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강-에스겔 33장 24절-26절(오해)140528-이 근호목사
93강-에스겔 33장 24절-26절(오해)140528-이 근호목사
이름 : 오용익(IP:211.223.103.85)
93강-에스겔 33장 24절-26절(오해)14052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3장 24절-26절입니다. 구약성경 1203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3:24-26
“인자야 이 이스라엘 황무한 땅에 거한 자들이 말하여 이르기를 아브라함은 오직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기업으로 얻었나니 우리가 중다한즉 더욱 이 땅으로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 되느니라 하는도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피 있는 고기를 먹으며 너희 우상들에게 눈을 들며 피를 흘리니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보냐 너희가 칼을 믿어 가증한 일을 행하며 각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니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보냐 하고.”
오늘 읽은 본문이 누굴 위하여 이야기하느냐? 이스라엘 나라가 쫄딱 망했지요. 성전은 불타고 왕은 죽고, 소위 유력한 자들, 지도자층은 전부 다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 가고 나라가 적막하기 짝이 없고 멸망한 상태에서 열성분자들이 등장합니다. 이 땅을 포기 못하겠다는 거지요. 하나님이 주신 땅을 반드시 차지할 수 있다고 들고 나온 독립 투사같은 존재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인데 그 이스마엘이 열 명의 부하를 데리고……. 총독이란 게 있었습니다. 바벨론이 지배하면서 그 땅을 바벨론의 고위관료가 총독으로 있으면서 다스리는데 그 총독의 이름이 그달리야라는 총독입니다.
이 총독이 와서 통치할 때에 “네가 뭐야!” 하고 죽여 버렸어요. 죽고 난 뒤에 그 바벨론을 상대로 해서 독립운동을 벌이는 투사들이 등장했습니다. 그 투사들에게 지금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서 예언하신 겁니다. 그 독립투사들이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땅인데 이 땅을 이방민족이 지배하고 통치한다는 것은 원래 하나님의 약속과 맞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이 부족하고 열성이 부족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이 부족해서 그렇게 되 었으니 우리가 목숨 바쳐서 비록 소수라 할지라도 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쟁취해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하늘나라, 이스라엘을 온전하게 회복시키자.”라는 운동을 하게 된 겁니다.
이 사람들의 주장이 24절에 나옵니다. “인자야 이 이스라엘 황무한 땅에 거한 자들.” 그냥 땅이 아니고 황무한 땅이에요. 황무한 땅이니까, 하나님께서 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황무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지요. “인자야 이 이스라엘 황무한 땅에 거한 자들이 말하여 이르기를 아브라함은 오직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기업으로 얻었나니 우리가 중다한즉 더욱 이 땅으로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 되느니라 하는도다.”라는 정치적인 신념으로서 많은 사람들을 포섭해서 독립운동을 벌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 원칙, 원리가 뭐냐? “아브라함은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땅을 줬는데 우리는 여러 사람이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허락하는 것도 정상이고 당연하다고 믿고 이 믿음가지고 다시 이 땅을 쟁취합시다.”라고 사람들에게 호소한 사람들이 독립운동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상에 대해서 많은 종교단체들이 아마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왜냐,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하나님이 약속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나라가 보고 싶은 거예요. 그 천국, 이 땅에 이룬 천국이 보고 싶은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이 사람들, 황무한 땅에서 독립운동 하는 이 사람들이 어쩌면 우리가 갖고 있던, 처음부터 하나님을 찾고 예수를 찾고 교회를 세우고, 하는 그 모든 의도를 미리, 우리가 갖고 있는 심리를 미리 선배 격으로 다 보여준 셈이 돼요. “우리 모여서 하나님 나라 만들어보자. 이상적인 공동체 만들어보자. 우리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 믿음과 헌신과 희생이 모아지면 하나님께서 복 주셔서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한테만 영광 돌리고 찬양하는 나라, 집단과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 사람들의 이런 생각이 사실은 이 사람들뿐만 아니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갖고 있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이 문열 작가의 소설 중에 <황제를 위하여>라는 것이 있어요. 그걸 보면서 인간의 종교 심리에 대해서 아주 잘 이야기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용이 뭐냐 하면, 정감록에 따르면 정씨 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장차 조선의 왕의 바통을 이어받아서 다시 왕이 되고 그 왕국이 들어선다는 예언서가 있어요. 그 정감록의 예언대로 그 황제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거예요. 일종의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지요.
과대망상증이라고 알면 돼요. 과대망상증이 모든 교주들의 공통점입니다. 또는 교주가 되려고 하는 목사들, 과대망상증이에요. 두 가지가 있거든요. 어떤 집단이 될 때 본인이 과대망상증이라서 “내가 바로 황제다. 내가 예언된 사람이다.”라고 나오는 경우도 있고 그렇게 당기게 되면 하나님의 뜻이 당장 눈에 보일 때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고 싶어 하는 많은 사람들이 돈 바치고 시간 바치고 몸 바치고 정성 바쳐서 집단을 이루어요. 이게 교주 혼자 떠든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그런 위대한 스타를 민중들이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성경대로 바르게 사는 교주가 나타나기를 원하는 거예요. 이것은 혼자서 했다, 또는 민중들이 했다, 하는데 이것은 비율로 하면 한 70:30, 교주가 70이면 거기에 놀아난 민중들 30, 이것은 계시는 아니지만 제 생각인데 한 70:30 그 정도 됩니다. 돈을 바쳐도 조금도 아깝지 않은 것은 교주가 그 돈 받아서 자기 이상을 착착 이루니 어찌 돈을 안 바칠 수가 있으리오. 이 선배 격이 바로 본문의 이스마엘이라는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대중들을 선동한 것은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이 땅을 왜 남한테 줄 필요가 있느냐? 하나님이 주신 땅은 우리가 소유해서 우리가 유지하고 지킬 필요가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정당성을 아브라함이 그렇게 했기에, 우리도 아브라함 후손이기에 마땅히 이 땅은 우리가 접수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여러분, 그 사람들이 뭘 모르냐 하면, 아브람과 아브라함의 차이를 몰라서 그런 겁니다. 아브라함 말고 아브람은 이 사람 말이 맞아요. 이 땅이 하나님 주신 땅이니까 이 땅에서 복 받아서 하나님 오시기를 기다리면 구원받는다, 그것은 아브람 시절의 이야기였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람의 뜻이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자기 복을 취득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 가치를 확보하려는 그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놓는 사실을 이 사람들은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묵시적 존재입니다. 역사적 존재가 아니고 묵시적 존재에요. 아브라함은 “내가 교주다.”가 아닙니다. 나는 묵시적인 존재,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사람이 없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돈 바치고 정성 바치고 시간 바쳐서 어떤 장소에다가 만들어내는 게 아니에요. 하늘나라는 우리 손으로 만드는 게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일체 인간이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묵시적 존재인 예수님에 의해서, 또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만들어진 거예요. 우리보고 하늘나라 만들라고 지시한 것이 아니고 문제는 예수님이 만든 그 나라에 우리가 들어갈거냐, 못 들어갈거냐, 그게 문제에요. 이게 문제지 우리 손으로 “하늘나라 왜 안 만들었어? 지옥 가.” 이런 주님이 아닙니다. 인간 자신이 생각하는 하늘나라는 반드시 거기에 자신의 가치가 포함되어 있어요. 자기 잘난 맛, 그런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나 이만큼 바쳤습니다, 이만큼 헌신했습니다, 이게 반드시 포함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그게 싫은 거예요.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홀로 이루어서 그 나라를 아버지께 바친다 했어요. 3장도 그렇고 고린도전서 15장도 마찬가지고. 홀로 이루시는 겁니다. 사람은 같이 이루려고 해요.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같이 이루는 하늘나라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무능한 분이 아니에요. 자기가 하늘나라 만드는데 힘이 딸리니까 “좀 도와줘” 그래서 하늘나라 만드는 게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생수 준비하고 건빵 준비해서 가는 나라가 아니에요. 하늘나라는 묵시적 존재만 갈 수 있는 나라에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영적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이것은 육적 사람은 못 들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무엇이 신앙이냐, 그것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 신앙이 아니냐 하는 것도 이야기해요. 무엇이 육적으로 천국에 들어가려고 시도하는 시도들인지 고맙게도, 너무나 친절하게도 성경은 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패한 사람, 천국가려고 애는 썼는데 실패한 사람, 하늘나라 이루려고 하다가 실패로 끝난 사람, 그런 사람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그런 사람을 보여줬는데 백날 보여줘도 사람들이 이미 노리는게 있어요. 예수님의 나라가 눈에 안보이거든요.
그리고 예수님의 나라에 대해서 누가 언급을 해줘도 아브람이 아브라함처럼 되려면 자기 아들을 칼로 죽여야 되거든요. 아브라함이 자기 칼로 아들을 잡았잖아요. 스톱, 안했으면 그냥 자기 아들 잡았어요. 그리고 그 아들 잡을 때 자기가 낳은 아들 아무나 잡는 게 아닙니다. 천사가 와서 임신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야기를 간단히 해 봅시다.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는 방법, 묵시적 존재가 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브라함 자기 아이디어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임신을 못해야 되고 천사가 세 명이 와야 돼요.
천사가 세 명 와서 내년쯤 아들 하나 생긴다고 해야 되고 이름까지 다 지어줘야 됩니다. 이삭으로. 그 전에 할례라는 희한한 제도까지 실시를 해야 되고. 아브라함이 제물을 바칠 때 횃불로 통과를 해야 되고. 이 모든 설비, 장치는 아브라함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게 아니에요. 무슨 말을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인도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천국에 못갑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도하지 않으면 아무도 못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도하지 않는 자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꼭 자기가 자기를 천국으로 데려가려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끄집어 내 놓습니다. 그리고 목사나 교주에게 요구를 해요. “우리가 뭘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 천국 가는 방법만 이야기해 주세요.” 라고 교주나 목사한테 그걸 요구를 해요. 사도요한 같은 경우에는 이렇게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예수님 말씀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사도들의 특징이 그래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었잖아요. 돌에 맞아 죽으면 다 천국 갑니까?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었다는 그것은 스데반 집사의 독특한 것이고 그 전에 돌 맞기 전에 이미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짧은 인생, 짧은 인생인지 긴 인생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짧은 인생을 끝내면서도 “아깝다. 후회한다.” 그런 것이 없습니다. 나 죽고 나거든 사법당국에 저 인간들 다 고소하라, 이런 유언 안 남겼습니다. 나 죽고 나면 장례위원회 설치하고 애도의 기간을 갖고, 이런 것을 요구한 것이 없어요. 어떤 사태가 일어났을 때 성령 받는 것이 아니고 평소부터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 뒤에 어떤 사태가 주어진다 할지라도 그것마저 하나님께서 나를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한 골목길로, 그야말로 내가 예상 못한, ‘어, 저쪽에도 길이 있었네. 저쪽으로 가도 십자가가 보이는구나. 난 예상도 못했네. 내가 인생 저래 살아도 거기서도 십자가가 보이네. 희한하다.’ 주께서 친히 십자가 보이는 쪽으로 인도해주는 코스로 이끌림을 받는 사람, 이게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에요.
시편 21편에 참 유명한 말씀 나오지요. 시편 23편이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 다음 말이 무서운 말이에요. “내게 부족함이 없다.” 세상에, 도대체 주께서 목자가 되어서 월 천 만원씩 주셨나봅니다. 부족함이 없다니. 대체 주께서 우리에게 한 달 수입을 얼마를 주시면 우리가 부족함이 없다고 나오느냐는 말이지요. 천만 원 줬습니까? 하는 일마다 다 잘된 거예요? 그래서 부족함이 없는 거예요? 우리가 주님과 손잡고 마지막에 천국에 도착해 보세요. 자기가 마지막에 그동안 겪어온 인생 여정, 코스, 굽이굽이마다 다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을 도착한 안목에서 바라볼 때 그게 보이는 겁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이미 도착했을 때나 알게 될 그 안목을 미리 부여받은 거예요. 그게 묵시적 존재라는 겁니다. 역사를 끝내고 난 뒤에, 역사가 끝나면 묵시거든요, 역사를 끝내고 난 뒤에 다시 살아온 역사를 바라보면서 고비고비마다 합력하여 이룬 선이 아닌 것이 전혀 없었던 거지요. 그런데 우리는 목자를 붙들고 얼마나 시비 걸고 닦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이럴 것 같으면 치웁시다.” 이런 식으로, “이런 식이면 난 예수 안 믿어. 교회도 안 나가.” 이런 식으로 항의하고 드러누워서 발악하고 앙탈부리고, 얼마나 그랬습니까? 눈물 흘리고 삐지고.
아브라함이 아들 바칠 때 깜짝 놀랐지요. 상당히 당황했을 거예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걸 통해서 뭘 발견했는가? 예수님 오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는 방법은 예수님이 너보다 더 중요한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사태를, 계속 일들을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나보다 더 중요하고 내가 갑이 아니고 예수님이 갑이고 나는 주님을 증거 하기 위한 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한 코스대로 이끌림을 받지 못한다면 결국 그 사람은 지쳐버립니다. 소위 교회 다니기에 지쳐버리고 나중에는 신앙생활 하는데 스스로 헉헉대면서 나자빠져버립니다.
그래서 오늘 서론이 길어집니다만 본문 들어가기 전에 언급하는 것은 오지 않을 사람은 나자빠지라고, 중도포기 하라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이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이런 잘못된 생각을 했느냐 하면, 그 땅이 주어진 게 아브라함 오직 한 사람이라는 그 말은 맞아요.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신 것은 결국 마지막은 한 사람으로 귀결된다는 겁니다. 한 사람과 여러 사람을 비교한다는 자체가 한 사람의 의미를 전혀 몰라서 그래요. 그 한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고 유일한 분이에요.
이 말은 모든 약속은 아브라함 너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장차 아브라함 자손으로 올 그 분과 일대 일로 모든 계산은 끝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예수님 만난 거예요. “나 아니고 예수님이었구나. 하나님이 날 상대하는 줄 알았더니 날 상대해서 내 구원을 확정짓는 것이 아니고 나 말고 그 예수님이구나.”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나를 택하여 세우신 겁니다. 아브라함을 택한 겁니다. 숫자가 문제가 아니에요. 아브라함 하나, 이삭 둘, 벌써 두 명이잖아요. 숫자가 문제가 아니고 천명이든 만 명이든 전부 다 가위표 해버리고 오직 한 분이어야 돼요.
구원 파들이 예수님을 교주라고 했거든요. 구원 파들이 주장하기를. 그러면 그 사람들의 문제는 간단해요. 그 교주라는 예수의 책을 거부하게 되는 거예요. 예수 교주의 말을 안 듣고 유 병언의 말을 들으니까. 교주가 예수님 같으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으면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데 성경의 말씀을 전혀 안 믿으면서 유병언의 말을 듣고 있단 말이지요. 그러니 보세요.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결국은 우리는 예수님 믿는다 하면서도 사실은 자기욕심의 소리를 들어요. 자기교주가 누구냐, 본인이 자기 교주에요.
괜히 유 병언 핑계 대는데 본인이 자기 교주가 되고 자기는 사나 죽으나 자기만 믿는 거예요. 이걸 누가 아시는가, 예수님이 아시고 자기를 부인하라는 거예요. 내가 진 십자가 지고 십자가 앞에서 너는 죄인으로서 드러나라, 그런 뜻이거든요. 얼마나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간단해요. 아주 간단하거든요. 자꾸 거기에 자신의 의로움을 끼워 넣으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들의 문제가 뭐냐 하면, 25절에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피 있는 고기를 먹으며 너희 우상들에게 눈을 들며 피를 흘리니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보냐 너희가 칼을 믿어 가증한 일을 행하며 각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니.”라고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들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 땅은 우리 땅이라는 겁니다. 이 땅은 우리 땅, 우리가 살기 위한 땅이라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땅 없이는 못사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땅을 줬다는 거예요. 일단 주신 이상은 그 땅은 우리 땅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땅을 주실 때는 그들에게 준 땅이 아니고 말씀의 땅이에요. 말씀대로 완성을 보여야만 비로소 그 땅이 축복의 땅이 되는 겁니다. 만약에 그 땅에 살면서 말씀대로 안살면 저주가 펄펄 내리는 저주의 땅이 되지요.
그 말은 뭐냐,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것은 천국, 하나님나라, 천국을 만드는 땅만 있는 게 아니고 지옥을 만드는 땅도 약속의 땅입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하나가 뭐냐, “너희가 피 있는 고기를 먹으며”라고 되어 있잖아요. 피 있는 고기 좀 먹으면 안 됩니까? 그것은 우리 생각입니다. 피 있는 고기 좀 먹으면 안 되겠어요? 피 있는 고기 좀 먹고 활력을 얻어서 주의 일 더하면 되잖아요. 왜 피 있는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합니까?
피를 왜 먹지 말아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인간들 수십억 다 모아놔도 그 이유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9장 5절의 말씀이거든요. 너희가 고기를 먹을 때 피 채 같이 먹지 말라는 말씀. 창세기 9장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심판한 그 땅에 은혜를 주시되 조건이 있어요. 짐승의 피나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라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그런데 이 조건은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의회해서 끄집어낸 아이디어입니까?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여기서 분명한 것은 뭐냐, 피 채 먹지 말라는 것은 인간의 생각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생각인 거예요.
없는 생각이니까 인간들이 못 지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우리가 율법을 못 지키는 이유가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왜, 율법을 우리가 만든 게 아니기 때문에. 얼마나 쉽습니까? 굉장히 쉬운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서 인간의 한계를 지워주려고 한 거예요. “너는 어디까지나 창조주가 아니야. 이 세상은 너의 관할이 아니고 네가 희망하는 대로 세상이 존재할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 너는 그저 이 율법이 준, 이 세상 만들 때 그 원리가운데 인간은 여기까지만, 이라는 그 한계를 지켜주면 인간이 된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이에요. 인간이 신이 아닙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인간이 아니에요. 그것은 신이 하실 일이고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일 뿐입니다. 한계가 있어요.
그런데 인간의 그 한계를 누가 정해주는가? 하나님의 법이 정해줘요. 그러면 한계를 넘으면? 한계를 넘으면 넘지 말라고 저주를 해버리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고 이 사람들 다 죽잖아요. 우리도 죽잖아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 이게 모여서 회의한 겁니까? 일방적인 거예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한 겁니다. 그러면 신앙이 뭐냐 하면, 바로 그 한계 앞에서 자기 자신을 다시 발견하는 사람이 신앙인 이예요. 그 한계가 인간들 집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그 한계가 늘 보이는 겁니다. 그게 늘 느껴지는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이유가 없어요. 거기에 토를 달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계를 넘으라고 온 쪽이 있지요. 성경에는 그게 뱀이라고 되어 있고 사탄이라고 되어 있는데 뱀이나 사탄을 뺍시다. 이거 안다고 괜히 신앙 있는 체 하니까. 한계를 넘으라고 했다는 그것을 뱀, 사탄이 했다는 그것을 안다는 것을 빼버리고 그냥 나를 예뻐하고 나를 사랑하는 가까운 친구나 친척이 하는 말이 “야, 하나님의 법이 있는데 하나님의 법 다 지키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냥 따먹어 버려.”라고 나한테 평소에 너무나 친절하고 내가 너무 좋아하는 사람, 가까운 사람,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식이죠.
부부는 갈라설 수 있지만 자식은 갈라설 수가 없잖아요. 아빠 엄마를 보고 예쁜 딸이나 든든한 아들이 “아버지, 그거 따먹어도 됩니다.” 했을 때 우리가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그 아들의 말을 들어줄 마음의 준비가 다 되어 있어요. 따라서 한계를 지워주신 주님은 아무 관심도 없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부탁하기에 우리는 흔쾌히 들어줄 반반의 준비를 다 하고 있다고요. 우리 어머니가 수요일에 되면 “지금 교인들이 오늘 수요예배가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세 번씩 이야기해야 오지 그냥 주보에 적혀 있으면 모른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왜 그런가 하면, 남의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오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조치하는 문제고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관심두면 안됩니다. 오든 오지 않든지 두 세 사람도 주와 함께 있으면 그게 바로 주의 말씀이 실현된 거예요. “이래도 믿을래.” 이런 이야기거든요. 주님께서 “이래도 내가 목자가 아니냐?” 지금 이렇게 되묻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자꾸 우리 한계를 벗어나서 기도하고, 벗어나서 소망하고, 벗어나서 이걸 달라고 요구할 때, 주님께서는 그래가지고서는 천국에 못 간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것은 지옥 만들기의 반복밖에 안되거든요.
외롭고 쓸쓸하고 안 알아주고 아무도 찾지 않는, 노아가 달랑 자기식구만 데리고 갔을 때 하늘나라 가서 꿇어앉아서 손들고 있었습니까? 참 잘했다. 9명 데리고 올까봐 조마조마 했는데 기어이 택한 자만 데려온 것에 대해서 칭찬했을 겁니다. 우리가 신이 아닙니다. 신이 아니면서도 우리는 마치 신인 양 여기고 있는 것, 하나님의 율법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내 욕망이 요구하는 대로, 뱀이 요구하는 대로, 사탄이 요구하는 대로 그거 부흥 못해서 안달이 난 우리 모습,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인자라는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지적합니다.
여러 사람 찾지 말고 한 분만 있으면 하늘나라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그 분이 십자가 짐으로, 천명이 십자가 진다고 해서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 분만 십자가 지는데 성공했으면 바로 그 나라에, 한분이 십자가 지는데 성공한 그 나라에, 어린양의 보좌에 우리가 인도함을 받을 때 그곳에만 영생이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마저 이용하려 했던 우리의 본색, 그것이 우리의 한계 밖에서 주제파악도 안된 하나의 몸부림 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매사가 다 주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철두철미하게 구원의 길인 것을, 구원의 정 코스 인 것을, 정품인 것을 우리가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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