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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유튜브(76강, 77강) 믿음 아닌 것, 포도나무 140605강의로마서

유튜브(76강, 77강) 믿음 아닌 것, 포도나무 140605

이름 : 이근호(IP:119.18.90.53)

76강

77강

공은주(IP:211.♡.100.128)

14-06-20 13:33

76강-YouTube강의(믿음 아닌 것)140605-이 근호 목사

제목은 믿음 아닌 것입니다. 보통 성경에서 “믿어라” 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렇게 할 때, “믿겠습니다.” 이렇게 돼요. 그것은 뭐냐 하면,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추가적으로 믿게 되면 그것이 믿는 게 된다. 그렇게 생각 드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해버리면 믿음을 추가적으로 가지게 될 때,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자기의 성량은 다치지 않고 현재 기존의 것은 그대로 보존하면서 추가적으로 믿음이 새롭게 새로 들어온 속성처럼 첨부가 가능한 것처럼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엄청난 오해입니다.

성경에서 성령님을 통해서 믿음이 들어왔을 때는 기존에 있던 자기가 그동안 갖고 있던 모든 성량들의 질서가 재편됩니다. 영향을 받아요. 그냥 믿음하나 더 추가되는 게 아닙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서 믿어라, 할 때는 그냥 곱게 순하게 믿음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들어와 버리면 기존에 알던 모든 것이 다 파괴되고 무너지고 사실은 일시적으로 혼란 상태에 빠집니다.

이사야6장에서 이사야가 고백하기를 하나님을 만났을 때,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 라는 고백을 하거든요. 이것이 내가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믿음 하나 더 추가했다, 이게 아니고 기존에 있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망해도 상관없는 것들을 내가 쥐고 있었다, 이리 되는 겁니다.

믿음이 들어오게 되면, 그동안 나한테는 중요하다 이것 없이는 못산다. 나는 이것 때문에 버텼다, 하는 모든 것들이 믿음이 들어오면서 부질없는 것, 쓸데없는 것을 붙잡고 있었다는 것이 그만 노출이 돼요. 이것이 발각을 당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언급할 때, 그냥 믿어라, 하는 추가적인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 믿음이 아닌 것이냐, 하고 병행해서 말씀을 주시고 여러 가지 일들을 일으켰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 갔을 때에 풍랑이 일었지 않습니까? 그 때 제자들이 자기는 믿음이 뭐고 간에 당장에 풍랑이 이니까 자기의 평소에 있던 자신의 모든 행동을 취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취했지요.

그런데 그 평소에 하던 모든 조치가 주님보시기에 어떻게 판정받았는가 하면, 믿음 없음으로 판정받은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평소에 우리는 믿느냐, 안 믿느냐, 상관없이 그냥 평등한 일상생활을 했건만, 주께서 일으킨 사건 앞에서는 그 전체가 믿음 없는 일상이 되는 것으로 판정을 받게 되는 겁니다.

자, 여기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추가적으로 하나 더 발생시키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그 믿음이라 하는 것은 그 전에 먼저 알아야 될 것은 우리의 모든 일상적인 삶이 사실은 믿음 없는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을 완전히 노출시키고 발각시키면서 이것이 믿음이라고 우리에게 제공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면 되지요. 주님께서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무엇과 동행해서 동반되는가 하면, 무엇이 믿음이 아닌가와 동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이 동영상 설교에서 우리가 지금 진행해야 될 일은 뭐냐 하면, 무엇이 믿음이 아닌가를 믿음 앞에서 우리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 믿음이 아니냐고 물으면 “예수를 안 믿는 게 믿음이 아닙니다.” 이렇게 쉽게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사실은 그것보다 더 깊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로마서1장17절에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대목을 깊은 의미로 보게 되면, 여기에 의인이라는 말이 나오고 믿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주 결론적으로 말씀드릴게요. 논리로 따지면 복잡하니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무엇이 믿음이 아니냐 하면은, 믿는 자가 되려는 것이 믿음이 아닌 것이 되는 겁니다. 보통 믿음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믿는 자 되기 위해서 믿음을 가지는데 그것이 믿음이 아닌 게 돼요.

왜냐 하면, 출발점, 시작점이 내가 어떻게 하면 안 믿는 자에서 믿는 자가 되는가를 이렇게 벌써 전제를 깔았거든요. 그러니까 그 전제에 누가 담겨 있느냐, 내가 거기에 주인공으로 이미 시작이 되어있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믿는 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을 원하는 거거든요. 믿음을 원하니까 우리는 그 믿음 원하는 사실을 모르고 내가 믿는 자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잘못에 들어가느냐 하면, 내가 믿는 행위를 해버려요.

주께서는 믿음을 원하는데 우리들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예수님을 믿는 행위를 발휘할 수 있는 사람으로 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이게 믿음이 아닌 거예요. 왜냐 하면, 믿음이 아닌 것에 뭐가 포함되어있는가 하면, 어떻게든 내가 살아보겠다는 그러한 의도가 강한 욕구가 거기에 담겨있으니까.

주님께서는 그걸 잘라버리기를 원하거든요. 주께서는 믿음을 원하는데 우리는 “짜잔, 내가 믿는 자입니다.” 라고 자기가 믿는 자의 주인공으로서 등장되기를 간곡히 고대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믿는 믿음을 행한, 사실은 행함 자가 되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로마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믿음이 뭐냐 할 때는 반드시 행함을 이야기합니다. 왜냐 하면, 행함은 그 행함의 주인공이 있어요. 행함을 행하는 그 주체 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구원받는 믿음은 세상에 어떤 주체 자가 없어요.

그럼 주체 자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되느냐, 내가 뭐든지 내 중심으로 내 살리기 위한 중심으로 뭐든지 행함에서는 내가 행함의 주체로서 주인공으로서 등장하는 이 자체를 부정하는 그러한 능력이 임할 때, 그것은 바로 내가 아니고 다른 분에서 온 행함입니다. 그 다른 분에서 온 행함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로마서1장17절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와 협상하거나 타협해서 제공되는 게 아니고 그냥 일방적으로 덮치듯이 우리에게 나타난 겁니다. 하나님의 의의 주체 자는 누구냐,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천국은 하나님의 의가 없는 사람은 못 들어갑니다. 그러면 정리하게 되면 이렇게 되거든요. 천국은 있습니다. 천국은 있는데 천국에는 하나님의 의가 없이는 못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가 없이는 못 들어가는 이것을 가지고 로마서에서는 뭐냐 하면, “믿음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없이는 못 들어간다, 부정적 표현을 긍정적으로 같은 뜻인데 바꿔버리면 믿음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제공자는 내가 아니다, 이 말이죠. 우리는 믿음의 수용자요, 믿음의 피동자입니다. 믿음의 시작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결과물이 믿음이 우리에게 발생되는 결과물을 낳을 때, 우리는 비로소 결과적으로 믿는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믿으라고 하니까 우리는 덥석 그 믿음을 잡기 위해서 평소에 우리가 우리의 행동에 주인공 노릇하던 그 습관과 버릇을 그대로 동일하게 작용시켜서 내가 믿는 자가 되겠다고 나서버리면 그것은 바로 믿음이 아니고 그 시작이 나의 행함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건 행함에 속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1장17절에 보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 에요. 이것은 바로 우리 인간세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예수님의 작용이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작용으로 우리에게 유발시키고 발생시키게 되면 우리 속에 있는 주님의 주체로 이루어진 그 결과로 인하여 우리는 의인되어서 구원받는 겁니다.

공은주(IP:211.♡.100.128)

14-06-20 13:39

77강-YouTube강의(포도나무)140605-이 근호 목사

제목은 포도나무입니다. 포도나무라면 교회 좀 다닌 사람은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요한복음15장 이야기를 하게 될 거예요. 요한복음15장이 교회에서 상당히 유명하게 된 내력이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복음15장에 보면,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면 잘린다는 내용입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면 하나님이 친히 잘라버린다.

그러면 그 이야기 들었을 때에 자칭 스스로가 포도나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아, 나는 포도나무니까 이제는 편안하게 교회 다니면 하나님이 천국에 넣어주겠구나!’ 이렇게 안일하게 빠진 사람에게 어떤 자극 같은 내용이 되어버려요. ‘아, 포도나무라고 해서 구원이 다 이룬 게 아니구나! 요한복음15장에 보니까 열매 없는 포도나무일 수도 있구나! 그렇다면 포도나무는 됐으니까 이제 남은 내 일은 열매 맺기에 전념하고 전력하면 되겠구나!’라고 그런 메시지가 나올 수 있는 어떤 여지를 제공한 것처럼 생각이 되지요. 요한복음15장이.

예수님은 포도나무고 아버지는 농부인데, 너희들이 내게 과실을 맺지 아니하면 그것은 절대로 포도나무 아니고 잘린다. 따라서 과실을 맺으려면 어떻게 하느냐, 나한테 붙어있으면 과실을 맺는데 그런 경우에만 어쨌든 저쨌던 간에 과실 없는 가지는 천국에서 소용없다. 이렇게 정리가 되니까 ‘아, 신앙생활 정신 차리고 제대로 해야 되겠구나!’ 경각심을 유도할 수 있는 본문이 되어버렸어요.

그런데 과연 그 내용이 이 요한복음15장에서 나온 내용이 맞느냐를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 요한복음15장 포도나무 이야기는 비슷한 이야기가 구약에 나옵니다. 에스겔15장2절에 보면 나와요.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라고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먼저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은 사실은 에스겔을 대표로 한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을 이스라엘 전체에게 던지는 취지가 뭐냐 하면, 거기에 불에 던질 화목이 될 뿐이라, 요 대목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어떤 역할, 어떤 기능을 보여줘야 되는데 기능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진노하심, 하나님의 분노하심을 축복과 아울러 겸해서 같이 보여줘야 될 그런 역할을 이스라엘이 하도록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런 식으로 나라를 만든 겁니다.

이걸 오늘날 현대식으로 이야기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성도로 불러냈을 때는 “나는 복 받았다!” 그 이야기만 하라고 불러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저주가, 하나님의 진노가 이토록 무섭다는 것도 아울러 증거케 하기 위해서 그 사람에게 찾아드신 겁니다.

이것이 성도가 보여줘야 될 하나님의 속성이에요. 양면성입니다. 상반된 두 가지 면을 다 보여줘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런 면을 사람들은 모르고 내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느냐, 어떻게 하면 구원받느냐, 이런 쪽으로 주님이 주신 모든 말씀을 곡해를 하게 되는 겁니다.

자, 그렇게 곡해를 하게 된 결과가 뭐냐, 결국은 이스라엘처럼 멸망되고 마는 겁니다. 에스겔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를 다시 한 번 취지를 말씀드린다면, 이미 에스겔 자체가 이스라엘의 멸망이 확정된 거예요.

선지자의 두 가지 역할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적을 베푸는 선지자가 있고 또 하나는 문서 선지자가 있는데 문서 선지자는 이미 멸망과 심판이 확정된 상태에서 차후에 기록된 말씀을 볼 때에 ‘아, 주님의 말씀은 빈틈이 없이 차질이 없이 이루어지는구나!’ 그것을 확인하라고 그 말씀대로 멸망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보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떻게 하면 그 말씀을 이용해서 내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애초부터 그러한 경우는 주님께서 용납될 수 없는 태도라는 것이 분명해지는 겁니다.

포도나무라면 열매 맺는 기능뿐만이 아니고 열매가 없을 때, 어떻게 망하느냐 하는 기능까지 합쳐서 그것이 포도나무입니다. 따라서 두 가지 기능을 다 같이 보여줄 경우에만 이것이 주님 앞에서 무용지물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유지가 된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참, 어렵지요.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주님이 앞에 계시고 나는 여기 있고 주님을 이용해서 어떻게 구원받을까 할 경우에서는 그것은 관계가 끊어진 사람이고, 진짜 주님으로부터 이미 구원받아서 관계도가 형성된 사람은 “주님이여, 주님은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 분입니까?” 하는 그 면과 또 하나, “주님이여, 주님은 얼마나 무서운 분이십니까?” 그 상반되는 두 가지의 양면성을 다 같이 보여줄 요량으로 주님 앞에 준비된 그릇으로 살아가는 사람. 그러한 인식이 성도에게만 받아지는 인식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평소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이러한 기능은요, “하나님, 우리가 이번에는 축복된 것을 보여드릴게요.” “이번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드릴게요.” 우리가 결정할 사항이 아닙니다. 이것이 이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겁니다. 절대로 ‘이번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속성을 내가 보여드려야지’ ‘이번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드려야지’ 이걸 우리 쪽에서 결단내리거나 그걸 선택할 그러한 권리나 자격이나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그러면 없으면 어떻게 하는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사야6장에서 이사야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나는 망하는 백성 중에 하나입니다.” 라고 고백했거든요. 또 다윗은 말하기를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고 했습니다.

자, 이 고백을 할 때에 그 이사야나 다윗이 그런 고백을 하게 된 것을 본인은 뭐로 여기느냐 하면, 그걸 축복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이게 놀라운 점입니다. 사람이 망했는데도 불구하고 분명히 망했어요. 나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분명히 자기 입으로 토했습니다. 분명히 모든 가진 것, 자기평생 쌓아놓은 것, 분명히 망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말하기를, 이것은 하나님만이 제대로 된 통으로 만나야 비로소 나타날 수 있는 축복된 고백으로 지금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인간승리입니까? 도대체 얼마를 도를 닦아야 이 정도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까? 이것은 도 닦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자기 눈앞에 누구를 보고 있는 겁니다.

너무나 거룩하고 너무나 무섭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평범한 보통사람이 아니라 그야말로 천사보다도 더 월등한 영광과 거룩을 품고서 막상 자기 눈앞에 어떤 존재자가 등장했을 때, 우리는 악! 하는 소리이외에는 다른 소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악! 하는 그 소리와 더불어서 우리가 이야기할 것은 “주여, 주께서 나에게 어떤 조치를 가한다 할지라도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주여, 원대로 하옵시고 주의 뜻대로 하옵시고 주께서 어떻게 사용하시든 그렇게 사용하는 그 자체에 대해서 저는 주님 앞에 찬양을 올립니다.” 라는 그 고백.

그 순간 그 사람의 영혼의 무게는 제로(0)입니다. 아무것도 무게를 잴 수 없을 정도로 깃털보다 더 가벼운 영혼, 가벼운 심령이 되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그동안 살아왔던 것이 주님의 결과물이었고 솜씨라면 지금 이 순간 앞으로도 이 세상 마감할 때까지 주께서 똑같은 차원에서 저를 그렇게 다루어주신다면 저로서는 영광입니다.” 라는 고백.

이것이 주님 앞에 화로다, 제가 망하게 된 이 자체를 주님의 속성이 온전히 나를 점령한 그 상태인 것을 이사야 입으로 고백하는 것, 이것이 바로 포도나무의 원래의 진짜 100% 주님의 속성만 보여줄 때, 그게 포도나무의 진면목이고 진짜 포도나무의 참된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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