는데 솔직하지 않은 게 더 나쁜 짓을 벌이고 있는 거예요. 왜 웨슬리 신학이면서 칼빈주의 신학교 나왔다고 칼빈주의신학이라고 우기는 그게 더 못됐다 이 말이죠.
알미니안주의와 웨슬리신학이 너무 닮았기 때문에 따져봅시다. 첫째, 인간은 범법으로 인하여 타락하여 깊은 영향을 받을지라도 인간이 영적 도움을 받지 못한 상태에 남아 있는 건 아니다. 따라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죄를 제대로 지은 거예요? 아니면 어설프게 죄지은 겁니까? 어설프게 죄지었지요. 제대로 죄지었으면 영적 도움을 받을 수가 없어요. 영적 도움 받을 기회가 요만큼이라도 있다는 말은 그것만큼은 죄에 물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죄란 바이러스 퍼졌는데 다행스럽게도 그것 하나는 아직까지 안 다치고 깔끔하게 남겨진 거예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리까지.
제가 문제를 하나 낼 테니까 알아 맞춰보세요. 산상설교에 보면 간음하지 말라는 대목이 나오지요. 거기서 보충하는 어떤 교재가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결혼하지 말라. 왜? 사랑하지 않고 결혼하는 것은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에 위배되는 거지요.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의 적극적인 버전은 결혼하려면 사랑해서 하라. 만약에 사랑하지 않고 결혼하면 자꾸 다른 여자를 보기 때문에 이것은 처음부터 간음하지 말라는 것을 어긴 것이다.
그럼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말씀에 간음하지 말라는 게 있고, 거기에 대한 같은 뜻이라고 우기면서 내놓은 사랑하지 않으면 결혼하지 말라. 둘이 같은 뜻일까요? 다른 뜻일까요? 이게 제 질문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사랑하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하지 말라는 말씀을 간음하지 말라는 취지로 주셨다면, 사랑해서 결혼한 것은 간음 안함이 되지요. 또 사랑하지 않는데 결혼할까, 말까? 돈 보고 할까? “나는 비록 돈을 원하지만 사랑하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을 거야.” 하면 그 사람은 간음하지 말라는 죄를 안 진 게 되지요.
제가 하는 말은 이거에요. 사랑하지 않거든 결혼하지 말라는 말은, 인간이 실천에 옮길 수 있고 지킬 수가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뭡니까? 인간이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지킬 수 없다는 이야기에요. 산상설교는 못 지킨다는 취지로 준 그것을 인간들은 예수님의 거룩한 말씀이니까 앞으로 예수님과 영원히 살 사람이니까 이것을 지킴으로써 주님 앞에 재롱이나 부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바르게 살았다는 티 낼 수 있는 근거, 자기 의의 근거를 자기가 마련하는 쪽으로 왜곡해서 해석해버리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인간의 숨겨져 있는 죄가 유일하게 나오는 방법이 그 방법밖에 없어요.
인간에 담긴 죄가 나오는 방법은 주의 말씀을 들이대면 못 지킨다고 들이댄 그 말씀을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을까 하고 시도하는 가운데 숨겨진 죄가 마구마구 쏟아지게 돼있어요. 하나님의 작전이었습니다. 걸러든 거예요. 그러니까 이천 년 기독교신학부터 해서 모든 목사들 설교가 그런 설교를 함으로써 온 교회가 그나마도 죄 짓고 있는 의라는 이름으로 죄를 더 활성화시키는 거예요. 우리는 의인이다. 우리는 세상과 달라.
알미니우스는 신학자고, 존 웨슬리는 부흥사인데 존 웨슬리의 근본적인 잘못된 출발점은, 우리 성도(성도집단)는 세상과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다른 점이 계속 나오면 신자고 안 나오면 신자가 아니라고 한 것부터 출발한 겁니다. 존 웨슬리에서 1단계, 2단계, 3단계가 있어요. 1단계는 열두 명의 청년이 모여서 성경대로 살기 클럽을 만든 겁니다. 홀리클럽을 만들어서 가입했어요. 열두 명의 청년들이 성경 읽고 그대로 지키기로 한 거예요. 이십 대에는 그런 객기를 부릴 만 하지요. 다를 그런 객기 안 부렸습니까?
더러운 세상과 극한 대조를 보이는 거예요. 고상하기 짝이 없는 우리들만의 그룹, 이게 존 웨슬리의 시작입니다. 그럼 어떻게 했는가? 하루 스케줄을 짜요. 성경뿐만 아니고 경건한 책을 읽고 토론을 합니다. 이야기하다보니까 벌써 대학생선교단체 생각나지요. 전공은 마음에 안 들고 대학생활은 짜증나고 그런데 자기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선교단체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미래가 암담한데 선교단체를 통해서 빛을 받고 앞으로 취직과 결혼을 보장해줄 것 같은, 여학생 같으면 좋은 남편감을 보장해줄 것 같은 그러한 희망을 기대하면서 선교단체에 매진하지요.
성경과 기도와 독서토론을 하면서 실천을 해야 되기 때문에 실천운동을 벌였어요. 예를 들면 교도소에 가서 죄수 위로하기, 노인들 위해 봉사하기, 부모 없는 아이들 공부 가르치기, 하여튼 봉사해서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솔선수범해서 힘을 합쳐서 해보자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의 문제는 혼자서는 안 되니까 힘을 합쳐서 해보는 거예요.
실제로 열두 명이 해본다 합시다. 막상 하기 전에 못 느꼈던 새로운 이슈나 요구사항들이 등장해요. 열두 명이 세상 변화시키기에는 너무 적잖아요. 취지는 좋지만 열두 명으로는 모자라지요. 그래서 회원모집 작업에 나서야 되고 그 다음에 세상일을 하는데 비능률적이에요. 예를 들면 의료봉사하려면 의사들이나 간호사들이나 의료계에 종사는 사람들이 필요하겠지요. 그리고 포스터 붙이고 행사할 때 정식으로 행정당국에 신고하고 하려면 너무 번거러우니까 경찰서나 법원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도움이 되겠지요.
그런 것을 하면서 그 집단은 뭘 느끼느냐 하면, 세상 권력이 나쁜 것만 아니고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내 세상 되게 유리한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다는 감이 오지 않겠어요? 유병언 장학생들, 왜 장학금을 줍니까? 구원파 활동에 필요할 것을 내다보고 한 거잖아요.
열두 명이 시작해서 그것까지 기대하다가 뭔가 한계에 부닥친 거예요. 열두 명 집단을 사실상 안 알아주지요. 만이 천 명이 아니고 열두 명이라니까요. 네비 찍으면 진자교회 안 나와요. 슈퍼 나와요. 제 아내가 찍어봤어요. 만약에 천이 명 교회 같으면 네비 찍으면 나온다고요. 수영로교회처럼.
지금 세상을 바꿔야 되는데 지옥 같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되는데 열두 명이 너무 작으니까 힘을 키워야 되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을 마귀가 시험할 때 예수님이 메시아란 걸 눈치 채고, 기적을 일으키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너를 추종할 것이다. 그리고 나와 함께 하면 세상 모든 걸 정복할 수 있다. 딱 나온다 말입니다.
그게 1단계고. 2단계가 뭐냐 하면, 영국에서 열두 명의 고상한 프로그램이 먹혀주질 않은 겁니다. 그 말은 젊은 청년 열두 명이 일을 하면서 은근히 노린 게 있다는 티나 난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완벽하게, 뒤에 나옵니다. 완전 성화, 이게 존 웨슬리의 기본 모토에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죄 짓지 않는다. 벌써 이십 대부터 그런 것을 노렸지요.
그런데 완전 성화하겠다고 실천에 옮겼잖아요. 그런데 열두 명으로 뭘 합니까? 그래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그때 이런 성경구절도 동원될 수 있어요.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 마태복음 13장 구절이 동원될 수 있단 말이죠. 우리끼리 이상적인 교회했는데 안 먹히는 거예요.
그렇게 안 먹히면 자기 존재감이 없잖아요. 있으나마나 한 존재가 되잖아요. 그러면 자기 존재감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판을 벌여야하지요. 경로당에서 10원 띠기 하지 말고 진짜 카지노 가는 거예요. 그게 어디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큰 도박판을 벌이는 게 두 번째입니다. 그게 인디언에게 전도하겠다는 것이 존 웨슬리의 두 번째 단계입니다. 판이 크지요.
인디언들은 짐승보다 못한 존재라고 소문났지요. 무식하고 세상 모든 것을 신으로 보는 범신론에 해당되는 아직도 문명의 이기를 모르고 계몽된 이성, 하나님의 지혜를 모르는 자들에게 교육시키고 치료하면서 봉사하면서 복음을 전하면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갔는데 또 실패했어요.
미국 가는 배 안에서 모라비안 사람들을 만났어요. 존 웨슬리가 18세기 사람이에요. 알미니우스보다 훨씬 뒤에 사람이에요. 그전에 모라비안이라고 해서 재세례파 쪽으로 동유럽에서 자체적으로 천주교를 반대하면서 소위 종교개혁적인 사고를 유지하는 집단이에요. 그들과 이야기하고 모습을 보면서 언어를 초월한 뜨거운 확신.
첫 번째 웨슬리의 단계는 완전한 성도의 삶. 개혁주의가 뭐냐 하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잖아요. 오직 성경을 통해서. 말만 성경이 아니라 성경대로 살기. 첫 번째가 성경대로 살기. 두 번째가 모라비안 사람들이 했던 뜨거운 확신. ‘뜨거운’이라는 형용사와 확신이 어울립니까? 미지근한 확신이 아니니까 뜨겁단 말이죠. 그런데 몇 도짜리 뜨거움일까요? 1500도? 그러면 2000도에 있는 사람이 보면 그것도 확신이냐? 미지근한 것들이라고 하지 않겠어요? 뜨거운 정도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어쨌든 간에 모라비안의 뜨거운 확신에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지금까지 알았던 것은 성경 보고 독서하고 토론하고 그걸 그대로 실천에 옮기려고 했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지식적인 신앙에 불과했구나.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뜨거움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서 어떤 예배에 참석하면서 루터의 로마서주석 서문을 읽는 가운데서 존 웨슬리는 또 감동을 받아요. 감동을 왜 그렇게 자주 받는지 몰라. 하나님이 죄를 용서했다는 겁니다.
첫 번째는 성경대로 살기, 두 번째는 확신, 세 번째는 사죄의 은총에 대한 확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죄를 용서했다는 그 사실에 대해서 감동받아요. 그래서 이 세 가지를 플러스하면 돼요. 삼종 세트에요. 완전하게 살기. 확신 있기. 죄 용서받기. 이걸 순서를 반대로 해봅시다. 3단계부터 나가봅시다. 죄 용서받고 그 다음 그걸 확신하고, 확신에 멈추지 않고 완전한 거룩에 나서야 되지요. 그래서 존 웨슬리 신학은 두 단계의 의가 있어요. 기본적인 의가 있고 완전을 추구하는 의. 칭의가 두 가지 칭의가 있는 겁니다.
교재 139페이지에 보면, 기초단계가 있고 완전에 이르는 제2의 단계가 있다. 이것은 웨슬리가 자기 체험에 근거해서 타인의 체험까지 확대시키면서 부흥운동이 일어난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나처럼 하면 구원받는다는 뜻이지요.
우리가 존 웨슬리를 생각하면서 천주교부터 봅시다. 산상설교에 대한 천주교의 교리가 두 가지에요. 웨슬리와 똑같아요. 산상설교에 대한 천주교의 해석에 기본적인 아마추어용 해석이 있고 두 번째가 완전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산상설교 본문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이건 심화단계에요. 초급반, 고급반 따로 있는 거예요.
왜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 그 이유에 대해서 말해보세요. 왜 이런 아이디어가 먹히는 거지요? 인간 속에 은근히 이런 단계를 노렸다는 뜻이에요. 천주교, 감리교도 그렇고. 감리교가 웨슬리에서 나왔으니까. 칼빈주의는 아닌 것 같이 하면서 똑같이 하고. 칼빈주의 성화론도 마찬가지고.
왜 이런 것을 기대하지요? 그건 제가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의 죄가 접혀져 있거든요. 접혀진 죄가 외부에서 거룩하고 고상한 하나님의 계시, 법이 오게 되면 접혀진 게 펼쳐집니다. 그 안에 응축, 압축 돼있던 죄가 기지개를 펴듯이 바깥으로 분출하고 방출하게 돼있어요. 이것을 웨슬리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그래서 웨슬리 신학이나 칼빈주의 신학도 마찬가지지만 이런 신학이 나온 것에 대해서 우리가 공부하게 된 것을 감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심을 이들이 대신해서 다 이야기했기 때문에. 예를 들면 세상 살면서 일이 잘 안 되잖아요. 그러면 제일 먼저 다가오는 게 뭐냐 하면, “내가 혹시 죄 지은 게 있는가?” 이건 기본적인 거예요. 처음부터 죄인인데 그런 죄인을 주께서 용서하는 식으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번 용서하고 난 뒤에는 그 다음에는 용서받지 않아도 될 만큼 알아서 하겠다는 독자적인 선언을 하는 겁니다.
제가 주일 오후에 그런 설교했잖아요.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못 간다.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어른이 된 사람은 도로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없거든요. 그래서 바나나킥으로 봤지요. 돌아가는 거예요. 어린아이로 출발해서 점점 어른으로 변하지요. 한 번 변한 어른이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없지요. 안 되면 하늘나라에 못 가는 거지요.
그러면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이가 뭐냐? 어린아이는 비자립적입니다. 뭔가 보호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 어른은 될 수 있는 대로 그 보호막을 탈출하고 벗어나려고 해요. 어린아이 같이 되라는 말은 이미 어른 본성이 발휘되고 있는 입장에서 도로 기 죽이고 고개 숙이고 보호해달라는 위인이 없어요.
다시 보충해서 말씀드리면, 어른이란 말은 이런 뜻입니다. 크게 쓸게요. 자립할 만큼의 의 확보가 급선무가 되는 겁니다. “저한테 어려움을 주셨는데 잘못된 조치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어려움이 닥치지 않을 정도로 나는 선하고 그동안 착하게 살아왔습니다. 하나님, 착한 자에게도 고난주십니까?” 이게 욥의 주제잖아요. “하나님이여, 착한데도 이렇게 어려움 있기에요?” 이런단 말이죠.
그런데 강도와 세리 또는 문둥병자, 소경 보세요. 십이 년 동안 혈루병 앓던 여인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라고 하지요. 타인들도 저주받았다고 했고 본인도 동의한 거지요.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세리가 누가복음 18장에서 동의했단 말이죠. 그럼 멀쩡한 사람, 지금 아무 일 없는 사람들은 결국 뭔 뜻입니까? 내가 이렇게 멀쩡한 것은 멀쩡할 만큼 이유가 나한테 포함돼있다는 거예요. 포함된 내용이, 내가 훌륭하기 때문에. 내가 저 세리나 창기와 같지 않은 것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기도한 것은 하나님의 의(마일리지)가 누적돼있고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이 벌을 내리고 싶어도 확보된 마일리지의 의 때문에 정의로운 하나님의 정의로운 조치라 본 거예요.
그게 바로 죄가 만들어낸 신이에요. 참 된 하나님이 아니고 자칭 잘났다고 여기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하나님이라니까. 그 하나님이 정의로운 하나님이에요. 서로서로 동의하고 통약, 통하는 약속처럼, 묵계처럼 느껴지는 것이 뭐냐 하면, 정의로운 하나님은 정의의 편에서 일한다는 겁니다.
웨슬리가 항상 염두에 둔 것은 찌질이 되지 말라는 거예요. 예수 믿고 난 뒤에는 날이 가면 갈수록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그냥 성경, 독서토론만 한 게 아니고 사회에 대한 봉사했지요. 사회봉사란 말은 우리도 교회를 지켜줄 만한 힘 있는 사회단체를 스스로 구성해나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요소요소에 정부 요직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전파에 지장이 없다는 겁니다.
감리교가 노리는 게 그거에요. 그들은 개인구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사회구원까지 이어져야 돼요. 선교단체에서 외치는 구호가 창세기 1장 28절이잖아요. 여러분 알지요. 다스리고 정복하라. 그러나 조건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면 개인구원에 머무르지 말고 사회구원으로 나가야 된다. 자본주의의 부조리에 대항해야 되고 독재에 대항해야 되고 새누리당 혼자 다해먹는 이제는 정권교체에 나서야 된다는 거예요. 잘못되고 편협한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 문창극이는 사퇴해야 되고.
참 그 욕심, 내가 소속된 단체가 사회에서 영향력이 있어야 된다는 탐욕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겠어요? 타고난 악마적 본성, 세계정복욕이 어떻게 삭제 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도 그랬지만 “내가 이 땅에서 어른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그만한 의가 확보돼있는 의가 있기 때문에 정의로운 하나님은 그 의를 보고 하나님은 나를 손댈 수 없을 것이다.” 손대려면 나보다 못한 찌질이 같은 인간에게 하라는 거죠.
그래서 존 웨슬리는 말하기를 예수 믿었으면 찌질이 되지 말고 이제는 성자로 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웨슬리가 모르는 게 있어요. 예수님 본인이 찌질이에요. 지금 방향을 잘못 잡았어요. 반대 방향으로 가야 되는데 마귀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예수님을 잡아 죽인 바리새인 쪽으로 가버렸어요.
재판석에 누가 서야 됩니까? 인간세계에 재판정이 있습니다. 거기는 누가 가는 거예요? 강도나 살인자 등 범죄한 자만 서잖아요. 그리고 누가 재판의 주관자입니까? 피고만큼 죄를 안 지은 의로운 쪽에서 재판하게 돼 있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이 만든 재판에 예수님이 섰잖아요. 그러면 도대체 이 사태가 어떻게 된 겁니까?
인간들이 뭘 추구한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 받고 추구한 게 뭡니까? 도대체가 그들이 말하는 예수는 어떤 예수에요? 주님은 요구해요. “왜 나처럼 죄인 되지 못하느냐? 나는 이렇게 혹독하게 죄인 취급당했는데 나를 따른다는 작자들아 무슨 꿍꿍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이 말이죠. 지옥 같은 세상에서. 뭐 세상을 변하시켜? 주님이 능력 없어서 변화 못 시켰습니까? 천사 동원 못해서 못한 겁니까?
제가 설교에서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세월호 침몰할 때 아이들의 조치는 뭐냐 하면, 배를 포기하는 거예요. 포기하면 살고 포기하지 않으면 죽는 겁니다. 과연 눈에 보이는 멋진 빌딩이 있는 부산 해운대가 침몰하느냐, 침몰하지 않느냐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바로 이 세상에서 다녀간 이유가 침몰 중인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미련 둬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문제, 스트레스와 고민이 그놈의 미련 때문이에요.
저게 아까운 거예요. 저 보석이 아까운 거예요. 저 명품이 아까운 거예요. 죽더라도 핸드백 들고 죽고 싶은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천국 가도 섭섭할 것 같아. 맛보고 천국 가고 싶어. 그러면 그걸 차려면 복을 받아야 되거든요. 복 받는 방법은 뭡니까? 나만의 의, 마일리지가 계속해서 충전돼야 돼요. 만약에 내 뜻대로 안 되게 되면 자기 카드를 꺼내게 된다니까요. “내가 혹시 죄 지은 적 있는가?”
욥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세상을 따로 만들고 있다는 거예요. 자기 의로움을 인정해줄 세상, 현실을 자기 위주로 항상 따로 만들고 사는 거예요. 그런데 욥을 찾아온 세 친구 전부 자기 나름대로의 현실을 또 따로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질이 다른 두 종류의 현실이 충돌했습니다. 자, 욥의 현실이 옳습니까, 욥의 친구의 현실이 옳습니까? 그 재판을 할 수 있는 분이 누굽니까? 나름대로 현실을 갖고 있고 분이 개입해야 돼요. 하나님의 현실이 등장하니까 서로 옳다고 우기던 현실이 둘 다 침몰해야 돼요. 그것은 인간이 지어낸 거예요. 내가 열심히 가고자 하는 그 세계에 내가 가고자 나서는 순간 그 세계는 가봤자 없는 세계에요.
그래서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어느 쪽으로든 가지 마세요. 스카이콩콩처럼 제자리 뛰기 하세요. 제자리 뛴 그 자리에 구멍이 파이잖아요. 그 구멍 속에서 비로소 진리가 나옵니다. 나 때문에 상처받고 파인 그 자리, 주님이 주신 은혜가 나의 욕심 때문에 아픔을 느끼면서 파일 때 거기서 피가 나오면서 우리는 주님의 고통의 유발자가 바로 나의 욕심인 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똑같은 반복적인 생활을 매일같이 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 보는 범위가 넓어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자리에 가지 않았으면 미처 알지 못했던 그 너머의 세계가 또 다시 우리에게 숙제처럼 다가옵니다. 여기가 지평선의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지평선 끝이라고 생각한 지점에 가보면 진짜 지평선은 내가 다가가는 그 행위로 말미암아 약을 올리듯이 저 멀리 가 있단 말이죠.
부자들이 그거거든요. 부자들이 왜 자꾸 돈 벌려고 하는지 알아요? 내가 이만 한 돈을 가질만한 자격이 있다고 걸 증명하기 위해서 계속 돈을 벌어야 되는 거예요. 200억 가진 사람은 내가 200억 자질 만 해서 200억 가졌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런데 200억 가진 그 순간부터 300억 사람들과 놀거든요. 그러면 300억 가진 사람이 볼 때 자기는 못난 존재가 되는 거예요. 왜? 내가 부실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니까 약이 오르잖아요. 그래서 사업이라는 도박에 나서는 거예요. 이것은 200억, 300억 노는 단위가 크다뿐이지 하루에 2만 원 버느냐, 3만 원 버느냐 하고 해운대 전통시장의 아주머니들도 똑같이 경쟁하고 있어요. 자기 위치에 따라서.
그래서 우리가 웨슬리신학을 제대로 공부 잘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뭐 신학도 아닌 것, 이러지 말고 웨슬리가 어떤 심정에서 이렇게 완전한 성화를 왜 추구해야 되는가? 우리가 거룩하면 거룩할수록 완전하면 완전할수록 거기에 비례해서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와 있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진짜배기 하나님의 뜻이라고 외친 웨슬리, 왜 그것이 진짜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게 된 취지와 이유가 어디서 나왔느냐는 것이죠. 그것은 본인이 실패했다고 느낀 데서 나오는 거예요.
이 이야기하고 첫째 시간 마칩시다. 여러분, 실패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건방진 이야기인지 웨슬리를 통해서 확인해야 돼요. 인간에게 실패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는 실패했다는 말이 성립이 돼요? 물 속에 잠수하는 사람이, “바지가랑이 다 젖었네.” 이런 말이 돼요, 안 돼요? 어항 속의 물고기가, “내 피부가 왜 축축하지?” 이게 말이 돼요? 말이 안 되지요. 나는 물에 안 젖어야 되는데 젖을 경우에만 물에 젖었으니까 실패했다는 말입니다. 나는 실패했다는 말을 듣는 하나님이 얼마나 어이가 없겠습니까? 네가 왜 실패를 논하느냐 말이죠. 우리는 실패를 논할 입장이 못 되잖아요. 우리가 뭔데.
다시 이야기합시다. “네 왜 딸이야? 아이고 실패했다.”고 하면 딸이 뭐라고 해야 됩니까? “‘제가 아버지 딸이어서 미안합니다.’ 이 소리해야 됩니까?”라고 오히려 아버지를 나무라야 되겠지요. 그렇잖아요. 여러분, 우리는 실패할 권한 없습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60)
14-06-20 11:07
20140617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4-존 웨슬리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 끝에 제가 인간에게는 실패가 없다고 했지요. “하나님, 저 실패했습니다.”라는 말을 할 입장이 안 된다는 겁니다. 실패, 성공을 우리가 왜 언급합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너는 왜 딸이야, 아들이야?” 그걸 왜 자식에게 물어요. 딸로 만들었으면 딸이고, 아들이면 아들이지.
죄 문제를 개인이 다루겠다는 의도 자체가 의를 내가 만들겠다는 취지에서 나왔기 때문에 죄를 자신이 관리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내 관리를 제대로 하게 되면 자기 위주의 의를 따로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지하갱도 2.5km 밑에 금고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선악과를 아담의 눈앞에 등장시킨 겁니다.
선악과가 무엇이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이 필요했지 인간을 죽지 말라고 또는 죽으라고 있는 게 아니에요. 선악과 자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은 선악과와 마주하면서 선악과와 함께 있는 또는 선악과 위주로 만들어진 두 개의 나무를 위하여 만들어진 에덴동산에 인간이 거기서 일종에 보조로 살게 된 겁니다. 잠시 살다가 나옴으로 말미암아 선악과, 생명나무의 체계가 에덴동산의 범위를 넓혀서 전 영적세계까지 확대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어요.
제가 주일 오후설교 때 그런 것 했잖아요. 치료제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병든다고. 병 낫기 위해서 치료제 있는 게 아니고 치료제가 얼마나 대단하지 보여주기 위해서 병이 나와야 돼요. 하지만 막상 병든 환자의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 굉장히 원통하고 절통하겠지요. 본인은 건강하고 싶은데 하나님의 자기 계획 위주로 밀어붙이다 보니까 아파야 되는 운명이 됐다는 자체가 서글픈 거예요.
여러분,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얼마나 주위에서 동정을 많이 받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뜻은 뭐냐 하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동정하는 제자들을 문제 삼고 제자들에게서 문제를 끄집어내지요. 뭔 뜻이냐 하면, 제자들은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측은해 여기면서 예수님에 대해서는 절대로 측은해 여기는 것이 아니고 자기와 한 편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실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보다 더 불쌍한 분이지요. 그런데 그게 제자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거예요. 나중에 성령이 와서 눈이 뜨게 되면 그제야 보게 될 겁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보다 더 측은하고 불쌍한 존재가 없었다는. 그리고 선뜻 그분의 뒤를 따라기에는 자신에 대한 미련, 자신은 행복해야 된다는 미련이 너무 강렬하게 붙잡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네가 내가 마시는 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쓴 잔을 제가 칠판에 쓰는 이유는, 모든 율법, 땅, 천국 개념이 쓴 잔을 마셔서 쓴 잔에 합류된 사람들에게만 제공되게 돼있습니다. 모든 인간들, 제자들이 있잖아요. 이들이 쓴 잔을 경유하지 않고 바로 하나님 주시는 축복과 천국과 번영과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영생 등 모든 것을 부여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아이디어가 뭘까요? 단순히 쓴 잔을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게 아니라 도대체 이들이 성경에 나오는 각양 좋은 것, 천국, 영생을 그들은 어떤 식으로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내세우는 겁니까? 그게 바로 존 웨슬리와 알미니안주의고 칼빈주의도 마찬가지고. 루터는 그게 아니지만. 어떻게 하면 된다는 겁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고 구원에 합당한 바르게 살면 얻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만약에 예수 안 믿고 바르게 살지 않으면 영생을 못 얻게 되지요.
그러면 묻습니다. 영생 못 얻는 것이 너한테 실망이 되는 이유를 대라. “당신이 지옥 가는 것이 당신한테 실망이 되는 이유가 뭐지요?”라고 물을 때 여러분은 뭐라고 답변하겠습니까? 너는 실패자라고 할 때 그 실패자라는 말이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이유가 뭐냔 말입니다. 예수님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개 같은 여자라고 했지요. 사람을 개라고 하면 기분 나쁘겠지요. 그런데 그 여인은 주님이 개라고 하시면 그것조차 축복이라고 수용했잖아요. 주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세상에 이만한 믿음 있는 자가 다 있느냐고 놀랐지요.
지금 우리가 근본을 찾아가는 겁니다. 근본문제가 뭐냐 하면 나로부터 출발하면 근본이 아니라는 걸 제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출발을 주님이 제시하는 쓴 잔으로 하자. 왜?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개념과 주님이 만든 현실은 쓴 잔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렇단 말이죠. 그런데 제자들이 누가 높으냐고 할 때는 쓴 잔을 못 마셨잖아요. 쓴 잔을 못 마신 것도 의미가 있는 게 인간이 쓴 잔을 못 마실 때 아이디어가 뭐냐를 제자들이 대표해서 충실하게 해주는 겁니다.
제자들의 철없는 생각이 오늘날 우리와 왜 그렇게 똑같은지요. 알미니우스 신학이 한국교회신학과 똑같단 말이죠. 영생을 따내자, 별을 따내자, 달을 따자. 달을 따내는 방법이 착하면 된다는 겁니다. 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못 따니까 죄의 반대말이 의가 되는 거예요. 죄의 반대가 의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진짜 숨어있는 의에 반대라는 걸 인간들은 모르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선악이 뭡니까? 선과 악은 서로 반대지요. 반대를 하나로 묶어서 인간이 따먹은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선에서 악으로, 악에서 선으로 맨날 둘 사이를 왕복할 뿐이란 말이죠. 선과 악, 악과 선 그 자체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이 땅에 없어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인간이 해내지 못하고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데서 선악을 넘어선 주님만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통영 꿀떡을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우리가 통영에 가지 않더라도 오늘 맛봤잖아요. 그럴 때 우리는 뭐라고 해야 됩니까? 내가 마중 나갔더니만 얻었다는 소리하면 안 되지요. 해운대까지 마중나간 거예요? 어디까지 마중나간 거예요? 우린 마중 나간 게 아니고 이 자리에 있었어요. 그냥 값없이 주신 겁니다.
값없이 준 것을 믿잖아요. 그걸 믿어요? 믿으면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고민을 해야지. 그냥 값없이 준 것에 대해서 고맙다고 인사만 할 게 아니고 평소에 우리가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 것들을 노출시켜줘야 돼요. 평소에 하는 짓이 뭡니까?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 있어서 내가 착한 만큼 복을 얻어서 내가 누릴 자격이 있다고 자랑하고 싶은 욕구, 욕망, 그 재미로 살아가는 겁니다.
사람이 행동에 조심하는 이유가, 그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지울 길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내가 이만큼 세상을 잘 사는 것은 누릴 만한 자격이 되고, 네가 못 누리는 것은 너는 나보다 죄 지은 더러운 인간이기 때문에 누릴 자격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주신 것이고. 그런 인간들 천국에 못 갑니다. 천국에는 면류관도 반납하는데 그런 생각으로 어떻게 합류하려고요? 이 땅에서 백날 목사하면 뭐 합니까? 천국도 못 가는데. 목사 됐다는 자체가 헛짓한 거지요. 목사로서 목회해보세요. 한 주간 실패란 느낌을 안 받을 때가 없어요. 오늘도 설교해놓고 이것도 설교라고 했나하는 생각이 늘 들어요.
여기서 칼빈의 문제점을 봅시다. 칼빈은 알미니안을 반대했어요. 그런데 지식으로만 반대했습니다. 칼빈의 실수가 뭐냐? 알미니안과 연관해서 이 점을 생각해봅시다. 이 점을 이야기하면 칼빈 참 나빠요. 어째서 나쁘냐 하면, 알미니안과 존 웨슬리는 개인적 성화를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칼빈주의한테 욕을 얻어먹은 거예요. 개인구원론자들이라고. 지만 살면 그만인가?
그러면 칼빈의 문제점은 뭡니까? 제가 방금 암시 줬지요. 존 웨슬리와 알미니안은 지만 살겠다는 겁니다. 칼빈의 얍삽한 점이 집단적으로 살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알미니안주의는 개인의 성화를 주장하지만 칼빈은 집단성화를 주장하는 겁니다. 집단성화가 되려면 교회라는 집단에 법이 반복돼야 돼요. 규칙과 법이 제안되지요. 그러면 칼빈은 뭘 노립니까? 주어진 법을 반복시키면 자동적으로 뭐가 나온다? 계속해서 우리가 실패자가 아니라 성공자로 이 땅에서 살만한 가치를 계속해서 근거가 되고 이유가 되는 집단적인 의가 나온다는 거예요. 웨슬리도 마찬가지지만 하나님이 정해놓은 반복된 규칙을 포기를 못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천주교에서 반복시키는 예식이 일곱 가지입니다(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혼배성사, 신품성사, 병자성사). 예를 들면 혼배성사, 성사, 거룩한 일. 임직하는 게 있고, 장례하는 일, 고백하는 게 있고. 견진성사가 있어요. 견진성사는 인간이 결심해서 예수 믿었잖아요. 그 다음에 성화단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걸 견진성사라 합니다. 거기다 두 가지를 추가하면 되지요. 유명한 세례와 주님과 떡을 나누는 성만찬을 더하면 되지요.
칼빈, 루터 등 개혁주의자들은 다섯 가지는 없애고 성만찬과 세례식은 계속 반복을 시켰습니다. 집단성화를 위해서 그랬습니다. 왜 그들이 집단성화를 주장하느냐 하면, 성경에 교회가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웨슬리, 알미니안주의 이론하기 전에 이것부터 이야기해드릴게요.
교회가 인간의 손으로 유지됩니까, 아니면 인간의 손으로 매일같이 허물어집니까, 아니면 교회에서 인간이 손뗌으로 교회가 되는 겁니까? 어떤 겁니까? 교회는 기초가 있어요. 그 기초가 뭐냐 하면, 주일 낮 설교한 것을 이야기할게요.
하나님의 영생과 구원을 이스라엘은 감당을 못했습니다. 감당 못한 이유가 이스라엘 조직 자체가 혈통중심, 육신중심으로 돼있단 말이지요. 육신 중심으로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사람의 본성이 동물의 본성과 똑같아서 어떤 경우에도 자기 자식을 내칠 수가 없어요. 천하에 아무리 예쁜 아이라도 내 자식보다 예쁘지 않습니다. 이것은 강아지도 고양이도 그렇고 타고난 본성이 그래요. 가족중심, 혈통중심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걸 탓한다고 해서 벗어날 입장이 못 되거든요. 하나님께서 혈통중심, 육신의 할례중심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이야기하고, 계시를 줘버리니까 그들의 한계가 드러났어요. 우리 민족은 택한 민족으로 혈통중심으로 해버렸단 말이죠.
그런데 신약에 나오는 교인들은 서로 아는 사람들이에요, 모르는 사람들입니까? 전부 모르는 사이지요. 비록 그들 속에 가족이 있다할지라도 내 가족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못 하지요. 마태복음 12장 끝에 보면 유대인은 혈통중심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설교할 때 잘 보이기 위해서 여기 예수님의 동생들과 어머니가 와있다고 이야기했지요. 그럴 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 가족도 왔다고 했습니까? 듣는 가족 기분 나쁘게 이야기했어요. “누가 내 동생들이냐, 누가 내 모친이냐?” 여기 하나님 말씀 듣는 자들이 모친이고 동생들이라는 거예요. 새로운 가족이라는 거예요.
예수님 제자 가운데 동생들 있었잖아요. 하지만 성령 안에서 그게 통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고 부정해야 돼요. 누구든지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못 들어가요. 하늘나라는 가족이 해체되고 혈통이 해체되고 새롭게 연결이 돼야 돼요. 새로운 본드로 연결이 될 때만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로 하기 위해서는 사전작업이 있어야 되는데 혈육, 육신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선행돼야 된단 말이죠.
그런데 혈육의 특징은, 한 번 아들은 영원한 아들이에요. 한 번 조카는 영원한 조카고. 그러나 부부는 한 번 부부는 영원한 부부입니까? 이혼하면 남이지요. 로마서 7장에 보면, 아내가 남편과 비록 혼인했을지라도 남편이 죽어버리면, 다른 남편을 얻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식을 어떻습니까? 자식 죽으면 다른 자식을 내 자식이라고 자리를 메워야 됩니까? 죽은 자식이라도 자식 맞잖아요. 그런데 남편 죽으면 지 남편입니까? 죽은 남편을 자기 남편이라고 하다가는 또 이혼당합니다. 잊어야지요. 이제는 잊고 새 남편을 사랑해야지요. 인간은 육을 잊지 못해요. 따라서 인간이 생각하는 교회를 본인이 잊지를 못합니다. 거기에 자기가 관여했기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의 교회를 성령께서 어떻게 세웁니까? 내 자리를 구멍을 내버려요. 그걸 공백이라고 합니다. 진짜 어려운 것 시작된다. 이건 가야산 수련회에서 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공(空)이니까 구멍이라고 보면 돼요. 그냥 비어있다. 교회가 내 교회라면 이미 교회 아니에요. ‘나’라는 이름이 빵구나야 돼요. 타이어에 빵구나면 그 부분에 타이어가 없지요. 없음을 한자로 ‘無’가 되고 영어로 ‘nothing’이 돼요. 있어도 없는 게 돼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는 거예요. 죽음이란 있다가도 없어지는 걸 죽음이라 하잖아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하는 겁니다.
베드로의 본 이름이 시몬이지요. 시몬이 베드로로 바뀌지요. 베드로,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베드로가 들어갑니까? 베드로가 안 들어간다니까요. 날마다 반석이 반석 되게 하는 주님의 작용이 베드로 자리를 차지해야 돼요. 그래야 베드로가 교회의 기초는 아니지만 사도의 기둥이 될 수 있어요.
말을 어렵게 했는데 쉬운 말로 합시다. 신성일이 [맨발의 청춘]이란 영화에서 반항하는 젊은 청춘의 모습으로 왔거든요. 그런데 영화 촬영 끝났습니다. 그리고 본래의 신성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돌아온 신성일이 반항하는 청년입니까? 맨날 오토바이 타고 다니고 춤추러 다닙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영화에서만 그렇지요.
하나님은 그 영화에서 빠져나오지 말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만드시는 영화에서는 내가 중요한 게 아니고 내 역할이 중요하거든요. 그 역할을 계속하고 싶은데 우리는 영화 찍을 때만 그런 척을 한 거예요. 교회 나올 때는 신자인 척하고 밖에서는 교인인 척하면 손해나기 때문에 아무소리 안 하잖아요. 우리는 본래의 자기 자리를 확보하려고 하는 거예요. 육적인 걸 확보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교회 됐다가, 교회 안 됐다가. 이건 교회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고. 그래서 성령께서 다시 반항하는 청년이 되게 하는 거예요. 영화는 안 끝났어요. 왜냐하면 그 영화가 현실이고 우리는 영화가 끝났다고 여기면서 본래 현실이라고 하는 그 현실이 내가 만든, 욥이 만든, 인간들이 만든 영화 같은 망상의 세계, 허무한 세계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영화 같은 망상과 주님이 만든 현실 사이에서 우리는 반대로 생각하고 살아간다고 보면 돼요. 그걸 라캉이란 정신분석학자가 아주 잘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태어나면서 상상하는데 그 상상은 어디서 왔는가? 그것은 내가 있기 전에 있었던 인간의 현실세계가 나한테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되고 싶은 나는 없고,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요.” 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게 되는 거예요. 저 사람처럼 좋은 차를 타고 싶어요. 저 사람이 있는 넓은 아파트를 가리키잖아요. 가리키는 그 사람은 어디서 나온 사람들입니까? 나보다 먼저 이 땅에 살던 사람이지요. 그러면 그 사람이 가졌던 아파트, 차는 어디서 나온 겁니까? 그 사람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에게 있던 거잖아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상황의 일부가 되지요. 그러면 우리는 누구의 산물이냐 하면, 단순히 우리 집안의 산물이 아니고 나보다 먼저 있었던 상황이 나를 하나의 부분으로 또다시 스스로 창조한 겁니다. 그 창조에 내가 관여하지 못했지요. 관여 못한 그것을 바로 공백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는 이유도 모르고 목적도 모르는 이유가, 공백이 나의 존재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공백이 기초기 때문에 공백에서 나온 것들만 무작정 추구하게 돼있어요.
일본 축구가 코트디부아르에 졌지요. 해설자가 기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너무 통쾌해서. 일본이 진 걸 왜 그렇게 좋아하지요? 어차피 러시아한 질 게 뻔하니까 같이 죽자는 이야기에요. 왜 그렇게 좋아하지요? 이게 공백이라니까요. 공백이란 nothing, 아무 이유 없어요. 이유 없기 때문에 누가 채워주면 그것 때문에 울라하면 울고, 웃으라하면 웃고, 그게 우리 인생입니다. 이 이야기하니까 속이 시원하다.
도대체 나라는 게 없어요. 우리는 남들이 내 앞에 펼쳐지는 그 존재의 바다의 물결이 내 발을 적시니까 내 것이 되고 말았어요. 휩싸인 겁니다. 드라마에 울고불고. 내 게 어디 있어요. 교회라 하는 것은 구원이거든요. 교회는 옛날 출애굽이라니까요. 출애굽이 계속 일어나야 돼요. 우리는 세상에 미련을 두고 세상이 전부기 때문에 계속해서 거기서 뭔가 뽑아낼 때 뭘 통과해야 되는가? 쓴 잔을 통과해야 되지요. 쓴 잔을 통과하게 되면 우리는 애초부터 실패자라는 사실.
그 쓴 잔을 제자들부터 마시게 하고 주님이 마십니까? 주님 마시고 난 뒤에 주님 마신 그 잔을 제자들이 마십니까? 주님 마신 그 잔을 제자들이 마시지요. 왜 그렇습니까? 사람 힘으로 이 잔을 마실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성령이 와서 마실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성경에서 교회를 뭐라고 합니까? 성령의 공동체. 딱 나왔잖아요. 쓴 잔 마신 사람들의 단체. 그렇다면 그들에게 실패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실패는 없어요.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선교하면서 모든 상황이 나에게는 ‘아니요’가 아니고 전부 ‘예’가 되었다. 요새 말로 패스. 잘 된 거예요. 잘 뽑힌 거예요. 영화 잘 찍힌 거예요. 반항하는 청춘, 연기 좋아. 사실은 연기 아니지만. 잘 한 거예요. 모든 게 누구 작품입니까? 주께서 연기도 못하는 우리를 그렇게 합치되도록 데려가신 거예요.
지금 웨슬리나 칼빈도 마찬가지고 알미니안주의도 그렇지만 그들의 목표가 뭐냐 하면,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생활하느냐? 성경에서 거룩하지 못하면 거룩한 나라에 못 간다. 베드로전서에 보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그것이 뇌리에 박혀있는데 그게 하나의 숙제가 됐는데
다시 이야기할게요. 웨슬리에게 첫 번째 출발점이 남과 어떻게 다른가? 거룩이란 것을 어떻게 포집하느냐 하면, 우리가 평소에 세상 보고 사는 것과 똑같아요. 저 사람은 저렇게 사는데 우리는 따로 열두 명, 어떻게 하자? 성경만 보고 토론하고 성경대로 이웃 돌보고 그렇게 살면 우리만이 완벽하고 완전한 성경으로 사는 젊은 사람들의 그룹, holy club이 되는 거지요. 거기다가 인디언에게 전도하러 갔으니 보통 거룩한 게 아니잖아요. 젊은 사람들이 얼마나 용기 있습니까.
그러한 모든 시도가 결국은 자기 마일리지 쌓은 것밖에 안 되고 그러면서 성경에 비추면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가 거룩하라. 거룩을 쟁취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쓴 잔을 집어넣자 말이죠. 쓴 잔은 예수님께서 자진해서 세상이 설치한 재판정에 본인이 섰잖아요. 재판정에 서서 사형을 받아야 쓴 잔이 나오지 쓴 잔이 집에서 홍삼 다려먹는다고 그게 쓴 잔이 아니란 말이죠. 쓴 잔은 세상이 미워해줘야 쓴 잔이 되는 거예요. 본인이 도 닦으면 쓴 잔이 아니에요. 자기 한계를 테스트한 거예요. 내가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극기 훈련이지 쓴 잔이 아니란 말이죠. 수녀들 보세요. 극기 훈련하잖아요. ccc 아이들 여름 되면 교회 돌아다니면서 걸식하잖아요. 극기 훈련 아닙니까. 국토종단하면서.
그래서 악마가 우리를 교육시켜줘야 돼요. 우리가 악마한테 훈련받아야 돼요. 조교도 아주 못된 조교한테 걸려야 돼. 말씀도 모르고 있는데 걸려보세요. 그때부터 왠지 그 조교를 사랑하게 될 거예요. 가면 갈수록 존 웨슬리를 사랑하게 되고 좋아집니다. 왠지 우리 본성에 맞아요. 바르게 살면 복 받는다는 게 좋다니까. 처음에 신학교 나와서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한국교회 썩었다고 복음대로 해야 된다고 개혁주의를 부르짖고 십자가를 부르짖다가 나중에 교회 장사 안 되잖아요. 하나둘 보따리 풀어 세상 따라가다 보면 그렇게 목회 40년 하다보면 왠지 착하면 복 받는 게 하나님의 뜻 같기도 하고 그래요. 웨슬리가 점점 정이 가요.
칼빈의 문제점은 그것을 교회 집단화하니까 그러니까 감리교보다 칼빈주의가 더 좋아. 교회 자체가 집단이니까. 그 안에 성찬식 살아있지요, 세례식 살아있지요. 거기다가 등록이 살아있어요. 성찬식 할 때 목사가 아니면 아무나 못하거든요. 목사가 있다는 것 얼마나 든든합니까. 목사는 우리한테 마치 의리, 그야말로 한 의리하는 것 같아. 의리 있는 교회 목사가 든든해 보이고 그래요.
여러분, 목사의 의리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주님의 쓴 잔입니다. 쓴 잔은 어디서 생긴다고요? 세상에 나가서 당해야 돼요. 사기도 당하고 같이 놀다가 너나나나 똑같은 존재라는 것을 혹독하게 체험해야 됩니다. 쓴 잔이 지리산 도 닦고, 기도원에서 도 닦는다고 느껴지는 게 아니에요. 그야말로 내 뜻대로 안 돼야 돼요. 나의 조그만 희망조차도 박살나야 돼요. 세상에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어야 돼요. 그 모두가 나한테 쓴 잔의 재료가 됩니다. 인삼 다릴 때 여러 가지 재료가 들어가서 보약 되는 쓴 잔이 되는 겁니다.
거룩은 바로 내가 망가진 게 거룩이에요. 그리고 잘못해서 망가진 게 아니고 처음부터 아무 짓도 안 해도 망가져야 되고 착한 일해도 망가지고 일부러 나쁜 일해도 망가지고. 어쨌거나 처음부터 우리는 망가진 존재로 이 땅에 왔음을 비로소 알 때 그 사람은 쓴 잔 안에서 거룩을 최초로 발견한 순간이 될 겁니다. 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내가 거룩해지고 주 안에서 의롭다하는 것처럼 처음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야기가 하나에 이론이 아니고 실제로 부부생활을 통해서 언제 아내가 사랑스러운가? 간단해요. 아내가 화장발 잘 받을 때? 아니에요. 아내가 성형수술해서 주름살 없을 때? 아니고. 아내한테 아무 문제없어요. 아내는 그대로 아내일 뿐이에요. 내가 죄인인 걸 알 때 무조건, 무조건 아내가 사랑스러워요. 나 같은 자에게 너무 과분해. 밥 안 해주고 밤에 춤추고 온 아내가 너무 고마워.
개콘에 [존경합니다] 코너에 보면, “여보 나 남자 생겼어. 당신 화나지 않아?” “거짓말하지 마. 너 같은 얼굴에 무슨 남자가 생겨.” 그러니까 그건 아내를 계속 이용하겠다는 거예요. 밥 해주는 아내로 이용하고 빨래해주는 아내로 이용하겠다는 거예요. 여러분, 혹시 그런 마음 듭니까? 이렇게 복음 아는 나를 만나서 구원받은 걸 천하에 감사히 여기라고 요구하는 거예요?
여기 137페이지 청교도 보세요. 수도승, 수녀, 구걸하는 탁발승, 전부 다 이런 식으로 경건한 것처럼 존 웨슬리도 마찬가지고. 139페이지로 넘어가봅시다. 진젠도르프가 나오는데 진젠도르프와 경건이 다르다는 거예요. 경건주의가 뭐냐? 이건 다음 시간에 할 거예요. 다음 시간에는 독일의 경건주의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진젠도르프의 견해가 뭐냐? [진젠도르프의 주장은 의롭게 되는 순간 인간은 철저히 성화된다는 것이다.] 맞네. 맞는 이야기네. 의롭게 되는 순간 철저히 성화됐다는 것이고, 존 웨슬리는 뭡니까? 기초를 닦는 거예요. 제2의 축복이 따로 제공돼야 되고 만약에 제2의 축복이 오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구원 못 받아요.
지금 웨슬리의 난점이 뭐냐 하면, 구원을 개인의 관리차원에서 생각하는 게 문제가 되거든요. 그래서 웨슬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협력이라고 하는 거예요. 나와 성령님의 협력으로 성화가 되는 거예요. 협력이니까 쉽게 말해서 동업이잖아요. 동업을 할 때 주도권이 누구입니까? 반드시 한 명이 대표자 되게 마련이에요. 동업을 하는데 한쪽이 속이면 신뢰를 잃어버리고 동업이 깨지죠. 이 말은 동업은 늘 깨지게 돼있어요. 그래서 성경에서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거예요. 한쪽을 사랑하면 반드시 한쪽을 미워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잖아요. 그러면 성령과 내가 동업해서 거룩을 이룬다면 나는 나를 사랑하니까 결국 동업이 아니고 이미 깨어졌지요. 성화가 안 되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거룩이란 거룩한 분에게 데려가서 그 앞에서 우리를 죽이고 그 죽은 자리에서 주님이 등장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그 일을 해요. 날마다 우리를 죽이고 다시 살리는 그 일을 하시는 거예요. 네가 하고 있는 일이 네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고, 네가 갖고 있는 아파트나 모든 재산이 네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지금 저희 빌라가 물이 새서 보드가 젖어서 떨어지고 벽지가 축 늘어졌어요. 우리 집 온수파이프가 터져서 그렇습니다. 그럴 때 우리 집이 누구 집입니까? 방금 이론상 주님의 집이잖아요. 주님의 집이니까 그걸 보고 내가 화를 낼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우리도 얹혀사는 입장에서는 화 낼 필요가 없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사태를 일으키게 되면 이론이 뭔지 따질 필요도 없이 단밖에 나오는 게 “아이, 짜증 나.” 이것 아닙니까. 벌써 공사 세 번 했거든요. 네 번째 해야 돼요.
그러니까 성령께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름 기둥으로 인도했는데 물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요. 양식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요. 하나님 믿는데 심지어 하나님이 동행하시는데 돈 떨어질 줄 상상도 못했단 말이죠. 인솔자에게 분명히 비상금이 있게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돈 없다고 나온다면 어떻게 됩니까? 분명히 물이 있고 양식 있는 줄 알았는데 없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는 거예요. 원망해야 돼요. 원망을 반드시 해야만 되는 거예요. 원망을 해야 우리 의가 정립이 안 돼요. 우리는 항상 불평할 수 있도록 용수철이 눌려져 있는 상태에요. 뭔가 계기만 되면 불평이 마구잡이로 터져 나옵니다.
바로 그 인간이 거룩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거룩한 것이 아니고 그 인간마저 거룩하게 하시는 그 하나님이 주 안에서 거룩하게 하거든요. 이런 성화를 존 웨슬리나 칼빈이나 알미니안주의는 상상도 못하는 거예요. 왜 상상을 못하느냐 하면, 세상에 돌아가는 일이 주의 일인 것을 안 믿고 내가 꾸려나가는 일은 따로 있다고 경계선을 쳐서 그런 거예요.
진짜 성도의 생활은 그 경계선을 늘 허물어버리세요. 저한테 수천 번 묻는 질문이 그거에요.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면 됩니까? 새로운 버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경계선을 허물어버리고 주님의 은혜의 파도가 찰싹찰싹 내 발 밑을 적신다고 모든 게 은혜로 받아들이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되는 겁니다.
거룩하지 마시고 거룩함을 입으세요. 히브리서 10장 10절에 나오는 말씀 아닙니까. 그냥 거룩함을 입어야 되는데 지가 거기서 거룩의 뜨개질을 하고 있다니까. 거룩의 뜨개질을. 예복을 입을 생각은 안 하고 뜨개질하고 있다니까. 한 땀, 한 땀. 뜨개질하는 사람들 보세요. 자기가 뜨개질한 것을 들어본다고요. 잘 나왔는지. 이게 도 닦는 거예요. 뜨개질한 것을 교회에 갖고 가서 숙제 검사한다고 이번 주에 이만큼 했다. 새벽기도 나왔다.
진젠도르프는 인간은 의롭게 되는 순간 거룩하게 되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진젠도르프의 문제점이 뭐냐? 다음에 할 거지만 미리 이야기하면, 진젠도르프의 성화나 칭의가 참 멋있어 보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