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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유사 메시야 140606강의이사야

유사 메시야 140606

이름 : 이근호(IP:119.18.90.53)

한윤범(IP:14.♡.134.60)

14-06-11 11:47

20140606a 울산강의-출애굽기 32장 : 유사 메시아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출애굽기 32장 15절부터 해보겠습니다. 모세가 시내산 위에서 하나님 만날 때 백성들 놔두고 혼자서 올라갔는데 거기서 내려오면서 양쪽에 돌 판 둘을 끼고 내려오는 그 대목입니다. 여기 시내산까지 모세만 온 게 아니고 ‘모세+백성들’입니다. 시내산에는 하나님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 보면서 제일 거북스럽게 여기는 것이 보통 책이나 드라마는 사람만 상대하면 돼요. 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 행복한 삶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을 들여다보면 사람과 하나님 사이거든요. 이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가 좋다고 해서 행운이나 행복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될 수가 없습니다. 부부 사이가 좋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천국 넣어주는 게 아니거든요. 목사와 교인들 사이가 좋다고 해서 구원받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걸 다른 말로 교인들끼리 싸우고 다툰다고 해서 지옥 갈 교회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패가 갈려야 진리가 드러난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다른 데 보면 너희들 가운데 분당, 갈라지는 게 있으니까 육신의 열매라고 했지만.

성경을 사람들이 보기 싫어하는 이유는 평소에 살아갈 때는 사람과 사람으로 상대하는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내가 그 사람한테 심하게 했더니 그 사람이 나한테 심하게 해서 마음 상했을 때 당황하지 말고 찾아가서 뭔가 좋은 소리하면 문제 해결은 끝. 그런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좋게 해결하는 방법이 하나님과 상대할 때도 써먹을 수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써먹을 수가 없어요. 우리끼리 좋다고 해서 덩달아 하나님한테도 그냥 좋게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단정하느냐? 우리끼리 좋으면 하나님도 좋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도행전 5장에서 부부 사이에서 의견 일치가 되었습니다. 헌금 반만 하자. 둘 사이에는 의견소통이 잘 된 겁니다. 그래서 반만 헌금하자고 했는데 그날에 사이좋게 죽었지요. 아마 보험금도 같이 나왔을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 보기가 겁나는 거예요. 내가 이 세상 바닥에서 써먹었던 방식이 전혀 하나님한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걸 단정할 수 있는 증거를 대라. 근거가 뭐냐? 모세+백성. 모세와 백성이 한 통속이 아니고 일부러 하나님께서 구분 짓는 겁니다. 여러분이 기차를 보면 다 열차가 아니에요. 열차를 이끄는 기관이 있습니다. 기관차라고 하지요. 기관차에 줄줄이 열차가 달려 있잖아요. 앞에서 당기는 것은 모세고 백성들은 뒤에 딸려 갈 뿐이에요. 의도적으로 기관차와 열차를 구분하는 겁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모세는 백성 중의 1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너희를 대표하는 뜻은 될지언정 너희들 중의 하나는 아니에요. 얼마 전에 투표했잖아요. 투표하는 것은 대표자를 뽑지요. 여기는 전부 다 새누리당 몰표가 나왔겠지만 대표를 뽑는 거예요. 대표는 우리를 대표하는 동시에 보통 우리와 같은 숫자로 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1이라면 그쪽은 크게 1로 써야 돼요. 영어로 하면 대문자 ONE. 대통령도 마찬가지고.

이러한 분리는 뭘 알리기 위함이냐 하면, 백성들아 너희들은 다 같은 인간으로 보이지. 인간끼리 있다면 결코 이스라엘이 될 수 없고 약속의 땅에 갈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애굽에서 나온 입장이에요. 그 다음에 문제가 어디로 갈지 모르는 거예요. 엄마와 싸워서 딸이 삐져서 그 밤에 가출은 했는데 어디로 갈지를 모르는 거예요. 부부싸움해서 홧김에 뛰쳐나왔는데 갈 곳이 막막한 거예요. 다시 기어 들어가지요.

왜 다시 기어 들어가느냐 하면, 자기 집에서 하는 행세가 바깥에 나와 보니까 집구석에서 하는 행세 외에는 배운 적이 없거든요. 애굽에서 나와 봤자 모세가 없으면 그들은 애굽으로 되돌아가든지 아니면 제2의 애굽을 그 자리에서 생산하든지 해야 돼요. 결과적으로 그들은 애굽에서 나와서 애굽의 분점을 차린 것밖에 안 됩니다. 약속의 땅에 간 게 아니고 제2, 제3의 애굽을 또 만들었어요.

교회 바르게 해보자고 교회 내에서 싸우다 뛰쳐나온 그들이 만든 교회가 전에 싸웠던 교회 못지않게 똑같은 질의 교회로 또 되는 거예요. 왜? 갈 바를 알지 못하니까. 왜 갈 바를 못합니까? 뛰쳐나온 인간들이 그 나물에 그 밥이거든요. 특출한 사람이 없는 거예요. 둘 다 같이 놀던 사람들이 모여 봤자 분가한 것이지 도약한 것이 아니고 초월한 게 아니잖아요.

이번 여름수련회에 출애굽기를 하겠습니다만 그래서 모세가 애굽이라는 자리에서는 자기 백성을 이끌 이유도 없고 이끌 수도 없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외부인이 투입돼야 돼요. 한 번 밖에 나갔던 경험이 있던 사람이 다시 애굽으로 와서 데리고 나가서 밖에 먼저 나갔던 모세가 누구를 만나야 돼요. 누구를 만나는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납니다. 만나고 난 뒤에 다시 애굽으로 들어갈 때는 모세 본인의 이름으로 가는 게 아니에요. 주의 이름으로 가는 겁니다.

주의 이름으로 갈 때 너희들 보기에는 너희와 똑같은 인간이지만 너희들은 너희 이름으로 살고 나는 주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을 티를 내야 되는데 그 티가 뭐냐? 손에 쥐었던 지팡이입니다. 이제는 지팡이가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백성을 지팡이가 데려가는 쪽으로만 계속해서 가게 될 거예요. 그리고 조용하게 가는 지팡이가 아니고 자꾸만 이질적이고 낯선 사건들을 유발시킬 겁니다.

지팡이가 물 위를 가리키니까 바다가 갈라지고 지팡이가 강물에 대니까 강물이 피가 되고 개구리 올라오고 파리 들끓고 이가 있고 악질, 독종, 우박 있고, 메뚜기 들끓고, 캄캄해지고 나중에는 맏이가 다 죽어 버리지요. 그 죽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습니다. “네가 감히 이스라엘 나라 만드는 그분을 대적하다니.” 네가 왜 성질이 더러워. 이것 때문에 죽는 게 아니에요. 너는 왜 손톱이 더러워. 이것 때문에 죽는 게 아닙니다. 구원받는 것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보톡스 너무 맞아서 퉁퉁 부었어. 그것 때문에 지옥 가는 게 아니에요.

지금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저 여자는 품위가 떨어져. 화장이 너무 요란스러워. 된장녀 같아. 이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가치 논쟁이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모든 가치는 완전히 일소에 붙입니다. 그런 건 묻거나 따지지 않아요. 낯선 기준을 들이댄단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성경 보기가 부담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익히 아는 우리의 상식이 성경에 나오는 말씀 지키기에 보탬이나 전혀 도움이 안 돼요.

우리가 미리 아는 길 같으면 우리가 알아서 가면 되는데 매일 낯선 길이에요. 10년 간 예수 믿었으면 12년째는 뭔가 알아서 할 수도 있는 문제인데 십 년간 예수 믿은 것은 11 년 되면 10년 동안 전혀 나오지 않은 길이 제공됩니다. 마치 시험 치는데 10년간 한 번도 같은 문제를 낸 적이 없는 선생님. 선배들한테 알았던 시험지로 백날 공부해봐야 아무 소용없는 것. 왜? 날마다 새로운 창조성이 나오니까. 새로운 길을 가지를 못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요약해드리면, 모세+백성, 그냥 모세와 한 통속이 아니고 모세와 백성을 구분시킨 이유는, 모세가 애굽에 온 것과 애굽에 살던 너희와 질이 다르다는 겁니다. 모세는 그들이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 돼요. 그러나 모세 없는 백성은 뭐냐? 그들이 평생 살면서 안다는 것은 기껏 다시 제2, 제3의 애굽을 반복해서 생산하는 것 외에는 아는 게 없어요. 배운 가락이 그것이니까. 그런 식으로 애굽에서 살던 사고방식으로는 모세를 파괴시킨 하나님 나라에 합류가 안 됩니다.

천국이란 그 장소, 위치에 간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도착하기만 하면 대충 살겠지. 천만의 말씀입니다. 대충해서 사는 곳이 아닙니다. 그리고 넣어주지도 않아요. 살만한 사람이 안 되면 절대로 넣어주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넣어준다는 것은 내가 알아서 너희들을 변화시켜준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의 위치가 뭐냐? 일단 모세가 없다고 치면 백성들은 우왕좌왕이지요.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그 자체가 애굽으로 뒤범벅된 그 자체가 애굽의 연장, 애굽의 확산이라고 보면 됩니다. 애굽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온 거예요. 애굽에서 벗어난 게 아니고 애굽의 덩어리에서 혹 하나 떼어서 간다고 보면 됩니다.

출애굽 사건은 애굽인들에 대한 이야기지만 모세가 광야에서 간다는 것은 애굽화된 히브리인들, 이미 애굽으로 물들은 이스라엘에 관하여 애굽에서 어떻게 그들을 계속해서 탈출시킬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면 이들의 위치는 위치상 모세는 하늘나라로 보면 되고, 백성은 애굽이에요. 애굽을 하늘나라, 약속의 땅으로 보내는 거예요. 이 위치에서 그냥 있으면 안 되지요. 위치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돼요.

방금 한 이야기를 다 지우고 수학식으로 이야기합니다. y=ax+bx+c 이 공식이에요. 이게 포물선이거든요. 이 이야기는 라이프니츠라는 학자가 만들었는데 이걸 데카르트 평면이라고 해요. 이 포물선이 특이하게 용처럼 그려졌지요. 이 선 따라 천국에 가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선을 따라서 먼저 내려온 사람이 있어요. 바로 기관사 역할하는 모세가 내려온 거예요. 모세 혼자 내려오면 안 되지요. 모세한테 지팡이가 있지요. 그걸 쥐게 하신 분이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하나님의 이름을 설명하려면 서너 시간 걸립니다. 잠간 이야기하면, 보통 사람은 사람 육체가 먼저 있고 이름을 짓습니다. 임신도 안 했는데 이름을 짓는 것은 특이한 부모고, 대략은 임신하고 난 뒤에 3D로 찍은 초음파 입체사진을 보고 아들인지, 딸인지에 따라서 이름을 져야 되는데 아들인줄 알고 도민준이라고 지었는데 전지현이 나오면 곤란하잖아요. 그래서 항상 인간의 이름은 신체가 먼저 있고 이름을 짓게 돼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이름이 먼저 주어지고 이름에 부합되는 신체가 마태복음 1장에 나옵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메시아가 뒤쪽에 오거든요.

우리 인간들 생각에는 이름만 덜렁 있는 것은 하나에 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아무 의미 없어요. 사람은 없는데 이름 부른다고 해서, “어이, 이순신 나와!” 한다고 누가 때리고 하지 않습니다. 이순신 추종자가 있으면 모르겠지만. 이순신은 이미 죽고 없잖아요. 이름 부른다고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욕해도 괜찮아요. 그러나 실제로 신체가 있는 사람이라면 왜 욕했느냐고 나오잖아요.

우리 상식에는 신체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이름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의 신체, 모양새를 알아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시몬이라고 불렀단 말이죠. 그런데 시몬이란 이름을 베드로로 바꾸잖아요. 이것은 베드로가 자기 이름인줄 알았거든요. 사람이 신체가 있고 불러주는 이름은 자기 이름 아니에요. 불러주신 분의 이름입니다.

강씨 집안에서 아들 낳으면 성이 강씨잖아요. 그런데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6개월 만에 천재가 되어 “아빠. 나 이씨로 바꿀게.” 바꿀 수가 없어요. 이름 지어준 자가 강씨 집안이기 때문에. 이 말은, 인간들은 신체가 먼저 있고 그 신체가 어떻게 활동하느냐 따라서 이름을 좋게 짓지요. 강타락, 이런 식으로 절대로 안 짓습니다. 이망해라, 이런 이름 안 짓거든요. 그저 잘 되는 것, 김번영, 최부흥. 왜냐? 뭔가 있으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은 특이해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에요. 벌써 이름 자체가 해야 될 기능이 포함돼있지요. 이 말은 인간들은 사람이 먼저 있고 이름을 붙이지만 주님께서는 이름이 먼저고 주의 이름에 부합되는 신체가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그냥 내지르는 소리가 아니고 이름 자체에서 장차오실 메시아의 속성이 함께 기적적으로 표적이 이뤄진다는 겁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것이 계속해서 구약 때부터 이 이름을 부를 때는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기능이 일어나는 거예요. 기능이 일어나는 점은 참 기분 좋은데 문제가 백성들이 애굽에 살던 사람이잖아요. 신체가 먼저 있고 신체에 맞게 이름이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내 몸, 내 신체가 우선되는 거예요. 그런 집단에 신체가 우선이 아니고 이름이 우선이 되는 분이 동행하니까 사람들은 자기 힘을 믿지 주의 이름을 믿겠어요?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그냥 소리에 불과한데 누가 믿겠어요. 아무도 안 믿지.

주의 이름을 불러서 구원받는다. 말은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주의 이름에 신체가 있다는 걸 모르고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나를 주의 이름에 부합되는 신체라고 착각해요. “주여, 제가 불렀습니다.” 그러면 이건 자기 이름의 연속이에요. 이건 모세가 없는 상태에서 단독 범행이에요. 내가 알아서 주의 이름 불러서 예수 믿어서 내가 구원받는 거예요.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종교에 불과해요. 그건 교회 아니에요. 친목단체에요. 자존심끼리 모이는 곳이에요.

세상의 교회 보세요. 화젯거리가 뭡니까? 화젯거리가 성경말씀이 아니고, “이번에 누가 이혼했데.” 그게 고소해서 미치는 거예요. “늙은 목사한테 권사가 와서 돈 빼먹고 도망갔데.” 이런 것 있잖아요. 그것은 친목단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것은 모세는 빠지고 고만고만한 인간끼리 모인 어설픈 묶음이에요.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에 큰 교회에 가고 작은 교회는 이용가치도 없어요.

이용가치 있는 것, 그게 바로 애굽적으로 교회 세운 거예요. 애굽 식의 교회에요. 기관차도 없이 자기들끼리 구원받고, 천국 만들어내고, 메시아 만들고, 삼위일체 만들고, 신학 만들고, 그런 식으로 자기들의 믿는다는 이름의 행함만 내세우고, 자기가 잘났다는 걸 보여주는 기도, 헌금, 전도, 열심만 내세워서 만든 교회, 그건 오락단체입니다. 계모임이에요. 위치가 있을 뿐이지 변화는 없어요.

지금 이 포물선 따라서 와야 된단 말이죠. 모세와 와야 돼요. 모세가 오면 안 되고 주의 이름이 보낸 모세가 와야 돼요. 이름을 모세라고 붙인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 모세가 왜 그렇게 많은지. 주님이 보낸 모세에요. 그것도 지팡이 든 모세. 장에서 산 지팡이 말고 진짜 기적이 일어나는. 그런데 그 기적이 사람들이 이해하고 예상하는 기적이 아니고 사람들로 하여금 매우 당황하게 만드는 그런 지팡이. 지팡이가 백성들 인도했는데 설마 능력 있는 주께서 우리를 인도한다면 기본적으로 숙식은 제공하겠지. 생각한 거예요. 조명시설도 밝혔단 말이죠.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 정도로 세세한 것까지 챙기면서 인도했는데 그 인도한 곳이 물이 없고 양식이 없는 곳입니다. 죽으라는 겁니다. 막장으로 몰아넣습니다. 세상에 이런 막장드라마 없습니다. 홍해 건너왔을 때 애굽사람들 고소하다고 느꼈지요. 이건 애굽도 없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도와주시는 우리 편이라고 했는데 세상에 애굽보다 더 무서워. 그래서 백성들이 이야기합니다. “공동묘지가 없어서 시원하게 터 잡으라고 우리를 넓은 사막에 집단 공동묘지 만들려고 데려왔나, 모세야. 답변해봐라.” 청문회 열고 난리 났지요. 모세 사표내고, 이번 세월호 책임져라. 그리고 모세가,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까? 노란리본 달고.

백성들한테는 포물선이 보이지 않는 겁니다. 포물선을 쓴 이유가, 위치이면서도 변화 되는 거예요. 위치에서 변화가 되려면 공식이 주어져야 되겠지요. 이 포물선에서 이 점 x₁에서 x₀ 이 거리만큼 이동할 거예요. y는 y만큼 이동할 거고. 이렇게 되면 y=ax+bx+c라는 공식이 나와요.

지금 어디쯤 왔느냐는 거예요. 그럼 보세요. 하나님이 함께 있고 모세가 이 길 따라 왔다 이 말이죠. 제가 포물선을 그렸습니다만, 이 점을 이렇게 붙였는데 사실은 우리 눈에는 이 선만 보이지요. 따지고 보면 이 근처에 무수한 점이 있어요. 이게 모세한테는 보일지언정 일반 애굽에 살던 사람들은 같은 인간들끼리 집단에 불과한 거예요. 고만고만한 사람이에요. 장 보러 갈 때 이 포물선 보입니까? 안 보이잖아요. 마음 끌리는 데로 지그재그로 살잖아요.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이건 정신병자지.

어떤 고지식한 사람한테 물건 사오라고 할 때 적은 데로 사는 데 오다가 박치기도 하든 말든 포물선대로 간다는 겁니다. 이런 인간 있어요? 없어요. 그런데 가다가 갑자기 꼬치 굽는 냄새가 나서 돈 계산 해보니까 남은 돈 이천 원으로 사먹고 가자. 이러면 벌써 노선에 벗어난 거예요. 그렇게 사먹다 보니까 주인과의 약속 시간은 지나버렸단 말이죠.

애굽에 사는 사람, 그냥 보통 사람들은 이 포물선이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서 보냄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포물선 없습니다. 포물선 없으면 뭐가 있느냐? 그냥 무수한 점들의 집합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기에 무슨 질서와 체제가 있어요.

그런데 여기에 윤동주가 등장합니다. 그 별들을 보는 순간 별들의 이미지 기능, 그냥 무작위적으로 흩어져있는 거기서 사랑하는 조국의 모습을 봅니다. 별 하나에 나, 별 둘의 나. 갑자기 여기서 사랑하는 여자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옛날에 헤어졌던 첫사랑의 모습이 등장하게 되면 이건 자기 나름대로 질서 잡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건 윤동주에요. [별 헤는 밤] 이건 윤동주 본인의 패턴이지요.

그런데 윤동주 말고 윤동기가 등장하면 또 그 나름대로 패턴이 있단 말이죠. 그 패턴은 그 사람의 과거의 인상에서 나온 거예요. 사람의 현재의 모든 행동은 과거에 자기가 겪었던 것을 되풀이하던 식으로 현재를 살고 있거든요. 과거에 상처 받았으면 상처받은 데로 하고. 과거에 잡채 먹다 체하면 그 다음부터 잡채 냄새만나도 피하고. 사람의 모든 행동들은 반드시 입력되어 있는 정보가 현재에 계속 반복해서 되살아나게 돼있어요.

그러면 하나님 뜻으로는 없어요. 왜냐하면 애굽에 살던 자기의 욕심에 의해서 임의로 하나님이고 예수고 자기 마음대로 패턴을 만들어서 이게 내가 믿는 천국이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백이면 백 다 달라요. 하나님, 예수, 천국 다 달라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여기에 방정식을 주면서 공식을 줬는데 그 공식이 십계명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이고 확실한 겁니다.

모세가 율법을 들고 왔다는 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쓰임 받는다는 뜻이에요. 이 말은 모세도 모세 나름대로 이름이 있잖아요. 남들이 모세라고 부르든 모시라고 부르든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어요.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만들어지게 되면 자신은 하나님의 이름에 속한 사람이지 내 이름에 속한 자기 존재가 아닌 겁니다.

그게 오늘날 성도가 그래요. 우리가 이씨, 박씨, 최씨 다 달라요. 어떤 이름이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구약에 이뤄진 그 사태가 신약에 오게 되면 본격적으로 반복이 됩니다. 완성 상태에서 그렇게 되거든요. “주여, 우리는 어디로 가야 됩니까?” 우리는 어디로 가야 돼요?

방정식이 이미 나왔잖아요. 이 포물선 y=ax+bx+c 이 위치에 해당되는 점들의 집합이에요. 여기에 세리가 오든, 창기가 오든, 그 사람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았던 상관없이 이 원리원칙에 준해서 개인의 욕심과 고집과 상관없이 주님의 열심과 고집에 의해서 반드시 이 방정식대로 살게 돼있어요.

그 방정식이 십계명. 하늘에서 모세가 양손에 들고 내려옵니다. 뭘 들고 옵니까? 오늘 본문 32장 15절에 보니까 두 돌 판을 들고 옵니다. 이것은 고정된 거죠. 하나님의 뜻은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뜻이 뭐다? 십계명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십계명 속에 하나님이 계시고 십계명 속에 들어올 때 이 포물선 안에 들어있어야 이 선을 주신 하나님과 합류가 되고 영생을 얻는 겁니다.

이 공식과 원칙은 인간들이 머리 맞대고 의논한 게 아니에요. 뭐라고 했습니까? 십계명이지요. 십계명 속에는 우리의 이름이나 우리 교회 이름이 없다는 것. 십일 계명에 새순교회는 어떻게 하라. 이런 게 없습니다. 십이 계명, 우리교회는 어떻게 하라. 이런 것 없지요. 십삼 계명, 장로 뽑을 때는 제직회 ⅔이상으로 하라. 그런 게 있습니까? 그런 건 이 포물선 바깥에 있지요. 포물선 바깥에 있으니까 사람들이 포물선은 주님의 이름으로 하기 때문에 애굽에서 탈출한 상태에서 이미 애굽과 상관없이 애굽의 사람을 건지기 위한 애굽 외적 요소에서 포물선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만 이해하지 사람들은 이해 못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말씀을 이해 못합니다.

그런데 제직회할 때 ⅔이상 찬성하면 장로 된다는 것은 세상에나 성령을 안 받아도 어떻게 잘 이해하는지. 설교자가 십자가 이야기 하니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다가 설교자가 와이셔츠 새로 사니까 어디서 샀지요? 어디서 샀데. 그건 아주 납득이 잘 돼. 참 보통 문제 아닙니다. 말씀 이야기하면 못 알아듣고 포물선 바로 옆에 점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그런 건 잘 이해하고.

예를 들면 포물선 옆의 점을 A라 합시다. 위에 어떤 점을 B라 합시다. 포물선은 이해 못하면 A, B는 이해한다는 말은 선이 자기 마음대로 형성돼있다는 뜻이거든요. 이렇게 형성된 선이 진짜 주의 말씀을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십계명을 주신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십계명의 말씀을 방해하는 그런 무리로써 애굽에서 나왔다고 보시면 되는 거예요.

그 무리의 집합에 대해서 돌 판은 어떻게 됐을까요? 깨졌지요. 이건 곧 모세의 깨짐입니다. 장차오실 예수님의 몸의 깨어짐, 십자가의 죽으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거든요. 약속이 깨지는 거예요. 약속이 깨지면 약속은 없는 겁니다. 약속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없으면 그들은 애굽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거예요.

장소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끄집어내고 바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로 하여금 한 곳을 거치게 했지요. 휴게소? 호두과자 사먹으려고? 차에 기름 넣으려고 휴게소 갑니까? 휴식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본격적으로 전에는 애굽과 싸웠는데 이제는 애굽화된 너희와 싸울 거야. 그래서 이스라엘은 결국 하나님의 하나님 됨의 진수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에게는 싸움의 대상이 필요했고 궁극적인 싸움의 대상이 소위 구원받았다는 자기 백성의 최후의 적으로서 등장되는 겁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된 자인데 예수님이 화목제물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를 얻는다.

그러면 예수님의 화목제물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의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것을 전제로 깔아야 돼요. 우리는 신자였다. 우리는 교인이었다. 그것 소용없습니다. 우리는 윤동주였고, 하나님의 포물선 이해 못하고 우리는 바깥에서 유사 포물선을 만들어내면서 자기가 만든 포물선에서 자기가 돗대질하고 자기가 스타가 되고 자기 자존심이 유지가 돼요. 이것이 주로 자기의 신앙생활, 교회생활의 역사거든요. 나는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 잘해 왔다는 뜻이란 말이죠. 나는 이런 식으로 목회 잘해 왔다는 뜻이란 말이죠.

이게 바로 진짜 주님과 충돌지점이라는 사실을 누가 알겠습니까. 알 수가 없지요. 자기는 비슷하게 간다고 이 포물선과 나란히 같이 가는 줄 알았지요. 그야말로 ktx 다니는 철로와 무궁화 다니는 철로가 대구에서 구미까지 갈 때는 비슷하게 가요. 구미부터는 확 달라지는데. 한쪽은 굴로 들어가고 한쪽은 맨땅으로 가고. 이 말은 한쪽은 십자가로 가버리는데 이쪽은 십자가를 피해서 가는 천국을 늘 상상하고 있는 거예요.

베드로가 자신의 존재의 바다가 있었어요. 내가 속한 바다. 부자 청년은 맨몸으로 주님 앞에 나온 게 아닙니다. 자기의 존재의 바다를 끌고 주님 앞에 나온 거예요. 그의 존재의 바다는 부자라는 거예요. 부자로써 어릴 때부터 십계명 지킨 청년. 그걸 줄이면 부자 청년. 다른 말로 하면 착한 부자 청년. 영생을 얻고자 할 정도로 마음이 순진하고 순박한 착한 부자 청년. “예수여,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주님께서는 가위를 준비했습니다. 뒤에 부자 청년의 존재의 바다를 끊고 나를 따라 오너라. 부자 청년이 보니까 자기의 부자 된 존재의 바다가 없으면 자기 존재의 가치도 없거든요. 결국 부자 청년이 노린 것은 영생도 아니고 주의 나라도 아니고 자기의 나라, 내가 영원히 영광 받는 내가 절대 신으로 추앙받는 내가 이만큼 잘났다는 것을 영원토록 자랑질할 수 있는 그 세계를 얻고자 그는 자기 존재의 바다를 끌고 온 거예요. 모든 걸 팔고 오너라. 잠시 근심하다가 “우리가 가는 길이 서로 다른 모양입니다.” 하고 끝났지요. 그런 이야기 얼마나 많이 들었다고요. 왜 그런데요? 십자가 없이 갈 수 있는 천국을 제공하라. 터널 속으로 안 가고 계속 내가 잘난 존재로 인정받으면서 갈 수 있는 그런 소식을 제공해달라는 거예요.

언약을 깨어져야 됩니다. 깨어짐으로 말미암아 이 백성들은 이제는 없습니다. 출애굽 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도 애굽은 있어요. 산 밑에. 모세 혼자만 출애굽했지요. 나머지는 애굽에 그대로 있었던 거예요. 애굽이 엿가락처럼 늘어진 거예요. 저쪽에 지리적인 애굽 있고, 정신적인 애굽은 광야에 있고. 따라서 애굽밖에 없으니까 출애굽을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새로 시작하는 근거가 뭐냐 하면, 언약은 깨어졌다. 언약이 깨어졌으니까 깨어진 언약을 누가 본드로 이어지게 하지 않는 한 그들은 애굽에서 천국으로 건너올 다리는 설치가 안 됩니다. 설치가 안 되면 언약을 타고 천국을 갈 수 없어요. 이 포물선과 그 옆에 임의의 무수한 점들의 집합에서 이 포물선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은 끊어졌어요. 여기는 공식, 십계명이 있는데 십계명, 돌 판이 깨져버렸으니까 아무도 들어올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그냥 애굽이에요. 애굽에서 합류될 수 없어요.

바로 깨어진 요소에서 깨어짐을 이어줄, 이렇게 봅시다. 첫 번째, 깨어졌다. 두 번째, 깨어진 것이 자체적으로 언약이 회복되려면 자체적으로 다시 회생돼야 되겠지요. 그분의 가족에 의해서 깨어진 것이 스스로 회복될 경우에만 이 작업은 다시 반복이 될 수 있는 거예요. 죽어야 될 그분에 의해서 그분이 다시 사흘 만에 살아나야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언약 덩어리기 때문에. 이 절차가 있어야 돼요. 언약은 반드시 깨어져야 되고 깨어진 증거를 가지고 거기서 다시 재생돼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이 죄인인 것이 드러나지 않아요. 이들이 하나님의 원수인 것이 티가 나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어떤 존재냐 하는 것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십자가 앞에서만 진정된 내 모습이 비로소 발각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설교의 마지막 결론을 십자가 외에는 다른 소리를 할 수 없는 이유가,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이미 하나님의 일에 참여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잘났다, 못났다는 차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지려면 그들이 뭘 느껴야 되느냐 하면, 누구 때문에 죽었으며 어떻게 해서 죽었다고 여겼던 것이 다시 영생이 제공되었는지 그 사건들이 일어난 십자가를 밟아 와야 돼요. 십자가를 비껴가면 안 돼요. 구경하면 안 돼요. 박수치면 될 문제가 아닙니다. 실제로 그 길을 가야 돼요.

지난번에 했습니다만 32장 8절에 보면,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송아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우상입니까? 염소 만들었으면 우상 아닙니까? 지금 송아지냐, 코끼리냐, 망아지냐 그게 문제가 아니지요. 앞에 뭐가 붙어요? 자기를 위하여. 자기가 어디서 살던 자기입니까? 애굽에서 살던 자기거든요. 애굽에서 살던 자기를 위한다는 것은 애굽 자체를 포용하겠다는 겁니다. 애굽 떼어내면 살 길이 없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나무 옮길 때 나무만 알맹이처럼 옮기는 게 아니잖아요. 그동안 정들었던 동고동락했던 흙을 노끈으로 묶어서 옮긴단 말이죠. 인간은 몸으로 살지 못하고 그동안 자기와 함께 했던 친구들, 그들의 사고방식, 생활패턴들과 뭉쳐져서 이걸 보장해주는 하나님은 우리를 좋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믿겠다고 나온 거예요. 미쳤어, 미쳤어. 다들 그래요. 그럼 이걸 어떻게 고칠 것인가? 그건 10분 쉬고 해야지요.

한윤범(IP:14.♡.134.60)

14-06-11 11:48

20140606b 울산강의-출애굽기 32장 : 유사 메시아
(강의:이근호 목사)

모세와 함께 있으면서도 애굽 생활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애굽으로 되돌아갈 생각만 했다. 그러면 그들이 생각하는 천국은 뭐냐? 애굽 같은데 애굽에서 원했던 것을 충족시키는 세상을 그들은 하늘나라로 본 겁니다. 사람이 사는 게 힘들잖아요. 그러니까 그 힘든 것을 제거해주는 이상 세계. 아마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이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내가 나를 사랑하는 그 내용을 절대로 하나님께서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거죠.

“하나님이여, 나는 이렇게 살고 싶고 이런 인간이 되고 싶고, 이런 인간으로 대우받고자 원합니다. 그것은 나한테 내가 너무나 사랑스럽게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여,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이상으로 사랑할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기대하는 세계는 바로 내가 기대하는 세계가 실현될 때 구체화 될 때 나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싶습니다.”라는 것이 그들이 우상성이었습니다. 방금 제가 길게 이야기했지만 간단하게 종교 또는 교회가 되는 겁니다.

성경을 펼치면 그것이 이스라엘의 내부에서 그런 것들이 주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다수는 그렇게 생각해왔어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초장부터 멸망해야 됩니다. 그런데 분명히 이스라엘은 우리와 똑같아요. 자기 야망밖에 몰라요. 그런데 다른 민족과 차이점이 있다면 그 대세 가운데서 뭔가 꿈틀거리는 게 있어요. 다들 그런데 다들 그렇게 하는 게 맞는데 뭔가 그것과는 대비가 되면서 고난 받고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면서 대신 희생하고 값을 치루는 다른 엔진이 가동되면서 용서받지 못할 자가 꾸역꾸역 용서받으면서 계속 인도함을 받는 거예요.

그 엔진부분이 제사법입니다. 어린양이 매일 아침저녁마다 우리 대신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누가 그걸 시켰느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하기에 일어나는 특이현상입니다. 그 특이현상이 우리 인생 가운데서도 날마다 반복돼야 돼요. 내 뜻은 이건데 이상하게 내 뜻대로 안 해주시는 그 고마움. 말이 이상합니다만 내 뜻을 좌절시키는 배려하심, 따스한 사랑, 나를 당혹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드는 그러한 깊숙한 개입, 이런 것들로 인하여 방향틀기가 되는 거예요.

그런 일이 일어나면서 반복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뭐냐? 주님은 이미 확정된 규칙대로만 움직인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도 우리의 아부, 뇌물, 재롱도 일체 받지 아니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의 원칙대로 자체적인 프로젝트대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거기에 우리는 종으로 말려들어간 겁니다. 마치 정미소에 무섭게 돌아가는 벨트에 말려 들어가면 획 돌아가잖아요. 우리도 마치 그런 발전기에 끼어들어간 거예요. 거기서 우리는 부스러지고 인생이 산산조각나는 체험을 하면서 이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중심에는 내가 있지 않고 다른 분이 우주를 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깜짝깜짝 놀라면서 순간순간 그걸 느끼게 만듭니다.

제가 두 번째 시간 초반에 쉽게 말씀드린 것은 첫째 시간보다 더 어려운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기죽지 말라고 먼저 쉽게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가 뭐냐 하면, 제가 어려운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어려운 거예요.

32장 10절에 보면,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여기에 진노, 분노란 단어가 나오지요. 이것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빼놓고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두 분 사이에 이야기의 주제가 하나님의 진노하심이지요. 이걸 밑에 있는 백성들은 까마득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저 사랑타령만 있어요. 온 교회마다 사랑만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나 정작 우리를 구원할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뭐가 주제입니까? 내 진노를 퍼부어야 되겠다는 겁니다. 그 당시에 모세가 말렸지요. 하나님께서 약속해놓고 약속을 취소하면 다른 민족들이 하나님이 일관성 없다고 얼마나 욕하겠습니까. 약속은 유지하면서도 진노는 진노대로 퍼부을 수 있는 어떤 대책을 세워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구원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둘 다 성취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주시면 고맙겠다고 나오는 거예요.

그걸 신약에서는 바로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의 진노를 대신 감수하겠다고 나온 겁니다. 그래서 구원받을 사람은 예수님의 죽으심 속에서 내가 받을 저주와 심판과 영원한 지옥 불을 그분이 대신 감수했다는 사실을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그걸 간파하고 있는 그들에게만 구원의 능력이 나의 행함이 아니고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십자가에만 있음을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에요.

그러면 지금까지 한 것이 뭐가 어려우냐? 쉽지 않느냐 하지만 들어가 보면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왜 어려우냐 하면, 율법이 확정됐잖아요. 그럼 생각해봅시다. 모세에게 오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직접 십계명을 하늘에서 낙하산으로 보내시면 어떻게 됩니까? 십계명을 미리 주고 지키라 하고 올라오면 어떠냐 말이죠. 이미 출애굽기 20장에 십계명 줬잖아요. 그들 생각은 뭐냐? 우리가 거룩한 백성이니까 거룩하게 합당하게 실천에 옮겨야 될 책임 있는 백성이구나. 십계명대로 지키면 되겠다고 생각했지요. 뭐가 빠졌어요? 우리한테 미리 줬던 돌 판이 우리로 인하여 깨진다는 사실을 사전에 몰랐지요.

이것은 열두 제자들도 몰랐어요. 예수님께서 어부인 베드로에게 “이게 내 못자국이다. 미리 십자가 졌거든. 이제는 고기 잡지 말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지요. 그냥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불렀지요. 십자가 지기 전에 불렀지요. 십자가 지기 전에 부르니까 제자들 사이에 기대하는 있었어요. 하늘나라에 가서 누가 높으냐? 이제 그것만 남은 거예요. 자기는 든든한 백이 있으니까. 메시아는 우리와 한편이고 우리를 구원해줄 거니까.

심지어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내가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네가 열두 고을 친히 다스릴 것이라고 했거든요. 이제는 누려~. 주님 따라서 누리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걸 누가 못해요. 주님 따라서 고생하더라도 그 고생한 보상이 온다면 고생하는 것도 즐겁지요. 그런데 주님이 막상 고난 받는다고 할 때 베드로가 나서서 반대하고 열두 제자 다 도망갔지요. 베드로가 세 번씩 부인했지요. 그러면 그들은 뭐였습니까? 그들은 오해해도 보통 오해한 게 아닙니다. 크게 착각을 한 거예요.

여기서 어려운 거예요. 어떤 게 어려우냐 하면, 준 메시아. 메시아는 아닌데 메시아에 준한 생활을 제자들이 하게 되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이란 인간의 모든 삶의 원형이 바로 예수님에게서 나왔다는 이야기를 해드리는 겁니다. 유사 예수, 유사 메시아 생활을 사람들은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거예요.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내가 바로 절대자다, 내가 신이다.” 이것은 무의식 가운데서 툭툭 튀어나오는 게 결국은 내가 신이라는 그 모습이 나오는데 그 모습을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유발시킨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이것은 인간은 아무리 도망쳐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돌아가는 데서 벗어날 수가 없게 돼있어요. 그게 로마서 5장 14절. 아담은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모든 인간은 준 메시아적인 생활을 하고 자기가 그런 생활을 하는 이유를 모르면서도 장차 나중에 보니까 예수님의 흉내를 내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지옥 가든 천국 가든 상관없어요. 전부 다 예수님 흉내 내면서 살아온 거예요. 마귀에 의해서.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가? 가짜와 진짜를 또렷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네가 어떻게 살았던 간에 그것은 인간이 아닌 거예요. 준 인간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인간, 하나님이 처음 창조했던 참된 사람을 모방하는 정도에서 끝나지 하나님이 기뻐하고 원래 원했던 그 인간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거예요. 그러면서도 짐승처럼 살지도 않아요. 유사 인간으로 살아가야 되는 겁니다.

그 이유가 율법, 하나님의 십계명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십계명을 인간에게 준 것은 원래 십계명의 최종 수용자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계명의 완성자에게 십계명이 주어져야 돼요.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럼 줄 때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에게 주면 될 텐데 어떻게 주느냐 하면, 매실차를 뒤에 계신 분에게 줄 때 그냥 가서 주면 되는데 전달시키면서 가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십계명 보면서 이것 지키면 신되겠다고 홀짝홀짝 마시는 거예요.

그런데 율법을 마시면 저주받게 돼있어요. 율법을 더한 것은 저주받기 위해서 준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주제 파악도 안 된 상태에서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율법을 받는 겁니다. 전달하라고 줬는데 그들은 지켜서 의롭게 되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율법 받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순간 이것 지키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오해를 유발시킵니다. 그게 갈라디아서 2장에 나오지요.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지를 않았다. 율법으로 의로움을 성사할 수 있다면 구태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지 않았다는 거예요. 안 되는 줄 알면서 율법을 왜 줬느냐? 바로 예수님의 죽음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한 겁니다. 이 점이 어렵다는 거예요.

내가 울산에 왜 사느냐? 예수님을 죽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이란 말이죠. 그냥 죽지 율법 주고 죽느냐. 하나님께서 율법을 줌으로 말미암아 내가 자체적으로 율법을 얼추 지켰다고 생각하게 해서 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원하는 천국 가는 바탕이 장만되었다고 자부해서 그 자부된 사람에 의해서 진짜 메시아가 살해되는 방식으로 죽음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한 겁니다.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가짜 인간들 품속에서 끄집어내고자 하는 거예요. 따로 예수님이 자살한 게 아니고 자기를 죽이도록 유도하신 거예요. 너희들이 없으면 죽음이 없는 거예요.

이런 작업이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만날 때부터 시작했어요. 예수님이 오셨을 때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뭡니까? 물속에는 죄 있는 자만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시면 안 됩니다. 세례요한이 오해한 게 뭐냐 하면, 물세례 받으면 깨끗하게 된다고 오해한 거예요. 세상에 이런 오해가. 물 뿌려서 깨끗하게 되면 물 한 다라 뒤집어쓰겠다.

세례요한은 하나님께서 시켰기 때문에 분명히 의로운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은 의로운 것 맞아요. 하지만 우리 자체가 문제기 때문에 그 의로움이 우리 속에는 의로운 게 아니고 변질돼요. 그 변질된 상태를 하나님께서는 의롭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이러니 제 말이 어렵지요. 죄인을 더욱더 죄인 되게 한 것을 주님께서는 박수친 겁니다. 성공한 거예요. 율법을 준 것은 죄인으로 하여금 더욱더 죄인 되게 하는 거예요. 그 박수소리 듣거든 따라서 박수치세요. 죄인 되게 해서 감사합니다.

사람이 자기가 죄인인 걸 아는 순간 졸지에 천국으로 변해요. 왜냐하면 모든 것이 내가 신경 쓸 문제에서 떠나기 때문에 그저 축복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내가 죄인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가게에 손님 하나 안 와도 내가 거기에 대해서 신경 쓸 이유가 없어요. 고3 둔 부모가 신경 쓰는 이유가, 딸이 고3인 게 문제인 게 아니고 자기가 죄인의 자리에서 벗어나서 그래요. 이혼한 것 때문에 신경 쓰는 것은, 자기가 이혼 당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깜빡해서 그래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지 못해서 그래요.

종은 자기 일이 없어요. 종이 자기 일을 챙기면 종이 아니에요. 분해된 자기가 주인 노릇해버린 겁니다. 여러분 달란트 비유 알지요. 그게 뭐가 문제냐 하면, 주님이 있을 때 종으로 행세하다가 막상 주인이 떠나니까 평소에는 종인 척 했지 결코 종이 아니었다는 게 드러난 거예요. 진짜 자기가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종이라면 주인이 준 한 달란트를 은행에 넣고 이자 받아야 돼요. 그런데 주인이 가니까 그냥 묵혀놨지요. 왜? 내 돈이니까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거예요. 주인이 떠나니까 비로소 본색을 드러낸 겁니다. 떠난다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 손에 죽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받는 사람의 절차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내가 예수 믿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그런 절차가 필요해요. 예수 믿을 만큼 믿었는데 아무 이득이 없다. 이제부터 내가 예수 믿으면 개다. 주께서는 박수를 치는 겁니다. 이제야 그런 소리가 나오는구나. 이제 시작하자. 그런 너를 어떻게 천국 보내는지 내 솜씨를 봐라. 구원은 절대로 타협의 대상이 아니에요.

목사가 구원받는 방법은 목회 실패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내가 정말 목사가 아니었다는 것을 목회하면서 죄인인 것을 알 때 목회는 누가 하느냐? 처음부터 목사가 하는 목회는 이 세상에는 없었는데 남들 신학교 나와서 다 하니까 자기도 한 다리 걸치면 되는 줄 알았지요. 천국 가 보세요. 목회자는 한분밖에 없어요. 예수님. 다른 사람은 목회자가 아니라 죄인이었어요.

어떤 사람은 십일조하는데 이 세상에 십일조 받을 위인이 없어요. 원래 십일조는 제사장이 받거든요. 십일조 내고 자시고 간에 받을 사람이 없다니까. 십일조 받을 창고가 없다니까. 제사장이 없어요. 만일 제사장이 있으면 십일조만 받지 말고 양도 잡아야 돼요. 교회 올 때 양 들고 오세요. 지금의 십일조는 성도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여러분한테 해요. 그러면 돼요.

십일조란 율법이 왜 필요하냐 하면, 십일조 율법을 지켰다는 시점이 와요. 십분의 일 낼 때 빳빳한 오만 원짜리 봉투에 넣을 때 어떤 마음이 드느냐 하면, “나는 십일조 했습니다. 십분의 일 드렸습니다.” 하는 그 순간 주께서는 박수를 칩니다. 예수 잡아 죽일 인간 등장했구나. 율법을 주신 것은 어떤 율법도 나를 의롭게 할 수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했는데 그들은 이 율법만큼은 지켰다고 자신만만한 그런 사태를 유발해서 사실은 아무도 없는데 있다는 사람을 등장시켜서 그리스도가 누구 때문에 죽었는가를 그 관계에 엮이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겁니다.

그래서 율법 없는 십자가는 없습니다. 이방인들도 예수 믿게 되었으면 구약을 다시 거쳐서 올라오세요. 이스라엘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에요. 율법 지켰다고 거룩한 백성, 거룩한 교회라고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고 설마 우리는 도와줄 것이라고 오해했던 그들은 망했습니다. 누가 망하게 했는가? 하나님에 의해서 망했습니다. 그게 구약역사에요.

하나님에 의해서 망했을 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나를 망하게 했다는 사람만 구원을 받아요. 그게 바로 아까 이야기한 포물선이죠. y=ax+bx+c 이 포물선을 십계명으로 확정되었지요. 율법은 누굴 증거합니까? 율법을 지키라는 것으로 마감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곧 나로 마감돼요.

컵이 있잖아요. 이 컵의 물을 마시라는 율법이 주어졌다면 우리는 오해하기를 마셨습니다. 율법을 실천했다고 할 때 왜 우리는 마심으로써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합니까? 평소에 우리는 율법을 내가 지킬 수 있다고 살아가거든요. 우리는 준 메시아, 준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본인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하나님도 아닌데 당황하지 않고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천천히 가면서 율법을 지킴으로써 끝, 구원의 끝에 이르렀다고 보는 거예요.

철저하게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농락당한 겁니다. 사울 왕은 제사 드려야 전쟁에 승리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제사는 제사장만 드리잖아요. 기름부음 받은 자가 와야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사울은 기다렸습니다. 약속 시간이 돼도 사무엘은 오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전쟁에 승리해야 되겠고. 그러면 뭘 생각해야 됩니까? 제사를 드려야 승리하니까, 민수기에 보니까 전쟁할 때는 언약궤 앞에서 제사를 드려라. 그러면 언약궤 앞장세우면 승리하고 밀리면 패배한다는 그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순간 이미 그 말씀은 위배된 거예요. 이걸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기 본색이 드러나면서 말씀은 깨어진 겁니다. 그건 준 메시아 역할을 시도한 거기 때문에.

진짜 메시아는 누굽니까?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이 앞장 세워 누굴 보냅니까? 그 당시에는 사무엘을 보내거든요. 참 사무엘도 얼마나 가려고 얼마나 했겠습니까? 가려고 하는데 “가지 마. 가지 말라니까.” 사울 왕은 사무엘이 안 오니까 전전긍긍하고 적들이 코앞에까지 왔다하고. “안 되겠다. 나라도 제사 드려야지.” 제사 드리고 나니까 사무엘이 도착해서 “너는 왜 제사를 드렸느냐?” “약속 안 지켰잖아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진작 그랬으면 순종했지. 사전에 어떤 이야기도 없었어요. 그리고 나라가 둘로 찢어질 것이라 하고 가는 사무엘을 사울이 잡으니까 옷이 둘로 찢어져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이벤트거든요. 짜고 치는 고스톱이에요. 사울은 인간적인 면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자 사무엘은, 나라를 너한테 빼앗아서 준비된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다.

그 이유가 뭐냐? 우리 이름은 육체가 먼저 있고 육체가 어떤 실천에 옮길 때 뒤늦게 내가 옮긴 행함과 말씀과 일치시키려고 애를 쓰는 반면에 주님의 이름은 신체가 없어요. 이름이 먼저 있고 이름은 신체가 없기 때문에 그 이름을 신체 있는 인간이 믿을 수가 없어요. 그 다음에 그 이름으로 어떤 사태를 유발시키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인간은 예상 못하거든요. 예상 못하기 때문에 예상 못할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예상 하면 예상한 것만 빼고 예상 못한 다른 것으로 가버려요. 그 말은 하나님이 새삼스럽게 우리에게 기대를 걸지 않아요. 일방적으로 갖고 노시는 겁니다. 결국 메시아를 말씀을 통해서 드러내되 그냥 단독으로 드러내시는 게 아니고 바로 죄인들 속에서 드러내기 위한 애초부터 주어진 전략이기 때문에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도 못하면서 지킨 양 하는 마음껏 거들먹거려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겁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돌 판을 깬 이유를 아시겠지요. “모세야 돌 판 들고 가거라. 가봐야 소용없을 거야. 안 믿을 거니까.” “그럼 여기서 깨겠습니다.” 그것도 안 돼요. 모세가 들고 와야 되고 우상 섬기는 소리를 들어야 되고 모세가 화가 나서 돌 판을 깨뜨려야 되고 그래서 돌 판은 처음부터 깨어져야만 하는 돌 판임을 차후적으로 소급해서 다시 발견케 하는 겁니다.

그럼 모세가 해야 될 것은 뭐냐? 이제부터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미 출애굽기 32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같이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겠다고 하지요. 율법에 근거해서 새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그럴 때 모세가 하는 말이, 그들을 지금 버리면 하나님께서 하신 맹세가 이뤄지지 않습니다.

이게 32장 13절에 나와요.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그러면 모세와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일을 어떻게 추진하겠는 겁니까? 아까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분노하심은 그대로 드러내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 자손을 별처럼 많아지게 하는 두 가지를 다 이뤄지게 해야 되겠지요. 이뤄지는 방식에 대해서 모세가 제안한 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됩니다.

함께 하신다는 말은 율법을 주신 분이 함께 하게 되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율법을 지키고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못 지키지요. 지키는 분이 못 지키는 백성과 동행하게 되면 결국 율법은 지켜지는 거지요. 나중에 둘이 나란히 가게 되는 최종 상태, 그 상황을 천국으로 굳어지게 하는 거예요. 천국에 가서 면류관도 반납하게 하는 겁니다. 면류관도 아낌없이 내놓으려면 율법을 못 지킴이 나란히 이뤄져야 되겠지요. 그러면 율법을 지킨 분이 율법을 못 지킨 죄를 담당해야 되겠지요.

이렇게 되면 주님은 사랑만 있고 하나님의 진노는 사라지잖아요. 진노는 하나에 과정에 불과하잖아요. 결국 봐주는 게 되니까 앞에 진노하심은 있으나마나 날아가 버렸죠.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가 도중에 날아간 셈이 되고 사랑에 흡수되었으니까 하나님의 진노란 속성은 날아가 버리게 되잖아요. 이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어렵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님의 무서움도 있어야 된다 말이죠. 있으려면 어떻게 하느냐? 사람을 진노하시되 약속을 살리는 거예요. 사람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구원을 구원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를, 맹세를 구원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는 자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을 구원하는 거예요.

로마서 1장 17절, 내 딸 결혼식 때 주례내용이 뭡니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오직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믿음에서 믿음이지요. 사람들은 그걸 오해해서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내가 믿는 자되면 되겠구나. 믿음에다 나라는 인간을 갖다 붙이는 거예요. 믿음만 거치지 인간을 거치지 않는 거예요. 이걸 떼어버리면 인간은 믿을 자격도 없는 죽을 죄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를 죽여 놓고 주님의 믿음이 우릴 건지면 우리는 죽은 자로 구원받기 때문에 결국 내가 믿는 자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님 주신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된다 이 말이죠.

중요한 것은, 주님이 선물로 준 믿음이고 그 믿음의 행위의 주체는 내가 아닙니다. 행위의 주체는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옴으로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는 거예요. 그걸 더 쉬운 말로 하면 주님은 날마다 나를 군화발로 밟고 우리는 밟히는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아예 그게 없거든 얼굴에 군화문신을 하세요. 날마다 면상에 주의 군화에 밟히고, 밟혔다고 좋다고 감사하고.

주님에게 밟힌 사람들의 장점이 뭐냐 하면, 사람이 무섭지 않은 거예요. 그리고 자기 인생이 어떻게 끝나는 것에 대해서 미리 걱정하지도 않는다는 거죠. 오늘날 밟혔는데 이것보다 더 심하게 밟힐 리가 있습니까. 완전히 인간도 아니고 개 취급 받았는데. 주님의 믿음 안에 개도 구원받는다면서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는 개로서 관계를 맺으니까 그 관계로 구원받는 거예요. 개 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개로 취급해서 구원하는 그 취급 자체를 주께서 온 선물로 수용하는 겁니다.

인간이 믿으면 인간의 믿음이라 하지 않습니다. 믿는 행위라 하지요. 그건 행함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행함으로 구원받으면 치매 걸리면 문제 생겨요. 예수님이 누구지? 자기 아들도 못 알아보는데 어떤 아저씨를 어떻게 알아보겠어요. 치매 걸리게 하신 주체가 보내신 믿음이 있으면 나를 치매 걸리게 하던 강도로 만들든, 창녀로 만들던 간에 그 믿음은 한결같이 변하지 않습니다. 왜? 그 믿음은 내가 만들어낸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매일 삶이 내가 만들어낸 어떤 개념과 주님이 주신 개념이 늘 매일같이 우리한테는 눈만 뜨면 충돌을 일으켜요. 오늘도 아침에 눈을 떴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 둘이 손잡고 기도하면서, “오늘도 승리하는 삶을 살자.” 주께서 “놀고 있다. 뭐가 승리인데. 오늘도 군화발에 밟힐 생각해라.”

보람찬 하루 끝나고 보세요. 만신창이고 걸레도 그런 걸레 없습니다. 하여튼 내 뜻대로 안 되게 돼있어요. 그런데 내 뜻대로 됐잖아요. 그때는 알아서 기어야 됩니다. “주여, 내 뜻대로 안 돼야 되는데 내 뜻대로 되는 저주를 퍼부으십니까? 왜 제 기대에 응답하시는 수모를 저한테 주십니까?”

정리하면 율법 속에 그리스도 들었다. 그런데 사람이 율법 지켜서 그리스도로 행세하려고 했다. 율법 속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와 내가 말씀을 지켰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라는 대충돌이 하나는 율법에 대한 X고 하나는 O가 되는 거예요. 동행하겠다는 겁니다. 동행하면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되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되었지 동행하는 너희들의 몫은 아니고 너희들의 공로는 아니라는 것을 통해서 새롭게 전개되는 이스라엘이 탄생합니다. 죄인마저 구원하시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탄생, 이미 십계명부터 시작된 거예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안식일을 어기면 돌 던지라고 나오지요. 분명히 율법입니다. 사람들은 평소에 말씀대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기 때문에 걸리기만 해라. 하고 있는데 막상 누가 안식일 어겼다는 소식에 돌 던지려고 했는데 자기 올케, 자기 처남, 심지어 자기 딸 그것도 유학한 딸,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란 말이죠. 갑자기 자긴 빠진다고 하는 거예요.

율법에 대한 벌칙이 주님이 내린 벌칙과 우리 스스로 내린 벌칙이 큰 차이 남을 보여주기 위해서 벌칙을 주신 거예요. 남한테는 엄중하게 법을 집행하지만 자기가 아는 사람, 자기와 가까운 사람, 자기 집안 식구, 피붙이에 대해서 왜 그렇게 관대한지. 관대해도 너무 관대해. 자기가 투자한 교주는 숨겨주고 도망치게 만들고. 전부 사업을 했기 때문에 자기 교주를 숨겨주는 겁니다.

예수님이 교주라고요? 교주 같으면 말씀대로 해야지. 교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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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727건 중 3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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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