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06b 울산강의-출애굽기 32장 : 유사 메시아
20140606b 울산강의-출애굽기 32장 : 유사 메시아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40606b 울산강의-출애굽기 32장 : 유사 메시아
(강의:이근호 목사)
모세와 함께 있으면서도 애굽 생활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애굽으로 되돌아갈 생각만 했다. 그러면 그들이 생각하는 천국은 뭐냐? 애굽 같은데 애굽에서 원했던 것을 충족시키는 세상을 그들은 하늘나라로 본 겁니다. 사람이 사는 게 힘들잖아요. 그러니까 그 힘든 것을 제거해주는 이상 세계. 아마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이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내가 나를 사랑하는 그 내용을 절대로 하나님께서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거죠.
“하나님이여, 나는 이렇게 살고 싶고 이런 인간이 되고 싶고, 이런 인간으로 대우받고자 원합니다. 그것은 나한테 내가 너무나 사랑스럽게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여,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이상으로 사랑할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기대하는 세계는 바로 내가 기대하는 세계가 실현될 때 구체화 될 때 나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싶습니다.”라는 것이 그들이 우상성이었습니다. 방금 제가 길게 이야기했지만 간단하게 종교 또는 교회가 되는 겁니다.
성경을 펼치면 그것이 이스라엘의 내부에서 그런 것들이 주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다수는 그렇게 생각해왔어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초장부터 멸망해야 됩니다. 그런데 분명히 이스라엘은 우리와 똑같아요. 자기 야망밖에 몰라요. 그런데 다른 민족과 차이점이 있다면 그 대세 가운데서 뭔가 꿈틀거리는 게 있어요. 다들 그런데 다들 그렇게 하는 게 맞는데 뭔가 그것과는 대비가 되면서 고난 받고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면서 대신 희생하고 값을 치루는 다른 엔진이 가동되면서 용서받지 못할 자가 꾸역꾸역 용서받으면서 계속 인도함을 받는 거예요.
그 엔진부분이 제사법입니다. 어린양이 매일 아침저녁마다 우리 대신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누가 그걸 시켰느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하기에 일어나는 특이현상입니다. 그 특이현상이 우리 인생 가운데서도 날마다 반복돼야 돼요. 내 뜻은 이건데 이상하게 내 뜻대로 안 해주시는 그 고마움. 말이 이상합니다만 내 뜻을 좌절시키는 배려하심, 따스한 사랑, 나를 당혹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드는 그러한 깊숙한 개입, 이런 것들로 인하여 방향틀기가 되는 거예요.
그런 일이 일어나면서 반복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뭐냐? 주님은 이미 확정된 규칙대로만 움직인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도 우리의 아부, 뇌물, 재롱도 일체 받지 아니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의 원칙대로 자체적인 프로젝트대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거기에 우리는 종으로 말려들어간 겁니다. 마치 정미소에 무섭게 돌아가는 벨트에 말려 들어가면 획 돌아가잖아요. 우리도 마치 그런 발전기에 끼어들어간 거예요. 거기서 우리는 부스러지고 인생이 산산조각나는 체험을 하면서 이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중심에는 내가 있지 않고 다른 분이 우주를 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깜짝깜짝 놀라면서 순간순간 그걸 느끼게 만듭니다.
제가 두 번째 시간 초반에 쉽게 말씀드린 것은 첫째 시간보다 더 어려운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기죽지 말라고 먼저 쉽게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가 뭐냐 하면, 제가 어려운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어려운 거예요.
32장 10절에 보면,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여기에 진노, 분노란 단어가 나오지요. 이것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빼놓고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두 분 사이에 이야기의 주제가 하나님의 진노하심이지요. 이걸 밑에 있는 백성들은 까마득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저 사랑타령만 있어요. 온 교회마다 사랑만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나 정작 우리를 구원할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뭐가 주제입니까? 내 진노를 퍼부어야 되겠다는 겁니다. 그 당시에 모세가 말렸지요. 하나님께서 약속해놓고 약속을 취소하면 다른 민족들이 하나님이 일관성 없다고 얼마나 욕하겠습니까. 약속은 유지하면서도 진노는 진노대로 퍼부을 수 있는 어떤 대책을 세워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구원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둘 다 성취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주시면 고맙겠다고 나오는 거예요.
그걸 신약에서는 바로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의 진노를 대신 감수하겠다고 나온 겁니다. 그래서 구원받을 사람은 예수님의 죽으심 속에서 내가 받을 저주와 심판과 영원한 지옥 불을 그분이 대신 감수했다는 사실을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그걸 간파하고 있는 그들에게만 구원의 능력이 나의 행함이 아니고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십자가에만 있음을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에요.
그러면 지금까지 한 것이 뭐가 어려우냐? 쉽지 않느냐 하지만 들어가 보면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왜 어려우냐 하면, 율법이 확정됐잖아요. 그럼 생각해봅시다. 모세에게 오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직접 십계명을 하늘에서 낙하산으로 보내시면 어떻게 됩니까? 십계명을 미리 주고 지키라 하고 올라오면 어떠냐 말이죠. 이미 출애굽기 20장에 십계명 줬잖아요. 그들 생각은 뭐냐? 우리가 거룩한 백성이니까 거룩하게 합당하게 실천에 옮겨야 될 책임 있는 백성이구나. 십계명대로 지키면 되겠다고 생각했지요. 뭐가 빠졌어요? 우리한테 미리 줬던 돌 판이 우리로 인하여 깨진다는 사실을 사전에 몰랐지요.
이것은 열두 제자들도 몰랐어요. 예수님께서 어부인 베드로에게 “이게 내 못자국이다. 미리 십자가 졌거든. 이제는 고기 잡지 말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지요. 그냥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불렀지요. 십자가 지기 전에 불렀지요. 십자가 지기 전에 부르니까 제자들 사이에 기대하는 있었어요. 하늘나라에 가서 누가 높으냐? 이제 그것만 남은 거예요. 자기는 든든한 백이 있으니까. 메시아는 우리와 한편이고 우리를 구원해줄 거니까.
심지어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내가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네가 열두 고을 친히 다스릴 것이라고 했거든요. 이제는 누려~. 주님 따라서 누리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걸 누가 못해요. 주님 따라서 고생하더라도 그 고생한 보상이 온다면 고생하는 것도 즐겁지요. 그런데 주님이 막상 고난 받는다고 할 때 베드로가 나서서 반대하고 열두 제자 다 도망갔지요. 베드로가 세 번씩 부인했지요. 그러면 그들은 뭐였습니까? 그들은 오해해도 보통 오해한 게 아닙니다. 크게 착각을 한 거예요.
여기서 어려운 거예요. 어떤 게 어려우냐 하면, 준 메시아. 메시아는 아닌데 메시아에 준한 생활을 제자들이 하게 되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이란 인간의 모든 삶의 원형이 바로 예수님에게서 나왔다는 이야기를 해드리는 겁니다. 유사 예수, 유사 메시아 생활을 사람들은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거예요.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내가 바로 절대자다, 내가 신이다.” 이것은 무의식 가운데서 툭툭 튀어나오는 게 결국은 내가 신이라는 그 모습이 나오는데 그 모습을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유발시킨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이것은 인간은 아무리 도망쳐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돌아가는 데서 벗어날 수가 없게 돼있어요. 그게 로마서 5장 14절. 아담은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모든 인간은 준 메시아적인 생활을 하고 자기가 그런 생활을 하는 이유를 모르면서도 장차 나중에 보니까 예수님의 흉내를 내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지옥 가든 천국 가든 상관없어요. 전부 다 예수님 흉내 내면서 살아온 거예요. 마귀에 의해서.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가? 가짜와 진짜를 또렷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네가 어떻게 살았던 간에 그것은 인간이 아닌 거예요. 준 인간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인간, 하나님이 처음 창조했던 참된 사람을 모방하는 정도에서 끝나지 하나님이 기뻐하고 원래 원했던 그 인간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거예요. 그러면서도 짐승처럼 살지도 않아요. 유사 인간으로 살아가야 되는 겁니다.
그 이유가 율법, 하나님의 십계명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십계명을 인간에게 준 것은 원래 십계명의 최종 수용자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계명의 완성자에게 십계명이 주어져야 돼요.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럼 줄 때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에게 주면 될 텐데 어떻게 주느냐 하면, 매실차를 뒤에 계신 분에게 줄 때 그냥 가서 주면 되는데 전달시키면서 가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십계명 보면서 이것 지키면 신되겠다고 홀짝홀짝 마시는 거예요.
그런데 율법을 마시면 저주받게 돼있어요. 율법을 더한 것은 저주받기 위해서 준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주제 파악도 안 된 상태에서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율법을 받는 겁니다. 전달하라고 줬는데 그들은 지켜서 의롭게 되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율법 받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순간 이것 지키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오해를 유발시킵니다. 그게 갈라디아서 2장에 나오지요.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지를 않았다. 율법으로 의로움을 성사할 수 있다면 구태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지 않았다는 거예요. 안 되는 줄 알면서 율법을 왜 줬느냐? 바로 예수님의 죽음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한 겁니다. 이 점이 어렵다는 거예요.
내가 울산에 왜 사느냐? 예수님을 죽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이란 말이죠. 그냥 죽지 율법 주고 죽느냐. 하나님께서 율법을 줌으로 말미암아 내가 자체적으로 율법을 얼추 지켰다고 생각하게 해서 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원하는 천국 가는 바탕이 장만되었다고 자부해서 그 자부된 사람에 의해서 진짜 메시아가 살해되는 방식으로 죽음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한 겁니다.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가짜 인간들 품속에서 끄집어내고자 하는 거예요. 따로 예수님이 자살한 게 아니고 자기를 죽이도록 유도하신 거예요. 너희들이 없으면 죽음이 없는 거예요.
이런 작업이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만날 때부터 시작했어요. 예수님이 오셨을 때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뭡니까? 물속에는 죄 있는 자만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시면 안 됩니다. 세례요한이 오해한 게 뭐냐 하면, 물세례 받으면 깨끗하게 된다고 오해한 거예요. 세상에 이런 오해가. 물 뿌려서 깨끗하게 되면 물 한 다라 뒤집어쓰겠다.
세례요한은 하나님께서 시켰기 때문에 분명히 의로운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은 의로운 것 맞아요. 하지만 우리 자체가 문제기 때문에 그 의로움이 우리 속에는 의로운 게 아니고 변질돼요. 그 변질된 상태를 하나님께서는 의롭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이러니 제 말이 어렵지요. 죄인을 더욱더 죄인 되게 한 것을 주님께서는 박수친 겁니다. 성공한 거예요. 율법을 준 것은 죄인으로 하여금 더욱더 죄인 되게 하는 거예요. 그 박수소리 듣거든 따라서 박수치세요. 죄인 되게 해서 감사합니다.
사람이 자기가 죄인인 걸 아는 순간 졸지에 천국으로 변해요. 왜냐하면 모든 것이 내가 신경 쓸 문제에서 떠나기 때문에 그저 축복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내가 죄인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가게에 손님 하나 안 와도 내가 거기에 대해서 신경 쓸 이유가 없어요. 고3 둔 부모가 신경 쓰는 이유가, 딸이 고3인 게 문제인 게 아니고 자기가 죄인의 자리에서 벗어나서 그래요. 이혼한 것 때문에 신경 쓰는 것은, 자기가 이혼 당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깜빡해서 그래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지 못해서 그래요.
종은 자기 일이 없어요. 종이 자기 일을 챙기면 종이 아니에요. 분해된 자기가 주인 노릇해버린 겁니다. 여러분 달란트 비유 알지요. 그게 뭐가 문제냐 하면, 주님이 있을 때 종으로 행세하다가 막상 주인이 떠나니까 평소에는 종인 척 했지 결코 종이 아니었다는 게 드러난 거예요. 진짜 자기가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종이라면 주인이 준 한 달란트를 은행에 넣고 이자 받아야 돼요. 그런데 주인이 가니까 그냥 묵혀놨지요. 왜? 내 돈이니까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거예요. 주인이 떠나니까 비로소 본색을 드러낸 겁니다. 떠난다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 손에 죽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받는 사람의 절차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내가 예수 믿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그런 절차가 필요해요. 예수 믿을 만큼 믿었는데 아무 이득이 없다. 이제부터 내가 예수 믿으면 개다. 주께서는 박수를 치는 겁니다. 이제야 그런 소리가 나오는구나. 이제 시작하자. 그런 너를 어떻게 천국 보내는지 내 솜씨를 봐라. 구원은 절대로 타협의 대상이 아니에요.
목사가 구원받는 방법은 목회 실패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내가 정말 목사가 아니었다는 것을 목회하면서 죄인인 것을 알 때 목회는 누가 하느냐? 처음부터 목사가 하는 목회는 이 세상에는 없었는데 남들 신학교 나와서 다 하니까 자기도 한 다리 걸치면 되는 줄 알았지요. 천국 가 보세요. 목회자는 한분밖에 없어요. 예수님. 다른 사람은 목회자가 아니라 죄인이었어요.
어떤 사람은 십일조하는데 이 세상에 십일조 받을 위인이 없어요. 원래 십일조는 제사장이 받거든요. 십일조 내고 자시고 간에 받을 사람이 없다니까. 십일조 받을 창고가 없다니까. 제사장이 없어요. 만일 제사장이 있으면 십일조만 받지 말고 양도 잡아야 돼요. 교회 올 때 양 들고 오세요. 지금의 십일조는 성도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여러분한테 해요. 그러면 돼요.
십일조란 율법이 왜 필요하냐 하면, 십일조 율법을 지켰다는 시점이 와요. 십분의 일 낼 때 빳빳한 오만 원짜리 봉투에 넣을 때 어떤 마음이 드느냐 하면, “나는 십일조 했습니다. 십분의 일 드렸습니다.” 하는 그 순간 주께서는 박수를 칩니다. 예수 잡아 죽일 인간 등장했구나. 율법을 주신 것은 어떤 율법도 나를 의롭게 할 수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했는데 그들은 이 율법만큼은 지켰다고 자신만만한 그런 사태를 유발해서 사실은 아무도 없는데 있다는 사람을 등장시켜서 그리스도가 누구 때문에 죽었는가를 그 관계에 엮이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겁니다.
그래서 율법 없는 십자가는 없습니다. 이방인들도 예수 믿게 되었으면 구약을 다시 거쳐서 올라오세요. 이스라엘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에요. 율법 지켰다고 거룩한 백성, 거룩한 교회라고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고 설마 우리는 도와줄 것이라고 오해했던 그들은 망했습니다. 누가 망하게 했는가? 하나님에 의해서 망했습니다. 그게 구약역사에요.
하나님에 의해서 망했을 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나를 망하게 했다는 사람만 구원을 받아요. 그게 바로 아까 이야기한 포물선이죠. y=ax+bx+c 이 포물선을 십계명으로 확정되었지요. 율법은 누굴 증거합니까? 율법을 지키라는 것으로 마감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곧 나로 마감돼요.
컵이 있잖아요. 이 컵의 물을 마시라는 율법이 주어졌다면 우리는 오해하기를 마셨습니다. 율법을 실천했다고 할 때 왜 우리는 마심으로써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합니까? 평소에 우리는 율법을 내가 지킬 수 있다고 살아가거든요. 우리는 준 메시아, 준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본인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하나님도 아닌데 당황하지 않고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천천히 가면서 율법을 지킴으로써 끝, 구원의 끝에 이르렀다고 보는 거예요.
철저하게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농락당한 겁니다. 사울 왕은 제사 드려야 전쟁에 승리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제사는 제사장만 드리잖아요. 기름부음 받은 자가 와야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사울은 기다렸습니다. 약속 시간이 돼도 사무엘은 오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전쟁에 승리해야 되겠고. 그러면 뭘 생각해야 됩니까? 제사를 드려야 승리하니까, 민수기에 보니까 전쟁할 때는 언약궤 앞에서 제사를 드려라. 그러면 언약궤 앞장세우면 승리하고 밀리면 패배한다는 그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순간 이미 그 말씀은 위배된 거예요. 이걸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기 본색이 드러나면서 말씀은 깨어진 겁니다. 그건 준 메시아 역할을 시도한 거기 때문에.
진짜 메시아는 누굽니까?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이 앞장 세워 누굴 보냅니까? 그 당시에는 사무엘을 보내거든요. 참 사무엘도 얼마나 가려고 얼마나 했겠습니까? 가려고 하는데 “가지 마. 가지 말라니까.” 사울 왕은 사무엘이 안 오니까 전전긍긍하고 적들이 코앞에까지 왔다하고. “안 되겠다. 나라도 제사 드려야지.” 제사 드리고 나니까 사무엘이 도착해서 “너는 왜 제사를 드렸느냐?” “약속 안 지켰잖아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진작 그랬으면 순종했지. 사전에 어떤 이야기도 없었어요. 그리고 나라가 둘로 찢어질 것이라 하고 가는 사무엘을 사울이 잡으니까 옷이 둘로 찢어져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이벤트거든요. 짜고 치는 고스톱이에요. 사울은 인간적인 면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자 사무엘은, 나라를 너한테 빼앗아서 준비된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다.
그 이유가 뭐냐? 우리 이름은 육체가 먼저 있고 육체가 어떤 실천에 옮길 때 뒤늦게 내가 옮긴 행함과 말씀과 일치시키려고 애를 쓰는 반면에 주님의 이름은 신체가 없어요. 이름이 먼저 있고 이름은 신체가 없기 때문에 그 이름을 신체 있는 인간이 믿을 수가 없어요. 그 다음에 그 이름으로 어떤 사태를 유발시키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인간은 예상 못하거든요. 예상 못하기 때문에 예상 못할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예상 하면 예상한 것만 빼고 예상 못한 다른 것으로 가버려요. 그 말은 하나님이 새삼스럽게 우리에게 기대를 걸지 않아요. 일방적으로 갖고 노시는 겁니다. 결국 메시아를 말씀을 통해서 드러내되 그냥 단독으로 드러내시는 게 아니고 바로 죄인들 속에서 드러내기 위한 애초부터 주어진 전략이기 때문에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도 못하면서 지킨 양 하는 마음껏 거들먹거려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겁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돌 판을 깬 이유를 아시겠지요. “모세야 돌 판 들고 가거라. 가봐야 소용없을 거야. 안 믿을 거니까.” “그럼 여기서 깨겠습니다.” 그것도 안 돼요. 모세가 들고 와야 되고 우상 섬기는 소리를 들어야 되고 모세가 화가 나서 돌 판을 깨뜨려야 되고 그래서 돌 판은 처음부터 깨어져야만 하는 돌 판임을 차후적으로 소급해서 다시 발견케 하는 겁니다.
그럼 모세가 해야 될 것은 뭐냐? 이제부터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미 출애굽기 32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같이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겠다고 하지요. 율법에 근거해서 새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그럴 때 모세가 하는 말이, 그들을 지금 버리면 하나님께서 하신 맹세가 이뤄지지 않습니다.
이게 32장 13절에 나와요.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그러면 모세와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일을 어떻게 추진하겠는 겁니까? 아까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분노하심은 그대로 드러내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 자손을 별처럼 많아지게 하는 두 가지를 다 이뤄지게 해야 되겠지요. 이뤄지는 방식에 대해서 모세가 제안한 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됩니다.
함께 하신다는 말은 율법을 주신 분이 함께 하게 되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율법을 지키고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못 지키지요. 지키는 분이 못 지키는 백성과 동행하게 되면 결국 율법은 지켜지는 거지요. 나중에 둘이 나란히 가게 되는 최종 상태, 그 상황을 천국으로 굳어지게 하는 거예요. 천국에 가서 면류관도 반납하게 하는 겁니다. 면류관도 아낌없이 내놓으려면 율법을 못 지킴이 나란히 이뤄져야 되겠지요. 그러면 율법을 지킨 분이 율법을 못 지킨 죄를 담당해야 되겠지요.
이렇게 되면 주님은 사랑만 있고 하나님의 진노는 사라지잖아요. 진노는 하나에 과정에 불과하잖아요. 결국 봐주는 게 되니까 앞에 진노하심은 있으나마나 날아가 버렸죠.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가 도중에 날아간 셈이 되고 사랑에 흡수되었으니까 하나님의 진노란 속성은 날아가 버리게 되잖아요. 이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어렵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님의 무서움도 있어야 된다 말이죠. 있으려면 어떻게 하느냐? 사람을 진노하시되 약속을 살리는 거예요. 사람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구원을 구원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를, 맹세를 구원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는 자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을 구원하는 거예요.
로마서 1장 17절, 내 딸 결혼식 때 주례내용이 뭡니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오직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믿음에서 믿음이지요. 사람들은 그걸 오해해서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내가 믿는 자되면 되겠구나. 믿음에다 나라는 인간을 갖다 붙이는 거예요. 믿음만 거치지 인간을 거치지 않는 거예요. 이걸 떼어버리면 인간은 믿을 자격도 없는 죽을 죄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를 죽여 놓고 주님의 믿음이 우릴 건지면 우리는 죽은 자로 구원받기 때문에 결국 내가 믿는 자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님 주신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된다 이 말이죠.
중요한 것은, 주님이 선물로 준 믿음이고 그 믿음의 행위의 주체는 내가 아닙니다. 행위의 주체는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옴으로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는 거예요. 그걸 더 쉬운 말로 하면 주님은 날마다 나를 군화발로 밟고 우리는 밟히는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아예 그게 없거든 얼굴에 군화문신을 하세요. 날마다 면상에 주의 군화에 밟히고, 밟혔다고 좋다고 감사하고.
주님에게 밟힌 사람들의 장점이 뭐냐 하면, 사람이 무섭지 않은 거예요. 그리고 자기 인생이 어떻게 끝나는 것에 대해서 미리 걱정하지도 않는다는 거죠. 오늘날 밟혔는데 이것보다 더 심하게 밟힐 리가 있습니까. 완전히 인간도 아니고 개 취급 받았는데. 주님의 믿음 안에 개도 구원받는다면서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는 개로서 관계를 맺으니까 그 관계로 구원받는 거예요. 개 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개로 취급해서 구원하는 그 취급 자체를 주께서 온 선물로 수용하는 겁니다.
인간이 믿으면 인간의 믿음이라 하지 않습니다. 믿는 행위라 하지요. 그건 행함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행함으로 구원받으면 치매 걸리면 문제 생겨요. 예수님이 누구지? 자기 아들도 못 알아보는데 어떤 아저씨를 어떻게 알아보겠어요. 치매 걸리게 하신 주체가 보내신 믿음이 있으면 나를 치매 걸리게 하던 강도로 만들든, 창녀로 만들던 간에 그 믿음은 한결같이 변하지 않습니다. 왜? 그 믿음은 내가 만들어낸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매일 삶이 내가 만들어낸 어떤 개념과 주님이 주신 개념이 늘 매일같이 우리한테는 눈만 뜨면 충돌을 일으켜요. 오늘도 아침에 눈을 떴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 둘이 손잡고 기도하면서, “오늘도 승리하는 삶을 살자.” 주께서 “놀고 있다. 뭐가 승리인데. 오늘도 군화발에 밟힐 생각해라.”
보람찬 하루 끝나고 보세요. 만신창이고 걸레도 그런 걸레 없습니다. 하여튼 내 뜻대로 안 되게 돼있어요. 그런데 내 뜻대로 됐잖아요. 그때는 알아서 기어야 됩니다. “주여, 내 뜻대로 안 돼야 되는데 내 뜻대로 되는 저주를 퍼부으십니까? 왜 제 기대에 응답하시는 수모를 저한테 주십니까?”
정리하면 율법 속에 그리스도 들었다. 그런데 사람이 율법 지켜서 그리스도로 행세하려고 했다. 율법 속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와 내가 말씀을 지켰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라는 대충돌이 하나는 율법에 대한 X고 하나는 O가 되는 거예요. 동행하겠다는 겁니다. 동행하면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되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되었지 동행하는 너희들의 몫은 아니고 너희들의 공로는 아니라는 것을 통해서 새롭게 전개되는 이스라엘이 탄생합니다. 죄인마저 구원하시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탄생, 이미 십계명부터 시작된 거예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안식일을 어기면 돌 던지라고 나오지요. 분명히 율법입니다. 사람들은 평소에 말씀대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기 때문에 걸리기만 해라. 하고 있는데 막상 누가 안식일 어겼다는 소식에 돌 던지려고 했는데 자기 올케, 자기 처남, 심지어 자기 딸 그것도 유학한 딸,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란 말이죠. 갑자기 자긴 빠진다고 하는 거예요.
율법에 대한 벌칙이 주님이 내린 벌칙과 우리 스스로 내린 벌칙이 큰 차이 남을 보여주기 위해서 벌칙을 주신 거예요. 남한테는 엄중하게 법을 집행하지만 자기가 아는 사람, 자기와 가까운 사람, 자기 집안 식구, 피붙이에 대해서 왜 그렇게 관대한지. 관대해도 너무 관대해. 자기가 투자한 교주는 숨겨주고 도망치게 만들고. 전부 사업을 했기 때문에 자기 교주를 숨겨주는 겁니다.
예수님이 교주라고요? 교주 같으면 말씀대로 해야지. 교주가 잡힐 때는 오히려 여기 있다고 알려줘야지. 베드로가 감히 칼 들고 말고의 귀를 벱니까. 예수님 잡힐 때 숨게 했습니까? 예수님이란 교주는 순순히 잡혔는데 어떻게 도망치는 교주가 다 있어요. 예수님이 망명했습니까? 남의 이야기하지 말고 당신 집안일이라면 당신도 그렇게 한다. 나도 도망치지. 나는 스위스로 망명한다.
이걸 안다는 거예요. 우리는 백날 남 욕해봐야 막상 그런 사태가 나타나게 되면 이 정권은 정치적이라고 해서 도망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요. 도망칠 수 없어서 잡히지 그럴 여지만 있다면 일단 피하고 보자는 것이 우리의 본심이란 말이죠.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은 안식일 어기기만 기다리고 죽이려고 작심을 하지만 막상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법을 어기면 나서서 변호하는 것처럼 율법이란 결국 내가 절대자인 것을 핑계와 변명조로 성경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잘난 존재며 남은 죽여도 나는 보호받아야 된다는 걸 발견하기 위해서 날마다 그것만 찾고 있어요. 그러니까 성경의 흐름이 다 깨져버리죠. 완전히 자기 필요한 것만 뽑아서 꽃다발 만들어서 자기 변명조로 자기 옹호조로 지키고 있단 말이죠.
아예 처음부터 가버리면 우리는 모세 편에 서지 마세요. 모세로부터 비난받을 덩달아서 우상 섬겼던 그쪽 편에 서세요. 제가 이번 수련회 강의교재를 쓰고 있거든요. 교재 첫 부분에 바로와 모세가 싸웠잖아요. 내 백성 내놓으라고 할 때. 자꾸 모세 편에 서지 마세요. 모세 편에 설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또 바로와 모세를 보는 관찰자로 서지 마세요. 우리는 바로 편에 서야 돼요. 너무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평소에 가는 우리의 삶이 바로 쪽이에요. 노동자 내놔라. 와서 불쑥 내놓으라 하면 내놓으라는 쪽이 나쁘지 안 내놓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래서 날마다 우리가 성경을 말씀 바깥에서 구경하는 게 아니라 말씀이 작용하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도록 지금도 주께서 작용하고 계셔요. 그러면 우리가 알아서 벌 설까요, 죄인이라고 말할까요? 그럴 때 제가 쓰는 말이 있지요. 그냥 사세요. 왜 그냥 살아야 되느냐 하면, 그림을 그려야 되는데, 전체 집합에 어떤 부분 집합이 있다고 합시다. 부분 집합에 경계선을 그으면 이 자체가 자아가 돼버려요. 내 나름대로 죄인 노릇해야지 하면 이 자체가 의가 되고 우상이 된다 이 말이죠.
“주께서는 전체로 움직이기 때문에 내가 따로 이제부터 죄인이니까 회개해야지.”라는 그런 짓을 하지 마세요. 그냥 사시면 주께서 알아서 말씀대로 하고 있는 걸 믿어야지 따로 믿는 구석을 챙기면, “네가 왜 회초리 들고 나서노?” “주여, 벌 내리시기 전에 제가 알아서 손들겠습니다.” 이게 무슨 모독이에요. 벌을 네가 왜 내리는데? 네가 알아서 왜 반성하는데? 그게 반성일까요? 반성했다는 의로움의 종류지요. 알아서 기었다는 자랑거리가 되잖아요.
평소에 그냥 사시되 그 전체가 말씀이 말씀대로 움직인 것을 믿으면 됩니다. 그냥 믿으면 되는 거예요. “주여, 오늘은 제가 교회를 와야 되는데 못 왔습니다.” 이것도 건방이 늘어났어. 전에 올 때도 우리 힘으로 온 게 아니거든요. 강제로 집어넣은 거예요. 군화발 있잖아요. 전에도 차여서 왔으면서 지가 알아서 왔대. 모든 발걸음을 주께서 세시고 계십니다.
할 때는 몰라요. 뒤돌아보니까 살아온 모든 굽이굽이가 추풍령 고개 넘듯이 한 고비, 두 고비 넘을 때마다 공식, 율법의 의로만 구원받는데 그걸 율법의 의가 이미 십자가로 말미암아 완성된 사람한테는 십자가 의가 나한테 생산된다는 것을 우리한테 율법 지키겠다는 짓거리를 하게 하는 것과 동반해서 내 안에 어떤 분이 계심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율법 주신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는 로마서 3장의 의미를 우리가 출애굽부터 찾아가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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