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4. 5. 23) 1강
광주 강의(2014. 5. 23) 1강
이름 : 서경수(IP:118.35.140.24)
광주 강의(2014. 5. 23) 3-1
철학에서는 유, 무를 다 다뤄요. 그런데 그동안 무는 종교에서 다뤘고, 신학이죠. 유는 철학에서 다뤘어요. 그런데 유럽 사람들은 다 신자이면서 교회에 안 갑니다. 어릴 때 유아세례 받고, 결혼할 때도 성당에서 하고, 장례식 때 신부나 목사 불러서 하면서도 평소에는 교회를 잘 나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에 놀러 가야하기 때문에.
국민 소득이 3만 달러가 넘으면 돈 버는 일에 너무 기를 빼앗기기 때문에 근무하지 않는 토, 일요일은 휴식하거나 취미생활로 스트레스를 풀지 않으면 계속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 가서 잔소리 들을 기력이 없어요. 그래서 소득이 높아지면 점점 교회는 안 다니면서 기독교 신자로 행세하는 거지요.
20세기 이전에는 무는 신이었습니다. 신이 나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신이 만들었다는 것은 신학이 담당을 하고, 만들어진 인간이 사회와 더불어 어떻게 화합을 이루며 살 것인가 하는 윤리, 도덕은 철학에서 담당하자고 했는데, 사람들이 신학 자체를 인정을 안 하니까 철학이 무(없음)가 무엇인가 하는 부분까지 담당하기 시작했어요.
철학이 무의 영역까지 자신만만하게 다루게 된 원인이 어디 있는가 하면, 바로 과학에 있습니다. 오단 군이 현재 공부하는 것이 자연과학이잖아요. 예전의 자연과학은 무와 상관없이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가 어떻게 이성을 사용해서 보다 신체가 행복하도록 병의 원인을 추적해서 건강한 몸을 유지하면서, 신이 부를 때까지 지상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기여한다는 것이 자연과학이 담당한 부분이죠.
신이 만들었다는 것은 신학의 영역이고, 그 밖의 것만 과학의 영역이라고 스스로 자기 영역을 제한했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교회에 관심 없고, 신학에도 관심이 없으니까 자연과학에서 특히 물리학, 현대 물리학에서 어디까지 손을 대는가 하면, 있음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힉스 메카니즘, 힉스에서 처음으로 중력이 나오고 질량이 나왔다. 이것을 거론한 이상, 과학이 이미 진리가 되었으니까 이 진리로 종교의 세계까지 관장하겠다고 나왔어요. 이렇게 되면 세상이 너무 상막하잖아요. 인간은 하나의 물질이고 원자, 분자, 세포 덩어리에 지나지 않으니까 소위 의료 윤리 이런 것이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과학은 돈 벌기 위한 과학이 되었고, 그로 인해 너무 상막해 져서 여기서 윤리, 도덕, 신학을 겸해서 인간다운 의료인을 양성하자는 주장이 나왔어요. 하지만 그들은 양보할 수 없어요. 오직 자연과학만이 진리라는 것을. 오늘 마가복음 1장 12절을 공부하면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통일체를 이루는 관념은 ‘자기 사랑’입니다. 돌고 돌아서 결국 남는 것은 자기 사랑으로 가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사랑의 모델을 어디에서 찾는가 하면 타인에게서 찾습니다. 자기 사랑을 위해서 남을 곁눈질해서 남이 가진 좋은 것을 전부 수입해서 더욱 사랑스런 자신을 만들기를 욕망하는 겁니다.
욕구, 요구, 욕망 이렇게 세분화하기도 하는데, 욕구는 생물적인 것. 즉 지렁이, 원숭이, 개 등이 가진 본능적인 것을 욕구라 하고, 요구는 자기의 바람을 언어로 표현하는 겁니다. 언어로 표현하기에 요구는 인간에게만 있어요. 욕망은 내가 원하는 바와 내 욕구가 일치되지 않을 때 그 차이를 욕망이라고 합니다.
목이 마른데 시원한 것이 먹고 싶어서, 자기 아내에게 “여보, 시원한 것 없나?” “시원한 것, 뭐?” “냉수가 좋겠네.” 여기에서 시원한 것과 냉수의 차이. 냉수는 욕망이고 시원한 것은 요구가 됩니다. 구체적으로 말로 표현은 못하는데 시원한 것을 냉수로 바꿀 때 욕망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냉수를 가져와서 마셨는데 “에이, 안 시원하네.” “그러면 뭘 줄까?” “더 시원한 것 없나?” “더 시원한 것, 뭐?” 말로 표현이 안 돼요. 말로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 차이부분이 욕망입니다.
그러면 욕구가 고정되어 있나요? 매일 달라지고 활성화 돼요. 그러니까 우리의 요구도 달라지겠지요? ‘욕구-요구=욕망’이라면 욕망도 늘 달라지겠지요. 그러니 요구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요구는 언어로 되어 있고, 언어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 우리보다 먼저 태어나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의사소통 체계가 언어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이미 남의 것이지요.
남의 것이란 말은, 각자 자기 사랑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이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니 내 욕구에 충족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래서 “당신은 왜 날 사랑하지 않아?” 이런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상대방은 “네가 뭔데 내가 널 사랑해야 되는데?” 이렇게 나오지요. 그래서 인간은 결국 자기사랑밖에 모르기에 희생이란 것은 애초부터 성립이 안 됩니다.
마귀가 희생하는 것 봤습니까? 마귀는 희생이 없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마귀를 좋아하는 거예요. 생각하는 것이 똑같거든요.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최종적으로 나의 사랑을 더욱 확장시킨다면 우리는 희생할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전적으로 자기를 희생해서 남을 살리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1장 12절을 보겠습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아주 짧은 문장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설명하려면 자기사랑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자기사랑을 나르시즘이라고 합니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서 물에 빠져 죽지요. 최종적인 사랑의 대상은 오직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는 이미 태어나기 전에 있던 언어체계에 의해서 내 자아는 계속 채워집니다. 따라서 나는 결국 타인들 중의 하나지요. 왜냐하면, 내 안에 들어 있던 것이 나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들이 한 것을 그대로 수입해서 내가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언어입니다. 갓난아이가 “밥 주세요.”라고 하지 않아요. 조금 자란 아이가 그 전에 엄마가 “이제 우유 먹지 말고 밥을 먹어야 해.”라고 엄마로부터 강요받은 거예요. 그래서 밥 달라는 말을 하지요.
타인이 살았던 풍습과 도덕 이 모든 것이 강요되어 나에게 왔기에 내 안에는 나의 것은 일체 없고 전부 타인의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나에게 타인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을 하는데, 내가 남이에요. 결국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사랑할 나도 없으면서 계속 남의 것을 끌어 모아서 나라고 여기면서 사랑을 하는 운명에 처해져 있습니다.
이것이 1장 12절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면, 이게 바로 구약에서 말하는 우상이 돼요. 마가복음은 신약시대입니다. 신약에서 어떤 문장을 쓴다는 것은 구약 전체가 이 안에 대립된 구조로 앞에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고 할 때는 그 앞에 무엇이 나열되어 있는가? 구약 전체가 포진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구약의 내용이 뭔가? 이스라엘의 멸망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멸망했습니까?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십계명의 1계명이 뭔가 하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자기애에 빠져있는데, 무엇이든 내 욕구에 맞도록 타인의 것을 수입합니다. 타인의 것 속에 하나님이 율법을 집어넣었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얼씨구나 하나님이 법을 주셨네. 이 법을 나의 것으로 만들면 율법 안에서 하나님과 내가 소통이 되면서 절대 자아가 된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법이 나를 채우는 내용물이기에 내 안을 쪼개보면 하나님의 법이 가득하기 때문에 나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부심을 가진 거예요. 지금도 중동 지역의 과격 테러집단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그들이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자기 안에 신의 계시가 있기에 자기가 신입니다. 내가 신이 된다는 것은 나의 최후 욕망이었어요. 매슬로우의 욕구설에 최고 단계의 욕구가 ‘자기구현의 욕구’입니다.
자기구현이란 말은, 내가 신인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때 존재의 우월감을 만끽하는 것입니다. 구원파 교주 유병언은 스스로 신이라고 여기기에 사람(검찰)에게 잡히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신이기에 스스로 사람에게 잡혀갔는데 유병언은 잡히지 않으려고 계속 도망을 다니고 있어요.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우상숭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수박 쪼개듯이 쪼개보니까 그 안에 하나님의 율법이 소복이 담겨 있어요. 시시한 인간들의 요구보다 신이 직접 주신 율법이 가득한 나는, 내가 되고 싶은 절대 신이 바로 이것으로 구현된다고 생각해서 율법을 신봉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의 극치였습니다.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어떤 사람이 저를 비난하면서 이런 말을 해요. “이근호 목사는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을 다 죄라고 한다.”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죄 중에서 태어났다고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주가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지요.
엑스레이 사진을 찍으면 겉에서 볼 수 없는 속의 것을 다 볼 수 있잖아요. 주님은 우리의 엑스레이 원판을 원하는 거예요. 즉 상한 심령이지요. 다윗이 그것을 알게 된 거예요. 저희들도 이것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주가 원하시는 것은 번제, 속죄제가 아니고, 십일조도 아니고, 율법 지키는 것도 아니고 상한 심령을 원해요.
그럼 번제, 속죄제는 왜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까? 이것은 엑스레이 사진을 찍는데 광선같은 역할을 하는 겁니다. 우리 몸에다 율법을 비추니까 새까만 죄가 드러난 거예요. 광선을 쫴야 사진이 나올 것 아닙니까. 율법이 오게 되면 우리는 죄인으로 드러나고, 드러난 그 인화지를 그대로 주께 드리면 되는 거예요. 참 쉽지요. 복음을 알면 인생이 이렇게 쉽습니다.
다윗은 ‘율법을 준 것은 나의 엑스레이 사진을 찍기 위함이다.’고 보고, 같은 사람인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야 의인이 되고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지켰습니다.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이 그렇게 된 것은 자기의 지혜가 아니고 성신이 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우리는 상한 심령이 되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진작 원하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아울러 깨닫게 됩니다. 방사선에 쪼여서 시꺼먼 그림이 나왔습니까? 그걸 그대로 하늘나라 건강공단에 제출하시면 영생이라는 보험금을 타게 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했습니다. 왜? 그들을 우상을 숭배했어요. 우상숭배의 원인은 자기애 때문이죠. 무조건 나는 나를 포기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악과를 따먹어서 그렇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령 죽으리라’고 하셨잖아요.
성경은 우상숭배냐, 아니냐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자기사랑에 빠졌어요. 자기애에 빠져 있으니까 율법을 받아도 그것으로 인해 우상숭배자인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기에 구원을 인간에게 맡겨놓으면 해결책이 없습니다. 성경은 우상숭배와 싸우는데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원수가 된 셈이잖아요. 그러면 해결책이 없지요?
그런데 1장 12절에 예수님에게 성령이 오지요. 만약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온다면 우리를 닫으면 안 돼요. 오늘 아침 TV를 보니까 어떤 냉면집에 냉면 그릇을 얼음으로 만들어서 얼음그릇에 냉면을 담아주는 집이 나왔어요. 더워서 냉면을 먹으러 온 손님이 얼음그릇에 냉면을 담아서 먹으니까 얼마나 시원하겠어요.
따라서 우리그릇 자체가 우리만 사랑하기 때문에 내 안에 무엇이 담겨도 소용없어요. 결국 우리는 우상숭배자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대구 강의에서 김성수 목사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그는 우리 자신이 우상숭배자란 사실을 지적하지 못했어요. 엑스레이를 찍어서 우리가 새까맣게 나와야 될 텐데 --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갑자기 얼굴이 천사처럼 밝아지고 뒷산의 아름다운 배경과 함께 웃는 모습을 사진 찍어 하나님께 보내려고 해요. 그런 짓은 유병언에게 하라고 하세요. 사진 찍어서 500만원 받고. 어떤 작품은 2,000만원 받고.
진짜 주님이 오시면 우리는 상한 심령으로 드러나야 하는데 김성수 목사 설교 듣는 자들은 전부 천사로 변하고 말았어요. 원래 기대했던 자기사랑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성경공부가 추가되는 겁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짓밟을 것은 요구하기는 참 곤란해요. 그럴 마음도 없고 능력도 없기에.
본문에서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다고 했는데, 이것은 모든 인간은 구원이 안 됩니다. 목사가 이런 이야기를 해 줘야 합니다. 안 되는데 1장 12절에 성령이 등장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다시피 성령이 예수님께만 찾아옵니까, 구원 받을 사람에게도 성령 세례를 준다고 되어 있습니까? 구원 받을 자에게 성령이 임한다고 합니다.
성령이 안 오면 어떻게 되지요? 예수 믿는 나를 내가 계속 유지함으로써 구원 받는 방식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셨다. 그러니 오신 예수님을 붙잡아라. 그러면 구원을 얻으리라.’ 이게 바로 성령 안 받은 사람의 주장입니다.
제가 30년 넘게 강의하면서 한 이야기를 요약하면 ‘여러분, 예수 믿으면 지옥갑니다.’라는 것입니다. 정말 속이 후련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자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서는 신이 났어요. 물 위를 걷고, 병을 고치고, 보리떡 5개로 5,000명을 먹이고. 이런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이제는 됐다! 이제는 살았다.’ 그런데 주님은 한 알의 밀알이 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잡혀 죽었습니다. 이것을 인간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의 덕이나 볼 생각을 하지 내가 희생하겠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요.
‘인간은 태어나자 말자 자기밖에 모른다. 그래서 외부의 것을 그냥 흡수해서 그것으로 자기 주체를 형성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보니까 흡수한 것 가운데 무엇이 있었습니까? ‘모세가 단독으로 하나님과 만나서 받았다는 율법이 있으니까 그것을 빨아들여서 자기의 내용을 채우면 이방 민족은 하나님의 언약이 없기에 다 저주 받아도 언약을 받은 우리는 구원 받는다.’
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고방식과 오늘날 교인들의 사고방식에 차이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런데 특이하게도 시편 51편에 성신이 임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은 다윗. 이 다윗이 말하기를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라는 것을 내세울 때, 비로소 율법의 기능이 나를 신으로 만들고, 나를 절대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더욱 더 죄인 되게 하는 기능이 있는 거예요.
로마서 5장 20절을 보겠습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는데, 율법에 십일조가 있는데, 십일조를 하란 말은 십일조를 하면 할수록 범죄를 더 저지르는 거지요. 하여튼 십자가마을 사람들은 머리가 좋아서 죄 안 지으려고 아예 십일조를 안 해요.
안식일을 지키라고 해서 안식일을 지키면 범죄가 더 심해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안식일 지켰다는 것이 타인의 언어체계니까 안식일 지킴이 내 속에 들어오면 나는 안식일 지킨 사람으로서 절대자가 되지요. 그게 바로 점점 상한 심령과 멀어지게 만들죠. 나를 더욱 교만하게 만들고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게 하지요.
이것은 모든 인간이 다 그럴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안식일 안 지킵니다. 교회도 안 나갑니다. 십일조도 안 합니다.” 이것을 자기 의로 자랑해요. 이러나저러나 인간은 자기사랑밖에는 몰라요.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됩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해결책이 생기는가? 인간이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저렇게 해도 안 된다면, 율법 줘도 안 되고, 율법 없어도 안 되고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성령이 오면 되는가? 성령이 예수님께 오고, 그 다음에 누구한테 오고. 이런 것이 아니고, 성령은 예수님께 먼저 오시고, 예수님 승천 후에 그 때 성령이 성도에게 영원히 주어지지요. 이 때 성령 세례가 주어지는 겁니다.
성령이 오실 때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고 일단 예수님을 경유해서 예수님의 내용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구원이 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예수님을 거치는 번거로운 방법 말고 바로 오셔서 구원하시면 어떤가? 이런 의문이 생기지요. 바로 오시면 구원이 안 돼요.
성령이 오시면 구원 됩니까? 구원 안 됩니다. 성령이 안 오면 어떻게 됩니까? 구원 안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천국 간 사람은 어떻게 해서 갔습니까?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경유한 내용이 있어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구원이 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령이 왔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내용이 우리의 내용을 바꾸치게 해 줘야 돼요.
지금 우리는 우상 숭배자입니다. 날 섬기는 것이 우상이고, 우리는 자기밖에 몰라요. 이것을 해결해야 돼요. 그래서 성령께서 예수님의 내용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면 구원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질문 드리겠습니다. 성령이 오지 않고 바로 예수님이 오면 구원 됩니까? 구원이 안 돼요. 왜 그런가 하면, 내가 예수 믿는 것으로 구원 받으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그것은 우상 숭배자가 되는 겁니다.
‘나는 여호와를 믿으니까 참 하나님을 믿는 거야.’ 이게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에요. 그러니까 구약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은 성령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미 구약에서 실험이 끝났어요.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은 구원 받았잖아요? 다윗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 전까지 대기상태에 있었습니다. 모세, 엘리아도 그렇고. 십자가 지고 난 뒤에 구원 받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자체에 구원이 있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로 등장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갈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컵이 저쪽에 있는데 내가 “컵 좀 가져다 줘.”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면 십자가를 가지고 올 수 있습니까? 못 가져와요. 로마서 1장에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했는데, 이것 읽으면 구원 받습니까? 안 돼요.
그럼 누가 와야 돼요? 성령이 와서 그 말씀이 믿어져야 돼요. 그렇다면 성령이 와서 믿어지나 성령 없이 그냥 믿는 것이나 믿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마찬가지가 아니에요. 성령이 와서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십자가)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자인 것을 아울러 재발견하게 되지요.
내가 엑스레이 사진에서 온통 새까만 죄인으로 나타난 상태에서 깨끗함을 입은 것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된 것이지 내가 십자가를 믿는 그것으로 내 몸을 깨끗하게 할 수는 없는 거예요. 지난 수요일 설교 후에 독일에 있는 딸이 전화를 했어요. 사위와 함께 생중계로 설교를 듣거든요. 무슨 내용인지 어려워서 잘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 날 설교 내용은, 네 식구가 사는데 아버지는 퇴근해서 스마트 폰으로 주식 상황을 살피고 있었고, 엄마는 텔레비전 드라마 보고 있었고, 아들은 숙제를 하면서 청일전쟁이 먼저인지 러일전쟁이 먼저인지 아버지께 질문을 했고, 딸은 음악을 듣고 있어요. 각자 자기의 일을 하고 있어요. 전혀 종교적인 모습은 없어요. 복음적인 것도 없고 그냥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래층에 사는 사람이 찾아와서 발자국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못살겠다고 시비를 걸어왔을 때 각자 하던 일을 중단하고 가족이 하나가 되어 침입자와 대결구도를 이룰 때 이것이 사건입니다. 사건이 터지면 숙제도 중지되고, 드라마도 그만 보게 되고, 주식 상황 살피는 것, 음악 듣기 모두가 중단되지요. 이게 바로 사건입니다.
사건이 터지면 모두는 그 사건에 몰입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는데 우리가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율법이 우리를 사건으로 몰아넣어요. 아래층 사람이 찾아와 다투다가 돌아갔을 때, 아내가 하는 말이 “에이 씨, 드라마가 끝나버렸네.” 그 사건이 터질 때 ‘드라마가 중요해.’라는 자기만의 가치는 깨져 버리지요.
이스라엘의 모든 율법은 그 안에 출애굽 사건이 담겨 있어요. 율법은 출애굽 사건을 반복합니다. 출애굽 사건이 뭐냐 하면, ‘빠져나올 수 없는 너희들을 주님의 능력이 개입해서 건져냈다.’는 것입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출애굽기를 할 것인데, 미리 말씀을 드리면 이렇습니다. 출애굽할 때 주의 이름이 개입해서 구원했잖아요. 이 말은, 히브리인들이 애굽의 힘을 꺾고 스스로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살이하면서 일상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어요. 살면서 하나님께 기도도 했고 그렇게 살았어요. 그러나 그것이 구원을 가져다 줄 수는 없었습니다. 사건화가 되어야 출애굽이 되지요.
하나님 믿는다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떤 것이 믿는 것인가? 주님이 개입한 사건에 의해서 하나님 믿는 것조차 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사건에 휘말려야 돼요. “이번 주일에는 꼭 교회 가야지.” 해서 가는 곳이 교회입니까? 교회는 가는 곳이 아니라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교회를 지어놓고 교회에 간다는 것은,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일상의 스케줄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사건이 아니에요. 사건은 아버지가 딸을 태우고 운전하고 가다가 다른 차와 부닥친 것이 사건입니다(오 목사님이 막내 딸(다인)을 태우고 가다가 사고로 딸의 코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당함).
사건은 예상을 못합니다. 사건이 터질 때, 내가 스스로 날 지킨다는 것이 현실이 아님을 짧은 순간만큼은 알아야 해요. ‘내가 날 지킨다는 착각에 빠져 살았구나. 세상을 내 중심으로 보는 자체가 착각이구나. 세상은 내 중심이 아닌데 왜 나는 내 중심으로 생각하지?’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자기사랑밖에 모르기 때문에 거기에도 내용물을 다 집어넣어서 그래요. ‘나는 이렇게 살거야.’ 하면서 좋은 것들로 가득 채웠어요. 채우니까 그 안의 내용물이 너무 아름답단 말이지요. ‘나는 교회 가서 훌륭한 목사님 설교 듣고 지금보다 더 멋진 사람이 되어야지.’ 이런 식으로 자기를 아름답게 꾸미는 거예요.
이것은 상한 심령이 아니고 멋있는 심령입니다. 남이 모르는 복음을 알았으니까 자기는 대단한 존재라는 거지요. 이건 자기 우월감이고 우상숭배입니다. 자기 사랑에 갇혀있는 꼴입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평소에 예수 믿은 것이 다 헛것인 것이 드러납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구원 받을 수 없음을 아는 것이 성령 받은 자입니다. ‘네가 무슨 수를 써도 구원 못 받는다.’는 말씀이 믿어질 때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고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용으로 우리에게 찾아오면, 지금이라도 당장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어 마땅한 존재로 드러날 때, 자기의 행함으로 구원 받겠다는 이 사고방식이 얼마나 사단적인가 하는 것이 드러나면서 이 사람은 이미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평생을 살아도 나는 우상숭배 외에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성령이 임해야 됩니다. 성령이 예수님께 먼저 찾아온 이유는 광야에서 시험 받기 위해서입니다. 누구한테 시험 받습니까? 마귀에게 시험을 받지요. 주님은 우리에게 먼저 오신 것이 아닙니다. “애들아, 오래 기다렸지? 늦게 와서 미안하다. 구원해 줄게.” 이것이 아니고, 먼저 마귀에게 들러요. 왜? 우리가 마귀의 나라에 갇혀있기 때문에 그래요.
갇혀서 산다는 말은, 결국 우리는 자기사랑이 우선이기 때문에 나를 채우는 온갖 내용물이 전부 우상숭배를 위한 것뿐입니다.
성령이 왔다는 것은 그냥 온 것이 아니고 마귀와 만났던 예수님을 우리 속에 개입시키는 겁니다. 율법이 있던 자리에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율법 때문에 죽었잖아요. 그리고 바리새인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바리새인이고, 예수님 욕했던 자가 우리 자신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성령은 예수님을 앞장세워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건을 가지고 우리에게 들이미는 겁니다.
밀게 되면 바리새인만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고, 자기만 사랑하는 모든 인간은 예수님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발하면서 성령이 주어졌기 때문에 ‘주여, 나는 죄 중에 태어났습니다.’ 하는 것을 고백하지요.
‘내가 이런 인간입니다.’가 아니고, ‘이런 모습이 바로 나입니다.’라고 ‘나’를 뒤에 붙이세요. ‘예수님을 싫어하고, 예수님보다 나를 더 좋아하는 그런 자가 나입니다.’라고 성령께서 그렇게 지적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비난해도 용서받지만 성령을 비난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마태복음 12장에 나와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2014. 5. 30. 15:25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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