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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8 - 동일성(종과주인)강의잠언

[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8 - 동일성(종과주인)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8 - 동일성

14,05,19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이제 시작하겠는데, 오늘은 교재 36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여기에 대한 적절한 예가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나옵니다. 소위 '달란트 비유' 라는 게 나오지요.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등장을 하는데, 열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주인의 말을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지만,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잔소리로 듣습니다. 즉 자아가 경각심이 아니라 건성으로 들은 겁니다. "주인이 없으면 내 마음대로 살 거야" 라는 식의 태도입니다.

(마 25: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마 25: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마 25: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마 25: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마 25: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마 25: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마 25: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마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마 25: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마 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마 25: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마 25: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마 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마 25: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마 25: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마 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마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 종의 비유 !!

여기에 소위 '달란트 비유' 라는 게 나오는데,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등장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 달란트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주인이 준 것인데, 그러니 달란트라는 것은 주인의 요소이고, 받은 사람은 이미 주인데 묶여져있는 입장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달란트 비유' 라고 하기보다는 '종의 비유'로 보고 싶다는 것이다.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 한 달란트를 받았다고 할 때, 그것을 제대로 이해한다고 하면 "당신은 누구의 종이 되고 싶어요?" 라고 묻고 싶은데,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의 종이 되고 싶어서 환장하겠어요" 라는 사람에게만 이 본문이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 현대인에게, 누구의 종이 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런데 개인의 존엄이 강조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누구의 종이 된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데, 오히려 그런 종에서의 해방이 곧 민주주의 혁명인데 말이다. 즉 "이 사회가 왕이니 귀족에게 얽매이지 않고 누구나 동등하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쟁취하려고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있었고, 그 이전에 미국에서 1776년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영국 본토와의 전쟁에서 승리해서 독립을 쟁취하게 되는데 말이다. 이것이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누구의 종이 되겠다" 라는 것은 박탈을 의미하는데, 상실감이고 말이다. 하지만 요즘 현대인들은 공무원이 잔소리만 해도 고소하고 하는데, 그러면 현대인들도 인간이고 조선시대 사람들도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복지담당 공무원에 자기에게 혜택을 주지 않았다고 테러를 가하기도 했는데,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쌍놈이 양반에게 복종하는 것이 왜 그렇게 영광스럽고 자부심까지 느끼느냐는 말이다. 서로가 같은 인간이면서 말이다.

왜 그렇게 되는고 하니, 쌍놈은 누군가가 자기에게 지시하고 명령을 할 때 안심하게 되는데, 즉 그렇게 복종하게 될 때 자기 마음의 편안함을 얻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어떠한가? 누군가가 자기에게 간섭하고 건드리면 그야말로 참지를 못하는데, 같은 인간인데 어떻게 이렇게 차이가 나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는 그렇게 종으로 훈련을 받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의 경우에도 보면, 그 당시에 잘난 사람은 따로 있고, 또 못난 사람도 따로 있다는 말이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사는데, 그야말로 요지경 속이라는 것이다(ㅋㅋ).

* 질문 - 그 당시 분위기가 그런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바로 교육인데, 물론 분위기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사람은 그런 분위기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분위기를 따라간다는 말이다. 만약에 어떤 집의 가장인 아버지가 성형외과 의사라고 하면, 자녀에게도 그것을 시킨다는 것이다. 꼭 성형외과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의사라는 직업을 고집한다는 말이다.

그러한 분위기를 네 글자로 '자본주의' 라고 하는데, 즉 돈이 있는 자가 성공했다는 분위기라고 하면, 그 사람에게 돈이 얼마나 많은지, 그것을 가지고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시장에서 통하는 '보이지 않는 손'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 자체가 하나의 상품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이다.

◈ 종의 특징 - '내 것이 없어' !!

여기 마태복음 25장의 비유라고 하는 것은, 종의 입장에서 이미 주인에게 받은 것이 있다는 것인데, 즉 주인의 요소가 자기를 그만 점령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종은 자기 것이 없는데, 그게 종의 특징이란 말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종의 비유를 언급하시는 것은, 주인이 이 세상에 대해서 알지 종은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면 종은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이 어떻게 끝이 나고 돌아가는지, 그것은 철저하게 주인이 관장하는 주인의 고유권한이고, 종은 제대로 된 주인에게 칭찬만 받으면 "니 팔자는 핀 팔자다" 라는 것이다. 어떻게 들으면 기분이 좋은 말인데, "주인 하나 잘 만나서 영생을 얻는다" 라고 하면, 괜찮은 장사가 아니냐는 말이다.

사람이 스스로 살아가는 것도 좋지만, 현대인이 혼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유발하는지 말이다. 자영업자들을 한번 보라는 것이다. 자기 사업이랍시고 얼마나 머리가 아픈지 모르는데, 심지어 편의점 하나를 해도 24시간을 해야되는데, 밤에는 강도의 위험도 무릅쓰고 말이다. 그러니 차라리 회사에 취직해서 월급을 받는 것이, 그것을 '따박따박' 이라고 하는데, 매달 따박따박 돈만 챙기면, 그것보다 더 편한 것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물론 승진을 하게 되면 책임이 뒤따르지만 말이다.

◈ 따박따박 !!

우리가 여기 길에 있는 교통순경을 보고 세월호 사건을 책임지라고 하지는 않는데, 해경이라고 해도 간부급이 되어야만 그런 소리를 듣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만 따먹으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수월한 길이 있는데, 왜 그렇게 복잡한 구조로서 제도를 바꾸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귀족가문의 집사가 되어서 따박따박 월급을 받고 양식을 제공받아서 살아갈 수 있는데, 나름대로 같은 급끼리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말이다. 농토라든지 다른 문제는 귀족이 알아서 하고, 우리는 월급만 받으면 되는데, 그러니 이게 얼마나 편하냐는 것이다. 그러니 종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이 어떻게 되고, 어떻게 끝나는지, 그것은 여기 마태복음 25장의 종의 비유에서 보면, 그것은 오직 누구만 아는 것인가? 주인만이 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인이 먼 곳에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종은 주인이 왜 그렇게 먼 곳으로 출장을 가야만 하는지,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쓸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 알려고 하지 말라고 믿고 맡겨라 !!

여기서 정리해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알려고 하지 말라고 믿으라는 것이다. 즉 '맡기라' 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주인의 일에 있어서 일부가 되는데, 어제 낮 설교시간에 초반부분에서 이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다.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주전체의 일부인데, 즉 구석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부라고 여기지 않고 독자적인 구역을 정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노심초사를 하는데, "이번 일은 실패하면 안 돼!"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전체를 관장하시는 주인을 안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분이 주님이라고 한다면, 그 주님의 종으로서 자기가 밑은 역할을, 그 임무를 구조라고 했는데, 그렇게 존재에서 구조로 바뀐다는 것이다.

여기서 존재는 마치 빠찡코 구슬과도 같은데, 한번 잡아당기면 자기 나름대로 깨어져서 도망을 가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모아놓아도 모아져서 하나로 녹아진 것이 아니라, 구슬이 하나 하나마다 각자 다 자기의 개성이 있어서, 잡아당기면 깨어지면서 다시 구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의 하나라고 하는 것은, 하나 됨이 아니라 잠시 발을 들여놓는 것인데, 즉 이용해먹는 것이란 말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모든 것이 다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포기한 적도 없고, 자기가 손해보는 일은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 주인은 없고 주인들만 있는 세상 !!

그러니 이 세상 자체가 어떠한가? 주인은 없고 주인들만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어제 낮 시간에 "이 세상은 만인의 투쟁의 장이다" 라고 했는데 말이다. 어느 놈이든 간에 붙었다 하면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라고, 그렇게 싸울 태세부터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 자신이 하나의 점, 그것을 '원자적' 이라고 하는데, 물리학에서 제일 작은 것을 원자라고 하는데 말이다.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것 말이다. 혹은 '원소적' 이라고도 하는데, 그러니 자기 자신이 하나의 점처럼, 즉 "마지막 이것만은 손대지 마!" 라고 하면서 버티는 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돌아다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작으면서도 주인 행세를 하려고 하니 인생이 얼마나 피곤하겠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얼마나 피곤한지 모르는데 말이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 운명을 몽땅 다 맡길 제대로 된 주인이 없다는 것이다. 믿는 대상이 없는데, 그러니 결국 믿을 놈은 누구밖에 없는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보험도 여러 곳에 들고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부모가 자식을 키워놓으면 자식이 자기 노후를 돌봐줄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요즘은 그런 자식도 없고 그런 부모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경상도 말로 표현하자면 '지줌지줌' 인데, 녹취하는 양반도 하동 사람이라서 듣고 해석하는데는 별 문제가 없지 싶은데, 고향이 울산인가요? 굳이 번역하면 '제각기 제각기'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살면 편한 것 같기는 한데, 그런데 자기 인생이 어디로 가고, 어떻게 끝장이 나는지, 그리고 죽고 난 다음에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옳은 길인지, 지즘지즘 다 자기가 옳은 길이라고 하니, 그것은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구원파의 유병언은 자기가 주장하는 게 진리라고 하고, 또 김성수도 자기 주장이 진리라고 하고 말이다.

그렇게 지즘지즘 모두가 다 진리라고 하니, 주님께서 사슬로서 탕자와 강도와 세리와 창기를 하나로 묶는 그 한 마음은, 그것을 바로 대립되는, 즉 버림을 받아도 마땅하다는 그 생각, 즉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하는 고백이 현대인들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 종에게는, 주인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야 !!

지금부터 이런 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는데, 아무튼 달란트를 받았다는 것은 주인의 요소가 들어왔다는 것인데, 그러니 종은 주인이 멀리 가고 없어도 종이라는 것이다. 바로 옆에 있던지, 멀리 타국에 가서 15개국을 돌아다니던지 간에 말이다. 종은 주인의 요소가 포함되어있는데,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눈에 주인이 보이지 않으니, 자기 주인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주인이 누가 진짜 종이고 누가 배신자인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을 하시고 잠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으신 것은, 그것은 바로 누가 가짜인지, 그것을 들통내기 위한 주님의 전략이란 말이다. 주님의 상습적인 수법인데, 즉 "있을 때 잘해" 라는 것인데, 하지만 없을 때도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잠언서를 하고 있는데, 이것이 지혜와 관련되어있다는 것이다. 지혜에 대해서 소문만 들었지, 실제로 지혜가 어떤 인물로 등장했다고 할 때, 우리는 그 지혜를 지혜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너도 여러 가지 지혜 중에서 하나겠지" 라고 하면서 참고로 할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가 배척을 했는데, "예수 당신은 아니야. 아직까지 우리의 지혜가 아니야"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밀침을 받아서 죽게 되었는데, 그렇게 배척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혜가 왔을 때, "지혜이다, 아니다" 라는 판정을 자기들이 내리겠다는 것이다.

◈ 여기는 미국, 이근호 목사 나오세요 !!

지금부터 조금 어렵더라도 양해를 해주시면 고맙겠는데 말이다. 오늘 아침에 전화를 한 통 받았는데, 미국에 계신 분인데 말이다. 자기들이 김성수 목사가 자살을 하고 난 다음에 그 목사의 동영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그런데 교인들 사이에 의견이 둘로 갈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우리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생중계로 본 사람들에 의해서 말이다. 그래서 교회가 둘로 쪼개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 쪽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는 자살하지 말라고 해놓고 정작 본인은 자살하고, 그러니 그게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래서 자살한 이후부터는 그 목사의 그 어떤 설교도 짜증이 나고 배신감을 느낀다" 라는 것이다. 반대쪽에서는, "그래도 김성수 목사 정도의 설교가 없지를 않느냐?" 라고 하고 말이다. 그러자 이쪽에서는 "우리교회의 이근호 목사 설교를 들어봐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쪽의 이근호 목사의 설교가 김성수 목사의 설교보다 더 옳다는 것인데, 그런데 정작 제가 궁금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들이 정말로 진리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나와야 하겠는가? "누가 옳은가?" 라고 판정을 내리기 이전에, 그들의 관심사 자체가 "무엇이 복음이고, 무엇이 진리인가?" 라고, 거기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 이근호 목사의 설교는 아직 요단강을 건너지 못했어 ??

그런데 그게 아니라, 저쪽에서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이근호 목사는 아직 요단강을 건너지 못한 설교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디가 문제인데?" 라고 하니, "그것은 몰라. 하지만 김성수는 요단강을 건넜는데, 이근호는 요단강을 건지 못했어"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녹취 '구' - 저는 "이근호 목사의 설교는 요단강을 건지 못했어" 라는 주장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건너도 너무 건너서 문제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이런 이야기를 수십 수백 번을 들었는데, 그것을 제가 그때 그때마다 일일이 다 지적을 해주었는데, 그것이 오늘 지혜와 관련이 되니 다시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우선 가장 쉬운 것부터 해보면,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1번, 성경 속에 풍덩 뛰어들어서 보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2번, 제3자가 되어서 심사하고 관찰할 수 있는 입장인가? 라는 것이다.

당연히 1번이 되어야 하는데, 2번이 되게 되면 여기서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성경에서 정보를 캐내서 자기를 절대자아로,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고 한다는 것이다.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이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후유증이라는 말이다.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전화를 받기도 이전에 예언을 했는지 몰라도 말이다.

◈ 선악과 사건 이후에도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인간 !!

제가 다시 한번 강조를 드리는데,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을 결코 무심히 흘려보내지 말라는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그 속성이 우리 육신에 여전히 남아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여기에다 크게 쓰겠는데, 즉 '동질성', 혹은 '동일성' 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누구의 동일성인가? '나의 동일성' 이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복음을 알기 이전의 '나'와, 복음을 알고 난 이후의 '나'가, 그렇게 '나1'과 '나2'를 동일성, 혹은 동질성, 그게 서로 같은 의미이니 앞으로 동일성으로 통일을 하겠는데 말이다. 그렇게 자기의 동일성을 유지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복음을 알기 이전과 이후가 서로 같은 '나'이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가? 성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성경을 보는 '나' 자신이, 성경에서 어떤 정보를 캐내어 가지고, 예수를 믿기 이전의 '나'와 예수를 믿은 이후가 '나'가 얼마나 동일한지, 그 동일성을 유지해서, 자기가 그리던 절대자아, 즉 자기 구원이 어떻게 확보가 되는지, 관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하나님'의 차이점은?

제가 어제 낮 시간에 설교하기를,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하나님의 차이점이 무엇이라고 했는지, 혹시 기억이 나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너무 빨리 지나가서 다들 잊어버렸지 싶은데,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대립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대립관계에 말이다. 그런데 보통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자기가 여기에 존재하면, "누가 나를 존재하도록 만들었지? 하나님이 만드셨구나" 라고 해서, 그러면 하나님은 저기에 존재하시는데 말이다. 그렇게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같은 존재로서 고유한 속성으로 연결이 되기 때문에, 대립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대립이 말이다. 그냥 섬기면 되고, 바치면 되는 문제이지, 대립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즉 가인의 제사라는 것이다.

◈ 처음부터 제사가 두 종류 !!

창세기 4장을 보면 처음부터 제사가 두 종류인데, 즉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가 있는데 말이다. 그 두 가지 제사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가인은 정성을 다해서 신에게 드렸다는 것이다. "신이시여, 받으소서!" 라고 말이다. 그러니 이게 무엇이 문제냐는 말이다.

그런데 아벨은 무엇인가? 제사 자체를 인해서 결국 누가 죽는가? 제사를 드린 본인이, 즉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후속 조치에 의해서 이 세상에서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다. 아니 제사를 드리면서 자기가 죽으려고 드리는 사람이 있느냐는 말이다. 그런 경우는 없는데, 그러니 진짜와 가짜의 차이가 여기서 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벨이 제사를 드리고 죽었다는 것은, 진짜 하나님과 관계가 되면 대립요소가 그 인생에 새겨지게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종이니 말이다. 아까 달란트 비유에서 뭐라고 했는가? 주인이 없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그리고 주인만 있다는 것이 아니라 종에게는 무엇이 삽입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주인의 요소가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그 주인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는데, 그 주인은 뭔고 하니까, 그리스도의 아버지, 즉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약속에 의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것이 대립요소인데,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어떻게 되었는가? 죽임을 당했는데, 그렇게 죽임을 당한 요소가 종에게 그대로 삽입이 되면 우리는 탕자이고 세리이고 창기라는 것이다. 즉 "지금 죽여도 당연합니다. 마땅합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게 될 때, 그것은 "나 여기에 있고, 나의 동일성을 유지한다" 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 결국 '나는 나다' !!

그러니 김성수 목사의 설교를 찾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어떻고 하는 것은 다 핑계이고, 계속해서 무엇을 유지하려고 하는가? "나는 나다" 라는 것을 유지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티가 여기서 난다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 하겠다" 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정보라도 얻어서 자기의 동일성을 유지해야 하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기가 주인이지 결코 종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전에 십자가 마을에서 논쟁을 할 때도 똑같은 이야기인데, 예수님을 증거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예수를 믿는 자기 자신을 증거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최종적 목표가 되고 말았는데, 즉 "내가 이렇게 잘 믿는 것을 좀 알아주세요" 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게 무슨 십자가 마을인가? 자기 마을이지 말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을 잘 알아서, 그것을 활용해서 "나는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하겠다는 것인데, 그러니 처음부터 노림수가 따로 있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간에, 제아무리 그런 이야기를 해도, 결국 마음은 엉뚱한 곳에 가있었다는 것이다.

◈ 천국으로 올라오세요 !!

어제 낮 설교에 굉장히 복잡한 요소가 많이 들어있었는데, 참 오후설교이지 싶은데 말이다. 그게 무슨 내용인고 하니, 사람들이 모여서 지옥에 왔는데, 그런데 주님이 오셔서 "저기 유재성 씨, 천국으로 올라오세요" 라고 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부럽겠느냐는 것이다. 어제 그분이 오셔서 그런 예를 들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분이 어디 자기를 천국에 넣어달라고 하면서 손을 들고 잔뜩 기대를 했는가? 주님은 자기가 기대하는 인간을 구원하는, 주님은 그런 식으로 일을 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분도 우리처럼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알아서 데리고 가신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들은 지금 잔뜩 기대를 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살아야하니 말이다. 얼마나 큰 차이냐는 것이다. 자기가 구원을 받고자 기대를 했었는데, 드디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예상이 가능한 것이고 전혀 돌발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것도 그만 율법화가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 율법은 예상이 되기에 !!

그렇게 율법은 예상이 되는데, 즉 "내가 예수님을 믿고 나면, 그 이후에 내 모습은 이렇게 된다. 나는 앞으로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여자도 끊고 모두 다 끊는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 현재 자기의 기대치가 동일성으로 쭉쭉 뻗어나기서, 마치 엿가락이 늘어지듯이 말이다. 그렇게 늘어진 것이고 확대된 것이란 말이다. 잘린 것이 아니고 말이다.

성령이 오지 않으면 이렇게 자기의 주인노릇이 계속해서 유지되고, 반면에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물론 그래도 우리가 주인노릇을 하는데, 육체 자체가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두고 "야, 이것이 바로 죄였구나" 라고 하면서, 자기 죄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시편 51편에 나오는 상한 심령이고 말이다.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김성수 목사를 지지하는 쪽에서 하는 말이 "이근호 목사의 설교는 요단강을 건너지 않았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매일같이 죄인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이런 짓거리는 무엇인가? 요단강을 건넌 사람과 건너지 않은 사람을 관찰하고 있는데, 구경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어느 편에 설까? 여기에 설까? 저기에 설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런 노림수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의 속성에 맞다는 것인데, 그 속성이 바로 절대자아, 즉 선악과를 따먹으면 신처럼 된다고 하는, 그 요소에 부합이 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아마 이것도 녹취가 되지 싶은데, 이것을 그대로 '김성수 목사 설교의 문제점' 이라고 해서 올려도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요단강을 건넜다고 하는 것과 건너지 않았다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동일성'은 중요하기 때문에 여전히 여기에 적어놓겠는데 말이다. 이것은 그쪽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교회의 교인이나 십자가 마을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저도 그렇고, 여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 전(前)과 후(後) !!

인간은 이렇게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이것이 '전(前)과 후(後)' 라는 것인데, 얼마 전에 여기에 대해서 강의를 했지 싶은데, 다시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인간에게 '전과 후'가 생각하는 것은, 시간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게 우리 안에 들어있는데, 그렇게 우리 안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를 기준으로 해서, 과거는 '전'이 되고 미래는 '후'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 물어보겠는데, 이런 시간의식이 우리 자신을 위해서 있는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위해서 있는 것인가? 당연히 주님을 위해서 있는데, 그런데 이들은 누구를 위해서 활용했는가? "가만히 있어봐라. 요단강 이전을 택할까? 이후를 택할까?" 라고 하면서, 자기가 시간의식을 활용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를 의식한 것인가? 자기가 자기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활용한 것이란 말이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7일만에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그것이 창조된 인간을 위한 7일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위한 7일인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것이 골로새서에 보면 나와있는데, 즉 예수님을 위한 7일이라는 것이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개혁주의 신학은 곧 구원파 !!

그런데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을 주셨는데, 그래서 이것을 잘 활용하게 되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개혁주의 신학 자체가 그 목적이 정해져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구원을 받는가?" 라고 하는 구원론이란 말이다. 완전히 구원파이고 그 끝은 유병언인데, 즉 금수원 신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개혁주의자들도 금수원에 가서 검찰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반대데모를 해야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성경에는 "니가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성경이 어떻게 예레미야의 구원이 목적이고 이사야의 구원이 목적이겠느냐는 것이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예수님만이 목적이라는 말이다.

지금 이 이야기를 30년 동안이나 하고 있는데, 성경은 우리의 구원이 목적이 아닌데, 그렇게 자기가 구원을 받아서 천국에 가면, 그 천국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중심이니 말이다. 자기가 공을 들여서 차지한 면류관을 미쳤다고 벗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 공로가 날아가 버리는데 말이다.

우리가 면류관을 벗어서 주님에게 드리면, 주님께서는 "아이쿠, 참 착하구나. 내가 다시 줄게. 이것을 가지고 가라" 라고 하시겠는가? 자기는 종이니, 그야말로 무익한 종이니 그냥 할 도리를 다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종이 왜 주인 행세를 하느냐는 말이다. 하여튼 선악과가 독하기는 엄청 독했던 모양인데, 완전히 약물중독이라는 것이다. 아주 지독한데, 그런 상태에서 자식을 낳고, 또 다시 낳았다는 말이다.

◈ 예수님을 믿어도, 여전히 '나는 나다' !!

다시 하겠는데, 우리는 전체를 모르는데, 그래서 전체서 일부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는 아니고 일부지만, 그 일부나마 자기를 절대화라는 구역을 따로 만들겠다고 시도하는 것이 우리의 육적인 본성인데, 그것은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을 믿어도 여전히 있다는 것이다.

다만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밖에 모르는 육신은 죽을 때까지 가는데, 그래서 남의 자식보다도 자기 자식이 더 중요한데, 당연한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할 이유가 없지 싶은데 말이다. 남의 이빨보다 자기 이빨이 아픈 것이 더 중요하고, 인사돌을 먹어봐야 소용도 없고 말이다. 그것은 건강식품이라는 말도 있는데 말이다.

◈ 그런데 성령께서 책망하시니 !!

아무튼 그렇게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밖에 모르는데,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성령이 오시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 책망을 하시는데, 그것을 잠언서의 지혜로 책망하신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책망을 받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책망을 받을 때, "나는 종에 불과하구나. 나는 주인이 아니구나.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주인 행세를 했구나" 라고 하면서, 그렇게 받아들이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내 증인이 되리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런 이야기를 하면, 꼭 어디 아프리카를 가야되고 러시아를 가야되는 줄로 아는데, 하지만 자기 집구석이 세상 끝이고 선교지인데, 그러니 가기는 어디를 가느냐는 말이다. 굳이 남의 나라에 왜 가느냐는 것이다. 저기 베트남에 가봐야 중국과 싸움밖에 일어나지 않는데 말이다. 여기에서도 얼마든지 영적 전쟁을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멀리 가야 영적 전쟁을 하는가? 무슨 그런 환상을 꿈꾸느냐는 것이다. 물론 교회가 그런 환상을 유발시켰지만 말이다.

그러니 너무나 간단한 문제인데, 전과 후가 말이다. 이미 우리는 주님이 보시기에 죽은 자인데, 다시 말해서 요단강을 건너와 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자기만의 특수한 시간의식을 가지고 외부의 것을 상대한다는 것은, 그것은 마귀가 만든 자리이지, 주님은 이런 자리를 주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후회를 하든 말든 간에, 그것이 주님이 주신 역할임을 믿게 되면,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라는 말이다. 그것이 성도의 자리이고 성령의 자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전과 후가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이미 창세 전에 구원을 받았는데 말이다. 시간이 만들어지게 이전에 구원을 받았는데, 무슨 전과 후가 있느냐는 것이다.

◈ 우리는 고마울 뿐 !!

그러니 우리 자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 되는데, 우리는 분명히 종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육신으로 인해서 자꾸만 종에서 탈퇴해서 나름대로 주인행세를 하는 것이 우리 몸의 행태에 잘 맞으니까, 그러니 자꾸만 주인노릇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을 말릴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은 십자가의 영인데, 그래서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를 책망해주시니까 얼마나 고마우냐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오심은 인간의 자아와 의논하지 않는데, 그런데 우리 인간의 자아는 어떠한고 하니, "성령이 오게 되면 나는 이렇게 변한다" 라는 것까지도 계산하게 되는데, 물론 그렇게 미리 계산해도 소용이 없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계산을 비켜서 오시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그런 계산은 다 헛방이라는 것이다.

◈ 사건과 '나' !!

그런데 인간은 왜 이렇게 무엇이든지 계산을 하는고 하니까, 이것을 '자아', 혹은 '주체' 라고 하는데,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늘 미안한데 말이다. 이렇게 어려운 것을 강의를 하는 사람으로서 또 해야하니 말이다. 그래서 얼른 하고 지나가겠는데 말이다. 자아, 주체, 혹은 '나'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 사건에 의해서 '나' 라는 게 그때 그때마다 정립된다는 것이다. 사건에 의해서 말이다.

◈ 옛날 옛적에 봉화에서 !!

저의 아내와 가끔 봉화를 가게 되면 여전히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제가 과거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봉화에 있었는데, 그때 저는 거기에서 교사를 하고 제 아내는 유치원 선생님을 했는데 말이다. 그렇게 거기서 달콤한 신혼생활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 아내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어느 한 곳에 있게 되면 다른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거기에만 집중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여보, 우리 봉화에서 평생을 살자"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이것은 잘했고 못했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성격자체가 그렇다는 말이다. 어떤 한 곳에 있게 되면, 다른 곳에 가게 되면 어떻게 될지, 그런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 일에만 매진하고 집중한다는 것이다. 조금 특이한데 말이다.

그렇게 제 아내는 봉화에서 계속 살기를 원했는데,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제가 그만 신학교를 가는 바람에 제 아내는 저의 뒷바라지를 하고 저는 신학교를 다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 어머니가 "우리 아들은 목사다" 라고 자랑을 하면, 제가 아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정작 신학교를 다닐 때 공납금을 비롯한 모든 돈을 자기가 다 마련해주었는데 말이다(ㅋㅋ).

◈ 봉화 사람들은 참 촌스럽다 ??

아무튼 그렇게 해서 봉화를 떠나서 떠돌아다니다가 지금 여기까지 흘러오게 되었는데, 그런데 가끔 봉화에 가게 되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봉화 사람들은 참 촌스럽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아는 사람들이 거기에 살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그렇게 촌스럽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번 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봉화에 있지 않고 이렇게 대구에 있으니 봉화 사람들보다 덜 촌스럽게 보이는데, 그렇다면 촌스럽지 않은 '나' 자신은 누가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건이 있어야 하는데, 만약에 제가 서울 강남에 가서 살 있지 있다고 하면, 물론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 말이다. 만약에 그렇게 되면 뭐라고 하겠는가? 봉화 사람들을 촌스럽다고 하는 대구 사람들이 얼마나 촌스러운지 모른다는 것이다(ㅋㅋ).

그러니 제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새로운 사건에 의해서 그때그때마다 자아를 새롭게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자아, 주체, 그것은 사건에 따라서 새롭게 만들어지는데, 그런데 그것은 공통점이 있다는 말이다. 그게 바로 항상 자기 변명과 자기 정당성인데, 그것이 바로 아까 이야기한 '동일성' 이라는 것이다.

◈ 나는 반드시 살아남아만 해 !!

다시 말해서, "세상은 죽어도 나는 죽을 수 없고, 이 세상은 꺼져도 나는 반드시 살아남아야만 한다" 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은 그 어떤 사건이 터져도 끝까지 남아있는데, 심지어는 이것이 전혀 안 되면 나중에 어떻게 하는가? 자살을 하는데, 즉 끝까지 자기 자신으로 버티겠다는 것이다. 이 세상을 탓하면서, 거울에 글씨까지 써가면서 말이다.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의 특징이 바로 이것인데, 약을 먹고 자살하든, 목을 매여 자살을 하든, 혹은 늙어 죽어도 그것도 역시 일종의 자살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늙어 죽어가면서도 인간은 자기 잘남을 이야기하는데,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게 아니고, "나의 절대성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피해를 입었는가?" 라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오히려 "주여, 왔노라. 보았노라"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가 승리자로 자체하는 것, 그것은 바로 자기의 육신뿐인데, 즉 성령을 받은 적이 없기에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다. 그렇게 곱게 곱게 관리한 자기 육신을 장렬하게 자기 품으로 다시 회수하면서 "역시 나는 보람차게 잘 살았노라. 끝!",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신자이고, 그런 자들의 모임이 교회냐는 말이다. 평생을 자기가 주인노릇을 한 것인데, 그것이 무슨 종이냐는 것이다. 지금 숨쉬는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말이다.

◈ 목회는 목사가 하는 것이 아니기에 !!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주위에서 걱정을 하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목사님,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닌데, 그렇게 설교를 해버리면, 우리교회의 경우도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다 떠나고 나면, 그러면 목회는 도대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 목회를 잘해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목회를 잘하고 설교를 잘했다" 라고 하는, 자기의 절대 자아를 증빙해주기 위해서 자기를 옹호해줄 사람은 모여달라고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모여서 교회가 되면 그게 과연 주님의 교회이냐는 것이다. 자기 교회이지 말이다. 왜 그런 사기를 치느냐는 것이다. 우리도 언제 물에 빠져서 죽을지 모르는데 말이다. 그렇게 해놓고 주님 앞에 가서 머리를 긁적이면서 "어떻게 살다보니까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면 될 문제이냐는 것이다.

◈ 용서는, 용서하시는 분의 기대치에 부응해야 !!

어제 오후에 분명히 그런 설교를 했는데, 즉 "용서라는 것은, 용서하시는 분의 기대치에 부응하지 않으면 용서가 되지 않는다" 라고 말이다. 우리는 "긍휼히 여겨주세요. 용서를 해주세요" 라고 하지만, 주님은 무엇인고 하니, "아직도 니가 주인노릇을 할래?"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그럴 때는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면 용서를 받고 난 뒤에 주인노릇을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고 하니, 그때마다 성령께서 우리의 신분자체가 변환된 것을 확인해주시는 차원에 책망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령의 나타나심은 우발적이기 때문에, 그게 사건이 되면서, 그 사건이 오게 되면 무엇이 발생하는고 하니, 그때그때마다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새로운 자아성이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제 낮 시간에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것을 반복하게 된다고 했는데, 그런데 이렇게 반복하는 것을 두고서 저쪽에서는 "요단강을 건너지 못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요단강을 건넌 사람은 더 이상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나온다는 말이다.

◈ 그것이 바로 유벙언, 윗치만 리 !!

하지만 그것이 바로 '유병언' 인데, 그리고 지방교회의 '윗치만 리' 라는 말이다. 자기들은 그들에 대해서 공부를 하지 않아서, 자기들이 그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데, 하지만 그것이 바로 구원파이고 박옥수이고, 유병언이고, 또한 지방교회라는 것이다. 권신찬이고 말이다.

검찰에서는 유병언이 양심이 있으면 출석을 하지 싶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들이 무슨 양심이 있는가? 김일성이 무슨 양심이 있느냐는 것이다. 양심이 있으면 미얀마에 가서 폭탄을 터트렸겠느냐는 말이다. 물론 박정희도 그렇고 말이다. 그러니 검찰이 마귀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데, 물론 같은 편이니 어떻게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유병언에게 양심을 말한다는 것을 말도 안 되는데, 세월호 선장도 그렇고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살아남기도 바쁘니 말이다. 그러니 그런 자들에게 양심을 운운하는 태도는 마귀를 너무 무시하는 처사인데, 물론 우리도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들이댄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혜택이 아닌데, 그러니까 "너희들, 군지렁거리지 말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귀에 걸려든 사람은 어떻게 하는가? 자기를 건드리면 자꾸만 '으르렁, 으르렁' 하는데, 자기가 무슨 엑소도 아니고 말이다. 아마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지 싶은데, '엑소' 라는 아이돌 그룹에 그런 노래가 있다는 것이다(ㅋㅋ).

그러면 이것을 잠언서에는 뭐라고 하는지, 교재 37페이지를 보자.

** 잠언서 마지막에 이런 말씀이 나오는데, 31장 29절과 30절입니다. 여기서 무엇과 비교가 되는고 하니, '고운 것'과 '지혜', 그리고 '아름다운 것'과 '지혜'가 서로 비교가 됩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 라는 겁니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고운 것, 아름다운 것을 마다할 자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요. 없습니다.

(잠 31:29)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난다 하느니라
(잠 31: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 '고운 것'과 '지혜'가 서로 대립되면서 !!

여기에 보면 '고운 것'과 '지혜', 그리고 '아름다운 것'과 '지혜'가 서로 비교가 되는데, 이렇게 비교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서로가 같은 편이 아니라는 말인데, 즉 서로가 대립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수님이 어디 꽃미남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따랐는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대하면서 이런 유혹거리로 인식하게 됩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내용이 조금 어려운데 말이다. 쉽게 말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이여, 지혜를 주옵소서" 라고 하면, 그렇게 우리 자아의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면, 그 안에는 무엇이 포함되는고 하니, 아름다운 것과 고운 것도 들어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것을 예상하면서 구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고운 것도 헛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 라고 지혜가 이야기를 해버리면, 우리가 기대했던 지혜와 막상 우리를 책망하는 지혜가 서로 노선이 같지 않다는 것이다. 자기는 지금 지혜를 만나려고 부산으로 가려고 하는데, 그런데 지혜는 광주에서 오고 있다는 것이다. 노선이 다르면 구원이 되지 않는데, 그러니 노선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바꾸니 지혜가 나서서 우리를 책망하신다는 말이다. 즉 "너희들이 지혜, 지혜라고 말은 하지만, 하지만 그 지혜 속에는 아름다운 것, 고운 것, 그리도 돈도 들어있다. 그렇지?" 라고 하면서, 그렇게 지혜가 지적질을 해댄다는 것이다.

◈ 대립이 없으면, 화해도 없어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는데, 우리는 곱게 받는 입장에 되지 못하고, 이미 우리가 품고 있는, 즉 동질성인데 말이다. 그런 우리의 동질성이 품고 있는 것을 파내면서, 그렇게 아프게 파낸 자리에 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파하는 가운데 말이다.

그래서 어제 낮에 "대립이 없으면 화해는 없다" 라고 했는데, 즉 우리 자신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요단강 이전을 고를까? 이후를 고를까?" 라고 할 입장이 되지 못하는데, 우리가 그렇게 고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잘못된 노선에 자리를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 주인은 주인이고, 나는 나다 !!

아까 달란트 비유, 즉 종의 비유를 이야기하면서 뭐라고 했는가? 우리는 종인데, 그런데 주인이 그만 빠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달란트를 받았는데, 그러면 우리의 시간적인 요소를 생각하게 되면, "이전에는 주인이 주셨다. 그런데 그 주인이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옛날에는 주신 것이지만 받아서 챙긴 지금은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자기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바로 게으른 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니가 진짜로 주인의 것이라고 여긴다면, 주인이 맡긴 것을 그냥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은행에 가지고 가서 이자를 받아도 된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이 게으른 종은 어떻게 했는가? 그냥 땅 속에 묻고 말았는데, 그것은 바로 "내 것은 내 마음대로 하겠다" 라는 태도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일을 하면서 당신을 주인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라는, 즉 "나는 나입니다" 라는 '나'의 동질성이란 말이다. 주인을 있을 때는 종인 척을 하지만, 주인이 떠나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라는 것인데, 이게 소위 '달란트 비유' 라는 말이다.

(녹취 '구' - 게으른 종의 경우에, "주인의 것을 챙겨서 내 마음대로 하겠다" 라고 하기보다는, "나는 주인의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방치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땅에 묻은 것인데, 이것은 요즘으로 보면 은행에 가서 성의도 없이 이자도 거의 없는 보통예금에 그냥 넣어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으면 펀드라도 들었지 싶은데 말입니다. 같은 의미인가요?)

◈ 교회와의 동질성을 유지하려는 인간들 !!

그런데 지금 시중에 나와있는 주석을 보라는 것이다. 달란트 비유를 이렇게 해석하는 주석이 있는지 말이다. 물론 있을 수 있는데, 그러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는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런 식의 주석이 아니라 "교회에 시간을 바치고 돈을 바쳐라" 라는 것인데, 왜 그렇게 주장하는가? 시간과 돈을 교회에 바침으로서 교회와 동질성을 유지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개인 동질성만이 아니라 교회라는 집단 동질성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것을 절대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이름을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절대화시키는데, 그리고 십자가 마을을 절대화시킨다고 하면, 그것이 곧 이단이라는 것이다. 즉 구원파이고 유병언이고 박태선이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자신을 현재 A로 간주하면서 A를 B라는 모델로 끌고 가고 싶을 때, 여기에 유혹을 받을만한 내용이 개입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큰 상급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A라는 지점에서 예상하고 기대했던 바 B라는 지점에 도달하고 싶은 겁니다.

◈ 'A라는 지점에서 예상하고 기대했던 바 B' !!

여기에 보면 'A라는 지점에서 예상하고 기대했던 바 B' 라고 되어있는데, 이게 중요한데 말이다. 여기 'A' 라는 지점에서 예상하고 기대했던, 그것이 미래이니 점선으로 그려보면, 그것이 'B' 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기대하면서 '믿습니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면 이 믿음 내용에 무엇이 포함되는가? "하나님, 제가 기대한 만큼 해주셔야 합니다" 라고 하는 자기 뜻이 포함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기도한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러한 전체가 바로 죄로 드러나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나는 'A' 라는 식으로 해서, 즉 십자가를 알고 복음을 알아서 'B' 라는 구원을 받았다" 라고 기대를 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그런데 진짜로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런 전체가 바로 이단이라고, 즉 죄라고 책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죄를 기대하거나 관찰하면 안 되고, 여기 안에서 실제로 사건화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상한심령인데 말이다.

◈ 다윗의 경우에 !!

다윗이 바세바의 아내와 간음하고 나서 나단 선지자가 찾아오기 이전에, 나단의 그런 지적을 몰랐겠는가? 다윗도 율법을 알고 있기에 당연히 알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자기 지식에 불과하고, 자기 인생 속에 하나님의 신이 개입해서 현재화가 되는, 그렇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즉 율법을 관찰한 것이지, 그 말씀 속에 풍덩 뛰어든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뛰어들어보니,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혹은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심령이구나" 라는 것이 실감이 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즐거운데,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우리를 거기 말씀에 집어넣어 놓고는 주께서 알아서 말씀을 지키는 사람으로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런 사건 속에서 우리 자신이 죄인으로 드러나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종으로 활용됨에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 자기 자신이 곧 해답 !!

그러니 여기에 무슨 요단강 이전과 이후가 있는가? 그야말로 말씀 속에 완전히 잠겨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인데, 매일의 삶이 주께서 말씀대로 하게 하시기 때문에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자신이 곧 해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해답을 구하거나 찾지 말고,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곧 해답이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렇다면 A라는 지점에서 바라보는 B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A가 아니라, 유혹을 요청하는 자기 탐심의 산물로서 B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충돌되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평소 자신의 얼굴에 불만을 느낀 여인이 있다고 하면, 이런 여인이 잠언을 대할 때 하나님을 상대로 무슨 흥정을 하겠습니까? "이 말씀을 제가 지킬 테니 제발 저를 미인으로 만들어주면 안 될까요?" 라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요구는 그냥 해소될 문제가 아닙니다.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 호락호락 던져질 인간이 아니기에 !!

그러니 여인의 이런 요구가 앞뒤가 맞지 않는데, 이것이 비단 잠언서 뿐만이 아니라 성경전체에 다 해당이 되는데 말이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하면, 우리는 "나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를 테니 구원해주세요"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이 되지 않으니 답답한데, 그래서 김성수 쪽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서는, 자기가 알기만 하면 구원이 되는 비법이나 정보를 수집하는데, 그래서 개혁주의는 위선이고 구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이 장난이 아닌데, 그렇게 호락호락 던져질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야곱의 경우에도, 야곱이 그렇게 많은 재산을 받았는데, 그리고 11명의 아들을 자기 힘으로 얻었다고 생각했겠는가? 그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신 것인데, 그러면 그렇게 주께서 주시니 관리와 유지는 누가 한다는 말인가? 당연히 자기가 해야한다고 여기는 순간에 누가 들이닥치는가? 하나님이 쳐들어오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축복은 내가 받았으니 그것은 내가 유지한다" 라고 하는 동일성, 그런 동일성은 하나님을 만나자마자 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야곱이 끝나고 말았는데, 이제는 야곱의 죄가 드러남과 동시에, 주님께서는 그 죄인을 교육자재로 삼아서 이스라엘의 본래 모습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을 사용하셨다는 말이다. 성도의 가는 길이 이러하다는 것이다.

◈ 주인에게 사로잡혔기에 조망할 수 있어 !!

예를 들어서, 참새가 지금 눈앞에 있는 자기 생존 문제에 집중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무엇이 내려오는 줄도 모르는가? 그만 솔개가 내려와서 채어서 가는데, 그러면 참새는 지금 자기가 공중으로 '붕' 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솔개에게 잡아먹히기 이전에 자기가 지상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참새는 그야말로 솔개에게 잡히는 줄도 모르고 눈앞에 있는 곡식만 주워먹을 생각만을 했는데, 그런 것을 계속해서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 본다고 해서 어디 요단강을 건너가지 않는 상태라는 말인가? 그게 구원이 되지 않는 상태냐는 말이다. 구원이 되었기 때문에 상세하게 계속 볼 수 있는데, "아하, 내가 바로 저랬던 자구나. 내가 바리새인이고, 내가 아간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숭배자가 곧 나구나" 라고 말이다.

그렇게 그 모든 것들이 다 조망이 되어서 위에서 본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본 영국, 프랑스, 대한민국' 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프랑스 작가의 사진집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이는데, 물론 자기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남들도 보인다는 것이다.

◈ 구원론이 아닌, 그리스도론으로 !!

그러므로 남들이 뭐라고 해도, 그것은 자기 눈앞에 있는 생존문제에 연연하고 구원문제에 연연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솔개에게 잡혔다는 것은 그리스도론이고, 눈앞에 있는 곡식에 연연하는 것은 구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원파이고 말이다. 그러니 자기 구원론에서 그리스도론으로 가야하는데, 즉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복음이 바로 그것인데, 즉 '예수 안' 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아버지가 딸에게 훈계를 해도 예수 안에서 해야하는데, 주님의 종으로서 말이다. 주인의 요소가 삽입된 종으로서 말이다. 그러니 이것을 하려고 하지 말고, 왜냐하면 주님은 지금도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고 계시는 것을 성령이 충만할 때 확인만 하면 되는데, 그것이 곧 "아하, 그렇구나!" 라는 것이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따라서 A와 B 사이에 제삼자인 C가 늘 개입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C에게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제삼자인 C를 강하게 밀어내게 됩니다. 남의 일에 주제넘게 간섭하지 말라고 밀치게 됩니다. 내 노선에 들어서지 말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육신이기에 A에서 B로 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예수를 믿던 믿지 않던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해도, 돌아서면 "오늘 오후에 빨래를 말려야만 하는데. 어떻게 하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백 날을 해도 A에서 B로 갈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그 다음에 C가 개입된다는 것이다. 그 C가 누구인고 하니, 바로 주님이고 성령님이라는 말이다.

◈ 개입하는 'C' !!

그렇게 성령이 개입하는데, 그런데 여기서는 구약이기 때문에 지혜라는 말이다. 지혜가 와서 책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처음에 강력하게 반발하는데, 하지만 택한 백성이라고 하면 반발할 수 없도록 하시면서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는 것이다.

여기 A와 B 사이에 무엇이 온다고 했는가? C가 오는데, 그렇게 A와 B 사이에 C가 개입하게 될 때, 그 C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지금부터 이야기해보자는 말이다. A는 현재이고 B는 미래이니 점선으로 표현이 되는데, 즉 미래의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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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727건 중 30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