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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교회의 충만 140613강의디모데전서

교회의 충만 140613

이름 : 이근호(IP:119.18.90.53)

김창길(IP:180.♡.197.209)

14-07-06 21:30

서울 의존교회140613a (교회의 충만)―이 근호 목사

디모데전서 3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처음에 감독에 관한 이야기와 집사들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것을 정리하면서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감독이라 하는 것도 사람이고 집사도 사람이죠. 사람이 사람한테 뭔가 요구를 할 때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요구를 하게 되면 요구한 그 이유가 있어야 돼요. 나는 당신이 이렇게 단정하게 살면 좋겠습니다. 할 때 왜 내가 단정하게 살아야만 하는지를 당신은 왜 그것을 요구하게 되는지를 반드시 언급을 하고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단정해야 됩니다. 라고 이야기를 해야 앞뒤가 맞는 이야기거든요.

여기 나오는 감독이나 집사에 관해서 언급을 하면서 교회라고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가정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고 있거든요. 그러면 가정 따로, 교회 따로가 과연 성립이 되느냐를 생각해 봐야 됩니다. 가정문제는 가정문제이고 교회문제는 가정문제와 별도로 따로 다른 규칙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 규칙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규칙이 없다면 여기 감독이라는 사람이 자기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자기 집에서 하는 행동과 교인들과의 행동이 일치해야 되겠죠. 일치해야 됩니다.

일치해야 되는데 일치안하면 어떻게 됩니까? 교회가 무너집니까? 부서집니까? 자, 이야기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사람이 감독이 어떻고 집사가 어떻고 할 때에 아예 집사 되기도 싫고 감독되기도 싫은 사람한테 이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이것을 나한테 해당사항이 없네! 하고 외면 할 거예요. 그런데 집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나 외부에서 집사를 맡겨진 사람에게나 감독을 본인이 하기 싫은데 외부에서 감독하라고 맡겨진 사람에게는 오늘 본문 말씀가지고 신경을 쓰겠죠.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왜냐 하면 감독이 일을 하고 집사가 일을 해야 되는데 여기 나온 말씀대로 이러하고 저러하고 하는데 도중에 자기가 봐도 실패했다 말입니다. 여기 말씀대로 위반하고 실패했을 경우에는 까짓것 감독 사표내면 되고 집사 안하면 되지 이렇게 나올 공상이 크죠. 아이고, 답답하나? 그 집사한다고 월급 더 주는 것도 아니고 집사 받지 못해도 여기보면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되고 자녀와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이어야 하고 또 집사들은 8절에 보면 단정하고 일구이언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 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일을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 할지라 이렇게 나와 있는데 처음에 집사될 때는 자신이 이 말씀대로 그렇게 실행에 옮길줄 알고 자신만만해서 집사 안수를 받았죠. 안수 받을 때는 눈물도 찔끔 흘리고 야 이 교회의 운명이 나한테 달렸구나! 내가 똑바로 살아야지! 내가 제대로 못하면 교회도 하나님에게 욕을 먹이는 교회가 된다, 이 참에 내가 스스로 제 2의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계기로 삼자! 라고 마음에 다짐에 다짐을 하는데 세상이 어디 가만히 둡니까?

세상이 집사다우라고 세상이 그렇게 움직여줍니까? 브라질이 크로아티아를 3대 1로 이긴 게 너 집사 똑바로 하라고 이긴 겁니까? 월드컵 첫 경기 부러졌잖아요. 브라질이 크로아티아를 3대 1로 이겼죠. 브라질이 축구에서 이긴 것과 집사들의 관련성을 논술하라 어떻게 보세요. 제주도 갈치 값이 내려가는 것과 집사 됨을 논하라 이런 것, 제주도 갈치값 내린 것 하고 내 집사된 것과 관련성이 없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까? 둘중에 하나에요. 없습니까? 있습니까? 있어요. 그 둘 중에 하나도 못 맞춰요? 제주도 은갈치 값 내려가는게 집사와 관련있다 말이죠. 세상에 어떤 움직임하나 하나하고 여기 있는 말씀하고 무관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말씀따로 세상 따로가 아닙니다. 큰일 날 이야기입니다.

전체의 말씀은 성경 에베소서에 나오는 겁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세상에 모든 충만한 것의 충만은 결국 교회로 마감이 돼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모든 움직임은 이 땅에 교회가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머리되는 교회가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따라서 그 집사님이 제주도를 놀러가도 거기도 주님의 활동을 접하게 돼요. 주님이 하시는 활동을 접하게 됩니다. 제가 가정 따로 교회 따로 했지만 범위를 더 넓혀봅시다. 세상에 어느 구석이 야구장에 가도 목욕탕에 가도 계시고 모든 구석 구석에 주님의 손길이 없는 곳이 없고 주님이 손길이 관여한다는 말은 디모데전서 3장을 가지고 관여한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디모데전서 3장 가지고 관여하고 어떤 때는 요한복음 1장 가지고 관여하고 디모데전서 3장에 관여한 현장에 들어가 보면 요한복음 1장도 있고 에스겔 33장도 거기 있고 미가야 2장도 거기 있습니다. 한 몸통입니다. 한 생물체, 한 통일된 생물체, 큰 문어덩어리에요. 전 세계가 그리스도가 엄연히 부활하시고 살아계셔서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를 위한 그 계획대로 짜 맞춰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주님에게는 아니요 라는 게 없고 모든 것이 예스, 패스, 일이 잘 됐고 또 잘 됐네! 또 일이 기차게 잘됐네! 또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네! 모든 것이 예스, 패스가 되는 쪽으로 세상은 모두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러한 예수님 중심을 생각지 못하고 이 말씀을 감독이 어떠니 집사가 어떠니 딱 하게 되면 뭐 여기에 안 맞으면 내가 스스로 알아서 살펴내면 되잖아요. 책임지겠습니다. 무슨 책임을 져요? 주님이 우리한테 책임질 일을 맡겼습니까? 우리가 주님과 일대일로 지금 너 책임져라! 네 책임지겠습니다. 책임 못 지겠습니다. 그렇게 주님과 협상 할 수 있는 우리가 그런 입장에 놓여있습니까? 그런 입장이 아니에요.

지금 여러분들이 뛰고 있는 심장의 박동과 아침에 먹었던 그 음식과 점심과 저녁에 먹었던 음식이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일용할 양식을 누가 주시는 겁니까? 우리 주님이 주신 거예요. 그런데 그 주님이 주신다는 그 루트, 그 통로, 그 절차, 주님이 계시고 나한테 이런 식사가 왔다는 중간에 연결되고 전달되고 전달되는 모든 과정, 그 연결 고리를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있습니까? 그렇지는 못하죠. 참새가 하나님께 키움을 당하면서 참새가 ‘하나님, 좀 천천히 합시다. 참새가 오늘 양식을 먹이시는 그 과정에 대해서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떻게 해서 내 입에 곡식 하나가 들어오는지 차근차근히 cctv를 반대로 돌려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되는지 한번 따져 봅시다.’ 하면 참새가 그런 소리 하면 주님께서 오냐 따져 보자 이렇게 나옵니까? 아니죠.

그러면 참새는 뭡니까? 주께서 친히 기르시는 결과물이죠. 그러니까 참새는 머리가 나빠서 모르겠지만 참새가 공중을 나는 것도 이게 주님이 일으킨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해서 참새가 그것을 되돌아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하지만 인간한테는 그런 능력이 생기도록 교체를 했다는 겁니다. 참새도 키우고 백합을 기르듯이 너희는 그 나라 의를 구하라! 그 나라 의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친히 일하시는 그 모든 영역이 그 나라, 하나님의 나라에요.

그러니까 지금 까지 한 것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라 하는 것은 우리 자아가 유지되면서 참여될 문제가 아니고 참새처럼 백합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일해 놓은 그 모든 일에 대해서 우리는 결과물이다. 자, 이 쯤 이야기하면 오늘 디모데전서 3장이야기가 슬슬 감이 오십니까? 우리는 결과물입니다.

결과물이라는 것을 어렵게 이야기해서 필연성, 내가 어떻게 하면 이 감독과 이 집사에 맞게 행동합니까? 어떤 필연성 자체가 우리한테는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디모데전서뿐만 아니고 어떤 기준도 마찬가지에요. 서로 사랑하라 하니까 제가 어떻게 하면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까? 하는 질문 자체도 용납이 안 되고 허용이 안돼요. 왜? 우리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미 주님께서 일을 일으킨 과정이거든요. 여기 방석이 있는데 방석의 이 끝 위 지점에 내가 놓여있다고 합시다. 우리는 성경에서 디모데전서에서 감독은 이렇게 해야 되고 집사는 이렇게 해야 된다니까 내가 그 말씀을 듣고 내가 이 말씀대로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지키려고 하는데 잘 안되면 어떻게 한다? 싫으면 그만 두면 되는 거예요. 집사 그만 두면 되고 감독 사표내면 돼! 이렇게 된다 말이죠. 어쨌든 간에 처음에는 감독하게 되면 감동받아서 내가 이제 주의 종으로 살겠다고 시작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시작하게 되면 이쪽에서 진동, 파장이 퍼지겠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내가 말씀 지키면 그 영향력, 효과가 주변에 번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흔히 부부에서 그런 오류가 있잖아요. 아내나 남편이 내 뜻대로 안되니까 나 하나 정신 똑바로 차려서 바르게 살게 되면 그 효과가 아내와 남편에게 전달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잘못이라 말이죠. 안되면 어떻게 할 거에요? 갈라 설 거예요? 성경은 뭐라 하느냐 하면 내가 여기 위에 있잖아요. 성경은 저쪽에서 흔들어버려요. 그러면 파장이 내 쪽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알 수 없는 분이지만, 사실은 부활하신 주님이죠. 주님께서 이쪽부터 흔드니까 여기서 방석의 진동의 여파가 우리한테 도달되는 거예요. 도달되면 우리는 성경 디모데전서 3장을 보게 되면 내가 여기 해당되는 사람인 것을 차후 적으로 결과적으로 우리는 파악이 된다 말입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과정 속에 이미 같이 참여된 거예요. 말려든 거예요. 주님이 일으킨 파장에 우리는 그 여파를 그냥 온몸으로 누리고 있고 받고 있는 입장이다 말이죠. 사람들이 디모데전서에 감독은 이렇게 해야 되고 집사는 이렇게 해야 된다 하니까 사람들은 벌써 쫄았어요. 보자마자 쫄았어요. 특히 여기 8절에 보면 집사들은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입은 하나인데 두말하지 않는다, 그런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인간 혹시 봤습니까? 신고 받습니다. 혹시 주위에 일구이언을 안 하는 사람이 있으면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보상금 드립니다. 오늘 빵 있는데 빵 하나드릴까요?

술에 인 박이지 아니하고 아, 술을 먹되 인박힐 지점과 인 박이지 않을 그 경계건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간다 뭐 그런 뜻이에요? 그럴 것 같으면 차라리 먹지를 말지 그 술 먹을 때 마다 신경 써서 자, 여게 인박이는 상태일까? 이것은 술은 취했지만 인은 안 박혔어! 마약하는 사람이 자기가 인박혔어 안 박혔다를 자기가 판단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습니까?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로다? 깨끗한 양심? 처음에 방석 빨았을 때는 깨끗했었어요. 살다보면, 발고 올라 서면 이렇게 더러워요. 더럽고 깨끗하게 빨았다할지라도 빨은 것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그렇게 깨끗하지 않습니다. 온갖 바이러스는 그대로 살아있고 물론 하이타이 팍팍 쓰고 거기다가 옥시크린 쓰게 되면 되긴 되지만 계속 사용하다간 자기한테 해롭고 깨끗한 양심에다가 뭐 또 여자들은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여자들이 싫어하는 것을 다 집어넣어놨네요.

여자가 수다 떠는 재미로 사는데 말을 하지 마라하면 됩니까? 여자가 단정하며 또 절제하며 여자가 백화점에 가 보세요. 그게 절제가 되던가요? 만날 구멍가게 가니까 절제가 안하고 싶어도 절제가 되는데 몇 개월 만에 백화점가서 원하는 것 사라하면 이것은 3시간을 돌아다녀도 나중에 와서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고 하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그래서 백화점에는 시계가 없어요. 시계보지 말고 마음껏 돌아다니라고 이게 좋은 옷, 명품이 안보이니까 절제되는 것 같지만 보고 난 뒤에 절제하라 하면 나중에 꿈속에서 라도 그 사람들이 대번 못 참겠다! 합니다.

따라서 디모데전서 3장에 나오는 내용은 교회의 교회됨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교회되려고 시도 하는 사람의 작업이 아니고 이미 교회 만들어 놓은 그 분의 홀로하신 작업이 되는 겁니다. 제가 언제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용서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발생되는 게 죄다. 구원이 구원되었기에 차후에 말씀 드리데면서 이렇게 될 수 없는 너를 이렇게 내가 만들었다, 그것을 내가 기르시나니 내가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 나라 의는 네가 머리가 좋아서 쳐다보는 것이 아니고 네가 그 나라를 쳐다보도록 내가 그렇게 만들어 냈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 아까 방석 흔들 때, 우리는 몰랐지요. 우리는 나만 설쳐야 그래야 뭐가 되는 줄 알았지만 내가 설치는 것보다 더 훨씬 전부터 주님께서 혼자 설쳐 됐다는 그 사실 것을 우리는 차후에 발견합니다. 내가 설치는 것과 주님이 설치는 것이 일치되겠습니까? 안되겠습니까? 일치될 수가 없지요. 지금부터 왜 일치 안 되는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교회라는 것이 무엇이냐? 여기 5절에 보면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아니하면 어찌 하나님이 돌아 보리요, 하는데 여기 교회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교회라는 말은 딱 이겁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집합, 집단 이게 교회에요. 너무 빨랐습니까? 천천히 해 볼까요?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죽임을 당한 그 죽임을 당한 그 죽음을 받아들여서 주님과 더불어서 하나님께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집단, 집합 그게 교회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끝!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끝입니다. 그 뒤에 말을 여러분이 알기는 아는데 제가 일부로 제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을 제가 일부로 빼먹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살기 때문에 내가 살잖아 우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일부로 빼놓은 거예요. 내가 죽었으면 죽은 것이지 우회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또 자기가 자기를 또 살리려고 그런 얍삽한 머리 통밥을 굴리지 말라 이 말이죠. 내가 죽었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사는 게 있으면 순전히 주님이 살아야지 내가 산다고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것이 바로 교회라는 겁니다. 어째 그런 일이! 보세요. 이런 사람을 어디서 찾습니까? 찾을 수가 없죠.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왜냐 하면 우리가 찾으려고 하는 자체가 보세요, 성경 말씀에 보면 교회가 있거든요. 교회가 뭐라고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사람들의 집합, 집단이 교회이죠. 그런 사람을 찾으려면 내가 여기 A와 B라는 길이 있다면 내가 내 방식대로 찾아가야 돼요.

그런데 찾아가는 방식이 내 방식을 동원하는 자체가 이게 반칙이 되는 거예요. 이 B라는 지점의 방식은 예수님께서 일으킨 코스를 밟아야지 엉뚱한 나한테 있는 코스를 밟으려고 하면 이 사람은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 내가 가게 되면 내가 그냥 가는 것이 아니고 쟁기를 달고 흙을 파며 나의 흔적을 남기면서 가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항상 찾는 것이 있어요. 그 찾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어디까지 왔나? 이런 놀이 있잖아요. 여러분 애들이 더울 때 학원 끝나고 난 뒤에 저녁 먹을 때 까지 골목에서 노는 거 있잖아요. 어디까지 왔나? 하잖아요. 항상 자기의 생의 흔적을 점검하면서 사람은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내가 어디까지 쟁기 가지고 팠나? 개도 오줌 누잖아요. 자기 영역 확보한다고 내가 영향력은 어디 까지 퍼져 있느냐 그것을 확인하는 거예요. 내 편은 몇 명이고 우리 교회 교인은 몇 명이고 나 알아주는 사람은 몇 명이고 이것을 자꾸 강아지만 그런 것이 아니고 항상 그것을 확인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주님께서 신자 되게 하는 신자를 내가 확인하면서 그런 사람을 저 사람이 신자 맞나? 하고 찾아가는 그 과정 자체가 또 나의 잘남을 나의 정당함을 내세워서 파고 들어가기 때문에 그 길은 주님이 파신 그 길이 아니에요.

그래서 그 사람 확인해 봐야 아, 영 아니네! 이렇게 된다니까요 그러면 그 사람이 이야기하죠. “네가 뭔데? 내가 너한테 인정받을 이유가 없어!” 이렇게 나오는 끝나는 겁니다. 내가 당신이 신자 맞는지 한번 점검 해 보겠습니다. 실례하지만 국정원에서 나왔습니까? 어디서 나왔어? 이렇게 물으면 할 말 없잖아요. 지가 왜 검사를 하는데요? 지금 바리새인입니까? 왜 검사하는데? 검사하면서 들이대는 그 잣대 자체가 오류가 없다는 그 근거를 한번 당신이 제시해 보라 말입니다. 당신이 나를 판단하는 그 판단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판단인지를 그 근거가 어디 있냐? 그 근거를 하나님의 인증서 한번 가져와봐라 하면 우리는 내 놓을 수 있습니까? 없지요. 제가 하는 이야기는 누가 주도권을 쥘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는 내 하는 신앙처럼 아니면 신앙 아니라고 이렇게 주도권을 쥘 수가 없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질 때 그들이 돌을 던질 때 현장에서 던지지 예수님을 왜 찾아옵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게 이상하잖아요. 그들의 법에 보면 반드시 우리가 집행할 때는 예수님한테 찾아가야 된다! 그런 게 있습니까? 그런 게 율법에 있어요? 없지요. 유대인에게 그런 법이 있습니까? 우리가 여기서 집행하기 전에 저 다른 동네 있는 나사렛 예수님한테 물어보고 합시다. 뭐 이런 게 그 당시 법에 있었습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간음한 여인을 처벌하는 게 아니고 사실은 누구를 노리는 게 누구를 처벌하려고 원하는 겁니까? 예수님을 처벌하기를 원하는 거예요.

십자가가 뭐냐, 죄 없는 무죄한 예수님을 죄 있다고 판정을 내린 그 판사를 죄인이 무죄함을 입증 받아서 자기를 죄 있다고 판정한 그 판사에 대한 판결이 바로 십자가에요. 다시 하겠습니다. 죄도 없는데 죄 있다고 판결했잖아요. 판결하고 난 뒤에 죄 있는 게 됐죠.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죄인을 사흘 만에 살아나게 하심으로서 참된 인간, 참된 의인을 보여 줬습니다. 그냥 보여 주고 끝났습니까? 일 끝나는 거예요? 일 끝나지 않았죠.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죠. 누‘구야? 나가 나보고 죄 있다고 했어?’ 라고 되돌아와서 예수님 보고 죄 있다 한 그 자를 예수님이 판사가 돼서 그 사람들을 피고로 판결을 내리는 심판을 감행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죄 있다고 판정한 이유가 뭡니까? 그 근거가 뭡니까? 방금 이야기 했죠. 자신의 방식으로 예수님을 판단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럼 자신의 방식은 뭡니까? 하나님의 뜻은 누가 지킨다? 하나님이 뜻은 누가 지켜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우리가 지켜서, 우리가 지킨 자에 한 해서 어디 간다? 천국 간다라는 원칙을 고수했잖아요. 이것은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교회 보세요. 교회라는 게 뭐냐 하면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합이잖아요. 자기 잘난 맛, 자기 대단함을 보여 주기 위한 집합이잖아요.

그런데 성경에는 그런 교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우리는 평생을 그런 교회로 살고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잘난지를 칭찬해주는 그런 교회를 원하고 있고 또 그런 교회를 찾아가고 있고 그래서 그 교회에서 자신을 정당함을 지금 확보하고 잘난 체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다가 디모데전서 3장을 딱 주니까 ‘내 실력 같으면 내 신앙철학 같으면 이 정도는 지킬 수 있겠다! 감독한 자는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 이 정도는 되겠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면 출발을 어떻게 합니까? 나로부터 출발을 하지요. 나로부터 출발할 것 같으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버림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전혀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메시야가 필요 하냐 하면 깃대 들고 앞장서서 ‘여러분 주신 말씀 믿지요? 그 말씀 여러분 헛되이 하지 말고 열심히 충실히 지킵시다! 나를 따르라!’ 뭐 이렇게 돼야 돼요. 독려하고 경려하고 말씀은 여러분들을 살립니다. 이런 식으로 내가 앞장 설 테니까 나 따라서 여러분 말씀 지킵시다! 이렇게 돼야 된다니까요.

그 분이 왜 죽어요? 그분이 누구한테 죽었습니까? 십자가에서 뭐라고 했어요? 유대인아, 유대인아! 왜 날 죽이느냐?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바리새인아! 바리새인아! 빌라도야! 왜 날 죽이느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까? 그런 십자가에요? 우리가 아는 십자가가? 뭐라 했습니까? 너무 무서워서 말 못하겠죠.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상상도 못한 다른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고 예상한 하나님하고 전혀 딴판이었어요. 하나님 자신, 자체가 다른 하나님이에요. 우리는 창세전에 있었던 일을 몰라요. 창세전에 있었던 약속도 언약도 몰라요. 그 모른다는 것이 십자가를 통해서 모른다는 것이 더욱더 모르게 된 거죠.

아버지는 아들을 죽이고 아들은 맥없이 아버지한테 살해당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세계인 것을 그것도 왜 그래야 하는지를 잘난 나를 두고 왜 그래야 하는지를 말만 하면 지키려고 준비되어 있는 아주 착한 양심을 가진 나를 두고 왜 아버지는 아들을 죽이고 아들은 아버지한테 죽임을 당하고 왜 그런 사태가 벌어져야 되느냐 말이죠. 착한 나와 무슨 관련성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우리한테 나타날 때는 그냥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한껏 재판장으로 대우하면서 나타나십니다. 너는 판사해라 나, 죄인 죄수 할게. 네가 보기에 내가 어떠냐? 이것을 묻는 거예요. 네가 판결하기에 내 모습은 어떻지? 하고 묻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법률지식과 율법 성경을 총 동원해서 판결을 내리죠. 당신은 도저히 우리한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면 주님께서 그러죠. 네가 납득이 안 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네가 판사 노릇하고 재판관 노릇하면서 그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스스로 포함 있다고 네가 자부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감독이 될 때에 감독된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내가 감독될만해서 감독됐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게 맞는 이야기입니까? 내가 술에 인 박이지 않았기 때문에 감독됐다는 겁니다. 저 인간은 만날 술만 찾아서 나는 술이야, 나는 술이야 만날 그 노래 부릅니까? 나는 술을 끊었기 때문에 감독됐다는 거예요. 이게 맞는 말이에요? 이것은 아까 방석에서 내가 말씀을 찾아가는 내 행동의 정당함을 스스로 부여하면서 따라 가는 계속 그 방식이 개입되는 거예요. 그 방식을 계속 유지하다가는 우리 눈앞에 무엇이 사라지느냐 하면 결국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심은 그것은 의미 없는 사건이고 그것은 잊혀야 할 사건이고 이것은 안 들려야 할 사건이에요. 꽤 부려야 될 사건이에요.

말씀 주셨다, 지켰다, 최선을 다 했다, 그것 때문에 착하다, 이것만 남아야 돼요. 다른 것은 기독교가 아니어야 돼요. 이것만 기독교에요. 그래서 그런 사람 모였더니만 다 같이 말씀에 정진하였다, 말씀에 정진하는 사람의 집합 이 꼴 교회, 그러니까 말씀이 진리니까 진리대로 사는 교회는 진리의 터다 이렇게 돼야 된다니까요. 여러분, 진리가 뭔지를 제가 한 말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소개해 드리고 이 진리대로 사는지를 여러분들이 스스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게 지키라고 준 진리인지 못 지키라고 준 진리인지 한번 보세요. 누가 복음 14장 25절입니다.

눅 14:25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허다한 사람들이 많이 따랐어요.

눅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이게 마귀 말입니까? 이게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이게 바로 예수님의 이야기이죠. 그럼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 “딤전 3: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찌며 딤전 3: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찌니”
그러면 우리가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아버지로서 감독될 입장이라고 칩시다. 그 감독 앞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어떤 사나이가 등장한 거예요. 내게 오는 자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모습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라고 왔을 때 그분이 체포됐고 나한테 판결을 맡겼을 때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떻게 판결 할 꺼에요? 나사렛 예수라는 분, 당신을 옳았고 내가 틀렸습니다. 이렇게 판결을 낼 수 있습니까? 내가 보기에는 너무 과격합니다. 취지는 알겠는데 여기에 자기 아내보다 더 우선된 게 있다 이렇게 이야기한 게 아니고 뭐라고 합니까?

처나 자식을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그냥 방치하라가 아니고 뭐라 했습니까? 미워하라 했죠. 누구 앞에서 미워하라 했습니까? 나를 만났거든 필요 뭘 하라? 처나 자녀나 형제나 자매나 미워하고 특히 미워할 것은 누구를 미워하라 했습니까? 처나 자식을 미워해서 기어이 예수님 따라 가겠다고 나서는 누구? 당사자 누구? 나를 ‘애라 인간아!’ 라고 미워하는 자만이 나를 따를 수 있다는 겁니다. 끝났어! 끝났어!

여러분들이 제주도 가서 갈치 회밥 먹으면서 이 누가 복음 14장 25절 말씀 생각합니까? 생각 안 하죠. 아이고, 이 갈치 맛있다! 이거만 생각하죠. 제가 아까 첫 강의에서 뭐라 했습니까? 세상의 모든 일이 갈치 값 내려고 하는 일이 모든 일이 예수그리스도의 교회, 그리스도의 머리되시는 것과 무관하다 했습니까? 연관되어있다 했습니까? 다 연관되어 있죠. 세상의 모든 발자국 소리 하나, 어떤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주 되심과 무관한 게 하나도 없죠. 친히 주께서 지금도 활약하고 계시니까 그런데 우리는 왜 그런 넓은 부분까지 감안을 못하고 생각을 못합니까? 왜 축구 보면서 브라질과 크로아티아 축구 보면서 왜 누가복음 14장 25절이 생각이 안 나던가요? 마리오인가가 한 골 넣을 때 너는 그 한 골도 미워하라 뭐 이렇게 여러분들 축구 보면서 그것을 생각합니까?

왜 못하죠? 이미 시작을 누구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나부터 출발하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너는 살아 있는 게 아니고 너는 죽었다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너는 죽었기 때문에 무슨 생각을 우리가 해도 그것은 나를 도로 죽이는 이유만 자꾸 생산될 뿐이에요. 내가 생각하는 것으로 인하여 내가 죽어 마땅함을 다시 확인하는 그러한 매일의 과정 속에 우리가 놓여있는 겁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다면 그것이 내가 기대했던 성과를 이루는 이상의 다른 성과입니다.

그 성과는 어디서 파장을 일으키느냐? 아까 이야기한 방석 저 끝에서 사실은 방석 끝이 아니라 방석 중앙이라 했는데 편의 상, 방석 저 끝에서 주님께서 친히 펄럭이면서 방석을 흔들어 줬더니만 내가 축구를 보면서 생각하는 것이 브라질에서 축구선수 누구에요? 네이마르, 네이마르야, 그 한 골 넣는 너를 미워해라! 라는 현상이 생기는 거예요. 아이고, 좋겠다! 저거 한 골 넣었으니 앞으로 몇 십억을 탈 텐데 하는 이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몇 십억 벌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아요. 한 골 넣으면 몇 십억 얻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게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다 하더라도 너 자신을 미워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왜? 그 골을 누가 넣게 해 주셨습니까? 주님이 축구 선수거든요. 주님이 축구 선수라니까요.

크로아티아가 자살골 넣었죠.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자기가 자살골 계산해서 찼습니까? 아니죠. 차다보니까 그냥 브라질 수비수 맞고 그냥 한 골 들어갔죠. 누가 그렇게 한 거예요? 주님이 그렇게 하셨죠.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안했다는 거예요. 내가 안했는데 관중석의 환호성은 누구한테 보여 집니까? 나에게 쏟아지지요. 그러면 부담을 누가 느껴야 돼요? 내가 느껴야 되지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내가 부담을 느껴야 되는 거예요. 내가 한 게 아닌데 아, 이 세상이 살만한 세상이 못되네! 왜? 나로 하여금 교만을 유발시키는 그런 현상들이 자꾸 일어나니까 아이고 차라리 떠났으면 좋겠다, 떠나도 한 두골 더 넣고 떠나야 되겠다! 그런 생각이들게 할 때 그 모든 그것을 그런 작동의 원리는 누가 시작한 거예요? 교회 머리되시고 또는 만물의 충만 되시는 주님에서 나왔다고 에베소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겁니다.

에베소서 1장, 그 대목을 한번 봅시다. 교회하면서 그 대목을 필히 봐야 되겠네요.
엡 1:22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이 대목이 어렵기 때문에 설명을 겸해서 하겠습니다. 만물이 그 발아래 복종했으니까 만물은 이미 예수님 발아래 있죠. 그러면 그냥 발로 꾹 발고 있습니까? 아니면 밟히도록 작용하고 있습니까? 밟히도록 작용하고 있죠. 발아래 있다 하니까 우리 생각에 발아래는 꿈쩍 못하고 가만히 있는 그런 사태만 우리가 생각나죠. 여러분 군홧발 밑에 지렁이가 가만히 있잖아요. 우리는 발 아래 있다 할 때는 뭘 생각합니까? 발아래 있으니까 꿈쩍도 안하고 그냥 조용하게 있을 꺼라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주님의 발아래 있는 것은 그게 아니에요. 마귀가 설쳐 되는데 그 설쳐 되는 것까지 어디 안에 있다? 주님의 허락 안에서 움직인다 이 말입니다. 왜냐,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사도 바울이 자기가 전도하면서 일어났던 모든 것은 전부 다 NO가 아니요 전부 다 성공, 성공 이어졌다 이 말이에요. 예스, 예스가 되는 거예요. 야, 참 오늘도 일 잘 됐네! 오늘도 일 멋지게 됐구먼! 야! 참, 세상에 홍명보 4대 빵 이런 참 하나님, 일 잘 하시네! 가나한테 4대 빵으로 지다니 이제 러시아한테 또 몇 대 빵으로 질지 주께서 아마 믿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거예요. 모든 일이 그 축구 시합 하나도 누구 발아래 있습니까? 주님 발아래 있죠.

그러면 주님 발아래 있다는 것을 우리가 멀찍이서 관람할까요? 나도 그 발밑에 들어가야 될까요? 어떻게 할까요? 나도 발밑에 밟혀야 되지요. 관람석에서 구경하면 안 됩니다. 박수를 치치 마세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 대로 하라고 예수께서 했죠. 그것을 우리한테 적용 시켜 보세요. 그러면 주님의 발아래 있는 이상은 우리가 내뿜는 모든 것, 우리가 시작하는 모든 것은 내뜻대로 될까요? 내 뜻대로 안 될까요?

이 방석 자체가 주님의 뜻대로 된다면 나로부터 시작하는 모든 것은 내 뜻대로 안되지요.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게 싫어서 내 뜻대로 됐다고 우기는 버릇이 있는데 그것은 우겨봐야 하나의 오기고 객기고 모든지 내 뜻대로 된 적이 없어요. 모든지 우리가 여기에 모인 것도 내 뜻대로 된 것도 없고 여기 컵에 물이 담긴 것도 내 뜻대로 아니에요.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보통 총각들이 결혼할 때 뭐라 하느냐 하면 결혼식에서 내가 하늘이 두 쪽 나도 이 여자는 내가 지킵니다. 그렇게 장담하죠.

하늘이 두 쪽 나도 이 여자는 내가 지킵니다. 그렇게 했는데 진짜 하늘이 두 쪽 나면 어떻게 할 겁니까? 두 쪽 나면 못 지키는 거죠. 그런 장담하지 마라 이 말입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내 여자 내가 지킨다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성경에는 그러면 그 사람만 주님의 발밑에서 벗어난 사람이 되어 버려요. 모든 만물은 주님의 발밑에 있죠. 내 돈 떼어먹고 사기치는 사람도 주님의 뜻에 의해서 사기친 거예요.

6.25 사변 터져서 미국을 의지한 것도 주의 뜻이고 식민지 되는 것도 주님의 뜻이고 밉보여서 또 다시 총리 못되고 탈락되는 것도 뭐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주의 뜻입니다. 위안부 된 것도 주의 뜻이니까 일본한테 사과 받을 필요도 없고, 주의 뜻이라면 일관성 있어야죠. 자기한테 유리하면 내 뜻이고 남한테는 주의 뜻이고 이러면 안돼요. 일관성 있게 나가야돼요. 내가 사기 쳐서 걸려든 것도 주의 뜻이고 이렇게 해야 돼요.

강도돼서 구원받았으면 그 사람은 강도된 것이 주님의 놀라운 주님의 사랑입니다. 강도된 게 주님의 사랑이라면 자기가 강도질하면서 죽게 된 어떤 신혼부부도 결국은 주의 사랑으로 내 칼에 맞아 죽었네! 일이 그렇게 되죠. 예수님께서 이런 소리를 하니까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사형 당할만하죠. 인간 세계에서 이렇게 총괄적으로 스타가 등장해 버리면 사람들한테 미움 받아요. “네가 뭔데?” 이렇게 돼 버려요.

만물이 그 발아래 복종케 하시고 또한 만물 위에 뭐가 있습니까? 만물 위에 교회 머리로 주셨느니라. 누구를? 예수님을, 만물위에 교회니까 교회가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세상을 발아래 둔다는 말입니까? 안 둔다는 말입니까? 둔다는 말이거든요. 그게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하는 말이 내가 니 반석위에 뭘 세우리니 뭐가 이기지 못한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다. 이기지 못한다는 말은 음부의 권세가 패배한다는 말이고 그러면 성좌의 위치에 교회가 세워진다 이 말 아닙니까?

교회는 결국, 승리자의 집합되죠. 승리된 자의 집합이잖아요. 승리된 자의 집합인데 그 승리가 누구한테 온 승리에요? 교회 머리되신 예수님의 승리를 분여받은, 공급 받은 거예요. 나뉘어져서 공급받은 거예요. 그것을 은사로 받은 거예요. 예수님의 능력에 의해서 세상을 다스리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내 능력으로 주님한테 예뻐 보이려고 내 능력으로 세상을 다스리니 세상은 이게 내 능력인지 주의 능력인지 우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요? 몰라요? 아니까 요게 어디서 또 주님을 빙자해서 네 능력을 발휘해 하고 도로 누구에게 가요? 도로 주님 발 밑에 있는 그 악한 세력이 우리를 이겨버리죠. 다니엘에 있는 말처럼 이 세상 권력이 성도를 이겨 버리니까 성도는 어떻게 됩니까? 패배 하겠죠.

그 패배한 것이 뭐냐? 성경에서는 뭐냐 하면 주님 보시기에 제대로 네가 자리를 찾아왔구나 하면서 그것을 승리로 본다 이 말이죠. 와, 진짜 어렵죠.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온 말입니다. 성도가 죽으면서 하는 말이 ‘그래 너 나 이겼다!’ 이 소리하고 죽는다는 거예요. 체포돼서 죽으면서 ‘아, 드디어 나는 승리했구나!’ 이런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3장에 보세요.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런 구절 기억하십니까? 승리하는 방법이 뭐라고요? 죽을 지경까지? 아니에요.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죽어버리면 승리도 날아가잖아요. 뭔가 죽음 직전까지 가야 되는데 애들 19명 구하고 선생님도 빠져 죽었는데 그 보상금 누가 받죠? 자기가 살아서 귀신이 받습니까?

사람은 생각해요. 어쨌든 저쨌든 죽으면 끝, 죽으면 패배라는 거예요. 이런 것도 기어이 살아남아야 좋은 날을 본다는 겁니다. 그게 승리입니까? 예수님 보세요. 예수님의 승리할 때는 언제 입니까? 다 이루었다가 언제 입니까?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해서 다 이루었다 했습니까? 아니면 돌아가실 때 그런 이야기했어요? 돌아가실 때 그 이야기를 했어요.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집합이 교회라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서울 의존교회140613b (교회의 충만)―이 근호 목사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교회란? 이미 정해 져있어요. 교회란 만물을 지배하고 있는 상위집단, 이미 딱딱 정해 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상태는 이미 고정된 상태에요. 이미 상태 자체가 확정된 사항입니다. 확정된 사항이 실제로 이 세상에서 움직일 때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형식으로 되풀이해서 이것이 적용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만물을 지배했다 할 때에 우리가 멀찍이서 그것을 관람을 한다, 관찰을 하게 되면 아, 주님께서 저기 마귀를 지배하고 있구나! 사진하나 찍자! 찰칵, 이렇게 저 같으면 그야말로 고정된 것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맞는데 우리가 발밑에 지배를 받는 그 발밑에 같이 들어가 있다면 사진 찍을 수 있는 위치가 우리에게 확보가 안돼요. 주님이 저기 계시고 마귀가 지배하고 있구나! 이렇게 확보되는 것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왜 주님이여! 자꾸 내 뜻대로 안되게 하십니까? 이런 식으로 우리가 지배를 받는 거예요. 왜 적들은 이기고 우리는 심지어 우리 목숨까지 위태롭고 위태로운 정도가 아니고 어떤 신자는 죽임을 당하고 죽으면서 아, 나는 이겼다 되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죽으면서 아, 힘없구나! 이런 소리 안하고 솔직하게 힘없다 하면 될 것을 가지고 죽으면서도 나는 주여! 죽음으로서 승리했습니다. 이런 되지도 않은 소리를 내 뱉을 때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부정하게 되는 겁니다.

에이, 주님께서 세상을 지배한다? 에이 아니잖아! 성경에서 에베소서 1장에서 괜히 사도 바울이 한 마디 툭 던져 보는 건데 실제 현실에서는 주님이 지배한다? 아니죠? 그렇죠? 아니죠? 이렇게 되는 겁니다. 1980년 5월 18일에 광주항쟁이 하는데 그때에 거기에 진보적 계열의 기독교단체가 뭐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멍텅구리 하나님이고 혀 잘린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귀머거리 하나님이다. 왜? 저 못된 전두완 군부 독재에 의해서 아무 죄 없는 젊은 청년들이 총칼에 죽어 나갔습니까? 국민의 세상과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될 군대가 오히려 그 독재자의 앞잡이 끈을 사수하겠다는 정권력에 빠진 그 독재자의 앞잡이 하면서 죄 없는 국민을 죽이는데 있어서 이 정의로움이 광주에서는 오히려 불의가 승리하는 그 모습을 볼 때에 하나님은 어디 있냐? 이겁니다. 하나님 어디 있어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그래서 나온 노래가 하나님은 혀 잘린 하나님이고 소용없는 하나님이다. 무능력 하나님이다. 라고 비양되듯이 노래를 불렀어요. 가사를 보면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거창하게 여러분은 광주 항쟁까지 가지 마시고 여러분이 돈 빌려준 202호에서 이사 가면서 돈 2만원 떼어 먹고 갔을 때 살아계신 하나님을 어디서 찾습니까? 돈 떼인 사람한테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맞아요? 저렇게 내 돈 2만원 떼어 먹고 도망가도 벌 안 주는 하나님이면 우리가 무슨 재미로 교회 다니고 무슨 재미로 하나님 믿어요?

커닝하는 학생이 공부 잘하고 착실한 학생은 꼴찌하고 세상에 아부하는 사람은 승진하고 못하고 인간은 착해도 승진 못하는 이런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어디서 찾아요? 그것도 하나님의 정의가 강같이 흐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까? 아모스 말씀처럼? 그래서 사람들은 진짜 말만 정의가 아닌 진짜 정의가 살아있는 교회를 사람들은 꾸역꾸역 만들어 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게 좌파교회에요. 우파가 아니고 좌파교회에요. 만들기 시작하고 그러면서도 그들은 불의한 세대에 대해서 언급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 모든 원인은 나부터 주님한테 눌려야 돼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의 처나 자식이나 가족이라도 나 앞에서는 미워하고 심지어 네 목숨까지 미워하고 나를 따라오라는 그 말씀에 우리가 눌려야 돼요. 그 말씀에 기가 눌려야 되고 내가 알아서 눌릴 수는 없어요. 그러나 주의 말씀이 그 말씀 가지고 누르게 했다는 것, 방석 저 끝에서 털면 누가 복음 14장 25절 가지고 흔들어 데면 그 여파가 눌리기 싫은 나에게도 그 말씀이 덮쳐질 때 우리는 그것이 말씀의 섭리가 되며 그것을 교회라고 이야기 합니다.

내가 이룰 수 없었는데 내가 왜 이렇게 말씀에 발현된 현상이 왜 나를 가지고 주께서 다른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나를 가지고 말씀이 말씀됨을 증명하는데 왜 나를 활용하느냐? 그 활용이 누가 복음 14장뿐만 아니고 에베소서 1장 22절 23절도 지금 이야기하는 거예요.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이것이 성경에서는 고정되어 있죠. 하지만 현실 속에서 이것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복종됐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복종된 상태가 보고 싶어서 우리는 멀찍이 내 자리를 피해서 다른 자리에서 카메라 들고 복종 잘하고 있는 내 모습을 찍고 싶은 충동을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오늘 본문을 봅시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아무 거나 한번 보세요. 여기 8절에 보면 “딤전 3:8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 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집사는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여러분에게 물어봅시다. 여러분, 더러운 이익을 탐했을 때가 즐겁습니까? 이익을 탐하지 않을 때가 즐겁습니까? 문제를 내고 보니 상당히 어려운 문제를 냈는데, 정답은 둘 다 즐거워요. 사람이 남들이 죄라고 지었다고 여기는 것을 지을 때도 즐겁지요. 그런데 그게 죄인지 알고 짓고 싶지만 내가 당황하지 않고 천천히 끊었을 때 주어지는 그 쾌감은 흔히 죄를 지었다는 쾌감보다 더 우세합니다. 그게 향락의 법칙이에요.

우리가 절제하고 자제해서 오는 향락은 죄도 아니지만 흔히 죄지었다고 여겼던 그 즐거움보다도 더 큰 즐거움을 우리한테 제공합니다. 여기 빠져 버리면 사람은 절제하는 그 재미로 살아요. 아~ 이것은 마약보다 더 셉니다. 프로포플 보다 더 센 거예요. 그 즐거움이 마약보다 더 세요. 점점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고 남이 하지 않는 난코스를 점점 더 개발해서 코스를 밟아나갑니다. 남들이 양반발 기도 할 때 자기는 꿇어 앉아서 기도 해야 돼요. 왜? 양반기도 해서 이미 얻었던 즐거움은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똑같이 하면 동일한 양의 쾌감을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더욱더 더 심한 자기 관리에 나설 수밖에 없어요.

그야말로 초대인들처럼 기둥위에 올라갑니다. 기둥위에 올라가서 거기서 소변 대변 해결하고 거기서 양식도 해결하고 60미터 기둥위에 올라가서 혼자 도를 닦을 겁니다. 그래서 제가 주일 낮에 설교 끝에 뭐라 했습니까? 도를 닦거든 100% 이단이라 했죠. 도 닦는 사람은 100% 이단입니다. 그게 즐거움이에요. 그게 있어야 세상을 마음껏 욕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왜 세상은 나처럼 착하지 않느냐 이 말이죠. 마음껏 욕할 수 있어요.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잡고 그 현장에서 죽이지 예수님한테 왜 끌고 옵니까? 그 당시에는 누가 자기의 라이벌이기 때문에? 유대인의 라이벌이 그 당시에 누구에요?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을 꺾어버리는 거예요. 빼도 박지도 못하는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결국은 그게 뭡니까? 모든 법이라 하는 것은 무엇과 연관되어 있어요? 내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이며 잘난 존재이며 내가 하나님께 복 받을 만한 그만한 자격이 있는 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세상의 모든 활동들을 제시하는 거예요.

사람이 사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관심받기 위해서 살아요. 관심을 끌기 위해서 살아요. 선교사들이요? 선교사들이 왜 선교사 가느냐? 관심받기 위해서입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지향하고 나를 쳐다보고 나를 남한테 찾아지는 사람 되기 위해서 사는 겁니다. 세상에 가장 슬픈 순간이 언제이냐 하면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불러주지 않는 순간입니다. 그야말로 다섯 자로 이야기해서 산장의 여인, 아무도 찾지 않는 일종의 사회적 자살이죠. 찾을 때는 기쁨을 누리다가 그래도 찾지 않을 때는 이제는 날 찾아봐라를 만들어 내는 즐거움을 일부로 본인이 만들어 내요.

날 찾아보라고 일부로 더욱더 못 찾는 곳으로 숨어 들어가요. 일본의 젊은 사람들이나 한국의 젊은 사람들이 자진해서 직장 갖기를 포기하는 사람들 특징입니다. 위대한 존재가 여기 있음을 너희들이 알아봐라! 처음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너희 위대한 존재가 여기 있음을 스스로 알렸는데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약이 올라가지고 약이 왜 오르지요? 나 이렇게 잘났는데 바보 같은 세상이 왜 이렇게 어리석어서 이 잘난 존재를 왜 못보고 지나가느냐 이 말입니다.

개척 교회하는 목사 우울증, 정신병에 안 걸리면 천만다행입니다. 특히 사모님, 우리 목사님 너무 훌륭한데 아무도 찾아주지 않네? 그게 주님한테 굴복당한 모습입니까? 오히려 그렇게 될 때 차라리 이렇게 하세요. 바로 네가 그런 인간을 네가 미워할 만하네! 누구든지 자기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내게 올수 없다는 그 말씀, 우리가 그 지경에서 비로소 무엇을 발견하느냐? 내가 나의 판사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개과천선이라는 드라마 보면 나오잖아요. 얼마나 난 변호사입니까? 대단한 변호사 아닙니까? 얼마나 법적으로 대단한 존재입니까?

바로 그런 것을 감안해서 오늘 디모데전서 3장 6절을 보세요. 참 중요한 말씀이에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교회를 언급하면서 목회자, 감독을 언급하고 집사를 언급하면서 이런 사기꾼을 조심하라 저런 사기꾼을 조심하라 이것은 되는데 여기에 마귀까지 동원해야 된다는 그 이유에 대해서 여러분 아셔야 돼요. 왜냐 하면 지금 교회는 고정되어 있어요. 교회는 누가 뭐래도 남을 위해서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이 교회의 자리는 변함이 없어요. 확정된 거예요. 하나님, 교회를 높여주세요. 새삼스럽게 건의할 필요도 없어요. 이미 확정되었어요. 에베소서 1장에 제가 남겨뒀지만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하시는 자의 충만이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진짜 성경을 누가 쉽다고 이야기했습니까? 만물의 충만, 충만을 위한 충만, 이게 무슨 말입니까? 충만 곱하기 충만입니까? 충만 더하기 충만입니까? 만물을 충만케 하신자의 충만, 이게 무슨 뜻입니까? 물론 충만 이라는 사람을 제가 본적도 있습니다만 그 사람들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김충만, 박충만 아닙니다.

충만 위에 충만은 충만한 자위에 또 충만이 또 있어야 된다는 말이 되거든요. 이게 무슨 뜻인가? 여러분이 감당하기 어렵겠지만 이 부분을 설명해야 되겠어요. 이 설명을 안 하고서는 감독된 자 집사된자 하면서 사단, 마귀의 이야기가 개입된 이유를 우리가 놓치는 수가 있어요. 이 세상은 존재의 바다에요. 바다는 뭐로 되어 있지요? 물방울로 되어 있지요. 존재의 바다,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물방울 같은 사람들이 모였다가 흩어지고 만났다가 튕겨나가고 튕겨나가서 자기 자리 따로 차지하다가 거기서 또 따로 이동하고 그 자리에서 크게 키우다가 세상의 모든 것은 그냥 N극과 S극이 만나서 튕기고 튕기다 원하면 만나고 또 튕기고 이런 무작위한 충돌의 여파가 잠시도 쉬지도 않고 계속해서 일어나는 바다입니다.

물방울을 계속 튕기면서 바다를 이루잖아요. 이 세상은 사람들과 사람 플러스, 동물, 식물, 광물들 이런 것들이 계속 만나고 튕기고 하는 그것이 세상이에요. 이 세상을 달리 표현한 길은 없습니다. 이것을 뭐라 하느냐 하면 있는 것들의 집합이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니까 있는 것들을 있게 한 그것은 어디 있느냐? 그 해바라기, 코스모스, 장미, 사람 그리고 다람쥐, 그 중에서 다람쥐를 있게 한 것은 그 중에서 어느 것입니까?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어이 다람쥐야! 너 어디서 나왔지? 내가 너를 만들지 않았는데 너 어디서 나왔지? 몰라요. 어이 코스모스야! 내가 너를 안 만들었는데 너 어디서 나왔지?

분명히 있는데 눈을 닦고 다시 봐도 있는데 컵이 여기 있는데 컵은 사람이 만들었으니까 되지만 분명히 있는데 그 있음이 어디서 튀어나왔느냐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그 있는 것이 계속 있습니까? 나이 많으면 없어집니까? 없어지죠. 죽으면 없어지죠. 그래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없는데서 있는 게 나온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기독교적이에요? 이게 복음입니까? 이거 복음 아니거든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말씀드렸는데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고 철학입니다. 이 철학은 유대교 묵시문학에서 처음 나왔어요. 이것은 복음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 안 받아도 철학자들도 다 이야기하는 겁니다. 있음은 어디서 나왔는가? 없음에서 나왔다! 왜? 결국은 있는 것도 어디로 사라지기 때문에? 없음으로 사라지게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로 사라지죠. 무에서 유가 나왔다고 보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유는 무로 돌리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모든 있음, 광물이 있음, 여기 달팽이가 있음, 지렁이가 있음 이 모든 있음의 바탕에는 뭐가 되느냐 하면 없음을 바탕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없음이 나중에 나온 게 아니고 처음부터 인간은 출산할 때부터 죽음을 바탕에 깔고 인간은 결국은 살만큼 살다가 신에 의해서 인간은 없어진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이거 알면 구원받습니까? 이것은 마귀들도 알고 있습니다. 이 존재의 바다에서 모든 것은 사라지기 때문에 이것은 전부 다 허무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있음과 허무만 남지요.

자, 묻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서 찾습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모든 있음은 누구와 관련되어 있다고 했죠? 예수님과 관련이 있죠. 그러면 교회에 봉사를 못하게 하는 세력은 뭐를 노리겠어요? 뭐만 관련성을 끊으면 되는 겁니까? 세상이라 하는 것은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다는 것은 허용되는데 뭐가 안돼요?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먼저 있고 예수님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목회자가 있고 목자가 있고 집사가 있고 우리가 있다를 예수님과 연계 시키는 것에 대해서 사단이 그냥 둘까요? 설쳐 될까요? 설쳐 되지요. 학생들 학교 보내 보세요. 학교에서 예수님 이야기합니까? 아니죠. 학교에서 뭐라고 합니까? 너 공부 안 하면 굶어죽는다고 하죠. 학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한결 되어 있습니다. 네가 공부 안하면 돈 못 벌고 돈 못벌면 굶어 죽잖아요. 학교에서 마지막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네가 현재 존재하더라도 어디로 사라집니까? 결국은 네가 사라진다. 그러면 사라지는데 늙어죽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일찍 안 죽으려면 활동해야 되겠죠. 활동한다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누가 나로 하여금 자꾸 죽게 만든다는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사람이 50억 60억이 있다, 논다, 일한다? 어떻게 됩니까? 해외여행 다니면서 놀겠지요. 그런데 은행잔고가 돈 2만원 있다면 뭐라도 하지요. 자꾸 뒤에서 귀신이 따라와요. 내 다리 내놓으라고 자꾸 죽음이 따라 오니까 죽으라고 앞으로 내 빼는 거예요. 있음은 무엇과 연관되어 있어요? 나를 죽이는 없음과 연관되어서 살아가는 거예요. 거기서 예수그리스도고 뭐고 다 필요 없어요. 예수 믿는다고요?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이 임하셔가 아니라 내가 지금 살고 자 하는데 능력 있는 예수님이 나 사는데 돈 좀 보태달라고 예수 믿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예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중요한 거예요. 내가 살아남는 게 성공이에요. 내가 죽어버리면 실패되니까 자꾸 쫓기는데 심지어 꿈속까지 쫓겨요. 꿈의 내용이 뭡니까? 낮의 연장입니다. 낮에 쫓겼던 것이 밤까지 따라와서 자꾸 쫓기는 겁니다. 아이고, 죽을 뻔 했다! 꿈속에서 주제가 뭡니까? 아이고, 절벽에 떨어져 죽을 뻔 했다! 이게 충만 위에 충만 입니까? 주님은 “무”자를 빼요. 주님은 “무”없음 “무”자리에 무엇을 집어넣어버리느냐 하면 “충만”을 집어넣어 버립니다.

내가 일부로 했지롱~ 네가 태어난 것도 내가 일부로 태어나게 했지롱~ 이렇게 나와요. 뒤에 롱이 중요해요. 예레미야 1장 네가 모태로부터 선지자로 택하였지롱~ 보이는 세계를 유지하다가 난감한 상태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욥이에요. 욥은 세상의 모든 것은 나의 정당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세상에 모든 것이 주어졌다고 보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이렇게 착하게 된 것은 주님의 은혜, 주님의 덕택이라는 겁니다. 듣는 우리가 기분이 이상하죠. 분명히 안 맞는 말 같은데 반박이 안 되죠. 왜 반박이 안 될까요? 우리가 평소에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욥과 욥의 친구들을 싹 따져보면 다 한 통속이에요. 전부 다 항상 마지막에 내세우는 것은 나는 어떻다? 나는 악하지 않고 나는 착하다는 겁니다. 욥은 착한데 왜 벌이 왔습니까? 이야기하고 친구들은 네가 우리보다 더 악하기 때문에 우리보다 더 심한 고생을 한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결국 욥은 이 의문점을 어디 까지 갖고 나오느냐 하면 의문점을 하나님께 기도 하는 형태로 이야기합니다. 기도가 뭐냐 하면 사는 살만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데 왜 하나님은 자꾸 내 정당함과 의로움의 합당한 보상과 조치를 왜 안 해 주십니까? 라는 것 때문에 기도 하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착한데 건강해야 되는데 왜 자꾸 나보다 악한 사람이 많은데 왜 착한 나를 왜 이렇게 비실비실 자꾸 아프게 하십니까? 욥이 따로 없네요. 욥1, 욥2, 욥3, 욥4 ……. 이것을 뭐라고 보느냐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에서 당황스런 일을 주님께서 발생 시킵니다. 우리가 구축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납득이 안 되고 앞 뒤가 안맞는 원인 결과가 연결이 안 되는 일들을 유발시켜 버립니다. 욥의 주제가 뭐냐? 연결이 안돼요. 내가 고난 받는 이유를 따로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이 더더 답답해요. 차라리 나쁜 짓해서 매맞으라고 하면 차라리 속이나 시원하지 이유가 없는데 고난이 온 거예요. 그러면 뭐가 문제가 된 겁니까?
욥의 문제가 뭡니까? 욥의 문제가 뭐냐 하면 욥이 구축한 세상 자체가,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한 그 자체가 문제가 된 겁니다. 제가 아까 존재의 바다라고 했죠.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의 바다, 반짝반짝 빛나는 물결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죠. 그 반짝거릴 때 그 반짝거리는 것, 하나하나가 다 물방울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 눈앞에 나오는 특히 여기 신곡시장에 가 봐요. 제가 끝마치고 오면 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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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727건 중 3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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