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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사도행전 61강(묵시적 존재), 마태복음 52강(교회 만들기)강의전도서

사도행전 61강(묵시적 존재), 마태복음 52강(교회 만들기)

이름 : 이근호(IP:119.18.90.53)

공은주(IP:211.♡.100.128)

14-06-12 16:03

대전140529-행22장22절(묵시적 존재)61강 - 이 근호 목사

사도행전15절부터 해봅시다.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이게 지금 예수님께서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만나잖아요. 만나가지고 예수님께 받은 자기 직무를 바울에게 전달하는 그 대목입니다. 17절에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이리 되어 있지요. 결국 바울은 수요일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마는 바울은 성도잖아요. 성도의 특징이 뭐냐 하면, 묵시적 존재라는 거예요.

사람은 누구나 역사적 존재라 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역사적 존재라는 것은 수평적이지요. 죽 깔려있는 것. 그런데 이 묵시적 존재는 수평적이 아니고 수직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수직적인 것이 갑이냐, 수평적인 것이 갑이냐, 성도한테는 수직적인 것이 갑이 되는 거예요. 수평적이고 세상적인 것은, 인간적인 것은, 을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나중문제라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지시를 누구한테 받느냐 하는 문제에요. 이게 제일 중요한 거예요. 평소에 살아가면서 지시를 누구한테 받느냐, 묵시적 존재라고 언급하는 것은 지시를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는다는 겁니다. 주님 또는 주의 영, 성령이죠. 지시를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역사적인 존재에서는 위로부터 아무 지시가 없는 거죠. 지시가 없다면 지시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흔히 요새 유행하는 단어, 소통, 주변사람들과 화합함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요. 그러면 이 수평적 존재에서의 진리라 하는 것은 본인이 진리를 정하는 것이 아니고 외치는 것이 아니고 주변의 눈치를 봐야 되는 겁니다. 정리하면, 역사적 존재에서 사는 것은 눈치 보기! 위에서는 수직적 존재에서는 눈치 안보기!

눈치 보기는 다른 말로 하면, ‘타인 의식하기’ 남을 의식하는 거예요. 남을 의식하기 때문에 항상 남을 의식하고 눈치 보게 되면 여기서 나온 게 뭐냐 하면, 변명과 핑계로 항상 뭐든지 유보하고 지연시켜 나갑니다. 자꾸 “좀 있다 할게.” “한 번만 기회 주신다면.” 이런 식으로 계속 가는 거예요. 요게 성화론이라 하는 겁니다. 성화론. “지금은 제가 잘못 했지만, 한 번 기회만 주신다면 다음에는 잘 할게요.”

성화론의 특징이 뭐냐 하면, 제가 죄를 지었으니까 다시는 이런 이러한 일을 하지를 않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지연시키고 유보시키는 거예요. 사람들은 이걸 뭐라고 하는가 하면, 회개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것은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눈치 보기의 연장’입니다. 눈치 보기의 연장에 불과한 겁니다. 도대체 내가 누구냐가 없이, 내가 누구인가도 없어요. 남이 이렇다 하면 그런 줄 알고 또 다른 사람이 이렇다 하면 그런 줄 알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묵시적, 이것을 가지고 ‘사건’이라 합니다. 분출하는 것. 접속되어서 화산 폭발하듯이 터져버리는 거예요. 폭발이죠. 폭발. 폭발하면서 그 인간의 몸은 괴사되는 겁니다. 험한 말을 써서 죄송합니다. 괴사 알지요? 암 걸리면 몸의 세포가 무너지는 것을 괴사라고 합니다. 완전히 허물어지는 거예요.

우리의 육신이 주의 묵시의 존재를 받는 동시에 사건이 폭발하면서 우리를 허물어뜨리지요. 예를 들면 대포 쏠 때, 대포에 폭탄이 앞에 있는 보신이 여물지 않으면 폭탄을 쏘고 난 뒤에 앞에 걸레조각처럼 다 찢어지겠지요. 멀쩡한 게 다 갈라지겠지요. 묵시적 사건에 터져버리면 전부 다 나라는 이 육신은 나라는 존재는 전부 다 갈래, 갈래 걸레처럼 넝마처럼 다 찢어지는 겁니다. 이걸 다시 주워서 꿰매지 마세요. 꿰매면 흉해요. 찢어진 대로 찢어지게 살아야 돼요. 찢어진 대로. 그래야 자기 부인이 돼요.

“나, 이런 인간입니다.” 하고 자꾸 주워 모으지 마세요. “나, 걸레입니다.” 이렇게 해야 돼요. 세리와 창기가 예수 믿는다고 좋은 직업 주신 게 아닙니다. “니 이제는 강도짓 하다가 이제 예수 믿고 기독교 서점해라.” “니는 예수 믿었으니까 이랜드 가서 취직해라.”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찢어진 대로 사는 거예요. 강도가 구원받을 때, 강도에서 아주 훌륭한 사람 돼서 구원받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강도에서 구원받지요. 거지도 마찬가지고.

역사적 존재에서는 찢어짐이 없이 항상 존재가 딱딱하게 갈수록 딱딱해져버려요. 딱딱해지면서 사건의 폭발이 일어나지 않으니까 변비가 되는 거예요. 딱딱해져버려요. 굉장히 사는 게 사는 만큼 힘들어요. “아, 나 왜 이리 살지?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고. 미치겠네.” 그래서 내가 모든 인간은 미친놈이라 하는 거예요. 이게. 모든 사람들은 모두가 미친 사람들이에요. 남 의식해야 되지, 남 눈치 봐야 되지 그리고 누가 뭐라고 하면, 핑계와 변명으로 일관해야 되지요. 잘못한 게 있으면 앞으로는 잘할게요. 해가지고 또 미래의 되지도 않는 소망과 미래에 또 희망을 걸어야 돼요.

그리고 지금은 못난 것을 남한테 내세우는 것보다 앞으로 잘된 그것을 이렇게 잘될 것이라는 미리 당겨서 남들한테 나 이런 사람 될 거야, 하고 그것마저도 자랑 질 한다고 내어놓고. 이렇게 힘들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울이에요. 사울이 예수님 믿는 사람들 핍박하고 예수님을 핍박할 그 시대에 묵시적 존재가 아니고 역사적 존재였습니다. 그러면 이쯤해서 결론 하나 맺어봅시다.

바울이 역사적 존재에서 묵시적 존재로 달라졌다는 말은 이것은 바울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현재 역사적 바탕 위에 있으며 구원은 바울이 구원된 것처럼 그렇게 구원되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는 걸 바울이 보여줍니다. 왜냐 하면 그 이유가 어디 나오는가 하면,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보냅니다. 21절에 보면,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이방인에게로 보낸다 할 때에 요 의미를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요새 세월 호 때문에 조용하게 선거 치루찮아요. 그런데 아주머니들이 새누리당은 옷을 빨간 옷을 입어요. 기호1번 해가지고. 옷 자체가 하얀 1자에다가 옷 전체가 빨개요. 그런데 조용하게 선거한다고 해서 그냥 인사만 하지요. 그런데 한 번 보세요. 그 여자분 멀리서 보면 1번이에요. 1번. 그러니까 그 몸 자체가 후보에요. 몸 자체가 후보로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자기가 후보를 소개하는 게 아니고 옷 자체를 그렇게 입었으니까 걸어 다니는 1번 후보라니까요. 주님께서 사도바울을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사도바울보고 말 잘해라. 말 능숙하게 해라. 이게 아니라 그냥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주님이 옷을 입혀놓은 마네킹이라. 그렇게 보시면 돼요. 그게 성도입니다. 성도는 말을 잘 못해요. 그래서 사도 서신에 보면, 사도바울이 말을 잘 못했어요. 말을 잘 못했는데 항상 사도가 외치는 것은 그래도 나는 주의 종이라는 겁니다. 그래도 나는 주의 종이다. 주께서 이렇게 나를 만들어놓았다는 거예요. 모세도 말을 잘 못했어요. 형이 잘했지. 그래도 주께서 보내심이기 때문에 모세는 묵시적 존재로서 사람 의식할 필요가 없지요.

벌써 이게 묵시적 존재다, 라는 말은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다, 이 말이잖아요. 그러면 사람을 의식 안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가 요구한 것을 들어주면 내가 니 말 믿어줄게. 라는 거래를 안 해도 된다는 겁니다. 당신이 나에게 이런 식으로 사랑을 하게 되면 당신이 믿는다는 예수를 나도 믿을게. 라는 그런 흥정과 거래에 나서지 마세요. 필요가 없습니다. 커피 한 잔 먹여준다고 교회 와서 예수 믿고 그런 거 없어요. 교회에서 그런 것을 하지만, 그것은 교회 조직을 만들기 위한 짓이지, 주님이 하는 구원방식은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보게 되면 어떻습니까? 배짱도 이런 배짱이 없지요. 주님께서 배짱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내가 찾아간 사람만 오너라. 끝!

주께서 시작한 일을 주께서 중도 취소되지 않고 멈추지 않고 끝까지 주께서 회수해 버리는 그 방식이 전도방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 말할 때, 잘 안 먹히거나 전도 안 된다 할지라도 당황하지 말고 마치 주님께서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천천히 내가 알고 있던 말을 증거 하면 끝!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왜냐 하면, 자기는 찢어진 포신이니까. 폭탄 터지고 난 뒤에, 분화구 터지고 난 뒤에 다 찢어져 버렸으니까. 그런데 이런 인간들이 목사가 되고 나면 문제가 돼요. 자기 교회가 있어야 밥 먹고 살거든요. 그 다음부터는 뭐냐 하면, 타인 의식하고, 남 의식하고, 변명 핑계대고 난리 나요.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내가 집약응축해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세상이 있는데, 세상에 예수님이 오셨다. 예수님 오시고 다시 아버지께로 갔지요. 요 코스대로 바울은 그 코스 그대로 올라가는 거예요. 올라간 코스대로. 여기에 있는 바울은 뭘 보여준다? 바울만의 세상이라는 걸 보여줘요. 왜?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일회성으로 끝난 게 아니지요. 바울 안에 살아있고 바울의 평생을 통해서 일생을 통해서 십자가 사건이 계속 사골 우러나듯이 또 달이고 하잖아요. 계속 우러나잖아요. 한약 달이듯이. 계속 우려먹는 거예요. 언제까지? 평생토록 바울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그리고 우리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그래서 우리의 이름은, 이제 우리의 이름은 바꿉시다. 사골로. 이 사골, 김 사골, 유 사골로 이름을 바꾸세요. 충분하게 우려먹습니다. 계속해서. 사도바울이 오죽했으면 “주님이여, 이제 그만 우려먹고 주님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안 돼! 더 우려내야 돼!” 바울도 주님 곁에 가고 싶지만, 그 때와 시는 본인이 결정하는 게 아니고 계속 우려먹을 때까지 우려먹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은 죽을 때까지 계시다. 죽을 때까지 철저하게 기호1번이에요. 갑자기 새누리당 생각이 나는데. 아, 정치적인 경향은 없습니다. 끝까지 선거 끝날 까지 그 아줌마들은 빨간 옷 입고 돌아다녀야 돼요. 1번 달고. 움직이는 하나의 계시가 되는 거예요. 움직이는 말씀이 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움직이는 그리스도가 되는 거죠. 움직이는 십자가 사건이 되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한 뭘 지연하고 회개합니까? 그런 게 없잖아요. 남 의식하고 이런 게 없잖아요. 어디 기호1번 붙인 게 누구인데, 자기가 기호2번을 의식하겠어요. 자기가 기호 1번만 하면 되는데. 1번만 하면 되지 지가 왜 2번, 3번을 왜 신경 씁니까? 그러면 되는 거예요. 이렇게 철저하게 인생 전체, 육신 전체를 묵시적 존재로 만드시는 그 작업 속에서, 여기서부터 또 중요해요. 작업 속에서 뭐가 달여지고, 뭐가 우러나오는가 하면, 바로 바울이 품고 있었던 바울이 속해있었던 이 세상이라는 것도 아울러서 같이 품어져 나오는 겁니다. 그래야 십자가 사건의 폭발의 의미가 있거든요.

십자가 사건이라 하는 것은 착한 예수님이 착하게 사시다가 착하게 돌아가시는 것이 아니고 악한 자가 예수님을 죽였다. 이 세상이 악해서 예수님을 죽였다가 아울러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난 그 사실뿐만이 아니고 거기에 수반해서 세상은 이토록 악하구나! 가 반복해서, 반복해서 계속 나와야 되는 겁니다. 반복해서.

그래서 우리의 생각은 이래요. 우리도 그만 유병언이나 구원파처럼 예수 믿는 사람 이렇게 돈 모아가지고 공동체해가지고 금수원이나 이렇게 해가지고 내가 대표가 돼가지고 사진 한 장 찍으면 5억 받고 우리끼리 가야산 호텔가가지고 우리끼리 이렇게 믿는 사람 되고 싶지요. 주님은 그런 방법을 하는 게 아니고 제일 말썽 많은 곳에 제일 세상의 끝 지점, 모세일가가 갔던 제일 막다른 끝 지점, 말썽꾸러기에 있는 아줌마 있는 곳에 싸움이 항상 벌어지는 마치 방전되는 거 같아요. 반짝, 반짝, 찌지직! 싸움이 벌어지는 그 현장에서 우리가 전에 속했던 세상을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늘 만끽하게 합니다.

나도 그랬었었지. 구원파 보면서 나도 구원파처럼 목회하고 싶었었었지. 스스로 깨닫게 하는 거예요. 교주로 추앙해가지고 나는 대우받고 내 딸은 천만원짜리 파리의 아파트에 살고 이 모든 인간들이 바로 유벙언이가 되고 싶은 그 세계가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소망하고 있는 거예요. 종교와 상관없이. 종교가 없더라도 유병언처럼 살아봤으면 좋겠다. 나이 칠십 넘어서 사진만 찍고 찍으면 돈 오백만원 이천만원 나오고. 그렇게 살고 싶은 유병언은 그걸 실현시켰잖아요. 밑의 저임금을 강탈해서. 노동착취를 해가지고. 착취하던 말던 저들은 좋다고 하니까. 자기는 구름 위에서 붕 뜬 상태에서 그걸 했잖아요. 욕을 하지만. 사실은 막상 우리가 그렇게 된다면 도망가고 제2동굴로 도망하다 튀기고 하겠지요.

바울로 하여금 바울이란 사람이 가야될 길은 어디냐, 막장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지셨던 그 현장을 찾아가는 겁니다. 그럼 그 현장을 찾아가려면 예루살렘으로 가야 되겠네? 여기 17절에 봅시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예루살렘에 돌아왔잖아요.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그 다음이 뭡니까? 속히 그 다음에 뭘 하라?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거예요. 왜? 수평적,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아니고 묵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지역으로는 물론 예루살렘이 십자가 진 장소 맞습니다. 이제는 그 장소를 주께서는 팽창시키고 확장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마치 노아의 홍수가 노아가 살던 지역만 비가 온 게 아니고, 홍수의 의미는 뭐가 방향을 주느냐 하면, 노아가 탄 방주가 홍수가 일어난 영역을 지시해주지요. 물에 떠밀린 방주가 한 5Km가고 스톱 했습니까? 아예 방주가 물에 떠버렸잖아요. 그럼 물 밑에는 뭐가 있습니까? 그동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했던 그 세상이 바로 자기 밑에 있고 자기는 지금 떠있는 상태다 말이지요. 장차 지금 물이 와서 그런데 불이 오게 되면 불바다 된 세상은 우리가 전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런 세상이 그런 예식장이 바로 불 밑에 있는 거예요. 다니엘과 세 친구는 그 밑에 갔다가 살아났고 그러니 얼마나 놀라운 거예요. 묵시라는 게 얼마나 놀라운 기적을 맛본 거예요. 기적을.

세상의 로또 1등 천장해도 이것과 바꾸면 안돼요. 지리적이고 제한적인 공간과 시간을 초월합니다. 안 상홍 집단에서는 지금도 생수사고 건빵 사거든요. 왜? 마지막에 요한계시록에 보니까 핵폭탄이 일어나게 되면 우리끼리라도 살아남아야 된다는 거예요. 참, 사기를 쳐도요, 그놈의 핵폭탄 때문에 교주가 돈을 번다니까요. 그러니 제가 그러잖아요. 사람이 제일 근본적인 잘못은 뭐냐, 살고자 하게 되면 마귀가 일곱 귀신 다 달라붙어요. 이리하면 살려줄게. 이리하면 살려줄게. 대학생 하나 취직하려하면 일곱 다단계 달려들듯이. 일곱 다단계. 대학생이 돈 빌리려고 하면 일곱입니까? 몇 백 개의 대부업자들이 다 달려들듯이. 사람을 빼먹는다는 귀신이잖아요. 살고자 하니까 귀신들이 달려드는 거예요. 그만 삽시다. 우리 그만 삽시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돼요. 살아야 된다는 것은 노림수가 되고 노림수는요, 항상 귀신을 불러 모으는 거예요. 귀신 부르는 주문이 뭐냐 하면 옛날부터 있던 거예요. 유세차, 귀신을 부르는 주문이에요. 제사지낼 때 축문. 귀신이여, 오라. 이 말이거든요.

요번에 브라질에서 월드컵 하잖아요. 그럼 젊은 애들은 이미 노림수가 있어요. 어떻게 하면 16강 잘만하면 8강 노림수 있지요. 그러면 그 애는 귀신한테 매인 거예요. 사람이 어떤 경우도 목표가 정해지면, 사업도 마찬가지고. 그 사업이 본인들을 힘들게 해요. 만약에 운 좋게 되게 되면, 기고만장하고 우쭐될 것이고 우쭐되는 동시에 내년에는 계획을 더 높이 잡을 게 뻔하고. 못되면 사표 내느냐, 마느냐, 또 스스로 자괴감을 느끼고. 그런데 이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라서 늘 공짜로 월급 안주지요. 항상 목표를 주잖아요. 일당 채우지를 않으면 나한테 일당도 없다. 항상 그게 있어요.

어떤 분은 말하기를 직장생활 할 때는 일요일 날 하도 회사가 불러내서 교회에 못 나왔는데 이제는 목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개인 사업하기 때문에 일요일 날 옵니다. 이리 하거든요. 개인 사업도 분식집? 치킨 집? 어디 편의점? 일요일 날 끝났어요. 이제는 새벽도 나가야 돼요. 같이 부인하고 새벽 24시간 근무해요. 집에 있을 수가 없어요. 손님하나 더 그리워서. 노림수가 바로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이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은 진짜 세상에서 배짱 제일 좋은 사람이 노아에요. 이건 물에 붕 떴어요. 붕 떠가지고 밑에 잠망경으로 아이고, 수고해라. 자기는 물에 떠가 있으면서. 이게 바로 물로 표현한 묵시적 현상이라면 사도 바울에게는 직접 신약이니까 완성적인 묵시적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런 표현에 대해서 옛날 강의에 보면 부상이란 말을 했어요. 부상열차 있잖아요. 자기 부상. 초전도체에다가 전자석이 접하게 되면 마이너스 효과라는 게 있어가지고 뜨게 되어있어요. 항상 붕 떠있는 거예요. 붕 떠있으니까 빌립보서3장에서 우리는 이 땅에서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느니라. 땅에 것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바로 이 시대에 우상숭배입니다. 부처 믿고 안 믿고 나 예수 믿었어. 예수 믿어도 우상숭배에요. 이 세상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이 세상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사실은 세상 것을 사랑한 게 아니고 세상에 누가 포함되어 있어요? 내가 주인공으로 이미 포함돼 있잖아요. 결국은 뭐냐 하면, 내가 나를 끝까지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묵시적이라 하는 것은 뭡니까? 내가 나를 사랑하려하는데 그 내 사랑 속에서 뭔가 화산폭발이 나버리죠. 그러면 찢어진 포신의 포의 앞 입이 찢어진 것처럼 폭발의 흔적을 갖고 있지요. 흔적을 지금 사도바울이 여기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까불다가 주님한테 된 통으로 당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의 존재는 갈기, 갈기 다 찢어진 거예요. 그러니 사나 죽으나 누구의 것이다? 사나 죽으나 이젠 주의 것이다. 로마서 14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사도바울이 어떤 이론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 하나 자체가 기호1번이라니까요. 새누리당 선거 운동이라니까요. 그 자체가. 그냥 우리는 사골이라 생각하고 좋든 싫든 간에 계속 우려먹어요. 계속 주님한테 이용당하고 우려먹고 그리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목사님 좋은 게 뭡니까? 좋은 점이 뭐냐 하면요, 남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좋고 이게 자유라는 겁니다. 자유. 남을 의식할 필요가 없어요. 니는 그렇게 살아. 그럼 나는? 나는 어떻게 사는 것조차도 나한테 어떤 권리가 없어. 니처럼 살아도 괜찮고, 니처럼 안 살아도 괜찮고, 니처럼 안 살려고 매일 거지처럼 살고 재산 교회 바치고 매일 기도하고 이거 아니에요. 그냥 사는데 찢어진 런닝구 다 찢어진 옷 하나 걸친 것처럼 그냥 사세요. 이걸 아주 고운 실로 꿰매지 마세요. 꿰매면 어설퍼가지고 운동하다 맹장 터지듯이 다 터지니까. 그냥 너덜, 너덜 사시기 바랍니다.

어떤 엄마는 자식한테 훈계하면서 훈계보다도 내가 훈계하는 이 자세, 이 모습이 얼마나 존경받을만하냐, 거기에 너무 신경을 써가지고 말 하나 이런 것도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오페라 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내 아들아, 편지 쓰듯이 경우와 격식을 갖춰서 하게 되면 참 아들이 보면서 “엄마, 드라마 너무 보는 거 아닌가?” 핀찬을 받을 수가 있어요. 성질나면 그냥 차버리면 돼요. 간단한 문제를 가지고. 왜냐 하면, 말보다 육신이 먼저인 거예요. 성질나면 주먹은 짧은데 발은 길잖아요. 아들이 늦잠 잔다. “얘야, 벌써 아침이 밝았단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얘야, 니가 좀 일어나서 빨리 하라.” 이게 아니고 그냥 발로 차! 디비 자기는 어디서 디비 자!

사람이 격식을 차리게 되면 그 우울증이 화병이 차서 내부에 누적이 돼요. 그러면 다른 쪽으로 이게 터트린다니까요. 도곡동 방화범처럼. 다른 쪽으로 나가요. 큰 스프링에 눌리면 큰 반대 에너지를 폭발하게 되어있어요. 남한테 피해를 주게 되어있어요. 사도 같은 경우에는 가라 하면 그냥 가는 거죠. 가면서 사도가 뭘 느끼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늘에 계신분이 어떤 식으로 수난과 고난을 당하다가 이 땅을 떠났는가? 그것을 같이 후에 다시 그 경험에 참여되는 즐거움입니다.

예수님이 당했던 그걸 그대로 당하는 그게 바로 고난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말이 거기에서 나온 거예요. 고난 없는 구원이 없다는 말은 이게 바로 로마서8장에 보면 나오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아들이라면 그 모델 따라서 양자도 아들을 닮아 가는데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고난을 받게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성령 따라 가니까 마귀를 만났지요.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이 세상 신을 늘 접하게 되고 우리가 뭔가 목적을 가지고 “제발, 이것만큼은...” 할 때에 그게 마귀가 와가지고 “도와줄게.” 그 때 이제 우리가 못 느꼈던 마귀가 와서 살살 꾀인다는 그 점을 기도 가운데 생활가운데 만끽할 수가 있습니다. 많이 느끼지요. “초조하지? 불안하지? 도와줄게.” “이번 일만 성공한다면 하나님 뭐든지 하겠습니다.” 이런 것들이 주님은 흥정을 안 하는데 자꾸 우리는 주님을 상대로 흥정조로 나와요. “이번에 하면 어떻게 해드리겠습니다. 이번 일만 잘되면 십의 이조를 드리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누가 달라고 했나? 무슨 하나님이 돈을 받아요? 안 받는데.

자, 19절 보면, 방금 이야기한 것이 맞는지 확인해 봅시다.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여기에 대해서 지난번에 어디선가 했는데 다윗이 결혼한 사람이 다윗 정실부인과 결혼한 사람이 남들 보기에는 욕 얻어먹을 만한 일이죠. 밧세바가 정실 아내라 했잖아요. 왜냐 하면, 밧세바가 있음으로서 자기가 완전히 걸레 다 되었죠. 왕이면서도. 심지어 밧세바가 남편 있었단 말이죠. 제가 지난주일 낮에 설교하면서 예를 잘못 들은 예가 있어요.

마태복음1장6절을 하면서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그 예를 들면서 내가 착각했어요. 남자 이름 둘이 나오는데 여자 이름을 두 개했어요. 끝나고 난 뒤에 내가 여자 이름을 두 개 했구나.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낫는다면 거기에 남자 이름이 몇 개 들어갔지요? 다윗도 남자고 우리아도 남자고 자식은 하나고. 그러면 그 자식은 아버지가 누구지요? 아내는 하나인데 남자는 두 명이니까 도대체 아버지가 누구란 말이죠? 둘 중에 하나는 가짜잖아요. 결국 솔로몬은 묵시적 존재에요. 이미 죽어버린 우리아의 아들이고 다윗은 세상적인 모습을 양상을 보여주는 겁니다.

바로 사도바울은 성도의 주체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주체의 분열에 대해서 언급하거든요. 로마서10장에서. 묵시적 존재가 들어오게 되면 세상 적 요소가 날아가서 없어지는 게 아니고 오히려 세상 적 요소가 비로소 그 색깔을 제대로 드러내요. 성령을 받음으로서 육신의 갖고 있던 본래의 그 성질을 그 사람이 그대로 다 노출되게 되어있습니다. 그 양쪽(육신과 성령)을 다 함유한 자만이 구원을 받아요. 착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사용하시는 대상이 되기 때문에. 주를 증거 하는 증인으로서 되기 위해서는 양쪽 요소가 같이 다 함유하고 있어야 되는 거예요. 내 욕심과 더불어서 주의 욕심도 함께 있는 겁니다.

그리고 항상 누가 이기느냐, 주의 욕심이 내 욕심을 꺾어서 이것이 나의 승리가 아니고 항상 나는 패배하고 누가 이기고? 주님의 십자가의 승리가 뭐냐 하면, 곧 용서의 승리에요. 용서의 승리입니다. 제가 십자가마을에 ‘용서와 가치’라는 글을 썼거든요. 그 글을 잠시 인용하게 되면, 사람이 뭔가 용서를 구할 때는 자기 가치를 안 놓치게 되어있어요. 유지하기 위해서 용서해 달라는 거예요. 잘못 되었으니까 예전처럼 되게 해 달라, 얼마나 얍쌉합니까? 그래서 용서를 구할 때는 상대방이 용서하지 않더라도 감수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돼요. “용서해 주세요. 안 해줘? 안 해주면 내가 가만히 안 두겠어.” 이것은 용서를 구하는 게 아니고 공격입니다.

주님께서 용서를 할 때는 인간의 용서를 보고 용서를 해주는 게 아니고 인간의 용서는 세상 적이라는 것을 폭로하면서 주님이 바친 것으로 아버지로부터 용서받아서 공짜로 아버지의 용서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식으로 용서를 해줍니다. 그러니 주님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우리의 용서는 노림수가 있다니까요.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무슨 노림수입니까? “아! 이런 실수를 하다니? 실수 없었을 때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이런 노림수. 그 노림수에 대해서 주께서는 거기에 동의를 안 하지요. 그걸 배제해버리고 예수님 본인이 아버지 앞에 나서서 받았던 용서를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따라서 이것은 누구의 가치입니까? 주님의 본인의 가치지요. 그걸 로마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의’라고 해요. 그리스도의 의가 가치 있는 겁니까? 잘난 내가 가치 있는 겁니까? 그리스도의 의가 더 가치 있는 거예요. 그것을 사도에게는 사건화 시켜서 내부에서 폭발시키는 겁니다. 성도도 마찬가지고. 성령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폭발시켜요. 그것은 우리의 몸이 그 전에 악령에 의해서 항상 우리의 욕심이 폭발했기 때문에 항상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던 그것이 항상 이 있는 자리에다가 주님의 의가 폭발해서 나오도록 하는 겁니다.

특히 20절에 보면,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했지요. 야~ 요게 아주 소중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왜 담겨 있느냐 하면, 이게 스데반이 그냥 스데반이 아니고 ‘주의 증인 스데반’이죠. 그러면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주님이 사울한테 “사울아, 사울아, 니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할 때에 사울이 자기는 스데반집사 죽을 때 찬성했잖아요. 그러면 사울 눈에는 그냥 나 인간, 스데반 니도 인간, 같은 인간으로 본 거예요.

그런데 스데반집사가 주의 증인인 것은 생각도 못했지요. 우리가 보통 예수 믿을 때 그 사람 보지, “그 뒤에 있나 가만히 있어 보세요. 비켜보세요. 예수님 계시네.” 이리 안 보잖아요. 뒤에서 왕~ 왕~ 뒤에 주의 후광이 있고 음악소리가 있고 그렇지 않잖아요. 성화처럼 뒤에 아우라가 있고 예수님 있고 이런 거 있습니까? 그런 거 없다 말이죠. 그런 게 없으니까 우리는 만만해서 더욱 더 예수 믿는 사람을 사울은 만만해서 그렇게 함부로 해도 되는 대상으로 본 겁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십자가가 이 땅에서는 그렇게 만만해요. 이 땅에서는. 그걸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한테는 구원의 능력이지만, 세상 사람한테는 줘도 갔다가 버릴 소식이 바로 십자가에요. 오죽했으면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됐을까요? 우리가 예수 복음전하고 예수 믿는다고 해서 사람들한테 대우받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우를 받다니요? 개한테도 대우 안 받는데. 복음 전하면 개가 존경합니까? 예수 믿는다고 잘 해주거든 이것은 복인 줄 알아야지 기적인 줄 알아야지요. 이걸 당연한 걸로 여기면 안돼요.

제가 몇 십번 얘기했어요. 목사가 그 교회에 복음전하다가 교인들이 나가라 할 때는 안녕히 계세요. 정태호씨하고 절하고 퇴직금이고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나오라 말이죠. 왜냐 하면, 그동안 복음 들어준 게 지가 말 잘해서 들어준 게 아니고 그 때마다 주께서 안 쫓아내게 했을 뿐이고 지금 쫓아낸 것은 주께서 나가라고 했을 뿐이기 때문에 복음의 지식을 전한 게 아니고 복음 전하는 본인부터 이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증거를 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전하는 사람이 이거하고 돈 얻겠다는 이런 계산하지 말고. ‘이거 아무도 안 좋아해! 내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누가 믿겠어.’ 라는 그런 마음으로 전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가족끼리 복음 전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자식한테 복음 전하는데 욱하지 마시고 “그래, 다음에 보자.” 이런 식으로. 그럴 수밖에 할 수 없어요. 사람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남한테 피해를 줍니다. 이 땅에 태어났다는 자체가 남한테 피해를 주게 돼있어요. 복음 안다고 해서 피해 안 주는 것도 아니고 복음 알아도 피해주는 건 마찬가지인데. 떠나기 전에 기호1번으로 기호1번 붉은 옷 입고 기호1번으로 그냥 몸 전체가 인생 자체가 주의 증인으로 한 거예요.

우리가 한 번 가상으로 시나리오를 별에서 온 그대를 비슷하게 해서 드라마를 해 봅시다. 사울이 이제 후회합니다. 스데반집사가 주의 증인인데 내가 죽임을 찬성할 때, 그 소리를 듣고 스데반집사가 화가 나서 위에서 다시 뛰어내려와 가지고 사울의 멱살 쥐겠습니까? “이제 와서 그런 소리하면 어떡하라고?” 이런 식으로 하겠어요? 죽은 것은 죽은 거고 “나 몰랐어요. 형님”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나는 그 때 항상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 줄 알았지 나는 몰랐어요.” 그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아이고, 얼마나 무책임한 발언입니까? 하여튼 예수 믿는 사람은 양심도 없어. 지 때문에 사람 죽여 놓고 사울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죽여 놓고 지금에 와서는 나는 몰랐었어. 나는 몰랐어. 완전히 치매 걸린 환자도 아니고. 나는 처음 알았다. 몰랐다. 끝나요. 왜냐 하면, 진짜 몰랐기 때문에. 정말 몰랐기 때문에.

따라서 여기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뭐냐 하면, 주께서 친히 인도하지 아니하시면 아무 일이 안 된다 것이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수요일 날 했잖아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마지막 관점에서 볼 때 부족함이 없는 거예요. 한 걸음, 두 걸음 주께서 친히 인도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그 길을 놓쳐버립니다. 잊어버립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그 길이 깜깜합니다.

어제 잊어버린 거 다시 합니다만, “목사님, 성도의 가는 길이 뭡니까?” 세상이 보이고 주님이 같이 보이면 이게 제 코스 가는 겁니다. ‘아, 세상이 이렇게 악하구나!’ 그리고 내가 그 속에 포함이 되어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보고 날마다 나오래. “빨리 빠져나와. 빠져 나와.” “저는 세상을 좀 더 살아보렵니다.” “살아볼 생각하지 말고 빠져 나와.” “그냥 방주타고 빠져 나와.” 이런 식으로. “먹고 마시고 하는데서 빠져 나와.” 늘 이렇게 인도하고 십자가 용서로서 내가 확보한 용서를 너한테 줄 테니까 너는 이 용서를 행하지 말고 믿음으로 이 용서를 그냥 믿음으로 살리라.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우리는 믿음 주신 분을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 가가지고 나오게 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빠져 나오는 중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생각해도 됩니다.

항상 그리스도 의는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분명히 말해 주면서 빠져 나오는 거예요. 이걸 분명히 말 안 해주면요, 우리는 이 땅이, 이 세상이 좋다고 여기서 노림수를 가지고 얼씨구나 하고 나옵니다. 이리 나올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해요. 자, 그 다음에 진도 나가 봅시다.

자, 그렇게 하니까 22절에 봅시다. “이 말 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 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했지요. 그러면 바울은 이 소리를 듣고 어떻게 됩니까? 박수를 쳐야 되지요. 왜냐? 십자가 사건이 나로 인하여 다시 또 일어났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이유가 뭡니까? 저런 놈은 살려둬서는 안 된다 해서 일어난 사건이 그걸로 십자가 사건이 끝난 줄 알았는데 그 끝이 통 통 통 간 것처럼 이제는 십자가가 팡 팡 뛰는 거예요.

세상에 복음을 전하니까 “여러분, 우리 행복하게 삽시다.” 이러면 그렇게 심한 욕을 안 먹어요. 바로 십자가 이야기할 때, 예수님 이야기하니까 그들이 그 점잖던 사람들이 다 인격이 고매하고 우아하고 한 성품들 하시는 그런 한 인격을 하시는 분인데 복음에 들어가니까 어떻게 됩니까? 발작을 하지요. 이게 바로 묵시와 역사의 만남입니다. 불꽃이 튑니다. 반짝 반짝 불꽃이 튑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예수님께서는 매일같이 이런 일을 겪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것은 사도바울은 가끔이지만, 우리는 더욱 더 가끔이고. 우리도 그런 일이 있지만, 자주는 안 일어나요. 늘 전화하면 모르지만, 그래도 늘 전화하지는 않잖아요. 이틀에 한 번씩은 전화하지만. 늘 전화하면 우리는 미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이 복음과 반 복음의 충돌이 늘 일어나지는 않지만, 그나마도 일어날 때는 우리로 하여금 ‘아, 세상이라 하는 것에 우리가 세상에 잔뜩 노림수를 가질 이유가 없는 곳이 세상이다.’ 생각해 보세요. 살아가면서 뭔가 노림수 목적을 가졌는데 막상 그 목적이 되니까 어떻게 됩니까? 굉장히 허무하고 허탈한 생각이 안 듭니까? ‘에게, 내가 이거 얻으려고 그렇게 마음 조였는지...’ 허무하고 허탈합니다. 심지어 좋은 일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면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누구에게 달려들었습니까? 예수님에게 달려들었잖아요. 지금 이 대목에서는 사람들이 누구한테 달려들지요? 사도 바울에게 달려든 거예요. 그러니까 주의 종이에요. 그러니까 기호1번이에요. 오늘 기호1번 5번 이야기하네요. 그러니까 빨간 옷을 입은 기호1번이라니까요. 보세요. 박근혜와 함께. 지역발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박근혜와 찍은 사진과 같이.

예수님께서 요한복음5장에서 예를 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때, 너희보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나와 함께 있음을 세상이 눈치 챘다는 겁니다. 주님으로부터 묵시라고 해서 역사를 초월한 걸 받는 게 묵시가 아니고 그것은 수학적으로 말한 거고, 진짜 묵시는 예수님한테 받아야 돼요. 이 세상을 떠나는 세상에서 받는 것은 그것은 상상할 수 있어요. 이미 인간의 종교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 반대만이 묵시다. 이것은요, 누구도 그런 생각할 수 있어요. 이생보다 저생이다. 그게 아니고 성경에서 말한 것은 바로 십자가에 죽었던 그 분으로부터 받을 때, 그게 진짜 천국이고 진짜 묵시의 세계가 바로 그 세계 이외에는, 예수님의 세계이외에는 다른 세계는 다 허상입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IP:211.♡.100.128)

14-06-19 14:42

대전140529-마16장14절(교회 만들기)52강 - 이 근호 목사

첫째시간 사도행전에서는 십자가의 반복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마태복음16장에 보면, 열쇠가 나와요. 내가 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니, 천국 열쇠를 준다는 말은 천국이 어떻다는 겁니까? 닫혀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닫혀있다. 닫혀있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천국에 대해서 안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이럴 거야. 저럴 거야. 제각기 상상력을 발휘해서 천국에 대해서 언급을 했을 겁니다. 서울 안 가본 사람이 서울 이야기하는 것처럼. 막상 서울에서 오신 분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열쇠이야기를 하거든요. 너희들이 천국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열쇠가 있다는 말은 첫 번째, 모른다는 말과 두 번째, 열린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거예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지요. 너희들은 모른다. 또는 못 간다. 못 간다와 그리고 열리면 갈 수 있다. 열쇠가 있다는 말은 잠겨는 있지 막혀있지는 않은 거예요. 문은 있는데 잠겨있는 것이지 아예 문조차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말입니다.

천국 열쇠가 있다고 하니까 이걸 지금 누구한테 하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한테 이야기를 한 거죠.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뭘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이때 베드로가 오해를 하죠. 천국 열쇠 있고 천국 들어갈 수 있다 하니까 사람들은 내가 들어간다. 내가 들어간다, 로 사람들은 항상 염두에 둡니다. “저요!” 이리되는 거예요. “저요!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를 부인하라 하거든요. 나중에 나옵니다. 16장 24절, 자기를 부인하라, 이 말을 가위표치지 말고 이걸 동그라미로 쳐보겠습니다. 구멍을 만들어요. 뻥하고 뚫린 빈 구멍, 누구는 누가 천국에 천국열쇠 들고 들어갈 사람은 누군가 있다, 이리되는 거예요. 누군가 있다. 그런데 베드로는 뭐라고 했는가 하면, 베드로가 오해하기를 지가 신앙고백을 하니까 네 반석위에 교회를 세운다 했으니까 “제가 들어갈게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드라마 누가 찍지?” “제가 찍을게요.” 하는 것처럼. 내가 들어갈게요. 이리 나온 거예요.

주께서 자기를 부인하라, 하고 이걸 차단시켜 놔버립시다. 못 들어가는 겁니다. 베드로가 못 들어가면서 베드로가 필요해요.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왜 못 들어가는가를 보여주는데 베드로가 적절하게 필요한 존재입니다. 뭐라고 되어있는가 하면, 내가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고난 받고 사흘 만에 살아난다고 하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라고 한 거예요.

제가 첫째시간에 했는데 다시 하게 되면,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 일어나야 돼요. 존재로서는 못 들어가고 존재가 찢어져야 돼요. 찢어지게 하는 사건이 일어나야 됩니다. 그 사건을 첫째시간에 무슨 사건이라고 했지요? 십자가사건이라 했지요. 십자가 사건의 반복에서 폭탄 터지듯이 일어나야지요. 그러니 우리는 사골인 동시에 아예 다이너마이트를 몸에 칭칭 감고 있다고 보면 돼요. 늘 십자가 폭탄이 펑펑 터져야 되지요. 그래야 자기가 부인해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러면 베드로가 못 들어가는데 왜 못 들어가느냐 하면은 왜 사람들은 열쇠가 닫혀있다는 것을 왜 몰랐느냐 하면, 여기 사단이 나옵니다. 사단이 모든 인간을 그동안 통제하고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디위에 짓는가? 교회는 사탄위에 교회가 지어져요. 사탄의 머리 위에. 사탄의 머리를 깨고 그 사탄 머리 위에 교회를 세우게 되는 겁니다. 베드로는 오해하기를 내가 니 위에 세운다고 하니까 사탄을 의식하지 못한 베드로입장에서는 내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고 그렇게 오해할 만합니다. 마치 천주교처럼. 베드로대성당이 있는데 1500년 지었는가 그런데 거기에 베드로무덤위에서 지었답니다. 그 짓는다고 면죄부 팔아먹은 거예요. 면죄부해가지고 그거 짓고 종교개혁일어나 가지고 신성로마제국이 두 진영으로 갈라졌잖아요. 루터 쪽과 천주교 쪽으로 갈라졌잖아요. 그 유럽 전체가.

베드로는 내가 있고 나의 고백이라 본 겁니다. 나의 고백이 아니고 이건 하나의 주께서 일으킨 사건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까지 결론 내려 보면, 베드로는 뭐냐, 두 대립세력이 만나는 장이 돼요. 사탄과 예수님, 아버지의 뜻 곧 하나님의 뜻이지요. 예수님이죠. 뜻이 어디서 만납니까? 베드로에서 만나는 요 지점에서 교회가 세워집니다. 따라서 교회는 늘 핍박의 대상이 되고 늘 이 땅에서 고난 받아야 되고 공격당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 사탄을 늘 불러와야 되기 때문에. 숨어있는 사탄을 끄집어내는 구심체역할을 해줘야 돼요.

일종의 K1에 나오는 격투기할 때, 골목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공개석상에서 링 위에서 하잖아요. 링 위에서 가둬놓고 두 선수가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우는 그 링 자리가 바로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운다는 말은 곧 세상의 진짜 숨겨져 있는 세상의 본질을 공개시키는 장으로 만들겠다는 거예요. 교회에. 우리나라의 교회와는 다르죠. 교회는 거룩한 사람들의 집합체. 단체. 교회는 순결을 이렇게 하는데. 제가 말하는 교회는 링. 파이트 fight 싸우는 영역이 되는 거죠.

사탄도 바로 교회가 있는 곳에 사탄이 오게 되어있고 그래서 예수님은 그걸 우는 사자와 같이 택한 자라도 우는 사자와 같이 공격한다. 그럼 이런 이야기가 사실은 어렵지 않아요. 쉬운 이야기가 왜냐 하면, 다니엘 같은 경우에 보세요. 다니엘이 느브갓네살이 갖고 있던 본성이 언제 다니엘과 다니엘의 세친구의 본질이 드러납니까? 느브갓네살이 미친 짓을 할 때, 나를 위한 금 신상을 만들어놓고 절하라든지 기도를 금한다든지 이런 짓 했을 때, 꼭 느브갓네살이 짐승다운 면모를 나타냈고 동시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여호와께서 여전히 살아 계시다는 것을 드러냈지요. 고 두 개 면면이 다 함께 모이는 자리가 뭐냐, 다니엘과 세 친구 그게 바로 교회잖아요.

교회는 예배당을 고딕식으로 짓고 어떻게 예수교장로회를 다느냐, 이게 교회가 아니고 주께서 사건을 유발시킨 십자가 사건을 또다시 유발시킨 현장이 교회가 되는 겁니다. 두 세 사람도 나와 함께 있으면 두 세 사람도 내 이름으로 있는 곳에서는 항상 그 전쟁이 일어난 장소라면 그 전쟁 장소가 바로, 교회가 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교회가 몇 군데 나오지요? 1장, 2장, 3장에 보면, 일곱 교회 나오지요. 왜 여덟 교회가 아니고 아홉 교회가 아닙니까? 백화점 쇼우 윈도우에 마네킹 일곱개를 해 놨다 하더라도 백화점에 오신 분이 일곱 분밖에 없습니까? 그 마네킹 일곱이 다입니까? 저는 옛날 어릴 때에 우리 집에서 옷가게 해서 아는데 우리 어머니께서 철따라 옷을 마네킹을 벗기고 갈아입히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그 마네킹은 그대로 있고 철따라 뭐만 바뀐다? 옷만 계속 바뀌는 거예요.

일곱 교회 그대로 있고 계속해서 그 시대에 따라서 일곱 교회의 양상이 계속 새로운 양상이 나오는 겁니다. 그 일곱 교회를 누가 쥐고 있습니까? 주님이 쥐고 있으니까 결국 주님께서는 교회를 일곱 교회만 구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일곱 교회가 한결같이 어떤 교회입니까? 문제성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문제가 있는 겁니다. 왜? 바로 이게 예수님이 예언한 것이 그런 교회기 때문에. 교회를 안 나와 버리면 이건 자기 문제성이 들통 나는 기회를 놓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가 절대자가 되어버려요. 나는 예수 믿는다. 나는 완벽하다. 나는 완벽하다가 되어버립니다. 그건 뭐냐, 사건이 아니고 뭐가 돼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사실은 미국에서 우리교회 동영상을 보시는 분들이 계셔요. 있는데, 얼마 전에 전화 몇 통화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 단체가 원래 김성수를 동영상으로 보던 단체였어요. 김성수 목사 때문에 모였던 단체인데. 어떤 분이 거기다가 김성수는 돌아가신 분이기 때문에 동영상 나오고, 저는 생중계가 되거든요. 그러니까 그 분이 하는 말이 자살해서 죽었다는 것이 수상하다는 거예요. 아무리 복음적하지만, 목사가 자살했다는 자체가 목사가 가짜일 확률이 높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살한 동영상 그만보고 아직은 살아있는 사람 것을 보자, 이리 나온 거죠. 교회가 갈라져 버렸어요. 보세요. 갈라져야 교회라니까요. 늘 갈라지고 또 갈라지고 해야 돼요. 갈라진 사람끼리 또 갈라지고.

그렇게 갈라지면서 만약에 안 갈라졌으면 아주 다정한 이웃이고 형제가 되는데 어떤 자살한 일이 벌어지고 나니까 거기서 균열이 일어나잖아요. 이것이 바로 사회적인 균열, 집단의 균열이 되지만,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뭐가 된다? 날마다 인간은 주체의 균열, 참 중요한 말인데요. 늘 주체의 균열이 일어나게 되어있어요. 왜냐 하면, 외부에서 새로운 사건들이 주어지기 때문에. 교회의 분열보다 더 작은 게 가정의 분열, 가정은 늘 부부사이지만, 늘 일어나고 가정에서 더 들어가면 개인적으로 내부적으로 늘 균열이 일어나게 되어있어요.

그 예가 바로 베드로가 “주여, 그러시면 안 됩니다. 내가 아는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하면 제가 아는 모시고 있는 그 예수님은 아닙니다.”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이 준 예수관을 잠시 니가 그걸 유지하고 있었구나!” 하고 지적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사탄에 속했다면 앞에 있는 니 위에 니 이름은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운다하는 주님의 예언은 어떻게 됩니까? 베드로가 사탄이라면, 주님의 예언은 실패하는 걸까요?

지금부터 이야기할 것은 사실 제가 요번에 여름수련회 때 하려고 생각한 것을 이야기 해야겠어요. 출애굽 속의 그리스도 주제하면서 이스라엘이 무엇이냐, 에요. 이스라엘이 무엇이냐, 참 이게 굉장하게 너무 너무 어려운 거예요. 이스라엘이 무엇인가를 한 번 보기 위해서 마태복음을 잠시 떠나서 구약 한 번 봅시다.

미가서4장10절 보면, “딸 시온이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애써 구로하여 낳을찌어다” 자식을 낳는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뭐냐, 딸 시온이어야 되거든요. 그럼 이스라엘은 어떤 용도냐 하면, 뭔가 자식을 낳는 용도에요. 그 자식이 누구 자식이겠어요? 뱀의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을 낳는 기능을 이스라엘이 하는 거예요. 어떻게? 고통하면서. 고통은 누구의 몫이다? 이스라엘이 해야 될 몫이에요. 이스라엘이 고통하면서 뭔가 순풍하고 낳는데 보니까 예수님이 튀어나온 거예요. 그렇게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자기 딸처럼 하는 거예요.

딸을 시집보낸다. 애기 낳기 위한 용도로 시집보낸다. 이리 보면 돼요. 아버지가 “니가 빨리해서 자식 낳아야 된다. 여자는 애가 낳는데서 여자야.” 이런 식으로. 보통 여자의 신체기능이 남자와 다른 점이 뭡니까? 여자는 애기 낳는데 적합한 몸이고 남자는 그것이 누락되고 없지요. 여자의 목적은 자식을 낳는데 있다 말이죠.

그런데 그 예루살렘 자체를 뭐로 봅니까? 자기가 해산해야 될 뭔가 누구를 낳아줘야 될 그러한 하나의 하나님의 딸로 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딸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식, 아들이 나온 거예요. 그럼 그 아들이 뭐하느냐, 그 아들이 바로 뱀을 이기는 거예요. 마귀를 이기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이기는 겁니다. 온 세상이 이미 묵시적인 요소가 아니면 이 세상에 모든 변화가 해답이 없지요. 답이 없지요.

보통 교회가 뭡니까? 기도해서 복 받는 것. 내가 복을 챙기는데 목적이 있잖아요. 내가 하나님께 열심히 하게 되면, 내가 은근히 노리고 있던 기대하는 행운이나 축복 같은 거 챙겨가지고 내가 이 세상 살면서 윤택하게 되는 것. 그걸 노리고 있다 말이죠. 문제가 어려움이 있을 때는 해결하기 위해서 교회 와서 기도하게 되면 니가 고통 하는 건강문제가 있는데 그게 아니고 그건 마귀가 준 우리 생각이고 사적인 노림수고, 욕망이고, 욕구고, 욕심이고 전체적으로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하기 위한 그러한 도구로 사용하는 거예요. 얼마나 하나님이 냉혹하고 아주 차갑습니까? 아주 냉정하지요. 우리는 뭐야? 우리는 주님 앞에 당한 거죠. 믿습니다, 믿씁니다, 믿씁니다, 백날 해봐야 주님께서는 그 딴 거 듣지도 않고. 제가 주일 낮에 설교했잖아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디서 발견하는가? 아픈 몸이 건강 한다든지, 돈이 생긴다든지, 가정화목, 이런 걸 했는데, 정작 로마서에 보니까 할례를 통해서 주님을 발견한다 했지요. 할례를 통해서.

사적인 거하고 너무나 거리가 멀잖아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다루고 있는 하나님의 그 작전과 하나님이 찾아오지 않은 모든 이방나라에서 신과 인간의 모든 흥정이나 거래는 얼마나 큰 차이가 납니까?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자기의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고 자기의 사명을 망각하고 누굴 모방했습니까? 주변에 있는 그 나라를 모방한 거예요. 주변에 있는 나라.

그러면 이 주변에 있다는 말은 이스라엘은 어디에 있다? 중심이죠. 그러면 창세기2장에서의 에덴동산 있잖아요. 에덴동산에 있는 중심에 다른 나무하고 다른 중심에 두 가지 나무가 있지요. 하나는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가 있지요. 이 나무가 다른 모든 것을 다 지배해요. 통치를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바로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그 날이 메시아 오시는 날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지배할 때 어떻게 지배하는가? 그냥 칼, 총을 만들어 지배할까요? 돈 많아서 지배할까요? 유대인이 세상의 금융 쥐는 것으로 지배할까요? 아니에요. 사탄을 예수 그리스도만이 지배할 수 있어요. 그 예수님은 어느 몸에서 태어납니까? 바로 구로하는 여인, 딸 이스라엘을 통해서 낳은 자식이 그동안 이 세상을 지배했던 사탄을 이기게 되는 그런 일이 되면 세상은 끝! 하나님의 계획은 끝나는 거예요. 주님의 계획 다 알아버렸는데요. 예수 그리스도가 만유의 주가 되고 모든 것을 자기 무릎 밑에 꿇어! 하는 거예요. 꿇어 하는 거예요. 천국에서 지옥을 통치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는 말이 “너희들이 천국에서 12고을을 얻으리니 너희가 장차 한 자리 차지해가지고 나와 함께 세상을 지배하리라.” 제자들이 그 소리 듣고 기분 업 돼가지고 좋다고 했지요. 조금만 지나면 나 예수 모른다, 이런 소리 하겠지만 하여튼 그 전까지는 업 돼가지고 온 상상을 다하는 거예요. 사건이 터지지 않고 오직 자기 존재만 계속 붙잡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잘되는 식으로 가는 거예요. 자기 부인이 아니고 자기 긍정, 내 긍정을 원하는 겁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끄집어냈다. 이게 끄집어낼 때, 끄집움을 당한 히브리인들도 상당히 많이 당황했어요. 왜냐 하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으신데. 이렇게 나온 겁니다. 다만 우리가 사는 땅에서 그냥 좋은 이웃관계 유지하기가 좋지 여기서 짐 싸들고 나오기까지는 자기들은 그것까지 생각 못했거든요. 마귀는 왜 나와요? 그냥 살지요. 하나님 잘 믿고 잘 살면 되잖아요. 이것이 우리의 소박한 우리의 희망이고 작은 행복이다 말이죠. 이게 찢어지니까 이게 아파요. 애굽하고 찢어지니까 이게 잘 안 찢겨지잖아요. 그러니까 이 출애굽이 할 이야기가 굉장히 많아요. 출애굽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게 많이 나오는 겁니다.

도대체 이 바로가 바로의 존재 의미가 뭐냐, 이런 걸 생각한다면 바로의 역할이 뭐냐, 그런 것은 뭐냐 하면, 일종의 본드 역할 하는 거죠. 떨어지는데 뭐가 본드가 붙어있으니까 안 떨어지는 거예요. 그 본드 같은 역할을 바로가 하는 거예요. 가지 마오, 가지 마오. 예! 하잖아요. 가지 말라는 거예요. 같이 살자는 겁니다. 세상이 자꾸 나를 붙잡는 것. 바지가랭이 붙드는 그 역할을 바로왕이 합니다.

그러니까 이 히브리 이스라엘 사람들도 끝까지 걸핏하면 하는 노래가 그거에요. 애굽으로 돌아가자.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만날 30세가 좋았다는 서른 즈음에. 점점 더 멀어져 가는데. 왜냐 지가 살았던 것은 애굽에서 살던 그 경험밖에 없기 때문에. 어려우면 다시 옛날로. 청춘을 돌려다오. 젊음을 다오, 이런 거. 자꾸 점점 더 멀어져가는 거예요. 점점 불안하지요. 자기 가치가 애굽에서 있던 가치 외에는 다른 가치를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새로운 가치는 그냥 말뿐이다 말이죠. 보장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살아온 것은 애굽에서 살던 그것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신랑, 신부 주례 앞두고 벌써 주례사를 해놨는데 이게 뭐냐, 신랑 신부 부부간의 제일 큰 문제가 뭐냐 하면, 혼자 살았을 때의 가치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이 부부생활이 안돼요. 애굽에서 살던 것밖에 기억이 안 나니까 혼자 살 때의 그 버릇과 가치와 자기의 생활태도를 둘이 만나도 양쪽 다 똑같이 평행선을 달려버려요. 계속 미팅만 하고 있는 거예요. 계속 선만 보고 있는 거예요. 매일같이 선만 보고. 둘이. 둘이 간만 보고 있고. 누가 센가, 안세냐, 자기 힘으로 안 될 때는 친정에 전화하면 또 시가 쪽에 전화하고 양 쪽 후원을 동원해가지고 또 싸우는 거예요. 제3의 교회거든요. 자기를 부인하고 당황하지 말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비우고 거기에 주의 계획이 주님의 가치가 들어오면 되는데 자기를 부인하고 이게 교회거든요.

교회가 곧 뭐라고 했습니까? 이 가정의 부부다 말이죠. 부부이야기하면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게 부부 이야기 아니고 무슨 이야기다? 이게 교회라는 이야기라고 에베소서 5장에 분명히 이야기했잖아요. 가정과 교회가 그렇게 연결이 될 줄은 보통 부부는 생각도 못했지요. 나만 행복하면 된다 하는 거예요. 가정에서 나만 행복하면 안 되고 가정이 행복해야 돼요. 왜냐 하면, 그 가정은 내 것이 아니고 니 것도 아니고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 안에서 부부되게 했기 때문에. 주님이 개입한 것이 결혼사건이다, 말이죠.

사건을 존재로 보지 말고 결혼을 사건으로 봐야 돼요. 낯선 사건, 제 3의 사건이에요. 둘 다 생각 못한 일들이 벌어져요. 부부가 결혼하게 되면, 혼자 살 때는 상상도 못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정말 안 만났으면 좋았을 뻔했다. 생각해봅시다. 내가 저 남자 안 만났으면 좋을 뻔 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옛날 혼자 살 때는 그 가치가 유지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낫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겠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어디서 못 빠져나왔어요? 여전히 자기 세계에서 자기 가치에서 빠져나왔어요? 못 빠져나왔어요? 못 빠져나온 거예요. 자기 부인이 안 된 거예요. 자기 부인을 도와주는 것은 뭐냐 하면, 친정도 아니고 시가도 아니고 ‘자식’입니다. “아! 성질 같으면 아~ 자식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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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0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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