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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4. 5. 23) 2강자유게시판마가복음

광주 강의(2014. 5. 23) 2강

이름 : 서경수(IP:118.35.140.244)

광주 강의(2014. 5. 23) 3-2

마가복음은 신약이고, 신약이 있다는 것은 앞에 구약이 있다는 말입니다. 구약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함께 했던 민족이 멸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멸망 후 성령이 오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무에서 창조했는가, 죄에서 창조했는가? 둘 중 어느 쪽이지요? 무에서 창조했다는 것은 구약에서 나오죠. 혼돈과 어둠 가운데서 창조했다.

그렇다면 무에서 창조한 것을 쥐고 있으면 이것은 신약 시대의 사람이 아니고 구약 시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되겠지요. 그러면 신약 시대의 인간상은 어떤 것입니까? 인간은 무에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죄에서 창조한 것입니다. 인간 근원이 무가 아니고 죄가 인간 근원이 됩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멸망했다는 것을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합니다.

율법이 더한 것은 죄를 더욱 죄 되게 하는 거예요. 죄를 더 지으란 말이 아니고, 죄가 계속 나온다는 것은 처음부터 죄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확인하도록 율법은 준 거예요. 우리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만들었기에 존재한다고 여기지요. 대자연은 누가 만들었는가? 하나님이 만들었다. 이것이 구약적 사고방식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고 대자연을 만들었으면 여기에서는 멸망이라는 것이 나올 수가 없어요. 아버지가 자식을 낳았으면 자식을 책임져야지 ‘이제 태어났으니까 나가 죽으라.’ 이럴 수는 없어요. 창조주가 피조물을 만들어 놓았으면 그 만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데 멸망했단 말이지요.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었다는 사실을 다른 민족은 몰라요. 그런데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내가 너를 만들었다. 그러니 너희들은 내가 준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하시면서 십계명을 주셨어요. 그런데 이 계명을 못 지키면 어떻게 됩니까? 지키면 복이 오고, 못 지키면 저주가 오지요.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에 머물고 싶어요. 그런데 여기에 율법이 주어져서 못 지키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니까 황당한 거예요. 이런 것을 인간이 요구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왜 이런 부담을 주십니까? 인간은 인간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첫째 시간에 인간의 자기애를 말씀드렸지요. 인간은 누구나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먹고 마시고 일하고 하는 모든 것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전혀 그런 말씀이 없어요.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인간과 인간들이 생각하는 인간은 너무도 달라요.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냥 흙이지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가 사람이라고 우리는 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사람이라고 우겼던 자들의 언어체계 때문에 우리가 그들과 어울려 살다보니까 우리 자신을 사람으로 여기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애굽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애굽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빠져나올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빠져나오면 어디로 갑니까? 갈 곳이 없는데. 우리는 살아도 애굽에서 살고, 죽어도 애굽에서 죽어야 합니다. 애굽 외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은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것을 알 필요도 없고 관심도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개입했다는 것은 결국 돌발적인 사태며 사건이라고 했지요.

출애굽 사건 이후에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에는 스프링이 달려 있는데, 출애굽하듯 율법이 튕겨 나와야 돼요. 튕겨 나온다는 말은, 돌발적이고 예상 못할 일들이 또 다시 일어나는 겁니다. 홍해를 건너왔던 사람이게 두 번 다시 홍해 건너는 일은 없습니다. 알랭바디우의 [존재와 사건]이란 책에 보면, “사건은 반복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요. 이것을 반복하게 되면 역사가 되는데 그 역사는 인간들이 자기 위주로 헤아렸기 때문에 그래요. 따라서 역사는 없다. 주체도 없다. 그러면 있는 것은 뭐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공집합의 연속이기에 있는 것은 없다.

지금 우리가 뭘 지킨다고 생각하는데, 지키는 것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폼을 내기 위해서 지키는 척하는 것이고, 성경에 나오는 말씀(율법)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말씀화 되는 겁니다. 율법이 왔을 때 우리는 마중 나가서 지키겠다고 했는데 그것은 율법의 취지가 아니고, 율법은 우리에게 침입한 것이고 덮쳐버린 거예요. 덮쳐버리면 우리가 지키든 안 지키든 간에 율법이 겨냥했던 그 방향으로 우리에게 결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아버지가 일본 영화를 좋아하셨는데, 제가 함께 보면서 사무라이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영화를 보면서 겁을 먹었어요. 사무라이들이 칼을 들고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여요. 율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겠다는 사람을 단칸에 베어버립니다. 이것은 율법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이 투입되면서 율법 본래의 목적을 스스로 달성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들이닥치면 말씀은 우리와 의논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말씀 본래의 목적을 말씀스스로 이루십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것은 구약에 나타나지 않고 신약에서 나옵니다. 구약은 율법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신약에서는 모든 말씀이 십자가에서 나옵니다.

십자가에서 말씀이 나옵니다. 말씀은 두 방향으로 갈라지는데, 지키면 복, 안 지키면 저주를 받지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근거로 해서 지키면 복을 받으니까 이것은 천국이고, 못 지키면 저주를 받으니까 이것은 지옥입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은 주님이 십자가를 진다는 그 시나리오에 따라 이미 만들어져야 되지요.

우리가 말씀을 초청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말씀이 쳐들어 온 거예요. 우리가 율법을 불렀습니까? 그냥 모세를 불러 율법을 주셨어요. 사람들은 오해했어요. “이 말씀 지키면 복 받겠다.” 율법은 지킨다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산사태처럼 쏟아져 내립니다. 그러니까 율법 지켜서 복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제사장이 제사를 지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흠 없는 제사를 드렸는데 그 제사장은 나중에 늙어 죽지요. 죽는 이유가 뭡니까? 죄 값으로. 제사장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율법대로 제사를 드린 그 죄로 죽는 거예요. 율법이 온 것은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함이라. 다른 말로 하면, ‘처음부터 너는 죄 안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진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율법과 인간(이스라엘)의 만남인데, 신약에서는 율법 안에 무엇이 있는가? 예수님 십자가 죽음이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숨겨진 마지막 비밀인데, 십자가를 통해서 이제 드러나게 하시는 것이 신약 성경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은 십자가 사건 안에 다 들어 있어요.

엄마는 드라마 보고, 아빠는 주식 상황 살피고, 아들은 숙제하고, 딸은 음악 듣고 있는 굉장히 단란해 보이는 가정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이들이 이런 일을 하면서 자신이 죄인인 줄 알겠습니까, 모르겠습니까? 모르지요. 이런 가정을 주께서 구원하시려면 십자가가 덮쳐야 되지요. 덮치게 되면 가정 전체는 사건화 되지요.

사건화 되면서 성령이 임하면 이 식구들은 주식에 관심 갖는 것도, 드라마 보는 것도, 숙제 하는 것도, 음악 듣는 것도 죄가 되고, 내가 존재하는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예상 못한 사건에 휘말리면서 네 식구는 십자가를 되풀이하는 가정이 되는 거예요.

십자가가 덮치는 것은, 아래층에 사는 사람이 층간 소음 때문에 찾아왔을 때 그들은 자기 일 다 버리고 침입자와 싸우면서 내 가정은 내가 지킨다고 할 때 이것이 바로 자기 의고, 우상 숭배입니다. 어저께 [가정의 달]이라고 해서 TV에서 ‘부부 10계명’ 이런 것을 말했는데, 이런 것은 이미 종교단체에서 다 주장한 것들입니다. 특히 미국에서 온 몰몬교 선교사들을 보면, 젊은 사람이 복장부터 행동 모두가 반듯하고 모범적이에요. 이들이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들에게 몰몬경만 건드리면 우상 숭배자로 돌변해 버리지요.

가족이 부부싸움하고 부모 자녀가 다투잖아요. 싸움하다가도 아래층 사람이 찾아와 언성을 높이면 갑자기 온 가족이 똘똘 뭉쳐서 내 가정을 지키는 거예요. 다윗이 이것을 알게 된 겁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남편을 살해했을 때 나단 선지자가 찾아왔지요. 선지자가 “이런 범죄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했을 때, “그런 자는 당장에 죽여야지.”라고 했어요. 왜? 이스라엘은 자기의 나라니까요. 그 때 나단 선지자가 뭐라고 했지요? “그게 바로 당신이다.”

이 순간 다윗이 얼마나 좋았을까요? 진작 이야기해주지. 나의 근원, 나의 뿌리를 평생 살면서 무슨 수로 알겠습니까? 간음하면 압니까, 살인하면 압니까? 사건을 통해 알려주십니다. 다윗이 하는 모든 행동들을 다 모아 바구니에 담으니까 그것이 주님이 일으킨 사건이며, 더 놀라운 것은 그 사건이 율법 완성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나를 이용해서 율법스스로 완성해 가는 겁니다. 말씀이 스스로 말씀 되게 우리를 활용한다는 말입니다. 지키긴 뭘 지켜요. 우리는 이미 주님 앞에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 활용당하는 그런 입장인데.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한 마디로 줄이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질문합니다.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무에서 유로 만들어졌습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들어졌습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들어졌지요. 이제 이해하시겠습니까?

세상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들어졌지요. 그래서 세상의 모든 철학자들은 결국 그리스도에게 무릎을 꿇게 하기 위해 각자의 주장들을 하게 하십니다. 이 시작이 마가복음입니다.

정리합시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것은 구약의 수준입니다. 신약에 들어오면 그리스도 체제이기에 우리는 무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죄에서부터 우리가 만들어졌어요. 죄에서부터 용서 받기 위해 만들어졌으면 구원 받고, 죄에서부터 저주받기 위해 만들어졌으면 저주를 받게 됩니다.

당황하지 말고 마가복음을 천천히 보면서 십자가로 가면 끝입니다. 깨끗하게 모든 것이 끝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십자가를 믿는다고요?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예수 믿는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진짜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를 믿게 되면 말씀을 보고 지키는 것이 아니고, 보는 순간 엑스레이 찍듯이 광선이 나와서 우리의 가슴을 찍어버리면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상한 심령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사건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 중심의 사건만 좋아하고 그것만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 깨달아집니다.

신약시대 성도는 나로부터 시작하지 않았음을 반복적으로 기억하는 것, 이것이 성령의 삶입니다. ‘그 때 운전 제대로 해야 했는데’ 생각하다가, ‘아하, 내가 잘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이 일으킨 사건이구나. 차에 탄 딸이 내 식구가 아니라 주님의 식구이지. 내가 또 우상숭배자가 되었구나.’ 깨닫게 되지요.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로부터 시작했지요? 그냥 ‘그분’이라고 합시다. 왜냐하면 언어로 규정하면 언어는 이미 타인의 욕망, 나의 과거 사용하던 욕망이 오면 입만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주의 이름은 함부로 안 불렀잖아요.

사도 바울이 주님을 이야기할 때 “내가 그리스도의 종 된 자다.”라고 합니다. 이처럼 성령 받은 사람은 자기를 이야기할 때 주님을 거론하고 주님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 그리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은 내 믿음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들에게 주의 이름을 자랑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내 구원을 위해 사용할 이름이 아니고 주의 종으로 쓰여지기 위해서 사용되는 이름입니다.

13절을 봅시다. “광야에서 사십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라고 했는데, 여기서 40일은 어디를 의식하는가 하면, 민수기 13장에서 정탐군이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모세에게 보고하기를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커서 올라갈 수 없다’고 했고, 이 불신에 대해 하나님은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해서 40년 동안 유리하게 될 것(민14:34)’을 말씀하셨습니다.

40일은 결국 인간이 주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믿지, 왜 못 믿었어?”라고 하는데, 그래서 성경 해석이 어렵다는 겁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믿지 못할 자임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못 믿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도저히 못 믿을 일만 발생시킵니다.

‘범사에 주님께 감사하겠습니다.’ 다짐하는 순간부터 감사할 수 없는 일만 터져요. 감사한 일이 생겨서 감사하라고 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감사할 일은 없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감사하라고 했고, 우리를 감사케 만드는 말씀 자체의 능력으로 감사케 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냥 사세요. 살다가 감사가 나오면 주님의 뜻인 줄 알고.

제발 자책하지 마세요. 자기 처벌을 하는 것은 자기애입니다. 이것을 라캉은 ‘주이상스’라고 했어요. 우리말로 하면 ‘흥분’입니다. 반성하는데서 오는 흥분, 희열. 사람이 그냥 즐거운 것을 즐기면 한계에 도달돼요. 그래서 그 때는 반대로 나가요. 자기를 때림으로써 나오는 기쁨이 있어요.

그래서 마지막 기쁨을 위해서 자살을 합니다. 최후의 기쁨을 인간은 남겨뒀어요. 죽음으로 누리게 되는 기쁨은 최후까지 숨겨두었다가, 더 이상 기쁜 것을 찾을 수 없을 때는 자살을 통해 자기애의 끝을 장식합니다. “자살했기에 지옥 같습니까?”라고 묻는 분이 있는데, 자살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병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나누는데, 병리적인 것은 두뇌에 문제가 생겨서 마치 장애자가 발걸음을 제대로 옮길 수 없는 것처럼 되는 것이고, 정신적인 것은 방금 이야기한 마지막 남은 카드, 나는 끝까지 내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한 거예요. 그래서 스스로 승리했다고 인정하고 싶은 거지요.

승리했다고 하는데 생각해 보세요. 인간은 누구와 싸우지요? 자기 자신과 싸워요. 그게 뭐냐 하면, 내가 되고 싶은 것과 거기에 미흡했던 나와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따져보세요. 내가 되고 싶은 것이 누가 원한 거예요? 타인의 욕망들이에요. 인간은 남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삼고 살아요.

인간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요. 남이 좋다고 인정하는 그 무엇이 발생해야 비로소 나도 욕망이 생겨요. 이 때 인생의 목표가 생깁니다. “나도 저렇게 되어야지.” 하면서 의욕을 가지고 희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인간이 우상숭배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주님이 십자가 지든 말든, 성령이 오든 말든 관심 없어요. 우리는 평생 우상숭배하면서 살게 될 겁니다.

그러면 구원 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이 바로 죄란 사실을 미리 알려줘요.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에 부합되는 인간을 만듭니다. 하나님 나라는 집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소 버릇이 나만 생각하기에 이런 인간은 천국에 못 갑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인간이 천국 간 적이 없습니다. 천국은 집단생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 살면서 집단을 생각하게 만드는 조치를 성령을 통해서 취하게 됩니다. 어떻게? 자기를 부인하게 만들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자기를 부인하면, 자기를 부인한 그 자기는 어떻게 됩니까? 자기 향유의 대상이 되지요.

자기를 부인했을 때 그 부인하는 능력이 나에게서 나온 능력으로 자기를 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항아리에 있는 물을 떠서 다시 항아리에 부으면 항아리 안에는 늘 그 물이 있을 뿐입니다. ‘나는 부족하다’고 하면서 다시 집어넣고, ‘나는 죄인이다’고 하면서 다시 집어넣고.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릇을 깨면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를 못 깹니다. 깨면 깬 자기를 또 챙겨요. 이것이 라캉의 ‘상징계’라는 겁니다. 좋은 것은 다 자기의 것으로 삼아요. 만약에 천국을 갔다고 하면, 천국 간 내 모습을 미리 당겨서 가져오면 이것은 착각이 되는 겁니다. 주님이 주신 사건에 의해 진짜 와장창 깨어져야 되는데, ‘깨졌다 치고, 당황하지 말고, 그래서 나는 구원 받았다. 끝.’ 이런 식으로 나와요.

살다보면 다 깨어지게 되어 있는데, 우리는 곱게 깨어지기를 원해요. 살살 깨지고, 안 아프게 깨지고, 욕 먹지 않고 깨지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러니 육으로 난 것은 육의 다른 버전일 뿐입니다. 성령이 오면, 그냥 살아도 ‘이것이 죄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나를 위해 투자하고 헌신한다는 것이 천국의 삶이 아니고 지옥의 삶이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거지 나사로가 거지라고 주님을 원망했겠어요? 원망 안 했어요. 왜냐? 지금 천국 갈 훈련을 하고 있기 때문에 천국 가는데 원망을 왜 합니까?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 내가 거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거지가 된 거예요. 내가 강도가 된 것은 강도가 되어야 하기에 강도가 된 것입니다. 창기가 천국 간다고 했지요. 이장우 감독의 [별들의 고향]에 창기가 나와요. 신성일 만나서 같이 살려고 하다가 헤어지는데, 얼마나 슬퍼요? 그런데 그 창기는 원망하지 않아요. “내가 당신에게 사랑받는 여자라면 이것으로 족해요.”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비록 내가 창녀라 할지라도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자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그 앞에서 내가 묻혀버리지요. 사랑이 덮치니까. 내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심판이 없고 모든 것을 용납하셨기에 주님께 그냥 감사할 뿐이지요.

이런 남편, 이런 아내를 만난 것이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이것이 바로 구원의 작업이었습니다. 이 자체가 말씀이에요. 말씀을 말씀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활용한 거예요. 창기와 세리로.

예수님은 40일을 광야에서 시험을 받았어요.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1:13).” 결국 구약은 구약대로 있으면서, 아파트에 네 식구가 있는데 네 식구라고 구원 받는 것은 아니고, 거기에서 사건이 벌어져야 되고,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 때 그들은 천국 가는 훈련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천국 가면 우리는 무조건 죄인이에요. 주 안에서 의인 되는 겁니다. 단독적인 나는 죄인이고, 주 안에서 비로소 우리가 의인이니까 절대로 나를 따로 내세우면 그것은 천국에 부합하지 않아요. 나는 죄인이지만 주님 때문에 구원 받았다고 해야 천국에 합당한 자입니다. 거지 나사로도 그렇게 했었고.

그런데 부자는 지옥에 가서도 자기와 자기 가족만 생각해요. 자기중심이지요. 천국 가는 훈련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그래요. 자기를 부인하는 훈련을 받지 못해서 그래요. 그러니까 1장 13-14절에서 예수님 홀로 성령 받고 홀로 출발하는 겁니다.

14절에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이 예수는 혼자 튀어나온 분입니다. 광야에서 사단을 만났지요. 마귀를 만나서 홀로 사단의 시험에서 이기시고 나오신 분이 갈릴리에서 복음을 외칩니다. 그 말씀을 사람들이 알아들었습니까? 당연히 못 알아듣지요. 제자들도 못 알아듣지요.

말씀을 못 알아들으니까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죠. 그런데 그 기적은 기적이 아니고 표적이에요. 기적은 인간들이 얻어 챙기는 것이고 표적인 그리스도 단일 체제를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세상에 사단이든 지옥이든 이단이든 전부 예수님의 단일 체제를 위해 만들어졌어요.

사고로 죽은 자들은 주님 위해서 죽어야 하고, 성도는 그것에 대해서도 범사에 감사해야 하고 그렇습니다. 자기중심에서 벗어나기 위한 훈련입니다. 내 새끼, 내 자식, 내 남편 이런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 땅에 태어난 것이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어쩔 수 없이 태어난 거예요.

14절에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님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전파되고 하늘에서 구름이 와서 예수님을 데려가고 끝났습니까? 지금 교회에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그러니까 회개하고 복음 믿자.”

그러면 구원 받습니까? 이것은 우상숭배자가 될 뿐이에요. 복음 믿었다는 사람, 회개했다는 그 자체가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게 못합니다. 그러면 십자가 지신 후 성령 주셔서 구원하면 될 일을 왜 미리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는가? 이것은 요한복음 2장에 나와 있지만,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런 모든 말씀을 통해서 인간들의 현 상태가 믿으려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배후 세력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표적입니다. 말씀하고 난 뒤에 기적을 줬을 때, 말씀을 이해 못했다는 증거가 표적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증거와 일치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제가 선지서를 둘로 나눠 설명했지요. 엘리야, 엘리사는 기적을 보여주는 선지자에요. 그런데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은 문서 선지자에요. 차이점이 뭔가 하면, 기적 선지자는 기적을 보여주는 거예요.

기적을 보여주는 것은 아직도 멸망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회개할 때마다 멸망을 연장시켜 주는 때이고, 문서 선지자 때에는 이미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미 문서로 확정되었어요. 그래서 나중에 멸망 후에 다시 문서를 봐라. 내가 말한 것이 틀림없이 이루어졌잖아. 이처럼 문서로 확정되었다는 말은 멸망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멸망 이전의 역사는 뭔가? 왜 그들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폭로하기 위한 시간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종말 시대입니다. 종말 시대는 이미 성경으로 확정되었어요. 누가 예수 안 믿는다고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이미 택한 자만 받고, 아버지께서 맡기신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구원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나서서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종은 주인의 일에 주제넘게 관여하면 안 됩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에요. 다만 지켜보시고 간섭하십니다. 세상을 복음으로 보세요. 그러면 그 사람은 바로 세례 요한이고 그 사람이 예수님의 종입니다. 세상을 그리스도 유일 체제로 보세요. 그러면 세상 돌아가는 것이 회개가 안 될 수밖에 없는 식으로 흘러갑니다. 흘러가면서 나도 마땅히 흘러가야 되는데 어떻게 예수님 십자가가 믿어지는지 주님께 더욱 더 감사할 뿐이지요.

그런데 15절에 “때가 찼고”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지금 이 때다.’라는 것입니다. 왜 이 때입니까? 재판할 때 판사가 등장하면 재판이 시작된 거예요. 임시적으로 재판을 순간순간 열어버린 겁니다. 세리와 바리새인 중에서 바리새인은 “저는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 하고 하루 세 번 기도했습니다.” 하니까, 재판장이 “너는 지옥!” 이렇게 판결하고, 세리가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했는데, 재판장이 “너는 천국!”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판결이 났어요.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했어요. 세상은 그리스도 유일 체제입니다. 교회가 이것도 모르고 자꾸 뭔가를 해야 되는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성경에 ‘~하라’고 했기에 해야 된다는 거예요.

성경에서 ‘~하라’고 한 것은 말씀 자체가 우리에게 덮쳐 와서 우리로 상한 심령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방사선이라고 보면 됩니다. 방사선이 비춰오면 우리는 온통 죄인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16절에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예수님 혼자 하시면 되는데 왜 제자들을 뽑습니까? 일손이 모자랐습니까? 아닙니다. 집단 구원 때문에. 12제자는 12지파 곧 이스라엘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애초부터 하늘나라는 개인 구원이 아니고 단체 구원입니다. 왜? 개인을 없애기 위해서. 왜 개인을 없앱니까?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 신이 되었어요. 둘이 있어도 상대를 이용할 뿐이지 상대에게 양보할 인간은 없어요. 부부가 100년을 살아도 한 몸 안 됩니다.

17절에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어부가 누구의 직업입니까? 베드로 직업이죠. 주님은 베드로의 직업인 어부를 그대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고기대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한다고 했어요. 이 말은 베드로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된다는 말이 아니고, 베드로는 어부 직업을 유지하되 어부 아닌 주님이 베드로의 자리에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도록 하시겠다는 겁니다. 주 안에서.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하도록 함께 일하겠다는 거예요. 세상 끝날까지. 마태복음 28장 24절에. 함께 있다고 했으니까 주님이 살아 있지요. 주님이 살아 있다는 말은 주님 식으로 해야 이게 진짜 주님이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뭡니까? 우리는 주님 식으로 살지 못했기에 늘 죽어지내는 거예요. 죽어있으면서 살아있는 주님과 함께 있기에 늘 죽어가면서 늘 살아있는 삶이 되는 겁니다.

살아있다는 말은 주님 식으로 살아있어야 산 것이지 그냥 광주나 대구에 산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늙어 죽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주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 살아있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게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식으로 사는 방식을 주께서 알려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사는 방식이 옳은 줄 여겼습니다. 이제는 내 방식 청산하고 주님 방식으로 올라 탈 그날까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 6. 13. 09:39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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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0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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